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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4일 23시 03분 등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백낙청 옮김/창작과 비평사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1892~1978)

아르놀트 하우저2(정면).jpg

후세의 사람들이 머리 속에 떠올림직한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의 전문분야는 꽤나 다양하다. 그는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 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미술사학자 라고 불린다. 어떤 것이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적절한 ‘맞춤 옷’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것이 그와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전문분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꽤나 어려운 질문이다. 절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는 이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써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는 한마디로 박학다식(博學多識)의 대명사다. 또한 그는 요즘말로 따진다면 스포츠의 멀티 플레이어이자, 한가지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다방면의 퓨전 스타일리스트(Fusion Stylist)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를 쫓다 보면 그의 삶을 딱 맞게 표현한 사자성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바로 전형적인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약 80년의 생애를 살다 갔지만, 젊음과 중년의 대부분의 시간을 참으로 가난하고 힘들며 고통스럽게 보냈다.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들이 그러하긴 했지만, 그의 경우는 헝가리란 약소국에서 태어난 까닭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등 망명의 길을 걸으면서 더욱 생활고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단련시키고, 정신세계를 깊고 넓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괴로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꿈은 늦게 나마 그의 앞에 ‘현실 실현’이란 말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은 그의 첫 책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출간한 1951년으로,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그나마도 책을 통해 작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3년 후인 독일어판이 출간되면서부터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무려 환갑을 넘긴 62세 였다. 중년도 넘긴 노년에야 비로서 그의 진가를 세상에서 알아준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망명지인 영국에서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고, 후에는 미국의 교환교수로써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마디로 60세를 넘겨서야 밥벌이에 대한 고통에서 한발짝 물러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독학(獨學)으로 그의 모든 이론을 정립하고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문학사를 전공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학력이 없다. 또한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그가 관심있어 하는 공부를 별도로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사를 놓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틈나는 대로 공부하며 계속하여 실력을 키워 갔다. 그는 대학전공인 문학사 외에 뵐플린(Heinrich Wlfflin)의 미술 양식사 연구, 드보르작(Max Dvorak)의 역사주의적 예술사 연구, 게오르그 짐멜?베르너 좀바릍,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적 연구 그리고 가장 늦게 접하게 된 현대적 예술 장르인 영화에 대한 연구까지 그의 학문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으며, 그는 불가사리처럼 받아 들이고,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문학과 예술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뛰어난 연구결과로 인하여 세상을 달리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의 생애

아르놀트 하우저는 1892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있던 헝가리의 작은 도시 테메스바르(Temesvr)에서 유태계 독일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테메스바르는 헝가리 영토였지만 그의 부모는 독일 이주민이었고, 그런 덕분에 하우저는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독일어는 물론 헝가리어, 세르비아어까지 똑같이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생업을 제외하고 독서에도 열중하는 교양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의 손에 한번도 책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정은 전형적인 소시민 가정으로 대체로 가난한 편이었으며, 하우저의 어린 시절 또한 조숙한 천재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년 하우저가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부다페스트 대학에 진학하고부터였다. 대학시절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는 그의 학문적 <눈뜸>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또 후일의 그의 생애와 학문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칼 만하임과 게오르그 루카치였는데, 다. 칼 만하임은 하우저에게 있어서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서로에게 도움과 자극을 받는 <친구>였다. 그러나 하우저와 루카치의 관계는 보다 미묘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일종의 <사제지간>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들 사이에 그 어떤 직접적인 <학문적 대물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우저에 대한 루카치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 지적 친화력과 일종의 외경심이었다.

이러한 이들 세 사람의 상호 영향의 주고 받음이 본격화되고, 가장 집중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 이른바 <일요써클 Sonntagskreis>에서 였다. 1915년에서부터 1917년까지 지속된 이 모임을 지배했던 분위기는, 특히 루카치에게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바, 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당시의 유럽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환멸과 종말론적인 위기의식 이었고,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열띤 지적 노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일요써클의 구성원들을 지배했던 주요 관심사는 윤리적인 것에 기초를 둔, 종교와 신비주의,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에 쏠려 있었다. 이후 일요써클의 이러한 정신주의적, 윤리적, 자유주의적 분위기로부터 루카치가 정치적/행동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 이행해 갔다면, 하우저는 학문연구활동을 통하여 어떤 삶의 거점과 전망을 찾으려고 하였다.

하우저는 본격적인 학문적 발전은 대체로 <형식주의> 혹은 <정신사적 방법>이 지배하던 시기와 <사회학적 방법>이 지배하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사를 전공했지만, 그의 초기의 주된 학문적 관심 분야는 문학이 아니라 조형예술이었다. 1919년 8월의 반혁명과 이로 인한 형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의 붕괴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부다페스트에서 떠나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는 주로 뵐플린류의 <형식주의적 방법>과 드보르작의 <정신사적 방법>에 크게 영향받아싿. 이른바 <빈학파>로 불리는 이들에게 영향받아서 처음에 하우저는 예술사를 <형식>과 <구조>의 역사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술사를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형식의 역사적 복합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나중에 드보르작의 정신사적 방법으로 옮아감으로써 하우저는 자신의 이론틀을 더욱 정교하고 세련화하고 있지만, 예술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연관에 관해서는 아직도 뚜렷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우저가 일종의 <작품내재적 방법>으로부터 <사회학적 방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영화>에 대한 그의 새로운 발견과 <시각성>에 대한 주목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다시 빈으로 옮긴 하우저는 생계를 위한 영화사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전혀 새로운 현대적인 장르를 접하면서 하우저는 이 새로운 예술분야가 제가하는 이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종래의 형식주의적, 작품 내재적 방법 대신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양식변화와 사회/경제적 요인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또는 그는 영화를 통해서 작품에만 초점을 맞추는 협소한 시각을 버리고, 예술 생산자와 수용자를 모두 포괄하는 변증법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영화의 발견으로 이루어진 하우저의 새로운 인식과 이론적 모색이 드디어 최초의 본격적인 결실을 맺은 것이 저 유명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이다.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인하여 하우저는 빈에서 다시 런던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거기서 하우저는 그보다 먼저 런던에 정착해 있던 칼 만하임으로부터 예술사회학관계 선집의 서문을 부탁받았다. 처음에는 약 100페이지 분량으로 계획되었던 것이 서술과정에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우저는 짧은 서문 대신에 보다 체계적인 예술사회사 저작을 시도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1951년 영국에서 출간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이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로부터 20세기 영화/예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학, 미술, 건축, 음악 등 모든 예술/문화 분야를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총정리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자신이 후에 말하듯 "이론적 전제와 내가 발견한 것으로 믿어지는 규칙성들을, 역사현상을 기술하고 서술하는 과제에 완전히 종속시킨" 연구서이다. 또 이 책은 다시의 문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소위 작품내재적 방법과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에 바탕하고 있던 예술관과 예술연구방법론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비로소 본격적인 의미에서, 예술을 그것을 낳게 한 사회와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찰하는 방법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하우저의 학문적 명성도 공고히 되었다.

