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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7일 10시 09분 등록
과학의 성경책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이나니
지금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

배움을 신봉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새기는 글귀이다. 모든 책들이 나름대로 배움을 주지만 <엔트로피> 책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충격적인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독후감을 쓰고 난 후 제목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왜냐하면 제목 속에 책의 내용이 압축되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몇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과학의 성경책>으로 정하였다. 기존 성경책은 하느님 말씀으로 충만한 책이라면 이 책은 과학적 사실과 법칙을 기초로 하느님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혹시 제목 때문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은 미리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은 신중히 생각하고 읽기를 바란다. 책을 여행하는 여정이 비행기를 타는 수준이 아니라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지구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로 날아가는 동안 정신적으로 느끼는 속도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둘째, 심장이 약하신 분은 미리 우황청심환을 먹기 바란다. 지금까지 갖고 다니던 자신의 눈을 내다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 눈 수술이 보통 수술이 아니다. 수술이 안될 지도 모른다.

그럼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부터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 저자 소개 (시사인물사전을 참조)

제레미 리프킨은 1945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태어나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플라스틱 백 제조업자였고, 어머니는 자선사업으로 맹인들을 위해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만드는 일을 했다. 1967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워튼스쿨에서 경제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터프스대학교 법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정도 학력이면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수 있는데 그의 인생을 운동가로서 바꿔 놓은 사건이 있다. 바로 베트남전쟁이었다. 후일 본인도 그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처럼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기자에게 말한 바 있다. 그는 반전시위를 주동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그런 운동 경험으로 돈 버는 길을 버린 채 70년대부터 워싱턴 DC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닌 문명비평가 이자 운동가로서 그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결성한 조직은 1971년에 만든 '새로운 아메리카 운동(New American Movement)'이었다. 그 후 77년에 그가 활동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경제동향연구재단(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을 설립해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우선 탁월한 저술능력이다. 그의 저서는 이미 16개 국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에서 읽히고 있다. 1989년 기계적 세계관에 근거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 낭비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경고한 저서 <엔트로피 Entropy, 1989> 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엔트로피 세계관을 근거로 종말론(?) 시리즈를 발표하는데, 남반부 사람들에겐 기아와 생존 위협을, 북반구 사람들에게 각종 '풍요의 질병'을 안겨주고 있는 육식의 과잉 섭취와 그를 뒷받침하는 선진국의 가공할 목축업의 폐해를 파헤친 <육식의 종말 Beyond Beef, 1993>, 정보화 사회로 인해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경고한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 1995>, 인터넷 접속으로 상징되는 정보화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2000> 등이 있다.

2002년에는 화석연료의 고갈과 함께 새롭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소 연료시대를 다룬 <수소경제 The Hydrogen Economy, 2002>를 발표하였다. 2005년에는 아메리카드림은 지고 관계를 중시하는 유러피안드림의 서막을 알리는 <유러피안 드림 European Dream, 2005>를 썼다. 그 외에도 <생명권 정치학 Biosphere Politics, 1991>, <바이오테크 시대 The Biotech Century, 1998> 등을 출간하였다.

게다가 그는 탁월한 연설가이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솜씨다. <노동의 종말> 이라는 책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25년간 10여 개국, 300개 이상의 대학에서 강연했다고 한다. 그는 TV출현도 활발하게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2005년 SBS 특집 프로에 직접 출현한 적도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운동을 위해 법률소송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소송은 뉴스 가치가 매우 높다. 글과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꿈쩍도 않던 언론매체들도 소송이 벌어지면 그건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건 소송에서의 승패가 아니라 언론이 소송 자체를 뉴스로 다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소송에서도 여러 건 승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흔히 문명비판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주장이 워낙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환경파괴 위험과 기술의 재앙적 남용을 경고하며 유전자 조작에 반대한다. 인류의 진보라고 하는 개념자체를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적 탐구의 성격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경제 활동의 개념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운동가이다. 이론만으론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책들엔 이론을 넘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을 설득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이 배어 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자상하게 분석하면서 일일이 대응한다. 그는 만연된 기존의 세계관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의 일반화된 반응엔 세 가지 유형이 있다면서 낙관론자, 실용주의자, 쾌락 주의자를 지목한다. 그리고 각 유형의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한다.

리프킨은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흐름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안목과 복잡한 현실을 명쾌한 개념으로 요약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종말론(?) 시리즈에서 언급했듯이 기존의 사상과 관점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기 때문에 현재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은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강하게 비판한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고 하거나 과학적 훈련을 받지 못해 이론이 난잡하다고 하거나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상에 대해 전면적이지 못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방어적인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오르내릴 수 있는 전문적인 주장들을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 전달하여 공적인 이슈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큰 관점에서 비전을 제시한다. 기존의 기득권층에 타격이 될 수 있어 혹독한 비판을 받을 수 있음에도 사회적 비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보지 못한 책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열정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

[15] 당면한 문제에 대해 찾아낸 해결책은 또 다른 더 큰 문제들을 낳는다.

[16] 세상이 문제투성이라면 그리고 그 세상을 고치려면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부터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문제가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9] 어떤 사회의 세계관에서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세계관이 자신의 행동방식이나 현실인식방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구성원 대부분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9]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지식과 기술이 축적됨에 따라 세계는 더욱 가치 있는 방향으로 전진해간다고 믿는다.

[20] 세계관은 우리의 현실인식과정에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있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20]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에 있어 제1법칙”이라고 주장했다.

[20]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일정한 구조와 가치로 시작해서 무질서한 혼돈과 낭비의 상태로 나아가며, 이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란 우주내 어떤 시스템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이다.

[21] 엔트로피 법칙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워낙 절대적이어서, 이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기만 하면 인생관이 바뀔 것이다.

[23]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프레데릭 소디의 말대로 열역학 법칙들은 “궁극적으로 정치체제의 흥망, 국가의 성쇠, 상공업의 변화, 부와 빈곤의 원천 그리고 인간 모두의 물질적 복지 등을 좌우한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물리적 활동은 열역학 제1법칙 및 제2법칙의 형태로 표현된 철칙에 철저히 지배된다.

[23] 엔트로피 법칙은 시간과 공간의 수평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정신적 초월이라는 수직적 세계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24]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같다. 부분은 전체 속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시간, 공간,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반면 그 자신은 엔트로피 법칙을 생각해낸 정신적 힘에 종속되는 것이다.

[24] 모든 정신적 탐구가 시작되는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려면 엔트로피 법칙을 보다 철저히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24] 오랫동안 역사가들과 인류학자들은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 왜 특정 세계관이 형성되었는가를 연구해왔다. 이 책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할 것이다. 즉 특정한 환경의 에너지 상황이 그 시대, 그 환경에서 형성되는 세계관의 기본 틀을 규정한다.

