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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6일 09시 3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故 이기백 교수님은 해방 이후 한국역사학, 특히 고대사학을 대표하는 교수님은 1924년 10월 21일 평북 정주에서 후일 풀무농원을 설립한 농민운동가 이찬갑(1904-74)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인은 1941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했해는데 오산중학교는 3.1 만세운동 33인 대표 의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이 설립한 학교로, 고인은 남강과 같은 집안이기도 하다. 교수님은 식민지시대 말기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 재학중 일본군에 징집돼 만주 관동군에서 복무했다가 해방과 함께 소련군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6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해 1년만에 졸업했으며, 58-63년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63-85년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사의 전해종, 서양사의 길현모.차하순 등과 함께 '서강사학'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회갑을 넘긴 85년에 한림대 교수로 옮겨왔고, 한림과학원 객원교수와 이화여대 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학사 출신인 고인은 1985년 서강대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한국실증사학을 대표하는 고인은 1962년 「국사신론」에 이어 이의 전면개정판인 「한국사신론」을 1967년 일조각에서 출판하면서 한국사학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 이 책은 영어와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판으로 번역돼 한국사를 국제사회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도 「민족과 역사」「신라정치사회사 연구」「고려병제사」「한국사학의 방향」「신라사상사 연구」「한국사상의 재구성」「고려귀족사회의 형성」「한국고대정치사회사 연구」「한국고대사론」「한국사를 보는 눈」「한국전통문화론」과 같은 역사전문 논문집 외에 「연사수록」(硏史隨錄)이라는 수상집이 있다. 이런 공로로 고인은 학술원 저작상, 인촌상, 국민훈장 모란장, 위암 장지연상, 용재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식민사관에 대하여>

저자 연구를 하면서 두 가지 면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동일한 인물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에 대한 혼란이었고, 두 번째는 그것을 판별할 만한 지식이나 학문적 내공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사학자라는 견해와 황국신민을 계승한 학자라는 사실 그리고 스승인 친일학자 이기백의 제자라는 점을 들어 보기에도 역한 말로 표현되는 자료가 많았다. 또한 동료 연구원으로부터 동일한 내용의 문의를 보고 많은 토론을 해보기도 하였다. 오히려 두 번째 혼란이 첫 번째 혼란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민족사관에 대하여 민족의 앞에서라는 단어를 앞에 두면 판단 자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자료를 찾던 중 故 길현모 교수님이 월간중앙 74년 1월호에 실린 민족과 문화-문화 방향의 도착(倒錯)에 대한 글을 보고 그 해답을 찾았다.

이리하여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다든가, 이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자각을 해야만 한다든가라는 식의 상투적인 사고방식부터가 청산되어야만 할 것이다. 도대체 민족정신이 영원히 우리 역사를 관철하는 지고의 정신이라면, 왜 그렇게도 쉽사리 땅에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모순 내지는 자기 모독적인 표현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의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으로 어떤 시기로부터 그리 되었다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일본의 침략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족정신은 그들에게도 대항할 수 없을 이만큼 그렇게도 무력한 정신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무자각의 결과였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왜 자각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게르만의 자연신이 전투에 효험이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 개종했다고 하는 클로비스의 지력에도 못 미칠 이런 수준의 논리가 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방치되어만 왔단 말인가.
민족 정신론자들이 상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해당 민족이 이룩한 역사상의 두드러진 업적과 인물들을 모두 민족정신의 구현이라고 주장한다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민족정신의 내용은 더욱 모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는 각 국민간의 민족정신의 경쟁적인 전시가 현출될 수밖에 없다.
가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인들이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자질이 특출하다고 보아주는 사람은 없는 것이며,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인이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해서 폴란드인의 탁월한 천문학적 자질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타민족들에게 앞서서 형성했던 이집트인들조차도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 민족의 대열에서 탈락된지 이미 오래인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마르크 블록은 기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역사가들의 병폐의 하나라고 지적한바 있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이 말에 민족사관에 대한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금속활자에 대한 부분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보다 200년 앞선다는 위대한 민족유산이다 라는 말은 지금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금속활자에 대한 새로운 기원을 만들었지만, 변화와 발전이 우리나라에 한정되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역사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가진 문화재이고,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쟁의 북새통에 피난길에 어수선한 시대에 대장경을 만드는 것보다, 미리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이 전쟁의 처참한 피해없이 편하게 살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왕과 관리자들의 기본적인 책무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이병도라는 친일학자의 제자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그렇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스승이 친일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자도 어용학자라는 말은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전제가 되어야 하고,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또 그 당시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이 두 가지의 혼란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동 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처절한 독립운동이나, 가족이나 가문을 팽개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직접 뛰어들었던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에 유학을 하여 식민지를 만든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다시 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에 계속 학자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는 반면, 지금도 이름 없이 추운 만주의 벌판에서 이름 없이 쓸쓸히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다른 개인사이지만, 아직 이런 개인사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였다는 말로 마무리 하기에는 좀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진행되고 있고, 정신대 위안부들의 문제도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이 말은 故 이기백 교수님을 폄하하는 글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재가 계속 풀어야할 개인적인 의문이다.



