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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8일 10시 40분 등록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라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인 것입니다. (p. 31)

E. H. 카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연구원 매 과제의 초입에서 발목을 잡고 끈질기게 한 주를 애태우게 만드는 '저자 탐색'의 의미를 여기서 다시 한번 발견한 것은 몹시 반가운 일이었다. 과거에 이미 발생한 '사실'조차도 그것을 다루는 역사가의 마음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면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빼곡히 나열되는 일반적인 책에서 '저자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은 확인하는 작업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아울러 책이 곧 저자의 거울이다,. 책 속의 저자를 놓치지 마라. 그들은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 저자의 정체는 곧 책 속의 그다. 다시말해 일상 속의 저자, 경력 속의 저자를 통해 그를 잠시 가늠하고 , 책 속의 저자로 조율하라. 어떤 사람은 책 속에서 멋있게 말하고, 일상과 경력은 책 속의 생각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과 경력과 다른 책의 기조를 파악해야 속지 않는다. 일상과 책이 서로 비추게 하여 밝게하라. _구본형

E. H. 카의 이야기가 길현모 선생님의 목소리로 흐르고, 여기에 다시 구본형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이 보태지니 '저자 탐색'이 그저 연구원 과제의 일부가 아니라 책을 통해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방법의 큰 축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획득형질의 전승'은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스승에게서 나온 따스한 생각이 그 제자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세대를 뛰어넘는 '이어짐'과 '나아짐'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E. H. Carr에 대하여…
카는 런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머천트 테일러 학교(Merchant Taylors’ School)에서 공부한 그는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하여 고전학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부터 1936년까지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1919년 파리 평화 회담에 영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베르사이유 협정 일부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여했다. 1920년대에 라이가와 라트비아 공화국의 영국대사관으로 파견되기 전까지 국제연맹과 관련된 영국외무부 지사에서 일했다. 라이가에 있는 동안 카는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매료되었고 러시아의 생활과 다양한 면을 다룬 몇 편의 작품을 썼다.

1936년, 에버리스트위쓰(Aberystwyth), 웨일스 대학의 국제 정치학 교수가 되었고 국제 관계 이론 분야에 대한 업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 '20년의 위기(The Twenty Years' Crisis)'은 이 때인 1939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 1941년부터 1946년까지 타임지의 부주필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포드 대학(Balliol college, Oxford)에서 정치학 교수로 근무하다가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카의 작품으로는 국제관계에 대한 중요한 논문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4권, 1950~1978)'과 도스토예프스키 전기(1931), 칼 마르크스 전기(1934) 그리고 미하일 바쿠닌 전기(1937) 등이 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소비에트 국민들의 영웅적 행위에 감명받은 그는 어떻게 소비에트 연합이 독일의 침략을 견뎌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1917년부터 집필 당시에 이르는 소비에트 연합의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의 모든 면에 대한 완전한 역사를 기록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이다.

E. H. 카의 주요 작품들
Dostoevsky (1821-1881): a New Biography, New York: Houghton Mifflin, 1931.
The Romantic Exiles: a Nineteenth Century Portrait Gallery, London: Victor Gollancz, 1933.
Karl Marx: a Study in Fanaticism, London: Dent, 1934.
Michael Bakunin, London: Macmillan, 1937.
The Twenty Years Crisis, 1919-1939: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Relations, London: Macmillan, 1939, revised edition, 1946.
Conditions of Peace, London: Macmillan, 1942.
Nationalism and After, London: Macmillan, 1945.
A History of Soviet Russia, 10 volumes, London: Macmillan, 1950-1978.
The New Society, London: Macmillan, 1951
What is History?, 1961, revised edition edited by R.W. Davies, Harmondsworth: Penguin, 1986.
1917 Before and After, London: Macmillan, 1969; American edition: The October Revolution Before and After, New York: Knopf, 1969.
The Russian Revolution: From Lenin to Stalin (1917-1929), London: Macmillan, 1979.
From Napoleon to Stalin and Other Essays,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0.
The Twilight of the Comintern, 1930-1935, London: Macmillan, 1982.

