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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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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00시 1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안 B. 시울라(Joanne B. Ciulla)

일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며 이보다 더 “일”과 “노동현장”에서의 나를 위로한 책은 없다!

일상을 통하여 재현되고 있는 일과 노동의 가치와 한계를 솔직하고 대범하게,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깐깐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조안 B. 시울라는 리치먼드 대학교의 교수이자 젭슨 리더십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윤리분야의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다양한 기업과 조직을 대상으로 한 자문 및 강연활동과 함께 기고와 집필을 여러 매체에 하고 있으며 저서에는 <리더십의 윤리학>과 <윤리, 리더십의 핵심> 등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개인이나 혹은 조직으로 하여금 일상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고찰로서, 일과 삶의 아름답고 균형 있는 조화를 고민하며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함이 돋보이는 일과 사람과의 진정한 가치와 화해를 모색한 책이다.

저자 자신이 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그동안 웨이트리스, 요리사 등의 직업을 경험하며 노동현장에서의 생생한 현상과, 불합리와 불평등 등의 직̇̇・간접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모색,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하여 개선되고 인식되어져야할 일과 노동의 의미와 가치 등을 인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경영학적 관점에서 논하여 지평을 넓힌 바람직한 연구서이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가 밝힌 몇 가지 견해들을 통해 이 책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면

•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기를 바라는지, 그 선택에 관한 책이다.

•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는 철학에서 보통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 미래의 일에 대한 소망과 두려움을 표현해준 나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 을 원한다.

저자는 이렇듯 일과 노동 현장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생활의 조화된 구체적이며 실제적 모색을 통하여 보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위한, 일과 노동의 상생과 어울림의 균형을 호소한다.


2] 마음속에 들어오는 글귀


아리스토텔레스가 꿈꾸었던 연장과 기계들은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서 이미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p8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의미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듦에 따라 그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것이다. p8

이 책은 처세를 위한 책도 엄격한 사회과학 연구서도 아니다.

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무엇이 “훌륭한 삶”을 이루는지를 묻는 질문의 일부로서만 존재했다.

사회와 제도는 일반적인 의미구조를 제공하지만 개인이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p10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는 철학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여러분이 일을 더 많이 해서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남겨줄수록 여러분의 실제 노동 가치는 줄어든다.” p11

공산주의 논리가 한때 전 세계적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회주의를 원해서가 아니라 공정한 사회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일은 “일상의 굴욕”이었다. 그들의 굴욕은 그들이 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나 상사의 멸시와 부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내 학생들은 감시당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신뢰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개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무능력을 탈피할 힘을 갖지 못한 것을 못마땅해 했다. p11

식당에서 나는 발레덴서, 모델과 함께 일했다. 우리 모두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발레댄서는 결국 주연 발레리나가 되었고 그 모델은 이탈리아 <보그지>의 표지모델이 되었으며 나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연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그 일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주거나 적어도 원하는 길을 가는 동안 우리를 먹여 살려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 그 어떤 최악의 일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p12 (최근 10년간 실제로 나는 그런 맘으로 살았다. 1970년대 방직공작 여성근로자들은 푸쉬킨의 시를 암송하며 고단한 일상을 참고 야학을 공부해 가며 삶이 우리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자며 살지 않았던가)

오늘날의 업무는 그렇게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노동력을 팔고 있지만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은 일의 지나버린 황금기(lost golden age work)에 대한 탄식이 아니다. . p14

‘일의 의미’ 뒤에 숨겨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가정들 (assumptions)을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의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기대를 살펴보고, 일과 삶에서 해왔던 자신의 선택들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일’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100배 공감)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직접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 책은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 있다. p15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일’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직업을 잃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소득이 있는 상태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p20

‘실직’은 사람들과 도시로부터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인 듯했다.

결국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p21

“실직의 문제점은 당신이 단 하루의 휴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 너무나도 옳은 말)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p22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일이 없이는 안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다.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일이 아니라 전쟁과 교육이 여가에 필요한 절제와 규율 같은 도덕적 미덕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이 학예(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학예의 이상(liberal art ideal)’ 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추구하는 지식이다. p23

교육은 정의와 자기 규율 같은 미덕과 지식을 전해준다.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후’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일을 필요로 하는가?/
남아프리카 원주민인 부시맨이 물었다. “세상에 몽고몽고넛이 이렇게 많은 데 왜 우리가 씨를 뿌려야 하지요?”

“회사를 그만둔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나는 곧바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다리가 셋 달린 의자처럼 매일 하는 일 없이 넘어졌다.” p25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 느낀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필요일 뿐인 것이다. p26

개미와 베짱이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가?
우리는 베짱이처럼 짧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고 개미처럼 길고 비틈 없는 삶을 살 수도 있다. p27(“가늘더라도 길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외치던 해부학교수님 생각이 난다.)

