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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22시 59분 등록
5월의 연구원수업은 큰 틀에서 인류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여행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하게 되었다.
먼저 E.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과거를 보는 관점과 시선으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이해를 위해 Leo Huberman의「가자, 아메리카로」, 세계사 혹은 유럽사 몇 장면을 통해 살펴본 Will Durant의「역사속의 영웅들」마지막으로 한국의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 한국사에 대한 여행은 이기백 선생의「한국사신론」으로 하게 되었다.

카의「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1)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2)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라는 보다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답의 일부를 이루게도 되는 것입니다.> (p 8)에서의 설명과 같이 이번 한 달 동안의 여행은 이 시대의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역사는 예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다. -( 윌 듀런트 역사속의 영웅들 p9)라는 주장처럼 책 속의 선조들의 사실적 경험과 예를 통해 살펴본 역사로 인해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지난 역사에 대한 탐색과 옛 선인들의 지혜와 통찰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흡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연구원 생활을 통하여 다져지는 보다나은 내일을 향한 꿈의 지침에 더 없는 좋은 자료와 귀중한 고찰이 됨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과거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36)
<역사가가 처해 있는 苦境은 인간본성의 하나의 반영인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42)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97)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양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북돋아 주는데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104)

역사는 전통의 계승과 더불어 시작되며, 전통이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에 전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기 시작한 것도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해서였습니다. 네델란드의 사가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는「역사적 사고란 언제나 목적론적인 것이다」라고 적은 바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170)

훌륭한 역사가들 역시,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건 말건 미래라는 것을 뼈 속 깊이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역사가는「왜냐」라고 묻는 동시에「어디로」라고 묻는 법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p170)

위의 이상의 견해에서와 같이 역사에 대해 우리는 <왜>, <어디로>로 라는 물음과 궁금증에목마르기 때문입니다.



1. 저자에 대하여

이기백(李基白) 1924~2004
평북 정주 오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ㆍ서강대학교ㆍ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거쳐 한림과학원 객원교수ㆍ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1987년 창간된 반연간지『한국사시민강좌』의 책임 편집위원을 맡았다. 『국사신론』(태성사, 1961), 『한국사신론』(일조각, 1967),『민족과 역사』(일조각, 1971) 『우리 역사의 여러 모습』(일조각, 1996)『한국사를 보는 눈』(문학과지성사, 1996)를 비롯한 많은 저서와『한국현대사론』(그라즈단제브 저, 일조각, 1973)등의 역서가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저서와 논문들을 모아『이기백한국사학논집』으로 펴내고 있다.
학술원상(저작상, 1982), 인촌상(학술부분, 1990), 용재 학술상(2003)을 수상했다.

이 책『한국사신론』을 저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ㆍ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정확한 구체적 사실은 올바른 역사가 성립하는 토대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섣불리 남이 거부하기 힘든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예가 종종 있어 왔다고 염려한다. 저자는 이 같은 풍조에 대항해서 일종의 투쟁을 해왔고, 그 점을『한국사신론』에 반영시켰으며 그러나 과거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살아 있는 역사를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노라 주장한다. 그리고『한국사신론』에는 저자 나름의 독자적 시대구분이 시도된 것이라고 한다.

“학문의 이상은 진리를 찾아서 이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값어치를 지닌다. 진리를 저버리면 학문은 곧 죽은 것이며, 죽은 학문은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서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낡은 틀을 과감히 깨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고, 이러한 신념이『한국사신론』에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라고 힘 있게 주장하며 그밖에 이 책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하여는「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이, 저자도 “10세기 뒤에 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며 주장을 대신하고 있다.


이기백교수, 민족·진리 추적한 국사학 ‘거목’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4-06-02 20:11
2일 별세한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는 해방 후 한국사학계를 이끈 국사학계의 거목이었다. 고인은 194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사학과 제1기생이었던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일제 관인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상(像)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역사학은 ‘민족’과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수렴된다. 일제 치하인 1924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남강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자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은 이전교수의 증고조부.

