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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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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3일 11시 03분 등록
이중적 시선


마지막 과제물 <일의 발견>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선생님께서 세 가지 과제물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신 화두는 무엇일까? 세 가지 책의 공통된 주제는 무엇일까?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세 가지 책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책마다 가슴에 와 닿은 글 중 핵심이 되는 문장 하나씩을 추려 보았다.

<미완의 시대>는 부탁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671p)

<코리아니티>는 깨우친다.
“누군가 말했다. ‘한국형 모델은 없다. 다만 한국의 역사만이 있을 뿐이다.’
천만에 ‘한국의 역사가 있다. 따라서 한국적 차별성도 있다.” (389p)

<일의 발견>은 비판한다.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를 시도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p)

세 글 속에 담겨진 숨은 뜻을 유추해 보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가 공통된 주제가 아닐까. ‘균형 잡힌 눈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바라보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다양성을 시도하며, 일을 경영의 관점뿐만 아니라 노동의 관점으로도 바라보자.’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려면 한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양끝을 떠받칠 수 있는 이중적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에게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왜 첫 시험대로 이중적 시선을 무려 세 가지 책을 통해서 강조하신 것일까?

선생님의 뜻을 구하고자 근거가 될 만한 글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단서를 <사람에게서 구하라>는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변화하려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보는 이중적 시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고쳐야 할 것과 고치지 않고 오래 써야 할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고쳐야 할 것은 반드시 해체하고 제거해야 하며, 남겨야 할 것은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란 결국 모순과 대립이 함께 ‘가장 잘 살 수 있는’ 공생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192p)

다양한 물결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세계 속에서 모순을 회통시킬 수 있는 두 개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어울림일 것이다. 어울림이 변화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 어울림 측면에서 보면 세 분의 저자들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과 놀이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일이 놀이였고 즐거움이었고 어울림이었다. 그런 면면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미완의 시대>는 말한다.
“나는 정말이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았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내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우리의 여행은 일과 발견과 휴가와 색다른 경험과 오랜 우정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었다. 아무리 가난에 찌들어 살고 늘 재앙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웃을 줄 알고 적어도 농담도 던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나는 재미있게 살았다.” (507p)

<코리아니티>도 간단하게 말한다.
“이제 나는 앞으로 10년간 100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한국과 세계’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 어울림의 방식을 다루어 보려 한다. 이것은 10년간 신나게 놀아볼 만한 재미있는 놀이이며 의미 있는 과제가 될 것이다.” (393p)

<일의 발견>는 더 간단하게 말한다.
“이 책은 오랫동안 내 삶의 일부였다.” (334p)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에게 놀이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일인가 놀이인가. 아니면 어울림인가.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답답하기도 하고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여러 측면에서 <일의 발견>은 그 동안 경영으로 편의된 일의 대한 나의 관점을 노동의 관점으로 그리고 삶과 사람의 관점으로 돌리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지난 며칠 동안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모든 생각들이 한 곳으로 집결되고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부지깽이다운 발상이며 깨우침인 것을 새삼 느낀다.

그 느낌을 그대로 <이중적 시선>에 글로 전하고자 한다.


1. 저자 소개

1978년부터 9년 동안 낮에는 노동자로서 웨이트리스, 바텐더, 요리사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였고 밤에는 야간 대학에서 노동철학을 강의하며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노동자 관점’으로 일에 대해 연구하였다.

박사학위 취득 후 20년 동안 경영대학원에서 강의와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경영자 관점’에서 일에 대해 연구하였다.

현재 리치먼드 대학교 교수이자 젭슨 리더십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윤리 분야의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일의 발견>은 저자에게 ‘일’에 대한 사랑이자 삶의 일부였다. 그냥 묻힐 뻔 했던 사랑의 결실이 운 좋게도 소중한 편집자를 만나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진심은 언제 어디서든 통하는 모양이다.

그 동안 ‘일과 삶의 행복한 통합’에 대해 고민해 오면서 ‘일’ 이면의 숨겨진 진실과 가정들을 인문학, 사회과학, 경영학적 관점으로 살펴봄으로써 종합적인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리더십의 윤리학>, <윤리, 리더십의 핵심> 등이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8]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8] 일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노동관을 뛰어 넘어, 이제 일은 우리 정체성의 주된 원천이자 개인적인 자존감과 행복의 주요 원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일은 때로 우리가 가족과 친구들, 종교, 공동체로부터 얻곤 했던 만족감을 대신한다. 이러한 대체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예측 불가능한 경제상황에서 고용인들은 때로 무기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9] 일은 우리의 지위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어떤 이들은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이다. 과거, 유럽인들은 이것을 무례한 질문이라고 여겼지만 그들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9]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11] 공산주의 논리가 한때 전 세계적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회주의를 원해서가 아니라, 공정한 사회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11] 몇몇 사람들에게 일은 “일상의 굴욕”이었다. 그들의 굴욕은 그들이 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나 상사의 멸시와 부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

[11] 나는 사람들이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심오한 투쟁을 지속하고, 가장 열악한 노동 조건아래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13] 경영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20세기의 경영이론과 그 실천이 어떻게 일의 의미를 형성해왔는지를 점차 알게 되었다.