[25] 그리스 신화에서 역사는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쇠퇴해 있고 살기도 힘들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시오도스는 이 단계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 - 풍요와 만족의 시대인 황금시대가 가장 좋은 시기이다 - 로 구분하고 있다.

[27] 우주는 궁극적인 혼돈을 향해 가고, 이때 신들이 다시 나타나 태초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시킨다. 그러면 모든 과정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역사는 완벽을 향한 발전이 아니라 질서에서 혼돈으로 움직여가는 사이클의 영원한 반복인 것이다.

[27] 역사가 쇠락해가는 과정의 순환이라는 생각은 사회질서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좋은 사회질서는 변화가 가장 적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계관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가 없었다.

[27] 그리스 사람들은 더욱 큰 변화와 발전을 더욱 심한 쇠락과 혼돈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는 변화로부터 최대한 보호된 세계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었다.

[30] 기독교적 세계관은 그리스적인 순환의 개념은 버렸지만 역사를 쇠락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30] 원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여지조차 박탈당한다. 인간이 역사에 뭔가 변화를 가하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31] 인간의 목표는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이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32] 튀르고는 역사의 순환과 지속적인 쇠락을 거부했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는 축적의 산물임과 동시에 진보하는 것이다.” 물론 튀르고는 진보는 불규칙하고 가끔 벽에 부딪히기도 하며 심지어 퇴보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기꺼이 동의한다.

[33]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의 근원인 대부분의 사상이 조그만 실오라기와 천 조각으로부터 나왔다. 이것들이 합쳐지고 짜여져 역사의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이 패러다임은 위에서 말한 전환의 시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35] 현대인에게 있어 역사는 기술발달의 과정이다. 지구는 거대한 부품상점이다. 이 부품들은 조립되어 어떤 기능을 가진 시스템으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일은 끝이 없다. 새로운 설계가 쉴 새 없이 나오고 뭔가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기계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고 공정을 확장한다. 여기서 진보란 완벽한 기계를 만드는 일에 ‘맞물려’ 있다.

[37] 기계론적 세계관은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 세 사람의 공동작품이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들이 만든 사상의 영향아래 살고 있다.

[38] 베이컨에 의하면 “객관적 지식으로 무장하면 모든 자연물을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 의학, 기계적 힘, 그리고 무수한 다른 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39] 데카르트는 기계 패러다임의 금과옥조가 된 다음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다. “나는 수학이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지식 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수학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40] 데카르트의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자리가 있고 상호간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는 정밀한 것이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41] 뉴턴의 3대 법칙은 이렇게 가르친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정지하고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직선운동을 하려고 한다. 물체의 가속도는 그 물체에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그 방향은 가해진 힘이 가리키는 직선 방향이다. 모든 힘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이 작용한다.”

[42] 사물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관찰에 의해 밝혀질 수 있었다.

[42] 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의 정상적인 활동이 뒤엉키고 혼돈스러운 것처럼 보이는가? 왜 사람들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고, 정부가 하는 일은 신통치 않으며, 경제는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이 제시한 질서정연한 기계론적 설명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사회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43] 역사는 무질서하고 혼돈된 상태에서 뉴턴의 기계론이 대변하는 질서 있고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상태로의 지속적인 진전으로 정의되었다.

[43] 정부와 사회의 역할을 기계 패러다임 안으로 끌어들인 존 로크와 경제를 기계론 안으로 끌어들인 애덤스미스였다.

[44] 베이컨이 신을 자연에서 밀어낸 것처럼 로크는 신을 인간사에서 제거해버렸다.

[44] 구성원의 재산축적을 보호하고 허용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로크에 따르면 순수한 자기 이익의 추구가 사회 구성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47] 로크에 인해 현대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의 생존의미와 목표는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47]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법칙을 따르면 경제는 성장한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와 통제 때문에 경제는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끌려가고 따라서 자연의 법칙이 깨지는 것이다.

[47] 애덤 스미스에 있어 효율성은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47] 경제학의 법칙을 들여다보면 가장 효율적인 경제운영방법은 자유방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다.

[48] “물질적 자기 이익 추구는 자연스런 것이므로 우리는 이기주의를 통제하는 사회적 장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인간의 욕구를 시인해야 하며, 결국 이기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미덕이다.”

[48] 애덤 스미스는 존 로크가 사회적 관계에서 도덕성을 제거해버린 것처럼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해버렸다.

[48] 시장을 통제하는 데 있어 ‘자연적’ 힘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획득을 추구하는 개인간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거래와 경쟁을 통해서만 부는 가장 잘 추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의 목적은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을 촉진하는 것은 무엇이든 환영받아야 한다.

[49]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다. 이들이 주장한 기본가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 가설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구상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따라서 혼돈과 혼란 속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재배열하여 우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질서를 지구상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역학의 과학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익이 증대되는데 가장 적합하도록 자연을 재배열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패러다임의 논리적 귀결은 간단하다.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 되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천하는 도구이다.

[50] 기계론적 세계관이 최대의 승리를 누린 것은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후부터다.

[51] 기계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진보라는 개념이다.

[57]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단 한번의 숨쉬기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우리는 한때 플라톤이 호흡했던 공기의 분자 5,000만 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57] 열역학 제2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에너지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낸다." 여기서 벌금은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58]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독일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였다. 그러나 엔트로피와 관련된 법칙이 처음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41년 전 프랑스의 젊은 육군 장교 사디 카르노에 의해서였다.

[58]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이 된다.

[59] 제2법칙에 의해 한 방향으로만(혼돈과 무질서를 향하여) 변화해가므로 오염이란 엔트로피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59] 평형상태는 엔트로피가 극대점에 달한 상태이며,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롭고 유용한 에너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60] 지국의 경제적 생존에 있어서 좀더 효과적인 재생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100% 가까운 재생률을 이룰 방법은 없다.

[62] 엔트로피 법칙은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느끼기도 해야 한다. 이 법칙의 핵심은 바로 진실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종의 직관이 필요하다.

[62] 에너지 수준과 엔트로피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관점은 집중도이다. 에너지는 항상 좀 더 집중된 상태(여기서는 향수병 안)에서 덜 집중된 상태(두 개의 방)로 옮겨간다.

[65] 비록 맥스웰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실험은 과학계의 완강한 고집을 대변해준다. 과학계는 엔트로피 법칙이 지구상의 과학, 철학, 생명에 대해 갖는 의미를 시인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67] 엔트로피 법칙은 폐쇄계에서 모든 에너지는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이동해간다고 가르친다.

