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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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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5일 10시 55분 등록
[가자, 아메리카로!] 미국사의 경영학적 재해석

<가자, 아메리카로 (We, The People)>은 리오 후버만의 저서들 가운데 단연 수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진보적 좌파 역사학자인 저자가 초등학교 교사였던 시절 초등학생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미국 역사책에 절망한 나머지 영웅들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의 역사를 풀어쓴 책이다. 1932년에 출판되자마자 오히려 일반 성인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얻었다. 그래서 1940년 성인용으로 개정돼 영국에서 다시 출판되었고 1947년에 내용을 추가하여 미국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29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 출판된 것은 1947년도 판이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역사책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통념을 일시에 무너뜨렸으며 책을 한번 들면 놓기가 싫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낱개로 흩어져 있던 미국사에 대한 퍼즐을 이 책을 통해 맞출 수가 있었다. 퍼즐을 맞추어 본 사람이라면 맞출 때까지 머릿속을 헤집어 놓던 난해함이 한꺼번에 해소될 때의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 제목은 (We, The People)이지만 한국 번역판은 <가자, 아메리카로!> 로 다소 엉뚱하게 번역되었다. 원제목의 의미는 미합중국 헌법의 첫 문장이라고 하는데 번역판의 제목을 책의 첫 장인 <가자, 아메리카로!>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팅 측면일까 아니면 금서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한 것일까. 아무튼 역사책의 정사가 아닌 야사로 기존의 위인이나 사건 중심의 내용에서 탈피하여 민중과 인과관계 중심의 새로운 구성은 독자들에게 재미와 통찰력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미국의 과거와 현재가 매우 뚜렷하게 보이며, 미국과 관련된 일들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훨씬 커지게 될 것이다. 출판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독서로 지정되는 것을 보면 스테디셀러가 되는 책들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1. 저자에 대하여


리오 후버만(Leo Huberman)은 언론인이자 학자이며 노동운동가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다. 1903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태어나 1926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33-1934년에는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1937년 뉴욕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대학 사범대에 설치된 실험적 학과인 뉴칼리지의 사회과학과장을 1938-1939년에 지냈고 1940-1941년에는 자유주의 신문 `피엠(PM)'의 노동 담당 편집자였으며, 1941-1942년에는 `유에스 위크(U.S. Week)'의 칼럼니스트였으며, 1942-1945년에는 전국해운노조의 대외관계 및 교육국장이었다. 또한 1945-1946년에는 레이널 앤드 히치콕(Reynal and Hitchcock) 출판사의 실험적 팜플렛 담당 편집자를 맡았다. 발기인이며 대중 활동가이며 정치평론가인 그는 1968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 그의 일생을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에 쏟았다.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는 1949년에 폴 M 스위지와 함께 창간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잡지이다. 저자의 아내 거트루드 헬러 후버만(Gertrude Heller Huberman) (1902-1965) 또한 이 잡지와 일생을 보냈다. 그녀는 12명의 남매 가운데 막내였는데, 부모와 함께 3살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으며, 먼슬리 리뷰의 경리와 구독자 관리 담당이었다. 1925년 리오와 결혼했으며 이 일을 맡기 전에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산업민주주의동맹(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의 부기 담당이었으며, 노동진보본부(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의 롱아일랜드 보육학교 교육부 관리자였다. 처음 3년 동안 이 잡지는, 그린위치 빌리지의 배로 거리에 있는 두 사람의 3층 아파트와 마사 포도원에 있는 그들의 여름 별장에서 발행됐다. 이 때문에 여름별장 차고가 임시 사무실이 되기도 했고 매달 잡지가 가득 든 가방을 우체국에 끌고 다니기도 했다.

저자의 사상은 일생을 같이 한 먼슬리 리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창간 첫 호부터 먼슬리 리뷰는 당시 지배적이던 생각, 즉 관리를 잘 하면 자본주의는 무한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계급 착취와 사회적 필요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조직에 반대했다.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은 가난함과 부와 수입의 불평등, 인종탄압, 제국주의, 낭비는 자본주의 사회가 물려받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재적인 것이며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유지했다. 당시 지배적이던 자유주의적 가정에 반대하면서 사회적 불합리와 부정은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틀 안에서라면 좀 더 나은 정책을 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했다.

