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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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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4일 18시 31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저서 : 가자, 아메리카로 〔 비봉출판사 2001 박정원 역〕
저자 : 리오 휴버만 〔1903 - 1968〕

리오 휴버만에 대해서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적어도 그의 노고와 사상과 생활이 구석구석 담겨있는‘WE, THE PEOPLE'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기 전까지만 말이다.
물론 솔직한 표현으로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휴버만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음을 시인한다. 저자에 대한 이력의 무지함은 나의 호기심을 지극하기에 충분했다. ‘좋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이력을 유추하는 놀이를 시작해 보자’
이러한 목적의식이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미국사 수업은 흥미진진했으며 생동감 그 자체였다. 그에 대한 한가지의 단서라도 더 찾으려는 목적으로 그의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려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은근한 욕심이 발동되어 그의 또 다른 명저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 리오 휴버 만은 이러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리라 -

1. 분명 노동의 현장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가 걸어온 경험이 바로 이야기 속에 녹아 있음은 부인 못할 것임을 확신한다.
2. 진보주의적 사고를 지녔음과 동시에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아울러 그는 대학이나 교육기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을 터다. (‘가자, 아메리카로’와‘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의 성실한 설명, 재미있는 이야기 방식)
3. 이 외에 몇 권의 역사서 더 썼을 것이다.
4. 역시 백인일 것이다.(그의 이름과 그가 지칭한 민중은 바로 가난한 백인이었음에서)
5. 그도 역시 미국적 생활에 익숙한 터라 지금까지의 다양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업이나 연구단체를 이끌고 있을 것이다.

- 조사를 통한 리오 휴버만의 이력 - 비교의 관점에서 미리 유추한 순서대로 나열해 감

1. 노동현장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노동 현장의 경험이 있었음: 진보회사 경비직을 비롯한 생산직 사원, 전기 기술자 보조원, 영업직 사원을 거쳐 노동연맹의 교육선전부장으로도 일함.

2. 진보주의적 사고를 지녔음과 동시에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 진보적 좌파(한 때 그의 저서는 우리 사회의 금서목록에 포함)요 마르크스주의자 대중 활동가이며 정치평론가. 사회주의 평론잡지인 ‘Monthly Review'의 발행인, U.S Week의 칼럼니스트(1941-1942)
→ 초등학교 교사(특히 초등 교사는 반 이야기꾼이어야 함) 그 외에도 몇 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음(혁명적이고 실험적 학교에서 학생들을 기르침)

3. 이 외에 몇 권의 역사나 노동 관련 저서가 더 있을 것이다.
→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 자본주의 발생에서부터 쉽고 세세하게 기술해감 자본주의의 역사흐름을 이야기 해줌)
→ 경제사 책 ( Man's Worldly Goods)
→ 위대한 버스 파업
4. 역시 백인일 것이다
→ 유태인 부모, 유태교인, 중하층계급가정에서 성장
5.기업이나 연구단체를 이끌고 있을 것이다.
→ ‘Monthly Review'의 발행인 겸 지필인
여기서 ‘Monthly Review'의 성격을 잠시 알아보는 것은 휴버만의 면모를 엿보는데 한 층 도움이 될 것이기에 잠시 이 잡지의 성격을 나열해 본다.

《다음 내용은 ‘가우리’에 실려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글임》
1) 미국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이성의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둠
2) 평이하고 어리석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함. 처음부터 먼슬리 리뷰의 논조는 중용을 지키고 신중하며 종교적 성향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정보를 제공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사상이 세련됐지만 양식은 단순하고 신중 명료함에 충실하면서 투명함과 성실함을 추구하려고 한다.

3)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미국 내 반대세력의 첫 번째에 섰다. 반대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힘이 필요하며 정부나 운동에서 조차 비판적이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고프고 소외된 이,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 기타 다른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4) 정치경제학의 기민한 실천을 꼽을 수 있다. 경제에 대한 독특한 명제의 전달은 가공할 만 하며 경제에 관한 종합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5) 현재를 장기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순간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에서는 극히 어려운 도전이며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는데,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이 일에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이론적 변덕과 중심 응시를 피하고 역사의 장기적 관점을 키웠다.

6) 증명된 국제주의다. 전세계의 움직임에 초점을 둠
순간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에서는 극히 어려운 도전이며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는데,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이 일에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이론적 변덕과 중심 응시를 피하고 역사의 장기적 관점을 키웠다.

