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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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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08시 55분 등록
A. 저자에 대하여

1. 약력 (Biography)

조안 B. 시울라(Joanne B. Ciulla)는 리치몬드 대학, 젭슨 스쿨(the Jepson School)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으로, 현재 같은 학교의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적 관점에서의 윤리학(ethics),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갈등 해소(conflict resolution), 리더십 등을 강의하고 있다. 또 예술사가, 찰스 존슨 박사와 함께 ‘예술가와 리더(artists & leader)’란 새로운 주제의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열정적이며 창의적인 강사로서 2003년 버지니어 고등교육 주의회로부터 우수 교수상(the Outstanding Faculty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UN 국제 리더십 아카데미 리더십 연구 분야의 유네스코 석좌 교수를 역임했으며, 라샬 대학,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와튼 스쿨, 옥스포드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시울라 교수의 연구 주제는 리더십 윤리학, 비즈니스 윤리학, 국제 리더십과 노동 철학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 ‘윤리, 리더십의 핵심(Ethics, The Hearts of Leadership)’, ‘일의 발견(The Working Life; The Promise and Betrayal of Modern Work)’, ‘리더십의 윤리학(The Ethics of Leadership)’ 등이 있다. 그리고 비즈니스 윤리학 교과서인 ‘정직한 일(Honest Work: A Business Ethics Reader)과 ‘도덕적 리더를 향한 모험(The Quest for Ethical Leaders; Essays in Leadership Ethics)을 공저했다.

그녀는 다양한 범위의 주제로 전 세계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여러 대학과 회사, 정부 등에서 윤리와 리더십 프로그램에 대한 컨설팅을 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세계 경제 포럼, 브루킹스 연구소, 아스펜 연구소 등에서 연설했으며, 여러 TV,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2. 일의 발견 (The Working Life; The Promise and Betrayal of Mordern Work)

시울라 교수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일의 발견’은 아마존닷컴(Amazon.com)의 2000년 비즈니스 분야 베스트 10위 중 2위에 선정되었다. 아마존닷컴의 섹션 에디터인 알란 J. 화이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시울라는 독자들에게 ‘일의 매력과 일의 변화된 중요성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역사, 신화, 문학, 팝 문화, 실제 경험 등 다양한 범위를 포괄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녀는 ‘일의 다양한 의미 또는 의미 없음(the many meaning of work or its meaninglessness)’을 탐구했다.”

그리고 리더십 전문가 워렌 베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진지하고, 깊은 생각이 담긴 중요한 책이며,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 즉 일터가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시울라의 글은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은 당신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사정없이 강요하며,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화이트와 베니스의 평처럼 이 책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은 성찰을 통해 일과 삶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통째로 뒤흔든다. 그녀의 차분하지만 열정 넘치는 설명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책장을 덮을 때쯤 당신은 불현듯 ‘내가 힘들게 달리고 있는 이곳이 사실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쳇바퀴일 뿐’임을, 혹은 ‘두 발로 굳건히 버텨 서 있다고 생각한 이 곳이 사실은 텅 빈 허공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왜냐면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B.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프롤로그.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9)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 고용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경영자들은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13) 평범한 일이 의미있어 보이도록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다.

(14) 하루가 끝날 무렵 노동자들의 얼굴을 덮고 있는 피로는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이 과업 자체의 정확하고 효율적인 수행보다는, ‘자아’를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14) 1990년대가 남긴 한 가지 이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변덕스러운 세계경제에서 경제적 거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일이 갖는 우선순위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을 위해 희생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진정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15)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일’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 미국인뿐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직접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 책은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다.



1. 왜 일하는가? _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21) 그들에게는 ‘구속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간 또한 없다. … “실직의 문제점은 당신이 단 하루의 휴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23)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다.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23)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 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한 기회이다.

(24) “회사를 그만둔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나는 곧바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다리가 셋 달린 의자처럼, 매일 하는 일 없이 넘어졌다.”

