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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9일 11시 32분 등록
치욕을 기억하라 (memento infamia)

<남한산성> 김훈지음 | 학고재 2007


김훈의 <칼의 노래>는 90년대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 등으로 대별되는 내면의 소통을 갈구하는 여성서사의 시대에서 비장함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남성서사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더구나 대통령의 탄핵시절, 그 책을 읽으며 국가를 걱정했다는 비화가 전해지면서 작품성과 더불어 그 당시 일본작품과 번역서가 수위를 차지하는 문단계에서, 한국작가로는 드물게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진입하기도 했다. 또한,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이후 선 굵은 역사 서사물 제작에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 후 그의 행방은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 국내 주요한 단편 소설 문학상을 거의 ‘휩쓸다’시피했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발표마다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김훈이 <남한산성> 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럼 그의 신작 <남한산성>은 어떤 작품 일까.

먼저 이 작품은 도저히 역사 소설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먼저 이 소설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는 한마디로 ‘시끄러운’ 시대이다. 인조반정을 비롯하여,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2-3 년을 주기로 국사책에서 비교적 자세히 다루어지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시대인만큼 시국이 어지러운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어떻게 역사의 이야기로만 읽히겠는가. 21세기를 연 동북아의 미래. FTA, 통상압력, 그리고 글로벌화가 되어가는 이 시대, 게다가 북핵문제로 이젠 내부 정치의 문제보다 전 세계의 동향이 신문 헤드라인으로 게재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는 정권교체의 시기에 한 국가의 운명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소국의 미래는 불투명 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가지는 미덕은 청나라의 황제 ‘칸’의 비중을 그리 크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 역사소설이 가지는 상상력 중의 하나는 강대국/약소국, 아군/적군, 문명인/야만인의 개념으로 흑백논리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이는 오히려 외부의 정치적 헤게모니보다는 포커스를 남한산성 내부에 맞추어 그 내부 갈등을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전작 <칼의 노래>에서 칼소리로, <현의 노래>에서 가야금 소리로 변주되어 나갔다면,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임금이 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때로는 눈보라처럼, 때로는 송파나루의 얼음장처럼, 그리고 봄을 알리는 바람 소리처럼 비장하면서도 커다란 울림을 준다.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어느 편에도 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특히, 겨울배가 내리는 내행전 마당에 임금이 직접 내려와 땅에 눈물로 머리를 찧으며 시국이 자기 탓임을 이야기 하는 부분은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과,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를 중심으로, 이시백, 김류, 서날쇠, 사공, 나루 등의 인물들도 남한산성 내부의 갈등을 형상화 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대장장이임에도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결국 신의를 잃지 않는 서날쇠, 당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다가 김상헌의 칼에 쓰러진 송파나루의 뱃사공, 적진을 뚫고 안개처럼 산성에 스며든 어린 계집 나루는 작가가 첫 장에 써 놓았듯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고통받는 자들의 시선으로 따뜻함을 전달한다.

칸이 보낸 답서 하나를 보내는데도 김상헌과 최명길이 쓴 글이 다르고, 정육품 수찬과 정 오품 정랑의 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그 상황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리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작가는 임금이 출욕의 출성에 앞서 최명길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즉, ‘삶은 곧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역사가 삶과 죽음의 기록이라고 할 때, 치욕의 역사는 살아 낸 삶의 이력이다. 결국, 그는 김상헌의 목소리를 빌러 이야기한다.

“버티지 못하면 어찌 하겠느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냐.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 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은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왔듯 성 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작가는 역사의 한 프레임을 살짝 들추어 내고는 어떠한 해답도 독자에게 주지 않는다. 그것이 임금의 부덕한 탓도, 정치적 공방의 탓도, 청나라의 탓도 아님을 이야기한다. 다만,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이 것은 과거에 있었던 ‘실록’으로 치부하기엔 미래에 다가올 일일 수 있는 계시록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OTL’, ‘굴욕시리즈’ 등으로 대변되는 간편하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무. 이.유.없.이.’ 남의 사생활을 들추어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공론화 시키는 통신의 시대에, 이처럼 장중하고 비장한 굴욕의 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각자 개인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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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2007.05.19 23:53:42 *.106.85.235
정말로 멋진 서평인것 같습니다. 요즘 신문마다 방송마다 이 책을 가지고 난리던데, 읽을까 말까 고민중이었는데,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정재엽님처럼 서평을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보다 서평이 더 재미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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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2007.05.19 23:55:59 *.106.85.235
저도 이 책을 지금 읽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비장함에 책장이 넘어가질 않고 있습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이곳 북리뷰에는 소설이나 문학집은 거의 없는 것 같아 항상 불만이었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상쾌한 서평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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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2007.05.20 00:01:13 *.106.85.235
책 안 읽고 이 글로 그냥 책읽은거 대체할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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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25
2007.05.20 11:00:14 *.106.85.235
혹시 이거 퍼가도 될까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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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7.05.21 15:34:17 *.165.140.138
진실로님, 이문재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서평도 서평이지만, 일단 책을 읽어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오랜만에 선이 굵은 책을 읽으니 무게감이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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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화
2007.05.22 16:06:27 *.165.140.138
전 정재엽님의 서평을 읽고 이 책을 샀는데, 두 페이지 읽고 다시 접었답니다. 너무 어려워서요 -.-;; 솔직히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게 아닌가 싶어요. 어려워야지만 문학은 아니지 않나요? 암튼, 날씨도 더운데 굉장히 짜증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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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7.05.23 14:13:55 *.165.140.138
아- 임정화님. 김훈의 책이 그렇게 쉽게 읽히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책속에 일종의 리듬이 있습니다. 일단 그 리듬만 잘 타시면 끝까지 어렵지 않게 넘어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마시고, 전체를 보시면서 이해하시면 아마 깊은 감동을 느끼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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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3 13:40:10 *.72.153.12
어제 3기 연구원들 수업이 있어 만났는데, 누군가 이 서평이야기를 해서 궁금해서 들어와봤습니다.
어제 수업이 '과거, 역사'에 관한 것이라 이 책이야기가 나왔나봅니다.

아군/적, 승리/패배, 번영/쇄퇴, 생존/멸망....이분법적, 혹은 대결적으로만 보던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좀더 넓어지고, 흥미로워짐을 느낍니다.

13세살 이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TV사극을 통해서 싸우고, 세력을 확장하고, 권력을 차지하고, 이기고 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는 그러는 것이려니 하는 은근한 안개비에 가치관이 젖어버렸나봅니다.
정재엽님의 서평을 보니, 그런 저에게 이 책은 '아하!'하는 순간을 많이 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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