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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6일 07시 04분 등록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변한다.

이 책은 제목처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저자인 Edward Hallett Carr 가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담아 답을 주는 책이다. 즉 역사철학에 관한 책이다. 철학자체도 어려운데 그 위에다 역사라는 말까지 얹었으니 접근하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역사 이론을 개관한 책이 아니라 탁월한 역사가인 저자 자신의 역사관을 조리 있게 밝힌 책이어서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역사입문서이다. 깊고 넓은 역사연구의 체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역사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책을 완전히 그리고 비판적으로 읽으려면 상당한 지식을 갖추여야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인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라는 말의 의미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원본은 1961년 영국에서 출판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1966년 길현모선생님에 의해 처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이래로 여러 사람에 의해 번역 출간되었다. 80년대는 대학가에 필독서가 되었으며 현재는 논술 시험에도 언급될 만큼 고등학생들에게까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거의 모든 역사학도들 뿐 아니라 19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온 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최근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런던 역사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 결과를 ‘굿바이 E.H.카’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한 권의 책이 역사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을 읽다보면 역사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노련한 저자의 지혜로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도 놀라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더 흥미롭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방법론에 많은 공감이 간다. 저자의 글쓰기 방법을 알아보자.

“가끔 나에게 역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에 어떻게 진행시켜 나가는가를 물어봅니다. 내 경우에는 우선 기본 史料라고 생각되는 것을 조금만 읽기 시작하면 근질증을 참을 수 없어서 그대로 쓰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이 처음 부분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어디거나 상관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동시에 병행되어 나갑니다. 한편으로는 읽어가며 한편으로는 써 붙이고, 깎아내고 다시 쓰고, 지워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읽는 것은 씀으로 해서 인도되고 방향이 제시되고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즉,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내가 찾아낸 것의 의미와 관련성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p40)

이는 구본형선생님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글은 우물과 같다. 퍼 올려야 다시 괸다. 한때 샘처럼 마냥 넘쳐흐르기를 바랐다. 그런 축복도 있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자연히 넘쳐흐르는 글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을 써 보니 그것은 깊은 우물과 같은 것이다. 퍼내지 않으면 다시 새물이 고이지 못한다. 이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다. 평범한 재능 밖에 없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언젠가 한 권의 책을 쓰리라. 이 말은 그 책을 얻기 위해 수많은 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지 않고 어떻게 정말 쓸 수 있으랴.”

평범한 사람은 쓰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을 읽을 수도 없다.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기본이 된 최근에 글쓰기에 대한 자세로 마음에 새길 만한 글귀라고 생각한다.

또한 독서에 대한 지혜도 얻을 수 있다.
" 사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등 심원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일쯤은 대학생들도 일상 실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만일 어떤 머리 좋은 학생이 성쥬드(St. Jude) 대학의 대학자 죤스(Jones)의 책을 읽어보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 그는 성쥬드 대학의 친구를 만나서, 죤스 신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라고 물어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역사책을 읽을 때에는 항상 역사가의 머리 속에서 오고가는 사색의 음을 잡아내야 합니다. 만일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역사가 쪽이 둔재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p32)

“여러분이 역사책을 집어들 때에는 표지에 적혀 있는 저자명을 찾아본다는 것 만으로서는 충분치 못합니다. 출판시일이나 집필시일도 아울러 유의하셔야 합니다. 만일 똑 같은 강물 속에 사람은 두 번 다시는 들어설 수 없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두 책을 쓸 수 없다는 말도 똑같은 이치에서 진실일 것입니다.”(p63)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십시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러한 이중의 시점 하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p66)

역사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제대로 적용한다면 저자의 생각과 감정과도 호흡할 수 있어 책에 대한 더 깊은 내용을 이해할 수 것이다. 현재 연구원에서 진행하는 북 리뷰의 형식이 ‘저자에 대하여’,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그리고 ‘내가 저자라면’으로 구성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마 구본형선생님도 E. H. 카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처음 책을 읽을 때의 부담스럽고 경직되었던 마음이 책을 읽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명확해지는 느낌이 든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세계관, 가치관 또는 미래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현대인의 필독서임을 감히 주장한다.


