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양재우
  • 조회 수 6562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6월 23일 02시 28분 등록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지음/박병규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20세기 가장 대표적 시인 중 한 명. 노벨문학상 수상자. 공산주의자. 민중시인.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이제 이 지구상에서 그를 대신할 민중시인은 더 이상 없다. 그가 지녔던 정열, 사랑 그리고 순수는 이제 그의 시 속에서 그리고 칠레 민중, 더 나아가 전세계 민중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탄생과 유년기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년 칠레 파랄 지방에서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를 낳고 2달 후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2년 뒤 아버지는 네루다를 데리고 남부의 테무코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트리니다드 칸디아마르베르데와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17년 테무코의 일간지 <라마냐나(아침)>에 생애 최초로 「열광과 인고」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1920년부터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공직 생활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투사가 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암살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España en el corazón, 1938)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앙드레 말로의 <희망>(1937),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1938), 폴 엘리아르의 <게르니카의 승리>(1938),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보다 더 스페인인들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던 작품은 역시 파블로 네루다의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이었다.

물론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쓰였기에 더 대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어로 쓰여졌다는 점 외에도 네루다의 시가 공화국파 병사들의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네루다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흐르는 분노와 피눈물을 시에 담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읽어 보라.

와서 거리의 피를 보라,
와서 보라
거리에 뿌려진 피를,
와서 피를 보라
거리에 뿌려진!


그에게 있어 마드리드는 처음으로 문화적 향취를 마음껏 만끽하게 해준 도시였다. 1920,30년대의 스페인은 회화뿐만 아니라 27세대라 불리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문화적 부흥기를 선도하고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 네루다는 ‘꽃의 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자신의 집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처럼 만들었다. 예술이 꽃피고 시인들로 넘쳐나는 문화의 도시가 파시스트들의 반란으로 파괴되자 네루다는 스페인 국민들 이상으로 상실감을 느꼈다. 더구나 절친했던 시인인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가 내전 초기 암살당하면서 네루다 역시 피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던 터였으니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스페인인의 감성으로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직설적이고 신랄한 시어 덕분이었다. 이 시집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는 <나의 변화를 설명하노라>("Explico algunas cosas”)에서 <자칼도 거들떠도 보지 않을 자칼들/바싹 마른 선인장도 씹다가 뱉어버릴 돌멩이들/독사들도 증오할 독사들>이라고 파시스트들을 정의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훗날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1950)라는 라틴아메리카 초유의 장편 서사시에서처럼 웅장함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통쾌함을 선사하는 민중시인의 미덕을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출판 역사상 전설로 남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뭉클한 일화 때문이다. 이 책의 1쇄는 바르셀로나 근처 산 속에 있는 몬세랏 수도원에서 1938년 11월 순조롭게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부수를 찍지는 않아서 이듬해 1월에 또다시 2쇄를 찍어야했다. 하지만 제본을 마치기도 전에 프랑코파 병사들이 수도원으로 들이닥쳐 모든 책을 파기했다. 이 무렵 공화국파의 마지막 보루나 마찬가지인 바로셀로나도 함락될 위기에 처하고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로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국파 병사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네루다의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오르피라는 작은 마을에서 다시 2쇄를 찍기 시작했다.

책을 찍을 종이가 모자랐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붕대와 깃발, 심지어 자신들의 옷가지까지 이용해 기어코 종이를 만들고 책을 찍어냈다. 2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네루다는 잔잔하게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고 이를 평생의 영예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 속의 스페인>> 2쇄가 출간된 그해 네루다 역시 그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한 바 있다. <<분노와 슬픔>>(Las furias y las penas, 1939)이라는 책 서문에 그는 적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 나의 시도 바뀌었다. 나는 맹세하노니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살해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수호할 것이다.>라고.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그의 책을 만들어냈다면, 네루다는 그들을 위해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데 신명을 다 바칠 결심을 한 것이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그 후 그의 병세는 위중해져 수도 산티아고의 어느 병원에 이송되었다. 평생의 꿈이 한 순간에 무참히 스러지고 난 시인에게는 더 이상 삶을 부여잡을 기력이 없었다. 곧 혼수상태에 빠져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 그들을 총살하고 있다고!'라는 말을 되뇌이며 쿠데타의 참혹함에 치를 떨다가 9월 23일 마침내 눈을 감고 말았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우리에게 매년 5월 18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듯 우리와 반대편에 사는 칠레인들에게도 잊지못할 날이 있다. 바로 9월 11일이다. 비록 이 날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말미암아 새롭게 기억되는 날이긴 하지만 이에 앞서 칠레인들에게 이 날은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데타군의 총격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의 기록을 살펴보자.

