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강종출
  • 조회 수 2254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7년 3월 22일 01시 27분 등록
일의 발견(The Working Life: The Promise and Betrayal of Modern Work)


저자에 대하여

조안B.시울라(Joanne B. Ciulla)는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철학자입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 리더십의 핵심(Ethics, The Heart of Leadership): 신뢰와 믿음 그리고 소통이 현대 리더십의 핵심이며, 현대의 진정한 리더십은 올바른 윤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탐구.

리더십의 윤리학(The Ethics of Leadership): 동양 철학에서부터 서양철학 등을 넓고 깊게 활용하여 기업체나 공공기관, NGO 등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의 본질은 올바른 윤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줌.

도덕적인 리더들에 대한 탐구(The Quest for Moral Leaders): 역대 리더들은 도덕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윤리가 얼마나 큰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 보여줌.

정직한 일: 사업윤리독본(Honest work: The Business Ethics Reader): 직업윤리가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며 직업윤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함.
이상이 대표적인 저술입니다.

시울라교수의 연구 관심사는 리더십으로서의 윤리학, 사업윤리, 국제리더십과 노동철학 이고, 철학을 근거로 인문학, 사회과학, 경역학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으며 윤리학과 리더십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고 있습니다.

두바이, 로마, 상파울루 등 세계를 무대로 윤리학과 리더십에 대한 세미나와 강연을 하고 있으며, 사업윤리저널지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고, TV나 라디오 등에서 철학자, 작가, 사회주의자, 경제학자, 사상가로서 넓고 깊은 지식과 예리한 통찰로 세련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리치먼더 대학교의 교수이자 젭슨 리더십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윤리학 분야 석좌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윤리학, 국제관계의 분쟁해결과 리더십에 대한 강의와, 예술 사학자 찰리 존슨과 함께 예술가와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책표지]
왜 ‘일’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
시울라 교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몰두하는 보기 드물게 도덕적인 철학자이다.

[프롤로그]
노동자들의 가치나 노동자들의 만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많이 있는 반면, 일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무엇이 “훌륭한 삶”을 이루는지를 묻는 질문의 일부로서만 존재했다. 이러한 질문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과 여가,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논의에 등장하게 된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직접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 책은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 있다.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9p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 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5p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6p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필요일 뿐인 것이다.

35p
이 책에서 수츠는 만약 우리가 아무도 일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일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목수는 ‘집 짓기 놀이’를 발명했을 것이고, 과학자는 ‘발견 놀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모든 발견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 해도 말이다. 수츠는 그들의 유토피아에서는 일하는 활동이 놀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외부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할 일’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거나 일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이 “놀이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놀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45p
그러나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일과 활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개인적 행복과 정체성이 유독 일에만 의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문화에서 유급노동은 어떻게 그토록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으며, 다른 문화에서도 점차 유급노동의 가치가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일’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모순적인 감정과 가치를 지녀왔다. “일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우리의 탐구를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1p
이 모든 사례들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바로 ‘필요성’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3p
태국에서는 ‘일’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서구와 달리, 태국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 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과 ‘마이사눅(mai sanuk: 재미없는)’ 으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근심 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64p
도덕적으로 다소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인 개념이었던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풍부한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변화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바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언제부터 일이 도덕적. 개인적 중요성을 갖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지적하기는 쉽지 않다.

66p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를 얻는 데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한다.

70p
오늘날 우리는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느냐에 상관없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언어조차 ‘앉아서 일하는 것’이 특권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의장(chairman)을 존경하고, 왕좌(王座,throne)에 영광을 돌리며, 교수 자리(chair)를 얻고자 하고, 의회에서 한 자리(seat)를 차지하기 위해 입후보한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는 대학에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75p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생각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규범에서 신교도의 “일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의 개념으로 그 우선순위가 바뀌기까지는 이후 다시 약 1,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78p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 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81p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즉 ‘창조자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것들의 창조자이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83p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정의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즉,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 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에게 감탄하지만 하나의 직업 혹은 한 가지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을 더 장려하고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85p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7p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명으로 인해 평범한 생활 속에 금욕주의가 생겨났고, 이것은 세속적인 행복의 추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우리는 때로 ‘소명(Beruf)’과 ‘천직(Vocation)’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8p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110p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이 노동자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일은 삶의 연속성을 반영한다. 둘째,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그들 자신은 곧 자신이 하는 일이며,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셋째, 일에 대한 헌신 덕분에 그들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존경 받는 경우가 많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117p
고용주나 경영자는 항상 자신의 뜻을 고용인들에게 강요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 고용인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직장에서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자유의 원칙은 이러한 관계의 중심에 있으며,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기본이 된다. 일할 자유, 일터에서의 자유, 그리고 일로부터의 자유.