이 우화는 주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일하는 삶이 노래하는 삶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만약 당신이 노래하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주제는 ‘공평함’과 ‘자급자족’이다. p28
탐욕, 인색함, 욕심은 때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 수반되곤 한다. ........“비록 그의 형체는 변했지만 그의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들판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밀과 보리를 모아 자신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솝은 시기심으로 인해 생겨난 근면함은 도둑질이나 탐욕, 인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p29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하라?/
맨더빌의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함으로써 최대의 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단순한 사리사욕을 넘어서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때 훨씬 더 감탄한다. p30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중심이다, p31 (구본형 선생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의 절충 개념?)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들/
개미, 베짱이, 꿀벌 중 당신은 어떤 유형의 노동자인가? 혹시 당신은 ‘개미베짱이’가 아닐까? p32

노년기에 인생을 즐기는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이렇듯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개미가 갖고 있는 인생 계획의 장점은 그의 검소한 생활이 그를 곤궁으로부터 구하고 늘 비상시를 대비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을 때, 일은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p33

개미로 변장한 베짱이 혹은 ‘개미베짱이(anthopper)’ 일 수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일하고 돈을 모으는 데만 집중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이러한 전략은 네 가지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이솝 우화의 개미와 달리 개미베짱이들은 참을성이 없고 만족을 지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개미베짱이들은 ‘빨리’ 돈을 벌고자 한다. 둘째, 그들은 일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왜냐하면 돈을 모으는 대신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생활방식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셋째, 문제는 개미베짱이들이 자신의 모든 시간과 돈을 일에 투여함으로써 친구, 배우자, 자녀와의 관계를 해치는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개미베짱이의 배우자는 그가 ‘이른 은퇴’를 즐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개미베짱이들은 돈벌이에 너무나 중독되어서, 자신의 재정적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도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혹은 일 자체와 돈을 모으는 즐거움에 중독될 수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지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은 그것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습관이 된다. p34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p35

놀면서 일하기, 일하면서 놀기/
만약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에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놀면서 일하는 대신 일하면서 놀 것이다.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아니, 그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만족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꿀벌의 일은 생존에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의미를 담고 있다. p36

플라톤은 놀이가 아이들과 작은 동물들의 뛰어오르려는 욕구로부터 발달했다고 말했다.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p37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
당신이 다음 네 개의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회계법인의 높은 보수를 받는 직책,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에서 일하는 것, 공무원, 겨울에만 문을 여는 아스펜스키 리조트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것!

그것은 의미 있는 일 혹은 당신이나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흥미롭고 중요한 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가나 자유 시간, 돈, 그리고 안정이다. p38

이상한 선택?/
스탐보브스키는 왜 월스트리트를 떠나고 , 비렌다 반즈는 왜 펩시콜라 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까?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일할’ 기회가 아니라, 집에 머무는 것과 일하는 것 사이에서 ‘진정한’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아마도 일이 주는 가장 근본적인 만족은 생계를 꾸리는 데서 오는 만족감,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일 것이다. p44
(이 만족감이 바로 안정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월급날 상점에 들러 몇 가지를 사서 가족에게 안겨줄 때 얼마나 뿌듯한가를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일과 활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개인적 행복과 정체성이 유독 일에만 의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p45

2. 일이란 무엇인가?
단어와 그 어원으로 살펴보는 일의 정의

일의 정의와 의미/
우리는 낮잠 자는 것을 “힘든 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낮잠과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용례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p47

빌 게이츠는 어떻게 ‘빌 게이츠’가 되었는가?/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 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p48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정신에 걸맞지 않게 하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 비해 일은 매우 사소하다.” P49 (옳은 말씀, 우리의 이상은 하늘을 찌른다.)

우리가 일이라 부르는 활동들/
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가? 도랑을 파고 있는 건설노동자, 회의에 참석한 중역, 비평해야할 영화를 보고 있는 평론가, 수업을 위해 소설책을 읽고 있는 학생, 병원에서 환자를 목욕시키는 자원봉사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P50

태도로서의 일/
대체로 “일”이라고 불리는 활동들은 우리가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일’을 다른 유형의 활동보다 덜 바람직한 것으로 가정한다. p52

사눅(sanuk 재미있는)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 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택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즉, 작업파티는 생일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p53

모든 문화에는 “일”이라 불리는 활동을 결정하는 고유의 가치와 사회적 인식이 존재한다.

어떤 것도 일이 될 수 있다/
일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을 ‘하고’ 일터로 ‘간다.’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소유하는’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p54

영어-아랍어 사전에서는 일에 해당하는 두 개의 아랍어를 재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아말(amal)'로 그것은 지식과 대비되는 일반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두 번째인 ’선(sun)'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p55

‘노동’과 ‘일’은 어떻게 다른가?/
가정부 메이벌은 그녀가 설거지한 그릇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매일 더 많은 설거지거리가 있다. 그러나 일과 노동이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p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력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 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사람”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일’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일’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p57

시시포스와 다나이드의 ‘일’/
노동은 고통이고 형벌인가? 시시포스와 다나이드를 괴롭힌 것은 세 가지이다. 즉, 소모적이고 지루한 과업, 자유의 상실, 무의미하고 헛된 일이 그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신들이 “쓸모없고 헛된 노동보다 더 무시무시한 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평한다. 시시포스와 다나이드를 괴롭힌 것은 세 가지이다. 즉, 소모적이고 지루한 과업, 자유의 상실, 무의미하고 헛된 일이 그것이다. p59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고나 고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건 업무일 뿐이야”/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p60

3. 일의 역사
아담의 ‘저주’에서 신이 내릴 ‘소명’으로 그리고 ‘삶의 목적’이 되기까지!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도덕적으로 다소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인 개념이었던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풍부한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변화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바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p64

일은 신의 저주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p65

욕망은 인간의 필요와 달리 무한한 것이다.