이러한 잡지의 취지 때문에 미국 정권에 탄압을 받았다. 1952년 매카시와 FBI의 에드가 후버가 함께 이끈 미국의회의 ‘비미국적 활동에 관한 하원 청문회’에 소환되어 사상검증의 치욕을 당했다. 폴 스위지는 1953년 뉴햄프셔 검찰에 소환되어 투옥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과 발언, 잡지 출간에 대한 추궁에 답변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당시 먼슬리 리뷰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겉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발송하고 기고자들도 실명을 사용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대개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참고하고 있으며, 각종 노동 단체에서도 교육을 할 때 그의 책을 교과서로 삼다시피 하고 있을 정도이다.

1953년 리오 후버만은 매카시의 정부 운영에 관한 상원 조사 소위원회에 소환됐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책에 대해 조사 받았다. 조사 대상 책의 상당 부분은 외무부가 도서관 비치를 위해 구입했다. 다른 많은 증인들이 하듯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기 않을 헌법의 권리에 호소하는 대신 그는 공산당원인 적이 전혀 없다는 말 이외에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는 헌법의 언론의 자유 부분에 기초한 행위였다. 그의 태도는 `브리티시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the British New Statesman and Nation)'에게 칭찬을 받았다.

리오 후버만이 남긴 짧은 글 하나를 통해 그의 사상을 살펴보자.

『좌파가 지금처럼 허약하고 산산 조각난 현실에서도 우리가 (미국)정치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아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약간 완화하고 약간은 수용하고 약간은 타협하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이제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우리의 말에 세상이 귀 기울이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귀 기울일 가치가 없게 변질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가르치자. 어디에서든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든지, 소수의 사람 앞에서든지. 우리의 운동 규모가 작다고 걱정하지 말고, 운동의 질을 더 생각하자. 연구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복음을 널리 전하는 투쟁을 벌이자. 황금의 법칙을 만들어 그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을 이해할 자질을 젊은 세대들이 갖출 수 있도록….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일부를 잘라내 버리지도 않고, 겁을 내 피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본 데로 이야기할 때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을, 전체 진실을 이야기하자.

- 리오 후버만(Leo Huberman)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1956년 1월호(1997년 2월호 인용문을 옮김)』

<가자, 아메리카로!> 책은 그가 29살 때 출판된 대중적인 미국 역사책이다. <사람의 세속적인 재화(Man's Worldly Goods)> (1936)는 50만권 이상 팔린 일반 경제사 책이다. 그 외에 <쿠바 혁명의 해부 Cuba Anatomy of Revolution> (폴 스위지와 공저), <베트남: 끝없는 전쟁 Vietnam: the Endless War>,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Socialism>(국역: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동녘, 1986>, <노동조합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Unions>, <노동 스파이의 부정한 거래(The Labor Spy Racket)>(1937)와 <위대한 버스 파업(The Great Bus Strike)>(1941)도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9] 이민 초부터 1929년까지, 미국은 젖과 꿀만이 아니라 강철과 석유가 흐르는 ‘약속된 땅’이었다. 그곳은 유럽의 가난한 이들이 부를 위해 찾아온 풍요의 땅이었으며, 억압과 압박을 받던 이들의 피난처이자 자유의 땅이었다.

[9] 초기 개척시대로부터 경제가 활기를 띠게 된 1929년까지의 비교적 긴 시기가 된다. 그것은 갖가지 역경 속에서 용감한 남자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어린이들의 노력으로 한 나라가 형성되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은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경제적 대확장의 역사이다. 그것은 대기업의 낙원인 미국에 있어서의 대기업의 전설이다. 그것은 점점 강력해지는 독점 자본의 힘에 관한 이야기다.

[10] “미국은 약속의 땅이었다.”그러나 그 약속은 최근까지도 오직 정상의 사람들에게만 실현되었다. 그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메리카의 꿈은 분명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을 하루 빨리 실현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7]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25] 무엇이 이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멀고 먼 낯선 땅에 정착하기를 꿈꾸게 했을까?