(25)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필요일 뿐인 것이다.

(27) 남아프리카 원주민인 부시맨은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 몽고몽고넛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가 씨를 뿌려야 하지요?”

(28) 이솝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한다. 우리는 베짱이처럼 짧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고, 개미처럼 길고 빈틈없는 삶을 살 수도 있다.

(30) “너(개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다른 어떤 생물도 네게 비축한 부의 일부를 공유하지 못한다. 반면 꿀벌은 기특하고 정교한 노력으로 세상에 축복이 되는 것을 만들어낸다.”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더빌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각각의 부분은 악덕으로 가득 차 있지만 / 그래도 집단 전체는 낙원이네.” 그리고 “시기 자체와 허영심 / 그것이야말로 근면함의 앞잡이라네.” … 맨더빌의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함으로써 최대의 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32)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4) 몇몇 사람들은 은퇴하면 ‘일로부터의 해방’과 ‘행복’이라는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삶 전체를 일에 바친다. 그러나 은퇴할 무렵이 되면 진정한 행복은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35)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35) 놀면서 일하기, 일하면서 놀기 _ 만약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에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

(36) 동물들조차도 비생산적인 놀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해설자는 사자에 대한 프로그램에서, 장난치는 사자새끼들이 스스로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훌륭한 사냥꾼이 되기 위한 기술을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준다.

(36)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42) “사실 그들 중 대다수는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들 대다수는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일을 하기 위해 현재 직업이 주는 안정과 권력, 구매력을 감히 포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의미 있는 일에 뛰어드는 것은 모험이다.

(42) 눈을 크게 뜬 어린 딸은 입을 삐죽거리며 묻는다. “나는 언제 클라이언트가 될 수 있어요?”

(44)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2. 일이란 무엇인가? _ 단어와 그 어원으로 살펴보는 일의 정의

(50)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세계이다. 말은 우리가 경험한 사람과 사물,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나타낸다.

(51)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작곡과 같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일이야말로 동시에 가장 진지하고 가장 맹렬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53) 작가 바바라 셔는 일과 놀이의 구분이 두 가지 활동 모두를 황폐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은 집세를 지불해주는 따분한 것이며 놀이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54)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과 ‘마이 사눅(재미없는)’으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59) “언덕에서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면, 그 과정은 새로 시작된다.” 이러한 벌에 대해 알베르 카뮈는 신들이 ‘쓸모 없는 헛된 노동보다 더 무시무시한 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평한다. 시시포스와 다나이드를 괴롭힌 것은 세 가지이다. 즉, 소모적이고 지루한 과업, 자유의 상실, 무의미하고 헛된 일이 그것이다.

3. 일의 역사 _ 아담의 ‘저주’에서 신이 내린 ‘소명’으로, 그리고 ‘삶의 목적’이 되기까지

(64) ‘살기 위해 인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7) “같은 강물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도 서로 다른 물이 흐른다. … 강물은 흩어졌다가 … 모이고 … 다시 모였다가 흘러나간다. …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 혹은 영혼 속에 존재한다.

(68)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일이 될 수 있었다.

(73) 그러고 나서 그(무기력, 정오의 악마)는 수도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창 밖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수도사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아보기 위해 태양을 바라보고, 동료가 주위에 있는지 보기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도록 만든다.

(74)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즉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법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탁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7) 만약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당신은 아마 마가렛 대처에게 지붕을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제임스 베이커에게는 빵 한 덩이를 요구했을 것이다.

(82)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르네상스인은 스스로의 정신과 영혼, 육체와 두 손을 훈련시켜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83) 인간이 자신의 일을 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즉,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ㅅ 있는 사람이다.

(86)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8)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었다.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_ 우리는 과연 일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90) “그는 선한 인간이다. 고로 그는 열심히 일한다.”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91) “나는 내 소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은 꿈꾸던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

(91)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사물을 만들어내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했을 때 솟아난다. 크루소는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여전히 ‘자기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92) ‘합리적 경제인’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이다.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고,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더 필요로 한다. …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인 것이다.