[13]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고용인들이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필요 이상으로 일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평범한 일이 의미 있어 보이도록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경영진의 슬로건은 “질”, “헌신”, 그리고 “팀워크”였다. 이 모든 경영 수단들은 조직 내에서 일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15] 우리가 일하면서 부딪히는 문제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로부터 비롯되므로, 이 책은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항상 자유와 통제간의 투쟁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분투하고, 고용인들은 일과 삶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권을 갖기 위해 분투한다.

[15] ‘일의 의미’ 뒤에 숨겨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가정들을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이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기대를 살펴보고, 일과 삶에서 해왔던 자신의 선택들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일’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20]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만약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는 것, 즉 “게으른 자의 마음은 악마의 작업장”이라는 것이다.

[21] 결국 사람들이 여가를 갖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속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간 또한 없다.

[23]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다. 두려움, 물질적 풍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26]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 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필요일 뿐인 것이다.

[26] 현대의 회사들도 개발도상국에서 유사한 문제에 부딪힌다. 노동자들이 시간외 수당보다 여가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고용인들에게 초과 근무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초과 근무를 하던 노동자들도 점차 돈보다는 자유 시간에 대한 선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초과 근무 수당을 받는 것보다 여가를 더 선호하는 것이다.

[26] 인류학자인 마샬 살린스는 사냥-채집 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사냥-채집꾼들이 다른 문화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적게 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8] 유명한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이솝은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질문을 두고 다툰다.

[28] 이솝은 베짱이의 친척인 매미에게는 좀 더 관대하다. 이솝에 따르면, 음악이 발명되었을 때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먹고 마시는 것을 잊고 노래만 부른 사람들이 있는데, 매미는 바로 이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들은 음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노래만 부른다.

[32] 스탠리와 단코는 그들이 연구한,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들’이 대부분 검소하며 많은 돈을 번 후에도 한참 동안 자신의 소비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35] 만약 우리가 아무도 일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일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목수는 ‘집짓기 놀이’를 발명했을 것이고, 과학자는 ‘발견 놀이’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모든 발전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 해도 말이다. 수츠는 그들의 유토피아에서는 일하는 활동이 놀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외부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할 일’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거나 일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이 “놀이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놀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36] 어떤 사람들은 놀이를 ‘생산적인 일’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놀이를 어떤 목적을 가진 것으로 정당화한다. 긴장을 풀기 위해 스쿼시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테니스를 치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골프를 한다.

[47] 기술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우리가 일하는 종류를 변화시켰지만, ‘일’이라는 단어의 의미자체를 급격히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51] 이 모든 사례를 연결하는 공통점은 바로 필요성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3]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 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57] 일과 노동이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건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력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59] 고통스럽고 지루하며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목적’이 있다면 그 자체로는 더 이상 벌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에 대한 벌은 일을 삶의 필수조건으로 만들었지만, 일 자체는 더 이상 벌이 아니다.

[72] 교회는 ‘일’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큰 죄 - 교만, 탐욕, 색욕, 분노, 질투, 탐식, 태만 - 는 물질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의 잠재적인 해악을 나타낸다.

[73] 태만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무기력은 영적인 일과 선행을 하는 데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일종의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80] 중세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신과 세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세속적인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쾌락 뒤에는 영혼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숨어 있었다. 수양과 쾌락, 도덕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일’은 이들 양극단 사이에서 모호하게 비틀거렸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을 통해 얻는 이득으로 지나치게 잘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82]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82] 삶이란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83]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정의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즉,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에게 감탄하지만 하나의 직업 혹은 한 가지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을 더 장려하고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6]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우리가 일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구원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일은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87]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 즉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수도원 생활은 더 이상 농부나 장인의 삶보다 완전하지 않다. 농부나 장인의 생활 또한 완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소명이 무엇이든 (자신의 소명에서) 완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 주었다.

[88]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89] 노동윤리를 그 종교적 토대로부터 분리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89]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천당’보다는 ‘가정’에 좀 더 가까운 무언가를 약속해주길 바란다.
[89]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견해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세 번째는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 것이다.

[90]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일에 대한 크루소의 상반된 태도는 소명으로서 일에 대한 낭만적 관점과 실용적 관점을 동시에 반영한다. 그는 모험과 창조 사이에서, 이익을 내고자 하는 욕망과 생계를 꾸리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91] 우리는 이야기 전반에 걸쳐서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일 자체이지 그것이 가져오는 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91] 그의 모든 작업은 그의 삶을 보다 안락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실용적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사물을 만들어 내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했을 때 솟아난다.

[92] 홀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크루소는 자신의 이익과 실용성에 근거한 선택을 한다. 인간은 일과 자급자족을 통해 행복을 발견한다는 믿음을 몸소 구현한다. ‘합리적 경제인’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이다.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고,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더 필요로 한다. 크루소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할 것이고,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에 대해 실용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환상을 갖고 있었다.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인 것이다.