부를 얻는데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그들은 어떤 것도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한다.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서양과 동양의 일 개념 차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p66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 혹은 영혼 속에 존재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생각은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변화로부터 안전하다. p67

깨끗한 일, 더러운 일의 기원/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서민이 될 수 없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힘을 덜 쓰는 직업인 ‘화가’는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p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로 “꼭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p69

초기 기독교인들의 일 개념/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p70

정오의 악마/
에바그리우스는 ‘무기력’을 “정오의 악마”라고 불렀다. 그것은 오후에 수도사들을 공격해서 그날 하루가 마치 50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는 것처럼 만들었다. 72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까지 확대시켰다. 즉,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성실히 일하라고 장려한 동시에,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에 대해서는 경계한 것이다.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와 에 라보라(ora et labora)’, 즉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법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탁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규정집에서는 사람들이 일하고, 기도하고, 읽고, 명상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곳으로 조직을 묘사한다. p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 기도였다.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을과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p75

‘어떤 직업’은 죄가 되기도 한다./
12~13세기 에 ‘일’은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시켜줄 뿐 아니라 그들의 잠재적인 미덕 및 악덕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사제들은 여인숙 주인, 목욕탕 주인, 선술집 주인에게서 ‘색욕’의 징후를 감시하도록 지시받았다.
새로운 고해규정서가 이전의 것을 대신했다. 이들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주제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모든 기독교인을 그 사람의 직업과 관련해서 정의했다. 둘째, 그들은 모든 노동이 보상과 사명감, 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그들은 노동에 근거한 모든 직업을 정당화했다.
고해 규정서는 직업의식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규정서들은 죄를 일종의 직업적 위험으로 간주했다. p76

매춘부도 정당한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매춘부들은 ‘고용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노동을 지급한다. 그러나 만약 매춘이 쾌락을 위한 것이고 매춘부가 오르가슴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빌려준 것이라면 그 이득은 매춘 행위만큼이나 수치스러운 것이다.”

르네상스인, 호모 파베르의 탄생/
14세기 피렌체는 우리에게 서계를 만들어 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르네상스인은 스스로의 전신과 영혼, 육체와 두 손을 훈련시켜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p80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즉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것들의 창조자이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p81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p82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학파 사이에서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보다 앞선 이 책에서 그는 덕(德)이 “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of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이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어가 만들어낸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노예들을 이용하여 자기 시간을 여가와 지적인 연구에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에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파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p83

노동자의 자살이 금지되고 거지들은 비난받다/
16~18세기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할 정도로 해야 할 노동이 많아졌다. 이렇듯 일의 가치가 상승하자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첫 번째 사람이었던 거지들이 비난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일을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부랑자와 거지가 되어야 했다.
p84

저주에서 소명으로!/
신교도들에 의해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p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크(Beruf), 즉 “소명”으로 정의 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에는 루터의 종교 개혁론 관점이 평확히 표현되고 있다. “수도원 생활은 더 이상 농부나 장인의 삶보다 완전하지 않다. 농부나 장인의 생활 또한 완전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소명이 무엇이든 (자신의 소명에서) 완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 ‘소명’ 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 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과 ‘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p87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는 과연 일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천당’보다는 ‘가정’에 좀 더 가까운 무언가를 약속해주길 바란다.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견해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p89

근대적 경제인의 원형, 로빈슨 크루소/
홀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크루소는 자신의 이익과 실용성에 근거한 선택을 한다. 오늘날 우리는 크루소의 유산을 공유한다.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인 것이다.

일에 대한 크루소의 상반된 태도는 소명으로서의 일에 대한 낭만적 관점과 실용적 관점을 동시에 반영한다. 그는 모험과 창조 사이에서 이익을 내고자 하는 욕망과 생계를 꾸리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p90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하는 일의 목적/
애덤 스미스보다도 먼저, 프랭클린은 부가 사회에 이득이 되고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 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개인의 선함은 개인의 행위뿐 아니라, 그가 자기 노동의 열매를 이용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방식에 근거한다.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 이라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노동윤리를 세속화했지만 전통적인 기독교의 미덕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프랭클린에게도 여전히 부에 이르는 길은 신중함, 근면, 검약이었다. 특히 훌륭한 품성은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현명해진다.” p93

소년들이여, 성공하려면 부지런함을 배워라?
자수성가한 미국인의 대명사인 앨저가 쓴 동화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메시지는 아마도 아메리칸 드림으로서의 노동윤리의 표현일 듯하다. 즉, 미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94

아메리칸드림을 창조한 성공담들/
남북전쟁 후 미국에서는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으로>같은 책이 쓰여 졌다. 이 책에 따르면 워싱턴 대통령은 농장에서 백악관으로 왔으며 가필드는 통나무집에서, 링컨은 개척자의 집에서, 그랜트는 무두질 공장에서 각각 백악관으로 입성했다. p97

“인간은 자신의 길을 궁리하지만 신은 그의 발걸음을 이끈다.” p98
“성공(success)의 또 다른 글자는 땀(s-w-e-a-t)이다.” p99

