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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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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3일 00시 33분 등록
"가슴으로 동양고전 읽기"

1.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책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은 후련했다. 근 일주일을 씨름하고 나니 마치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묵은 숙제를 막 끝낸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사서삼경을 위시한 동양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는 학교다닐 때 듬성듬성 배운 내용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고전(古典)이라는 수업이 따로 있었는데, 고전의 뜻을 음미하기 보다는 피상적인 주해와 이를 무지막지하게 외워야 간신히 시험을 치룰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짧은 기간의 동양고전독법 속성과정이어서 역시 주마간산격으로 이뤄진 독서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동양고전의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인해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한번에 3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감방에서 고전은 책 한권으로 오래 읽을 수 있었기에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학 교양과목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은 제자백가가 서술한 동양고전인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불교, 신유학, 양명학 등 동양 사상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관계론'을 중심으로 쉽게 풀어주고 있다. 여기서 관계론은 변증법 철학을 연상하게 한다. 서양 사상이 개별적 존재를 존재의 궁극적 형식으로 보는 ‘존재론’에 기초한 반면 동양 사상은 세계는 모든 존재의 관계망으로 이뤄진다는 ‘관계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고전 문헌에 대한 단순한 재해석에 그치지 않고 정치경제학 교수답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거대담론으로서 동양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다. 동양고전이 씌여진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서 시대적 혼란상을 해결하기 위해 제자백가들의 백가쟁명의 지혜가 발휘되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체제 극복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것이 저자의 믿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묵자, 순자 등의 비주류 사상가들의 주장은 퍽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묵자는 유가에 밀려 후에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던 불우한 사상가였으나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가치를 주장한 점이 흥미로왔다. 묵자가 살던 시대를 고려해보면 묵자는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동방박사가 아닌가? 묵가 조직의 엄격한 규율과 실천을 보면 흡사 다빈치코드에 나오는 비밀결사조직 시온수도회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은 사람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것이다.'라고 언급한 순자의 음악에 대한 생각도 무척 재미있다. 법과 제도에 의한 경직성의 폐단을 예측하고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을 강조한 것이다. 귀족이나 서민이나 똑같이 상벌로 다스린다는 법의 평등정신을 강조한 점도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새삼 공부를 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평생 학습의 좌우명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나에게 '공자왈맹자왈'로 시작되는 동양사상은 부지불식간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낡은 사상으로 인지되어 있었다. 고전을 본다는 것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스피드가 요구되는 현대에서는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이다는 생각이었다. 그 방대함으로 인해 태산준령 앞에 호미로 맞서는 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는 법이며 진리는 새롭게 창조되기 보다는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의 재조명은 현재 부딪히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무릇 고전뿐 아니라 모든 책은 내 자신, 내가 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제대로 읽힌다는 확신이 들었다.

'강의'를 읽은 일주일은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여지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칼 베커의 노회한 충고가 가슴으로 갈무리되는 한주였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윽한 향기가 책에서 배어나오는 듯하다. 고전은 두고두고 곱씹어야 제 맛이 난다. 내년 이맘 때 다시 보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까? 벌써 궁금해진다.


2. 역지사지(易地思之)(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동양고전 강독을 '관계론'이라는 주제로 풀어가고 있다. 동양고전은 텍스트이며 '관계론'은 자본주의라는 컨텍스트(Context)하에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이다. 이렇게 주제어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발췌, 해석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책을 쓸 때 접근할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계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다 보니 어떤 부분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의 ‘사(思)’를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노자의 심지(心志)와 복골(腹骨)을 정치경제학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해석하는 것 등은 다소 부담스럽다. 동양사상이 '관계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관계론'의 근간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서양 변증법'이 '동양사상 관계론'의 원인제공자인 셈이다.

또 한가지 '관계론'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관계론'이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저자가 생각하는 관계론에 대한 체계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아 책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주제의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서론 부분에 '관계론'에 대한 개요와 함께 '관계론'을 중심으로 책을 전개하는 방법론을 소개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시종일관 신자유주의, 세계화, 상품미학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매스를 들이댄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신세대, 온라인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63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하나 온라인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문체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서간문체 형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강의체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떤 부분은 용어때문인지 사회운동단체의 성명서 같이 도식적인 느낌도 들었다.

내가 저자라면 '변화', '자기계발'의 관점에서 재해석 해보고 싶다. 자기 분석, 학습, 반성, 시간관리 등이 주요 테마가 될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역량이 가능하다면 관계론의 주요 구성요소를 설명하고 거기에 맞는 고전의 내용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고전을 해석해보고 싶다. 지금 이 책이 각각의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의 관점이라면 거꾸로 관계론을 이루는 구성요소에 논어,맹자,묵자 등의 동양고전의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사실 나의 이런 독서평이 '마음으로 소를 대하지 못하고 오직 눈으로만 보는 포정해우의 누'를 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죄스러움이 앞선다. 어찌 되었든 동양고전이 잠시나마 나의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주신 신영복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3. 책에서 끌어다 쓰기(인용)

<1장 서론>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P17)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P21)

서양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입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입니다.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P30)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P34)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着)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P36)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人)과 인(人)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P41)

동양 사상의 내부에는 모순 구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P43,44)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P47)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2)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P55)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P58)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P64,65)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 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P72)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P77)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다. (P81)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P82)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P83)


<3장 주역의 관계론>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庶人)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대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게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P90)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P100)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P101, 102)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P102)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고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P129)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不亦君子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P142)

나는 인간관계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56)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P159)

사마우에게 이야기한 인(仁)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其言也言+刃)라고 하는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한 까닰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言+刃乎)하는 것입니다. (P173)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사(思)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의 현장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P179)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P181)

'학이'편에 나오는 '학즉불고'(學則不固)란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p182)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P187)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하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P191)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P194)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199)


<5장 맹자의 의(義)>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賢者而後樂此) 현자는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P219)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P243)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P272)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 + 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P274)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P283)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P289)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P292)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P300)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Progress is Simplification)"라고 했지요. (P304)


<7장 장자의 소요>

포정해우(疱丁解牛) : ‘백정이 소를 잡다’는 뜻으로 유명한 예화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 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靭帶)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P324)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은 머리와 가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328)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純白不備). (P329)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작은 풀 한 포기든 돌멩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P347)


<8장 묵자의 겸허와 반전 평화>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 兼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P374)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P382)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P421)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P425)

음악이란 사람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故樂者 治人之盛者也) (P427)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울 것이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 (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 (P443)

현실보다는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P452)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巧詐不如拙誠) (P457)


<11장 강의를 마치며>

(불교철학은) 모든 존재를 연기(緣起)로 파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연기(煙氣)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478)

선(禪)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와 상통하는 무조직(無組織), 무경전(無經典)에 기반을 둔 각(覺)이요 불심(佛心)입니다. (P485)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P488)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決破羅網), 공자(孔子), 육경(六經)도 존숭할 필요가 없다. (P503)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P506)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場)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P508)

사상의 최고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510)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P510)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P511)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P511)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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