길현모 교수님에 대하여
1923년 평북 희천에서 훗날 제물포고 초대교장이 되는 길영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 사학과 출신 고 민석홍, 고 양병우, 노명식 전 서울대 교수와 함께 광복 이후 국내 서양사학계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1963년 서강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전해종(동양사), 고 이기백(한국사), 이보형·차하순(서양사) 교수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의 전성시대를 연 주역이었다. (신제 박사와 구제 박사의 변화기에 서울대에서 서강대로 옮기셨다고 한다.)

군부독재를 비판해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한 차례씩 해직의 아픔을 겪었지만 꼿꼿함을 꺾지 않았다. 1983년 한림대 교수로 복직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66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 고인은 실증사학의 대명사인 랑케 사학을 비판하는 논문과 자본주의 이행논쟁 등에 대한 논문을 남겼다. 길현모 교수는 광복 이후 국내 서양사학계의 초석을 놓은 학자로 평가된다.

(아무리 뒤져도 길현모 선생님에 대한 자료는 구본형 선생님이 쓰신 글만한 것이 없어서 그 글을 링크합니다. '길현모 선생님, 중요한 길목마다 그 분이 거기 서계셨다' <-- 클릭하세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 할 때에 우리들의 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라는 보다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답의 일부를 이루게도 되는 것입니다. (p. 7)

먼저 사실을 틀림없이 입수하라. 그리고 나서 해석이라는 유동하는 모래 속으로 위험을 걸고 뛰어 들어라. (p. 10)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 _하우스만 (p. 11)

사실은 자루와 같은 것이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집어 넣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설 수 없다. (p. 12)

우리들이 책으로 읽는 역사는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결코 사실 그것은 아니고 오히려 인정된 판단의 체계에 불과하다. _조프리 베라클루 (p. 17)

그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우리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슈트레제만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고 그가 원했던 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고 그가 원했던 일,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고 싶었던 일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p. 25)

영국의 역사가들이 역사철학의 문제에 몰입하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p. 27)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라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인 것입니다. (p. 31)

사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등 심원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일쯤은 대학생들도 일상 실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만일 어떤 머리 좋은 학생이 성쥬드(St. Jude) 대학의 대학자 죤스(Jones)의 책을 읽어보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 그는 성쥬드 대학의 친구를 만나서, 죤스 신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역사책을 읽을 때에는 항상 역사가의 머리 속에서 오고가는 사색의 음을 잡아내야 합니다. 만일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역사가 쪽이 둔재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p. 33)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한다는 것도 아니요, 과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도 아니요,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써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p. 36)

보는 각도가 틀릴 때마다 山의 모양이 틀리게 나타난다고 해서 山에는 객관적인 모양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없다든가, 무한한 모양이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사실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해석이라는 것이 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해서, 또한 현존하는 해석이 어느 것이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 못된다고 해서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모두 매한가지라든가, 역사상의 사실이란 본래부터 객관적 해석에 의하여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든가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p. 38)

우리에게 있어서는 의견의 허위성이 곧 그 의견에 대한 반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생명을 북돋아주고 생명을 보존해 주고 종족을 보존해 주고 더 나아가서는 종족을 창조해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p. 39)

사람이란 아주 어린 유아기나 극단한 노년기를 제외하고서는 전적으로 자기 환경 속에 말려들거나 무조건 거기에 예속 당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전적으로 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잇거나 그에 대한 무조건의 지배자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p. 41)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p. 42)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라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의 문제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를 논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역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여러분의 의견은 어차피 이에 반대되는 똑같이 일방적인 또 하나의 의견에 의하여 수정받게 마련입니다. (p. 45)

미개인은 문명인보다도 개인적인 경향이 덜하고 보다 철저하게 사회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인류학자들은 보통 말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의 기본적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단순한 사회는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보다도 획일적입니다. 그 의미는 그러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다양한 기능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요구하거나 그러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일이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p. 47)

여러분이 역사책을 집어들 때에는 표지에 적혀 있는 저자명을 찾아 본다는 것만으로서는 충분치 못합니다. 출판시일이나 집필시일도 아울러 유의하셔야 합니다. (p. 63)

나는 첫 번 강연 때에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에다 나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십시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러한 이중의 時點下dptj 역사가를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p. 66)