일단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사회학적 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나자, 하우저는 곧바로 예술사회학 그 자체의 목적과 한계, 그리고 기초적 개념의 정립이라는 이론적 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영국의 리즈 대학교수 시절에 그의 두번째 대작 [예술사의 철학]이 탈고되었다. 이 원고는 1958년 독일에서 [현대예술고찰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그는 이후의 그의 예술사회학적 사유의 근간이 될 기초개념들을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즉 예술사회학의 목표와 한계, 목표설정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적 근거, 예술적 태도에 있어서의 기호(嗜好)와 양식의 관계, 미학적인 판단들이 내려지는 근거가 되는 사회학적 입장과 심리학적 입장 사이의 모순성, 익명의 예술사(Kunstgeschichte ohne Namen)와 내재적이고 내인적인 예술발달에 대한 재검토,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습(Konvention)의 문제 등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1957년 리즈에서의 교수활동을 마침과 동시에 미국에 객원교수로 초청되면서, 하우저는 미국에서의 2년동안 하나의 특수한 예술사적 문제에 깊이 천착해 들어갔다. 즉 그것은 예술이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있어서의 양식개념 및 양식의 변화에 대한 기준과 그 복잡한 변화양식을 밝히는 것이었는데, 이 위기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는 매너리즘(Manierismus)이라고 불리는 발전의 단절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우저는 이 매너리즘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모든 예술사연구에서 제외되어 왔던 매너리즘을 다시 발굴하여, 거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그는 하나의 위기적 징후이자 불연속점으로서의 매너리즘이 어떻게 정상적이고 연속적인 예술의 흐름에 영향을 주며, 그것이 현대 예술에 어떤 양상을 하고 등장하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였다. 하우저의 이러한 작업은 1964년 [현대예술과 문학의 기원 - 르네상스의 위기 이후 매너리즘의 발전과정]이라는 긴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하우저는 미국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자신의 최후의 역작이 될 [예술의 사회학]을 집필하였다. [예술의 사회학]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의 독자적인 마르크수주의 해석과 변증법적 방법론의 독특한 적용이다. 하우저는 이 책에서 <이론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하고,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철학적이고 사회철학적인 이론적 수준만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더불어 또한 하우저는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결정론적 모델>을 거부하고, 양자사이에 일종의 매개적 층위를 설정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나름의 방식으로 한층 더 정교화 하였다. 변증법적 방법론의 구체적 적용에 있어서도 하우저는 변증법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엄밀하게 축소하고, 또 비변증법적인 단계를 상정함으로써 종래의 변증법적 제이론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하우저는 1978년 비로소 자신의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갔다. 헝가리에서 그는 예술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년 후, 향년 86세의 나이로 기나긴 생의 여정을 마감하고 자기를 낳아준 조국의 대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 그의 생애 출처 : http://musicus.egloos.com/2103528

http://windshoes.new21.org/person-hauser.htm(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 그의 저서

1951년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1958년 : 《예술사의 철학 (Philosophie der Kunstgeschichte)》

1964년 : 《매너리즘 : 르세상스의 위기와 근대 예술의 기원》

(Der Manierismus. Die Krise der Renaissance und der Ursprung der modernen Kunst)

1974년 : 《예술의 사회학 (Soziologie der Kunst)》

1978년 : 《루카치와의 대화》

("Im Gespr?ch mit Georg Luk?cs" kleiner Sammelband mit drei Interviews und dem Essay

"Variationen ?ber das tertium datur bei Georg Luk?cs")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제1장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 마술과 자연주의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는 자연주의적 예술은 처음에는 선(線)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을 비교적 딱딱하고 어색하게 밖에 그릴 줄 모르는 모사(模寫)에서 출발하여 드디어는 자유분방하고 재기 넘치며 거의 인상주의적이라할 만한 수법에까지 이르는 예술이다.(14P)

이 시대의 그림은 이러한 마술의 도구였던 것이다. 즉 그림은 짐승이 그 속에 걸려들게 되어 있는 ‘함정’이었다. 아니, 이미 짐승이 걸려든 함정이었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기 때문이다.(17P)

2. 신석기 시대 : 애니미즘과 기하학 양식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은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면서였다. 이때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 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된다. 자연에 충실하며 그때그때 모델의 특징들을 애정과 인내로써 묘사하려는 그림 대신에 사물을 충실히 그려낸다기보다는 상형문자처럼 가리키는 데 그치는, 획일적이고 인습화된 기호가 나타난다.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한다.(22P)

선사시대 인류의 물질적 환경과 정신구조에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어서, 돌이켜보건대 그 이전의 생활은 모두 단순히 동물적 본능이었던 데 비해 그 이후의 모든 변화는 목적의식을 지닌 하나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다. 이러한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점을 이룬 계기는 바로, 인간이 식량을 채집하거나 수렵하는 식으로 자연의 혜택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대신 이제부터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동물과 식물을 길들이게 되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목축업 및 농업의 발견과 더불어 인간은 이제 자연에 대한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며 어느 정도는 운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23P)