1. 저자에 대하여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역사학자이다.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의 실증사학 - ‘역사란 객관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복원한다.’는 역사관 - 을 거부하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연구자의 관점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그 당시 물들어 있던 역사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큰 영향을 받아 기존의 정사, 왕조사 중심의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민중사관, 계급사관에 입각한 사회사나 경제사 등이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성과 이성’, ‘해방전후사 인식’, ‘소유의 역사’, ‘노동의 역사’ 등 책들과 더불어 386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저자는 평생 역사학만을 추구해온 학자는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대학에 들어와서는 정치학을 강의하다가 60세가 넘어서야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늦깎이 역사가였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폭넓은 현장체험을 통해 참신하면서도 유연한 역사관을 체득함으로써 일정한 틀에 갇힌 역사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역사관을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통해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간된 것이다.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런던의 머천트 데일러즈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1916년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수많은 업무들에 종사한 후 1936년에 사임했으며, 웨일스 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더 타임스’의 부편집인을 역임했고, 48년에는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튜터(개별지도교수)였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러지의 펠로우(특별연구원)가 되었고, 1966년에는 베일리얼 칼리지의 명예연구원이 되었다. 1982년 타계했다.

다른 주요 저서로 양대 세계대전 사이 국제정치 흐름을 다룬 <위기의 20년, 1919~1939>, <낭만의 망명객>을 비롯해 <평화의 조건>, <새로운 사회>,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 등이 있다.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4부작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그의 대표작이자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1945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거의 30년간 이 책에 매달렸다고 한다. 모두 합쳐 14권에 이른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7]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 할 때에 우리들의 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 라는 보다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답의 일부를 이루게도 되는 것입니다.

[7] 19세기는 사실을 존중한 대단한 시대였습니다.

[9] 액튼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죠지 클라크 경조차도 역사에 있어서의「사실이라는 굳은 핵」과 「이를 감싸고 있는 이론의 여지가 많은 해석이라는 과육」과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그는 과실의 알맹이는 딱딱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육의 부분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먼저 사실을 틀림없이 입수하라, 그리고 나서 해석이라는 유동하는 모래 속으로 위험을 걸고 뛰어들어라 - 이것이 역사에 대한 경험적인 상식학파의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11] 나는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만의 말을 상기하게 됩니다. 역사가를 정확하다고 해서 칭찬한다는 것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혼합된 콘크리이트를 썼다고 해서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의 일의 필요조건이지 본질적인 기능은 아닌 것입니다.

[12]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어떠한 순서와 전후 관련 속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역사가인 것입니다.

[12]「사실은 자루와 같은 것이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설 수 없다.」

[13] 시이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들이 자기들의 이유에 따라 결정한 것이지, 그 전에나 그 후에 수백만의 딴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13] 역사가란 불가피하게 선택적이게 마련입니다. 역사가의 해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립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굳은 핵을 믿는다는 것은 전후가 전도된 오류입니다.

[15] 역사적 사실로서는 그 지위는 결국 해석의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라는 요소는 역사의 모든 사실 속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16] 그것은 우연적 계기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떤 특수한 견해의 감화 밑에서 그런 견해를 밑받침해주는 사실이어야만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입니다.

[17]「우리들이 책으로 읽는 역사는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결코 사실 그것은 아니고 오히려 인정된 판단의 체계에 불과하다.」

[27] 영국의 역사가들이 역사철학의 문제에 몰입하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8]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라고 크로체는 언명했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 하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임무는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가 가치의 재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기록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30] 「역사는 역사가의 경험이다. 그것은 역사가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고 역사를 쓴다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30]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복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라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 라는 문제인 것입니다.

[32] 만일 콜링우드의 말과 같이 역사가는 자기 극중 인물의 마음의 움직임을 사상 속에 재연해야만 한다면 다음 차례로서는 독자가 역사가의 마음의 움직임을 재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독서에 대한 지혜도 얻을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등 심원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일쯤은 대학생들도 일상 실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만일 어떤 머리 좋은 학생이 성쥬드(St. Jude) 대학의 대학자 죤스(Jones)의 책을 읽어보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 그는 성쥬드 대학의 친구를 만나서, 죤스 신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라고 물어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역사책을 읽을 때에는 항상 역사가의 머리 속에서 오고가는 사색의 음을 잡아내야 합니다. 만일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역사가 쪽이 둔재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33] 역사가는 자기가 취급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4]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비로소 과거를 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36]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써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40] 가끔 나에게 역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에 어떻게 진행시켜 나가는가를 물어봅니다. 내 경우에는 우선 기본 史料라고 생각되는 것을 조금만 읽기 시작하면 근질증을 참을 수 없어서 그대로 쓰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이 처음 부분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어디거나 상관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동시에 병행되어 나갑니다. 한편으로는 읽어가며 한편으로는 써 붙이고, 깎아내고 다시 쓰고, 지워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읽는 것은 씀으로 해서 인도되고 방향이 제시되고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즉,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내가 찾아낸 것의 의미와 관련성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41] 역사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경제학자들이 인풋트와 아우트풋트라고 부르는 이 두 개의 과정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단일 과정의 두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42]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요, 억압적인 주인도 아닙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42]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 중의 어느 한 쪽만을 우위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43]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입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43]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47] 단순한 사회는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보다도 획일적입니다. 그 의미는 그러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다양한 기능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요구하거나 그러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일이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개별화의 증대라는 것은 발달된 근대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이며 이와 같은 경향은 사회활동 전체를 위에서 밑바닥까지 물들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47]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48] 개인숭배라는 것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때까지는 「민족, 민중, 당파, 가족, 단체 등의 일원으로서의 자각밖에 없었던」인간이 이 때에 와서 마침내는「정신적인 개인이 되고 그러한 존재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9] 근대 세계의 발전에 수반되었던 개인화의 증대라는 것도 전진하는 문명의 통상적인 한 과정에 불과했었다는 점입니다.