[25] 이민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굶주렸기 때문에 보다 많은 빵, 보다 나은 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왔다. 미국은 그들에게 그것을 줄 수 있었다. 유럽은 늙었고 미국은 젊었다. 유럽의 토양은 오랜 세월 동안 갈아먹은 것이었지만, 미국의 땅은 아직 사람의 손이 닿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처녀지였다. 유럽에서는 토지가 소수의 몇 사람들, 즉 상류계급의 수중에 들어 있었으나, 미국에서는 누구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43] 이들 최초의 이민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미 대륙의 동해안 가의 각각 다른 지역에 상륙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일을 이룩해 놓을 것인가에 관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접하게 된 환경-강, 토양, 해안선, 기후 - 다시 말해서 지리적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정착 단지의 이민들이 종사하고 있었던 생업은 각 지방의 지리적 환경에 크게 의존했다. 세로 지역의 남쪽 끝에서는 플랜테이션 방식의 농사를 지었고, 북쪽 끝에서는 고래잡이배로 7개 바다를 누볐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한 결과가 있게끔 작용했던 결정적인 지리적 원인들이 있었다.

[56] 뉴잉글랜드인들이 흑인 노예의 사용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가 필요 없었을 뿐이었다. 후에 흑인 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었을 때 남부에서는 피부색이 검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북부에서는 반대로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적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61] 유럽인들은 어느 정도 그들이 익숙해져 있던 형상대로 이 땅을 조각했다. 그러나 이 땅의 자연이 그 모습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 무언가를 행하고 있는 동안, 이 땅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행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민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 미국인으로!

[62] 모든 식민지 주민들은 계급과 소유재산에 따라 일정한 권리가 있거나 없거나 했다. 계급과 재산. 그것은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 거의 항상 따라다녔다.

[67]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사고방식은 변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이러한 사상이 논의된 바는 있었으나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것은 후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매우 중대한 사상이었다.

[67] 바로 그것이었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변경으로 왔다. 살고 있던 곳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계약 노동자들,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들, 구 정착지에서는 발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야심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68] 미국이 이동하고 있었다. 한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랑의 기질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온 가족을 이끌고 서쪽의 변경지대로 갔다. 그곳은 억눌리고 짓밟혀 온 가난한 사람들의 ‘약속한 땅’이었다. 땅-그것은 독립과 부를 향한 열쇠였다. 그들은 땅에 굶주려 있었다.

[75]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국가가 소지하고 있는 금의 많고 적음이 그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고 믿고 있었다. 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운 좋게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낸 다음, 그들은 금광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므로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들을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금광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남미에서 이러한 방법을 써서 큰 수확을 올렸다. 그러나 인디언들이라고 해서 날마다 금광을 발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더 나은, 더 확실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은 상품 수출이었다. 물건을 팔고 있는 한, 돈은 자연히 흘러들어올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을 한 것은 영국뿐만 아니었다.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결같이 자국 상품의 수출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 수출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시장이 있어야 했다. 식민지, 식민지들,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해야 했다. 모국을 제국의 중심으로 하고 식민지들을 모국 상품의 소비시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109] 식민지는 제국을 떠났다. “미합중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114] 얼핏 생각하기로는 강력한 영제국이 미국을 차례차례 손쉽게 정복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은 제국 병사들이 승리에 별로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군에 탈영병들이 있었듯이 제국군에도 역시 탈영병들이 있었다.

[117] 독립선언문은 1776년에 작성되었다. 10년 후 2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는 한정상속법이 사라졌다. 15년 후에는 모든 주에서 장자상속법이 사라졌다. 혁명은 미국을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상류계급의 지배라는 구세계적 사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118] 또 하나의 중요한 결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사실이었다. 연령이 21세에 도달한, 미국 시민권을 가진 모든 백인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 5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혁명이전과 혁명 기간 중에는 투표권을 가지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혁명이후에는 요구되는 재산의 정도가 훨씬 낮추어졌으므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120]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 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125] 대금업자, 제조업자, 상인, 채권 소지자, 투기업자, 노예소유자 - 그들은 모두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그들은 돈을 가진 부자들이었고,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줄, 그리고 안전하고 쉽게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는 따라서 재산을 늘게 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130] 그래도 더욱 확실하고 빈틈없이 하기 위해 정부의 3개 기관으로 하여금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권한을 갖게 하고 각 기관의 임기를 다르게 했다.

