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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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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2일 22시 35분 등록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절반이 넘는 양이
국풍입니다. 국풍은 각국의 채시관 採詩官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最古의 시입니다.
은말殷末 주초 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경에 관해서도 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선 3백여 편이 넘는 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주(註)가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시경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寫實性)에 있습니다.
이야기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시경은 민요이며 민요는 개인 창작이 아닙니다. 집단 창작입니다.
그리고 그 전승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노래가 계속 불려지고 전승될 리가
없습니다.
시경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실성(眞實性)과 진정성(眞正性)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이
지극히 불안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진정성 그리고 사실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소위 상품미학과 사이버 세계, 그리고 바로 여러분들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신세대들이 매몰되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 일반에 대하여
그 허구성, 가공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반성적 시각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경의 독법은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辭(시) + 調(노래) + 容(춤)이었다고 전합니다.
즉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毛詩 大序)고 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써도 부족하고 노래로써도 부족하고
춤까지 더해서 그 뜻의 일단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辭)만 남은 것이지요.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로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 운동 古文運動,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 등 문예 혁신 운동을 벌여
민중 정서에 다가서기를 호소합니다. 근세 이후에는 고문 운동이 오히려
보수화의 논리와 결합되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 社會詩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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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 17편입니다. 시경(詩經)이 북방 중원의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四言體) 운문(韻文)인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에서 발전한 남방문학입니다.
남방국가인 초(楚)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巫風)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浪漫文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세계(詩世界)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노래입니다.
초사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작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적 영역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에, 또는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동경이나 도피 또는 복고적 비탄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구조에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지는 것 즉 포섭됨으로써
발견할 수 없는 그 구조를 드러내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 낭만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기후와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모택동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곧 남방정권입니다. 현재의 강택민 주석의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가 갖는 의미입니다.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 때의 일입니다.
모택동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장정(長征)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하지요.
흔히 조직(組織)의 유소기(劉少寄), 이론(理論)의 모택동이라고 하지요.
모택동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기제를
드러내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 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유의미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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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 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 範疇的 (kategorie)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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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5.03.22 23:11:50 *.42.252.158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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