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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4일 11시 39분 등록


언론인이자 학자, 노동운동가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다. 1903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태어나 1969년 사망했다.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잡지 편집자를 거쳐 1938년부터 1년간 컬럼비아 대학 뉴칼리지의 사회과학 부장으로 재직했다.

<우리 민중과 미국의 드라마 We, the People Drama of America>(국역: <역사와 민중>, 비봉, 1983), <쿠바 혁명의 해부 Cuba Anatomy of Revolution>(폴 스위지와 공저), <베트남: 끝없는 전쟁 Vietnam: the Endless War>,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Socialism>(국역: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동녘, 1986), <노동조합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Unions> 등의 책을 냈다.

한글로 된 웹페이지를 대상으로 '리오 휴버만'을 검색하고 보니 찾을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위에 나와 있는 것이 전부다. 어딘가에 한글로 잘 정리된 저자 소개가 한 페이지 쯤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특히나 시간이 부족한 이번 주를 잘 모면해 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어로 된 문서들을 대상으로 검색을 시작하니 몇몇 흥미로워 보이는 문서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대략 몇 개의 문서들을 읽고 중요해 보이는 부분만 추려보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문서를 읽어 나가면서 힘을 잃었고 결국엔 통째로 번역을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음 글은 리오 휴버만이 폴 스위지(Paul Sweezy)와 함께 창설한 'Monthly Review'에 지난 2003년, 리오 휴버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실렸던 글이다. 존 사이먼(John J. Simon)이 쓴 이 글은 리오 휴버만이 스스로 기록한 자전적인 내용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로 본 그의 모습을 통해서 저자의 삶과 생각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글이 실린 'Monthly Review'가 리오 휴버만에 의해 창간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우리 부모님에 대한 회고록을 쓸 일이 생긴다면, 아버지께서 술 드시고 주차된 버스 아래서 잠드셨던 기억이나, 어머니께서 옆 집 아주머니와 육탄전을 벌이며 싸우셨던 사건 같은 건 은근슬쩍 빼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의 공백은 물론 '가자, 아메리카로!'를 통해서 비추고 채우면 될 것이다.

리오 휴버만, 급진적인 선동가, 사회주의 선생님. by John J. Simon
(시간에 쫓겨서 급하게 번역을 하느라 글이 엉망입니다.)

이번 달은 폴 스위지(Paul Sweezy)와 함께 공동으로 Monthly Review(이하 MR)를 창간한 리오 휴버만이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달이다. 만일 휴버만의 논설과 출판 능력, 타고난 상상력 그리고 독립적이고 명백한 사회주의의 나팔 소리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MR은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MR과 출판사는 미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선도적인 목소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리오 휴버만과 폴 스위지의 특별한 협력과 우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MR의 첫 번째 사무실은 배로우가에 위치한 리오 휴버만과 거트루드 휴버만(리오의 아내, 1965년 사망)의 아파트에서 시작되었다. 둘은 이 곳에서 잡지의 방향을 구상하고, 세계관을 다듬고, 기고가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각 발행본의 내용을 결정했다. 그리고 특히 리오는 기업으로서의 MR로 하여금 냉전과 마녀사냥 시대의 초기에 두드러지게 위험한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MR에서의 첫 20년 동안 휴버만이 한 일은,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삶의 모든 걸음에 있어서의 사람에 대한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역사 교육에 대한 헌신으로 기억되는 그의 삶에서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을 지속시킨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옹호였다. 1949년, MR의 창간 후에 쓰여진 간략한 자전적 스케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뉴저지의 뉴워크에서 11남매 중에 막내로(내가 태어나기 전에 6명의 남매가 죽었다.) 1903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중산층이 된 지식인이었다. 나는 고향의 공립학교를 다녔고, 16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름방학은 풍부한 현장경험의 기회였다. 난 11살 때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셀룰로이드 공장에서 일했다. 나는 또 월스트리트 중개소의 호객꾼, 네딕(오렌지 음료회사)의 외판원, 유리공장의 노동자, 전기기술자 보조, 우체국의 점원 그리고 전신기 회사의 야간조로 일했다. 이 모든 일을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했다. 뉴워크주 보통 학교에서 2년을 보낸 후에, 선생님으로부터 수료증을 받은 나는 18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25년,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학교 선생님인 거트루드 헬러(Gertrude Heller)와 결혼했다. 신혼여행으로 뉴저지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왕복하는 여행을 히치하이크로 다녀왔다.