이 세상에는 명칭 이외에는 보편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같은 명칭을 가진 사물도 그 하나하나는 모두가 개별적이고 단일한 것이다. _홉스 (p. 96)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p. 97)

'역사가를 역사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 주는 것은 일반화입니다' _엘튼 (p. 99)

경험을 가다듬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하는 類別조차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p. 108)

볼세비키 당원들은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끝장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혁명도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치를 불신하고, 나폴레옹을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경제적 현황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 입각하여 다가오고 있는 호경기나 불경기를 에언했다고 합시다. 만일 그가 대권위자이고 그의 의론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가 예언을 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예언한 사태의 도래르 fehq게 되는 것입니다. (p. 109)

그들은 아마도 말로 표시는 안할 망정 강제와 착취의 諸방책이 적어도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공업화에 따른 代價라는 점에 치중해 가지고 차라리 진보의 손길을 멈추고 공업화를 안했던 편만 못했다고 말한 역사가라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만일 그런 역사가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 영국의 작가, 평론가)이나 밸록크(J. H. P. Beloc, 1870~1953, 영국의 역사가, 작가)의 계열에 속한 사람일 것이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제대로 된 역사가치고 이런 사람을 상대해 줄 사람이란 없을 것입니다. (p. 124)

과학과 역사와의 대립이라는 것도 영어 이외의 언어에서는 전연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만을 보더라도 이 편견이 얼마나 옹졸한 섬나라 근성에서 나온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p. 131)

연구의 목적은 동일합니다. 즉 자기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p. 133)

위대한 역사가(아니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위대한 사상가)란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 혹은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왜냐」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p. 136)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원인의 목록을 앞에 놓고서는, 그것을 질서지어야 하겠다, 諸원인의 상호관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거기에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하겠다. 혹은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말투를 따른 다면) 「결국에 가서는」, 「궁극적으로는」 어떤 원인과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 즉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하겠다는 직업적인 강박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떠한 원인을 내세우는가에 따라서 어떠한 역사가인가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p. 140)

그런데 이미 송장이 된 말 등어리에 채찍질을 하면서 산 말의 외관을 꾸며온 것이 바로 포퍼 교수와 이자이아 벌린卿이었던 것입니다. 이 혼란을 가셔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겠습니다. (p. 145)

옛날에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신의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자이아 벌린卿은 인간행동은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행동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것을 반대합니다만, 이 것 역시 동일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p. 147)

어떤 일을 운이 나빴다고 기술해버리는 것은 그 원인을 캐낸다는 귀찮은 의무를 면하려고 할 때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p. 161)

인간정신은 관찰된 사실을 모아놓은 잡물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져서, 그 중에서 「부적절한」 것은 버리고 「적절한」 것만을 골라내 가지고 이어 붙이고 모양을 만들어서, 마침내는 지식이라고 하는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바느질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관주의가 지나치다는 위험성을 약간만 제한하고 본다면 이 말은 역사가들의 정신활동의 양상을 묘사한 말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p. 163)

이상과 같은 절차는 철학자들은 물론 역사가들의 일부에게까지도 당황과 충격을 초래할 것입니다. (중간 생략)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합시다. 죤즈는 파티에서 술을 보통량보다 과음하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브레이크가 시원치 않은 차를 몰고, 앞이 도무지 안 보이는 브라인드 코너에 이르렀을 때에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를 사려고 길을 건너던 로빈슨을 치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혼란이 가신 뒤에 우리는 (가령 경찰서 같은 데에) 모여서 이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운전하는 사람이 반쯤 취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을까요? (이 경우라면 형사사건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시원치 않은 브레이크 때문이었을까요? (이 경우라면 불과 일주일 전에 그 차를 오버 홀한 수리점에 대해서 어떠한 조처가 있어야 하겠지요.) 혹은 브라인드 코너 때문이었을까요? (이 경우라면 도로 주관 당국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하겠지요.) 마침 우리들이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을 때에 두 사람의 名士(그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가 실내에 뛰어들어와 가지고, 만일 그날 밤 로빈슨이 담배를 떨어뜨리지 않았던들 길목을 건너지도 않았을 것이고 치어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로빈슨의 담배에 욕망이야말로 그의 사인이고, 이 원인을 무시한 조사란 모두가 시간의 낭비이며 그로부터 나온 결론도 모두가 무의미하고 무익할 뿐이다라고 당당한 능변으로 조리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도대체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거침없이 흐르는 웅변을 가로막고 정중한 태도로 그러나 단호하게 두 사람의 방문자를 도어로 밀어낼 것이며 수위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들을 다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준 다음에 다시 조사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해자들에게 우리들은 무슨 답변을 줄 수 있을까요. 물론 로빈슨은 끽연자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에 있어서의 기회와 우연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철두철미 진실하고 철두철미 논리적입니다. 거기에는 「경이의 세계에 간 앨리스」(Alice in Wonderland)라든가 「거울속의 세계」(Through the Looking Glass)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도 같은 빈틈없는 논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나로서도 옥스포드풍의 학식의 원숙된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작품들을 찬양하는 마음에 있어서 남에게 뒤질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와는 방식을 달리하는 나 자신의 논리는 다른 곳에 간직하고 싶습니다.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Lewis Carroll의 본명, 옥스포드 출신의 영국의 수학자겸 작가(류의 방식은 역사의 방식은 아닌 것입니다. (p. 164~165)

