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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04시 3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안 B. 시울라

리치몬드 대학, 젭슨 스쿨의 석좌 교수로 재직 중
세계적 관점에서의 윤리학, 비판적 사고, 리더십 등을 강의
전(前) UN 리더십 학회에서 리더십 연구 분야의 유네스코 석좌교수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 객원 교수와 와튼 스쿨(펜실베니아 경영대학원) 선임연구원을 역임
한때 웨이트리스, 요리사 등 색다른 직업을 두루 경험
노동철학을 강의하면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도 교류

대학 교수답게 그녀의 글은 다분히 학자풍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하나의 시각을 주장하지 않는다. 여러 이론가들의 이론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유연성이 있다. 모두가 ‘어떻게 하면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것인가?’에만 매달려 있는 현재의 경영학 서적에 ‘조직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라는 도발적이며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그녀는 대범하다.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지 않는 지식인이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 ‘이 책의 일부를 집필하고, 다시 수년간 내버려두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나 일과 일의 의미라는 주제는 한번도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열정을 ‘뜨거움’이 아니라 ‘식지 않는 끈기’라고 본다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인물이다. 그것의 그녀의 모든 저서들이 ‘일’과 ‘노동 윤리’라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냉철한 비판적 시각과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는 모순인 듯 보이지만 그녀는 그러한 이중성을 잘 관리하고 있다. 일의 의미를 ‘더도말고 덜도말고 있는 그대로 볼 것’이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 과는 달리, 그녀는 ‘일과 여가의 균형을 맞추어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며, 다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직업 현실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이중성으로 인해 그녀의 목소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구절

(15) 우리가 일하면서 부딪히는 문제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로부터 비롯되므로, 이 책은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항상 자유와 통제간의 투쟁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분투하고, 고용인들은 일과 삶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권을 갖기 위해 분투한다.

(20)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만약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는 것, 즉 “게으른 자의 마음은 악마의 작업장”이라는 것이다.

(23) 직업을 잃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 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8) 유명한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이솝은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질문을 두고 다툰다.

(28) 이솝은 베짱이의 친척인 매미에게는 좀 더 관대하다. 이솝에 따르면, 음악이 발명되었을 때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먹고 마시는 것을 잊고 노래만 부른 사람들이 있는데, 매미는 바로 이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들은 음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노래만 부른다.

(32) 스탠리와 단코는 그들이 연구한,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들’이 대부분 검소하며 많은 돈을 번 후에도 한참 동안 자신의 소비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32)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물론 사업 계획은 인생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33)개미를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개미가 가지고 있는 인생 계획의 장점은 그의 검소한 생활이 그를 곤궁으로부터 구하고 늘 비상시를 대비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34)개미와 개미베짱이는 모두 미래의 풍요로운 삶을 상상하며 일한다. 그러느라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35) 만약 우리가 아무도 일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일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목수는 ‘집짓기 놀이’를 발명했을 것이고, 과학자는 ‘발견 놀이’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36) 어떤 사람들은 놀이를 ‘생산적인 일’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놀이를 어떤 목적을 가진 것으로 정당화한다. 긴장을 풀기 위해 스쿼시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테니스를 치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골프를 한다.

(37)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들어 쇠약해질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면, 그것은 의미있는 인생인가?”이다.

(47) 기술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우리가 일하는 종류를 변화시켰지만, ‘일’이라는 단어의 의미자체를 급격히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52)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일에 대한 욕구와 동기는 외적 압력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영성에 의해 동기화된 수도사의 경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53)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 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57) 일과 노동이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건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력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63)도덕적으로 다소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인 개념이었던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풍부한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변화했다. 뿐만ㅇ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바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66)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를 얻는 데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그들은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75)성 베테닉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 기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생각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규범에서 신교도의 “일하라, 그리고 기도하라”의 개념으로 그 우선순위가 바뀌기까지 이후 다시 약 1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80) 중세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신과 세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세속적인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쾌락 뒤에는 영혼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숨어 있었다. 수양과 쾌락, 도덕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일’은 이들 양극단 사이에서 모호하게 비틀거렸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을 통해 얻는 이득으로 지나치게 잘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83)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정의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즉,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에게 감탄하지만 하나의 직업 혹은 한 가지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을 더 장려하고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6)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고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우리가 일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구원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일은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87)우리는 때로 ‘소명’과 ‘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8)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90)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이 아니라 의미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92) 홀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크루소는 자신의 이익과 실용성에 근거한 선택을 한다. 인간은 일과 자급자족을 통해 행복을 발견한다는 믿음을 몸소 구현한다. ‘합리적 경제인’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이다.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고,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더 필요로 한다. 크루소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할 것이고,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에 대해 실용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환상을 갖고 있었다.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인 것이다.