[74] 시간은 한 방향, 즉 앞으로만 흘러간다. 이 방향은 또한 엔트로피 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시간은 에너지가 집중된 상태에서 분산된 형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비춰준다.

[74]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76]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서는 결코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 그 반대로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면 많은 시간이 사라진다.

[76]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시간의 방향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속도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어떤 때는 빨리, 어떤 때는 느리게 증가한다.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는 얼마나 많이 아기들이 태어나는가, 몇 포기의 풀이 죽는가, 몇 대의 차가 만들어지는가, 몇 방울의 빗물이 지상에 떨어지는가, 바람은 얼마나 부는가, 파도가 해변을 때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자갈이 모래로 변하는가에 좌우된다.

[77] 그러나 우리는 엔트로피 과정이 발생하는 속도를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 행하는 모든 활동은 엔트로피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늦춘다. 우리가 삶의 방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지구상의 유용한 에너지를 얼마나 빨리 혹은 얼마나 천천히 소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79] 폐쇄계는 주변환경과 에너지를 교환하지만 물질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명체는 개방계이다. 개방계는 주변환경과 에너지뿐만 아니라 물질도 교환한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 결코 평형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평형상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평형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정상상태”라고 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생명체를 통해 흐르는 것을 멈추면 정상상태는 깨지고 이 생명체는 평형상태, 즉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주요 관심사는 엔트로피가 아니라 자유 에너지 흐름이다.

[81] 각 단계의 개체가 얼마나 희생되어야 그 윗 단계의 생물이 죽음을 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1년을 살아가는 데는 300마리의 송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300마리의 송어들은 9만 마리의 개구리가 필요하고, 이 개구리들은 2,700만 마리의 메뚜기가 필요하며 이 메뚜기들은 1,000톤의 풀을 뜯어먹는다.”

[81] 에너지는 모든 생명체를 통해 계속 흘러가며 높은 수준에서 생명체로 들어가 낮은 수준에서 빠져나온다.

[83] 엔트로피 법칙은 진화로 인한 생명체의 활동으로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진화가 어떤 마술처럼 더 큰 총체적 가치와 질서를 창출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너무도 분산되고 무질서해진 것은 눈으로 봐도 알 수 있다.

[83] 진화는 한편으로 거대한 무질서의 바다를 만들면서 군데군데 점점 더 큰 질서의 섬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84] 신체외적도구라고 하면 인간이 유용한 에너지(마이너스 엔트로피)를 포착하고 변환시키고 처리하는데 쓰이는 모든 도구를 포함한다.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공구와 기계를 발명한다. (우리는 집을 지어 열을 얻고 체온을 유지하고 길과 다리를 만들고 새로운 수송수단을 고안하여 에너지 이동을 돕기도 한다. 우리는 또한 에너지의 처리와 분배를 좀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언어, 관습, 경제조직, 정부 등을 만들어낸다)

[85] 문화는 더 큰 환경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은 우주의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지배하는 최고의 원칙으로 작용할 것이다.

[85] 에너지는 인간의 삶의 기반이자 문화의 기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에서든 권력은 에너지를 변환, 교환, 폐기하는 신체외적도구를 통제하는 사람이 장악한다. 신체외적도구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에너지 흐름을 통제한다. 이들은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어떻게 일을 배분할 것인가 결정한다.

[86]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정치학과 경제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이것을 거북하게 느낄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많을 것이다.

[87]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환경을 구성하는 방법에 변화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역사의 주요시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각 시기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끈을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 끈이 바로 엔트로피 법칙이다.

[91] “행복한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이 두 속담을 통해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91] 아놀드 토인비는 사회의 역사가 운명적인 그리고 환경적인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오스왈드 슈펭글러(독일의 철학자, 교육학자)는 문명의 역사는 마치 인간의 삶처럼 탄생, 성장, 죽음을 거치는 순환과정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92] 역사의 퍼즐을 이해하는 열쇠는 엔트로피 법칙과 앞서 말한 두 개의 격언이다. 역사를 개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92] 개인 차원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고 있을 때 그 방식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93] 역사의 여유 또는 잉여이론은 이렇다.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이들이 풍요의 결과 잉여를 충분히 축적해서 생각하고 실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라는 것이다.

[93] 모든 것이 잘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결코 바꾸지 않는다.

[94] 큰 변화는 예외 없이 풍요함의 축적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존의 원천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94] 역사란 제2법칙의 반영이라는 사실이다. 엔트로피 과정은 항상 극대점을 향해간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량의 에너지는 영원히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에너지원 자체에 대한 질적 변화를 꾀하는 때가 이른바 역사의 분수령이라는 지점이다. 바로 이 전화의 시기에 낡은 방식을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95] 세계의 전체적 무질서는 항상 증가하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감소한다. 인간의 생존이 유용한 에너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갈수록 열악해지는 환경 속에서 버티려면 일을 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 열악한 환경에서는 인간의 육체만으로 늘어난 작업을 감당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적절한 수준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복잡한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던 것이다.

[95] 뉴턴 추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보의 과정이며 인간은 먼 옛날보다 훨씬 잘 산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고의 배경에는 근본적인 가설이 깔려있다. ‘에너지의 흐름이 클수록 사회는 더욱 효율적이 되고 문명은 더욱 진보하며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된다.’

[96] 인류가 기술발전을 이룩할 때마다 에너지를 추출하고 소비하는 과정이 더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결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유용한 쪽에서 무용한 쪽으로만 변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96] 에너지 흐름이 가속화됨에 따라 각 엔트로피 분수령사이의 시간도 짧아졌다.

[96] 일이란 간단히 말해서 유용한 에너지를 써버리는 것이다. 백만 년 전과 비교할 때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당시보다 1인당 1,000배의 에너지를 ‘소비’해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97] “한계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98] 지구라는 폐쇄계에 내재하는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 스스로를 완전히 구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생존과 다른 모든 생물종의 생존은 자연과 화해하고 생태계와 협동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이제까지 우리가 지구에 입힌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자연적 재생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준다면 우리와 모든 생명은 지구상에서 오랫동안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99] 식민화 단계에서 절정단계로 옮겨가는 것이야말로 생물 종으로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가장 심오한 변화이다. 이제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100] 역사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른다.

[103] 기술이 더욱 발달함에 따라 에너지 흐름, 인구, 엔트로피가 모두 증가했다.