    내 젊은 시절의 일정은 꽉 차있었다. 뉴워크에서 오후 3시 15분에 수업을 마치고 버스와 기차로 뉴욕에 가서 뉴욕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버스와 기차로 뉴워크로 돌아와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1926년에 뉴욕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그 해에 뉴욕의 실험적인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그곳으로 이사했다.

바로 그 학교,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씨티 앤 컨트리 학교(City and Country School)는 20세기 초에 싹트기 시작한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운동의 심장이었다. 존 드위(John Dewey)나 캐롤린 프랫(Carolyn Pratt, 학교의 설립자) 그리고 엘리자베스 어윈(Elizabeth Irwin)과 같은 개혁가들은 아이들을 교육의 중심에 세우고, 지식뿐만 아니라 묻고, 이해하고, 그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는 최초의 학교를 만들었다. 이는 상식적으로 들리는 것처럼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저항을 받았다.(이 부분 번역이 어렵군요. 원문은 'As commonsensical as that may sound, it was considered a subversive idea, resisted then as it is today.) 휴버만은 학교의 급진적인 접근 방식 때문에 시티 앤 컨트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진보적인 교육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가 훗날 MR 초기에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되고, 'The ABC of Socialism(1953)'의 공동 집필자이기도 한 시빌 메이(Sybil May)를 만난 곳도 바로 거기였다.
휴버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2년, '가자, 아메리카(민중의 관점에서 쓰여진 그의 혁신적인 미국사)가 출간된 후에, 출판사는 내게 세계사에 대한 책을 쓸 것을 요청했다. 이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교직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경제학 학교(School of Economics)와 대영 박물관에서 공부했다.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밤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많은 일을 했다.

이 기간동안 휴버만은 민중의 정치 그리고 경제 자본주의 역사를 다룬 'Man's Worldly Goods: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1936)'를 썼다. 이 책과 '가자, 아메리카로'는 모두 성인 독자를 위해 개정되기 전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로 씌어진 것이었다. 이 책들의 개정판은 미국 내외에서 성장하고 있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노동 운동에서의 노동자를 위한 급진적인(radical) 교육의 기준 작품이 되었다.

1938년, 리오는 1930년대의 투쟁적인 노동조합에 대해 기업의 고용주와 폭력단원들이 자행한 불법적이고, 때론 피비린내 나는 수법에 대한 날카롭게 진실을 파헤치는 폭로를 담고 있는 'The Labor Spy Racket'를 출판했다. 또한 1940년에는 미국의 짧은 경제 역사, '주식회사 아메리카'를 출판했다.
휴버만은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몇 년 동안 스콜라스틱(Scholastic) 잡지에 부편집자였고, 그 후, 진보교육연합(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의 인간 관계 위원회(Human Relations Commission)의 회원이었다, 1938년부터 1939년 사이에 나는 콜럼비아 뉴 칼리지의 사회과학과의 학과장이었고, PM 신문(뉴욕의 전설적인 비영리 좌익 일간)의 노동 편집자였다. 또 1941년에는 U.S.Week의 칼럼리스트이기도 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국가선원조합(National Maritime Union, CIO)의 책임자였다. 1946년부터 1947년에는 출판회사, '레이날 앤 히치콕(Reynal and Hitchcock)'의 편집자로 일했다. 그리고 1949년에 폴 스위지와 함께 Monthly Review를 설립했다.

    저녁 시간과 휴가는 노동자를 위한 학교에서 그들을 가르치는데 사용됐다. 국가선원조합(National Maritime Union, NMU)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은 당연히 유명해졌다. 타임지는 NMU의 기관은 세계에서 가장 매끄러운 무역 노동조합 문학을 포함하며 이 대부분은 리오 휴버만의 작품이다. 회원들은 절차에 따라 힘들게 훈련된다. 선장들은 뱃사람의 생계를 좌우하는 선박위원회를 존중하고 두려워하도록 배웠다.