오산보통학교(6년제)와 오산중학교(5년제)를 다닌 고인은 학창시절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함석헌의 ‘성서의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 훗날 고인은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이들 역사학자의 민족주의 사관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대를 중퇴한 고인은 46년 서울대 사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한다. 그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이병도 교수로부터 실증적인 학문연구 방법을 익히게 된다. 사료에 대한 비판과 검증 과정은 그에게 역사의 ‘진리’를 캐는 작업이었다. 그는 이 고된 과정을 통해 사실(史實)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고, 여기에 역사학자의 사관이 가미되면 그것이 곧 역사의 진리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다.

그는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말할 정도로 진리지상주의자였다. 해석보다는 지나치게 사실을 강조한 그의 성향은 때로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의 실증적인 학문연구방법이 해방 후 한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학문 연구는 61년 출간된 ‘국사신론’을 비롯해 ‘신라정치사회사 연구’ ‘고려병제사’ ‘신라사상사 연구’ ‘한국고대정치사회사 연구’ 등 굵직굵직한 성과물을 발표하면서 결실을 보게 된다. 특히 ‘국사신론’은 67년 ‘한국사신론’으로 증보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통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국사신론’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면 거의 모두가 이 책을 보았을 정도로 한국사 분야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또 영어와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판으로 번역돼 한국사를 국제사회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이기도 하다.

고인은 권위적인 학풍으로 상아탑에 안주해온 역사 연구를 일반인에게 쉽게 소개하는 데도 앞장서왔다. 지난 87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해온 반연간 학술지 ‘한국사시민강좌’는 지금까지 34집을 발행하면서 역사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0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선 고인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며 한국사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특히 63년 서강대에 부임, 22년간 후진을 양성하면서 ‘서강학파’라는 학맥을 수립하기도 했다. 현재 정두희·이종욱(이상 서강대), 김용선(한림대), 신호철(충북대), 김당택(전남대), 노용필(덕성여대) 교수 등 30여명의 제자들이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정두희 교수는 “대학원 시절의 세미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학설을 비판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면서 “선생님은 당신과 다른 견해라 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다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회갑을 넘긴 85년에 한림대 교수로 옮겨 95년 퇴직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림과학원 객원교수와 이화여대 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하며 학문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런 공로로 고인은 학술원 저작상, 인촌상, 국민훈장 모란장, 위암 장지연상, 용재학술상 등을 수상했다.〈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명복을 빕니다]이기백 前한림대 교수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4-06-02 19:09
2일 별세한 이기백(李基白) 전 한림대 교수는 학문이나 사생활에서 엄격했던 학자로 유명했다. 제자인 이기동(李基東) 동국대 교수는 고인에 대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한 분”이라고 말했다. 너무 꼿꼿해서 제자들이 함부로 말을 건넬 수도 없었던 이 ‘스승’은 학술발표회 때마다 참석해서 경청하며 자상한 가르침을 주었다. 작년 9월 ‘한국사시민강좌’ 편집회의에서 “이제 내 명도 얼마 안 남았다”며 “폐간사를 쓰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고인이 팔순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금 약해진 것일 뿐”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의 지병은 이미 악화돼 있었다. 고인은 일주일 전부터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지만 그 와중에도 직계가족 외에는 문병조차 받지 않는 엄격함을 고수했다.

역사학계에서는 “1967년 ‘한국사신론’이 출간된 뒤부터 ‘이기백’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한국사학을 거론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식민사관과 유물사관을 배격하고 지배 세력의 확대에 의한 집권 세력의 교체를 한국사 전개의 기본틀로 확립한 ‘한국사신론’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등 7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한국사’를 대표하는 저서로 자리 잡았다. 학문적으로 엄격했던 고인은 한국사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수용하며 1976, 1996년 수정증보판을 거듭 내놨다.

고인은 1924년 10월 21일 평북 정주에서 후일 풀무학원(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을 설립한 농민운동가 이찬갑(李贊甲·1904∼74)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에서 고 이병도(李丙燾) 교수의 지도 하에 한국사를 공부했다.