(95)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기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98) “인간은 자신의 길을 궁리하지만 신은 그의 발걸음을 이끈다.”

(100)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으며, 마침내는 가장 높은 파도의 꼭대기에서 빛날 수 있다. 그것이 이 나라의 위대함이다……”

(101)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하는 일’ 이상이다.

(102)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시인들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을 원했고 창조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그들은 이제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다.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자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3) 내가 오늘 한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나 어부, 소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105)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에는 두가지 유형의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 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 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10)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 둘째,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 셋째, 일에 대한 헌신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는 경우가 많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111)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111) 그들이 꿈꾸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작은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가게를 열거나 독립적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것, 혹은 개인 개업을 꿈꾼다. 그것이 재즈 연주자로 사는 것이건, 로빈슨 크루소처럼 모험을 떠나는 것이건 간에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1)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과 ‘더 나은 삶’을 동일시하기가 더 어렵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힘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Part 2.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_ 우리는 과연 자유롭게 일하고 있는가?

(117) 자유의 원칙은 이러한 관계의 중심에 있으며,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기본이 된다. 일할 자유, 일터에서의 자유, 그리고 일로부터의 자유.

(117)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우리는 일을 ‘필요’와 연관시킨다. 노예제도는 필요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대부부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 위해 일한다.

(118)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일과 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노예들이 자유를 얻으면 개인적인 특성으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이 아닌 한, 즉 상황으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22)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6)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 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129) 우리 모두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실행 가능한 선택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131)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4)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개척하길 원했으며 일터에서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려 들지 않았다.

6. 일꾼 길들이기 _ 그들은 우리가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해주기를 원한다

(140) 사장이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일을 하는 것과 사장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일하지 않은 것 간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둘 다 도전의 제스처이지만, 하나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는 “나는 일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는 당신이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41)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142)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역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144)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45)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 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149)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151) 메이오는 호손 효과를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로 설명했다. 긍정적 전이는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관계에서 권력적 요소를 이용한다.

(158) 깨끗하고 매력적인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집과 차, 그리고 고급 주방설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아의 침몰’이라든지, ‘권위에의 복종’같은 작은 모욕들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organization man)”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7. 노동의 두 얼굴 _ 우리의 일터는 왜 이토록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졌는가?

(160) “단지 생계를 위해서만 일하고 일 자체와 그것이 갖는 의미를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이 아니며, 시민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161) 경영 연구자들은 외적 보상에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열정적인 인간 행동과 헌신을 고취시키는 잡히지 않은 영혼, 즉 “기계 안의 유령”을 찾기 위해 인간의 정신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162)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 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 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163) 밀스는 로먼이야말로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인생을 완전히 망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165)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는 밖에서 보면 무척 좋아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강압적이고 독재적일 수 있다.

(167)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 우주선을 발사하기로 결정한 과학자들과 행정가들은 공통된 과업과 정해진 시간에 우주선을 발사하려는 바람으로 단합된 “팀”이었다. 그들은 고체연료 로켓의 결합 부분의 안전성에 의심을 품은 소수 공학자들의 발사 반대에도 결코 동요되지 않았다.

(172) 우리가 가장 감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엄이나 신념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거나 죽음에 맞서는 것을 택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목숨을 걸거나 유산을 포기하는 모험을 강행하는 연인들, 압제적인 정권에 대한 진실을 기록하는 쪽을 선택한, 외롭고 배고픈, 추방당한 작가…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지배 받는다. 매슬로의 도식을 벗어난 이러한 예외들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독특성을 나타낸다.

(172)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 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진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6) 테컬은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모욕”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이 된다고 썼다. 일은 “일상의 빵뿐만 아니라 일상의 의미를, 현금뿐 아니라 인정을, 무기력뿐 아니라 놀라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윤리의 가치들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터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방해물들이 존재한다.