성공의 열쇠는 무엇인가?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의 열쇠가 된 것이다. p99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
마치 미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이며 그 입구 너머에는 강력한 비문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건 없는 자 입장 불가”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하는 일’ 이상이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영역에서 훌륭한 생산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p101

마르크스는 일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인간의 욕구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질은 다름 아니라 그가 상품의 생산자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분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그의 이상은 사람들이 많은 영역에서 훌륭한 생산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 p103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은 “삶의 빛”인가 “삶의 짐”인가?/
‘르네상스인’ 이자 ‘일벌레’ 이기도 했던 윌리엄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p104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리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와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p105

왜 전문가들이 존경받는가?/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p106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일은 삶의 연속성을 반영한다. 둘째,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그들 자신은 곧 자신이 하는 일이며,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셋째, 일에 대한 헌신 덕분에 그들은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전문가나 장인으로부터 얻는, 일에 대한 환상은 자율성, 창조성, 지위, 개인적인 기술에 대한 존경, 타인에 대한 사심 없는 서비스, 그리고 지배층의 통제라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전문가와 장인은 바람직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일을 통해 꿈꾸는 것은.../
루터와 프랭크린이 일에 대해 생각했을 때, 그들이 생각한 것은 소규모 농장주, 가게 주인, 혹은 장인이었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다른 사람 아래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가게를 열거나 독립적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것, 혹은 개인 개업을 꿈꾼다. p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미국에서 ‘일’이 미국의 민주주의적 이상과 정반대 형태로 발전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맹렬한 독립성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를 창출하는 이들의 권리가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권리보다 우선시된다. P115
노예제도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 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 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p117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들은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선택을 싫어하는, 지배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일단 노예들이 자유를 얻으면 개인적인 특성으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이 아닌 한, 즉 상황으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p118

이 소년들 중 15%는 소유자들이 즉석에서 구매한 소년들이다. p119

자유를 팔아 희망을 산 사람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 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p121

북부의 임금노예들 VS. 남부의 농장노예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말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p125

‘자유로운’ 계약관계?/
소도시에 살고 있고 부양할 자녀가 넷이나 되는 미혼모 역시 어디에서 일할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p127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가 계약에 동의하는 한 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보다 큰 착취의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 간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팔고자 한다면 고용주가 얼마나 많은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p129

일하는 원숭이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p130

시간과 자유의 매매/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 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즉, 우리는 시간과 자유를 판다. p131

무너지는 ‘장인’들의 시대/
19세기에 이르면, 장인의 전문 지식에 대한 존중이 점차 사라진다. 독립전쟁 후 젊은이들은 삶과 일에 대해 공화주의 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일터에서 어떤 권위에도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p132

기계와 산업 노동자의 출현/
산업혁명이 고조되는 동안 미국 산업의 물리적 산출량은 열네 배나 증가했다.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 함으로써 사람들을 기계의 일부처럼 쉽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p135

6. 일꾼 길들이기
그들은 우리가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해주기를 원한다. p137

할당량 맞추기/
대부분의 작업장에는 할당량이 있었으며, 너무 많거나 적은 일을 함으로써 할당량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추방당했다. 할당량을 유지하는 일꾼들은 “좋은 사람” 이자 그 직종의 믿을 만한 숙련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p139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다/
경영자가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p140

“수미트‘가 몸값이 높은 이유/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이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p141

‘비스킷 만드는 법’의 탄생/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143

“과학적 관리법”에 대한 저항/
1912년부터 1913년 사이의 경제 호황기 동안 산업 현장에서의 고용인 이직률은 연간 100% 내지 250%에 달했다. p144

근로자들에게 복지를 베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 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p145

미국식 제도의 발달과 몰락/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에 대공항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p147

인간관계 경영의 시작/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일은 육체적 과정 이상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때 일의 동기는 돈 말고도 더 많은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p149

심리학으로 경영하기/
메이오는 심리학이 고용인들로부터 충성심을 얻어낼 수 있도록 경영자들을 도움으로써 고용인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조직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p152

메이오는 고용인들이 면접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치료 효과로 인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일에 대한 그들의 불평은 변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배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 것이다. p153
호손 연구는 왜 노동조합을 무시했을까?/
질손은 메이오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2만 명의 근로자들을 면접했는데도 근로자들 중 누구도 회사를 비판하거나 노조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p154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이 진정한 진보인지, 혹시 그것이 일터에서의 인간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관계 접근으로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있었다. 경영자들은 여전히 “협력이란 사장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 여기며, 협력의 기술이 아닌 협력의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p156

노동조합의 딜레마/
노동조합 가입률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증가했다가 감소했다. 1950년에는 비농업 임금노동자들의 40%가 노조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동안에도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건재했다.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p157

노동의 두 얼굴
우리의 일터는 왜 이토록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졌는가?