1973년 9월 11일

잔뜩 찌푸린 하늘의 아침, 라디오에서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방송을 하였다. 바로 전날인 9월 10일밤 칠레 해군과 미국의 전함들은 공동 작전을 위해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고,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거로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9월 11일 이 날은 국민들의 재신임투표가 예정되어 있던 날로 아옌데의 개혁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국민들의 재신임여부를 묻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지지도는 확고하여 승리가 확실히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육, 해, 공군과 경찰은 피노체트 육군 최고사령관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고야 만다.

잠시 후 쿠데타군은 칠레의 여러 방송국들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고, 아옌데 대통령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 직후 대통령궁은 경찰과 군 병력, 장갑차, 탱크 등에 의해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소속의 전폭기들이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쿠데타군에서는 대통령에게 해외망명을 허락할테니 항복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아옌데 대통령은 그 제외를 거절하였다. 설사 수락하였다 하더라도 쿠데타군은 그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대통령궁으로 폭탄이 투하되었고 잠시 후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쿠데타군의 선봉 돌격대를 따라 들어간 군사평의회 정보국 전직 요원은 미국의 언론인 토마스 하우저에게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쿠데타군은 아옌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이후 새로운 칠레에서는 단 일주일여의 기간동안 3만여명의 시민과 인민연합 지지자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명, 해외 망명 및 국외 추방자가 100만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칠레 인구는 고작 1,000만명에 불과했다.

과연 미국은 세계 평화의 수호자였던가?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시골소년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17P)

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25P)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33P)

나는 집으로 데려가려고 백조를 안았다. 그 순간 리본이 풀어지는 느낌, 검은색 팔이 내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백조의 긴 목이 축 처진 것이다. 그때 백조는 죽을 때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4P)

나는 시적 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본 후에 되돌려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의논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문학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36P)

정말 끝도 없이 무한하게 펼쳐진 해변이었다. 칠레를 감싸고 있는 해변은 행성을 두른 띠 같고 남극해의 표효에 시달리는 반지 같으며 칠레 해안을 돌아 남극 너머로 뻗어가는 경주로 같다.(38P)


2. 도시의 방랑자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56P)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하며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칠레를 매우 사랑한 우나무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이성 또는 힘으로’라니. ‘이성으로, 항상 이성으로.’ 이렇게 말해야지.”(66P)

"이 철학서를 2월 24일 밤 루나 공원에서 나에게 야유를 퍼붓고, 또 나를 죽이라고 고함치던 4만 명의 개자식들에게 바친다.“-오마르 비뇰레의 <소와 나눈 대화> 중 헌사-(69P)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내 시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더니만 이제는 나를 공격하고, 내 눈을 빼먹으려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내 침묵을 받을 만한 가치는 있다. 나는 적들과 다니면서 내 자신이 오염될까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오직 민중의 적만이 내 적이기 때문이다.(72P)

그때 가죽상은 단호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불후의 명문을(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랬다) 남겼다. “이런 가죽하고는 결혼할 수 없소.”(76P)

첫 시집! “작가와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깍은 목각품이다.” 그러나 어떤 장인도 시인처럼 자신의 손으로 처음 창조한 대상에서 이러한 도취의 감정이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운 책이 되고, 시인의 언어는 향기를 품고 노래하는 포도주처럼 다른 언어라는 술잔에 옮겨져 지구 곳곳을 누비겠지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77-78P)

우리 시인들은 작품 가운데 단 한 편만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알레르기가 돋는다. 이러한 알레르기는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반응이다. 앞서 말한 독자들의 애착은 시인을 특정 순간에서 못 빠져나오게 만든다.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78P)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83P)