(179)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

(181) “타인은 지옥이다” _ 일하면서 미소까지 지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 한 슈퍼마켓의 점원들은 “저의 약속: 웃거나 인사하지 않으면 저의 1달러를 가져 가세요” 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어야 한다.

(183)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8. 유망한 직장 _ 경영 이론가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직장’은 가능한가?

(190) 이러한 책과 이론들은 경영자들에 ‘대한’ 것인 동시에, 경영자들을 ‘위한’ 것이다.

(192)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 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 “동일한 기관이라도 문화가 지배하면 가장 높은 수준의 진정한 자율성이 발생한다. 문화는 중요한 소수의 변수들을 강력히 통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혁신하도록 장려된다.”

(195)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일과 소득뿐 아니라 훨씬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6)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를 감정과 힘의 관계가 미묘하게 얽힌 조직으로 표현했다. 경영진이 우호적이고 피상적인 평등주의 속에 계급제도를 감추고 의미와 가치, 감정의 지배를 통해 일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감성과 우호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조직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힘을 과시함으로써 통제권을 얻기 때문이다.

(196)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197)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 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그것은 업무도 아니고 사교도 아니다.

(197) 엘드리지 클리버가 저서 <갇힌 영혼>에서 지적했듯이 “집 안에서 일하는 흑인(house nigger)”보다는 “들에서 일하는 흑인(field nigger)”이 되는 편이 낫다. 들에서 일하는 흑인은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공손히 대해야 하는 부가적인 모욕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198) 많은 조직들이 중간 관리자를 제거하여 조직의 위계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조직 내에서의 책임이 아래로 밀려 내려가고, 고용인들 스스로 자신의 일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기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권한위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하게 만들거나, 실제로는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3) 그리하여 한쪽에는 겉으로는 안 그런 체하면서 통제권을 유지하는 “새로운” 관리자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러한 기업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하는 근로자들이 있다. 직장은 전보다 더 활기차고, 희망으로 가득 채워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이전보다 더 ‘진실’해졌는가?

(203) ‘팀’이라는 단어는 재미와 도전, 그리고 스포츠 영웅주의라는 개념을 일터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모두 이 팀에 함께 있고,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개념은 흥분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은 또한 사람들의 소속 욕구에 부응한다. ‘일’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의 또 다른 이점은 그것이 극적으로 뛰어난 기술, 목적에 대한 고귀한 헌신,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204) 컨설턴트인 존 카젠바흐가 지적하듯이, 회사 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205) 피셔는 우리에게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한다. 즉 진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한 경영자의 말을 인용해서 “사원과 가족 구성원을 구분하는 것은 해롭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206)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팀’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9) 주란은 기본적으로 품질은 제품의 “사용 적합성(fitness for use)”을 말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214)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5) 리엔지리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 한때 지시 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218) 남자들은 항상 직장을 불행한 결혼생활이나 배우자와 아이들로부터의 피난처로 이용해왔다.

(219) 아메르코는 20세기 이후 조직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경영의 열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회사는 일을 풍부하게 만들고, 계층을 무너뜨리고,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줌으로써 사람들이 일을 ‘원하도록’ 만드는 “기계 안의 유령”을 이용했다.

9. 배신하는 직장 _ 지금,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220)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 때문에 직장을 잃은 것이다.

(223) 회사가 단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가차없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고용인들이 감지하거나 알고 있다면 충성은 터무니없는 것이 된다.

(224) “신뢰가 없다면 배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신뢰가 없이는 협력도, 공동체도, 거래도, 대화도 있을 수 없다.”

(224) 교만하거나 어리석거나 순진했던 경영자들은 고용인들이 자신의 일자리에 대해 걱정하고, 일자리를 두고 “팀 동료”와 경쟁하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팀 정신을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225) “사람들은 이전만큼 흔쾌히 노동 문화에 흡수되지 않는다. 직장은 나에게 돈을 지불하지만 나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직원 야유회 같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지 말라.”