3.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한글판 머리말>

한국사신론을 저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구체적 사실은 올바른 역사가 성립하는 토대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섣불리 남이 가부하기 힘든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저자는 이 같은 풍조에 대항해서 일종의 투쟁을 해왔고, 그 점을 한국사 신론에 반영시켰다. 둘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사회적 연관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살아있는 역사를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학문의 이상은 진리를 찾아서 이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값어치를 지닌다. 진리를 저버리면 학문은 곧 죽는 것이며, 죽은 학문은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서장>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4p)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 지라기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실제 역사의 구체적 전개과정에서도 한국은 밖으로부터의 침략자에 대하여 끈질긴 항쟁을 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론에 있어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그들이 말하는 반도적 성격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였던 것이다.

(4p)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4p) 민족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 노력의 성과를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5p)이러한 세 학파는 각기 그 입장과 주장이 달랐으나, 모두 그들이 짊어진 일정한 역사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즉,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여 주었으며, 유물사관은 전통적인 양반사회의 개혁을 정당화하여 주었으며, 또 실증사학은 한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키는데 공헌하였다.

(6p)이제 한국사학은 단순히 식민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는데 그칠 수는 없다. 또 우리 자신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태도만으로 만족할 수도 없다.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였다거나 혹은 또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한 가지 사실로 해서 높이 평가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에 만족하고 있는 한국사학에는 오직 퇴보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의 비판적인 계승이 문화의 여러 사실을 독자적으로 체계화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 사학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야할 단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7p)유교적인 개인 중심의 역사 이해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서 중요시된 것이 제도사학이었다. 물론 군주(君主)이건 영웅(英雄)이건 간에 개인 중심의 역사관은 청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제도가 인간 없이 운영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가 필요로 해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이야말로 그 제도를 이해하는 핵심문제가 아닐 수 없다.

(8p)인간 집단이 존재하는 양상이나 변화해 온 과정을 다른 민족의 경우와 비교하여 어떤 점이 같았고 어떤 점이 달랐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그 보편성(普遍性)과 특수성(特殊性)의 인식이 되겠다.


<제1장 원시공동체 사회>

(20p) 씨족은 자급하는 경제적인 독립체였다. 다른 씨족의 영역 안에서 채집이나 사냥, 고기잡이 등의 경제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제2장 성읍국가와 연맹왕국>

(24p) 이들 청동기인과 신선기인과의 관계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빗살 무늬토기 유적과 민무늬 토기 유적은 아무리 거리가 근접해 있는 경우라도 서로 뚜렷이 구별되고 있다.