드리커는 ‘호손 연구’로부터 소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불만족은 단조로움이나 기계적인 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정이나 의미의 결여, 혹은 자신의 일이 사회적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산업 체계 내에서의 소외의 문제는 더 많은 복지 혜택과 안정성, 또는 임금을 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소외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성인(adult)으로서의 책임과 위엄을 주었을 때만 완화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일은 주로 직업의 사회적․ 도덕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지 특정한 일의 종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회사의 개념>에서 드리커는 근로자로서의 경제인을 비난한다. 그는 “단지 생계를 위해서만 일하고 일 자체와 그것이 갖는 의미를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이 아니며, 시민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드리커는 또한 유럽 파시스트의 “자유” 개념을 개인에 대한 다수의 권리로 묘사한다. p160

“새로운 작은 사람”의 출현/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섬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아서 밀러의 1949년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인 윌리 로먼은 밀러의 “작은 사람”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밀스는 로먼이야말로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인생을 완전히 망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인사부서가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대신하고, 근로 의욕이 그동안 일하는 동기로 작용했던 도덕성을 대체했다. p163

“주사위는 조직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두 시대의 직장 모두 집단 작업을 강조하고 충성과 헌신을 장려한다. p164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와이트가 말한 “조직인”의 이면에 있는 성격 유형이다. p165

회색 플란넬 옷을 입은 남자/
어느 회사의 인사담당자가 입사 지원자에게 “마지막 행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으로 끝나는 자서전을 쓰라”고 요구했다고 하자. 당신이 입사지원자라면 어떤 내용으로 지원서를 채울 것인가? p169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회사/
경영자들은 개인의 ‘선호’ 보다는 그들의 ‘욕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욕구는 때로 사람들에게 일하는 동기가 되어 주기도 하고, 일하지 않도록 만들기도 한다. 경영자들이 깨달은 비결은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또 다른 욕구를 장려하는 것이다. p170

H.E.W. 연구 보고서/
H.E.W. 연구는 사람들이 흥미로운 일과 일에서의 발언권, 그리고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일에서 봉급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들은 만족을 원했다.

밀스가 말한 “새로운 작은 사람”처럼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졌다. 그러한 사람들은 “침묵하는 다수”로 불렸다. p173

TV시리즈 ‘가족 안에 있는 모든 것’ 이 시리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부분적으로 많은 사람이 느낀 점을 벙커가 ‘실행’ 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대단한 직업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삶의 행로를 서툴게 헤쳐 나갔기 때문에 희망을 보여 주었다. p174

이러한 조사는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 매슬로의 “욕구” 이론에 비추어볼 때 사람들은 상당히 잘 지내고 있으며 이미 자신들의 하위 욕구를 충족한 상태로, 앞으로는 상위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둘째, 일이 너무나 지루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흥미로운 일’에 우선권을 주게 되었다. 셋째, 1970년대는 자기분석적인 시기였고 이러한 자기중심 세대(me generation)의 근로자들은 실제로 보다 의미 있는 일을 원했다. 넷째, 노동윤리의 전통과 당시의 문화적 풍조를 고려해보면,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질문에 답했으며, 자신들이 사실은 ‘흥미로운 일’보다 ‘직업 안정성’이나 ‘높은 보수’를 우선시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섯째, 1,533명의 근로자들은 단지 그 시대를 나타내는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p175

태컬은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모욕”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이 된다고 썼다. 일은 “일상의 빵뿐만 아니라 일상의 의미를, 현금뿐 아니라 인정을, 무기력뿐 아니라 놀라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메시지는 H.W.E. 보고서의 메시지와 매우 유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원하며, 그것도 훌륭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직무상 혹은 상사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윤리의 가치들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터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방해물들이 존재한다.

참여경영의 실험작 ‘볼리바르 프로젝트’/
볼리바르 프로젝트에서는 고용인들의 직업 안정성을 증대시키고, 그들이 근로조건 및 훈련에 대한 결정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용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직무를 재설계했으며, 생산 과정이 좀 더 원활히 진행되도록 일했다.

“타인은 지옥이다”/
일하면서 미소까지 지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 한 슈퍼마켓의 점원들은 “저의 약속: 웃거나 인사하지 않으면 저의 1달러를 가져가세요.”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어야 한다. p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이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감정의 통제>에서, 직업이 ‘감정’을 어떻게 시장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변화시켰는지 묘사하고 있다. p182

사적인 삶에서라면 마땅히 피했을 정서적 교환이 공적인 삶에서는 보편화되고 있다. p183

혹실드는 자신의 직업과 지나치게 동일시된 근로자는 정서적으로 소진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직업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근로자는 스스로를 위선자로 여기며 모욕을 느낄 것이다. p184

8. 유망한 직장
경영 이론가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직장’은 가능한가?

베스트셀러 경영서들이 만들어 낸 ‘신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p189
기업문화의 “발견”/
성공한 기업에는 강한 문화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 경영자들이 있다. 딜과 케네디는 강한 문화를 가진 기업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위대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초과근무를 하거나 한층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며 독자들을 확신시켰다. p192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일과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p195
'업무'도 아니고 '사교'도 아닌 것에 시달리기/
무쇠 나르는 사람 “슈미트”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 아래서 일했지만 상사에게 미소 지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무쇠를 나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무쇠도 나르고, 미소 띤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넛을 먹어야 한다. p195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 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엘드리지 클리버 저서 <갇힌 영혼>에서 지적했듯이 “집에서 일하는 흑인(house nigger)”로 보다는 “들에서 일하는 흑인(field nigger)”이 되는 편이 낫다. 들에서 일하는 흑인은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공손히 대해야 하는 부가적인 모욕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p197