(101) 마치 미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이며 그 입구 너머에는 강력한 비문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건 없는 자 입장 불가.”

(103)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낟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5)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6)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 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109) 전문가들이 사업가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행동을 강요받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109) 전문가와 장인들의 덜 고귀한 측면은 훈련 및 진입과정의 복잡함이 그들 집단에게 특정 지식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중략) 학자들은 그들 학문 분야의 구성원 자격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 대중들이 흥미로워할 주제에 관한 학술적인 저서나 연구인데도 오직 동료 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다. 때로는 그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때도 있다

(117) 노예제도는 필요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있기 위해 일한다.

(121)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원하는지 혹은 원치 않는지에 대한 가정은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을 처우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123) 파렴치한 독일 선주들은 자신의 승객들을 대상으로 수지 맞는 사업을 벌였다. 즉 일부러 여정을 지체함으로써 승객들의 여행경비를 불렸고, 그 지불을 계속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승객들은 선주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소지품을 팔아야 했으며 더 팔 것이 없는 경우 자신들의 자유를 팔아야 했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 갖고 있는가이다.

(128)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129) 소도시에 살고 있고 부양할 자녀가 넷이나 되는 미혼모 역시 어디에서 일하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실행 가능한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130)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131)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132)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 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137) 일꾼들이 갖는 힘의 원천은 그의 전문 기술이다. 그리고 또 다른 힘의 원천은 다른 일꾼들과의 연합이다.

(138) 연맹은 고용주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불어놓옸ㄱ, 20세기는 미국 노동자들의 가슴과 정신을 통제하기 위한 총력전의 시대가 되었다.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세가지 혁신과 운동이 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터가 형성되어다. 과학적 관리법, 복지 자본주의, 그리고 경영에서의 인간관계접근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길들였을 뿐 아니라 일을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경험으로 만들었다.

(138)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세 가지 혁신과 운동이 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터가 형성되었다. 과학적 관리법, 복지 자본주의, 그리고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길들였을 뿐 아니라 일을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경험으로 만들었다.

(140) 사장이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일을 하는 것과 사장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일하지 않는 것 간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는 “나는 일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는 당신이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간연구 기술자인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는 두 가지 도전의 제스처를 진압하는데 헌신했다.

(144)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158) 사무직 노동의 증가는 경영에서의 인간관계적, 심리적 접근을 새롭게 적용하도록 만들었다. 깨끗하고 매력적인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 같은 작은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160) 드러커는 이윤을 지향하고 불가피하게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회사에,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고 산업 시민을 양성하는 무모한 책임을 부여하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러커는 대표적인 사회기관으로서 회사가 사회의 가치와 열망에 부응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사가 이러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몇 가지 장애물이 존재한다.

(162) 밀스가 보기에, “계약 노예들”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우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들을 “새로운 작은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170) 경영자들은 개인의 ‘선호’보다는 그들의 ‘욕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욕구는 때로 사람들에게 일하는 동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일하지 않도록 만들기도 한다. 경영자들이 깨달은 비결은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또 다른 욕구를 장려하는 것이다.

(171) 이 피라미드 모형은 종종 문맥을 벗어난 채 차용되어서, 1960년대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험 매슬로의 견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다. 매슬로는 일부 사람들의 욕구는 도식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욕구 단계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실제 관찰과 일부 모순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감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엄이나 신념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거나 죽음에 맞서는 것을 택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중략)
확실히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욕구들은 고용인들에 대한 권력을 항상 고용주들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야말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178)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 참여와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일은 때로 진정한 자유 시간, 특히 직업 안정성이 확보된 상태에서의 자유시간과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례가 주는 메시지는 조직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일터에 있는 것보다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다.

(178) 그러나 회사가 잘 굴러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을 혁신하거나 개발하지 못한 회사에 대해 시장은 무자비하다.