저자를 먼저 가늠 해보고 글을 읽어나가는 순서와 역으로 책을 통해서 그를 가늠하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몇 마디의 말에서도 상대의 8할 이상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서도 상대를 파악 못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가늠한 내용이 실제의 그와 일치함이 많았다는 것은 그가 말로나 행동 ,글로써 자기를 나타내는데 일치감을 보인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먼슬리 리뷰를 통해서 그의 용기와 힘이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평을 하고 싶다. 그는 용기 있고 담대하며 작크 야탈리처럼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17]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미국의 해안가로 끌려 들어왔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운 지방에서 추운지방에서, 산지에서 평지에서 불모의 사막에서 비옥한 들에서, 폭 3,000마일, 길이 1,500마일의 이 거대한 자석은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인간을 끌어들였다.

[21]미국에 오기를 원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삯을 지불할 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선장에게, 그들의 배삯을 대신 값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몇 년의 기간동안 하인으로 팔리는데 동의 했던 것이다.

[23]‘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라들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멀고 낯선 땅에 정착하기를 꿈꾸게 했을까? 이민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렸기 때문에 ,보다 많은 빵, 보다 나은 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왔다.

[27]사람들은 왔다. 그리고 토지와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그들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고향에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다가 그들의 행운에 대해 썼던 것은 물론이다. 누구나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모험담에 는 흥미를 갖는 법이어서, 이 편지들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가며 읽혀졌다.

[33]시계가 밤낮으로 매 시간을 알릴 때마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제외한 여타 지역에서 출생한 외국인들이 100명씩 미합중국의 해안가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한 뒤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41]불결한 물, 부패한 음식, 부족한 식량, 극도의 추위와 더위, 인디언들에 의한 학살, 이것이 초기 정착민들이 흔히 처해있던 환경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버티었다. 그리고 다른 정착민들이 들어왔다. 점점 더 많은 정착단지가 들어서고 더 많은 이민들이 도착하면서 그들은 토양으로부터 한 나라를 조각내고 있었다. 그들은 ‘신세계’에 새로운 출발을 걸고 조국을 떠난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45]잎담배! 이것은 남부 식민지 중 가장 오랜 버지니아의 생활의 숨결이었다. 사람들은 잎담배로 말하고 생각하고 거래했다. 그곳은 농업지대였으므로 다른 작물들도 재배되기는 했으나 , 과일, 곡물 등에서는 경쟁 상대가 있을 법했던 것과는 달리 잎담배에서만은 단연 누구도 남부 사람들을 따를 수가 없었다.

[57]여자들과 아이들은 양털과 실 따위를 빗질하고 실을 잣는 일 등으로 항상 분주하다.
제일 꼬마로부터 제일 연장자까지 각자의 몫이 있어서 나름대로 의 밥벌이를 할 수 있다. 네 살만 넘으면 자기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68] 메사추세츠 주민들은 뉴욕과 코네티컷의 서부 지역으로 들어갔으며 코네티컷 주민들은 펜실베니아로 옮겨갔다. 미국이 이동하고 있었다. 한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랑의 기질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온 가족을 이끌고 서쪽의 변경지대로 갔다. 그곳은 억눌리고 짓밟혀 온 가난한 사람들의 ‘약속의 땅’이었다. 땅, 그것은 독립과 부를 향한 열쇠였다. 그들은 땅에 굶주려있었다.

[70] 개척자는 ‘바보라 하더라도 현인이 옷을 입혀 주는 것보다 혼자서 더 잘 입는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황야를 지배하게 된 지금 어떠한 상류계급의 명령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일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76] 식민지, 식민지를,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해야 했다. 모국을 제국의 중심으로 하고 식민지들을 모국상품의 소비시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를 갖는 것은 또 다른 이득이 있었다. 각 모국마다 수입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사들이는 데 모국에서 금이 나간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모국이 식민지로부터 필요한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다면 금이 제국 밖으로 흘러나가 다른 경쟁국을 부자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결 방법은 모국과 여러 식민지들로 거대한 제국을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76]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의회는 돈 많은 지주, 상인, 제조업자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물론 그들은 위에 말한 모국과 식민지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의회의 위원회 중 하나였던 무역 및 플랜테이션 위원회는 이렇게 보고했다. “북미 대륙의 식민지화는 그 주된 목적이 왕국의 상공업을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607년에서 1763년까지 156년 동안 의회에서는 모국에 유리하도록 식민지의 무역을 통제하는 많은 법들이 제정됐다.