[138] 그렇다. 그들 초기 개척민들이 서부로 간 것은 그들이 그것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지 그것이 용이한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151] 변경선은 미개와 문명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개척농민은 그의 문명생활을 포기하고 한동안은 실제로 미개인 되어야 했다. - 중략 - 그들의 모든 행동들은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야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황야를 변형시켜 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들 자신도 변형되어 갔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미국인의 전형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변경생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51] 황야와의 그러한 투쟁이 개척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투쟁은 그들에게 자립을 가르쳐 주었다.

[152] 황야와의 투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온갖 어려움과 싸우고 마침내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2] 개척자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가 누구인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배웠다. 독일인,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서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부에서 그들은 모두 평등했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신분이 천하거나 귀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일은 똑같은 것이었다. 누구든 자기 일에 성공한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평등할 수 있었다.

[152] 서부의 한 집회에서 어떤 정부 관리들이 연단에 오르기 위해 군중 사이를 비집고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외쳤다. “길을 비켜 주십시오. 우리는 국민의 대표들입니다.” “당신들이 비켜 가시오.” 군중은 재빨리 응수했다. “우리는 국민이오.”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배짱을 가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려 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용해야 할 때 발명가가 된다. 동시에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개척자는 다방면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가 적응해야 했던 상황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 적응했고, 따라서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204] 사람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큰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 기분에 맞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항상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213] 미국인들이 인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했던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일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은 그 일을 대신할 기계들을 발명했다. 각종 기계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명되고 있긴 했으나 미국인들이 그 뛰어난 착상력으로 고안해 낸 노동절약적 발명들은 숫적으로 많았을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215] 이렇게 여자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농한기의 남자들의 노동력과 수많은 기계들의 발명에 힘입어 공업은 미국의 동북부에서 시작됐다. 1820년대에 들어서자 공업은 이민의 물결을 타고 그곳에 터전을 굳혔다.

[217] 더 많은 공장들이 건설됨에 따라 공업제품의 가격은 점점 하락했다. 제조업자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사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생산원가를 줄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생산원가를 줄이는데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개량된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방법 하나는 노동자로 하여금 같은 임금으로 더 많은 기계를 돌리게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었다.

[229] 왜 남부의 경작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다른 농산물들을 스스로 생산하지 않았을까? 농장주들의 이윤은 면화 생산에 있었다. 그래서 흑인노예들은 면화를 재배하는 법만을 익혔다. 그 외의 다른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여 면화, 그리고 또 면화만이 재배되었다.(잎담배 재배 지대에서는 잎담배만이, 쌀 재배 지대에서는 쌀만이 다른 지대에서는 역시 그런 식으로). 남부는 유일작물 재배 지대가 되었다.

[244] 백인들은 흑인이 결코 피스톨이나 어떤 종류의 위험한 무기에도 손댈 수 없도록 유의했다. 그것이 그들의 반란을 막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흑인들이 백인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백인들에 대해서 열등하다는 의식을 스스로 갖게 하는 것이었다.

[245] 노예제도의 보존에 교회가 공헌한 바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렇게 노예들이 마음 속으로 그의 주인을 신과 동일시하게 했던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247] 북부와 남부는 일과 사고방식, 생활이 서로 달랐다. 북부에서는 소규모의 농업, 해운업, 발전하는 공업이 있었고, 그 모두를 백인 자유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흑인 노예노동에 의한 유일작물의 농업이 있었다. 두 지역은 생활의 모든 면이 달랐으므로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247] 양 지역간의 분쟁은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 간의 상반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공업의 북부에 유리한 것은 농업의 남부에 불리했고, 마찬가지로 농업의 남부에 유리한 것은 공업의 북부에 불리하였다. 보호관세가 그 적절한 예였다.