흥미롭게도 간략한 자서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만족스럽게 인용한 것은 노동자 교육에 있어서의 성취다. 그가 NMU에서 일하는 동안 '모든 배가 학교다'라는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었다. 길고 지루한—그러나 위험한—항해 동안, 선상 도서관은 선원들이 위대한 고전문학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 마르크스 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역사를 서로에게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 휴버만은 또한 다작하는 소책자 출판자였다.

호주 출신 좌익이며, 서부해안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추방위협을 받고 있던 해리 브릿지를 옹호하는 '다리 위의 폭풍(Storm Over Bridges)', '위대한 버스 공습(The Great[New York] Bus Strike(1940))' 그리고 'NMU는 무엇이고, 무엇을 하는가?(The NMU: What it it, What it Does(1943))'를 썼다. 또한 폴 스위지와 함께 '사회주의만이 해답이다(Socialism is The Only Answer(1951))', '인종차별, 인종 관계의 위기: 두 개의 나라, 흑과 백(The Crisis in Race Relations: Two Nations, White and Black(1956)) 그리고 미국 대외 정책의 이론(The Theory of U.S. Foreign Policy(1960))'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위에 인용한 자전적인 노트는 1950년대 초에 작성되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 전쟁의 숨겨진 역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 War)'를 시작으로 Monthly Review 출판사의 문을 여는데 있어서 리오 휴버만의 중심적인 역할과 1953년, 맥카시 위원회 이전에 적대적인 증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의 증언은 1953년 8월자 Monthly Review에 실렸다.)

당시 MR 출판사의 업적 중에는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의 중국 해방군의 설립자인 Zhu Deh의 일대기인 '위대한 길(The Great Road)', 폴 바란(Paul Baran)의 '성장의 정치적인 경제(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 그리고 폴 바란과 폴 스위지의 '독점 자본(Monopoly Capital)' 등의 출판이 있다.

50년대와 60년대에 MR의 세계적인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리오 휴버만과 폴 스위지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작가와 투사들을 만났다. 점차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가 초점이 되었다. 1959년과 1960년에 MR의 편집자들은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함께 섬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다른 분석가들에 앞서, 그들의 유명한 책, '쿠바 혁명 해부학(Cuba: Anatomy of A Revolution)에서 그들은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변화는 사회주의라고 결론 내렸다. 쿠바 혁명은 휴버만은 여생동안 많은 글들과 또 다른 책, '쿠바의 사회주의(Socialism in Cuba(1968))'에서 빈틈없이 다루어진다. 또한 리오 휴버만의 지도 아래 MR 출판사는 '체 게바라의 게릴라 전쟁(Che Guevara's Guerrilla warfare(1961))'와 '쿠바 혁명 전쟁 회상(Reminiscences of the Cuban Revolutionary War(1968))'을 출판했다.

여행에도 불구하고 휴버만은 MR을 대표해서 잡지사를 향상시킬 방법을 찾고 잡지사의 범주와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말하고 쓰고 조직했다. 그의 말년에는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백인 패권주의의 비극을 조사하고 이에 도전했다.

리오 휴버만의 친구들은 만약 그가 차분하게 말하고, 따뜻함이 가득하고 게임(특히 테니스, 그리고 포커와 스크래블(단어 만들기 놀이))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이 글이 엉망이라고 할 것이다. 그와의 대화 주제는 정치에서부터 마르크스 형제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때론 그리니치 빌리지의 거리를 계속해서 걷기도 했다. 휴버만은 1968년 11월 9일에 죽었다. 그의 삶은 유산으로 남아 여전히 MR 가족들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은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최근까지도 오직 정상의 사람들에게만 실현되었다. (p. 11)

오랜 항해 끝에 배가 필라델피아에 닿은 후에도 뱃삯을 지불한 사람과 적당한 저당물을 잡힌 사람 외에는 배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뱃삯을 지불할 수도 적당한 저당물을 잡힐 수도 없었던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사 줄 때까지 배에 남아 있어야 했다. (p. 20)

더 크고 더 좋은 빵이 당시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그 하나는 종교적인 박해였다. (p. 28)

인간이라면 아마 그 어느 누구도 600명의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면서 태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초기 이민에게 인디언은, 드물게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끊임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p. 40)

인디언들에 의한 학살 (p. 41)

어느 쪽이 먼저지?