[79] 매사추세츠 총독 프란시스 버나드 경은 이 모든 계획을 명료하게 요약했다. “아메리카 무역에 관한 대영 제국의 두 가지 큰 목표는 (1)아메리카의 신민들로 하여금 제국이 공급할 수 있는 일체의 공업제품과 상품을 오직 제국으로부터만 수입할 수 있게 하는 것과, (2)아메리카의 외국 무역을 통제하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이익은 제국으로 돌리거나 또는 제국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80] 제정되는 법마다 모두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제정된 무역법들 중 어떤 것들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돼있었다. 어떤 무역법들은 그들에게 손해를 가져왔다. 그들은 손해를 가져오는 법들은 부분적으로 지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렸다.

[87]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그러한 전사의 감정적인 번영은 오래 가지 않았다. 1763년 전쟁이 끝나자 경기는 갑자기 폭락했다. 군대는 해산됐고, 프랑스인들의 식량 소비가 갑자기 중단됐고, 물가는 떨어졌다. 몹시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때야말로 서부로 이주해 가서 처음부터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시기였다.

[106] 1775년 4월 19일, 게이지 장군은 콩코드에 있던 식민지의 군수품을 압수하기 위해 일대의 제국 병력을 파견했다. 폴 리비어와 라피스 도오즈가 뛰어다니면서 그 지방 주민들에게 이 소식을 퍼뜨렸다. 게이지의 군대가 콩고드로 향하던 중 렉싱턴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소수의 식민지 주민들로 구성된 일단의 군대를 만났다. 총이 발사됐고, 전쟁이 시작됐다.

[108] 1776년 1월 10일, 토마스 페인은 ‘상식’이라는 팜플렛을 발간했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꾸밈없고 솔직한 필체로 Tm여진 것이었다. 많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페인의 생각은 새로운 것이었다. 간혹 독립이라는 생각을 한 번 쯤 떠올려 본 사람들도 있었다. 페인은 민중에게 최후의 일보, 즉 영국으로부터의 완전 분리를 향한 마지막 걸음을 내닫을 때가 이르렀음을 역설했다.

[115] 그 무렵 영국에서는 애초부터 식민지 주민들과의 싸움에 회의적이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이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이 불행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몹시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를 원했다. 제국군은 귀향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독립전쟁은 끝났다. 미국은 식민지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117] 독립선언문은 1776년에 작성되었다. 10년 후 2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는 한정상속법이 사라졌다. 15년 후에는 모든 주에서 장자상속법이 사라졌다. 혁명은 미국을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상류계급의 지배라는 구세계적 사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장자와 다른 아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했다. 소수의 손에 언제까지나 묶여 있는 거대한 토지가 아니라, 자신의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소유하는 작은 땅이 새 시대 미국의 제도가 되어야 했다.

[120]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 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121] 미국 의회는 영국의회와 같아서는 안됐다. 미국 의회는 명령할 수 없었다. 구걸해야 했다. 각 주는 주 내에서의 주 의회 의원들을 선출한다. 주 의회가 주를 다스리는 권한을 갖는다. 연방의 의회는 간섭할 수 없다. 그러한 제도는 외부의 강력한 정부로 말미암아 극심한 불행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던 나라, 그런 정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전쟁을 치른 적이 있는 민족으로부터 기대될 수 있는 것이었다.

[129] 민중이, 말하자면 재산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142] 한 장소에 도착하여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영구적으로 머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만에! 더 서쪽으로 가면 좋은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곧바로 이동할 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동하다가 정착하고, 나중에 온 사람에게 땅을 팔고, 그리고는 다시 이동했다. 이동한다는 것은 그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천성이었다.
[142] 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라더포드 B.헤이스의 얘기도 있다. 그는 어떤 남자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그 남자는 하도 자주 이동을 한 탓에 그의 가축들까지도 길이 들어 있었다.

[144] 1875년 나는 험하고 산이 많은 오체고 지방을 방문했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고, 길의 흔적도 나 있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고, 그곳은 집에서 30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내게는 빵도, 고기도, 어떤 종류의 음식도 없었다. 불과 낚싯대, 이것이 내가 갖고있던 유일한 생활수단이었다. 개울에서 송어를 잡아서는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말은 개울가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 먹었다. 방한코트 속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다만 적막한 황야뿐이었다.