한국사 분야에서 고인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대정치사회사와 고대사상사. 고인은 ‘신라정치사회사연구’와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등 이 분야에서 약 20권의 역저를 내놓았다.

고인의 학문적 태도는 관점을 달리하는 후학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배층 중심으로만 한국사를 바라본다는 민중사학 계열의 비판은 ‘지배층 바로 아래 세력이 다음 시대를 담당한다’는 고인의 학설과 맞서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마지막까지도 ‘한국사학사연구’의 집필을 계속했던 고인은 이 작업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떠났다.

고인이 말년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사의 대중화 작업. 1987년 9월부터 역사대중지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의 책임편집을 맡아 올해 2월까지 34집을 발간했다.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이 반년간지는 무크지와 정기간행물의 중간 형태로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유지하며 성공적인 잡지로 자리 잡았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교수, 민현구(閔賢九) 고려대 교수, 정두희(鄭斗熙) 이종욱(李鍾旭) 서강대 교수, 이훈상(李勛相) 동아대 교수 등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틀을 닦아 현재 학계 중진으로 한국 사학계를 이끌고 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강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고, 강물이 흐르거든 갓끈을 씻어라. 아, 역사..., 우리곁에 늘 생생하게 살아 쿵쿵 뛰는 민중들의 그 가쁜 숨소리! [인터파크 제공]



2. 내 마음 속에 들어 온 글귀

서장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제1절 근대 한국사학의 전통

식민주의사관의 청산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을 청산하는 일이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3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립항쟁이 없는 민족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며, 한때 지방분권적이었던 일본에서 이 점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흔희 조선시대의 붕당(朋黨)을 말하지만, 그것이 선천적인 민족성의 소산이었다면 한국사의 시초부터 있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붕당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발생하였다. 이것은 붕당의 발생이 역사적 산물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붕당은 한국사의 발전에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이다.

민족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 노력의 성과를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p4

제2절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

인간 중심의 이해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p7

제10장 사림세력의 등장
제1절 훈구세력의 지배하의 사회적 변화
제2절 사림세력의 등장

사림의 진출
사림이란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재야(在野)의 독서인군(讀書人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중ㆍ소지주층(중ㆍ소지주층)에 속하며,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향촌에서 유향소(留鄕所)나 향청(鄕廳)을 통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써니: 사장(詞章) 1 시가와 문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사령.
경학(經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림.
수기치인은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유학이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다.

여기서 노자는 거의 예수와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다.

네가 다투지 않으면 지상의 그 누구도 너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 손해를 친절로 갚아라. ....... 나는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선하지 않은 사람을 선하게 대한다. 이와 같이 하면 모두가 선해진다. 나는 진실한 사람에게 진실하며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실하다. 그러면 모두가 진실하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

이런 가르침은 현자에 대한 노자의 개념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理想)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道)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속의 영웅들 p30)

슬픈 어조로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만큼 덕을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기본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널리 교육을 펼쳐서 도덕성과 사회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대학』이라 불리는 책에 있는 이 두 구절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제국(온 세상)에 최고의 미덕을 펼치기 원했던 옛사람들은 먼저 자기 나라의 질서를 잡았다. 나라의 질서를 잘 잡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가족을 단속하였다. 가족을 단속하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하였다. 생각을 신중히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지식을 최대한 넓혔다. 지식을 넓힌다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을 탐구하자 지식이 완전해졌다. 지식이 완전해지자 생각이 신중해졌다. 그들의 생각이 신중해지자 마음이 바르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게 되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다스리게 되자 가족을 단속할 수 있었다. 가족을 단속하게 되자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었다.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자 온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었다.」(역사속의 영웅들 p33)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 사화는 연산군(燕山君) 4년 (1498)에 있은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를 특히 사화(사화)라고 적은 것은 그것이 사관(史官)들이 적어 둔 초벌원고인 사초(史草)에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p227