(225)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젠 그렇게 해줄 직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고용인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227) 다시 말해, 기업들은 지난 20년간 자신들의 이윤을 고용인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대중은 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227) 갤브레이스의 말에 따르면, 노동시장은 본질적으로 가격뿐 아니라 임금까지도 통제하는 강력한 기업들에 의해 ‘조작’된다.

(231) 노사관계에 있어서 큰 모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만큼 그 사람의 만족을 이용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232)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3) 어떤 직업도 안전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안전한 직업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34)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235) 오늘날의 회사원들은 와이트가 말했던 조직인보다 더 오랫동안 일하고, 더 큰 압력을 참아낸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승선이 없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경주에 남아 있는 것이다.

(237) “그래, 내 영혼을 팔아서! 자, 오늘 이 거래를 끝내면 나는 어떤 유정 굴착 장치에 500갤런의 독성 세척제를 판 대가로 수수료를 벌게 돼. 그러니까, 나는 이곳과 괌 사이에 있는 모든 바다 생물들을 죽이는 한편, 희망봉에서 주말을 즐길 수 있어.”

(238)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242) 퓨어스테인은 아직도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기본적인 사회계약을 존중했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복지 혜택을 준다면 그들은 당신을 위해 생산할 것이다.”

(242) 우리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옛날이 더 좋았다고 자주 생각한다.

(244) 만약 미국 주식회사(corporate America)의 낡은 사회적 계약이 “세계경제의 요구”와 “기를 쓰고 달려야 할” 필요성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면 메리와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 남을 것인가? 그녀는 아무런 보상도 보장 받지 못한 채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여덟 시간 근무를 하며 삶의 다른 활동들에 시간을 쓰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후자는 그녀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한 선택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Part 3. 일과 삶

10. 당신을 ‘주말을 위해’ 사는가, ‘주말 동안만’ 살아남는가?

(247) 일을 좀 적게 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소비욕구나 부채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덜하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일을 한다. 어떤 이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는 게 두려워서 일을 한다.

(249) 오래된 아날로그 시계는 뭔가 좋은 구실을 가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이 시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볼 수 있다. 현대의 디지털 시계는 시간을 전후의 일련 사건 자체로만 묘사한다. 그것은 앞으로만 나아갈 뿐, 당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그저 축적되는 질서 정연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249)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 – 우리는 시간을 사용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팔고, 시간을 만들어내며, 때로는 시간으로 대가를 치른다(형기를 치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간은 돈’이라는 관념 아래서 살아간다.

(251) 모든 사회는 그 사회만의 독특한 ‘사회적 시간(social time)’을 갖는다. 사회적 시간은 언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일반적인 인생 경로를 결정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언제 먹고, 언제 학교를 가야하며, 언제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고, 결혼을 하거나 은퇴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253)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254) 이제 우리는 겨우 한가지 사태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 곧바로 다른 사태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255) 산업화된 국가의 노동자들은 단지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을 판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판다.

(257)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63)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4)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 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8) 집에 세 자녀를 보모와 함께 두어야 하는 곤경에 처한 서비스 근로자들이, 언젠가는 자신도 자수를 하고, 한 끼 식사를 세 시간 동안 준비하고, 분재를 재배할 시간을 갖게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정말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싶어한다기보다는, 이러한 것들을 할 시간적인 여유와 직업 이외의 일들도 잘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269) 진화 심리학자인 존 투비와 레다 코스미디스는 술집을 배경으로 한 TV 코미디 프로그램 ‘건배’의 인기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세계-이따금씩 신중하게 계획을 잡아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이 곧잘 이뤄질 수 있는 곳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을 반영한 것임을 알았다. 노동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할은 …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일이 아니라 여가를 위해 산다고 썼다. 할에 따르면, 블루칼라 노동자의 사회 생활은 일과 분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다 자연스럽게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270) 이들은 우리에게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스스로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굉장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러한 기분은 환상에 불과하다.