[265] 일찍이 1902년에 ‘미합중국 공업위원회’는 “1865년 이후 이루어진 변화와 진보는 여러 면에서 그 이전의 인류 역사의 전 과정에 걸쳐서 있었던 모든 것보다 크다”고 언명했다.

[266] 오늘날에는 변경이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땅은 비싸다. 그의 시대에는 대부분의 기업이 개인 또는 동업자의 소유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은 법인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의 시대에는 노동자가 주체였고 도구는 그의 부속물이었다. 오늘날에는 기계가 주체이고 노동자는 부속물이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이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단 말인가? 크게 말해서 자원, 인력, 기계, 돈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85] 농업의 전문화는 농민을 기복이 심한 자본주의 경제에 휩쓸려 들게 했으므로 위험했다. 소비를 위한 생산과 교환을 위한 생산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306] 주식회사의 동업 형태는 현명한 투자가로 하여금 한두 개 회사가 아니라 여러 회사에 투자함으로써 모험을 더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농업의 전문화로 한 가지 작물의 재배에만 전력했던 그래서 그의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있었던 농부와는 달리 자본가는 여러 회사의 주식을 샀다. 한두 군데의 회사가 저조하다고 해도 그는 안전했다. 그의 나머지 재산은 다른 곳에 투자되어 있었다.

[318]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운명을 자본가의 손에 맡기도록 만들었다. 고용주는 공장과 값비싼 기계를 갖고 있었다. 근로자는 더 이상 자기가 먹을 양식을 생산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었다.

[319] 미국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독립선언문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분리를 선언한 것이었다. 그 뒤를 이어 고용주 계급의 이익과 근로자의 이익의 분리를 선언하는 근로자의 온갖 선언이 있었다.

[321] 미국 최초의 노동조합들은 압박받는 공장근로자들의 조합이 아니었다. 고도로 숙련된 장인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임금을 높이고 근로시간을 줄이고 이전에 규정되어 있던 근로조건의 파괴를 막기 위해 - 단결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되었던 것이다.

[322] 노동자 계급의 조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자본주의의 발전 협동과 상호교류라는 물리적 수단뿐만 아니라 계급 및 계급의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조합의 결성을 위해 분투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은 부를 쌓아감과 더불어 비정을 더해가고 있던 자본가계급과 맞서야 했다.

[361] 최초의 이주민 정착 시절에서 1929년까지의 300년간은 경제적 확장의 시대였다.

[372] 1929년의 공황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생산제도였다.

[373] 미국이 앓고 있던 질병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최고도로 발전한 최첨단의 자본주의였다.

[373] 그리고 부자의 문전에는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부국은 구세계의 최악의 빈민굴과 견줄만한 빈민굴을 갖고 있었다.

[377] 이러한 고도로 발달된 최첨단의 자본주의가 미국 국민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배를 계속하는 한 임금을 낮추고 능률을 증진시키고 경쟁자를 밀어내고 가격을 고정시키고 해외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벌이는 등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싸울 것임을 의미한다.

[378] 그것은 공업이, 기업의 생산적 측면보다는 돈벌이 측면에 몰두한 사람들의 원격조정에 의해 운영됨을 의미한다. 그 결과, 투기적인 측면으로 향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그런 투기는 저변의 경제적 현실과는 점점 연관성이 희박해지는 것이다. 지배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금융조작이다. 이에 따라 지주회사가 마구 설립되었다.

[379] 불황은 효율 전문가의 구실을 했다.

[380] 이윤을 얻는 방법은 생산비를 줄이는 것이다. 생산비를 줄이는 방법은 가능한 한 적은 수의 근로자를 고용하여 가능한 한 임금을 적게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로자는 임금이 적어질수록 구매능력도 적어지게 된다. 다른 말로 옮기면 이윤을 얻는 과정이 스스로 패배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언제나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게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80] 1929년은 실로 번영의 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만의 번영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세계 최대 부국의 최대 번영의 해조차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383]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축적,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축적 .... 의 연쇄사슬은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분명 끊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사슬은 끊어졌다. 가장 약한 고리의 역할을 한 것은 주식시장의 투기소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요인은 자본주의 체제가 그 존속을 무한한 확장, 생산력의 무한한 해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미 무한한 확장의 벽을 자동적으로 쌓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확장이 불가능할 때는 수축한다.