조광조는 유교적인 도덕국가의 건설을 그의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는 유교적인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하하고, 권선징악(권선징악)과 상호부조(상호부조)를 그 정신으로 하는 향약(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적 도덕을 향촌(향촌)에 확립시키려 하였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 간행하여 일반 국민이 유교적인 교양을 갖게 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내외 요직자로 하여금 덕행(德行)이 있는 인물을 천거케 하여 그들을 국왕이 친시(親試)로써 채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케 하였다. 그 결과로 사림들이 많이 등용되게 되었다. p 228

서원과 향약
서원과 함께 지방에 있어서의 사림들의 지위를 굳게 하여 준 것이 향약(鄕約)이었다. 향약은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주된 정신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유교도덕이 행해지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같은 목적으로 편찬된『소학(小學)이 정신을 실현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향약은 처음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조광조)가 널리 실시하려 하였으나 그의 실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 향약은 개별적으로 각지에서 시행되더니, 선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향약의 간부인 약정(約正) 등에는 대개 지방의 유력한 사림이 임명되었고, 일반 농민들은 이에 자동적으로 포함되었다. 그 결과로 사림들은 농민에 대하여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들보다도 오히려 더 강한 지배력을 가지고 그들의 사회적 기반을 굳게 하였다.

사림들의 생활기반은 중앙의 관직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방의 농장(農莊)에 있었다. 그들은 관직을 얻어 중앙으로 간다 하더라도 완전히 지방의 농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동족(同族)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농장과 동족이 서원을 건립하고 향약을 운영해 가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사림의 승리는 이러한 사회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p230

제 4절 사림의 문화

성리학의 융성
본래 주기설은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를 신비적인 이보다는 물질적인 기에서 구하는 입장이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이는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설에서는 사물의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p239

제11장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제 2절 수취제도의 변화

역법의 변화와 균역법
토지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가 농촌의 황폐 위에 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p247

제 3절 경제적 성장

광작농민과 농촌분화
지대의 지불은 타조법으로부터 도조법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장차 화폐로 지불하는 도전법(賭錢法)으로 발전하는 터전이 되었다. p249

도고상업의 발달
한편,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갔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자기들의 근거지에 한정되지 않고 중요한 교역지를 따라 전국의 시장에 뻗쳐 있었다. 가령, 서울의 강상(江商)은 한강(漢江)을 따라 경기ㆍ충청 일대에서 미곡ㆍ소금ㆍ어물 등의 판매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박에 의한 운수에 종사하던 관계로, 나아가서 조선업(造船業)에도 투자를 하여 이를 지배하였다. 또 개성(開城) 송상(松商)의 활동은 경기를 중심으로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는 황해ㆍ평안지방, 남쪽으로는 충청ㆍ경상 지방에 미치고 있었으며, 이들 각지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송상은 그들의 중요 상품인 인삼을 직접 지배하고, 이를 홍삼(紅蔘)으로 가공하는 데도 손을 대었다. 이러한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시전상인들도 난전(亂廛)을 금할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수공업을 지배하고 특정 상품들을 독점판매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상인은 사상이건 시전상인이건 간에 수공업을 지배하여 상품을 독점판매하는 도고상인이 지배적이었으며, 따라서 도고상업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상업형태였다. p251

제4절 실학의 발달

실학의 발생
17ㆍ18세기에 벌열정치(閥閱政治)가 행해지면서 소수 양반가문이 정권을 독점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몰락양반들이 발생하였다. 그런가 하면 농촌에서는 광작(廣作)에 의한 부농이 생기는 한편 영세농들은 이농을 강요당하여 유민의 수가 늘어났다. 도시에서는 도고상인(都賈商人)들이 상공업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자 영세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등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따르는 갖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사회가 당면한 이 같은 사회적 현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학문적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반성 속에서 새로이 일어난 학문이 실학(實學)이었다. 그러므로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몰론 정권 담당자의 일부에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말한다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측에서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南人)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p255

제12장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제2절 신분체제의 변화

잔반과 중인층
조선의 양반사회는 크게 볼 때에 양반을 지배계층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p272