[105] 목재위기의 대안은 석탄이었다. 목재를 석탄으로 바꾼 것은 단순히 에너지 기반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석탄이 도입되기 전까지 유럽문화는 철저하게 나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에너지 기반이 바뀌자 생활 방식 전체가 뿌리째 변화될 필요가 생겼다. 사는 방식, 이동방식, 복장, 행동양식, 정부의 통치방식 등 모든 것들이 안팎으로, 위아래로 뒤집혀 버린 것이다.

[105] 오늘날 우리는 나무를 석탄으로 대치한 것이 대단한 발전이며, 진보를 향한 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의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다. 석탄은 열등한 에너지원으로 천대받았다. 석탄은 더러웠고 많은 오염물질을 내뿜었다. 석탄은 또한 나무보다 캐기도 힘들고 처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사용가능한 형태로 바꾸기까지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106] 인간은 가장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에너지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사람들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106] 경제발전 과정에서 인간은 원료와 그 원료의 추출방법을 끊임없이 바꿔야만 했다. 구하기 쉬운 원료에서 어려운 원료로 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처리 및 생산기술을 이용해야 했다. ... 가장 광범위한 생태학적 맥락에서 경제발전이란 좀더 집중적으로 자연환경을 착취하는 방법의 발전을 의미한다.

[106] ‘더 나은 방법’이란 에너지를 추출하기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개발된 ‘다른 방법’일 뿐이다.

[108]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질 때마다 인간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작업방식은 옛날 방식보다 더 열등한 대체물로 인식되었다. 어떤 경우에 이러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고 어떤 경우에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왔다.

[111] 기술을 싸고 있는 신비로운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나면 남는 것은 벌거벗은 변환자뿐이다. 인류가 그 재능을 동원하여 생각해낸 모든 기술은 자연의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변환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변환과정에서 에너지는 문화와 인간 사이를 흘러간다. 여기서 에너지는 비평형 상태에서 잠시 생명과 그 부산물을 유지하는데 사용되고 결국 분산된 상태의 쓰레기, 즉 무용지물이 된다.

[111] 기술은 결코 에너지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기존의 유용한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111] 우리는 자연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제1법칙과 제2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첫째, 세계 안의 물질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다. 둘째, 에너지는 항상 유용한 형태에서 무용한 형태로 또는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환된다. 기술은 바로 이 변환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11] 이 모든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환경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111] 인간도 주변환경과의 상호교환을 통해 살 수 있다. 기술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리 끌고 가는데도 우리는 바로 이 기술 때문에 자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문화 패턴과 개인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자연의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12] 세계가 혼돈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기를 꺼린다.

[112] 우리 자신이 만든 세계의 무질서한 파편 때문에 더욱 노출되고 더울 위험에 빠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115] “모든 기술은 주변 환경에 더 큰 무질서를 창조하는 대가로 일시적인 ‘질서의 섬’을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115] 기술이 가끔 달갑지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해도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함으로써 과거의 실수를 보상하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115]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이 기술도 뭔가 말썽을 일으켜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원자력은 저준위 방사능과 암을 일으킨다. 더 크고 더 빠른 자동차는 일산화탄소 중독과 오염을 야기한다.

[115]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 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효과는 차라리 그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직한 결과를 낳는다.
[116] 세계는 더욱 무질서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새롭고 복잡한 기술적 해결책을 어떤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기 때문이다. ‘변환자’의 수가 빨리 늘어날수록 유용한 에너지는 더 빨리 소비되고 분산과 무질서도는 커진다. 해결책보다 문제가 더 빨리 늘어나는 것이다.

[116] 그들은 현대문명의 기술과 과거 여러 문명의 기술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문명에서 기술은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기술은 도구에 불과했지 생활방식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계 패러다임 안에서는 기술이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인간은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 기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목표는 예측가능성과 동기화이다.

[117] “이 쳇바퀴에서 기술자들은 같은 곳에 머물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려야 한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와 달리 인간 쳇바퀴에서는 빨리 달릴수록 더욱 뒤떨어진다.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은 결국 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119] 그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연구개발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는데도 100%의 시장잠재력을 가진 기술은 두 가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름이 가지 않는 바지와 휴대용 계산기였다.

[120] 새로운 기술이 계속 전파되어가면서 전체 시스템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은 늘어나고 엔트로피 값은 극대점을 향해 나아가며, 에너지 흐름이 전 과정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123] 역사가들은 문화 또는 문명의 발전단계가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보편화하는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다양한 경제적 및 정치적 활동을 좀더 중앙집중식으로 통제하는 체제를 굳건히 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125] 사회 안에서 일이 배분되는 방식(에너지의 변환), 사람, 집단, 조직 사이에서 에너지가 분배되는 방식(에너지 교환), 흐름의 각 단계에서 쓰레기가 처리되는 방식(에너지의 폐기)들이 표면에 나타나는 무질서의 사회, 경제, 정치적 특성을 결정한다.

[128] 오직 절정 상태에서만 이러한 복잡성과 중앙 집중화의 과정을 늦출 수 있다. 에너지 흐름의 총량을 줄임으로써 엔트로피 과정은 느려지고(하지만 절대로 멈출 수는 없다)무질서 과정도 느려진다.

[128] 절정상태에서는 작고 분권화된 기구가 선호되며, 식민화 상태에서는 크고 중앙 집중적인 기구가 선택되는 것이다.

[129] 전문화는 증가하는 복잡성 및 집중화와 나란히 진행된다. 기술사회에서 인간을 위시한 모든 것은 확장되는 사회 메커니즘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사회 전체의 기능이 더욱 복잡해지고 집중화되면서 각 개인의 기능을 더욱 세분화되고 한정되며, 이들의 생존은 시스템 안의 다른 기능에 더욱 의존적이 된다.

[131]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나친 전문화는 종의 멸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어떤 종이 특정한 생태계 내에서 지나치게 전문화되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즉 전환에 대비할 수 있는 융통성과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또 기존의 에너지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근본적으로 다른 에너지 환경으로 옮겨가는데 필요한 융통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132] 어떤 문화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너지 환경이 변화면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도 변해야 한다.

[133]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인간은 순환과 흐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량과 비축이 중요한 사회로 이동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도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변환하는 것으로 살아가던 문화는 세계를 끊임없는 계절의 순환으로 파악했다. 나고,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과정은 질적인 과정이다. 에너지원은 생기와 다채로움으로 넘쳤다.

[134] 뉴턴 패러다임은 수학공식, 측정에 대한 강조, 위치와 거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착취하는데 안성맞춤인 패러다임이 되었던 것이다.

[134] 시간도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과 연관을 잃어버렸다. 시간은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석탄광맥과 유정 속에 들어 있는 태양 에너지를 우리가 얼마나 빨리 뽑아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함수로 전락했다.