[385]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하나의 혁명이라 불렸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혁명이 아니었다.

[385] 뉴딜정책은 이윤의 획득을 주목적으로 하는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를 바꾸지 않았다. - 미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이다. 뉴딜 정책은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전복을 가져오지도 않았다-고용주는 여전히 옛날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근로자 역시 옛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391] 세계의 다른 모든 진보된 공업국가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국가적인 구호를 다루는 사회보장제도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미국은 그렇지가 못했다.

[396] 뉴딜 정책은 관념적 혁명이었다. 이미 1891년 독일에서는 노년 보험 대책이 세워졌다. 그러나 세계 제일의 부국 미국에서는 1935년 8월 까지도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한 아무런 영구적인 보장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1911년 영국에서는 국민실험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실업인구를 갖고 있던 미국에서는 1935년 8월까지도 실직근로자를 위한 아무런 영구적인 대책도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 노년보험과 실업보험의 영구적인 대책은 1935년 8월 14일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사회보장법’이 제정되면서 처음으로 미국에 선을 보였다.

[398]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점은 불안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의도로 제정되었던 사회보장법이 실은 전혀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낮은 생활수준을 보장했던 ‘보장’제도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뉴딜 정책을 관념적인 혁명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다.

[403]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없을 때는 그들의 근로자들을 거리에 몰아내고 그들의 기계를 하릴없이 놀게 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었다. 그것이 고의적인 생산제한의 방책이 아니고 무엇인가? 농업조정국은 제조업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사용해 온 방법을 농민들이 사용하도록 도우려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439]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로서의 기능이 어느 정도까지 제거되었는지를 헨리 포드는 그의 저서 <나의 인생과 일>에서 보여주고 있다. 헨리 포드는 그의 저서에서 그의 공장의 모든 작업 중 43%가 단 1일 이하의 훈련을 요했으며, 36%가 1일 내지 1주일 20%가 1주일에서 1년 그리고 오직 1%만이 일 년 이상의 훈련을 요하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444] 지도자들은 여전히 직업별 조합의 철학을 완고히 고집하고 있었다. 왜? 노동운동에 더 이상 보탬이 될 수 없는 철학을 그들이 끝내 고집했던 이유는 그 직업별 조합의 철학이 AFL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던 지도자들의 이익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보수적 노선의 지도자들은 훌륭한 직업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452] 대기업가들은 재산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 뉴딜법(예를 들어, 산업부흥법)은 지지했으나,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 뉴딜법(예를 들어, 사회보장법)은 공격했다.

[453] 1933년의 여름에 실크 모자를 쓴 멋진 노신사가 방파제 끝에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습니다. 친구 하나가 방파제로 달려가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실크 모자만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벼렸습니다. 그 노신사는 의식이 회복되자 감사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그의 생명을 구해 준 그의 친구를 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노신사는 실크모자를 잃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를 온갖 욕설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490] 사기업은 이미 오래전에 자유기업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491] 우리의 복지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 중의 하나는 소수의 거대한 조직의 수중으로 힘의 집중 현상이 증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492] 일자리와 평화의 문제는 이와 같이 우리의 독점구조와 이윤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자유기업’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경제가 독점자본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독점자본에 의해 지배될 것인가, 아니면 국민 자신의 복지를 위해 국민에 의해 지배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492] 민중은 뉴딜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들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했다.

[492] 일자리와 평화는 이윤만을 위한 생산제도가 아닌 사용을 위한 생산제도 하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과는 다르다. ‘영웅’이나 ‘전쟁’ 등 승자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책이 아니라 그동안 소외되었던 약자의 관점으로 기술한 ‘민중’의 이야기이다. 나도 민중의 한 사람이기에 이해하기가 더 쉽고 친숙했지만 다른 관점에 더 관심이 쏠렸다. 다름 아닌 역사의 기술방법이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저자는 새로운 교수법으로 역사를 가르쳤다. ‘무엇이 일어났는가?’하는 기존의 주입식 교육방식에서 탈피해서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하는 원리식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와 같은 역사 교수법이 학생들에게 반응이 커지자 출판사의 출판의뢰에 의해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직업병일지는 모르지만 이 부분에 관심이 더 집중되었다.