제4절 중인층 및 평민의 문화

천주교의 전파
종래 천주교는 양반 중에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남인(南人)의 시파 학자들이 많이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수는 박해와 더불어 점점 줄어들고, 19세기에 이르면 대체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많이 믿었다. 의업(醫業)에 종사하는 사람 같은 중인층도 있었으나, 농(農)ㆍ공(工)ㆍ상(商)에 종사하는 사람이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믿었다. 그리고 여성 신자가 또한 현저히 증가하였다. 요컨대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 낮은 사람,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주교의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로 서울과 그 부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어서, 천주교가 농촌의 종교이기보다는 도시 중심의 종교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p281

동학의 발생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 갔다고 하면, 동학(東學)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동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동학은 철종(1849~1863) 때에 최제우(崔濟愚)가 제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儒)ㆍ불(佛)ㆍ선(仙) 3교의 장점을 취하여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항한다고 하였으나, 그 교리 속에는 천주교에서 취한 것도 있으며, 또 민간의 무술신앙(巫術信仰)에서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그의 사상은 『동경대전(東經大全)』ㆍ『용담유사(龍潭遺詞)』등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곧 하늘(신, 神)이라 하여 이 둘을 한가지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심은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은 까닭이 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동학이 농민들에게 환영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주문(呪文)을 외고 산제(山祭)를 지내는 등 농민들의 전통적인 무술신앙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어서 쉽사리 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현실을 개혁하려는 사회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p282

제14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제1절 독립협회의 활동

독립협회의 활동
독립협회가 시민 중심의 협회로 전환하면서는 이러한 상징적인 사업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사회운동ㆍ정치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는 우선 민중의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하나가 토론회(討論會)의 개최이고, 다른 하나가 기관지(機關紙)의 간행이었다. p325

제2절 일제의 정치적 침략과 의병의 항쟁

을사조약
을사조약의 내용은, 첫째로 일본 외무성(外務省)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ㆍ지휘한다는 것이요, 둘째로 금후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셋째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황제 밑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둔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여버린다는 것이었다. p323

일제의 식민지화
조약의 서문에는 양국의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한국의 우방이 아니라 적국이었다. 또 일본은 한국인을 희생시키고 일본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한국을 병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병합은 장차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을 침략하는 기지를 제공케 하였고, 때문에 동양의 평화는 더욱 교란되었다. 일본은 그의 침략행위를 허위에 가득찬 문구로써 은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335

제 4절 애국계몽운동

교육열의 팽창
근대적 사립학교의 시초로 고종 20년(1883) 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元山學舍)였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회원들을 위시한 지방민들의 요청으로 개화파 관료인 덕원부사(德源府使) 정현석(鄭顯奭)이 설립한 것이다. p354

3.1운동의 전개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과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가졌음을 선명한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대한 보복적인 행위를 선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약3장(公約三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자주적 정신을 발휘하되 배타적 감정에 흐르지 말며, 질서를 존중하여 공명정대하기를 기하였다. 즉, 평화적인 운동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p363

제3절 민족운동의 새 양상

물산장려운동과 소작ㆍ노동쟁의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바라고 일본의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광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노동쟁의(勞動爭議)도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애 어용노동단체를 조직하여 일을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파업은 결국 타협으로 매듭지어졌으나, 노동쟁의가 민족운동과 연결되는 양상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노동쟁의는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제일 많았으나, 뒤로 가면서는 점점 단체교섭권의 부여,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항일민족운동의 일부로서 점점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어 갔다. p382

제4절 민족문화의 수호

국학 연구
국어(國語) 연구에 있어서는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로써 조직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 발족한 후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된 현 한글학회는 국어의 정리에 이바지한 공이 컸다. 이윤재(李允宰)ㆍ이극로(李克魯)ㆍ최현배(崔鉉培)ㆍ김윤경(金允經) 등이 중심이 되어 움직인 이 학회는 『한글』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국어 보급에 힘쓰는 한편, 사전의 편찬에 착수하고, 이를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맞춤법의 제정, 표준어의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 등 국민의 현실적인 요구에 응하는 허다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한글을 창제한 날을 ‘한글날’이라 정하여 이를 기념하는 등 민족문화를 일반에게 널리 선양하는 데에도 공이 컸다. p389