구석기시대의 예술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실물에 충실하게 그려 내는 데 반해 신석기시대 예술은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와 양식화되고 이상화된 초현실세계를 대립시키는데, 그 근본 원인은 바로 그러한 세계관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26P)

예술작품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일 뿐 아니라 사유의 표현이며, 기억의 소산만이 아니고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가의 마음 속에 있는 감각적이 아닌 개념적인 요소가 감성적?비합리적 요소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26P)

신석기시대의 형식주의 예술과 모사 중심의 자연주의 예술이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존재의 직접적인 표상으로 보지 않고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대결’하는 현장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27P)

자연주의는 개인주의적?무정부적 생활양식과 일종의 무전통성(無傳統性) 및 고정된 관습의 결여 그리고 현세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 이에 반해 기하학주의는 통일적 조직을 만들려는 경향과 영속적인 질서 그리고 대체로 현세의 피안을 지향하는 세계관과 일치한다.(32P)

정신적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부닥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애매한 사용인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예술 양식과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사회형태 사이에 결국은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이색적인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으며, 이런 대담한 유추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려는 생각만큼 큰 유혹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찍이 베이컨(F. Bacon)이 말한 ‘우상(偶像)’들과 마찬가지로 진리탐구에 치명적인 것으로서 그가 경고한 네 개의 우상에 이어 ‘애매성의 우상’(idola aequivocationis)이라 이름지어도 좋을 것이다.(33P)

3.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

‘화가 겸 마술사’인 이들이야 말로 전문화 및 직업분화를 이룬 최초의 본보기인 셈이다. 어쨌든 이제 화가가 아닌 여타의 마술사 내지 주술사와 더불어 일반대중과 구분되는 그들은, 특수한 재능의 소유자로서 훗날 특별한 능력과 지식 뿐 아니라 일종의 지배자로서의 권위까지 내세우며 모든 일상적인 노동과 절연하게 될 본격적인 사제계층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34P)

회르네스는 신석기시대 예술의 기하학주의적 성격을 그 여성적 요소와 연결시킨다. 그는 “기하학적 형태 중심의 예술 양식은 무엇보다도 여성적인 양식으로서, 여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동시에 묘사대상을 길들이고 가꿔놓은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하학적 모양을 중심으로 한 장식은 남성의 정신보다는 가정적이고, 답답하리만큼 질서에 집착하며, 미신적일 정도로 세심한 여성의 정신에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순수한 미학적 견지에서 볼 때 이 예술양식은 스케일이 작고, 비정신적이며, 아무리 화려하고 다채로워도 일정한 한계를 지닌 예술형식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제한성으로 인해 오히려 건강하고 튼실하며, 근면성이 배어 있는 외면적 장식성으로 인해 보기 좋은 예술형식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예술에서 여성적 본질의 표현인 것이다.(35P)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1.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단순한 소비에서 생산으로, 원시적 개인주의에서 공동작업으로의 발전이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면 신석기시대와 다음 시대의 경계선을 이루는 것은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45P)

인구가 집중되고 이렇게 집중된 다양한 사회계층간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정신적 자극이 풍부하게 마련인 도시, 변화가 많은 시장을 갖고 이 시장이라는 현상의 특성인 반(反)전통적 온상이 되는 도시, 외국과 교역을 하고 외국 및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상인들이 사는 도시, 비록 유치한 단계로나마 화폐경제가 성립되고 화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촉진시키는 부의 편재현상도 없지 않은 도시--이러한 특색을 갖춘 도시의 출현은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으며, 예술분야에서도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성적이며 종래의 형식과 전형의 속박에서 훨씬 벗어난 양식을 낳았다.(47P)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루한 전통적 형식의 배후에서 실험적인 개인주의와 탐구적인 자연주의의 생동감을, 도시의 생활감정에서 우러나와 신석기시대의 정체적 문화를 와해시키고 있는 힘들을 느껴야만 한다.(47P)

압박이 가장 심했던 고대 오리엔트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 중 상당수가 탄생했다. 이들 작품은 예술가의 개인적 자유와 작품의 미적 가치 사이에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증명해준다. 예술적인 의지란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장애물을 뚫고 나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예술작품은 일련의 목표설정과 이에 대립되는 일련의 장애들--부적합한 제재라든가 사회적인 편견이라든가 대중의 미흡한 판단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장애와, 혹은 이러한 장애를 이미 자체 내에 받아들여 동화시켰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 공공연하고 완강한 대립관계에 서 있는 목표설정--사이의 긴장에서 탄생하는 것이다.(48P)

2. 이집트 예술가의 지위와 예술활동의 조직화

사제와 왕후는 모두 동일한 신정(神政)질서의 일부였고 그들이 예술에서 부여한 과제, 즉 구원을 확보하고 명성을 드높이려는 두 가지 과제는 모든 원시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사자숭배(死者崇拜)의 측면에서 일치하였다. 두 계급 모두 장엄하고 권위를 상징하며 현실과의 격차가 뚜렷하게끔 양식화된 묘사를 예술에 요구했고, 사회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신으로써 예술을 대했으며 이를 자신들의 보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50P)

3. 중제국시대 예술의 유형화

이집트의 궁정예술에서 볼 수 있는 거북살스러울 정도로 의식적(儀式的)인 형식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 이것은 인류사에서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들은 초개인적인 고차(高次)의 사회질서, 즉 그 위대함과 빛남이 왕의 은총에 힘입은 세계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57P)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예술에서 보이는 모든 합리주의적 형식원리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면성’(Frontalitat)의 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면성’의 원리란 랑에(J. Lange) 및 에르만(A. Erman)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든 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61P)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감상자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한다. 그것은 권위를 상징하는 예술이며 존경을 강요하는 예술인 동시에 존경을 아끼지 않는 예술이기도 했다. 감상자를 의식하는 그런 태도는 일종의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예의이고 범절이었다. 왕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 덕을 칭송하고자 했던 궁정예술은 모두가 어떤 원리에서든 정면성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감상자 또는 발주자에게 위안과 봉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고 대면하는 예술인 것이다.(62P)