[51] 지금 나는 방정식의 양쪽에 있는 개인과 사회적 요소와의 비중을 물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어느 정도까지가 단독의 개인이고 어느 정도까지가 자신의 사회 및 시대의 산물이겠습니까.

[52]우리는 가끔 역사과정은 「행진하는 행렬」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가들이 홀로 솟은 암벽 위에서 아래 경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나 사열대에 선 중요인물과 같은 위치에 자신을 놓고 생각한다는 위험성이 없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당치도 않은 이야깁니다. 역사가도 행렬의 한구석에 끼어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보잘것없는 인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행렬이 굴곡하여 혹은 우로 돌고 혹은 좌로 돌고 때로는 거꾸로 되돌아오고 함에 따라 행렬 각 부분간의 상대적인 위치도 항상 변해가게 마련입니다. (중략) 행렬 - 그와 더불어 역사가도 - 이 움직여 나감에 따라서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시각은 부단히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그가 처해 있는 행렬의 지점에 따라 과거에 대한 자신의 시각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54] 위대한 역사란 분명히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비전이 현재의 제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하여 빛을 받을 때에만 씌어지는 것입니다.

[58] 지금의 나의 목적은 두 개의 중요한 진실을 밝히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첫째로는 역사가가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부터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입장 자체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9]역사가는 역사를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역사의 산물인 것입니다.

[59] 격동기의 역사가들 중에는 그 저작 속에 하나의 사회와 하나의 사회질서가 반영되지 않고 여러 질서의 계기가 반영되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63] 나의 목적은 역사가의 연구가 자기가 그 속에서 일하고 있는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흐름 속에 잇는 것은 사건만이 아닙니다. 역사가 자신도 역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책을 집어들 때에는 표지에 적혀 있는 저자명을 찾아본다는 것 만으로서는 충분치 못합니다. 출판시일이나 집필시일도 아울러 유의하셔야 합니다. 만일 똑 같은 강물 속에 사람은 두 번 다시는 들어설 수 없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두 책을 쓸 수 없다는 말도 똑같은 이치에서 진실일 것입니다.

[65] 한 사회가 어떤 종류의 역사를 쓰고, 어떤 종류의 역사를 쓰지 못하는가 하는 것처럼 그 사회의 성격을 뜻 깊게 암시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66]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달라짐에 따라서 사회와 관점이 자기들과 어떻게 달라지는가 라는 차이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보다 유능하다는 점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역사적 입장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란 자기가 그러한 조건 속에 얼마나 깊이 사로 잡혀 있는가를 자각할 수 있는 감수성 여하에 달렸다고 봅니다.

[66]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십시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러한 이중의 시점 하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66] 인물 개개인에게서 촉발된 관심처럼 역사를 보는 눈에 오류와 불공평을 초래하는 것은 없다.

[77] 역사적 사건에는 무엇인가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역사 코스를 잡아 비틀어 놓는 성질이 있다.

[78] 역사상의 사실은 확실히 여러 개인에 관한 사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이 고립해서 행한 행동에 관한 사실도 아니요, 또한 진실한 것이건 상상적인 것이건 개인들이 자기 행동의 동기였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동기에 관한 사실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 있는 개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이며 또한 개인행동으로 하여금 왕왕 행위자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의 아니 때로는 반대의 결과까지를 초래하게 하는 사회적인 힘에 관한 사실인 것입니다.