[147]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에 항상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림 개척민들이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없었고 드문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는 했다.

[150] 서부인들은 인심이 후했다. 그들의 태도는 거칠고 무뚝뚝해 보였으나 길을 잃었거나 여행길에 지친 나그네는 항상 그들의 볼품없는 오두막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나누어 가질 줄을 알았다. “쉬어 가도 좋소”라는그들의 말만으로는 별로 환영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겠지만, 그들은 말로 겉치레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152]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발명가가 된다. 동시에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된다. 개척자는 다방면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가 적응해야 했던 상황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 적응했고, 따라서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153] 개척자들의 생활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는 화려한 것을 혐오했다. 그는 꾸밈을 싫어했으며 그의 태도는 직선적이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주적이었고, 강한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과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황야에서의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174] 서부는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농민들로 이루어졌다. 서부인들은 가난했고, 빚을 지고 있었으며, 돈이 필요했고, 그들의 상품을 팔기를 원했다. 선거가 다가왔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들과 같은 사람에게, 그들의 문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쏠렸다. 그들은 서부인을, 한때 그들과 같이 가난했던 사람을, 변경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던 사람을 선출했다. 그는 그들과 같이 자신의 두 손으로 일했던 거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과 같이 인디언과 싸웠던 용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찾아갔던 강인한 살마이었다. 배운 것이 없어 무지하고, 용맹스럽고, 과격한 기질과, 두 주먹의 무사. 그들처럼 살고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옳다고 믿는, 그들과 동류의 인물. 서부인들은 그들의 위력을 증명해 보였다. 1828년 앤드류 잭슨의 승리는 서부인들의 위대한 승리였다.
[180] 그들에게 ‘머나먼 서부’는 제집 같이 낯익은 곳이었다. 초원의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거나 깊은 산중에 떨어뜨려 놓는다해도 그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길잡이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변화없이 지극히 단조로운 초원에서도, 산중의 가장 복잡한 미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어떠한 위험도 어떠한 어려움도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없다. 또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불평하는 것을 경멸한다.

[190] 역시 오하이오 출신의 다른 하원의원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가리켜 “죄없는 민족과의 타당한 또는 정당한 이유 없는, 정복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다. 나는 어떠한 협조도, 어떠한 지원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멕시코 주민의 피에 나의 두 손을 적시지 않을 것이며, 미국군에 의해 그곳에서 행해져왔고 앞으로도 행해질 살인행위에 가담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3] 인디언들에게 들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들소는 그들의 식량이 되었고, 옷이 되었고, 집이 되었다. 산타페의 상인 그렉은 들소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이 짐승은 초원의 인디언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식량 공급원일 뿐 아니라 그들의 오두막 지붕을 덮는 데 쓰이며, 그들의 옷은 대부분 그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그들의 침구, 로프, 고기를 넣는 주머니 등이 들소 가죽으로 만드러지며, 그 힘줄은 활줄, 그리고 정강이받이, 신발 등을 꿰메는 데 쓰인다.” 인디언의 생활은 들소로 싸여 있었다.

[195] 그들의 주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텍사스 코뿔소들은 아주 강인해서 수백 마일을 걷고도 끄떡없었으며, 물을 먹지 않고도 장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고도 바닥이 흔히 유사인 강들은 건널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었다. 코뿔소 주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언제 무리 밖으로 뛰어 달아날지 모를 이 야생의 길들지 않은 동물들을 다룰 줄 아는 솜씨좋고, 담대하고, 민첩하고, 강건한 기수들이 출현했다.

[200] 풍차는 평원에서 낯익은 모습이 되었다. 풍차는 일부 농민들과 목장주들의 급수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풍차가 없는 서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관개와 건조농법으로 부족한 물 문제를 해결했다. 아직도 평원에는 농지로는 전혀 적당하지 않지만 소나 양의 사육은 가능한, 그리고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많은 지역들이 있다.

[204] 1765년에서 1789년에 이르기까지 영국 의회에서는 일련의 엄중한 법들이 제정되었다. 새로운 기계 및 그 기계의 설계도 또는 모형을 국외로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기계를 조작하는 숙련노동자는 국외로 나갈 수 없었다.