4. 아메노피스 4세 시대의 자연주의

위대한 정신적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아메노피스 4세는 일반적으로는 일신론(一神論)의 이념을 발견한 교조로 알려져 있고 또 세계사에서 ‘최초의 예언자’ 혹은 ‘최초의 개인주의자’ 식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는 또한 예술을 의식적으로 개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즉 그는 예술의 목표로서 자연주의를 내세워 의고풍 예술양식에 맞서는 새로운 업적을 이룩한 최초의 인간이었던 것이다.(64P)

지배층에 속한 사람은 항상 궁정품의 권위를 재현하는 양식으로, 하층민 사람들은 통속적인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이처럼 적용해야 할 양식을 대상에 따라 바꾸는 이러한 수법은 미술사 및 문학사에서는 결코 신기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W. Shakespeare)가 인물을 구별하여 묘사할 때 사용했던 두 가지 방법, 즉 하인과 광대 역 등의 대사에는 평범한 산문을 사용하고 주인공이나 귀족들은 예술적인 운문으로 말하게 하는 수법은 소재에 따라 양식을 바꾸는 이 ‘이집트적’ 수법과 같은 것이다.(70-71P)

5.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관한 진정한 문제점은 경제적으로든 상업과 수공업, 화폐와 신용제도가 압도적인 비중을 점유하고 있던 이 나라의 예술이 농업 및 자연경제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이집트 예술보다 더 엄격한 규율에 매여 있고 변화나 신선함이 적다는 사실이다.(72P)

구석기시대의 인간이 인간보다는 동물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것은 그들의 생활이 동물 중심이었던 탓인 데 반해 후대에 오면서는 동물은 양식화할 가치가 없다고 보아 동물 그림이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려지는 것이다.(75P)

6. 끄리띠

끄리띠 예술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예술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궁정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끄리띠에서는 로꼬꼬적인 요소, 즉 세련되고 경묘한 것이나 섬세하고 우아한 것에 대한 취미가 좀더 강하게 대두한다. 회르네스는 축제 행렬이나 축제극, 공공의 투기(鬪技)나 공개시합, 부인들과 그 요염한 행동거지 등이 끄리띠 사람의 생활 속에서 차지한 비중을 지적하면서 끄리띠 문명에 내포된 기사적(騎士的) 요소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견해 임에 틀림없다. 중세에 와서도 그러했듯이 이런 유의 궁적적?기사적 요소는 정복에 의하여 토지 소유자가 된 향사(鄕士)들의 구태의연한 생활양식을 누르고 좀더 자유분방하고 융통성 있는 생활양식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또 이러한 생활양식에 부응하여 좀더 개성적이고 양식 면에서 자유로우며 자연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한 예술을 생산했던 것이다.(77P)

이 ‘우연적 배치’라는 좀더 자유분방하고 회화적인 구도는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오리엔트적 부자유함과 대립시켜 ‘유럽적’이라고 부르는 제일 적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자유로운 창의성의 표현인 동시에, 집중과 통제를 기조로 하는 양식원리와는 반대로 모티프의 풍부함이나 다채로움을 환영하는 예술관의 표현인 것이다.((77-78P)

끄리띠 예술은 대체로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한 편인 채, 처음에는 아마도 신석기시대로부터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던 시기의 주로 기하학적인 형식주의에서 출발하여 극단적인 자연주의 시대를 거쳤거나, 다시 고풍스럽고 약간 아카데믹한 면이 있는 양식화 시대로 되돌아온다.(78P)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1.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모든 원시시대의 문학이 그렇듯이 선사시대의 그리스 문학도 주문이나 신탁의 일종이요 축복이나 기원을 위한 격식에 맞춘 문장들이거나 군가 또는 노동요였다고 생각된다. 이들 장르에 공통된 하나의 특색은 그 모두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집단적 문학이었다는 사실이다.(86P)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게 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의 아카이아(Achaea)의 왕이나 귀족들, 즉 이 시대에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를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자랑스럽게 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들이었다.(87P)

유동적인 생활을 하는 호전적인 민족에게는 보고 듣는 것 전부가 모든 전통과 법에 맞서는 자유분방한 개인주의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쟁탈의 대상이요 개인적 모험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완력과 용기, 숙련과 지략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88P)

문학의 사명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싸움터로 몰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로 끝난 싸움 뒤에 장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름을 들어 칭송하며 그들의 명예를 드높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되었다. 영웅시(Heldenlied, heroic lay)를 낳은 것은 무사귀족들의 명예심이었다.(89P)

시는 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함과 동시에 서정적인 성격도 잃어 버리고 서사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서사시’야말로 유럽 문학에서 종교적 의례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으로서는 우리가 알기로 가장 오래된 문학인 것이다.(89P)

모든 문학의 최고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어느 개인의 창작도 아니요 그렇다고 민속문학의 산물도 아닌 익명의 고급 예술품이며 다수의 우아한 궁정시인들과 학식있는 문사들이 이룩한 집단창작으로서 그 창작과정에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유파 또는 세대의 기여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19세기 미학 전체의 주춧돌이 되는 낭만주의의 예술관 및 예술가관은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96P)

농민의 생활권에 자리잡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문학은 헤씨오도스(Hesiodos, Hesiod)의 작품이다. 그의 문학도 흔히 말하는 민중문학은 아니다. 즉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문학도 아니요 서민들이 모이는 주막 같은 데서 항간의 음탕한 이야기들과 겨룰 수 있는 문학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취급되고 있는 소재와 가치관, 인생목표 등은 농민층, 즉 귀족지주들에게 억압받는 민중의 그것이었다. 헤씨오도스 작품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물론 화해를 말하고 대립의 해소와 위무(慰撫)를 시도하는 것이지만--계급투쟁과 혁명의 시대는 아직 요원하였다--여하간 처음으로 문학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사회정의를 주장하며 자의(恣意)와 폭력을 규탄한 최초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제까지 시인에게 맡겨졌던 종교와 예배, 궁정생활과 지배자 찬송의 임무를 처음으로 버리고 정치적?교육적 사명을 떠맡아 피압박계급의 스승이요 충고자요 대변자가 된 것이다.(98P)