132p
이것은 한 사람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135p
때로 이러한 책들이 어느 한 스승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138p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세가지 혁신과 운동(initiative)이 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터가 형성되었다. 과학적 관리법, 복지 자본주의, 그리고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human relations approach)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길들였을 뿐 아니라 일을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경험으로 만들었다.

143p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불라디미르 일리치 레니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6p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58p
사무직 노동의 증가는 경영에서의 인간관계적. 심리적 접근을 새롭게 적용하도록 만들었다. 깨끗하고 매력적인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 같은 작은 모욕들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노동자자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organization man)”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160p
드러커는 이윤을 지향하고 불가피하게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회사에,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고 산업시민을 양성하는 무모한 책임을 부여하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162p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164p
근로자들이 일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의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직장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일터에서의 삶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며 우려하는 고용주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에서는 고용인들을 조직의 이미지에 맞추려 하는 것이다. 양편 모두 이러한 문제를 “소외”라고 부른다. 일이 삶으로부터 사람들을 소외시키든, 삶이 일로부터 사람들을 소외시키든 말이다.

176p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원하며, 그것도 훌륭한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직무상, 혹은 상사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윤리의 가치들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터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방해물들이 존재한다.

183p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7p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92p
이것은 명백한 강제력이 없어도 영향력을 가진 관리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고용인들의 힘과 통제권은 이론가들이 “문화”라고 부른다 또 다른 변장(變裝)속에 가려져 있었다.

203p
직장은 전보다 더 활기차고, 희망으로 가득 채워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이전보다 더 ‘진실’해졌는가?

220p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에게 저녁뉴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대량학살이나 치명적인 새 바이러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꿈의 구장”이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정장 차림의 중년 백인 남성에서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38p
고용인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냉소적이 되어감에 따라, 자신들이 느끼는 바를 고용주들에게 전혀 솔직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244p
그녀는 아무런 보상도 보장받지 못한 채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여덟 시간 근무를 하며 삶의 다른 활동들에 시간을 쓰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후자는 그녀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한 선택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PART THREE 일과 삶
248p
오늘날에는 과업이 시간을 측정하고 조직화하기보다는 시간이 과업을 측정하고 조직화한다. 농업과 같은 과업 지향적인 공동체와 그 체제하의 직업은 시간 지향적인 공동체에서처럼 일과 여가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 노동시간은 일련의 과업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서는 노동 시간은 지정된 숫자의 시간만큼 일하는 것으로 이루어 진다.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한 가지는 기술이 근로자들의 작업을 대신함으로써, 그들의 일을 단순 작업화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숙련직과 전문직을 단순 작업화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숙련직과 전문직의 과업 지향이 시간 및 돈 지향으로 바뀜에 따라 그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그들이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된 것은 사실이다.

275p
일은 사람들의 생활에 몰래 침투해서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어떤 이들에게 일은 돈과 지위, 소속감, 자존감 등을 포함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약속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이 우리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잡아먹을수록, 우리도 일 이외의 “무엇인가를 더” 원하기 시작한다.

278p
신교도들은 일을 ‘미덕’과 연관시킨 반면 여가는 ‘악덕’과 관련시켰다. 중세의 휴일은 음악과 춤, 음주를 위한 시간이었으나,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묵도와 명상을 위한 날이 되었다.