3. 세계의 길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 있는 공포의 꽃잎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웅이다.. 항구의 기억 속에 천재지변, 흔들리는 땅의 전율,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표효소리가, 마치 바다 밑 도시나 땅 밑 도시가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리며 인간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알려 주는 듯한 소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94P)

계단!
어떤 도시도 발파라이소처럼 계단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는다. 어떤 도시도 자기 얼굴에 이처럼 고랑을 파 놓지 않는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내려가는 듯이 삶이 오가는 계단! 중간에 자주색 엉겅퀴 꽃이 피어 있는 계단! 아시아에서 돌아온 선원이 텅 빈 집이나 화목한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 술 취한 사람이 검은 유성처럼 떨어지는 계단! 태양이 언덕과 정사를 나누기 위해서 오르는 계단!
발파라이소의 계단을 전부 돌아다니면 세계를 한 바퀴 돈 셈이 된다.(96P)

그때 발파라이소가 밝아 왔다. 처음에는 짙은 황금빛이더니, 이내 바닷가 오렌지나무로 변하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늘을 드리우고, 눈부신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다.(98P)

나는 다만 종소리와 굽이치는 기복과 이름을 따라갈 뿐이다. 특히 이름을 따라간다. 이름에는 큰 뿌리와 잔뿌리가 있고, 공기와 기름기가 있고, 역사와 오페라가 있으며, 그 음절에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100P)

결국 애국심을 가장한 이 엉뚱한 제안으로 우리는 타협점을 찾았다. 영사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영수증에 우리 서명을 받고 돈을 건네주었다. 실제 수령액을 세어 보니 영수증에 기입된 금액보다 적었다.
“그건 이자입니다.”라고 영사가 설명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 랭군에 도착해서 빌린 돈을 수표로 변제했다. 물론 이자는 제외했다.(117P)


4. 빛나는 고독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127P)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속이 텅 비고 온 몸이 나른해졌다.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이를테면, 팔꿈치나 목을 움직인다든지 멀리서 들려오는 마차 소리, 경적 소리, 길거리 사람들의 목소리라든지) 한데 어우러져 느긋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137P)

몽롱한 침묵은 아편굴이라는 물웅덩이에 가라앉은 부서진 꿈의 침전물이다. 눈을 반쯤 감고 섬세하고 감미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는 그 사람들은 바다 밑에서 한 시간 동안 지내는 꿈을 꾸거나 언덕 위에서 하룻밤 지내는 몽환에 젖어 있었다.(138P)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142P)

소년인지 여인인지 떨리는 듯 흐느끼는 목소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음으로 치달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어둠이 물든 저음으로 내려왔고, 프랑기파니 향에 달라붙어 아라베스크처럼 굽이치다가 분수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수정처럼 맑은 높이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재스민 꽃 사이로 사그러졌다.(143P)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는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149P)


5. 가슴 속의 스페인

에르난데스는 종종 동물과 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마치 다듬지 않은 돌처럼, 순수한 숲과 굽이치는 생명력을 지닌 자연에서 솟아나온 작가였다. 잠든 암염소의 배에 귀를 대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지도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젖통으로 젖이 흘러들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인데, 저 염소 시인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일 것이다.(179P)

로르카는 사방에 빛을 뿌리는 요정이었다. 가슴에 모아 둔 기쁨을 주변에 퍼뜨리며 행성처럼 삶의 행복을 반사하는 사람이었다.(186P)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188P)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195P)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210P)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210P)

운 좋게도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알베르티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쓴 찬란한 시를 의미한다. 알베르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장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린 붉은 장미처럼 공고라의 눈송이, 호르헤 만리케의 뿌리,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꽃잎, 구스타보 아돌표 베케르의 서러운 향기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 시의 정수가 알베르티의 시라는 크리스털 잔에 녹아 있는 것이다.(211P)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 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214P)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 했다.(228P)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229P)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멕시코는 진홍색과 번쩍이는 청록색이 어우러진 숄의 고장이다. 멕시코는 막사발과 항아리의 고장이고, 곤충이 갉아먹은 과일의 고장이다. 멕시코는 노란 가시와 강철처럼 파르스름한 잎을 자랑하는 용설란의 고장이다.(232P)