서사시는 에에게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는 용광로이자 당시 국제무역의 중심지이던 소아시아에서 발달한 것이라면, 기하학 무늬 중심의 당시의 조형예술은 그리스 본토, 즉 도리스와 보이오띠아의 농경사회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호메로스의 스타일은 국제적으로 개방된 도시인의 언어인 반면 기하학주의는 모든 이질적인 것에 대해 등을 돌리려는 시골의 농민과 목축민의 표현형식이었다.(99P)

2.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여전히 그리스 도처에서 갈채를 받고 이를 모방하는 자들이 다투어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귀족계급으로서는 진부한 영웅설화보다는 시사적인 문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그리스 본토박이 문학인 합창대용 서정시와 사상시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쏠론(solon)을 비롯한 격언시인, 띠르따이오스(Tyrtaeos)와 테오그니스(Theognis) 등의 비가(悲歌)시인, 씨모니데스(Simonides)와 삔다로스(Pindaros, Pindar) 같은 합창대용 서정시 작자들은 애당초 재미있는 모험담이 아니라 진지한 도덕적 교훈, 조언, 경고를 귀족계급에게 제시했다. 그들의 문학은 주관적 정서의 표현이자 정치적 선전과 도덕철학을 겸한 것이었고 그들 자신은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귀족 및 전민족의 교육자요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들의 사명은 귀족들의 마음 속에 항상 위기의식을 일깨워주고 자신들의 위대성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주는 것이었다.(104P)

경제적 개인주의의 대두와 함께 서사시 편찬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하는 서정시인과 더불어 문학의 영역에서도 주관주의가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단 소재의 관점, 즉 원래 서정시는 서사시보다 개인적인 소재를 취급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시인이 자기 작품의 저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새로운 요구라는 면에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이제 정신적인 것에 관해서도 개인 재산권의 관념이 등장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107P)

기원전 7세기 말엽 처음에는 이오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그리고 뒤어어 그리스 본토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참주정치(Tyrannis, rm 전제적인 성격으로 인해 ‘폭군정치’의 어원이 되었으나 역사용어로서는 그리스사의 한 시대를 뜻할 뿐 참주가 반드시 폭군이었다는 의미는 없음--옮긴이)는 혈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인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뜻하며 이 점에서도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참주정치는 그 본질적인 반민주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민주제의 성과를 앞질러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주제는 권력의 군주제적 중앙집권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제 이전 단계로의 역행을 뜻하지만 토지귀족에 대한 민중의 착취에 한계를 긋고 가정경제?자연경제적 생산에서 교역과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완수함으로써 지주층에 대한 상인층의 승리를 초래한 것이다.(109P)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예술이념과 마주치게 되는 셈이다. 이제 예술은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예술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 형식이 처음에는 오직 실용적 목적과의 관련에서 결정된다. … 실용적인 지식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연구가 되고,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추상적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원래는 마술이나 종교의 부속품, 선전과 자기찬미를 위한 도구, 또는 신과 악령과 인간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예술도 순수하고 자율적인, 즉 ‘이해타산을 떠난’ 형식, 예술 그 자체와 아름다움을 위한 예술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본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만 생겨난 명령이나 금지, 의무나 터부 등이 마침내 ‘순수’ 윤리의 규범이 되고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 실현을 위한 지침으로 변했던 것이다. 실용형식에서 이념형식으로, 구체적인 형식에서 추상적인 형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학문의 세계에서나 예술?도덕의 영역에서나 그리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112-113P)

예술을 생존투쟁의 무기로만 보고 그러한 예술에만 의미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예술이란 것은 모든 실용적 목적과 효용, 모든 미학 외적 이해관계에서는 독립되어 있는 단순한 선과 색의 유희, 리듬과 조화, 현실의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으로의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아마도 예술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예술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13P)

아무런 거리낌없이 형식 그 자체를 음미하고 즐기는 능력, 수단 자체에서 목적을 찾고 예술을 현실지배나 현실개조를 위해서뿐 아니라 단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가능성--이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에 의해서만 비로소 발견된 것이다. 물론 훨씬 전부터 있던 경향이 이 시대에 이르러 표면에 드러났을 뿐이고, 또 이렇게 해서 발생한 일견 자율적인 여러 형식도 실은 사회학적으로 제약받은 것이고 은연 중에 어떤 실용적인 목적에 봉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경향이 드디어 표면에 드러나고 이제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14P)

자의식이라는 것, 즉 당면한 현실적 필요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에 관한 총체적인 앎을 추구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최초의 위대한 추상행위였고, 개개의 정신형식을 그것이 인생 전체 속에서 그리고 통일된 세계상 내부에서 가지는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또 하나의 공적이었다.(116P)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 중의 일부가 자율적인, 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이나 종교, 과학이나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117P)

3.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민주제는 온갖 세력의 경쟁을 자유롭게 방임하고 모든 인간을 개인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평가하여 각자에게 최고의 능력을 발휘시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평준화하고 출생에 따른 특권을 폐지한다는 점에서는 반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118P)

예술작품의 가치와 사회적 조건을 일 대 일로 간단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다.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가지가지의 요소를 그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것뿐이며, 이러한 요소들이 동일할 경우에 거기서 생기는 예술작품의 질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수도 있는 것이다.(130P)

4. 그리스의 계몽사조

기원전 5세기가 끝나가면서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적?개인주의적 요소, 주관적?감정적 요소들이 점점 그 범위와 비중을 더해갔다. 전형보다는 개성이, 모티프의 집중보다는 확산이, 절제보다는 풍성함이 갈수록 더 우세하게 되었다.(130P)