[135] 이제 인간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떠나 다시 한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옮겨 가려는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139] 미국인들의 에너지 소비행태를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하나뿐이다.

[140] 지수 함수적 인구증가 때문에 지구의 에너지 기반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이 가해진다.

[146] 월드 워치 연구소는 앞으로 수십 년간 현재의 수준으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면 지구 온도는 크게 변하고 이에 따라 “아마 빙하기가 왔다가 간 것에 버금가는 규모의” 기후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 오늘날의 재생효율은 대부분 금속의 경우 30% 정도이다. 그리고 재생은 또 한 번의 오염을 유발하며 원료의 수거, 수송, 변환에도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162] 재생과 마찬가지로 보전도 매우 중요하다.

[163] 자동온도조절장치의 설정온도를 바꾸면 생물학적, 심리적 영향도 나타난다. 우리는 에어컨에 철저히 적응이 되어서 인류 역사의 99%에 해당하는 기간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온 온도와 습도가 이제는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덜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근로자보다 더 시원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의 생산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167] 에너지 흐름의 각 단계마다 기술, 기구 등 변환자들이 더욱 복잡해지고 집중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나 무질서가 증가했다.

[167] 인플레이션의 횡포에 대처할 때 이것은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168] 환경으로부터 유용한 에너지원을 끌어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따라서 많은 비용이 요구됨에 따라 에너지 흐름 전 과정을 통해 변환, 폐기와 관련된 비용이 계속 상승한다. 그 결과 생산자의 입장에서든 소비자의 입장에서든 가격은 끝없이 상승한다.

[170] 에너지, 식품, 주택, 의료 등 4대 생필품에 있어 가격상승은 에너지의 변환 및 교환과 관련된 가격상승과 직결되어 있다.

[170] 인플레는 궁극적으로 어떤 환경의 엔트로피 상태를 측정한 결과이다.

[172] 시스템이 직업과 소득을 배분하는 방법으로 인해 에너지의 변환과 교환과정의 주변부에 놓이는 개인과, 그룹, 계층 등이 있게 마련이다. 시스템 안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에너지 흐름 전 과정에 걸쳐 비용이 상승함에 따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가장 많이 쪼들리게 된다. 그리고 어려워지는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는 빈민계층을 계속해서 에너지 흐름 밖으로 완전히 팽개쳐버린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사회복지 등의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결국 실업이라는 것도 엔트로피 과정의 이면에 불과한 것이다.

[173] 에너지 흐름과정 전체에서 축적되는 경제 및 사회적 무질서를 해결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가 커짐에 따라 이러한 정부기관들도 비대해진다. 그러나 경제기구처럼 정부기관도 자체조직을 유지하는 데 점점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조세부담은 늘어나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에너지 흐름은 줄어드는 것이다. 국민에게 에너지를 빼앗아 경제 및 정부조직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쏟아 붓는 악순환은 더욱 빨라지고 결국 사회 메커니즘 전체가 엔트로피 분수령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174] 새로운 에너지를 어디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자본주의 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통해 숨어 있던 자원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개발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들은 자원 그 자체가 고갈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76]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경제적 과정의 단계는 계속 증가한다. 즉 생산과정 전체 걸쳐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축적되는 무질서로 인해 사회는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머핀을 먹는다고 하자. 오늘날 석유화학에 의존하는 농업의 에너지 효율은 매우 낮다. 그러나 일단 밀이 익고 수확되면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가공공정을 또 거치기 때문에 이 미친 짓은 여러 단계로 희석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머핀을 만들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에너지 단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재생 불가능한 자원으로 만들어져 화석연료로 추진되는 트럭이 밀을 실어 나른다. 2) 밀은 대규모로 중앙 집중화된 빵공장으로 간다. 그곳의 기계들은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밀을 가공해서 머핀을 굽고 포장한다. 이 공정에서 밀을 3) 정제하고 4) 표백한다. 이러한 공정을 거치면서 말끔한 흰색을 띠지만 주요 영양소가 소실된다. 5) 밀가루에는 니아신, 철분, 티아민, 리보플라빈이 첨가된다. 6) 제품이 트럭에 실려 긴 시간을 이동한 후 빵가게에서 며칠 혹은 몇 주씩 손님을 기다려도 변질되지 않도록 방부제가 첨가되고 7) 황산칼슘, 인산 제1칼슌, 황산암모늄, 효소, 브롬화칼륨, 요오드칼륨 등 반죽을 좋게 하기 위한 컨디셔너가 들어간다. 8) 그리고 나서 빵을 구운 후 9) 골판지 상자에 넣는데 10) 이 골판지 상자는 손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상자와 머핀은 11) 석유화학 제품으로 된 비닐봉지에 들어가고 12) 역시 석유화학제품으로 된 끈으로 봉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머핀 포장은 13) 트럭에 실려 이동한다. 14) 가는 곳은 냉방이 되고 형광등으로 조명이 되고 항상 배경음악이 흐르는 식품점이다. 15) 마지막으로 소비자들은 2톤짜리 금속덩어리(자동차)를 끌고 가 머핀을 사고 16) 머핀을 토스터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는 상자와 비닐 포장지를 버린다. 이것은 17) 고형 폐기물로 처리되어야 한다. 머핀은 130칼로리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것을 얻기 위해 이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결국 머핀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제조공정의 각 단계에서 분산된 에너지의 총량에 비교하면 하찮은 것이다.

[178]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데 드는 단순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고 선전하는 편의식품과 가공식품은 사실상 인간을 더욱 큰 엔트로피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부엌에 있는 시간을 조금 절약할 수 있겠지만 그로부터 얻는 이익보다는 가공식품을 살 돈을 벌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근로시간(인간의 에너지)이 더 크다.

[179] 이 시스템은 부가가치 생산과 국지적 엔트로피 감소에만 관심이 있지 전체적인 에너지 분산이나 엔트로피 증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179] 엔트로피 법칙이 제대로 이해되려면 사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유용한 물질과 에너지의 일부를 쓰면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개인, 제도, 공동체, 사회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제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무질서로 인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며 이 금액은 제품을 사용해서 얻는 가치보다 크다는 것, 둘째, 후대의 생물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183]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농업기술을 매우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 농업은 인간이 고안해낸 영농방식 중 가장 비효율적이다. 소 한 마리에 쟁기를 매서 밭을 가는 농부는 기계화된 현대 미국의 대형 농장주보다 투입된 단위 에너지당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184] 복잡한 기계와 석유화학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에너지 흐름이 늘어날수록 농업은 더욱 중앙 집중적이 되었다. 미국 농업이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는 비용이 상승함에 따라 소규모 가족농장이 사라지고 대규모 영농기업이 들어섰다. 오늘날 29개의 영농기업이 미국 전체 경작지의 21%를 소유하고 있다.