(178) 볼리바르 사례를 보면서 서투른 회사의 경영 실패와 통제를 벗어난 고용인들에 대해 비난하기는 쉽다. 또한 고용인들은 책임과 통제력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X 경영 이론이 옳다는 결론으로 비약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 참여와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에서의 자유시간과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례가 주는 메시지는 조직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일터에 있는 것보다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고용주들은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

(183)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187)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너무나 복잡미묘한 오늘날의 직장은 사람들의 욕구와 그들이 집단에서 일하는 방법을 분석해온 많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경영 컨설턴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직장의 설계에는 좋은 의도들이 충분히 많이 포함되어 이다. 이들 전문가들은 일이 의미있는 것이 되길 바랬다.

(191) 이 모든 책들은 경영자들이 다정하고 온화한 선사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193) 딜과 케네디는 강한 문화를 가진 기업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위대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초과 근무를 하거나 한층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며 독자들을 확신시켰다. 그들이 보기에, 기계안의 유령은 사람의 내부가 아니라 문화 속에 있었다. 기업문화는 고용주가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들면 훌륭한 고용인들이 올 것이라고 이상적으로 가정했다.

(194) 과연 고용인들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깅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어야 하는가?

(195)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일과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무쇠 나르는 사람 ‘슈미트’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 아래서 일했지만 상사에게 미소 지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무쇠를 나르기만’하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무쇠도 나르고, 미소 띤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넛을 먹어야 한다.

(196)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업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사교모임은 또한 단지 남들과 좀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을 야기한다.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200) 1987년 캘리포니아의 한 경제지는 500개 기업의 소유주 및 회장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그들 회사의 절반이 감수성 훈련의 또 다른 형태인 일종의 의식고양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오늘날 신봉하는 것과 동일한 주제들, 즉 권한 위임, 리더십, 긍정적 사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다만 명상, 바이오피드백, 최면술과 같은 비정통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창가 있다. ‘에너지 언리미티드’라는 회사는 간부들에게 맨발로 뜨거운 석탄 위를 걸으라고 요구하면서 이 훈련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205) 진정한 스포츠 코치는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 ,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이기는 팀을 만들어낼 때에만 인정받는 불쾌한 파시스트처럼 행도할 수 있다.

(208) TQM의 기본 원칙은 애초에 똑바로 하라 와 소비자는 언제나 옳다 이다.

(209) 경영자들은 열광적으로 TQM 을 채택했는데 그것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그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경영서의 저자들은 TQM의 참산성을 찬양해 마지 않았다. TQM 신봉자들의 대다수는 그것이 ‘새로운 철학’이며, ‘기업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해 TQM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과서는 TQM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숨막히게 설명했으며 경영자들으게 TQM으로 이동하라고 촉구하는 등 개인이나 조직 수준에서 그것을 ‘심각하게’ 요구했다.

(214)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5)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20세기의 경영이론 전체를 마감하면서, 과학적 관리법과 리엔지니어링은 모두 생산 속도에 관심을 가졌다. 여전히 ‘시간은 돈’이다.

(222)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222) 회사가 고용인들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용인들로부터 충성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한가지 방법은 충성이라는 단어에서 도덕적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고용인들은 다른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사에 ‘충성’할 것이다.

(229) 우리는 앞서 ‘채찍’이 종종 윌리엄 H. 와이트가 말한 ‘온화한 치료자’로 대체되는 것을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 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이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고용주들은 사람들이 그 본질적인 보상에 초점을 맞춰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231)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위 관리자들은 특별한 의식이나 칭찬, 현금 이외의 보수가 비관리직 근로자들에게 가장 큰 자극이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특별한 의식이나 칭찬은 업무의 질적 성과와 결합된 승진과 더불어 중간관리자들에게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위 관리자들 스스로에게 가장 큰 유인은 품질 성과와 결합된 ‘현금보상’이라고 응답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어떤 종료의 보상이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는지 근로자들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234) 생산성과 품질을 놀랍도록 향상시키고,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회사의 능력은 훌륭한 경영 이론 덕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노동윤리 때문일 수 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238)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불화의 유일한 조짐은 사무실 벽과 칸막이 안을 장식하고 있는 딜버트 만화뿐이다.

(243) 해리와 메리는 같은 일을 했고, 업무에서 사실상 똑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리는 미혼이고,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하루에 열 시간 내지 열네 시간씩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메리는 기혼이었고 세 아이가 있었으며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여덟 시간씩 근무한다. 집단이 당면한 윤리적 문제는 회사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의 품질이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만약 해리와 매리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회사는 누구를 택할 것인지 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한 선택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247) 당신은 ‘주말을 위해’ 사는가, ‘주말 동안만’ 살아남는가?