국사(國史) 연구에 있어서는 애국적 계몽사학의 전통을 이은 민족주의사학이 1920년대에 성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한국통사(韓國通史)』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등을 저술하여 민족의 혼(魂)을 지키기를 역설하였다. 신채호(申采浩)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입장에서 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하였고, 특히 고유한 낭가사상(郎家思想)을 크게 강조하였다. p390

써니: 낭가사상(郎家思想) : 백과사전

신채호에 따르면, 낭가사상은 한민족의 원시종교인 수두제[蘇塗祭]신앙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단군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민족적 구심점인 수두(단군)제전(祭典)을 거행하였고, 이것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소도(蘇塗)라는 이름의 제전으로 계승되었다가,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차대왕(次大王) 대에 와서 '선배' 제도로서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제도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선배는 선인(仙人 또는 先人)의 우리말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가사상은 한국의 주체적인 전통사상으로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화랑제도(花郞制度)는 바로 고구려 선배제도를 모체로 하여 성장 발전한 것이다. 낭가사상은 고려 중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다가 묘청의 난 때 국풍파(國風派)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화랑제도와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태도에서 보듯이 유·불·선(仙)교 가운데 바로 선교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고 파악하고, 그는 그것을 낭가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상은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과 서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나아가 일제시대 국권회복의 실천적 이념으로까지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독단적인 사료선택과 언어해석방법으로 낭가사상을 설명함으로써 그 전개에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제16장 민주주의의 성장
제1절 8.15해방

해방
한국민족은 이 해방이 곧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p394

종장 한국사의 발전과 지배세력
제1절 한국사의 대세

지배세력의 변화
역사를 체계화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다. p407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이 책 한국사신론은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로 일컬어지던 이기백 선생의 대표적 저서이며 저자 스스로도 본서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술회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역저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국사학계의 귀중한 자료로 국사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와 기술은 후대를 위한 역사가의 희생과 헌신적 탐구열이 아니고는 감히 탄생할 수 없는 역작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 지식의 미흡함과 한국사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송구하게도 책의 위대함보다 흥미적 관점에서 먼저 논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고 말았다. 내용이 너무 충실하게 꽉짜여진 점은 일반인으로서는 재미를 느끼기보다 국사교과서 같은 무거움을 느꼈다면 저자의 노고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조금 더 평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둘. E.H Carr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다루었던 많은 내용들이 한 달 동안 읽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해 얻는 통찰에 많은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역사를 통해 현대인이 모색하고 귀기울여야 할 점 들에 대해 많은 생각과 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몇가지 Carr의 견해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역사를 공부하고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도록 앞으로 더욱 활용하고 의식의 수준을 높여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 역사는 움직인다 ***

<역사가를 역사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 주는 것은 일반화입니다.> p99)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양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북돋아 주는데 있습니다. p104

제3의 논점은 역사에 있어서의 예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으로부터 예견이 나오고 예견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꽁뜨

역사에 있어서의 예언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는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사이의 차이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p105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인간행동의 제 형태를 추궁하고 자기의 연구대상인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하려고 했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역사학과 사회과학에 있어서만 특유한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역사가의 모든 관찰 속에는 불가피하게 역사가의 관점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마련이고, 역사에는 어디까지나 상대성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칼ㆍ만하임의 말에 의하면,「경험을 가다듬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하는 類別조차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관찰과정 자체가 관찰대상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역시 진리인 것입니다. 써니- 책에서 뿐만이 아니라 변.경에서 타인의 학습내용을 관찰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배움과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물며 독서를 통해 작가의 주장을 탐색하고 현실에서 생각해 볼 때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에 이르거나 예를 통해 지난 나와의 대화에서는 감동과 회한이 많이 서렸음을 기억할 수 있다.