[92]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계몽된 형태의 자기 이익을 명확히 밝히기도 전에, 프랭클린은 부가 사회에 이득이 되고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행복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3]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을 두었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두 번째는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101] 마치 미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이며 그 입구 너머에는 강력한 비문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건 없는 자 입장 불가.”

[101]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영역에서 훌륭한 생산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102]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시인들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을 원했고 창조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103] 애호가란 어떤 일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사람이다.

[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106]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 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 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 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8]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 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108] 전문직을 특별한 직업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일에서의 자율성과 공평한 서비스일 것이다.

[109] 전문가들이 사업가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행동을 강요받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109] 전문가와 장인들의 덜 고귀한 측면은 훈련 및 진입과정의 복잡함이 그들 집단에게 특정 지식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110]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일은 삶의 연속성을 반영한다. 둘째,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그들 자신은 곧 자신이 하는 일이며,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셋째, 일에 대한 헌신 덕분에 그들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부터 존경받은 경우가 많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111]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과 ‘더 나은 삶’을 동일시하기가 더 어렵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될 것”이라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일로부터 개인적, 도덕적, 사회적, 물질적 이득을 거두어들이는 능력은 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16]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일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국가의 특성에 있는 듯하다. 지독하게 독립적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116] 일이 커다란 땅, 집에 대한 소유권,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약속할 때 사람들은 일터에서의 권력과 자유보다는 시장에서의 권력과 자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117] 노예제도는 필요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있기 위해 일한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 갖고 있는가이다.

[129] 소도시에 살고 있고 부양할 자녀가 넷이나 되는 미혼모 역시 어디에서 일하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실행 가능한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130]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131]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131] 착취는 또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기꺼이 팔고자 하는 것들 결정하는 데 있어 누가 권력을 갖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131] 우리는 노동력과 자유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우리가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는 고용인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미스는 일꾼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이 아니라 일터에서 상실한 자유의 대가로 보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133]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학습조직에서는 지식이 전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현대 조직에서 업무에 대한 지식이 항상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업무에 대한 지식보다 일을 하는데 더 유용하다.

[137]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문제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부심과 기술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일했다. 따라서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8] 그는 연맹의 목적이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시정해서 고용주들은 자신의 자본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받고 고용인들은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38]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세 가지 혁신과 운동이 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터가 형성되었다. 과학적 관리법, 복지 자본주의, 그리고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길들였을 뿐 아니라 일을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경험으로 만들었다.

[140] 사장이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일을 하는 것과 사장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일하지 않는 것 간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는 “나는 일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는 당신이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간연구 기술자인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는 두 가지 도전의 제스처를 진압하는데 헌신했다.

[141] 테일러는 자 없이도 측정을 할 수 있는 장인들의 능력에 감탄했지만, 정작 그는 산업 현장에서 사람들이 그런 기술 없이도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테일러가 보았듯이, 노동자들은 공장장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은 노동자들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141]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학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 집권화 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144]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46]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 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58] 사무직 노동의 증가는 경영에서의 인간관계적, 심리적 접근을 새롭게 적용하도록 만들었다. 깨끗하고 매력적인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 같은 작은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159]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대기업에서의 일의 문제는 곧 소외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은 지루했으며, 고용인들은 자신의 노동이 낳은 최종 산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 조직들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켰고 그들을 가족과 공동체 생활로부터 단절시켰다.

[159] 피터 드러커는 ‘호손연구’로부터 소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불만족은 단조로움이나 기계적인 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정이나 의미의 결여, 혹은 자신의 일이 사회적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산업 체계 내에서의 소외의 문제는 더 많은 복지 혜택과 안정성, 또는 임금을 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의미 있는 일은 주로 직업의 사회적, 도덕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지 특정한 일의 종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159] 드러커는 대표적인 사회 기관으로서 회사가 사회의 가치와 열망에 부응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60]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일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7] 집단적 사고 상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이륙 후 73초 만에 우주선이 폭발하여 일곱 명의 우주 비행사들이 사망한 1986년의 챌린저호 참사 같은 사건들은 그러한 집단이 내린 결정의 비극적 결과를 보여준다.

[168] 우리 모두가 이따금씩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노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직장에서 이렇게 선을 긋기란 때로 쉽지 않다.

[170] X 경영이론은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근로자들에 대한 테일러의 가정들, 즉 사람들은 게으르고, 자기 규율이 부족하며, 물질적 보상과 처벌에만 반응하고, 직업에서의 안정을 원하지만 책임은 원치 않는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반면 Y 경영이론은 참여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하기를 좋아하며, 스스로 동기화되고,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한다.