[82] 한 시대의 위인이란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전해주고, 그것을 완성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그는 곧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83] 위대한 인물은 항상 현존하는 세력의 대표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존권위에 도전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가 그 창조를 돕는 세력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와 같이 기존 세력에 업혀서 위대하게 된 인물들보다는 크롬웰이나 레닌과 같이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어준 세력 그 자체의 형성을 조력한 위인들의 창조력이 보다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자기 시대보다도 너무 앞섰기 때문에 그 위대성이 후대에 가서야 겨우 인정받게 된 위인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 내지는 그 사역인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을 대표하고 창조하는 뛰어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83]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나는 그것을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금일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입니다.

[84]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인 것입니다.

[85] 과학은 사회에 대한 인간지식도 증진시킬 수 잇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당시의 일입니다. 그 후로 사회과학의 개념, 그리고 사회과학의 일부인 역사의 개념은 19세기를 통하여 점차로 발전해 나갔고, 자연계의 연구에 적용된 과학의 방법은 인간문제를 연구하는 데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86] 과학은 이미 정적인 것, 무시간적인 것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 과정을 취급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90] 우리들은 경험적 자료, 즉「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의 힘을 빌려서 원리에 대한 증거를 얻고, 다음으로는 이 원리를 토대로 하여 경험적 자료를 선택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90]「순환적」이라는 말보다도 「상호적」이라는 말이 보다 적절했을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다시 동일한 장소에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와 사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발견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1]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93] 죠르쥬 소렐(1847~1922)은 40대에 이르러서 사회문제에 관한 저작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기술자로서 일해 온 사람입니다만, 그는 어떤 상황 하에서는 과도한 단순화라는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특정한 요소를 분리해 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93] 우리들은 자기의 길을 의식하면서 걸어 나가야만 한다. 우리들은 타당해 보이는 부분적인 가설들을 시험해봐야 하며, 발전적인 수정의 여지가 항상 남아 있도록 잠정적인 근사치를 가지고 만족해야만 한다.

[94] 즉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을 찾아서 점진적으로 전진하며,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추출하고 다음으로는 추출된 사실을 가지고 해석을 테스트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96] 우선 언어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역사가로 하여금 과학자나 마찬가지로 일반화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97]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97] 역사가란 언제나 자신의 증거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일반화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99] 역사는 일반화 위에서만 생장할 수 있습니다.

[100]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가인 이상 사실과 해석과를 분리시킬 수 없듯이 이 양자도 서로 때놓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양자 중의 하나만을 우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102] 결국 내가 할 말은 역사학이 사회학적인 것으로 되면 될 수록, 사회학이 역사적인 것으로 되면 될 수록 쌍방을 위해서 더욱 이롭다는 것뿐입니다. 양자간의 경계선을 넓게 개방하여 상호간의 교류를 크게 펴 놓읍시다.

[102] 일반화라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한 경우의 사건에서 얻어낸 교훈을 딴 대목의 사건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104]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은 아닙니다. 과거의 빛에 비추어서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동시에 현재의 빛에 비추어서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양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북돋아 주는데 있습니다.

[105] 역사가에게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개별적인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특정된 사건에 대한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정된 것이란 단일한 것이고, 거기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109] 관찰자와 그 대상과의 사회 과학자와 그 자료와의 역사가와 그 사실과의 상호관계는 연속적인 것이고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역사와 사회과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128] 추상적인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워놓고서 그것에 의하여 역사적 행동을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편 모두가 이러한 기준 속에 자기들의 역사조건과 원망에 알맞은 특수한 내용을 담아 넣고 보게 마련인 것입니다.

[135]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입니다. 역사가는 내가 첫 번 강연의 마지막 대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왜냐’라는 물음을 부단히 추궁하는 것이며, 해명의 희망이 있는 한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가 - 아니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위대한 사상가 - 란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 혹은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왜냐’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137] 역사란 과거의 여러 사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정연한 질서 하에 정돈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만은 공인된 학설이었습니다.