(31p) 성읍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 초기국가를 멸하고 개편한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치 신라의 신분제도를 카스트제도라고 하지 않고 골품제라고 부르듯이, 우리나라의 초기국가를 성읍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성읍국가는 한국에서의 최초의 국가였으며, 따라서 한국에서의 국가의 기원은 성읍국가로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49p) 이들 법 조목은 이 시대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우선 살인과 상해에 대한 처벌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존중한 사실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절도에 대한 처벌은 사유재산을 존중한 사실을 나타내준다. 특히 고조선에서의 절도죄에 대한 관심이 커서 비록 속죄하는 대가를 치르고 자유민이 되더라도, 오히려 일반은 이를 부끄러이 여겨 결혼의 상대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간음과 질투의 처벌은 가부장적안 가족제도를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제 3장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

(67p) 수당의 침입에 대한 고구려의 승리는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민족항쟁사상에서 특이할 만한 사실이라 하겠다 당시 수나 당의 야심은 고구려를 정복함으로 해서 동양에 있어서의 패권을 쥐자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고구려가 패하였던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까지도 그 지배 밑에 놓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들 침략자를 물리침으로 해서 이 민족적 위기를 구출하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의 승리가 지니는 민족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72p) 화랑도가 사다함, 기뮤신, 관창 등 화랑 출신들의 많은 무용담을 전하여 주어서 유명함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75p)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 유교를 중시하였다. (중략) 신라에서는 유교가 위의 두 나라 보다 뒤늦었으나, 유교도덕이 널리 국민에게 널리 국민에게 권장되고 있었다. 특히 화랑도 사이에서 중요시 되던 신(信)에 의하여 안으로 사회적인 결합을 이루고, 그것이 충(忠)을 통하여 위로 왕권과 연결됨으로 해서 유교는 국민은 국민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사회도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77p) 세 나라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신라의 경우에는 그것은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다. 민간에 침투한지 1세기 뒤에 양(梁)으로부터 신라 왕실에 전해지고 나서야 불교는 공인의 길이 마련되었다.

<제 4장 전제왕권의 성립>

(87p) 물론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과거 3국의 활동 무대에 속하던 만주의 넓은 지역이 그 영역에서 벗어났고, 거기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渤海)를 건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실제로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불구ㅠ하고 이 신라의 반도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립된 기반위에서 한국민족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신라가 발해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며 대립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신라의 영토와 주민 및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와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반도통일은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해야 하겠다.

(100p) 신라에서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유교가 불교를 대항하는 독립된 사상으로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신문왕 2년에는 국학(國學)이 설립되었다. 그 후 성덕왕 16년(717년)에는 당으로부터 공자 10철, 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국학에 안치하엿다.

(110p) 발해는 멸망과 함께 만주는 한국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발해는 한국민족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최후의 국가였던 셈이다. 발해가 망한뒤에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은 고려로 와서 고려에 의한 민족의 통일에 이바지 하였다.

<제 5장 호족의 시대>

(113p) 육두품은 그의 신분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처지가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지위의 승진보다는 학문적 식견에 의한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하였다.

(116p)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일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앙의 정치무대에 직접 등장하거나 혹은 이와 대항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갈라지고 무너져 가는 중앙귀족들이었지만, 그들의 세력기반인 골품제도를 보존하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해도인 장보고는 몰락하였다.

(118p) 반란의 첫 봉화를 든 것은 사벌주(상주) 지방의 원종과 애노였다. 이들의 반란세력은 상당히 강하여서 이를 평정하러 나간 정부군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한다.

(122p)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까지 국경을 넓히었고, 신라사회에 얽어매고 있던 골품제의 사슬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한편 또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의 탈을 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실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 귀족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제 6장 문벌귀족의 사회>

(131p) 광종의개혁은 호족 출신의 장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광종은 과거에 합격한 물벌없는 학자들이나 고려에 세력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인들을 주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광종이 죽자 제거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신라 육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134p) 고려의 신분제도가 세습을 원칙으로 하고는 있었지만. 한편 신분의 변동이 부단히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낮은 신분에서 높은 신분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향리로부터 문반이 되는 경우와 군반으로 무반이 되는 경우였다.

(151p) 유교의 발전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낳게 하였다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로 생각되었으며 국왕은 귀족들은 정치가로서의 도덕적인 수양을 중요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유교적 입장에서 편찬된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규정적인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었다.