279p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계층의 오락은 거리에서 술집으로 이동했는데 술집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293p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과 여가 간의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

305p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309p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312p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에서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20p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그곳은 다만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장소일 뿐이다. 회사나 사회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인정해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마저 개인적으로 그들 주변의 의미를 “밝히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에필로그]
고용이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일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활동과 조직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삶에서 더 큰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직장을 잃거나, 바꾸게 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해 줄 다른 친구들과 공동체, 관심사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아가 우리 삶의 다른 측면들이 직장에 예속될 때, 우리는 일과 삶 ‘모두’에 대한 통찰력을 잃는다.

아마도 우리가 그토록 많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의 제한된 시간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감사의 글]
이 책은 오랫동안 내 삶의 일부였다. 나의 남편이자 가장 좋은 친구인 르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저자라면

“일의 발견”을 통해서 일과 삶을 재발견했습니다.

일을 통하여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존재이유나 정체성을 확인하고 확인 받습니다. 또한 일을 통하여 나와 세상을 소통하고 나를 표현하고 나타내게 됩니다. 삶은 일을 포함하지만 거의 일이 삶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이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일에서 소외되고 일과 삶은 분리되어 갑니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일이 발전되어 왔다는 우리들의 단순한 시각과 안목으로는 이런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일의 본 모습을 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심해지는 삶과 자신의 분리 즉, 가정에서 소외되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느낌이 강해지고,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애정 어린 분노가 증대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삶을 더 통제하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지만 일은 개인을 더 의존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행복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의 모습은 일과 삶이 일치되는 즉, 여가와 일의 경계가 없어지고 일과 내면의 자아가 일치되는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변화경영연구소와 더불어 일이 삶이 되는 1인 기업가로 바로 서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원에 응시하면서 붙인 소제목입니다.

이런 적절한 시점에 저자가 직접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말할 정도로 오랫동안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쓴 조안 시울라교수의 “일의 발견”은 일의 의미와 일이 어떻게 삶과 연관되어 변하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가치와 성격을 가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 우리들이 일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데 밝은 빛을 던져줍니다.

시울라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시작합니다.
“노동자들의 가치나 노동자들의 만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많이 있는 반면, 일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무엇이 “훌륭한 삶”을 이루는지를 묻는 질문의 일부로서만 존재했다. 이러한 질문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과 여가,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논의에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일을 단순히 시대적. 과학적. 사회적인 관점과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니라 다소 철학적인 관점에서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일의 본질적인, 약간 도발적인 표현을 쓰자면 일의 모습을 발가벗겨서 일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편협 되거나 일부 영역에 갇혀있지 않고 다양한 사상이나 경영이론을 인용하고 활용하여 일을 넓고 깊게 보게 해주는 것도 이 책의 좋은 점입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략히 정리하면
제1부 “일의 의미와 역사”에서는 일이 가지는 다양한 모습을 찾아보고 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태도를 보여줍니다. 고대인들이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는 것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일에 “매력”을 부여하고, 일이 소명이 되고 기도가 되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또한 일과 관련된 가치와 노동윤리를 탐색하고 모든 사회에는 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제2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에서 일과 자유 사이의 긴장 그리고 고용인과 고용주사이의 긴장을 다룹니다. 노동윤리나 경영이론들이 시대에 따라 어떠한 방식으로 노동자나 고용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는지 잘 보여주고 조직과 일이 우리를 배신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또한 점차적으로 일과 노동에서 소외현상이 심해지고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근로자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제3부 “일과 삶”에서는 일하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일이 생활 속으로 점점 더 많이 침투하는 과정과 시간이 과업을 측정하게 되면서 노동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소비의 반복이 조장되는 문화형성 과정과 여가를 누리고 향유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모습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또한 점점 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냉철하게 고찰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행복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결국 각자의 몫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이상입니다.

철학자로서 사회과학과 인문학 나아가 경영학의 접점에서 본 일에 대한 고찰과 성찰입니다. 여기에 이 책의 위력과 힘이 있습니다. 넓은 시각과 통찰 그러나 결코 얕고 가볍지 않는 경험과 깊은 탐구가 함께 녹아 있는 책입니다.

자아의 침몰, 직장에서의 자유와 시장에서의 자유의 교환, 영혼의 일부를 포기,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 넥타이를 멘 회사의 제물(祭物) 등 다소 도발적인 용어와 단어들을 사용하여 마음의 파장을 크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의 특징입니다.