쏘피스뜨들은 의식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언변이 좋은 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교육의 기초를 세웠으며, 소위 지식인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러한 지식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설정된 것은 인류사상 처음이었다. 소피스뜨들에 이르러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식의 개념과 마주치게 되는데,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초기의 사제층이나 호메로스 시대의 음유시인들과 같은 일정한 직업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층에 항시 인력을 수급할 수 있을 만큼 폭넓은 일종의 인간 수원지(水源池)로서의 지식층이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131P)

쏘피스뜨들은 과학?법?도덕?신화?신 등의 모든 가치나 질서는 역사의 산물이요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들은 맞고 틀림,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상대성을 발견하고 인간의 모든 가치판단의 배후에는 실용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파했으며 그리하여 휴머니즘 계통의 모든 계몽 운동 및 폭로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합리주의나 상대주의도 르네쌍스 인간의 자연과학적 태도, 18세기의 계몽사상, 19세기의 유물론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유경쟁과 이윤추구를 기조로 하는 경제구조의 소산이었다. 당시의 자본주의는 근대 자본주의가 그들의 후예에게 열어 보였던 것과 같은 시야를 그들에게 열어 보였던 것이다.(132P)

쏘피스뜨 철학의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및 동시대 예술의 환각주의와 주관주의는 양자 모두가 경제적 자유주의 및 민주사상의 표현이며, 모든 것을 선조들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얻었기 때문에 낡은 귀족적인 태도나 그들의 위엄있고 거창한 행동거지에 한푼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은려는 세대,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신조를 지녔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이나 정열을 아무 거리낌없이 공공연하게 발산하는 세대의 정신적 산물이라는 것이다.(134P)

쏘피스뜨드른 스스로가 계급적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계층이었을 뿐 아니라 어떤 특정한 계급에 연결되는 일도 없는, 이제까지의 역사에는 유례가 없던 사회집단이었다. 쏘피스뜨들은 이른바 여러 계급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인텔리층’(freischwebende Intelligenz), 즉 여하한 기존 계급에도 전적으로 부합할 수 없고 또 여하한 계급도 그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떠돌아다닐 수 밖에 없는 지식인층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137P)

‘열광’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문학작품의 모태는 시인의 기술적 능력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영감이 되는데, 플라톤의 이러한 학설은 결코 시인을 무슨 신적인 존재로 승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과 그 작품 사이의 간격을 강조하고 시인 자신은 신이 그 목적 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139P)

플라톤은 진보적인 예술가로서 서민적인 미무스에서 자연주의적 수법을 배워온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인 철학자로서 귀족의 생활감정에 바탕을 둔 관념론 철학을 창시했던 것이다.(140P)

5. 헬레니즘 시대

국가는 경제적 능력의 우열에 따라 인재의 우열이 가려지는 것을 장려했는데, 그것은 생존경쟁에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사업에서도 가장 유능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145P)

학문연구가 이와같이 전문화되고 비인격화된 사실의 필연적 결과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절충주의의 위험이었다. 이 두 가지 특색은 서양문화사에서 처음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것이자, 헬레니즘의 모든 특색 중 아마 가장 현대정신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적 특징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예술작품의 근본적 특색이기도 하다. 역사를 존중하며 고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지녔고 과거 여러 형태의 예술유파에도 폭넓은 태도로 임했던 이 시대는, 필연적으로 모든 자극에 대하여 무차별하게 반응을 보인 시대이기도 했다.(147P)

6.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그리스의 영향이 아직 지배적이었던 아우구스뚜스 시대에는 예술분야에서 조각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회화가 점차로 세력을 뻗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건축조각과 기념비 조각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다시피 하게 된다. 3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조각의 복제품 제조는 중지되고, 그 뒤 200년 동안은 모든 실내장식을 회화가 거의 독점해 버렸다. 그리스 고전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조각이었던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154P)

고대 후기인 아우구스뚜스 시대는 그림이 전부였다. 즉 그림은 뉴스, 사설(社說), 광고, 포스터, 화보, 그림 연대기, 환등, 영화잡지, 극영화 등 모두를 겸한 것이었다. 그림이 이토록 애호되었던 것은 일화를 환영하는 기분이나 신뢰할 만한 정보, 증인, 기록에 기울인 깊은 관심의 표현임과 동시에 구경에 대한 원시적이고 싫증을 모르는 쾌감의 표현이요 무엇이든 그림으로 설명된 것을 즐기는 천진함의 표현이었다.(155P)

고대 오리엔트 및 그리스 미술의 묘사법은 조소적(彫塑的)?기념비적이고 행위의 요소가 아주 없든가 별로 없으며 비서사시적?비희곡적인 반면, 로마 및 그리스도교적 서양의 미술은 설명적?서사시적?환각주의적이고 희곡이나 영화처럼 ‘사건’을 지니고 있다. 고대 오리엔트 및 그리스의 미술은 거의 모두가 어떤 전형의 상이요 초시간적 본질의 묘사이며 개개의 독립된 인물상이었다면, 로마 및 서양의 미술은 그 대부분이 역사화, 그림 이야기, 정경묘사로서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현상을 시간적?공간적인 수단에 의해 포착하려 했다.(156P)

7. 고대 그리스?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 19세기 스위스의 미술사가, 문화사가)에 의하면, 어떤 민족이 노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그 민족의 생활이상을 낳은 생활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163P)

쁠로띠노스에 의하면 미는 신의 본질적 특색의 하나이고 개개의 단편적 현실은 미를 통해서만, 그리고 예술의 형태로만 신과 멀어짐으로써 잃어버렸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165P)

제4장 중세

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 가지 변동들--즉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의 탄생이라든가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로의 전환,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 자연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의 맹아--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쌍쓰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177P)