(159p) 묘청은 이자겸의 반란에 궁성이 불탄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엿다. 그리하여 중흥의 공신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개경의 땅기운은 쇠하고 서경의 땅기운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제 7장 무인정권>

(160p)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열세를 초래하였다. 무신들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여있었다. 마땅히 무신이 맡아야할 군사령관직도 문신이 맡는 임무가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강감찬은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출신이 무신인 것은 아니다. 결국, 무신은 천대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는 사역되는 존재였다.

(161p) 무신의 난은 의종24년(1170)에 일어났다.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장군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을 쓴자는 모두 죽이라”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무신과 군인들의 합류는 이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켰다.

(169p) 이쪽 언덕에 서면 그 대안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강화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좁은 강수 하나를 건너 빤히 바라보면서 몽고는 고려의 군신을 항해 육지로 나오라고 외칠 뿐이었다. 고려의 대답은 군대를 철수시키면 육지로 나오겠노라는 것이었다.

<제 8장 신흥사대부의 등장>

(182p) 무인정권에 의하여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학문적 교양을 갖출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 곧 학자적 관료였다. 이러한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는 무인정권이 타도된 이후에 더욱 활발히 정치적인 진출을 하였다.

(187p) 그는 국호를 새로 조선이라고 하고 국도를 한양으로 옮기어 새 왕조의 면모를 표시하였다. 특히 새로운 국도의 건설에 태조는 적잖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는 풍수지리설에 비추어지거나 혹은 그 규모에 있어서 새 왕조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한양(서울)은 이후 오늘에 이르리까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88p) 고려후기 유교의 특징은 성리학을 받아드렸다는 데에 있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小學)을 중심으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하는 면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철학적인 국면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제 9장 양반 사회의 설립)

(196p) 조선의 사회를 움직여 나간 지배적인 계층은 사대부였다. 사대부들은 결국 관직을 얻으면 문반(文班)이나 무반(武班)의 양반(兩班)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양반이라는 말은 문무의 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적 신분층에 대한 새로운 칭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03p) 고려이래로 실시된 관리의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은 조선에 이르러 그 중요성이 더하여 갔다. 음서(蔭敍)가 원칙적으로 공신 및 3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한하고 있었으므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영달할 길이 거의 없어진 셈이었다. 사실 양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인생의 등용문이었다.

(216p) 이 같은 취지에서 세종은 일부 유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이고 언어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던 것이다.(세종 28년. 1446)

(217p) 성종 16년(1458)에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통사 동국통감이 편찬되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의식이 강하게 일어나서 단국을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 평양에 사당을 세워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던 때르모, 통사에서는 으레 단군조선을 민족사의 기원으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제 10장 사림세력의 등장>

(227p) 이리하여 정계에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드디어는 사화(士禍)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국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첫 사화는 연산군 4년(1498)에 있은 무오사화였다. 이를 특히 사화라고 적은 그것이 사관들이 적어 둔 초벌원고인 사초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28p) 궁중과 깊은 인연을 가진 무리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시의 폐출사사사건을 들추어서 그를 충동하여 혼구 및 사림의 잔존세력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내었다. 이것이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였다.

(228p) 이에 격분한 훈구세력은 모략으로 중종을 움직여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며(중종 14년, 1519), 이로 인하여 사림세력은 또 한번 크게 꺽이었다.

(229p) 인종이 먼저 즉위하였다가 곧 죽은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그의 외척세력이 반대파를 처치한 것이 바로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회안 것이다.

(233p)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은 해상권을 완전히 조선군의 수중에 있게 하였고, 그 결과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고 말았다. 또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순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위협하여 왜 육군의 작전을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11장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242p)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붕당이 생긴 초기에는 동인이 득세하여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붕당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의 건저의사건을 전후하여 동인중에는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리어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기었다. 이 남·북인의 분열도 학파로 보면 이황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간의 대립이었다.