암기를 싫어하고 원리와 이해를 좋아하는 성격에 딱 맞는 역사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내용 전달을 위한 새로운 교수법의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미국사를 이해한다는 측면보다는 그동안 나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의 주된 원인이 흑인노예의 해방이 아니라 남북간의 상반된 지역적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총 2부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에서 14장까지의 1부는 초기 개척시대부터 경제가 활기를 띤 1929년까지의 이야기이고 제15장에서 20장까지의 2부는 1929년의 경제공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뉴딜의 정책에 대해 다루고 있다.

1932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어린이용으로 1부 만으로 구성되었다가 성인에게 더 호응이 커지자 2부를 추가하여 성인용으로 1940년과 1947년도에 출판된 내용이다. 그래서 1부와 2부의 느낌이 다르다. 특히 2부는 뉴딜에 대한 이야기로 저자가 생각하기에 뉴딜이 자본주의 제도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 때문에 호기심이 다소 반감되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에 대한 생각을 책의 내용을 직접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 보자.

『“미국은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최근까지도 오직 정상의 사람들에게만 실현되었다. 그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메리카의 꿈은 분명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을 하루 빨리 실현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10)

저자의 이런 관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미국의 역사를 경영학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보고 싶다. 저자도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경제적 대확장의 역사라고 보고 있다. 경영학적인 해석의 관점으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창조성과 생산성 사이에서 오고가는 힘의 긴장관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미국의 해안가로 끌려 들어왔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운 지방에서 추운 지방에서, 산지에서 평지에서, 불모의 사막에서 비옥한 들에서, 폭 3,000마일, 길이 1,500마일의 이 거대한 자석은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유형의 인간들을 끌어들였다.”(p 18)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민은 20세기 초에 한 해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올 정도로 날로 커져 갔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국은 지금의 블루오션에 해당된다. 빵을 위해서든,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든, 일자리를 위해서든,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든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유럽에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온 것이다.

이후 아메리카내의 지리적 환경에 따라 농업, 광업, 공업 등 산업이 발달하게 되고, 새로운 기술과 발명으로 잉여생산물이 축적되자 무역을 하게 되고, 이 무역을 통해 새로운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서부의 개척과 동부의 발전이 병행하면서 창조성의 힘에서 생산성의 힘으로 서서히 넘어가면서 시장도 레드오션이 된다. 이후 생산의 힘에 의해 세계강국으로 부상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지만 그 힘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1929년에 경제적 공항을 맞이한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뉴딜정책을 시도하지만 저자는 뉴딜정책이 경제적 혁명이 아닌 관념적인 혁명에 머물면서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미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과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볼 계획을 갖게 되었다.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과 편리된 지식의 한계로 심층적인 접근과 공부도 후일로 미루어야 하겠다.

이 책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넓어졌고 영웅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도 조명해 볼 수 있어 의미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교수법과 새로운 해석을 배울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언제나 기존의 한계를 깨는 신선한 시도는 처음에 혼란스럽지만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하기 때문에 마냥 즐겁다. 가자, 더 넓은 세계로!
IP *.99.1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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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4 16:58:17 *.99.241.60
자료를 찾다 보니 이런말도 나오더군요.

But he wasn't teaching, he was telling.
(나는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얘기할 뿐이다.)
휴버맨은 가르치는 것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칼럼 중간에도 노동조합원들에 대한 교육도 읽기가 좋더군요.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많이 배우기도 해야하고,
배우는 사람 즉 수요자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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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5.14 18:52:30 *.114.56.245
부족함에서 오는 혼돈과 갈등, 한발자국 더 나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위안합니다. 같은 책을 앞에 놓고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하다는 것, 우리 연구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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