배에 계속 머물러서 일등 항해사가 되거나 선장이 된 사람들은 배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p. 56)

뉴잉글랜드인들이 흑인 노예의 사용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가 필요 없었을 뿐이었다. (p. 56)

법을 만든 사람들은 부유한 상류계급이었다. 왜 그 같은 법들이 부유층에게 유리하게 돼 있었는지는 쉽사리 알 수 있는 일이다. (p. 67)

책에서 계속 등장하는 특정 법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하게 됐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의미 있는 한편 일종의 혐오감과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바보라 하더라도 현인이 옷을 입혀 주는 것보다 혼자서 더 잘 입는다' (p. 70)

만일 식민지 주민들이 적에게 군량을 공급하지만 않았던들 7년 전쟁은 5년 전쟁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p. 83)

인디언들은 식민지 주민들이 서부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껴 왔었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항상 전쟁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식민지의 모피상인들은 대부분 정직하지 못한 부랑자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정직하게 벌 수 있는 돈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럼주로 인디언을 취하게 한 다음 그들과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일삼았다. 모피 무역은 영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디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를 원했다. 식민지 주민들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이동해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제국 정부의 손길을 벗어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외에도 땅값이 올라서 서부의 땅이 비싸지게 되면 영국인들이 톡톡히 재미를 볼 것으로 생각했다. (p. 86)

서민층은 그들의 주된 분쟁의 상대가 유산(有産)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이지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유산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도록 선동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 전통적 수법이었다. (p. 91)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 민중은 권력층, 즉 부자와 상인들의 도움 없이는 크게 진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p. 101)

"차(茶)를 애용하지도 않았고 차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지금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다들 건강했지요" (p. 103)

차(茶)를 차(車)로 바꿔도 적절하게 어울리겠는걸.

민중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서 역설하는 선동적인 연사들에 귀를 기울였다. 동인도 회사 차가 상륙하게 되면 상인들이 잃게 될 돈에 대한 말은 별로 없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든가, '해방'과 '자유'에 대한 말은 많았다. 차는 절대로 상륙하지 못한다. (p. 104)

미국 의회는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인쇄기에서는 수백 장에 이어 수천 장, 수백만 장의 달러 지폐가 쏟아져 나왔다. 그 지폐를 뒷받침해 줄 금도 은도 없이. (p. 110)

혁명이란 말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변화'이다. 미국 혁명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구시대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미국으로 하여금 "자유국가"라는 평판을 갖게 한 것이다. (p. 120)

문: 빚은 돌려받고 싶지 않을 때는 언제인가?
답: 가치가 떨어진 달러 지폐로 빚을 갚겠다고 할 때. (p. 121)

한 가지 사실에 관해서만은 실제적으로 대표 전원이 일치된 의견이었다.-민중이, 말하자면 재산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p. 129)

"우리 미 합중국 국민은(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더 완전한 연방을 이루기 위하여(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헌법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등장시켰다. 그 정부 안에서 13개의 서로 분리되어 싸우고 있던 주들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만일 이 헌법이 국민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미국 연방은 이름뿐만이 아닌 진정한 '미 합중국'이 될 수 있었다. (p. 131)

'뭔가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활력과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들이 모든 것들이 그저 그대로이고 아무런 흥미거리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고향 마을의 생활과는 대조적인, 인디언과 야생동물과 총싸움이, 위험과 모험이 있는 변경의 생활을 알았을 때, 떠난다는 것에 대해 재고해 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p. 134)

초기 개척민들이 서부로 간 것은 그들이 그것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지 그것이 용이한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p. 138)

'네. 나도 우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둡시다. 당신이 내게 돈을 줄 권리가 있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 우유를 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p. 150)

아~ 멋지다.