[140] 과학은 ‘다양성을 향하여’ 그리고 ‘통합성과 단일성을 향하여’ 동시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것이고, 이 이중적인 그리고 명백히 모순되는 과정이야말로 지식에 대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41] 역사가에게는 과거를 이해하겠다는 충동이 있기 때문에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답을 단순화하고 어떤 해답을 따 해답에 종속시키고, 제사건의 혼돈과 특정된 제원인의 혼돈속에 질서와 통합성을 도입한다는 일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141] 역사가가 원인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원인을 단순화해 나가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42] 두 개의 매력적인 함정에 대해서 논해야만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역사에 있어서의 필연」이라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헤겔의 간계」라는 표딱지가 붙어있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있어서는 우연」이라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표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145] 결정론이란 모든 일에는 하나 혹은 몇 개의 원인이 있고, 원인들 중 하나 혹은 몇 개에 변화가 없는 한 그 일에도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신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148] 사실은 모든 인간 행동이 그것을 보는 견지에 따라서 자유롭기도 하고 결정되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158] 역사적 사건이 융성과정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퇴락과정을 거듭하고 있는 집단이나 국민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기회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이 우세한 법입니다. 시험의 결과란 결국 제비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라는 생각은 열등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60] 어떤 일을 운이 나빴다고 기술해버리는 것은 그 원인을 캐낸다는 귀찮은 의무를 면하려고 할 때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161] 제대로 된 역사가라면, 지금까지 우연사로서 취급되어 오던 사건도 그것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도 있고 적절한 의의를 부여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는 경우를 흔히 체험하는 것입니다.

[161]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사실의 구분은 엄격한 것도 아니요, 불변한 것도 아닙니다. 즉, 어떤 사실이건 일단 그 적합성과 중요성이 인정되기만 하면 역사적 사실의 지위로 승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역사가들이 원인을 취급하는 마당에 있어서도 다분히 유사한 절차가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의 원인에 대한 관계는 역사가의 사실에 대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상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은 역사 과정에 대한 그의 해석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의 해석은 원인의 선택과 정리를 결정합니다. 제원인의 상하관계, 하나 혹은 한 묶음의 원인이 그 밖의 원인에 대해서 지니는 상대적 의의, 이러한 것이 역사가의 해석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이라는 문제를 푸는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163] 인간정신은 관찰된 사실을 모아놓은 잡물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져서 그 중에서 「부적절한」것은 버리고 「적절한」것만을 골라내 가지고 이어붙이고 모양을 만들어서, 마침내는 지식이라고 하는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바느질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65] 역사란 역사적 의의라는 견지 하에서 선택과정인 것입니다. 역사는 현실에 대한 인식적 자세에 있어서의 선택체계라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과적 자세에 있어서의 선택체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65] 역사적 의의에 대한 규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 연쇄를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168] 역사에 있어서 인과의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데 열쇠의 역할을 다해주는 것은 틀림없이 목적이라는 개념입니다.

[170] 역사는 전총의 계승과 더불어 시작되며, 전통이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에 전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기 시작한 것도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해서였습니다.

[170] 역사가는 ‘왜냐’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라고 묻는 법입니다.

[173] 역사 과정이 향해 나가는 고올을 설정함으로써 전연 새로운 요소 - 목적론적 사관 -를 도입한 것은 유태인들이었으며, 다음에는 그리스도 교도들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역사는 의미와 목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만 그 대신 현세적인 성격을 상실했습니다.

[175] 자연적 자원에 대한 인간의 힘과 인류의 복지를 위한 그 지적 이용방법은 장래에 있어 무한히 발달할 것으로 본다.

[175] 우선 내 자신만 해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고 자랐다는 점, 그리고 나보다도 15년쯤 연장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나는 빅토리아시대의 낙관주의가 한창 무르익었을 당시에 자라났고 .... 아직도 - 나에게는 그 당시의 안쾌했던 어딘가 희망에 찬 기분이 남아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찬성이라는 점을 미리 인정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178]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다아윈의 혁명이 일어나 가지고서야 이러한 모든 난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자연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진보한다는 결과가 나온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의 근원인 생물학적 유전과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의 근원인 사회적 획득과를 혼동함으로써 보다 중대한 오해를 터놓게 된 것입니다.

[179]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181] 변화만 빨랐고 진보는 늦었던 과거 4백년간에 걸쳐서, 자유가 보존되고 지켜지고 넓혀지고 마침내는 이해되기에 이르렀던 것은 폭력과 끊임없는 악의 지배에 항거하기 위하여 하는 수없이 취해졌던 약자들의 집단적 노력에 의한 것이다.

[183] 사실 내가 만일 역사의 법칙이란 것을 만들어 내겠다고 애써 본다면, 어떤 시기에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집단 - 계급, 국가, 대륙, 문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 은 다음 시기에는 같은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취지의 것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집단에는 전시기의 전통과 이해와 이데올로기가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다음 시기의 요구 조건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당연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집단에게는 몰락의 시대로 보이는 것이 딴 집단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이라고 보인다는 일이 극히 흔하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보란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185]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진화는 기술의 발달에 비해서 결정적으로 뒤늦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요.