(253) 일을 빨리 더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바라고, 사람들은 자유시가니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8) 그들은 단지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파는 것이다. 초기 장인들은 원하는 댈 오고 갈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268) 할에 따르면,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사회생활은 일과 분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다 자연스럽게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ㅈ것이다. 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얻는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경우에는 일이 때로 여가를 방해하기 때문에 여가시간을 위한 일정을 따로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271)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일련의 법정소송에서 고용인들은 전화를 받는 것에 대한 초과 근무 수당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275) 일은 사람들의 생활에 몰래 침투해서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어떤 이들에게 일은 돈과 지위, 소속감, 자존감 등을 포함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약속하는 듯 해싸. 그러나 일이 우리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잡아먹을수록, 우리도 일 이외의 ‘무엇인가를 더’ 원하기 시작한다.

(276)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사람들

(276) 여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독특한 능력,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우는 능력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가를 필요로 한다.

(277)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 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자칭 일벌레인 G. K. 체스터턴은 여가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했다. “첫 번째는 무언가를 하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282) 대중오락은 일로 복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이것이 괜히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다움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보라.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TV 드라마를 매일 보고 싶어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월드 시리즈 게임을 보기 위해 하루 동안 휴가를 내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나는 정말이지 TV를 좀더 볼수 있도록 휴식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

(286) 살아가면서 일과 여가를 분리시키는 데는 특정한 재능이 필요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는 데 요구되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에 압도된 나머지 여가활동에 참여하지 모한다. 그들에게는 삶과 일을 분리하는 것이 그 둘을 통합하는 것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

(287) 십대들 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몇몇 학생들은 그래야 하지만, 점차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289)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90) 과거에 우리가 이웃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렸을 때에는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했다. 그러나 우리가 직장이나 뉴스에서 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요즘, 우리는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과 경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를 막힘없는 소비와 부재,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294) 모든 사람에게 여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면 삶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보수 없이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게 되면 그 활동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감소하게 된다고 연구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295) 여가는 자유롭고,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이며, 즐겁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다.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6)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질과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즉,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9) 삶의 주된 목적은 1) 당신이 신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작업을 갖는 것. 2) 당신이 그의 즉각적인 결정을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 3)당신이 집으로 여기고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장소를 지구상에 갖는 것. 4)동시에, 보다 큰 세계의 시민이 되는 것.

(304) 신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동시에, 그 질문을 제거해 버린다. 모든 사람의 삶은 불멸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목적에 도다라기 위해 노력하는 참가자들이다.

(308) 개인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특정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이 칼이나 기계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목적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웨이트리스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 그녀가 일하는 목적과 같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309) 우리는 또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이란 행복한 삶인가? 자선 사업가의 사례에서, 우리는 그녀가 객관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이 의미를 갖지만, 주관적으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의미있는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한다.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있는 삶인가? 이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310) 인간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310)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3)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삶 전체이지 일련의 지나가는 사건들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317)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을 출현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8) 결국 ‘작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간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것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9) 직장 내의 기도 모임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고용인들의 욕구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징후이다. 진짜 문제는 일이 그들의 에너지와 시간뿐 아니라 일 이외의 의미있는 활동과 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박탈한다는 점이다. 만약 고용주들이 ‘그 이상의 것에 대한 고용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그 해답은 기도 모임이나 영혼 발견 세미나에 있지 않다. 고용주들은 ‘직장의 구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이 승진이나 상여금, 혹은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일 바깥에서도 훌륭한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과 융통성을 그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용주들이 유일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게을러졌고, 그들은 고용주들이 자기 삶의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었다.

(320)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분명 사람들은 조직 내에서 흥미롭고 매력적인 직업을 발견할 수 있고 실제로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의미있는 일에 대한 욕구가 개인의 ‘삶의 의미’라는 보다 광범위한 질문과 연관디어 있다면, 고용주들이 그러한 것을 제공할 만한 위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그곳은 다만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장소일 뿐이다.

(321)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일의 객관적 요소는 일 자체의 도덕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 받아야 한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322) 의미 있는 일은 의미 있는 삶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조직에서 행해지는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일은 그 안에 무언가 좋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가장 의미 있는 직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타인들을 돕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물건을 생산하도록 하는 일이다.

(332) 아마도 우리가 그토록 많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333)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 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 제한된 시간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3. 내가 저자라면..