황야와의 그러한 투쟁이 개척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투쟁은 그들에게 자립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낯선 상황과 맞섰고 그리고 정복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해결했다. 동부를 떠나면서 고향과의 관계도 끊었다. 산맥 동부의 주민들이 유럽을 향해 서부의 땅을 '후진(後進)지역'으로 생각했던 반면, 개척자들이 서부를 향해 동부를 '후진지역'으로 생각했던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는 어떠한 간섭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장이었다. (p. 151)

서부의 한 집회에서 어떤 정부 관리들이 연단에 오르기 위해 군중 사이를 비집고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외쳤다.
"길을 비켜 주십시오. 우리는 국민의 대표들입니다."
"당신들이 비켜 가시오" 군중은 재빨리 응수했다.
"우리는 국민이오."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배짱을 가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려 들지 않았다. (p. 152)

멀러서라! 홍인종들아. (p. 153)

아~ 인디언들에 대한 휴버만의 계속되는 비하는 그가 '우리'라고 부르는 'We, the people'에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큰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 기분에 맞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면 항상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p. 204)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주 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는 좋은 땅이 미국에 많이 있는 한, 대규모의 공업은 결코 미국에 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견해가 그러했다. 그는 1760년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공업은 빈곤 위에 건설되는 것이다. 그것은 땅이 없는 빈민들의 군집이다. 그들은 굶주리지 않으려면 저임금으로 타인을 위해 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가(발기인)로 하여금 공업의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가족을 넉넉히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을 위해 고용되어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국민에게 충분한 땅이 있는 한, 공업은 미국에서 어떠한 규모로도, 어떠한 가치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p. 208)

아프리카에서 갓 들여온 흑인들은 백인들의 습성을 배우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래서 미국에서 그의 후손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흑인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인들은 흑인들이 배울 능력이 없는 것으로 잘못 믿고 있었다. 노예 주인들은 경제학자 케언스(J. E. Cairnes)의 이론을 믿었다. (p. 224)

…… 이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노예폐지론자들의 노예제도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 그들은 노예제도가 그릇된 것이며, 미국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었지만 적은 숫자에 비해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무섭게 진지했고, 스스로 옳다고 확신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하고 쓰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 250)

그들이 흑인들을 받아들여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p. 252)

노예폐지론자와 북부인 전체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남부에서 면화를 모두 팔아서 들어온 돈보다도, 북부에서 장화, 구두 등 가죽제품과 철만을 팔아서 들어온 돈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남부 지주들과 북부 사업가들의 싸움에서 북부인들의 승리를 예고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p. 258)

'부자들의 전쟁에 빈자(貧者)들의 싸움' (p. 262)

남북전쟁 이후 미국 농업의 변화는 남부 경제의 기본적인 변화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 변화는 미국과 유럽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을 정도의 일대 혁명이었다.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갔던 금과 은은 '구 세계'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막대한 역할을 했던 가격혁명을 가져왔다. 19세기에는 또 하나의 흐름-미국의 농작물-이 구 세계의 경제에 두 번째의 혁명을 가져왔다. (p. 278)

"월 가(Wall Street)는 미국을 수요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미국은 월 가의, 월 가에 의한, 월 가를 위한 정부가 되었다. 이 나라의 위대한 국민들은 노예가 되었고, 독점기업이 주인이 되었다. 서부와 남부는 공업의 동부에 묶여 무릎을 꿇었다. 돈이 지배한다…… 국민들은 그들의 주인들을 살찌우기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대중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사악한 돈의 개떼들아! 대중을 이토록 궁지에 몰아세운 대가를 기대하고 있으라! (p. 288)

의회에서 제정된 법은 4,000달러 이상의 모든 소득에 대해서 2%의 소득세를 부과했다. 물론 농민과 근로자는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부과한 세금이었다. 부유층은 이를 반대했다. 또 다시 대심원은 부자들의 구제에 나섰다. 소득세 제도는 남북전쟁 중에도 실시되었는 데도 불구하고 1895년 대심원은 5대 4의 표결로 그와 같은 세금은 위헌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p. 290)

의회는 셔먼 법을 트러스트에 대한 국민의 무기로 제정했다. 그러나 법원은 셔먼 법을 흔히 노동조합에 대한 고용주의 무기로 해석했다. (p. 316)

재산이 1위였고 이간의 생명은 2위였다. 그것이 마찰의 한 원인이었다. (p. 318)