[175] H.E.W 보고서는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 매슬로의 욕구이론에 비추어볼 때 사람들은 상당히 잘 지내고 있으며 이미 자신들의 하위욕구를 충족한 상태로 앞으로는 상위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둘째, 일이 너무나 지루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흥미로운 일에 우선권을 주게 되었다. 셋째, 1970년대는 자기 분석적인 시기였고 이러한 자기중심 세대의 근로자들은 실제로 보다 의미 있는 일을 원했다. 넷째, 노동윤리의 전통과 당시의 문화적 풍조를 고려해보면,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질문에 답했으며, 자신들이 사실은 흥미로운 일보다 직업 안정성이나 높은 보수를 우선시하는 점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섯째, 1,533명의 근로자들은 단지 그 시대를 나타내는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177] 근로자들이 불행한 주요 원인은 미국의 회사들이 그들을 대체 가능한 기계부품처럼 다루기 때문이었다.

[177] 볼리바르 프로젝트에서는 고용인들의 직업안정성을 증대시키고, 그들이 근로조건 및 훈련에 대한 결정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용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직무를 재설계했으며, 생산과정이 좀 더 원활히 진행되도록 일했다. 오늘날 기업에서는 이것을 권한위임이라고 부른다.

[178]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 참여와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일은 때로 진정한 자유 시간, 특히 직업 안정성이 확보된 상태에서의 자유시간과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례가 주는 메시지는 조직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일터에 있는 것보다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다.

[178] 그러나 회사가 잘 굴러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을 혁신하거나 개발하지 못한 회사에 대해 시장은 무자비하다.

[180] 고용인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는 데 있어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문제는 경영진이 어리석은 전략적 결정을 내렸을 때 근로자들 역시 사업에 대한 나름의 이해에 기반을 두어 좌절하고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1] 완전한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

[183]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183] 사적인 삶에서라면 마땅히 피했을 정서적 교환이 공적인 삶에서는 보편화되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정서적 교환은 일방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184] 소외는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인 반응일지 모른다. 소외는 대개 일에 대한 개인의 통제나 선택의 자유가 결여됨으로써 생겨난다. 만약 일이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면, 왜 당신은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하는가? 노동조건에 대한 더 많은 자유나 권력은 소외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즉 정서적인 일을 하는 고용인들로 하여금 이따금씩 고객들에게 고함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할 수 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고객들은 이제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 짓는 서비스만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객을 다루는 고용인들의 정서적 긴장은 그들의 자발적인 정서 반응의 범위가 축소될수록 증가할 것이다.

[184] 서비스업의 밝은 면은 사람들이 타인을 돕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 감정이 그 직업에 적합한 감정과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 개인의 성격 특성이 그가 가진 직업의 정서적 태도와 잘 맞아떨어질 때 발생한다.

[189]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인기 있는 경영서들 역시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경영서의 수명이 워낙 짧고, 시장에서 다양한 개념의 경쟁 서적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이 책들은 일이라 무엇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모순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도 자주 있다.

[190]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2]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194]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기해준다고 생각했다.

[194] 사회윤리는 집단의 도덕적 요구가 개인의 도덕적 요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기업문화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불확실성은 고용인들이 1920년대뿐 아니라 일반 적으로 항상 가져왔던 고용에 대한 불확실성일 것이다.

[195]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일과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6]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197] 그는 근로자로서의 만족을 소비자로서의 만족과 교환했다. 그는 경제인이자 애주가였으며 바람둥이였다. 그러나 그는 회사에 충성하는 종업원은 아니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일에는 사회적 요구가 없었다. 그는 동료들과 도넛을 먹으며 미소를 짓거나, 회사의 훈련 세미나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도록 요구받지 않았다.

[199] 모두에게 항상 같은 생각을 하도록 요구하는 리더십 혹은 권한위임 프로그램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201]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2] 권한 위임 프로그램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현장 감독들과 일선 관리자들이 권한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우리가 볼리바르 사례에서 보았듯이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203] 직장은 전보다 더 활기차고 희망으로 가득 채워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이전보다 더 진실해졌는가?

[203]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204] MIT의 폴 오스터만 교수는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팀을 활용했던 회사들은 팀원들이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이상, 팀과 수익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또한 팀을 사용했던 회사들은 그렇지 않은 회사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해고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들 사례를 보면 직장에서 팀으로 일하는 것과 이웃의 농구팀에서 활동하는 것 간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205] 팀워크는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생존을 위한 진짜 투쟁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205] 진정한 스포츠 코치는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 ,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이기는 팀을 만들어낼 때에만 인정받는 불쾌한 파시스트처럼 행도할 수 있다.

[208] TQM의 기본 원칙은 애초에 똑바로 하라 와 소비자는 언제나 옳다 이다.

[211] TQM이 일에 대한 긍정적이고 보상적인 모델이기는 해도, 그것은 일을 행하는 환경과 행하는 일의 종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단지 경제적인 거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고 행도할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기업은 순전히 경제적인 거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211] 근로자들이 산출에 영향을 미치는 자원을 거의 통제하지 못하므로 생산성을 기초로 하여 그들에게 보상이나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데밍은 생각했다.