(271)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3) 이것은 다시 생활이 일의 일부여야 하는 지, 일이 생활의 일부여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당신이 집에서 일한다면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273) 베블런은 사람들이 확실한 여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확실한 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 로렌스 셰임즈는 흥미로운 일은 사치품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주장한다.

(274) 그들은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환상을 갖고 있으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탐닉한다.

(274) 항상 일만 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곧 “대면 시간(face time)” 즉 일과 후 직장에 남아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면 시간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일을 하기보다는 이미지 형성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식(symbolic ritual)’이다.

(275) 그러나 일이 우리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잡아먹을수록, 우리도 일 이외의 “무엇인가를 더” 원하기 시작한다. 샘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과 소비가 사람들을 규정하게 되면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쇠퇴한다.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킨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초과 근무를 강요하는 조직들은 완전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11. 여가와 소비주의 _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276)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여가를 갖기 위해 일을 한다고(혹은 “분주하게 보낸다고”) 말했다. 여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독특한 능력,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우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가를 필요로 한다.

(277) 영국의 수필가이자 자칭 일벌레인 G. K. 체스터턴은 여가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했다. “첫 번째는 ‘무언가를’ 하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아마도 가장 드물고 귀중한 부분)는 ‘아무일도 하지 않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277) 일이 우리를 고상하게 만들고 피로하게 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줄지라도, 정작 우리를 인간으로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가”라고 주장했다.

(279)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80) “나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했으니, 이제는 나를 즐겁게 해줄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가질 자격이 있죠.”

(283) 리브친스키는 TV 시청에는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노력이 거의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TV 응시(staring)”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를 “멍하니 응시하는(stupid stare)” 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TV를 완벽한 ‘오락’ 혹은 ‘일로부터의 기분전환거리’로 만든다.

(283) 그러나 일이 우리의 힘과 자원을 몽땅 소진시켜서 TV 시청 외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도록 만들거나, TV 시청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 만든다면 잘못된 것이다.

(283)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일은 물질세계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사람들을, 동물적 본성에 따라 좌우되는 존재에서 벗어나 의식적이고 자발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 일이 지루하고 단순해질 때, 그것은 개인의 발전을 억누른다.

(284) 흥미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여가를 추구하고, 지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인일에 만족하곤 한다.

(287) 소비는 개혁가들이나 고용주들, 혹은 정부의 어떤 계획보다도 더, 일과 자유시간의 관계를 단단한 매듭으로 연결한다. 조직인이 조직에 깊이 뿌리내리는 대신, 공동체 내에서는 얕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한 윌리엄 H. 와이트는 옳았다. 그가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소비주의와 신용거래가 사람들을 더더욱 일에 묶어놓는다는 점이었다.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일을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다.

(288) 흥미로운 것은,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9) 때로,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보다 중요하다.

(289)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90) 이것은 우리를 막힘 없는 소비와 부채,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쇼어는 이 순환의 고리 속에 빨려 들어간 사람들은 “소비가 삶의 의미와 만족까지 줄 것이라고 점점 더 기대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292) 그러나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결정하고, 심사숙고하고, 의견을 표현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293) 우리가 실제로 일터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했다면 통제권을 되찾는 한가지 방법은 시장에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수입 이하로 생활하는 것은 수입을 초과하여 생활하는 것만큼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더 많은 융통성을 허락한다. 부채와 소비 욕구로 인해 우리는 싫어하는 일에 얽매여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는데 쓸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

(294) 데시는 이것을 “과잉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라고 불렀다. 즉, 사람들은 이미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추가적인 대가를 지불 받으면 필요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295) 여가는 자유롭고,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이며, 즐겁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다. …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_ 직장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296) 의미 있는 일의 본질과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즉,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8) 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삶은 강이다.” 남자는 일어나서 도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당신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삶은 강이라는 말뿐입니까?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 가장 어이없는 말이군요!” 도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삶이 강이 ‘아니란’ 말이냐?’