[188] 모든 주요 수송수단이 소비하는 에너지를 합치면 전국 에너지 소비량의 25%가 넘는다.

[189] 우리의 주요 수송수단은 모두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로 가동된다. 미국 수송체계의 에너지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수송업계는 소수의 몇몇 업체로 더욱 중앙 집중화되었다.

[191] 첫 번째 생각해보아야 할 비용은 시간이다. 자동차의 역할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미국인들은 점점 더 멀리 있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193] 오랫동안 존속해온 인간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은 생태학적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과 맞먹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익숙하던 삶의 방식이 갑자기 정신적 상처를 남기며 변해버림에 따라 무질서가 발생하고 이 무질서는 범죄, 실업, 정신질환의 증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199] “로마의 멸망은 로마의 융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로마는 주변의 농촌에서 얻은 자원이 아니라 가까운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약탈한 자원을 이용해 거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거대도시 로마를 유지하는데 이용된 바로 그 방식이 로마를 멸망시킨 것이다.”

[206] “사회문제는 사회가 비대해짐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간이 이에 대처하는 능력(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할 뿐이다.”

[209] 거의 모든 경제학자가 동의하는 바이지만 군사비 지출은 인플레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군사 분야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지급되는 반면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은 시장에서 공급증가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10] 우리가 전쟁의 역사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에너지 흐름이 집약되면 될 수록 전쟁은 더욱 잔혹해지고 비인간적이 된다는 것이다.

[216] 당일치기 시험 준비를 하느라 골치를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형광펜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학교에서는 거의 관습으로 굳어진 현상이다. 전날 밤 학생들은 형광펜으로 교과서 여기저기에 줄을 치며 암기한다. 다음날 시험에서 쏟아놓을 수 있을 때까지만 보관하기만 하면 되는 대량의 데이터를 이렇게 해서 쑤셔 넣은 것이다. 시험이 끝나면 24시간 이내에 이 데이터는 머릿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남은 것이라곤 쌓인 피로뿐으로 이것 때문에 며칠을 고생한다. 학생의 지식은 시험 직전 최고조에 달했다가 끝나고 나면 추락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교육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218] 판도라의 이야기도 에덴동산이야기도 당초에는 완벽했던 세상이 지식의 등장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판도라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본 순간, 그리고 이브가 지혜의 나무에서 사과를 따먹은 순간, 인간은 길고도 고통스런 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지식의 축적이라는 것이 세상을 더욱 무질서하게 만들고 더욱 와해시키는 과정이다.

[219] 에너지 환경이 점점 더 열악하고 힘들어짐에 따라 우리의 정신활동도 더욱 복잡하고 추상화되었다는 증거도 있다. 수렵채취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벌거벗은 본능 이상의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농경사회는 더욱 추상적인 사고를 인류에게 강요했다. 산업사회는 이보다 훨씬 더하다.

[219] 정신적 활동의 주요목표는 인간의 생존을 확보하는데 있다.

[223] 정말 이상한 것은 입수 가능한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적어진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 보인다.

[223] 미국에서의 정신질환은 정보혁명과 나란히 급증해왔다.

[227] 우리는 점점 정보과부하를 소화해낼 능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매스컴, 교육산업, 정보산업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우리에게 좀더 많은 정보를 쑤셔 넣는 것을 통해 이 정보가 뭔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228] “죄수를 심하게 처벌하면 할수록 반사회적 행위와 폭력사건이 늘어난다.”

[229] 오늘날 보건의료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산업이며, GNP의 9%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231] 1976년 독일의 린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학술대회에서 많은 참석자들은 이른바 “마술의 탄환‘이라고 불리는 항생제가 도입되기 전보다 더 건강 상태가 열악해졌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233] 오늘날 치료의학은 죽음에 이르는 주요 질병을 제거하는데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고 늘어난 평균수명에 대해 생색을 낼 근거는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지난 몇 년간 실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과거 150년간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주로 기여한 요소는 개선된 위생상태와 영양공급이다.

[236] 대부분의 환경은 환경에서 비롯된다. 질병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엔트로피가 증대함에 따라 축적된 폐기물로 인해 발생한다.

[236] 인류역사 전체를 통해 모든 에너지 환경에서 큰 질병들이 발생했지만 어떤 특정한 질병이 다른 질병보다 더 자주 나타났다면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어떤 문명의 에너지 기반이 갖고 있는 형태, 둘째, 그 사회의 에너지 흐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 셋째, 그 사회가 엔트로피 과정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247] 전 세계가 거대한 산업의 쓰레기통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진해서 우리의 물질적 부를 대폭 줄여야 한다. 인류애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247] 그러나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제3세계 국가도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 존재해온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53] 근본적인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에너지 흐름을 줄이고 지구의 생물학적 한계를 지키자는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한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257] 태양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우리의 기술과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검약과 탈집중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266] 우리는 점점 심해져가는 혼란의 와중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생물학자들이 옛날부터 자신이 쏟아놓은 진실을 우리는 매일 실감한다. 어떤 생물이든지 자신이 쏟아 놓은 쓰레기더미 속에서는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67] 욕구를 만들어내고 키우는 것은 지혜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유와 평화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욕구가 늘어날 때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더욱 의존하게 되며, 따라서 존재의 공포가 늘어난다. 욕구를 줄여야만 인간은 갈등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이러한 마음의 긴장을 줄일 수 있다.

[269]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많을수록 좋다’가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시장만 개척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기어코 생산한다. 그래서 사회는 전자레인지, 헤어드라이어, 대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 우리 몸을 오염시키는 약 같은 상품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270] 산업사회는 생산의 목적이 소비에 있고 노동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지만 저엔트로피 사회에서는 노동이야말로 의식의 계몽 상태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273] 생태계의 움직임에서 인간을 유리시켜 놓은 오늘날의 관점은 저엔트로피 시대가 되면 모든 현상 상호간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저엔트로피 문화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며 이 둘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생명의 원천이 된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일단 이해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이 생긴다.

[273] 생태계 제1법칙은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한 군데를 파괴하면 그것은 인간을 위시한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273] 저엔트로피 사회에서는 자연을 정복한다는 생각이 다른 생물들과 전체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283] 저엔트로피 시대가 되려면 세계 인구가 크게 줄어야 한다.