(243p) 탕평책은 붕당 대립을 근본적으로 없애지는 못하였다. 어느 면에서는 오히려 이를 조장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관직을 바라는 양반의 수를 더욱 증가시킨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254p) 17, 18세기의 벌렬정치가 행해지면서 소수 양반가문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몰락양반들이 발생하였다. 그런가 하면 농촌에서는 광작에 의한 부농이 생기는 한편 영세농들은 이농을 강요당하며 유민의 수가 늘었다. 도시에서는 도고상인들이 상공업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자 영세상인이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등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따르는 갖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나고 있었다.

(261p) 그 까닭은 소수 벌열(閥閱)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약한자를 억누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골몰하는 벌열들이나 부농, 거상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학자들이 이 서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학이 유행한다는 것은 벌열 중심의 양반사회, 성리학지상주의의 사상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제 12장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271p) 이러한 지방행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짊어지울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도 위협하였다. 이에 그들의 악행을 규찰하기 위한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각지로 다니면서 관리들의 부정행위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써 지방행정의 잘못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비록 비교적 청백한 관리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도도한 시세를 거역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76[) 민란이 또 발생하였다. 그 주체는 물론 농민이었다. 그러나 대게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들에 의하여 지도되어, 대규모적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순조 11년(18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대표적인 것이다.

(278p) 이러한 민란들은 대개가 포악한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가서 벌열정치 및 세도정치에 의하여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으로 진전되어 갔던 것이다.

(281)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常民)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제 13장 개화세력의 성장>

(293P) 그러나, 신문명의 수입은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항은 개화와 자주의 양자를 어떻게 하면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커다란 역사적 시련을 한국민족에게 안겨 준 셈이었다.

(295p) 개화의 조류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 유학자들의 위정척사사상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에 근본을 두고 그 밖의 다른 이질적 문화를 배척하는 사상이었다. 재야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성장한 이 위정척사사상은 그러므로 서양 및 일본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298p) 대원군의 재집권은 곧 보수주의와 배외정책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청·일 양국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301p) 그러나 개혁이 발표도 공포도 되기 전에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청군이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그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제 14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331p) 보호조약의 체결을 위하여 일본은 정치계의 온로 이토를 파견하였다. 이토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일본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일본측의 보호조약안을 승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듣지 아니하자, 가장 반대가 심하엿던 참정(수상) 한규설을 일본 헌병이 회의실에서 끌어내고 말앗다. 그 뒤에 일본 군인이 외부로 가서 외부 신인을 가져다가 조약에 날인하여 버렸다. 말하자면 불법적인 절차를 밟아 조약을 성립시킨 것이었다.

<351p) 시일야방성대곡은 일본의 사기적인 침략행위와 정부의 무능을 지탄한 뒤에 다음과 같은 비분강개 말로써 끝맺고 있다. 오호 애통하다 우리 2천만 남으ㅏㅣ 노에가 된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기 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남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는가. 애통하도다 동포여.

<제15장 민족운동의 발전>

(367p) 3.1 운동은 일본으로 하여금 형식적이나마 그들의 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것은 한국 국민이 일본의 식민정치에 기꺼이 따르고 있다고 선전하던 일본의 주장이 전혀 거짓임이 밝혀졌고, 따라서 세계의 여론이 극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에 헌병경찰 정치를 버리고 소위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하여 그들의 식민정책의 일부를 수정하였던 것이다.

(378p) 이러한 속에서 농민들의 반항운동이 격화되자 일본은 소위 농촌진흥운동을 일으켰다. 1933년에 시작된 이 운동은 자력갱생에 의하여 춘궁을 퇴치하고 부채를 근절하여 농가의 경제를 갱신시킨다는 것이었다.

(389p) 하기 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브 나르도 운동) 도 농민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생활을 개선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

(390p) 신채호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입장에서 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하였고 특히 고유한 낭가사상(朗家思想)을 크게 강조하였다.

<제 16장 민주주의의 성장>

(393p) 해방의 날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옥에 갇혔던 이들이
인력거로 츄럭으로 풀려나올 때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울지 못했다.
아이들은 새해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어른들은 아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서울 장안을 뒤엎은
태극기 우리 기,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윤석중, 해방의 날)

(394p) 국내에서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날카로워져 가고 있을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진주하였다.