(298) 우리 모두는 삶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우주가 우리를 비웃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298) “인생은 희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비극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299) … 삶의 주된 목적은 1) 당신이 신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 2) 당신이 그의 즉각적인 결정을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 3) 당신이 집으로 여기고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장소를 지구상에 갖는 것. 4) 동시에, 보다 큰 세계의 시민이 되는 것.

(300) 사람들이 외로움이나, 친구 또는 가족들로부터의 단절감을 느낄 때 그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구한다. 창조의 행위는 그 사람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다. –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의미 있게 여기는 이유도 이것이다.

(301) 프랭클은 쾌락과 고통이 아닌, ‘가치’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간은 이상을 위해 죽고 살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해답에 도달해야만 한다.

(302) “만족을 지연시키는 것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훌륭한 삶의 방식이다.

(304) 신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동시에, 그 질문을 제거해버린다.

(304) 성경적 신앙은 자유롭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것은 정신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 맹신(盲信)이다.

(306) 아마도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인 듯하다. 즉,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들-에 우리의 에너지와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307)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8) 우리는 삶의 가치나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최상의 답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310)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펴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1) 그는 사람들이 드물게 절정에 이르거나 최적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그것을 “몰입(flow)”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순순히 의식의 흐름을 따른다. 그들은 어떤 활동을 그 자체로 추구하고, 그 일에 완전히 몰입된다.

(312)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에서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 그들의 삶은 다나이드의 ‘새는 물항아리’와 같다. 그들은 조금씩 행복을 채워 넣지만, 항아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315)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6)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은 우리 안에 있는 존재를 나타낸다. 그것은 감정과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힘,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아와, 우리 앙 있는 신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된다.”

(317)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인간 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9) 고용주들은 ‘직장의 구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이 승진이나 상여금, 혹은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일 바깥에서도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과 융통성을 그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용주들이 유일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게을러졌고, 그들은 고용주들이 자기 삶의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었다.

(320)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개념을 ‘우리 삶에서 의미를 갖는 일’로 재정의한다면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의미 있는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20)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그곳은 다만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장소일 뿐이다.

(321)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하고 의미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 특정한 게으름 혹은 주의의 결핍 때문이다.

(322)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324) 헤시오도스가 주장하기를 정의는 훌륭한 삶의 본질이며, 삶이 좋을 때 일도 보다 나아진다.

(324) 일에서 겪는 고통은 타인들에 의해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즐거움은 대개 우리 스스로 발견한다. 이상적인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영업을 꿈꾸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327) 기업의 입장에서, 정직한 직장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심리적 조작’이나 공허한 선전’에 해당하는 경영 지침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더는 효과적이지 않다.

(329)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30)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330) 다른 이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332)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향상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2) 이러한 거래에서 우리는 소비 욕구를 억누르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2) 즉,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이 삶을 조직화하고 분명하게 내재된 보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일단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기로 결정하면, 일과 삶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놀라울 정도로 무궁무진해진다.

(333)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333)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 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이 책은 다만 일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일 뿐이며, 새로운 직업 현실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의 제한된 시간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C. 내가 저자라면

1. 정신을 차리다!

책을 내려놓은 순간, ‘갈!’ 하며 죽비로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내려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시울라 교수는 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자리는 사실은 없는 것이라며,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일’에 대한 중심 기반과 기본 가정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생각과 사실들이 실은, 다른 사람의 검증 안된 생각 또는 조작일 뿐이라고 거침없이 밝힌다.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남이 이끄는 대로 ‘노예’처럼 살 것이라며 잔뜩 겁을 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한편으론 통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시울라 교수는 이런 독자의 마음을 읽은 듯, 담담하지만 솔직하게 말한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다른 이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차가운 이성으로 차근차근 풀어낸 글이지만, 저자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믿고 있는 일과 삶에 대한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고 결국 ‘자신의 삶의 의미는 자신이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데에 있고, 한계는 저자가 밝혔듯이 단지 일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뿐이라는 데 있다.