역사는 정복자들이나 정복을 향유하는 자들이 쓴다.(251P)

멕시코는 지금도 내 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독수리처럼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환한다. 이 독수리는 내가 죽은 다음에야 심장 위에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254P)


8. 암담한 조국

나는 돌로 만든 세계의 배꼽,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도 속해 있는 세계의 배꼽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나 자신이 초라한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득한 옛날 내가 여기에 살면서 밭이랑을 갈고 돌을 다듬은 것만 같았다.(256P)

강가에 펼쳐진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 풍경이 말을 걸어 온다. 그러나 사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나는 사막의 언어, 다시 말해서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259P)

내 시와 삶은 아메리카 대륙의 강처럼 흘러 갔다. 남반구의 깊은 산속에서 발원하여 쉼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칠레의 거친 물살처럼, 내 시는 그 물살에 떠낼가는 어느 것 하나도 배척하지 않았다.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었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 많은 상(償)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263P)

"기자 양반. 이렇게 쓰세요. 나는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다른 칠레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쓰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이름 또한 파블로 네루다라고요."(286P)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 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 주며, 식물 왕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291P)



9. 망명의 시작과 끝

"나는 시의 미래를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나짐 히크메트-(297P)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시 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300P)


10. 여행과 귀환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341P)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바위 꼭대기에는 신선의 도포 자락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동양화의 거장들이 즐겨 그린 그림이고 날아가는 새였다. 심오한 시는 이런 장엄한 자연에서 흘러나온다. 새의 날갯짓 같고, 고여 있는 듯이 흐르는 시냇물의 반짝거림 같은 간결하고 투명한 시가 흘러나오는 것이다.(349P)


11. 시는 직업이다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독했다.(377P)

시는 이미 독자와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386P)

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 당겨 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 또한 예상 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387P)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데, 이것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391P)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392P)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삐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393P)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을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394P)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성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서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 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는 자신의 시를 방어하기 위해 일반 대중이 부여한 자격을 등에 업었다.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해야 한다.(395P)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395P)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휙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 그리고 감정이라는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396P)

신비한 영감이라든가 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은 불손한 의도를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순간에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압력이나 이전의 독서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얼마간은 타인의 것이다.(396P)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때마다 2000년은 더욱 가까워진다. 2000년의 종소리,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이 시대의 우리 시인들은 노래하고 투쟁했다.(398P)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399P)

시의 분자란, 꽃가루처럼 가볍든 납덩이처럼 무겁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다가 밭고랑이나 사람 머리 위에 떨어진다. 이러한 씨앗들이 봄기운을 만나면 꽃이 되고, 천장에서는 탄환이 된다.(434-435P)

시의 영예란 거리에 나가서 이런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파괴 분자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았다. 생명은 모든 구조를 초월하며, 영혼은 새로운 규범을 찾는다. 씨앗은 도처에서 싹을 틔우며, 모든 생각은 이국적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며, 인간 질서의 변혁을 열렬하게 고대한다. 봄은 반역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436P)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495P)

나는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 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496P)

저들은 또다시 칠레를 배신했다.(517P)




3. ‘내가 저자라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도 처음이지만, 시인의 자서전도 처음 접해 보았다. 아니 아예, 파블로 네루다란 사람조차도 모르고 살았었다. 미국, 유럽의 유명한 작가들도 잘 모르는 판에 칠레라니... 어쨌든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시인의 자서전은 문체도 다르다. 빼어나고 화려한 문장이 곳곳에 자리잡아 탄성을 일으키게 만든다. 다음을 보자.

'그때 발파라이소가 밝아 왔다. 처음에는 짙은 황금빛이더니, 이내 바닷가 오렌지나무로 변하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늘을 드리우고, 눈부신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다.'(98P)
→ 밤에서 새벽으로의 전환, 탁월한 표현!! 언어는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은유, 비유, 함축의 언어란!!