[207] 기계를 돌릴 동력이 필요했다. 그 지역에는 물살이 빠르고 수많은 폭포들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강들이 있어 기계를 돌릴 동력을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급류를 몰고 흐르는 강물에서 기계를 돌릴 모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213] 미국인들이 인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했던 또다른 방법이 있었다. 일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은 그 일을 대신할 기계들을 발명했다. 각종 기계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명되고 있긴 했으나, 미국인들이 그 뛰어난 착상력으로 고안해 낸 노동절약적 발명들은 숫적으로 많았을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215] 영국 공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 이주민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이곳의 노동조건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만족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언제나 노동력이 흔했으므로 초기 시절부터 노동자는 좋지 않은 작업환경에서 긴 시간을 일하고 기아임금을 받아왔었다. 미국에서는 항상 노동력이 부족했으므로 노동자를 공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비교적 높은 임금
이 지불되었다.

[217] 자본가는 돈을 벌기 위해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이상은 최저의 생산비를 들인 상품에 대해 최고의 가격을 받는 것이다. 생산비가 최저일때 이윤은 가장 커진다. 노동자의 임금이 낮을수록, 상품의 생산원가가 낮을수록 그들의 이윤은 높아지는 것이다.

[224] 아프리카에 갓들여온 흑인들은 백인들의 습성을 배우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래서 미국에서 그의 후손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흑인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인들은 흑인들이 배울 능력이 없는 것으로 잘못 믿고 있었다.

[226] 노예주인이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많은 노예들을 사용하여 천편일률적인 작업을 시키고, 감독을 두어 그들을 감시하게 하고, 유일작물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플랜테이션 제도였다.

[234] 사람들의 유언장에서 변화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종전에는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에 가장 안전하고 적당한 재산이 토지와 가축이었는 데 반해, 1850년대에 와서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에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가치있는 재산은 노예들이었다.

[240] 노예의 임대는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노예주인은 돈이 필요할 때면 일손을 필요로 하는 농부에게 돈을 받고 그의 노예들을 빌려 주었다. 그 돈은 물론 주인에게 돌아갔다. 노예의 임대가격은 일손이 급히 필요한 정도와 빌릴 수 있는 노예수에 따라서 높기도 하고 낮기도 했다.

[244] 뉴올리언즈의 ‘아메리칸극장’에서 우리 일행이 관람했던 연극에는 한 노예가 등장하는데, 그의 대사 중 하나가 “나는 생각하고 느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250] 노예 폐지론자들은 북부와 남부간에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반노예제도 단체를 조직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내용의 책자를 써서 각처에 배포했다. 이같은 책들의 수입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남부에도 일부가 밀수입되었다.

[251] 그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백인이 주인이고 흑인은 노예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성장했다. 그런 관념은 습관처럼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

[262] 북부의 많은 사람들은 남부가 따로 독립하려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링컨은 달랐다. 그는 나라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예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치른다 하더라고 미 연방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67] 유럽이었다면, 왕이 막대한 부의 창고를 소유했을는지도 모른다. 또는 광대한 토지가 어느 귀족가문에 수백 년에 걸쳐 소유되어 전해질 수도 있었다. 또는 교회가 많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국토의 약 절반 가량을 농부 개개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는 해를 따라 2백년간이나 서부로의 행진을 계속해왔던,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국토의 나머지 절반은 미국 국민의 재산이었다.

[269] 자원, 인력, 기계, 그리고 자본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울려 미국을 세계 제일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남북전쟁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원동력 구실을 했다. 그들은 천연자원과 노동력과 자본을 합성하여 현대의 미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을 개발했다. 때로는 정당한 방법으로, 때로는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은 부자가 되었다.

[279] 사실상 미국이 세계적인 공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을 가히 세계의 곡창으로 만들었던 미국 농업의 대대적인 확장이 주된 원인이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해외로 수출되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수입품을 수입하는 데 지불될 수 있었다. 구세계의 자본가들에게 나날이 늘어가는 빚을 미국이 갚을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농업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292] 정부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유층이 잘살도록 법을 만들어 놓으면 그들의 번영이 넘쳐 아래 사람들에게로 흘러내려 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주당이 갖고 있는 정부의 개념은 대중을 잘 살게 함으로써 그것을 발판으로 그들의 번영이 위로 모든 계층에 골고루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01] 이민들은 또 다른 면에서 미국을 대공업국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들은 값싼 노동력의 무한한 공급원이었다. 남북전쟁 중 북부의 제조업자들은 의회에 압력을 가하여 예약이민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을 근거로 그들은 해외에 대리인을 파견하여 외국의 근로자들을 뱃삯이 갚아질 때까지 임금을 받지 않고 미국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조선으로 계약을 맺고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316] 의회는 셔먼 법을 트러스트에 대한 국민의 무기로 제정했다. 그러나 법원은 셔먼 법을 흔히 노동조합에 대한 고용주의 무기로 해석했다.