[213] 대부분의 TQM 이론가들이 암시하는 바는 고용인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허락되고 경영진이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등 그들을 윤리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장치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고용인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들과 경영진의 관계가 윤리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람들은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경영진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당한 경영행위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윤리적 관계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214]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와 “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214] 애덤 스미스는 가장 효과적인 생산 방식은 과업을 부분으로 쪼개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을 만든다. 20세기의 경영 이론 전체를 마감하면서 과학적 관리법과 리엔지니어링은 모두 생산속도에 관심을 가졌다. 여전히 시간은 돈이다. 단지 그것은 최근 들어 더 빨리 지나가고 더 많은 비용과 관련되고 있다.

[221]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221] 그녀는 말했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요. 해고를 당한 건 잘된 일이었어요. 내 인생은 회사와 함께 끝나는 게 아니에요.”

[223] 회사가 고용인들에게 제공하는 안정성과 충성이 줄어들수록 오히려 그들에게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23] 충성은 상호적인 개념이다. 회사가 고용인들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용인들로부터 충성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충성이라는 단어에서 도덕적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고용인들은 다른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사에 충성할 것이다.

[224]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을 신뢰한다면 악수만으로도 사업을 함께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든 계약과 합의된 내용을 서면에 기록하고자 할 것이다. 사회나 조직 내에 신뢰가 없으면 사람들은 규칙, 계약, 법으로 그것을 대체한다.

[225] 신뢰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충성이 보수의 대가로 신뢰가 법적 계약으로 한정되면 이들 용어에 담긴 도덕적 의미는 사라지고 직장은 도덕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225] 회사가 잘 경영되고 있지만 미래에 보다 나은 경쟁력을 갖기 위해 당신을 해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회사의 파산으로 인해 직장을 잃는 편이 고용인 입장에서는 다소 받아들이기가 쉽다.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오늘날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쓸모없게 되었거나 폐기할 수 있는 부품인 것처럼 느낀다.

[226] 직장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덕적 문제는 공평성이다. 우리는 임금의 불평등을 참는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7] 노동시장은 본질적으로 가격뿐 아니라 임금까지도 통제하는 강력한 기업들에 의해 조작된다. 우리는 사람과 제품, 기업이 모두 정상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고, 승자가 막대한 보상을 얻는 승자독식의 사회에 살고 있다.

[230] CEO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지만,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위해서는 훌륭한 근로자들 또한 필요하다.

[231]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 였다. 연구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31] 일은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자기표현,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갖는 유용성과 관련된다. 사람들이 일을 단순한 경제적 거래 이상으로 생각할 때 일은 그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된다.

[232]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효과적인 근로자 동기부여 방법은 심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32] 일부 경영자들에게는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이 전쟁에서는 근로자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으며, 고용주는 여기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233] 인간이 경제를 통제하고 경제를 책임지며, 직장에서의 개인의 노력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믿음이 없으면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234] 생산성과 품질을 놀랍도록 향상시키고,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회사의 능력은 훌륭한 경영 이론 덕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노동윤리 때문일 수 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234]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241] 버지니아 지역의 노조 동원을 맡은 현장 지도자인 도리스 크루즈는 근로자들이 노조 가입을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주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존엄과 존중에 대한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근로자들이 정당하게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대접받도록 고용주들이 보장하지 않는 것에 놀랍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243] 해리와 메리는 같은 일을 했고, 업무에서 사실상 똑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리는 미혼이고,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하루에 열 시간 내지 열네 시간씩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메리는 기혼이었고 세 아이가 있었으며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여덟 시간씩 근무한다. 집단이 당면한 윤리적 문제는 회사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의 품질이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만약 해리와 매리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회사는 누구를 택할 것인지 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한 선택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247]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9] 시간이라는 선물을 준 신은 우리가 그것을 잘 사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249] 오래된 아날로그시계는 뭔가 좋은 구실을 가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이 시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볼 수 있다. 현대의 디지털시계는 시간을 전후의 일련 사건 자체로만 묘사한다. 그것은 앞으로만 나아갈 뿐 당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그저 축적되는 질서 정연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250] 생물체 내의 시간 주기를 조사하는 시간 생물학자들은 체온과 신진 대사율이 시간에 대한 개인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아이들의 체온은 더 낮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기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이는 아이들이 오랫동안 차를 타고 가면서 “아직 멀었어요? 언제 도착해요?”라는 똑같은 질문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체온이 더 높아서 시간을 더 빨리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의 모든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251] 문화는 일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처럼 시간의 개념 또한 바꾸고 조정한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만의 독특한 사회적 시간을 갖는다. 사회적 시간은 언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일반적인 인생 경로를 결정한다.

[253]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3] 우리가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254] 보스턴과 뉴욕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 느린 삶의 속도를 지닌 마을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스스로의 삶을 더 행복하고 더 나은 것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54]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또한 접근성과 거리에 대한 공간적 개념을 포함한다.

[255] 일은 협동을 요구하지만 현대의 일은 또한 동시성을 요구한다.