[284] 인구폭발은 농업중심의 경제(태양 에너지에 의존0에서 공업시대(지구의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착취하는 데 의존)로 옮겨가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286] 사람의 수가 아니라 에너지 소비량으로 세계 인구지도를 그리면 오늘날 에너지 고갈이란 측면에서 가장 심각한 인구문제를 겪고 있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인구의 절대수를 제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에너지 소비를 대폭 줄이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290]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만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는 모른다. 한편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를 알면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293] 세계를 자동기계로 보는 고전 물리학을 버리고 우리는 세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그리스적 패러다임으로 회귀하고 있다.

[294] 오직 엔트로피 법칙만이 변화의 본질과 방향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 관련된 모든 것들의 상호연관성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언젠가 잘못된 것임이 증명되어 버려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법칙이다.

[295] 학교에서는 양, 거리, 위치 같은 것들은 열심히 가르치지만 질이나 개념형성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298] 교육은 측정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게 될 것이다.

[298] 교육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대신 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299] 교육과정은 지식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299] 자연과 맞서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될 것이다.

[299] 엔트로피 시대의 교육은 일상에서의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옮겨질 것이다.

[303] 동양의 종교가 에너지의 흐름을 최소화하고 무질서의 축적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반면 서양의 종교는 역사가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04] 지배란 자연의 시중을 드는 것이다.

[306] “왜 내가 자연의 질서를 돌보고 보전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했고 인간에게 그것을 관리할 책임을 위탁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에게 봉사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311] 세계와 우리의 삶에 제시된 새로운 방향에 대해 우리는 저항한다. 엔트로피적 세계관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에 매혹되면서도 우리는 심오한 의미를 거의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새로운 세계관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안전하고도 친숙한 신화를 포기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323]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괴리되고 도시화된 우리의 지성은 환경과 인간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통찰할 능력이 없다. 고에너지 문화로 인해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조각나 버려서 삶의 원천과 더 이상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자연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관을 통해 우리보다 잘 알고 있었다.

[324] 자신의 의지와 기술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어리석은 농부나 미개인들도 전문가 사회의 가장 총명한 근로자나 기술자 또는 지성인보다 더 유능하다.

[328] 우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우울하고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밖에 없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어떠한 일을 한다 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상이 점점 열악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가? 지난 수백 년간 인류가 해온 일이 모두 당초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면 희망은 있는가?

[329] 인류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지구에 대한 공격행위를 중지하고 자연의 질서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332] 사회적 발전과 정신적 발전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반대방향의 길을 걸어왔다. 이 두 개의 길이 다시 한 군데로 모이려면 지배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인간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 준 세계)에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334] 우리에게 남겨진 자원을 최대한 보전하고, 생성과정을 지배하는 자연의 리듬을 최대한 존중하는 길은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생명과 우리 뒤에 올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339]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거의 모든 분야에 이식되었다. 통신,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심지어 예술에까지 이용되었던 것이다.

[347] 인류의 삶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오늘날 꼭 필요한 계명을 전파할 것이다. “너의 종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3. 내가 저자라면

<엔트로피>는 현재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뜯어 고칠 것을 부탁이 아니라 강요한다. ‘영원한’ 물질적 번영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유한한’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둔 엔트로피 세계관으로 옮겨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우주 속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별을 찾아 우주선 탐사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지구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 지구임을 깨달아야 한다.

먼저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다. 이들이 주장한 기본가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 가설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구상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따라서 혼돈과 혼란 속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재배열하여 우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질서를 지구상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역학의 과학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익이 증대되는데 가장 적합하도록 자연을 재배열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패러다임의 논리적 귀결은 간단하다.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 되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천하는 도구이다.” (p49)

즉 우주는 옛날에 위대한 기술자가 시동을 걸어놓은 기계이며 인류는 그 기계를 지구상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한다. 지구는 거대한 부품상점이어서 이 부품들은 어떤 기능을 가진 시스템에 쓰인다. 인류의 역사는 기술발달의 과정으로 새로운 설계가 쉴 새 없이 나오며 이를 위해 인류는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고 공정을 확장한다. 진보란 완벽한 기계를 만드는 일에 ‘맞물려’있다. 인류는 기계가 설정한 틀에 따라 산다. 기계는 우리의 생활방식이다.

반면에 저자가 주장하는 엔트로피 세계관을 들어보자.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열역학 제1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 (p57)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양은 고정되어 있고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오직 모습이 변할 뿐이라는 것이 제1법칙의 골자이다. 제2법칙은 모습이 변할 때 항상 한 방향, 그러니까 입수가능한 쪽에서 불가능한 쪽으로, 유용한 쪽에서 무용한 쪽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환경에서 추출되어 사회를 통해 처리될 때 그 중 일부는 각 단계마다 분산되고 소비되며 궁극에 가서는 만들어진 제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른 형태의 쓰레기로 변한다. ” (p174)

모든 생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유용한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다른 생물들이 자신의 몸에 달린 것에만 의존하여 에너지를 얻지만 인간만은 신체 외적인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이런 도구를 통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다시 전기에서 태양에너지로 에너지원을 바꾸며 인류는 발전하였고 진보해왔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인류 역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엔트로피 관점에서는 ‘정말 그럴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답한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지구상이건 우주건 어디서든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사용된 수많은 에너지 중 일부는 질서를 창조하는 데 쓰였지만 다른 일부는 다시는 쓸 수 없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 쓸모없는 에너지는 환경오염으로, 인플레라는 이름으로, 실업이라는 이름으로, 암이라는 이름으로 인류 생활 전반에 걸쳐 혼란과 고난을 가져다주었다.

또 지구의 자원은 어떤가? 우리가 막무가내로 파내고 써버려도 남아있을 만큼 무한한 것인가. 지금 우리는 후손들이 쓸 쟁기를 빼앗아 칼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엔트로피 세계관은 무엇보다 지구 자원과 인류가 사용하는 기술의 한계를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이 점부터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구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못하다. 이해하더라도 단지 지구의 운명을 조금씩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지금은 중국과 미국에서도 높은 호응을 얻고 있는 <괴물>이다. 반미적 설정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미국 언론의 반응은 오히려 장점이라고까지 말하는 분위기이다. <괴물>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환경오염, 사회부조리, 강대국에 대한 정치적 비판, 가족의 힘 등 많이 있지만 다른 면을 주목하고 싶다.