[185] 역사에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지도적 역할이나 주도권이 그럴 때마다 한 집단이나 지역으로부터 타집단, 타 지역으로 넘어갔습니다. 근대 국가가 일어나고 중심세력이 지중해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던 시기나 프랑스혁명의 시기 등은 근대에 있어서의 그 현저한 예였습니다.

[187] 진보라는 것은 추상적인 말입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 목적은 역사진행의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나타나는 것이지 역사의 외부에 어떤 출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7] 문명사회라는 것은 모두가 미래 세대를 위한 희생을 현존 세대에게 강조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희생을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이를 신의라는 명목 하에 합리화하는 태도와 대조되는 세속적인 합리화라고 하겠습니다. 뷰리의 말에 「후세를 위한 의무라는 원리는 진보의 관념의 직접적인 소산이다.」

[188] 사회과학 - 역사를 포함한 - 은 주체와 객관을 따로 떼어놓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고의 사이에 엄격한 분리를 강요하는 것과 같은 지식이론과는 조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자간의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의 복잡한 과정을 정당하게 다루어 나갈 새로운 모델이 필요합니다. 역사 사실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가가 인정하는 의의 여하에 의해서만 역사상의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 - 만일 우리들이 이 편의적인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면 - 이란 사실의 객관성일 수는 없는 것이고, 단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과의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190]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절대자는 변화이다.

[193]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할 열쇠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만 우리들은 역사에 있어서의 궁극적 객관성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미래를 조명하고 미래가 과거를 조명한다는 것은 역사의 합리화인 동시에 역사의 설명입니다.

[193] 우리가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할 때에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그것은 그 역사가가 자신의 사회적, 역사적 위치에서 오는 제한된 시야를 넘어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는 그 역사가는 자신의 비전을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따라서 그 안목이 전적으로 목전의 자기 위치에만 국한되어 있는 역사가들보다는 과거에 대한 더욱 깊고 더욱 영속적인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4] 과거를 취급하는 역사가들도 미래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야만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195] 역사 서술을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제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부단히 넓혀지고 깊어지는 통찰을 마련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에 대한 건설적인 견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에 대한 나의 해석인 것입니다.

[196] 과거 200년간에 걸쳐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일정한 방향을 따라서 진행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방향이 전체적으로 옳은 방향이라는 것, 즉 인류는 나쁜 상태로부터 좋은 상태로, 저급한 상태로부터 고등한 상태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204]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920년대의 역사가가 1880년대의 역사가보다도 객관적 판단에 가깝다는 것, 오늘날의 역사가가 1920년대의 역사가보다도 더 가깝다는 것, 아마도 기원 2000년의 역사가는 더욱더 객관적 판단에 접근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목전에 놓인 어떠한 고정 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놓여있는, 그리고 역사 코스의 진전과 더불어 발전하는 그러한 기준에만 의존하고 생존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것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206]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과 가치에 관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단서는 보통 우리들이 「진리」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의 양쪽에 걸쳐 있는 말로서 양쪽의 요소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습니다.

[207] 역사적 진리의 영역은 이러한 양극 - 가치를 떠난 사실이라는 북극과, 사실이 되고자 애쓰는 가치 판단이라는 남극 - 의 중간지대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란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의 양자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08]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 만일 여러분이 낡아빠진 말이라고 탓하시지 않는다면 - 진보입니다. 이리하여 나의 결론은 진보를 가리켜서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말한 액튼의 말에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08]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214] 애담 스미드와 헤겔의 제자인 마르크스는 세계가 합리적인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사고방식 하에서 출발하였습니다.

[214] 마르크스의 결론적인 견해를 종합해보면 역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삼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 하에서 일관된 합리적인 전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즉 그 하나는 객관적인, 주로 경제적인 법칙을 따라서 전개되는 사건의 진전이며, 그 둘은 이에 대응하며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이룩되는 사상의 발전이며, 그 셋은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형태하의 실천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혁명의 이론과 실천에 조합과 통합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222]인간세계에 대한 이성의 적용의 전진을, 그리고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인간능력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만일 필요하다면 낡은 표현을 빌려서 이것을 진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

[222]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조차도 객관적인 자연법칙을 탐구하고 확립한다는 것보다도 자연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고 자기 환경의 변형을 가능케 할 유용한 가설을 짜내는 데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성의 의식적인 활용을 통해서 환경을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을 변조한다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24] 이성의 확대라는 이러한 현상은 내가 지난 강연에서 개별화라고 부른 과정 - 문명의 발전에 수반된 개인의 기능과 직업과 기회의 다양화 - 의 한 국면에 불과합니다.