인간의 사고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어떤 설명은 합리적이라고 보고 어떤 설명은 합리적인 것이 못된다고 보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어떤 목적을 위한 유용한 설명과 그렇지 못한 설명과를 갈라 놓는 일을 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p. 167)

나는 좀전에 버트란드 러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우연히 읽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이것은 내가 아는 한 강한 계급의식을 노출한 그의 유일한 말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대체로 봐서 오늘날의 세계에는 백년 전에 비해서 자유가 퍽 적다.」 나로서는 자유를 측정하는 척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소수의 감소된 자유와 다수의 증대된 자유와를 어떻게 결산지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측정의 규준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로서는 버트란드 러셀의 말은 그야말로 엉망이라고 할 밖에 없습니다. (p. 176~177)

획득형질의 전승이라는 것을 생물학자들은 부정합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p. 179)

이자이아 벌린卿은 「진보와 반동이라는 말은 그게 남용되어 오기는 했지만 결코 공허한 개념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이 점에 관해서는 나도 그와 견해를 같이 한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p. 184)

문명사회라는 것은 모두가 미래 세대를 위한 희생을 현존 세대에게 강조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희생을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이를 神意라는 명목하에 합리화하는 태도와 대조되는 세속적인 합리화라고 하겠습니다. (p. 187)

역사가는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한다」 _네이미어(Namier) (p. 193)

나는 지난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諸사건과 점차적으로 우리들 앞에 출현하게 될 미래의 諸목적과의 대화라고 말씀드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p. 194)

역사 서술을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諸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부단히 넓혀지고 깊어지는 통찰을 마련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거에 대한 건설적인 견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에 대한 나의 해석인 것입니다. (p. 195)

역사상 「우리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은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뿐이다」 _헤겔 (p. 199)

예언자는 자기 시대에 앞서 태어나는 것 (p. 203)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920년대의 역사가가 1880년대의 역사가보다도 객관적 판단에 가깝다는 것, 오늘날의 역사가가 1920년대의 역사가보다도 더 가깝다는 것, 아마도 기원 2000년의 역사가는 더욱더 객관적 판단에 접근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p. 204)

첫 번 강연에서도 말씀드린 바와도 같이, 역사가란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의 양자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p. 207)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진보입니다. (p. 208)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p. 208)

철학자들이 해온 일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한다는 일뿐이었지만, 참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일이다. (p. 215)

프로이드가 한 일은 인간행위의 무의식적인 근원을 의식과 합리적인 탐구 앞에 폭로함으로써 우리들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p. 218)

오늘날의 경제학은 이론적인 수식의 조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一者가 타자를 어떻게 밀어 제끼는가를 연구하는 실제적인 학문이 되었습니다. (p. 220)

급진주의자(急進主義者)들이 승이에의 확신을 구가(謳歌)할 때에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은 그 콧등을 내려갈긴다. _트레바.로퍼 (p. 240)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실은, 영어사용세계의 인텔리나 정치사상가들이 이성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보다도, 부단히 움직이는 서계에 대한 주도한 감각이 감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p. 243)