‘3의 법칙’이 갖고 있는 모순/
고용인들은 ‘권한위임’의 목적을 갖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사실은 자신들을 “세뇌”시키려는 시도라고 불평했다. 고용인들은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오히려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p198

“넥타이를 맨 회사의 제물(祭物)들”
‘에너지 언리미티드’라는 회사는 간부들에게 맨발로 뜨거운 석탄 위를 걸으라고 요구하며 이 훈련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p199

‘팀워크’ 혹은 ‘팀 개념’이라는 유행어의 허구/
진정한 스포츠 코치는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이기는 팀을 만들어낼 때에만 인정받는 불쾌한 파시스트처럼 행동할 수 있다.p 203

팀은 ‘문화’ 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팀 안에서 집단으로부터 받는 또래 압력(peer pressure)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도록 만든다. 팀은 광범위한 조직 문화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만약 집단이 중요한 제품을 생산한다면, 그들은 “점수를 유지”할 수 있고 잘만 하면 자신들의 수행에 대한 보상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팀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준다는 점이다. p204

컨설턴트인 존 카젠바흐가 지적하듯이, 회사 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심지어 데이비드 리스먼조차도 조직 내에서 팀워크를 예찬하는 것이 실제로는 “적대적 협력”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팀워크는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생존을 위한 진짜 투쟁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p205

워너 기어 사의 혁신 이야기/
노조의 적극적인 참여로 워너 기어 사의 생명력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불만과 생산비용은 감소했고, 근로의욕과 이윤은 증가했다. 그러나.......

위대한 종합체, TQM?/
에드워드 에밍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p208

새로운 제도들은 일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었는가?/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p210

피어스는 품질이 윤리의 문제이며 이는 또한 지도층뿐 아니라 모든 단계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윤리적 지도자들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사는 자신들이 광고와 제품 팸플릿, 연례 보고서에서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은 소비자들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나타내는 강력한 진술이다. 그러나 고용인들과 다른 투자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p213

‘리엔지니어링’ 기업혁명이 남긴 것/
이전의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 경영기법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p214

그렇다면 직장은 ‘엘 도라도’ 인가?/
때로 직장은 집보다 더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우리를 더욱 지지해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은 집이 되고 집은 직장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직장으로’ 도피하곤 한다. p217
9. 배신하는 직장
지금,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계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직업이 그의 삶도 함께 유지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직업은 그에게 지금은 사라져버린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주었다. p221

‘직장’은 결코 우리들의 ‘집’이 될 수 없다/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기업의 시도는 실패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 직장은 가고 싶다고 해서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p223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즉,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p225

오늘날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쓸모없게 되었거나 폐기할 수 있는 부품인 것처럼 느낀다.

누가 돈을 가져가는지 보라/
1974년 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중역의 이름은 평균12.3% 오른 반면 평균적인 미국 근로자의 임금은 3.5% 증가 했다.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은 중간 소득자들이 받는 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며, 하위 소득자들의 임금은 실질적으로 하락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p227

경제학자인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P227

갤브레이스는 “우리는 사람과 제품, 기업이 모두 정상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고 승자가 막대한 보상을 얻는 승자독식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 로버트 H. 프랭크와 필립 J. 쿡의 의견에 동의한다. p228

일 자체가 보상이라고?/
모든 사람이 일에서 찾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한 보상을 원한다. 회사의 이윤을 창출한 대가로 근로자들에게는 피티나 열어주고, 고위 관리자들에게는 엄청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지급하는 조직에는 무언가 부정직한 것이 있다. p228

일은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자기표현,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갖는 유용성과 관련된다. 사람들은 일을 단순한 경제적 거래 이상으로 생각할 때 일은 그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훈련, 직무 충실화, 직업 과정에서의 더 많은 발언권은 일을 더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일 자체가 보상이 되도록 한다.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p232

우리에게 미래를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일은 중요하다. 그 반대도 또한 사실이다.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이 말했듯이 일은 사람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준다.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말처럼 가치 있는 일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인간이 경제를 통제하고 경제를 책임지며, 직장에서의 개인의 노력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없으면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p233

‘필사적으로 일하는’ 진짜 이유/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p234

경영진은 사업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봐 직원들이 휴가를 갈 때조차 노심초사한다. 결국 근로자들은 소진되거나 자멸할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더 오랜 시간 동안 일할 것이다. 오늘날의 회사원들은 와이트가 말했던 조직인보다 더 오랫동안 일하고, 더 큰 압력을 참아낸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승선이 없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경주에 남아있는 것이다. p235

냉소적인 근로자들/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p237

왜 ‘파업’ 하는가?/
도리스 크루즈는 근로자들이 노조 가입을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주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존엄과 존중에 대한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다. p239

퓨어스테인의 아름다운 공장/
“만약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복지 혜택을 준다면, 그들은 당신을 위해 생산할 것이다.” p241

해리와 메리 중 누가 선택되겠는가?/
해리는 미혼이고 일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하루에 열 시간 내지 열네 시간씩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메리는 기혼이었고, 세 아이가 있었으며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여덟 시간씩 근무한다. p243

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당신은 ‘주말을 위해’사는가, ‘주말 동안만 ’살아남는가?