미국 최초의 노동조합들은 압박받는 공장근로자들의 조합이 아니었다. 고도로 숙려뇐 장인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임금을 높이고, 근로시간을 줄이고, 이전에 규정되어 있던 근로조건의 파괴를 막기 위해-단결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되었던 것이다. (p. 321)

1886sus은 미국 노동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해였다. 그 해에 '고귀한 노동기사단'의 위세는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한 몰락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p. 327)

미국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쟁들-막대한 재산을 파괴했고 많은 생명을 앗아간-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고용계급이 노동조합을 부인하고 조합과의 단체교섭을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이 같은 진실이 좀더 널리 수긍되고 있지 않은 것은 오로지 고용주들이 여론을 조성하는 기관들인 신문, 학교, 교회 등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신문이 보도한 것도, 교사들이 가르쳤던 것도, 성직자들이 설교했던 것도 주로 자본가의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 (p. 334)

사실상 쿠바는 우리의 것이었다.(여기에 '우리'는 미국민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란 다만 돈 많은 자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p. 350)

미국 자본의 외국 침입은 평화적으로 행해진 때도 있었으나, 간혹 심각한 분쟁을 초래하기도 했다. 때때로 미국 자본의 뒤를 해병대가 따라갔다.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중간 생략)

보라! 상원의원의 진술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실제로 이러한 수법이 우리가 감행했던 제국주의 사업에 때때로 사용되었음은, 그러한 사업에 수차례 걸쳐 직접 참여했던 한 사람의 진술을 통해서,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하 생략) (p. 357~358)

17세기 초의 미국은 호아금의 해 1929년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야만인과 야수들만이 살고 있던 황야가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 3백년 간의 대변모는 옛날 통속소설 작가의 환영을 받았을 스릴 만점의 성공담이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이야기에 "무일푼에서 백만장자로"라는 걸맞는 제목을 붙였으리라. (p. 361)

1929년의 공황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생산제도였다. (중간 생략) 미국이 앓고 있던 질병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최고도로 발전한 최첨단의 자본주의였다. (p. 372~373)

부자의 문전에는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 (p. 373)

지배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금융조작이다. (p. 378)

뉴딜 정책은 관념적인 혁명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다. (p. 398)

의사의 우선적 의무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다. 그의 다음 일은 환자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구호 사업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회복을 위한 뉴딜 정책의 처방은 AAA, NRA, PWA라는 이름의 약이었다. (p. 399)

사용을 위한 생산(production for use)의 제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계획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는 판국에 식량과 의류를 파괴하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지적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의 신봉자들에게는 것을 비난할 권리가 없었다. (p. 403)

이윤 제도의 체계 안에서는 '매장하는' 정책이 조금도 나쁠 것이 없었다. 물론 뉴딜이 그와 반대로, 작물의 감축보다는 확장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모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모든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는 정책을 추진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계획이 추진되자면 모든 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즉, 이윤을 위한 생산에서 사용을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루즈벨트 행정부의 목표가 아니었다. 뉴딜 정책은 경제적인 혁명이 아니었다. (p. 404)

1935년 7월 5일 대통령이 서명한 노동관계법(NLRA)은 아마도 뉴딜의 전체 입법(立法)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p. 434)

25센트의 최저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면 사업을 그만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좀더 능률적인 선에서 사업을 재조직할 수밖에 없었던 고용주들도 있었다. 그들이 저임금을 지불하는 한, 그들은 공장을 비능률적으로 경영하고도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임금의 인상으로 그들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좀더 나은 기획을 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p. 450)

"우리는 겨우 싸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p. 453)

체임벌린도 달라디에도, 영국 국민들에게나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들이 미국과 정반대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그들조차도 루즈벨트 대통령의 빛나는 각종 성명(聲明)에 대해 입에 발린 찬사를 보내야 했다. (p. 458)

미국 자신은 확실히 침략자가 아니었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심사는 평화의 유지와 수출무역의 확장이었다. (p. 461)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기록은 같은 것이다. 그럴듯한 말들과 약간의 진보적인 행동, 그리고 때로는 역행적 행동이었다. (p. 469)