1) 감상

“과연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누구나 잠시 스치는 생각으로 했음직한, 그러나 감히 공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던 질문을 던지는 것에 우선 놀랐다. 이런 종류의 근원적인 질문들은 오랜기간의 숙고와 대범한 용기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은 도발만이 아니었다. ‘역사’는 일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기에 더 없이 좋은 재료였다. 이솝 우화부터 피터드러커까지 시간대순으로 사람들의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줌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일에 대한 다양한 시각(문제의식)과 여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유익이었다. ‘고용주는 직원이 나가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직원은 고용주가 해고하지 않을 만큼만 일을 한다’는 이야기는 과장되었지만, 다시 생각해 볼 말이다. ‘돈’을 매개로 관계가 형성되는 조직에서 수많은 경영학 서적들이 이야기하는 충성심, 팀, 주인의식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가.

여가는 내가 오해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나는 바람직한 여가 활동이란 곧 나의 ‘꿈’과 관련된 어떤 활동–이를테면 책을 읽고, 강연 테잎을 듣고,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만이 적극적인 활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거나, 쓸데없이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약간의 자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통해 여가에 그런 의무를 데리고 들어올 필요가 없음을, 특히 나는 마음을 열고 삶을 풍부하게 하는 다양한 여가를 즐길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의 ‘의미있는 일’에 대한 저자의 정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불행한 자선사업가. 회사나 사회가 가치있는 일이라고 인정해 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마저 개인적으로 그들 주변의 의미를 ‘밝히지’ 못하는 예를 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얼마전에 내 이야기(Me-Story)를 글로 쓰면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카네기에 입사하고 생긴 버릇이 있다면 속으로 세가지 질문들을 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는가. 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일은 가치로운 일인가?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처럼 나는 세번째 질문을 바르게 했어야 했다. “나는 가치있는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는가?”가 내가 질문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좋은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치있게 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의 발견> 덕분에 나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있는 일의 객관적 요소(“가치있는 일인가?”)와 주관적 요소(“가치롭게 수행하는가?”) 사이의 균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나에게 적용할 좋은 통찰을 얻었다.


2) 아이디어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 제시한 두 가지의 핵심 질문 -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중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얻을 수 없다. 그리하여 ‘대안이 부족한 비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첫번째 질문에 집중한 것에 대한 이유로 그녀는 책(p.297)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일의 의미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은 우리가 왜 여기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개인이 발견한 의미와 문화과 만들어낸 의미에 대한 분석을 수반한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질문은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조직이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한가?’일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보다 적절한’이라는 단어가 ‘선행되어야 할’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녀의 글에 따르면 두 가지의 질문중에 우열을 따질 만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며, 결국에는 두 가지가 모두 비중있게 다뤄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의미있는 일’에 보편적인 답이 있는 것은 아니며 (저자가 말했듯) 그렇기에 진지하고 비중있게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주 힘든 작업일 것이다.

또한 너무나 많은 이론들과 주장들이 하나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공감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많은 이론들에 파뭍혀 저자의 생각을 읽기가 어렵다. 특히 두개의 대립적인 의견들을 제시하면서도 저자의 견해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경우 몇번을 책을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책의 전체적인 질문이 도전적이고 대범한 만큼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이야기하건, 독자가 선택할 문제라고 이야기하건간에 명확한 의사표시가 필요하다.

몇 가지의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일과 조직에 대한 많은 통찰을 준다. '코리아니티'와 마찬기지로 실험적인 새로운 시도, 그녀의 과감한 첫발에 경의를 표한다. 대해‘의미있는 일’에 대한 그녀의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며 동시에 유급고용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몇 년 후에 ‘일의 발견’에서 나아가 ‘의미있는 일의 발견’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보게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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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26 04:39:52 *.254.149.106
와~ 옹박님 이 시간까지 깨어 계셨군요. 반가운 마음에 일단 인사 남기고 이제 글 읽어보러 갑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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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26 06:44:07 *.167.160.37
과연 걸출한 인물이다,
새벽에 일어나 너의 글을 찾았으나 없었을 때 몹씨 당혹했는데, 정말 신중을 기해 써내린 글이구나.
얼마나 있어야 너의 사상이 담긴 글을 읽어 볼련지 기다려진다. 수고했다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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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2007.03.26 07:08:09 *.128.229.88
초아 선생님은 최고의 관전자. 참으로 애정이 깊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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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26 10:08:50 *.54.31.44
신종윤님, 같이 밤을 지샌것 같네요 ㅎㅎ 오늘 휴가라고 하셨지요? 저는 사무실 사람들이 다 '눈이 왜이렇게 빨갛냐?'고 놀리는 가운데 꿋꿋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러다 픽 쓰러지지.. ^^;

초아선생님. 아.. 정말 감격 또 감격! 저는 떨어져도 31일에 남해가서 '옆방'잡고 놀꺼니까 뵐수 있겠어요 ㅎㅎ 선생님. 항상 든든하게 후원해주시고 용기 북돋아주셔서 감사합니다. 31일에 뵐께요!