[318]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운명을 자본가의 손에 맡기도록 만들었다. 고용주는 공장과 값비싼 기계를 갖고 있었다. 근로자는 더 이상 자기가 먹을 양식을 생산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었다.

[322] 남북전쟁 이후 대기업의 성장은 노동조합운동의 물결이 거세어짐을 의미했다. 산업의 확장은 근로자의 도시집중의 증가와 전국적인 조합의 조직에 필수적인 교통 운수 기관의 개선을 가져왔으며 또한 노동운동에 절실히 요구되는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333] 고용계급은,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세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합에 반대했고, 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미국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쟁들 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고용계급이 노동조합을 부인하고 조합과의 단체교섭을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348] 각 부문을 지배하는 거대한 주식회사의 소유주와 이 주식회사들을 지배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의 손으로 머지않아 국가의 대부분의 권력과 부가 집중되리라는 놀라운 사실은 이미 명백한 것이었다. 국가의 부의 지배에서 정부의 지배로 이르는 것은 단 한 걸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352] 미국 자본가들은 그들의 수중에 잉여생산물만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중에는 잉여자본도 있었다. 신생국에서 토지광산철도 등이 막 개발되기 시작할 무렵이면 다른 나라들의 자본가들은 국내에서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찾아 신생국의 개발에 그들의 돈을 투자한다. 이런 일들은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다.

[372] 미국의 경제제도는 노령에 접어들어 있었다. 미국의 경제제도는 일찍이 생산력의 해방과 개발을 전례 없는 정도까지 끌어올리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했었다. 더욱 더 많은 이윤과 자본을 위한 더욱더 많은 이윤과 자본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미국의 경제체제는 그 기능을 수행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잠재력을 완전히 소진해 버린 것이다.

[385] 뉴딜 정책은 이윤의 획득을 주 목적으로 하는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를 바꾸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이다. 뉴딜정책은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전복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고용주는 여전히 옛날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근로자 역시 옛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390]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 단순한 원칙은 미국민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예전에는 굶주리도록 허용됐다. 후버 대통령이 정부의 구호사업을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철도 은행 보험회사 등을 위한 구호였다. 후버는 정부의 구호를 요청하는 빈민들의 호소에 대해서는 귀를 막았었다.

[398] 사회보장법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 법은 기획면에서 많은 결함이 있었고, 일부는 시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보호를 필요로 하는 수백만의 인구가 외면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점은, 불안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의도로 제정되었던 이 법이 실은 전혀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낮은 생활수준을 보장했던 보장제도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뉴딜정책은 관념적인 혁명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다.

[409] 긴급한 사태는 긴급대책을 불러왔다. 미국의 산업기구 전반에 걸친 정부의 통제 계획이었다. 그것은 고용주와 근로자 모두에게 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기 위해 설계된 계획이었다. 고용주는 일부 독립 기업가들이 비밀리에 행했던 것을 공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권리, 즉 산업의 각 부문에서 살인적인 경쟁과 과잉생산,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가격하락에 종말을 고하기 위해 기업간에 협동할 수 있는 권리를 원했다.
[417] 공공사업에의 지출계획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비판되어야 할 점은 실제로 비판되었던 점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 계획이 부적당했던 것은 정부가 너무 많은 돈을 차입해서 지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가 충분히 많은 돈을 차입하지 않았고 지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36] 노동관계법은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피고용인에게 모든 것을 준 반면 고용주의 두 손을 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본 법은 오직 한가지 면에서만 고용주의 행동을 제한했다. 즉, 고용주의 행동이 근로자의 조직권 및 단체교섭권과 충돌하는 데에만 제한을 가한 것이었다. 고용주는 여전히 그의 근로자를 차별대우할 수 있었고, 임금을 깎아 내릴 수도, 능률 제도를 도입할 수도,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도, 공장을 폐쇄하고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444] 다행히도, 그 작업으로부터 움츠러들지 않았던, 오래되고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조직 근로자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것이 행해지지 않는 한 기존 조합들의 힘과 안전이 흔들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현명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기 위해서 그들의 전략과 전술을 변경할 만큼 창의력이 풍부했다.