[255] 산업화 이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동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곳마다 한차례의 격렬한 노동과 게으름이 교차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256]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고용주들과 그 나라를 방문한 여행객들은 일부 개발도상국가 노동자들의 동일한 태도에 주목한다.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259] 오늘날에는 과업이 시간을 측정하고 조직화기보다는 시간이 과업을 측정하고 조직화한다. 농업과 같은 과업 지향적인 공동체와 그 체제하의 직업은 시간 지향적인 공동체에서처럼 일과 여가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 노동시간은 일련의 과업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서의 노동시간은 지정된 숫자의 시간만큼 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259] 숙련직과 전문직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시간 지향적인 기관에 고용되지 않는 이상 과업지향적인 특성을 지닌다.

[260] 전문 직업의식은 특정한 업무 수행을 시계가 아닌 공익이라는 시민정신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63] 고용주들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한 만큼 더 많은 양을 생산해주기를 바라지만 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갈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일에 대한 통제감을 주기 때문에 강력한 유인이 된다.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4]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 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5] 근무시간 자유 선택제는 근로자들이 자신의 삶에 일을 끼워 맞출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근로자의 만족과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지난 백 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 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266] 일의 과업 지향성과 시간 지향성 때문에 우리는 집에서 하는 일을 사무실에서 하는 일과 다르게 경험한다.

[269]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269] 신경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 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70]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산업적으로 사고하던 시대에는 근로자가 건물 안에 있는 시간 동안만 생산을 하면 되었다. 이제 고용주는 고용인들이 어디 있든 상관없이 전자 공학을 이용하여 그들을 구속할 수 있다. 그들은 집에서, 출근길에, 자녀의 운동경기장에서, 그리고 휴가 중에도 일을 할 수 있다.

[271]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3] 과거의 사람들은 확실한 여가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확실한 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 즉, 중요한 인물이거나 유한계급일수록 더 많은 일로 바빠야 하는 것이다.

[275] 일과 소비가 사람들을 규정하게 되면서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쇠퇴한다.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6] 여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독특한 능력,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우는 능력을 이끌어 낸다.

[277]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 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자칭 일벌레인 G. K. 체스터턴은 여가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했다. “첫 번째는 무언가를 하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279]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283] 그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보다 TV를 보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독서는 매일 조금씩 이루어지는 습관인 반면 TV는 아무 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당신은 책에 나온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으나 줄거리를 생각해내기 위해 책의 앞부분을 다시 읽어야만 한다. 이와 달리 TV는 시청자에게 어떠한 정신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으며 굳이 줄거리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연속적인 TV 프로그램들은 지난 줄거리를 다시 보여줄 뿐 아니라 다음 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예고도 해준다.

[284] 흥미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여가를 추구하고, 지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여가에 만족하곤 한다.

[286] 여가와 일의 내용은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좋아할 때, 긍정적인 방식으로 중복될 수 있다.

[286]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과 더 많은 소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7]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휴가가 적을 뿐 아니라 유럽인들보다 서너 배나 많은 시간을 쇼핑에 사용한다.

[289]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가족을 부양하거나 대학에 가기 위해 경험하는 일이 옷이나 CD 플레이어를 사기 위해 하는 일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목적 자체가 더 영구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90] 과거에 우리가 이웃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렸을 때에는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했다. 그러나 우리가 직장이나 뉴스에서 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요즘, 우리는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과 경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를 막힘없는 소비와 부재,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290]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291] 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포기한 꿈을 보상받고자 한다. 일과 여가, 그리고 소비주의는 우리를 악순환에 가둔다.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든 일을 보상받기 위해 물건을 구매하며 자유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293] 소비주의는 노동윤리가 떠난 자리 -혹은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한 자리 -를 대신한다. 우리가 실제로 일터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했다면 통제권을 되찾는 한 가지 방법은 시장에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부채와 소비 욕구로 인해 우리는 싫어하는 일에 얽매여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

[293]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과 여가간의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

[294] 모든 사람에게 여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면 삶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보수 없이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게 되면 그 활동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감소하게 된다고 연구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295] 한 유대인 재단사가 미국 남부의 어느 도시로 이사를 했다. 백인우월주의 폭력집단인 K.K.K. 가 이 소식을 듣고 동네 아이들을 선동해서 매일 가게 앞에 가서 모욕적인 욕설을 하라고 시켰다. 첫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가게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 욕을 할 때마다 25센트짜리 동전을 주마.” 아이들은 기뻐했다. 다음 날, 아이들이 나타났을 때 재단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욕할 때마다 10센트를 주마.” 많은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 셋째 날, 재단사는 아이들에게 5센를 주었고, 그 다음날에는 1센트를 주었다. 다섯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말했다. “더는 너희들에게 돈을 주지 않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대답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리도 이제 여기 와서 욕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들이 욕설을 상업적인 거래로 변화시킴으로써 현명한 재단사는 아이들의 비열한 즐거움을 약화시켰다. 좋아하는 대가로 돈을 받아본 아이들은 이전처럼 단순히 즐거움만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296] 우리가 일과 여가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큰 그림에 의해 좌우된다.