영화 앞부분에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한강 다리 중간에서 자살하려는 듯 난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나온다. 동료 두 명이 그를 말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그 사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 … 커다랗고 시커먼 게 있어 … 물속에 ….” 한 강물 위로 여러 겹의 동심원이 그려지지만 물속에 있는 정체는 알 수가 없다. 가까이 다가온 동료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가 있다는 거야”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사내는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라고 이죽거리며 “잘살아들”하고 강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은 영화의 세 번째 신으로 미군이 방류한 다량의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괴물이 탄생하는 첫 번째 신과 작은 돌연변이 물고기가 괴물로 성장하는 두 번째 신에 이어서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영화의 전개상 괴물이 존재한다는 복선을 전달하는 것 이외는 특별한 메시지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이라는 말을 남기며 자살하는 인간의 모습과 <엔트로피>가 우리에게 주장하는 내용과 겹쳐지며 연상된다. 자살하려는 사내가 보기에 두 동료는 이전에도 둔했고 지금도 둔하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지 못하는 것은 한강물 속에 있는 커다랗고 시커먼 괴물이다. 바로 엔트로피이다. 사내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괴물을 보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기다릴 괴물을 두 동료들은 보지 못한다. “당신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가?”라고 외치고 있다. 죽기 직전에도 경고를 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저자는 <엔트로피>를 통해 통렬하게 일깨워주려 한다.

이제 엔트로피 세계관을 이해하였다면 인류의 운명을 구할 실천적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자는 명료하게 주장한다.

“전 세계가 거대한 산업의 쓰레기통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진해서 우리의 물질적 부를 대폭 줄여야 한다. 인류애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p247)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이 누렸던 물질적 혜택을 후진국들에게 지구의 운명이 위험하니 ‘이제는 덜 쓰면서 살자’라고 설득할 수 없다. 선진국이 세계자원의 대부분을 계속 먹어치우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동안 제3세계 사람들은 끼니를 얻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고 이제 막 공업생산을 시작해서 조금 나은 생활을 하려는데 미국 같은 부국들이 환경오염을 이야기하며 경제개발을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작처럼 보일 것이다.

2007년 4월 6일자 조선일보 신문에 ‘온난화의 양극화’라는 제목의 의미심장한 기사가 실렸다. 뉴욕 타임스가 쓴 ‘지구 온난화의 승자와 패자’라는 기사를 소개한다. 승자는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내뿜지만 악영향을 극복할 계획과 자금 등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패자는 온실가스는 별로 배출하지 않았으면서도 온난화의 부작용을 감당할 역량이 없어 고스란히 피해를 본다는 점을 밝힌다. 북미, 유럽, 일본 등은 승자에 해당하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은 패자에 속한다. 이렇게 나타나는 세계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길이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책에서도 지적한다.

"근본적인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에너지 흐름을 줄이고 지구의 생물학적 한계를 지키자는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한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p253)

변화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그 부분을 공감하고 추진하려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자신은 충분한 혜택과 번영을 누려오다 이제는 망할 수 있으니 뒤따라오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나온 쉬운 길로 오지말고 우리 같이 새로운 길로 같이 가자 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후발자가 뻔히 보이는 쉬운 길을 놔두고 보이지 않아 두려운 힘든 길을 누가 갈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리더의 역할이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전 세계 나라들의 리더가 누구이며 또 그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고개가 갸우뚱거리며 앞날이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길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조리 있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는 일단 기계론적 세계관이 남긴 최악의 유물들을 모두 치워버려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는 과학, 교육, 종교에서 혁명처럼 시작되어야 한다. 각 분야에서 과거의 기계론적 구조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요구하는 대로 새로운 구조로 대치되어야 한다.”

또한, 엔트로피 법칙은 인류역사에 걸쳐 모든 문화가 품었던 핵심적 의문에 대한 답을 내준다.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남겨진 자원을 최대한 보전하고, 생성과정을 지배하는 자연의 리듬을 최대한 존중하는 길은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생명과 우리 뒤에 올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p334)

"인류의 삶에 있어 전환점이 될 오늘날 꼭 필요한 계명을 전파할 것이다. 너의 종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특히 종교의 사상과 과학의 원리가 한 곳에서 만나고 동양의 사상과 서양의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평행선을 달리다가 이 곳에서 만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동양의 사상은 관계를 중시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욕심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제 엔트로피 관점도 역사는 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에너지의 흐름을 최소화하고 무질서의 축적을 줄일 것을 말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성경의 말씀에서 ‘지배’의 개념을 인간이 자연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자연에게 시중을 드는 것으로 재 정의한다. ‘시중꾼’ 이론으로 생산과 소비에 대한 생물학적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개념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고 한다. 진리는 한 곳에서 모인다는 말의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과학의 원리와 법칙으로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설명하고 결국 ‘사랑하라’ 라는 한마디 말로 결론을 맺는 명쾌한 논리에 참으로 탄복한다. 그래서 이 책을 <과학의 성경책>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엔트로피 세계관으로 기본적인 관점을 바꾼다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큰 흠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기존의 생각과 결별하기 힘들어서 비판적 시각으로 꼼꼼히 책을 살펴보았지만 비논리적인 부분이나 논리간격이 벌어지는 부분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양적 사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완전한 연결은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미국인이라는 한계에도 정신세계의 근저에 흐르는 물줄기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만나는 부분,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부분,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부분 등 그 동안 분리가 되어서 서로 간에 생긴 벽으로 인해 통합될 수 없었던 부분들을 통섭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더욱 좋겠다.

새로운 관점을 알았다는 큰 발견 말고도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각을 찾게 되었다. 엔트로피 세계관이 시간의 관점에서 세계의 흐름을 조망한다면 공간적인 관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근거를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사용한 에너지원을 살펴보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이제 다시 석유에서 태양에너지 또는 수소에너지로 전환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재생가능 에너지원과 재생 불가능 에너지원 사이를 오고 가는 중이다. 더 의미 있는 결론을 얻으려면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동하는 사례를 찾아봐야 하겠지만 흐름의 근저가 되는 엔트로피 법칙과 호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수확이라고 확신한다.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의 책들이 그에 대한 사례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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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4.08 23:10:44 *.254.149.66
아~ 저자에 대한 조사를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아주 자세한 조사를 읽어보고서야 제 저자 조사가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시사인물사전'이라... 다음부턴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좋은 내용,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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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4.09 09:15:50 *.99.120.184
저자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정리해보지만 저자속으로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직은 내공이 많이 부족하네요. 조금씩 몰입하다보면 저자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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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4.09 11:21:57 *.249.167.156
'고소공포증'과 '우황청심환'이 경쾌하게 다가오네요^^ 엔트로피는 과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책을 알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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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4.09 22:37:19 *.211.61.200
비판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인 비판내용을 알 수 없어서 세세한 내용에 대해 쓸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시간을 갖고 다시 볼 생각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방어적인 비판이라는 느낌이 강하네요. 좋은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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