스뜨라본(Strabon,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사가(史家))도 “회화는 문맹자에게는 책의 대용물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뒤랑뒤(Durandus, 12~13세기 프랑스의 스꼴라 신학자)도 여전히 “교회의 그림과 장식은 민중을 위한 강의이고 독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세 초기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만일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고 추상적인 사색을 할 수 잇다면 예술은 전혀 쓸모없는 물건인 셈이었다. 말하자면 예술은 본시 감각적인 인상에 동요되기 쉬운 무지한 대중을 위한 하나의 편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185P)

2. 비잔띤 제국의 정교합일체제하의 예술양식

비잔띤 제국의 통치형태는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 Casaropapismus), 즉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한 사람의 전제군주 손에 집중되어 있는 형태였다. 황제가 교회 위에까지 군림하는 근거가 된 것은 교부(敎父)들에 의하여 전개되고 유스띠니아누스 황제가 법률로 선포한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로서 이것은 왕이 곧 신의 후예라는 이미 낡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신화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비록 황제가 바로 ‘신’이라는 주장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황제는 적어도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자, 유스띠니아누스가 즐겨 쓴 말을 빌리면 신의 ‘대사제(大司祭)’가 될 수는 있었던 것이다.(189P)

3. 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아마씨아의 아스떼리우스(Asterius Amasianus)는 그림으로는 아무리 해도 대상의 물질적 부분, 시각에 호소하는 부분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예수를 그리려는 모든 시도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지 말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한번의 수모로써 족한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사람의 모습에 담아두기보다 오히려 그의 무형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확실히 새겨두도록 하자.”(199P)

4. 민족 대이동기에서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기까지

여러 예술 장르가 완전히 동일한 양식경향을 드러내려면 예술이 그 표현수단을 극도로 제한된 가능성 가운데서 쟁취할 필요 없이 여러 가지 가능한 형식 중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발전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207P)

고급 필사본의 세밀하고 복잡한 수법이 정적인 작품을 낳기 쉬운 것처럼, ‘싸구려’ 펜그림ㅇ서 보는 담백한 스케치풍의 묘사는 인상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작품을 낳기 쉬운 것이다.(219P)

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낭만주의자들은 모두 영웅서사시는 개개의 시인이 그 직업적 기술을 구사하여 의식적으로 만든 것일 수 없고 소박한 민중의 무의식적?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민중문학을 집단에 의한 즉흥적인 창작으로 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서히 발전해가는 지속적인 유기적 과정이요 따라서 개개 시인의 업적으로 돌릴 수 있는 단속적?의식적인 행위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민중서사시는 영웅설화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어감에 따라 ‘생장’해 나가는 것이요 그것이 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그 생장이 멈춰진다는 것이었다.(227P)

음유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추었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미 결코 시인이나 가인만이 아니고 악사 겸 무용사, 극작가 겸 배우, 광대 겸 곡예사, 요술쟁이 겸 곰재주 놀리는 쇼꾼, 한마디로 당대의 만능연예인이요 ‘메트르 드 쁠레지르’(maitre de plaisir, 여흥진행 담당자)였다.(231P)

문학작품은 그 자체의 전설과 그 스스로의 영웅적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시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만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도 존속해간다. 문학의 각 시기는 그 자신의 호메로스와 그 자신의 『니벨룽엔의 노래』『롤랑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시기는 이들 작품에 자기 유의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해석들은 작품에 대한 직선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품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대가 내리는 해석이 언제나 전보다 더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의 정신에서 출발한 모든 진지한 해석 노력은 작품이 갖는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게 마련이다. 역사적 현실의 기반 위에 영웅서사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이론도 모두 적극적인 의의를 띤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는 역사의 진실이라든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라는 것보다는 대상의 핵심에 닿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2-233P)

6.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칼 대제의 재위기간이 끝난 뒤로 궁정은 이미 제국의 정신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학문, 미술, 문학 일체의 거점은 이제 수도원이고 당대의 정신적 소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도원 부속의 도서관, 사본제작소, 화실에서 진행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서양미술이 최초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이들 수도원의 노력과 재산 덕분이었다.(233P)

서양에 조직적인 노동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은 수도원이었다. 중세 산업의 대부분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수공업은 수도원에서 비로소 가내경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또 시간관리가 최초로 행해진 것도 여기에서였다. 즉 하루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이용하며, 시간의 경과를 재어 종을 쳐서 이것을 알리는 것 등이 수도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분업의 원리는 생산의 기초가 되고, 개개의 수도원 내부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도원들 상호간에도 실시되었다.(235-236P)

7.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봉건제도는 9세기의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 메로빙어 왕조 시대와 달리 새로운 것은 이렇게 주어진 토지가 봉토(封土)로서의 성격을 띠고 토지를 받은 사람이 토지를 준 사람에 대하여 가신(家臣, 從士)의 관계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말을 바꾸면 이제까지의 단순한 종속관계 대신에 이제는 계약에 의한 의리관계, 상호봉사와 상호책임의 관계, 쌍방이 서로 의리와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가 봉건제도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244P)

봉건시대의 국가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한 점을 정점으로 가진 피라미드형의 복합사회였다. 왕은 전쟁의 주관자이긴 하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대지주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관리나 용병, 총신(寵臣)이나 벼락감투를 쓴 사람, 식읍(食邑)을 받았거나 녹(祿)을 먹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영주의 자격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들의 특권은 법의 근원으로서의 군주가 부여한 공식적인 권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실상으로 장악하고 있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권력에 의거한 것이었다.(245P)

오로지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것, 감각적으로 생동하는 것, 형태적으로 정상적인 것을 묘사했을 뿐이며 영혼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암시를 일체 회피했던 고전적인 고대에 비하면, 로마네스끄 양식은 영적인 표현만을 노리는 예술이요 감각적 경험의 논리가 아닌 내면적인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르는 예술로 보인다.(259P)

영웅이나 왕처럼 그려지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직 모든 지상적인 것, 무상한 것에 대해 승리자의 용모를 갖추고 있는 이들 그리스도상에 상응하는 것이 당시의 성모상인데, 그것은 고딕시대 이래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사랑과 고뇌를 나타낸 성모상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든 것을 추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그려진 마돈나인 것이다.(260P)