[297] 몇몇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보편적인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일과 가족, 부까지 포기한 한 남자에 대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그는 지구 곳곳을 여행한다. 심적으로 지치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진 그는 마지막으로 히말라야에 있는 한 유명한 도사를 찾아간다. 그는 무릎을 끊고 이야기한다.
“아, 현자시여, 저는 삶의 의미를 찾아 먼 길을 여행했고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지금 저는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부탁이니, 저에게 삶의 의미를 이야기해주십시오.
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삶은 강이다.’
남자는 일어서서 도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당신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삶은 강이라는 말 뿐입니까?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 가장 어이없는 말이군요!’
도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삶이 강이 아니란 말이냐?”
이 이야기는 듣기에 따라 우습거나 슬프거나 혹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이러한 농담은 삶이 모순된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다. 상황의 허세와 진지함이 실제 상황과 모순될 때 결과는 우스꽝스럽다. 우리 모두는 삶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우주가 우리를 비웃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301] 인간은 이상을 위해 죽고 살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해답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우리 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우리 자신을 초월하거나 벗어남으로써 그것을 발견한다.

[307]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우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308] 누구나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만 홀로 그러한 의미에 활기를 불어넣거나 물을 밝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309]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310]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310]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311]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밀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3]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삶 전체이지 일련의 지나가는 사건들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315] 핸디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물질적 복지를 개선시켰지만 “빈자와 부자를 분리하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너무나 많이 소진시키며 항상 보다 만족스러운 세계로 이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혼란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삶과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핸디의 처방은 타인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탐구하는 적절한 이기주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317]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현한 인간 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20]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그곳은 다만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장소일 뿐이다.

[321]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일의 객관적 요소는 일 자체의 도덕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 받아야 한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321]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하고 의미를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특정한 게으름 혹은 주의 결핍 때문이다.

[322] 의미 있는 일은 의미 있는 삶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조직에서 행해지는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일은 그 안에 무언가 좋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가장 의미 있는 직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타인들을 돕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물건을 생산하도록 하는 일이다.

[323] 조직이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용인들이 일을 통해서는 물론 일 바깥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충분한 에너지와 자율성, 의지, 소득을 남겨주는 일과 보상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330] 존중, 신뢰, 정직은 양방향으로 작동한다. 고용인들도 자신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

[331] 직장 바깥에서 훌륭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일도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은 지나치게 지루하지 않게 개인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게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일이 직장 바깥에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332]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2] 아마도 우리가 그토록 많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333]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 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 제한된 시간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3. 내가 저자라면


<일의 발견>은 노동자의 시선으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일’의 숨겨진 진실과 가정들을 밖으로 내놓음으로써 일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경영의 관점으로 기업과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는 나에게 다른 한편의 관점인 노동자의 눈도 존재함을 깨닫게 한다. 경영자의 숨겨진 진실을 따끔하게 깨닫는 신선한 충격이며 사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시스템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기존의 사고를 허물어뜨리는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책 곳곳에 펼쳐져 있다. 많은 내용이 있지만 몇 가지만 소개한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44p)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와 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214p)

“TQM을 비롯한 경영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4p)

‘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금한 순서대로 근거 있는 자료와 사례 그리고 우화에 빗대어 재미있게 비유해가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마치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사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태초부터 다른 생물학적 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하였다. 일이 곧 삶이었다. 이 후 공동체 생활과 정착생활을 하면서 생존으로부터 여유가 생기고 문명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과 문명사이의 끈질긴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도 이때부터 일과 여가로 분리되고 그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산업화이전까지 일은 여가를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지만 산업화 이후에는 여가가 일에 종속되어 버렸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이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 남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둘 사이의 깊어진 괴리로 인해 인간의 감정이 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기 시작했다. 즉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일은 생산성향상을 위해 점점 분업화 그리고 파편화되고 사회는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일과 여가 사이의 벽은 높아져만 갔다. 이 벽으로 인해 일 사이의 이동성과 삶의 질 향상은 줄어들게 되어 일은 인간에게 무의미해져 갔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관념은 인간을 더욱 일에 얽매이게 하였고 그것에 대한 대가인 돈과 소비로 소외된 인간의 존엄성과 감정을 치유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삶과 일의 분리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물론 일과 여가, 사람과 시스템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를 하였다. 복지자본주의, 인간관계경영, 참여경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일 속에서 인간과 시간을 통제하려고 하여 사회적 또는 심리적으로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현재 고등학생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현실은 수능이라는 일에 얽매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여가를 가질 수가 없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삶의 의미를 찾고자 일 속에 종교의 힘이나 문화와 커뮤니티 생활을 도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경쟁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의 막연한 두려움은 사람을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하였다. 일의 생산성은 높아진 반면 삶의 통제권은 일에게 넘겨준 셈이 되었다. 이제 인간들이 다시 그 통제권을 되찾아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기득권을 일이 쉽게 내놓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하든, 여가를 보내든 인간이라는 느낌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인간 존엄성을 회복해야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제는 이 일을 ‘일’에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일과 삶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아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 되었다. 즉, 자신만의 어울림을 찾아야 한다. 우리 삶의 주인공은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일’을 바라보는 관점 속에 서양인의 의식이 의연 중에 깔려 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나오는 데 그 중에 한 예를 살펴본다.