시간과 일/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 우리는 시간을 사용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팔고, 시간을 만들어내며, 무엇보다도 ‘시간은 돈’ 이라는 관념 아래서 살아간다. p248

노동윤리의 구성요소인 시간은 돈과 행위의 동의어이다. p249

자기 시간․ 상호작용 시간․ 조직 시간․ 사회적 시간/
때로 사회적 시간, 상호작용 시간, 자기 시간, 조직 시간은 충돌할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의 한 가지 결과는 기다림이다. p250

시간의 속도/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p253

시간을 ‘파는’ 시대/
산업화된 국가의 노동자들은 단지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을 판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판다.

일은 협동을 요구하지만, 현대의 일은 또한 ‘동시성’을 요구한다. p255

감시하는 시계/
자영업을 하는 가구 제작자는 하루에 열네 시간을 일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여섯 시간만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구 공장에서 일한다면 가구의 완성 여부에 상관없이 하루 여덟 시간 일해야 하고 더 오래 일하게 되면 초과 수당을 기대할 것이다. p259

집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생산성을 높인다./
사실,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한다.
p261
'시간제 근무'가 더 좋은 사람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우리가 보아온 많은 경영제도들과 달리 이 제도는 근로자들이 자신의 삶에 일을 끼워 맞출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근로자의 만족과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p264

가정이 일처럼 보이는 이유/
일이 개인이 시간을 몽땅 차지하거나, 그 사람이 가진 에너지 전부를 소진할 때 집은 더 이상 직장으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또 다른 직장이 된다. p266

365일 노동자의 탄생/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당신이 집에서 일한다면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전문직의 일은 대개 시간 지향적이기보다는 과업 지향적이다. p272

‘유한계급’에 대한 새로운 정의/
과거의 사람들은 ‘확실한 여가’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확실한 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낸다. 즉, 중요한 인물이거나 유한계급일수록 더 많은 일로 바빠야 하는 것이다. p273

일이 없으면 삶은 타락한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p274

11. 요가와 소비주의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사람들 p276

여가는 존재의 상태, 인간의 조건을 말한다. p277

지루한 일요일 만들기/
디 그라치아에 따르면,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78

직장인들이 주말에 TV만 보는 까닭/
TV는 ‘일로부터의 복귀’를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면서 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p282

일과 여가활동의 관계/
자신의 ‘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 일은 여가 시간에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중복될 수 있다. p283

마르크스는 “그러한 개인은 동물적인 기능(먹고, 자고, 자식을 낳는 것)에 있어서만 인간이고 인간적인 기능(일과 자유 시간)에 있어서는 동물” 이라고 이야기한다. p284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는 데 요구되는 육체적․ 정신적 긴장에 압도된 나머지 여가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삶과 일을 분리하는 것이 그 둘을 통합하는 것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 p286

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
미국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일’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이른바 ‘중산층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p286

소비는 개혁가들이나 고용주들, 혹은 정부의 어떤 계획보다도 더, 일과 자유간의 관계를 단단한 매듭으로 연결한다. 조직인이 조직에 깊이 뿌리내리는 대신, 공동체 내에서는 얕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한 윌리엄 H. 와이트는 옳았다. 그가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소비주의와 신용거래가 사람들을 더더욱 일에 묶어놓는다는 점이었다. p287

소비주의의 악순환/
일과 여가, 그리고 소비주의는 우리를 악순환에 가둔다.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일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든 일을 보상받기 위해 물건을 구매하며 자유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p289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p290

<추락의 두려움>에서 에렌라이히는 중산층은 노동 계급과 달리 ‘본질적 가치’를 지닌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일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일로는 일부 사람들이 원하는 생활양식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다. 그 결과,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은 기업 변호사가 되고, 사회복지사가 되려던 사람은 은행원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포기한 꿈을 보상받고자 한다.”고 에렌하이히는 말한다. p291

노동자가 ‘왕’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국세청에 시달리는 시민이자, 자녀들에게는 무시당하는 부모이며, 인정받지 못하는 배우자이자, 무기력한 근로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p291

무엇이 진정한 여가인가?/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p293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직장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삶의 의미에 대한 짧은 고찰/
“아, 현자시여, 저는 삶의 의미를 찾아 먼 길을 여행하였고,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지금 저는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부탁이니, 저에게 삶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십시오.” 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삶은 강이다.” p297

“삶의 의미 또는 목적은 무엇인가?”
“인생은 희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비극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 호레이스 월폴
“인생이란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들 대다수로 하여금 우리들 중 소수만이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W.V. 콰인
“내가 맛있는 프랑스빵을 찾으려고 애쓰는 동안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휴 무어헤드에게”
- 엔디루디 p298

삶의 주된 목적은 : 소설가제임스 A. 미치너
1) 당신이 신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
2) 당신이 그의 즉각적인 결정을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
3) 당신이 집으로 여기고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장소를 지구상에 갖는 것.
4) 동시에 보다 큰 세계의 시민이 되는 것. p299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치료들?/
치료적 접근은 사람들을 사회에 ‘참여’시키는 대신 사회에 ‘적응’시킨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 즉 리비도(libido)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비도에는 다른 무언가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슬픔과 우울로 이어지는 일종의 동요가 그것이다.”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 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의미치료는 환자와 마주하여 환자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재교육한다. 프랭클은 쾌락과 고통이 아닌 ‘가치’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p301

프랭클에 따르면 고난은 개인을 타락시키기보다는 고귀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사제나 목사, 랍비를 찾아가거나 그냥 참았을 일인데, 현재의 사람들은 치료자를 찾아간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람들은 또한 공허감을 느끼거나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할 때 대중적인 자가 치유서(self-help books)와 지지 집단(support group)에 의지한다.