(398p)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에서는 드디어 총선서가 실시되었다. 남북협상파가 불참하였고, 북한에 배정된 100석을 제외한 것이었으나, 198명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에 5월 31일에는 국회가 열리었는데, 이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여 7월 12일에는 국회를 통과시켰고, 7월 17일에는 드디어 이를 공포하였다.

(400p) 6.25동란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405p) 4월 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 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406p) 그리고 아직도 그 속에서 민주화를 위한 싹이 나타나는 징조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북한에서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게 되는 날이, 또한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종장 - 한국사의 발전과 지배세력>

(408p) 이와 같이 대체로 통일신라기를 분기점으로 하고 지배세력은 흥미있는 변화를 해 왔다. 즉 점점 축소되어 가던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반대로 점점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는 그치지 않고 있다.

(411p) 그러므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목아래 모든 집권자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그들이 한국사의 큰 흐름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 혹은 후퇴 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역사적 위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대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411p) 민중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기층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민중 없이는 사회 자체의 존립조차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지배세력은 민중에 의지하여 그 존립을 유지할 수가 있을 뿐이었다.

(412p) 그리고 3.1운동은 위의 동학과 독립협회 두 계열의 합작운동이었다. 이리하여 이렇게 크게 성장한 민중은 항상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주동세력이 되어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해방과 더불어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 대세는 4월 혁명에서 할 수 있듯이 더욱더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 내가 저자라면

<역사의 구분점에 대하여>

한 국가의 생성과 소멸로 구분하여 배운 교과서로 공부를 하다가 어느정도 나이가 들어 지배계층의 구분으로 보는 한국사는 새로움을 주었다. 예전에는 한나라의 국가의 생성이 왕건이나 이성계 등 태조에 대한 한사람에만 편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떠한 자연적인 질서나 원칙이 있었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지배계층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거기에 따른 사회제도의 변화등의 이해가 쉽게 다가 왔다. 결정론적인 역사관이 아닌 원인론적으로 따져보는 한 시대가 늘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때 국사를 배웠음) 다시 읽어본 한국사는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최근 대하역사드라마가 많은 덕분에 시각적으로 준 많은 부분들이 떠올랐다. 이순신, 이방원, 최근 연개소문, 주몽, 대조영에 이르기까지...중간중간 그들의 배우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실증사학의 대가 답게 실제 사건을근거로 풀어보는 역사가 조금 지루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알고 역사를 평가하기에 충분하였다. 오히려 부족한 나 자신을 책망하였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많은 것은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피폐의 역사에 괴로워 했고, 근대 개화기의 부족한 지식이 아쉬움을 나타내게 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되돌릴 수 없고, 그런 아쉬움의 순간 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늘 외롭고 어려운 존재이다. 이는 역사를 쉽게 바라보거나, 쉽게 잊혀지는 존재가 아나리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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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5:40:18 *.99.120.184
혼란을 주어서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바쁜 와중에도 나의 질문에 답해주고 고민해주는 모습에 고마울 따름이다.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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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6.06 04:49:24 *.128.229.230
그대가 찾아 옮겨둔 길현모 선생님의 글에 감사합니다. 종종 극단적 민족주의가 반역임을 명심해라. 그것이 바로 폐쇄인 것이다. 일본인들이 만일 극단적 민족주의의 노선을 가고, 중국이 또 민족주의의 노선을 가게되고, 각 민족이 다 그 길을 가게 된다면, 세계는 각 민족의 민족주의의 '경쟁적 각축장' 으로 타락할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다.

"여행자만이 과거로 가는 경계선을 넘을 수 있다. 여행자란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 온 사람이다."
이 말을 기억하라. 배타성, 한 곳에의 집착, 시대착오, 모두 배움에 치명적인 적이다.

공부하여 의식을 갖춘 사람은 지적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지적 상품에 쉽게 현혹되지 마라. 현명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언어로 세상과 자신과 인생을 정의하고 싶어한다. 폭을 넓혀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균형이 잡혀야 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올바로 인식되어야 너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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