“다음과 같은 가상 실험을 해보자. 당신은 대학을 갓 졸업했으며, 현재 미혼이다. 당신은 네 개의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회계법인의 높은 보수를 받는 직책이고, 두 번째는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에서 일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공무원, 네 번째는 겨울에만 문을 여는 아스펜 스키 리조트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회계사는 돈을, 그린피스는 의미를, 공무원은 안정을, 웨이터는 여가를 대표한다. 이 질문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들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동양인은 네 가지 답의 조화와 균형을 찾고자 고민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다.’ 보다는 ‘어느 하나를 잘하려면 다른 하나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라는 입장을 선호한다. 그래서 일과 삶의 균형도 선택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포기로 정의한다.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도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는가?’이다. 동양적 관점으로 본 ‘일’의 발견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책을 노동의 역사라는 측면으로 보면, 노동자와 경영자, 두 주인공의 힘의 대결로 그려진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듯하다. 그런 면을 볼 때 역사는 과거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역사의 활용 측면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역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사람에게는 개인의 역사가 있고 사물에도 이력이란 것이 있다. 정체성이란 현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말하지만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흘러온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는 역사를 먼저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개인의 기질이나 재능을 파악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역사는 실험의 보물창고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는 축적된 사실이나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특히, 역사가 실험실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어려운 실험의 결과들을 과거 속에서 추출해낼 수 있다. 자연과학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진 장비를 통해서 현재 정확한 실험결과를 찾을 수 있지만 인문사회의 실험은 긴 시간과 사회적 비용 등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실질적으로 어렵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인문사회 분야의 실험창고인 셈이다. 그래서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아래 질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GE의 전 CEO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 것이다. 잭 웰치, 빌 게이츠, 마이클 델 등 전·현직 최고의 경영자들의 답변이 몹시 궁금하다. 그런 이야기가 포함된다면 ‘일’에 대한 재미난 토론이 될 것이다.

3월 20일자 조선일보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다. 기사의 제목은 ‘대기업 임금 인상의 두 얼굴 : 직원 월급은 짜게, 임원 보수는 후하게’ 이다. 올해 직원의 월급 인상은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가이드라인인 2.4%로 묶여 있는데 대기업 임원의 보수가 작년보다 20% 가까이 오른다는 내용이었다.

일의 대가로서 보수가 중요해진 이 시대에서 리더와 직원의 어울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노동자와 경영자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는 직장은 존재할 수 없을까. 경영은 곧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달궈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또한 조직 속에 어울림이 없다면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마침 <코리아니티> 책 속에 있는 글이 떠오른다.

“<주역>은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 책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는 오래도록 누적된 인식의 틀이다. 그런 <주역>이 가장 이상적인 괘로 지천태괘(地天泰卦)를 꼽는다. 이 괘의 모양은 ‘하늘 위에 땅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밑을 향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역>은 이 괘를 인간관계와 연관해서 좀 더 설명해 놓았는데 대략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화를 건너온 과단성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남아있는 사람 곧 주변의 비주류도 멀리하지 말고, 붕당을 만들지 않고 중용을 행하면 태평하다’는 의미로 풀었다.”

일과 삶의 어울림, 일과 자신의 어울림, 개인과 조직의 어울림, 세상과 자신의 어울림 등 많은 것들과의 어울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나와 연구원의 어울림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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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3.23 11:32:49 *.221.217.199
세 권의 필독서가 서로 반응하고 참고하고, '어울리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우리 연구원 커뮤니티 안에서 진정한 '어울림'이 가능하다면, 그 경험이 더 큰 세상으로 확산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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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3.24 05:27:41 *.128.229.88
좋은 정리입니다. 눈을 크게 뜨게 만듭니다. 토요일 아침을 기분좋게 시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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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3.25 06:48:36 *.211.61.244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번을 계기로 시야도 넓어지고 마음도 넓어졌습니다. 앞으로 어울림에 대한 생각을 많이하고 나에게 맞는 세상과의 어울림을 조금씩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조금씩 아름다워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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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1:50:52 *.140.145.63
아마도 이번 레이스에 참가한 분들과 관전자들 모두가 한번쯤 고민해
봤을 질문에 대한 좋은 힌트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지깽이님의 눈
을 크게 뜨게 만든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이 문장을 이렇게 수정해 보고
싶네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그
것이 코리아니티 실천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역사는 인문사회 분야의 실험창고인 셈이다.- 이 문장도 좋네요..
우리는 이런 형태의 실험창고를 좀 더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개발해
놓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에게는 영화가 그런 대상이지요..^^

이번 세번째 리뷰가 제가 봐도 가장 탁월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이스에서 어제보다 더 나아짐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송교수님께
축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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