누가 뭐라건 나 자신은 변함없이 낙관주의자입니다. 루이스 네이미어卿이 나에게 정강(政綱)이나 이념(理念)을 피하라고 훈계할 때에, 오크쇼트 교수가 나에게, 우리들은 어떠한 특정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일은 아무도 보오트를 뒤흔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할 때에, 포퍼 교수가 하잘 것 없는 단편적 대책의 덕분으로 애용하는 T형 고물차를 언제까지나 몰고 다니기를 원할 때에, 트레바 로퍼 교수가 떠들어대는 급진주의자들의 콧등을 내려칠 때에, 모리슨 교수가 공정한 보수정신으로 집필된 역사를 옹호할 때에,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며 위대한 과학자의 낡은 말귀를 가지고 대답할 것이다:「그래도 역사, 그것은 움직인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책에 짤막하게 인용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글귀로 기억되는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저 고전의 한 자락처럼 내게 인식되어 있었다. 처음 받아 든 책의 얇고 조그마한 외관은 내 마음을 살짝 풀어주었다. 요 몇 주 동안 눈이 빠지도록 시간에 쫓겨서 읽었던, 베개로도 쓸 수 있을 법한 책들에 비하면 거저 먹기로 보였다. 미래의 달, 4월을 보내고 맞이한 역사의 달 5월은 그런 장밋빛 희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 허술한 기대는 책을 열고 몇 페이지 읽어나가기도 전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역사가의 임무는 「그것이 진정 어떠하였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여주는데 있을 따름이라」 랑케

카는 역사의 도덕화를 규탄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랑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책의 앞부분을 연다. 그는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의 수집과 그 정확성만을 추구하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비판한다. 또한 역사가의 임무에서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역사가가 처한 환경으로부터 역사가를 분리하여 해석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결국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고 사상의 역사'라는 크로체와 콜링우드의 사관은 카에게 있어 하나의 귀착점이 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p. 43)

책의 첫 장을 마무리하며 드러난 주장은 책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극단적인 견해를 지양하고 상호작용을 존중하는 저자의 기본적인 태도를 잘 나타낸다. 이에 대해 역자 이신 길현모 선생님은 서평을 통해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완결된 이론일 수도 없고 이로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처럼 저자인 카는 '철학적 방향'을 보여준다기 보다 '방법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학으로 치면 자세한 병의 진단과 치료를 다루는 전문의학서적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실질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을 다루는 건강실용서적에 가깝다고 하겠다.

카는 역사와 과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그리고 역사는 특수한 것을 다룬다는 지적에 대해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정정한다. 또한 역사학과 현대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일반성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과학자와 데이터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카가 보여주는 과학과 산업화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은 뒤에 나타나는 진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짐작하게 하는 한편, 오늘날에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산업화에 대한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모습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p. 208)

이런 그의 진보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추구는 '사회와 개인', 역사에 있어서 '도덕적 판단'과 '인과 관계'를 다루는 내내 일관되게 드러난다. 비록 책의 마지막 장인 '넓어지는 지평선'에 이르러 그가 드러내는 영어사용국가에 대한 견해들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그의 주장의 일반성을 떨어뜨리고 말았지만 스스로를 망설임 없이 '낙관주의자'라고 칭한 노학자의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입니다.'라는 마지막 한마디는 이를 넘어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책 장을 덮고 보니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린 느낌이다. 미래를 예측한다고 촐랑대면서 느꼈던 공허함이, 영어 단어를 남발하면서 느꼈던 껍데기뿐인 허전함의 근원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저 멀리서 빈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하지만 애타게 나를 부르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사'였던 모양이다. 바닥을 다지지 않고 집을 짓는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그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해온 나의 부족함을 탓하며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다른 연구원의 '헐떡거리며 읽었다'는 표현을 보고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빈 속으로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쯤에서 한숨 한번에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주변을 둘러보니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잘했다. 잘했다. 연구원 하기를 참말로 잘했다' 부족함에 주저앉는 대신 불쑥하고 솟아오를 오기가 생긴다. 채워가는 재미를 만끽할 일만 남았다.