자기행동의 분석과 예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사자들은 결과에 대한 불길한 예언에 의해서 사전 경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행동의 수정이 가해지게 되고, 설사 그 예언이 아무리 정확한 분석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적중되지 않는다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p108
써니-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지평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이며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하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역사적 관찰에 의거하여 전제정치는 단명하다는 확신을 조성하는 정치학자들은 독재자의 타도에 도움을 주게 될 수도 있습니다. 109
써니 - <윌 듀런트 역사속의 영웅들>의 유럽 세계사 를 통한 예에서 상세히 볼 수 있었으며 가깝게는 이 책 우리의 한국사를 통해서도 또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태백산맥>,<토지>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관찰자와 그 대상과의 사회 과학자와 그 자료와의, 역사가와 그 사실과의 상호관계는 연속적이고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역사와 사회과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p109

사회로부터 遊離되고 역사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기준이나 가치란 추상적인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역사가라는 것은 모든 가치의 역사적인 被制約性을 가려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역사를 초월한 객관성을 요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p129
써니- 이 점은 독서를 하면서 중요한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에 있어서는 진보의 종국은 이미 진화된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한없이 먼 곳에 있는 것이고, 그에 대한 지표는 우리들의 前進途上에서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침반은 귀중한 그야말로 불가결한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로가 그려진 지도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내용도 우리들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p182
써니 - 한 달 동안 읽은 책들은 읽기에 쉽지 않았으나 내 인식의 틀에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하였고 독서의 중요함을 새롭게 배우는 중요의식을 갖게 하였다.

역사가는「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할 열쇠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미래를 조명하고 미래가 과거를 조명한다는 것은 역사의 합리화인 동시에 역사의 설명입니다. p193

역사에 있어서의 판단의 기준은「보편적 타당성을 요구하는 원리」가 아니라「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p201
그렇다면 김구와 이승만의 대결에서 가장 효과적이 었던 것은 단연 이승만의 승리다. 김구를 지지하는 많은 재야 인사들은 이승만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고 김구에 대해 애석해 하지만 김구는 너무 큰 욕심으로 오히려 꿩도 매도 다 놓치고 역사에 오히려 헌신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한다.
집권자들이 다르게 되면 또 다른 시각의 저서들이 나올 것인가. <한국사신론>에서는 현대사에 대한 언급을 피했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는 너무도 일방향 적인 관점에서 모색된 점이 짙게 느껴져 읽기에 거북했다.

역사상에는 뜻 깊은 실패라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역사는 소위「지연된 성공」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늘의 명백한 실패도 내일에는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p203
써니-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이로운 점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역시 미흡했으나 희망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이런 여유와 관점의 수용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목전에 놓인 어떠한 고정 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놓여 있는, 그리고 역사 코스의 진전과 더불어 발전하는 그러한 기준에만 의존하고 생존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것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p204

가치는 사실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더라도 일방적인 그릇된 이야기입니다. p205

우리가 사실을 알려고 할 경우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나 따라서 우리가 입수하는 해답 같은 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가치체계의 후견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소산인 것입니다.

가치는 사실 속에 들어가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p206

역사가란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의 양자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p207


정적인 세계에서는 역사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만일 여러분이 낡아빠진 말이라고 탓하시지 않는다면 -진보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역사관은 우리들의 사회관의 반영입니다. p208

역사는 인간이 이성을 활용하여 자기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에 적응해온 긴 투쟁의 과정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이성의 새로운 차원과 역사의 새로운 차원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은 전례없을이 만큼 강하게 자기를 의식하고 있고, 따라서 역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과거의 희미한 어둠 속을 열심히 뒤돌아다보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혹시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微光이 향해 나가는 앞날의 어두움을 밝혀 주는 빛이 되어 주지나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입니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앞날을 내다보는 願望과 不安은 걸어 나온 과거에 대한 통찰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무한한 역사의 쇠사슬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근대 세계의 변화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발달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그 첫 시작은 데카르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고의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고를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즉 관찰활동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동시에 사고와 관찰의 主體와 客體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지위를 처음 확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18세기 후엽의 루소가 나타날 때까지는 이러한 발달은 아직도 충분히 명확한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소는 인간이 자기 이해와 자기의식의 새로운 심화된 세계를 열어 주었고, 자연계와 전통 문명에 대한 새로운 견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을 당시의 사회질서를 지배하고 있었던 전통적 관습 전부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인간 이성의 활용과 자연법칙에서 도출된 단순한 기본 법칙이 이에 대치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의해서 고취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액튼은 그의 원소 속에서 그 때까지는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액튼에 있어서는, 헤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자유와 이성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또한 미국혁명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해온 일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한다는 일뿐이었지만, 참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일이다. >p215