읽다보니 의외로 재미있다. 중간중간 재밌는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한번씩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은 시인이기 이전에 마치 꽁트작가와 같은 느낌도 준다. 내 생각에 이처럼 재미있는 자서전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을 듯 하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배어있는 유머감각이 자서전 또한 위트와 재치로 끌고 가는 듯 하였다. 재밌었던 몇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안달루시아 출신의 시인 페드로 가르피아스의 경험담 : 말이 안 통하는 술집주인과의 대화.
"글세,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어. 하지만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있으며 다 이해가 되었지. 아니, 그런 느낌어었어. 그 사람도 내 이야기를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네."(223P)
→ 뭐랄까. 마음이 통하면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실은 하나다. 나머지는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삶은 그 진실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다. 그 주변에 의해 좌우되면 안된다.

●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를 칠레로 탈출시킨 일
'이처럼 나는 우리나라 문화(멕시코 감옥에서 탈옥시킨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가 후에 칠레에 세워진 멕시코 학교에 벽화를 그린 일)에 공헌을 했건만 그 보답으로 칠레 정부는 두 달간 영사 업무를 중지시켰다.'
→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여. 멕시코인을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탈옥시킬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그 대담함이여. 그리고 '그 보답으로'란 표현을 쓰는 '즐겁고 유쾌한 뻔뻔함'이여!

● 피카소와의 에피소도.
'나 때문에 그리지 못한 걸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피카소의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285P)
"괜찮은 작품이야."(287P)
→ <열정과 기질>에서 나온 피카소의 개인적 이기주의가 네루다에게는 그의 신분까지 걱정해주는 착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대적인 문제인가? 그에 따라 네루다도 피카소의 작품활동 시간을 빼앗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암튼 이러한 유명인과의 살아있는 에피소드는 이 자서전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더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시기가 197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난 후로써 이미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비서인 오메로 아르세의 도움을 받아 자서전을 구술로 집필하였으며 그 중간중간에 반짝반짝 빛나는 위트와 유머를 추가하여 더욱 맛깔스러운 자서전을 만든 것이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천성적으로 작가는 항상 자유로움을 갈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문체나 형식, 어구, 유행, 경향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마음 가는 데로 시를 표현하려 애썼던 점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꼭 해보려 했던 점은 마치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호기심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호기심, 실험정신은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 대표적 예가 아편 경험이다. 만약 아편을 하는데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음침한 소굴에서 아편을 해야만 한다면 영사의 자격으로써 위험하기도 하고 하고 싶지 않을만도 한데, 그래도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실험정신엔 포기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편에 대해 쓰려면 아편 맛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은 과연 프로 작가다운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편에 대한 경험을 한 후에 바로 아편 흡입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 정신력은 작가가 진정 실험을 위해 아편을 접했음을 더욱 잘 알게 해주는 그러한 행동이었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목차를 보면 뚜렷한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다. 각 장의 큰 제목 아래로 많은 소제목들이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인 책의 흐름은 중간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런 부분에서 나와 같은 독자는 흐름을 놓치고 결국 길을 잃게 된다. 물론 뒤에 연보가 있지만 자서전 내용 상에는 별도의 연도표기를 하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자주 놓치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저자는 자서전 후반부로 오면서 앞에서 해왔던 글의 형식과는 달리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빠뜨렸던 이야기 위주로 글을 써간다. 그러다보니 독자는 호흡을 잃어 버리고 작가가 이야기하는 대로만 쫓아가기 바쁘게 된다. 특히 후반부의 많은 사람들 개개인의 서술과 평가에 대한 부분은 다소 진이 빠지는 지점이었다. 다소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저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 그들을 총살하고 있다고!'라는 말을 되뇌이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념적 투쟁, 특히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 군부세력의 무력 앞에 심히 괴로워하며 특히 자신이 정치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아옌데의 죽음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라도 알았을까? 그의 죽음이, 그의 장례행렬이 민중의 첫 시위가 되었다는 점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민중들이 지속적이며 결코 꺽이지 않는 항쟁을 시작했음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때마다 2000년은 더욱 가까워진다. 2000년의 종소리,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이 시대의 우리 시인들은 노래하고 투쟁했다.'(398P)





IP *.178.33.22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