라틴 아메리카 제국에서의 선린정책의 길은 평탄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던 데다가, 그들과의 관계를 담당하고 있던 직업 외교관들도 달러 외교방식에 익숙해 있었고, 대기업에 우호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비민주적 전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p. 473)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정부와 민중은 전쟁 또는 다른 위기에 처했을 때 기업과 거래해야 하는 문제에 q부딪칠 때마다 '속수무책'이 된다. 기업은 자신이 지정한 조건이 아니면 일하기를 거부한다. 기업은 천연자원을, 동산(動産)을, 국가경제기구 내의 전략적 지위를, 그리고 기술 장비 및 생산 과정의 지식을 지배한다. (p. 480)

뉴딜 정책은 재정 지출에 의해 대중의 수축된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자본주의가 존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회철학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시적인 완화제조차도 자본가들에게는, 그들이 1932년의 위기로부터 회복되는 즉시로, 불쾌한 것이었다. 그들은 구호, 회복, 개혁(Relief, Recovery Reform)의 3R을 증오했다. 그리고 네 번째의 R-루즈벨트-을 증오했다. 그는 부정(不淨)한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p. 487)

일자리와 평화는 이윤(利潤)만을 위한 생산제도가 아닌, 사용(使用)을 위한 생산제도 하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p. 492)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조안 시울라, 일의 발견)

그래서 우리가 만났던 역사책들은 한결같이 위인의 이름과 그들이 거창하게 저질러 놓은, 소위 말하는 의미 있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힘 없는 자,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언제나 침묵했고, 역사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물론 존재조차도 확인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자, 아메리카로(We, the people: The drama of America)'는 다른 역사책과는 멋지게 차별화되고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힘없고 가난한, 그래서 때로는 생존마저도 위협받았던 서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펼쳐지는 역사는 때론 눈물 겹고, 또 때로는 벅차다.

살던 곳을 버리고 꿈을 찾아 미국을 향했던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꿈의 첫 출발점이 어디였는지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더 크고 좋은 빵,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의 굶주리고 억압받던 사람들을 미국 동부 해안으로 끌어들였다.

북부와 남부의 태생적인 차이, 동부에서 서부로 폭발하듯 번져나가는 이주의 역사 그리고 다시 북부와 남부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속에서 전부라고 생각했던 영웅들을 그저 간간히 이정표로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독특하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운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어 역사가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생생하게 비추는 살아 숨쉬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적인 대성공과 그 뒤에 찾아 든 끊임없는 추락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뉴딜 정책을 다루고 있는 책의 중반 이후 부분은 편한 마음으로 술술 읽혀지던 전반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사회주의자인 저자는 근대 미국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극복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명쾌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숨 가쁘게 제시되는 통계수치와 자세하게 설명되는 갖가지 정책들은 분명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가 역사를 다루던 방식과는 달랐다. 책의 전반부를 읽는 동안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바짝 세운 채 머리를 책 속에 들이 밀어야만 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자본의 손발이 되어 세계의 판도를 조율하고 다른 나라의 정부를 좌지우지했던 기록들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 쿠바를 유린하는 미국의 정책과 전략을 보면서, 그들이 보여준 한국 근대사의 많은 장면들이 그저 우방으로서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했다.

뉴딜 정책과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책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한 지면의 분량에서도 드러난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 끝에 이어진 추락을 극복해나가는 뉴딜정책에 대해, 저자는 이전의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 대신 열렬히 옹호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명심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결국 이런 구호 정책을 통한 위기의 극복이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일자리와 평화는 이윤(利潤)만을 위한 생산제도가 아닌, 사용(使用)을 위한 생산제도 하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p. 492)

사회주의 역사가가 바라본 미국 자본주의 역사의 해답은 결국 사회주의인가? 그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사용을 위한 생산제도'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그 안을 벗어나 본 적 없이, 그 바깥을 생각해본 적 없이 살아온 나로써는 새로운 문제가 주어진 셈이다. 이렇게 조금씩 넓어지는 모양이다.