일산님, 정말 죄송합니다. '산 씨리즈'가 너무 많은 탓에 제대로 기억을 못하겠어요... 누구신지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승표형인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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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밝힘
2007.03.26 10:12:29 *.219.66.78
일산님, 정말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 치명적인 탈락 사유가 될지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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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26 10:16:18 *.167.144.152
옹박아 일산(日山)님은 일산정(日山亭)의 주인이시다.
북한산 자락에 세검정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곳에서 사시는 분!
넌 볼때마다 사고치노! 아이구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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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26 16:12:37 *.72.153.12
역시 시원시원하구만.
나중에 만나면 물어볼게 많은데.....음. 하여간 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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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26 18:13:06 *.55.54.44
아,,, 헉!!
일산이 사부님? 사부님 호는 일해(日海) 잖아요? -_-;
(저는 첨에 호인줄도 몰랐어요. 분당 아니고 일산 사는 사람이 누굴까.. 알수가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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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3.26 22:36:48 *.142.241.211
...미치겠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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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26 23:49:13 *.70.72.121
옹박의 재치 만점. 사랑받을 자격있네 자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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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4:31:57 *.140.145.63
열정을 ‘뜨거움’이 아니라 ‘식지 않는 끈기’라고 본다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인물이다.- 열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이는구만..
식지 않는 끈기를 그녀는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고용주는 직원이 나가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직원은 고용주가 해고하지 않을 만큼만 일을 한다.-대부분의 조직은 이 명제에 대해 부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봄. 서글픈 현실이지..ㅜㅜ

“과연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조직의 리더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각각의 구성원은 과연
의미있는 일을 제공하거나,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바꾸어 묻고 싶구만.. 같이 고민해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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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3.27 11:02:19 *.252.33.160
저도 '일'에 대해서 여러 생각들을 해왔는데,
진작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일에 대해서 좋은 통찰을 주네요.
옹박님의 톡톡튀는 설명과 의미있는 지적들이
빛납니다. 저자 설명도 재밌었습니다.
저도 읽고 리뷰 올려야 겠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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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2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 알렌 치넨 [14] 香山 신종윤 2007.04.03 2480
751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 중년의 발견 [7] 好瀞 김민선 2007.04.03 2267
750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 마음에 좋은 약 [6] 時田 김도윤 2007.05.18 2201
749 뒤 늦은 소감...&lt;일의 발견&gt; [6] 바람처럼 2007.04.03 2041
748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생명의 나무 ) [10] 써니 2007.04.03 2281
747 매 순간의 중년을 꿈꾸며 [6] 素賢소라 2007.04.03 2395
746 (독서004)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3] [2] 素田최영훈 2007.04.03 2079
745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알렌 치넨 [3] 香仁 이은남 2007.03.31 2210
744 당나귀 인생을 치료하다. [3] 余海 송창용 2007.03.30 2150
743 女自의 발견 [5] 김귀자 2007.03.30 2158
742 (004) (수정됨)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계속되는 내적 변화 [4] 한정화 2007.04.02 2092
741 IT 타짜가 전하는 '사람' &amp; '소통' file [5] 이기찬 2007.03.29 2158
740 일의 발견(Working Life)을 읽고 [2] 엄승재 2007.03.26 2409
739 『일의 발견』을 읽고 [2] 이희석 2007.03.26 2222
738 일의 발견 - 조안 시울라 [1] 최정희 2007.03.26 2072
» (03) 일의 발견 - 조안 시울라 [12] 옹박 2007.03.26 2227
736 003 일의 발견 - 일의 분석을 통한 자아발견 [2] 양재우 2007.03.26 2202
735 일의 발견, 조안 시울라 [6] 신종윤 2007.04.13 2650
734 일의 발견, 삶의 발견 file [5] 한정화 2007.03.26 1718
733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의 발견 [1] 素賢소라 2007.03.28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