좋았던 점
좋은 번역의 힘
‘역사란 무엇인가’, E.H.카, (길현모 역 - 역자가 중요함)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연구원 모집 공고를 접하고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던 변.경.연 홈페이지에 구본형 선생님께서 올리신 '길현모 선생님, 중요한 길목마다 그 분이 거기 서계셨다'라는 글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은 그런 내 생각을 추측을 넘어선 확신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구본형 선생님께서 길현모 선생님의 번역본을 선택하신 이유가 단순히 최근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론적인 주장과 견해들은 이런 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정중한 표현에 부드럽게 쌓여서 본래 강의로 진행되었던 현장의 느낌을 살려주었다. 책 전체에 흐르는 영국 역사학자의 이질적인 표현들은 길현모 선생님의 부드러운 필치를 통해 본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히 다듬어졌다. 물론 책이 처음 번역되었던 당시와 현재 사이에는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있는 관계로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표현들이 간혹 맥을 끊기도 하지만 길현모 선생님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번역은 세련되고 매끄럽다. 좋은 번역은 시대를 넘어선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예의 힘
다른 이의 주장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제시한 인용문과 예시들은 대단히 짜임새 있는 모습으로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그 중에서도 '클레오파트라의 코'라고 이름 붙인 역사의 우연성에 대한 부분에서 포퍼 교수와 이자이아 벌린경(卿)의 주장을 파헤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음주 운전자와 끽연자의 교통 사고(p. 164~165, 위의 인용문 참조)' 이야기는 딱딱한 역사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유쾌하고 시원한 것이었다. 추상적인 주장을 단번에 눈 앞에 보이는 현실로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저자의 강점이라고 하겠다. 잘 만들어진 혹은 잘 수집된 구체적인 예제는 말하는 이의 주장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긍정의 힘
책의 전반에 걸친 저자의 긍정적인 목소리는 읽는 내내 뿌리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영국인 특유의 시선들조차도 인류의 진보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목소리에 희석되어 별다른 거부감 없이 흡수된다. 따끔한 비판조차도 긍정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질 때 그 의미가 빛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유식함을 가장한 흠집내기 식의 태도만으로는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최근 몇 권의 북리뷰를 통해서 꼬투리 잡기 식의 건전하지 못한 비판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역사, 그것은 움직인다'는 그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아쉬운 점
책의 구성
1961년에 있었던 연속강의 내용을 TV 프로그램과 잡지에 맞게 재조정하고, 또 이를 단행본으로 엮으면서도 강의를 진행하는 것과 같은 포맷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강의 형식이 유지된 탓인지 책은 크게 몇 개의 장으로 나뉘었을 뿐 세부적으로는 나뉘지 않고 덩어리로 존재한다. 지난 과제 중에 조안 시울라는 너무 자세하게 목차를 구성하는 바람에 내용의 강약과 리듬을 조절하지 못했다면, 카는 너무 큰 단위로 묶어놔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간에 길을 잃도록 방치한다. 각 장을 적절한 계층으로 구성된 세부 장들로 나눈다면 책을 읽어나가는 리듬을 살리고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빛나는 예시, 너무 많은 인용
앞서 장점을 이야기할 때, 적절하고 정곡을 찌르는 좋은 예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와는 달리 너무 자주 등장하는 인용은 어디까지가 그의 주장이고 어디부터 타인의 생각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카는 책에서 멋지게 인용한 유명한 역사학자와 철학자의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 나 같은 독자가 자신의 책을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런 인물들의 뒷배경을 제대로 알 길이 없는 초보자는 스스로의 무지를 탓하며 머리통을 쥐어박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쓰게 될 책에서는 적절한 수준에서 인용문을 조절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무식한 자(者)의 희망사항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라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의 문제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를 논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역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여러분의 의견은 어차피 이에 반대되는 똑같이 일방적인 또 하나의 의견에 의하여 수정받게 마련입니다. (p. 45)

이와 비슷한 이유로, 새삼스럽게 국문전용과 국한문혼용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문 사용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21세기의 독자들에게 대부분의 주요 용어들이 한문으로만 표기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한문의 난이도가 높지 않다는 점과 풀어서 제공된 자세한 설명이 한문 부분의 어려움을 대부분 덜어주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등장하는 한문들은 비한문세대를 흡수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사실 한문에 대한 희망사항은 책 본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뒤에 언급할 길현모 선생님의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때문이다.)