아쉬운 점으로 우선 일에 대하여 약간 가볍고 사변적인 접근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은 우리아버지 세대에는 필사적인 생존의 도구였으며, 그 전 세대에는 더 절실하고 절박한 생존과 삶의 도구였을 일을 너무 사상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으로 그 절심함과 생동감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2장 일이란 무엇인가에서 본서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듯한 너무 광범위한 일에 대한 정의와 용어에 대한 해석으로 논리전개나 서술에 박진감이나 탄력을 잃어 버리고
4장 일에 대한 낭만적 환상에서는 주제의 일관성이 없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노동윤리나 노동철학을 정연하게 말하지 못하고 다소 산만하고 느슨한 구성을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방대하고 많은 내용을 인용하고 참고하면서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중복되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이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또한 역자후기에서 이 책에 대한 피상적인 소감으로 거쳐 책의 무게를 가볍게 한 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이 책의 탁월함은
일을 잘하는 방법이나 여가와 일의 균형, 일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는 많은 다른 책들과 달리 “일”을 역사적. 사회적으로 뿌리깊게 파고들어 일이 삶과 분리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노동철학적 관점에서 파헤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업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주어 고용인들의 경영이론이나 노동철학에 휘둘리지 않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일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져 갈수록 일이 앞으로 우리 삶을 더 지배하게 되고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개인을 더 많이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것도 잘 보여줍니다.

“미국인뿐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직접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 책은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다.” 고 힘주어 말합니다.

저자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에서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일과 삶의 의미는 그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구하고 채워나가야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일이 단순히 일을 넘어 삶이 되고 자신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없고, 시간이 더 이상 일을 구속하지 못하고, 일과 자신이 일치될 때 삶은 평온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IP *.34.47.17

프로필 이미지
이기찬
2007.03.27 01:37:19 *.140.145.63
저자에 대한 균형잡힌 비평이 인상적이군요.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임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한때 대기업에 다니면서 이른바 오너라는 사람들이 조직구성원들
에게 머슴이 되기를 강요한다는 생각에 많이 괴로워하고 절망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2 '일의 발견'을 읽고 [2] 정양수 2007.03.26 1814
731 일의 발견 &quot;삶은 강이다&quot; (2) [4] 정선이 2007.03.26 2006
730 일의 발견 &quot;삶은 강이다&quot; (1) [2] 정선이 2007.03.26 2073
729 The Working Life-Joanne B. Ciulla [2] 오윤 2007.03.25 1771
728 (003)일의발견 [4] 최영훈 2007.03.25 1763
727 일의 발견 &quot;일의 의미와 의미없음&quot; [3] 김도윤 2007.03.26 2436
726 일의 발견 - 일에 대한 다각적 접근과 고찰 [2] 김민선 2007.03.25 2190
725 게으름을 벗어나는 방법-너로서 살아가라 [3] 도명수 2007.03.25 2289
724 일의발견 -조안B 시울라 [1] 이은미 2007.03.25 2231
723 일의 발견/조안B.시울라 [3] 香仁 이은남 2007.03.25 2248
722 일의 발견, '행복'이라는 보물섬을 향한 첫걸음 [1] 임효신 2007.03.24 2059
721 [일의 발견] 이중적 시선 [4] 송창용 2007.03.23 1874
» [003]일의 발견(일과 삶의 긴장과 화해) [1] 강종출 2007.03.22 2254
719 코리아니티는 꿈 벗에게 희망이... [3] 정선이 2007.03.19 1869
718 구본형의 코리아니티를 읽고 [1] 김지혜 2007.03.19 1772
717 코리아니티 -구본형의 글로벌 경영 전략-을 읽고 [2] 엄승재 2007.03.19 1974
716 코리아니티경영을 읽고 [1] 정양수 2007.03.19 1688
715 '코리아니티'를 읽다. file [2] 김도윤 2007.03.19 2046
714 코리아니티의 힘 [4] 素賢소라 2007.03.21 1784
713 코리아니티 - 다시 날개를 달며 [1] 최정희 2007.03.19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