[224] 만일 개별화 과정에 대한 학문적인 실례를 원하신다면 과거 50~60년 동안에 나타난 역사나 과학이나 그 밖의 모든 개개 학문 분야에 있어서의 무한한 분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결과로 얼마나 엄청난 수의 다양한 개별적인 전문화가 초래되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226]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기회를 넓히고 따라서 개별화의 증대를 촉진함에 있어서 불가결한 강력한 수단입니다만 그 반면에 이익집단의 수중에 있어서는 사회의 획일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239] 액튼의 세대는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변화를 역사에 있어서의 발전적 요인으로 본다는 감각과 이성은 변화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라는 믿음입니다.

[243] 그러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실은, 영어사용세계의 인텔리나 정치 사상가들이 이성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보다도, 부단히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주도한 감각이 감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243] 중요한 일은 지금에 와서 이 변화라는 것이 성취, 기회, 진보 등으로서 생각되지 않고 공포의 대상으로서 생각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44]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며 위대한 과학자의 낡은 말귀를 가지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

[247] E.H.카의 사관이 일견 미온적이고 유동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핵심에 믿을 수 있는 확고한 신념과 낙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이상과 같은 상대성에 철한 사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격동하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사안과 달관을 몸소 구현하고 있는 선각자를 목도할 때에 학문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와 용기는 다시 한번 새로워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칠순을 바라보는 노역사학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다른 역사가들의 견해를 비교해가며, 친절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말투와는 달리 그 내용은 부드러움을 너머 너무나 강력한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상식으로 고착되었던 ‘역사는 고정되어 있다.’라는 사관을 ‘역사는 변한다.’라는 혁신적인 말로 여지없이 깨버렸기 때문이다. 즉 저자가 19세기 주류를 이루던 랑케의 실증사학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어느 광고의 멘트처럼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반기를 든 것이다. 아니 그동안 키워준 아버지를 부정하고 독립하여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6가지 부분, 즉「역사가와 사실」, 「사회와 개인」, 「역사와 과학과 도덕」,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넓혀지는 지평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분마다 저자의 역사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역사는 변한다.’는 기본 개념을 토대로 역사와 관련된 문제들, 역사의 주체, 역사의 대상, 주변 환경 등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역사는 과거 그대로의 기록이다.’이라는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의 사관과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이탈리아 역사 철학자 크로체의 양극단적인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의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에는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효소가 촉매제 역할을 한다. 역자도 밝혔던 것처럼, 저자의 사관이 일견 미온적이고 유동적이라는 느낌도 있으나 이는 이중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눈을 통해 나왔다고 생각된다.

“사실은 자루와 같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설 수 없다.”(p12)

세상에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과거의 사실 속에서 역사가의 불가피한 선택과 해석에 의해 탄생된 산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역사철학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가의 해석이나 선택은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배경은 개인이 속한 사회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요컨대 역사가 자신도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아주 적절한 비유가 책 속에 있어 소개한다.

“우리는 가끔 역사과정은 「행진하는 행렬」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가들이 홀로 솟은 암벽 위에서 아래 경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나 사열대에 선 중요인물과 같은 위치에 자신을 놓고 생각한다는 위험성이 없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당치도 않은 이야깁니다. 역사가도 행렬의 한구석에 끼어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보잘것없는 인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행렬이 굴곡하여 혹은 우로 돌고 혹은 좌로 돌고 때로는 거꾸로 되돌아오고 함에 따라 행렬 각 부분간의 상대적인 위치도 항상 변해가게 마련입니다. (중략) 행렬 - 그와 더불어 역사가도 - 이 움직여 나감에 따라서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시각은 부단히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그가 처해 있는 행렬의 지점에 따라 과거에 대한 자신의 시각도 결정되는 것입니다.”(p52)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개인들 간의 대화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의 대화인 것이다. 역사는 현재라는 거울 속의 비추어진 과거인 셈이다.

지금까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였다. 이제는 그 대화방식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알아볼 순서이다. 대화를 하려면 대화의 목적과 방식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자신의 말만 하는 수다에 불과하고 일관된 방식이 없다면 알맹이 없는 잡담에 불과하다. 저자는 그 대화의 목적이 진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진보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이다.