프로이드가 한 일은 인간행위의 무의식적 근원을 의식과 합리적인 탐구 앞에 폭로함으로써 우리들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의 이성의 영역의 확대이며,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해 나갈 인간능력의 증대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그리고 진보적인 업적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p218

그것은 변화를 역사에 있어서의 발전적 요인으로 본다는 감각과, 이성은 변화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라는 믿음입니다. p239

그러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실은, 영어사용세계의 인텔리나 정치사상가들이 이성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보다도, 부단히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주도한 감각이 감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p243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며 위대한 과학자의 낡은 말귀를 가지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p244

맨 처음에 읽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남은 기간 동안의 독서에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을 많이 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위대한 책이었다는 느낌과 좋은 책을 선정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중여한 책들을 너무 미흡하게 읽었다는 반성도 다시 하게 됩니다. 6월엔 좀 더 열정적으로 하여야 할 텐데 늘 아쉬움과 미련만이 남습니다.

IP *.75.1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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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5:35:14 *.99.120.184
점점 간결해지며 정리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책과 자신, 책과 책이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네요.

이번 5월은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글 뿐만 아니라 마음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무딘 나에게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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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06 04:17:51 *.70.72.121
되도록 이쁘게 보아주고 장점인냥 붇돋워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인용이 너무 많아서... 좀 그러네요. 욕심이 많아서... 여하튼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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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6.06 05:06:44 *.128.229.230
책을 읽고 무엇인가 배우고 있으니 그대의 일상 어딘가가 변해 가는가 ? 일상에 대한 어떤 시선이 바뀌어 가는가 ? 세상에는 많은 삶들이 있다. 그대를 기다리는 좋은 삶이 있다. 그러니 지난 일로 슬퍼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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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06 10:07:41 *.75.15.205
헉? 찌리릿.... 부지깽이님!!!.... 부들부들.... ㅠㅠㅠ.... 히히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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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전사
2007.06.08 19:44:34 *.84.6.38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꿈의 지침'을 얻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것의 관계는....
연구원과 서포터즈의 관계가 아닐까요.
서포터즈는 연구원이 있기 때문에 존해합니다. 써니님이 있으니 플러스전사가 존재하는 거죠.
연구원이 사라지면 서포터즈의 존재는 당근 없겠죠.
써니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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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10 17:06:06 *.70.72.121
주체할 수 없는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꿈을 가지신 여러분들이 있기에 변.경.연이 존재할 것입니다. 또한 사부님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가 여기에 모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름다우신 사부님을 사랑하며 절실한 꿈을 가진 서로에게 배우고 도우며 나누는 또 다른 나로 우리라는 <변화경영연구소 사람들> 하나이지요. 우리 모두 화이팅! 달리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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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 한국사 신론 / 이기백 [3] 好瀞 김민선 2007.06.03 3184
860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3] 이야기 2007.05.29 2553
859 (10)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 [2] 박소라 2007.05.28 2372
858 『역사 속의 영웅들』을 읽고 [1] 현운 이희석 2007.05.29 1893
857 (11)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란트 [1] 박승오 2007.05.28 2132
856 (11) ‘역사 속의 영웅들’을 만나다! [9] 時田 김도윤 2007.05.28 2218
855 [역사속의 영웅들] 아쉬운 영웅들의 이야기 [2] 余海 송창용 2007.05.28 2357
854 (011) 역사 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 [2] [1] 校瀞 한정화 2007.05.28 2448
853 [독서11]역사속의 영웅들/Will Durant [2] 素田 최영훈 2007.05.30 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