<마음의 습관>에서 로버트 벨라를 비롯한 저자들은 우리가 “치료적 사회(therapetic society)”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치료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제도에 대한 순응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M. 스콧 펙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자기 규율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만족을 지연시키는 것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훌륭한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살아가는 방식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노동윤리에 대한 진술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고통’이라는 좋은 투자를 통해 ‘행복’이라는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p302

정서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사람들에게 치료나 대중심리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질문의 증상(우울이나 불만족)을 완화시키거나 일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벨라가 지적하듯이 치료자가 가진 지식은 심리적이고 임상적인 것이며, 때로는 도덕과도 무관하다. 프랭클은 자신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한 반면 펙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많은 사람들이 펙의 접근을 좋아하는 듯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500만 부 이상 팔렸다.

벨라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 충족과 성장이 개인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끝없는 과정이라는 견해 그리고 치료와 같은 개별적 접근에 도전한다. 그들은 치료적 접근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기능에 대한 공적 대화에 참여하도록 하는 대신 사람들의 사회적응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사적인 치료가 직장의 가치와 목적을 만들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공공의 참여 대신 일에 대한 열정적 혹은 회의적인 적응을 장려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할 때 대중적인 책들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을 격려해주고 해답을 주기를 원한다. 치료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가치가 개입된 대화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 의지하여 이 질문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p303

삶의 의미에 대한 종교적인 해답/
신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동시에 그 질문을 제거해버린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영성과 신앙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적 신앙은 자유롭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것은 정신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 맹신(盲信)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임의적인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님을 보증해준다. p304

삶의 목적과 일의 목적/
“내 삶의 목적은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배고픔을 몰아내는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목적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p305

일터에서 우리는 행복한가?/
일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힘겹게 일하고 음악을 듣거나 맥주를 마시며 “피로를 푼다.” 그리고 다음날의 일을 준비한다. p309

기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영적 공동체?/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p313

‘삶’과 ‘영혼’을 요구하는 기업들?/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p313

‘의미 있는 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적극 참여하라. 오늘날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일하더라도 여전히 태만할 수 있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은 ‘뇌수술’에서 ‘쓰레기 수거’까지 어떤 것이든 포함할 수 있다. p319

에필로그
‘일’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기아나 재난도 진정한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들은 유일한 관심의 대상인 들판을 낙천적으로 보살필 뿐이다.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가 주장하기를 정의는 훌륭한 삶의 본질이며 삶이 좋을 때 일도 보다 나아진다. 삶이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지 혹은 일이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드는지 여부는 부분적으로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에 달려있다. 어떤 이들에게 일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에서 겪는 고통은 타인들에 의해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즐거움은 대게 우리 스스로 발견한다. p324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은 노예나 농노, 계약제인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현대의 경영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조차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종할 때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할 사람은 거의 없다. p326

만약 기업이 쉽게 해고 가능한 저급의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또한 그 대가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직업 안정성이 실제로 드물다면 영리한 고용주들은 뛰어난 인재들을 자신의 조직에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안정성을 조건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p327

고용이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일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활동과 조직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풀먼 마을의 문제점은 그것이 매력적이고 편리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질서정연할 수 있는 반면, 결국에는 우리가 고용주들의 운명에 더 크게 의존하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변덕스러운 직업세계에서 이런 상황은 온당치 못하다. 나아가 우리 삶의 다른 측면들이 직장에 예속될 때, 우리는 일과 삶 ‘모두’에 대한 통찰력을 잃는다. p328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은 현재의 불안정한 고용환경으로 인해 인격의 타락이 불가피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장기간의 헌신이 드물어짐에 따라 신뢰관계는 방향을 잃고 느슨해졌으며, 의지와 행위가 분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장기적인 관계야말로 헌신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며 한 회사에 장기간 복무하는 것이야말로 인격 발달의 중요한 열쇠라고 가정하고 있다. p329

연속적인 취업이 반드시 장기 실업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과 고용되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여전히 자기 효능감, 규율, 고결함, 자부심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고용주와 근로자들이 모두 시장의 변덕에 종속되어 있다면 정보공유는 경쟁조건을 동일하게 하여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른 이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p330

오늘날 사람들은 다양한 조직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일이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고 새로운 장소에서 여러 명의 고용주들을 위해 일하게 되더라도 개인의 고결함은 여전히 그가 일하는 방식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직장 바깥에서 훌륭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일도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은 지나치게 지루하지 않게 개인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게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일이 직장 바깥에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융통성이 있는 근무시간이나 원격 근무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새로운 제도들은 긍정적이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p331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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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26 00:19:30 *.70.72.121
본문이 잘려서 뒤로 넘김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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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3:17:42 *.140.145.63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긴 인용인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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