“인간세계에 대한 이성의 적용의 전진을, 그리고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인간능력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만일 필요하다면 낡은 표현을 빌려서 이것을 진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p222)

이는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한 세대에 의해서 획득된 기술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이해력과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역사의 목적이 과학과 동일하며, 일반화를 통해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려는 방법론도 과학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여 ‘역사는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변화를 역사의 발전적 요인으로, 이성을 변화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이성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미래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적인 예로 동해바다의 표기 문제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라는 문제를 바라볼 때 역사가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기록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가는 모든 영향에 대해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과연 역사가 현실적으로 힘의 논리에 초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단지 책속에 있는 저자의 글로 그 의문에 대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p208)

<역사란 무엇인가>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가 한창일 때 자라고 연구한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믿던 한 역사가의 낙관적인 믿음의 소산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환경 파괴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가 과연 진보인지에 대한 명제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처럼 저자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비록 완성하지는 못하고 메모만 남겼지만 제2판의 서문에서 그는 과연 진보라는 것이 맞는 이야기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처음 이 책이 나온 시대는 비록 최강대국의 지위는 잃었지만 양대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인의 자긍심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판을 준비하던 80년대 초는 분명 낙관의 시대는 아니었다. 지난 20세기는 점점 심화되는 동서진영의 대립, 프랑스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이슬람의 대두와 전쟁 등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을 맞이했던,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극단의 시대’였다. 이 때 역사가는 무턱대고 역사의 진보라는 사념에 의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려고 2판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볼 수 없겠지만 그 책의 결론이 자못 궁금하다. 과연 그는 절망을 보았을까? 그래도 희망은 인류의 역사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라는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무질서 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엔트로피 세계관을 제시했다. 인간의 삶은 에너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유용한 에너지는 물질적 토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나 지구 내에 있는 자원은 제한되어 있어 언젠가 인간은 퇴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역사 속에 축적된 지식과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환경 지배력을 강화하여 인간에게 안정적으로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인류의 진보를 강조했다. 두 관점은 인간을 바라보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려한다는 리프킨의 세계관을 카가 생전에 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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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5.06 11:06:01 *.70.72.121
김일성 죽음을 예언했던 무녀 심진송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그 이후 그녀가 또 다른 국사의 위기를 예고 했더랬는데 다행이 그 일은 발생하지 않았죠. 그녀의 해명은 그녀가 기도해서 막았기 때문 이라는 거였어요.

학자들이 고뇌하고 문제점을 내놓으며 대중을 일깨우는 위대한 강점 중의 하나는 자신이 염려하는,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세상사를 인류의 모두가 함께 모색하고, 진보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도록 헌신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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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5.06 11:19:23 *.145.80.189
What is history?
어쩌면 역사를 사실데로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지도 모른다. 역사는 거짓이다. 아니 조작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인물도 있다. 그건 역사학자의 이념과, 당시의 정치적압박에서 기록되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를 폭군이라 했다가, 몇십년 지나지 아니해서 자기이념을 펼치는 높은 정치인이라 하는 걸 짧은 우리의 생에서도 발견 되듯이, 그걸 E,H, Carr이 복잡하게 서술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를 공부하지는 않지만 "역사의 진실을 보는 눈"을 우리 모두는 가져야 함이다. 좋은 글 잘 읽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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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5.06 13:28:15 *.18.196.39
창용님 잘 정리하셨네요.

사실 카도 시대의 산물이기에 오늘날 그의 역사관 모두 맞다고 할수는 없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는 사실이고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점과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사실에는 공감이 가요.

중요한 것은 역사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가
로 수렴된다고 봐요. 저는 이것을 인간존엄으로 표현했죠.

서로가 서로를 돕는 세상 그리고 서로를 아름답게 해주는 세상
그런 세상위에서 모든 사고와 사상이 응축되었으면 합니다.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좋을 결실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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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5.07 02:19:18 *.112.72.193
와.. 저자 소개 정말 좋군요.
형의 요즈음의 관심 주제인 글쓰기와 잘 연결되었네요. 역시 '화두'가 중요하다니깐요. ㅎㅎ 그나저나 사부님 말씀 정말 좋다. 글은 우물과 같다. 캬. 명심해 두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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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5.07 09:37:41 *.99.120.184
써니님/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지식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초아샘 / 그동안 역사에 무지했던 자신이 서글퍼집니다. 5월은 과거 속에 푹 빠져 볼랍니다.

도명수님/ 모범적인 선배님의 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세상의 방향은 어울림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사람과 사람과의 조화 이런 어울림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옹박/ 조교로서 수고가 많은데 이렇게 댓글까지 달아주어 고맙다. 한번 하나씩 해결할려고 해. 능력이 부족하니 내용 소화하기에 급급해. 그동안 독서량도 부족했지만 영역도 편협했던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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