아마도 최근에 출판된 다른 출판사의 책에서는 이 부분이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길현모 선생님의 번역본이 가지는 가치를 고려할 때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는 요즘의 것으로 바꾸고 한문 부분은 한글과 같이 표기하는 방식으로 보완해서 새롭게 책을 출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에 캠브리지 대학의 연속 강의로 이루어진 내용이 BBC 방송과 주간지 리스너(Listener)를 통해 일반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 후 맥밀란(Macmillan)사에서 출간되었고 다시 1964년에 펠리칸(Pelican)의 포켓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1966년 길현모 선생님에 의해 최초로 번역 출판되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던 중 우연히 길현모 선생님께서 이 책을 번역하시기 전인 1964년 7월, 역사학회에서 발행한 역사학보에 서평을 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회도서관에도 역사학보 원본이 없어서 실망하던 차에 운 좋게도 원본 자료를 스캔한 PDF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이 글에 첨부하는 길현모 선생님의 서평은 일반인의 시선이 아니라 국내의 서양사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가 바라본 '역사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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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5.08 13:08:03 *.249.167.156
이런 자료들을 다 어찌 찾으시는 건지^^ 그 노력과 실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용히 국회 도서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에 담아둡니다. 이번주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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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5.08 15:37:21 *.227.22.57
도윤~ 찾는 노력을 줄이고 쓰는 노력을 더 해야 할까봐. 점점 길을 잃는 느낌이네. 머리가 새하얗게 텅빈 느낌이야. 좀 힘드네. ㅎㅎ 도윤! 널 보고 힘을 얻고 있으니, 계속 좋은 글 부탁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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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5.08 19:17:59 *.167.160.33
향산!
구본형 선생님이 세상에 이름을 내게 된 것은 "변화 경영"을 깨달아, 자신의 이념을 세상에 보임으로써 시작 된 것이다. 그로써 변화경영의 일인자가 되었다.

향산!
북 리뷰를 하면서 내가 이 세상에 던질 메세지는 무었인가를 깊이 생각 하면서 글을 쓰시게.
그것이 완성되어서 새로운 물결, 신 사조가 우리나라를 넘쳐서 세계로 펼처 나가길 빌겠네.

점점 글이 쉬워진다. 좀더 쉽게, 좀더 낮게, 노동자도, 중학생도, 고교생도 읽을 수 있는 글을 만들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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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5.09 10:22:03 *.180.48.239
내가 저자라면에 소제목으로 달아둔 것들 적절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한줄의 말로 표현해 내니 읽은 이가 길을 잃지 않네요. 리뷰 잘 봤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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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5.09 12:43:56 *.75.15.205
앞 머리에서 향산이 사부님과의 첫 대면에서 눈물을 주르르 흘린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당신의 열병이 점점 깊어감을 느껴요. 카의 실물을 보게 해 줘서 고마워요. 무지 잘 생겼네요. 넓은 이마, 자존심 강한 코, 크고 고집 스런 눈, 야무진 입이 완벽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섬세하군요. 저자가. 카는 음악을 좋아하실래나? 열심히 하는 당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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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5.09 18:15:06 *.227.22.57
초아선생님~ 세상에 던질 메세지... 어렵지만 계속 고민해보겠습니다. 글이 쉬워진다 하시니 조금 기운이 납니다만, 제가 보기엔 계속 그 모양이라서 마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이제 초입이니 그냥 꾹!하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정화님~ 시각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쵸? 게시판에 그런 기능이 조금 보강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 저도 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써니누나~ 갑자기 쑥스럽게 그 얘긴 왜... 그러게요. 열병이 깊어가나? 시름시름하네. 저 사진은 좀 뽀샵처리를 한거 아닌가 싶네. 그 옛날에도 그런게 있었나는 몰라도... ㅎㅎ 음악을 좋아하실래나? 난 음악을 사랑하나? 중요한 것도 잊고 사나? 빠르되 잊지 말기! 자꾸만 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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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10 13:27:56 *.99.241.60
서문도 잘 읽었고,
막상 책을 읽을때는 그냥 지나쳤던 부분들이 많이 들어오고
클레오파트라의 코얘기도 다시 살아납니다.

특히 귀중한 자료 잘 보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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