2. 저자의 강점과 장점

그러나 그것이 한계라고 말하기에는 이 책은 너무나 많은 소중한 진실과 장점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내가 저자라면’ 이라는 비판적 시각 대신, 책을 읽으며 흠뻑 빠져 들었던 저자의 강점과 장점에 대해 3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저자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이는 쉼 없이 공부하는 자세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일’이라는 한가지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혜안이다. 이는 ‘일’이란 주제를 화두처럼 꼭 붙들고, 끊임없이 파고든 집중력의 결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인류에 대한 믿음’과 ‘정의에 대한 열정’을 차가운 논리와 이성의 틀 안에 담아낸 저력이다. 그 어떤 변화도 차가운 이성이나, 뜨거운 감성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감동 또한, 저자의 인류에 대한 따뜻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날카롭고 체계적인 논리가 뒷받침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3. 리뷰를 마치며

이제 리뷰를 마치는 시점에서 내게 남은 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직장생활이란 길의 끝이 사실은 그 어떤 곳으로도 향하지 않는다는 텅 빈 깨달음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저자가 독자에게 던져주고 싶었던 궁극적인 메시지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에서 시작해라. 네 것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섣불리 믿지 마라. 너의 길은 바로 네 안에 있다. ‘네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가?’ “삶을 일에 꿰어 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 해라!

결국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오직 자신 안에서 시작된다.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의 제한된 시간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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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3.25 22:58:51 *.60.237.51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정신 없이 헤맸다.

책상 옆의 작은 풀이 목이 말라 초췌해졌다. “내가 살려고, 너를 말렸구나!” 그렇게 정신 없이 발버둥쳤던 2개월간의 짧고도 긴 여행이 이제 끝나간다.

자기 소개서를 쓰느라 주말을 바쳤던 2007년의 2월과, 3권의 책과 씨름하며, 과제를 작성하느라 허둥지둥 보냈던 2007년의 3월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치열한 역사에서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의 일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전체에서 개인으로 거슬러오는 정신 여행을 거치면서, 난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었고, 진짜라고 믿었던 길 위에 진짜가 없었음을 깨달았고, 또 세상엔 질투날 만큼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뜨거운 영혼들이 많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며 돌이켜보니, ‘그 바둥거림에서 참 많은 걸 배웠구나’, 그리고 ‘제 잘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울렸다. 이제 주어진 시간 안의 최선을 떠나 보냈으니, 언젠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 부처님과 마주앉아 차 한잔 마시는 그날을 꿈꾸며, 두 달간의 여정을 잠시 음미해봐야겠다.

늘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과제를 붙들고 낑낑대는 나를 지켜봐준 아내와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줬던 많은 사람들과, 같이 시험을 치르며 동고동락한 스무 명의 동지들. 모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묵직한 주제의 과제를 통해 이 과정이 단지 선발을 위한 시험 만이 아닌, 자기 발견을 위해 필요한 소중한 여정임을 일깨워준 구본형 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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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2:55:00 *.140.145.63
화이트와 베니스의 평에서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확신이 드는
군요. 다른 이의 적절한 평을 인용하는 것의 위력을 알 수 있는 대목
입니다.. 감사 드리구요.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과 ‘마이 사눅(재미없는)’으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 이 대목을 읽고서야 써니님의 컬럼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는군요..^^

김도윤님의 댓글을 읽고보니 관전자 입장에서 참가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즐겁고 의미있는 지적레이스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님의 댓글은 한편
으로는 앞으로 쓰시게 될 첫 책의 서문을 미리 보고 있는듯한 느낌도
갖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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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27 14:59:29 *.72.153.12
오~ 그랬었구나.
아~.
깊은 숨과 긴 숨이 쉬어지게 하는 글과 댓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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