[454] 미국민의 눈에 비친 대외정책의 주요 문제점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에서는 반전 감정의 풍조가 고조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458] 우리의 대외정책은 상충하는 세력들의 총 복합적인 산물이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가도, 어떠한 명확한 계획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지지하지 않았다. 어떤 기업은 그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종전보다 훨씬 강력히 일본의 세력을 억제하기를 원했다.

[460] 좀 더 멀리에서 본다면, 뉴딜의 대외정책이 비능률적이었던 원인은 행정부 내에서 작용했던 주관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열강의 모순되고 변화하는 세력배치 안에서의 미국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이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473] 라틴아메리카 제국이 미국 국무성과의 우호관계를 해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이 좀더 민주적이 되는 길인 듯 했다. 미국과 멕시코와의 외교적 곤경은 카르데나스 정부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다는 이 그 주된 요인이었다.

[473] 라틴 아메리카 제국에서의 선린정책의 길은 평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던 데다가 그들과의 관계를 담당하고 있던 직업외교관들도 달려 외교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대기업에 우호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비민주적 전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476] 미국 무역정책의 기본적인 약점은, 그것이 정치적 수단으로서 이용될 수 있었던 만큼 효과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미국 시장은 다수의 주요 무역국들에게 경제적인 고려 대상으로서 일류급이었다. 한편, 미국의 수출은 종종 그들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흥정에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무기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485] 뉴딜의 철학은 노동자계급과 중산계급, 그리고 부분적으로 소수의 비교적 양식있는 자본자들에게 미친 경제력의 압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중산계급은 종래의 생활양식에 불만이었으나 정확히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고 있었으나 너무 큰 변화를 원하지는 않았다.

[492] 민중은 뉴딜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들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뉴딜이 급속히 한낱 과거의 기억으로 퇴색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그들은 그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똑 같은 대상을 놓고도 각자가 걸어온 길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대상’이라는 것에 다양한 색채로 덧칠을 한다. 리오 휴버만의 가자, 아메리카로 WE, THE PEOPLE은 나를 통해서 벌써 두 세 번은 덧칠 되어졌다. 엄격히 말하자면 내가 이 책에 두는 초점이 몇 번은 이동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초점의 이동은 내용에서 저자로 그리고 또 다른 파생물로의 이동도 포함된다. 이러한 나의 관점이 아직도 몇 번 더 변할 여지를 남겨두고 간략하게 내가 덧칠해 나간 색채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1).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역사 수업의 형태를 책으로 옮겨 놓은 것

내가 변화경영연구소의 문을 두드린 첫 번째 이유는 ‘나를 새로이 발견하자는 것’도 아니고 ‘글이나 책을 써보겠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납득이라는 것이 가지 않는,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푯말을 등에 업고 가르치는 아이들을 나의 좁디좁은 세계 속에 가두고 있지는 아니 한가!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변경에서의 머뭇거림은 나의 심신을 괴롭혔고 급기야는 학교를 떠나야 겠다는 결심으로까지 몰아갔다. 더 늦기 전에 내가 가진 틀을 과감히 부수고 싶었다. 다시 학생이 되고 묻고 답을 구하고 나아가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향해 아이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그 갈망은 강렬했고 절박했다.
리오 휴버만을 바라본 첫 번째 관점은 그가 가르침에 대한 의식의 전환과 방식에의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나도 그렇거니와 많은 사람들은 상황이 자기의 뜻과 같지 않을 때는 곧잘 ‘내가 변화되지 못함에 대한 자기 성찰보다는 제도나 타인의 탓으로 쉽게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우리는, 그는 안주하고 말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혁명적 교사며 열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을 품지 않고는 결코 내가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타고난 ’꾼‘이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학습방법을 연구한 결과로의 ’꾼‘이 된 것이다.
나는 한 주간 그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신명나는 수업에 참석한 학생이었다.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위에 집짓기 놀이를 하기도 하며 때로는 면화 농장에서 고된 일과를 보내기도 했다. 간혹은 그가 그려내는 그림(삽화)에 우울함이 묻어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구수한 재담에 충분히 묻힐 수 있었다. 어느 때는 수업의 흐름이 그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방만하게 흘려가는 때도 있었지만 그가 젊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찌 그에게 찬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있으랴. 그 많은 실감나는 인용구를 위한 책이며 잡지를 도대체 어떻게 구했을까. 도표며 그림을 그려내는 솜씨는 언제 익혔을까? 그의 거칠 줄 모르는 가르침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 시점에서 나 자신을 질책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립문을 터주고 함께 잠깐의 외출을 시도하기도 했던 나(我)이지 않는가? 타인을 사랑함은 나를 지극히 사랑함에서 출발된다는 것. 리오와 같은 교사가 있었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한다.