좋았던 점
생명력 넘치는 증거와 인용문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그러나 책의 전반부에서 더더욱)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답고, 눈부시고, 가슴 뛰고, 눈물 겨운 (또는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기존의 역사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 중심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사람을 담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들은 책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 미소 짓고, 아프게 눈물짓게 만든다.

날카로운 통찰력
전세계인이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대공황의 극복 이후까지를 다루는 이 책은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막힘 없이 시원스럽게 뚫린다. 상당히 긴 시간과 많은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저자는 내내 여유 있는 자세로 이유를 찾아내고 결과를 설명한다. 자크 아탈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업적 체계를 통해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풀어냈듯이, 저자는 '자본'을 통해 역사를 설명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과관계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서 읽는 이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통찰력은 그가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독특한 시선
책을 쓸 때 어떤 관점에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소재를 찾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리오 휴버만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마땅한 역사책이 없다는 사실에 개탄하고 '가자, 아메리카로!'를 썼다고 한다. 저자는 역사라는 소재를 가지고, 기존의 역사책들의 '가진 자의 역사'라는 천편일률적인 관점을 뛰어넘어 '대중의 역사'라는 독특한 접근 방식을 선택함으로 홈런을 쳐냈다. 평범한 '소재'를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것은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분명히 유용한 방법일 것이다. 연구원 생활의 대미를 장식할 책 출판에 대한 단서를 확인한 셈이다.

아쉬운 점
편협한 시선
'We, the people'의 'We'는 말 그대로 '미국인'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진 자에 반해 힘없는 서민의 편에 섰을 때의 공정한 모습과는 달리, '프랑스인'과 '인디언'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편협한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아메리카의 원주민인 인디언과의 마찰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들을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 정도로 대하는 듯한 저자의 태도는 읽는 동안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흑인 노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 '노예 해방'을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는 결국 'We'가 '백인 노동자'로 한정되는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쿠바 그리고 대한민국
미국이 쿠바를 상대로 보여준 위선적인 정책에 대한 부분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의 현실이 계속해서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이 책의 개정판이 1947년에 나왔으므로, 일본의 패망에 이어서 벌어지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한국전 등은 이 책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는데, 저자에 대한 조사 중에 Monthly Review Press에서 최초로 출판한 책이 '한국 전쟁의 숨겨진 역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 War)'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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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4 17:14:11 *.99.241.60
해석할 엄두도 내질 못했는데, 방대한 글 해석을 해주어서 잘 읽었음.
댕큐^
쿠바문제는 48시간을 보면서 케네디라는 인물의 훌륭한 외교술만 보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상대편인 쿠바는 오죽했으면 저랬을까 하는생각이 들었음. 아마 역사적 상대주의 때문을 인정해주어야 할듯..

암튼 저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서평, 잘 읽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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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5.14 23:11:51 *.72.153.12
저도 저자 조사에 대해서 땡큐.
책 읽으면서, 느낀점, 저자 조사로 알아낸 점 등을 깔끔한 정리해 내는 것을 글로 봅니다. 읽으면서도 공부가 되려나... 그래서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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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담솔
2007.05.18 00:02:24 *.248.28.179
너무 오랜만이죠?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죄송해요 ㅠㅠ
아무래도 자주 못들어 올듯해요.. 마음속으로 늘 응원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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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5.20 12:03:56 *.145.231.168
잘 쓴 서평이군요.
역시 3기는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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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5.28 09:28:04 *.227.22.57
쫓기듯 글을 써놓고는 창피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댓글도 하나 못달았네요.

영훈형~ 해석한거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근데 글쓰고 생각하는데 더 시간을 들여야 할까봐요. ㅎㅎ 배보다 배꼽이 더 큰게 아닌가 싶어요.

정화님~ 깔끔한 정리라 말해주니 고마워요. 저자 조사의 고삐를 늦출 수가 없겠는데요. 감사합니다.

해담솔님~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어와 댓글을 남겨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직접 응원을 해드려야 할텐데, 그럴 수 없으니 저도 마음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로선배님~ 그날 마루에서 뵙고도 많은 얘기 나누지 못해 조금 아쉬웠습니다. 다음에 천안 갈때 마실에 한번 들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잘 쓴 서평이라고 말씀해주시니 부끄럽네요. 다음엔 좀 더 잘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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