2. 노동의 현장을 함께 했던 저자로 에의 초점

휴버만은 유태인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정의 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었음인지 아니면 유태인 특유의 가정교육 영향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나이 11살 때부터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 후 그는 음료회사를 비롯한 전기 기술자 보조원 회사 경비직 등의 여러 현장에서 그의 인생의 폭을 넓히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애착을 깊이를 더했다. 나 또한 그 시기에 대한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10대 초반에 일일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견습공이 아닌 숙련된 일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고용주의 세심한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품삯도 어른 품삯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대학 입시를 끝내놓고는 어페럴 공장에 새벽 6시경에 출근해서 저녁 7시에 퇴근했으며 그 외 미술학원을 비롯한 많은 현장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노동’이라는 것을 다양한 형태로 쏟아내었다. 노동현장에 대한 나의 이러한 경험은 ‘일’을 신성시 하게 된 밑거름이며 오히려 ‘재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의 늪으로부터 다소 멀어질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그가 풀어나간 미국의 역사 시간의 숨은 흐름은 일종의 노동의 역사 방식이라는 생각이 미친다. 수많은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찾아 나선 시작 부터가 그들이 가진 ‘노동’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흑인 노예며 민중이라는 가난한 백인들의 이야기도 결국은 노동의 방식을 이야기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 또한
‘백인 노동자의 입장’이라는 다소 편협된 입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P238〕흑인들 조차도 그들을 멸시했다.- 이 말은 흑인들은 이미 이야기의 상대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 그러나 이는 험 잡기 위한 험에 불과한 것이다.

3. 리오 휴버만을 통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대한 성찰

〔 미국 역사를 신명나는 이야기 마당으로 받아들인 나는 왜 아픈 우리역사를 회피하려고만 들까? 언제 쯤 우리 역사를 보듬을 수 있을까?〕

우리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는 나다. 물론 우리들의 피붙이에 대한 강한 애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픔에 대한 ‘회피다 아예 가슴 저린 기억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의 근원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임이다. 한 때는 중국의 동북 공정 프로젝트에 분노하고 그와 관련한 여러 형태의 세미나에도 참석하는 열정을 가졌지만 내가 내 상처를 만드는 일이였기에 어느 선에서 접었다. 왜 사실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질책을 떠나서 감정을 추스르고 나의 조상이, 우리들의 선조가, 우리 보다 앞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길을 냉정한 눈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를 리오의 이야기에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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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4 16:52:07 *.99.241.60
우리 역사에 대한 부분은 늘 가슴이 아파오네요.
반만년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중요한 순간마다
나라와 백성보다는 통치자나 관리자들이 자기 개인적인 이익만
고집하다가 잃어버린 역사가 많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또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계속 이어져 오면서 어느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운
시기가 계속되기도 하구요
암튼 많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Carr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이기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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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5.14 18:34:49 *.114.56.245
아픈 상처까지도 껴안고 나가는 변경인이 되고자 합니다. 작은 발걸음이, 현재의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 그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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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근
2007.05.18 10:11:09 *.124.218.100
샬롬! 며칠전에 시작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고 어제 밤에 읽다가 역시 환경에 의해 중간에서 접고, 이제 겨우 다 읽었습니다. 서포터즈라는 것이 책을 같이 읽고 고민하고 느껴서 그 생각들을 나누며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데, 쌤께서 올리신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내것으로 순화시키는데는 상당히 버겁네요. 비겁하지만, 아주 비겁하지만 올리신 글들만이라도 열심히 읽고 소화시키는 훈련이라도 제대로 해 보겠습니다.
특별히 이부분이 저에게는 큰 깨달음이 되고 변화의 단초를 제공해 주네요. "개척자들의 생활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는 화려한 것을 혐오했다. 그는 꾸밈을 싫어했으며 그의 태도는 직선적이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주적이었고, 강한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과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황야에서의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개척자" - 저도 이들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며 자주적인 그러면서 강한 집념을 소유한 자가 되도록 가열차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너무 잘 읽었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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