8. 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263P)

온갖 가치의 계산, 교환 및 추상화를 가능케 하며 재산을 비인격화하고 중립화하는 화폐는 개개인의 그 사회적 집단에의 귀속도 그들의 가변적인 자금능력이라는 추상적?비인격적인 요인에 의존하게 만들고, 이에 따라서 각 신분 사이에 가로놓인 세습적으로 고정된 경계선을 원칙적으로 지양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대우가 금전적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해진다는 이러한 새로운 사태는 일반적으로 각 경제주체간의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이러한 재산의 획득이라는 것은 가문이나 신분, 특권 등보다도 두뇌, 정세판단, 현실감각, 타산능력 등 극히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개개인이 어떤 사회계층의 대표자로서 갖는 의미가 엷어진 대신에 자기 실력이 인정받는 정도가 커졌다. 이제 사회적 지위를 얻는 길은 형통에 따른 비합리적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의 지적인 자격이 된 것이다.(267P)

시민적 세계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비단 대성당 건축뿐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사문화 전체가 옛날부터의 봉건적?위계질서적 생활감정과 새로운 시민적?자유주의적 사고방식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시민계급의 영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문화의 세속화 현상이다. 이미 예술은 보통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소수자만이 나눌 수 있는 암호가 아니라 거의 누구에게든지 이해될 수 있는 표현수단이었다.(271-272P)

기사계급의 낭만적 이상주의와 의식적이고 감상적인 영웅주의는 실은 재탕된 이상주의요 영웅주의였으며, 그것은 기사계급의 명예라는 개념을 형성해나간 신흥귀족의 자의식과 야심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277P)

고귀한 인격이 고귀한 출생가문보다 가치가 높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봉건적 군인계층이 이미 완전히 그리스도교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민족대이동 시대의 거칠고 품위없는 직업군인으로부터 중세 최성기의 ‘하느님의 기사’에 이르는 긴 발전의 결과였다.(278P)

기사계급의 새로운 생활감정이 가장 순수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특색인 ‘기사도의 덕목’과 좁은 의미에서의 ‘귀족적인 덕목’이다. 즉 한편으로는 패배자에 대한 관용, 약자의 보호와 부인에 대한 존경, 훌륭한 범절(courtoisie)과 여인에 대한 멋스러운 예우(galanterie) 등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신사’(gentleman)에게 남아 있는 특성들, 예컨대 너그러움, 돈이나 이해관계에 대한 초연함,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경우 바르고 체면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는 태도 등이다.(279P)

기사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러한 태도 즉,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궁정적인 예절에 어긋나고 부적당하다고 생각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쌀쌀하고 남자는 사랑에 몸이 달아 있는 것이 오히려 궁정적인 예절이고, 남성이 끝없이 참고 끝없이 수그리며 여성의 의지와 더욱 훌륭한 본질 앞에서 자기의 의지, 자기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궁정적이요 기사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연모의 대상인 여성이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사람의 쓰라림에 스스로 탐닉하는 일종의 감정적 노출증과 자학증이 곧 궁정적인 예법이었다.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갖가지 특색은 모두가 이 기사문학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사랑하고 애태우며 단념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상대의 응답이나 사랑의 성취와 관계없이 바로 그 부정적 성격에 의해 더욱 타오르는 사랑, 손에 잡히는 대상이나 심지어 분명히 규정할 수 있는 대상조차 가지지 않는 이른바 ‘먼 것에 대한 사랑’--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근대문학사의 막이 열리는 것이다.(285-286P)

외딴섬처럼 외부와 격리된 사회에서 젊고 독신인 사나이들의 무리가 이렇게 탐스러운 부인과 매일 함께 지내면서 부부간의 정다운 정경을 자연히 보게되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사나이에게 바치고 있으며 그 한 사람만이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었을 때. 이 고도(孤島)와 같은 세계에 극도의 성적 긴장상태가 조성되었음에 틀림없고, 많은 경우 다른 곳으로는 배출구를 찾아낼 수 없던 이 성적 흥분이 궁정적 연애라는 승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 기사의 모든 교육제도 자체가 강한 성적 유대의 발생을 조장하게 되어 있었다. 사내아이는 열네살까지 완전히 여자의 손으로 교육받았다.(292P)

궁정적?기사적 연애의 드러난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관능적 요소를 간과할 수 없으며, 그것이 실은 교회의 금욕적인 계명에 대한 반항의 산물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292P)

새 시대의 연애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는 이제 주로 부인들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졌다. 문학작품의 감상자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점하게 된 사실이 서양문학사에서 최대의 변화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감상하는 방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도 장래를 위해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학감상이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이 시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장엄한 행사 때나 특별한 계기만이 아니라 마음내킬 때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문학’(Literatur, literature)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301P)

9. 고딕 예술의 이원성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러한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에는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일체의 신학적 변호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계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표현하며, 따라서 예술의 관점에서도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마련인 것이다.(308-309P)

고딕 교회는 생성의 상태를 계속하고 있고,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 이러한 건축물은 미완성임으로 해서 그 효과가 손상되기는 커녕 도리어 힘과 매력을 더하는 것이다. 역동성을 띠는 모든 예술양식에 특유한 형식의 개방성이라는 것도 휴식을 모르는 무한한 운동이라는 인상을 강조하고, 여하한 안정도 영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322P)

10. 건축장인조합과 길드

건축장인조합과 길드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피고용자 집단이고 그 내부 조직이 위계질서적이었는 데 반하여, 후자는 적어도 그 시초에는 제각기 독립한 사업가들이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결합한 단체였다는 점이다.(331P)

11. 고딕 후기의 부르즈와적 예술

후기 고딕 미술은 방랑자?여행자?보행자를 되풀이하여 그리고 있고, 도처에서 길이라는 느낌을 나타내고자 하며, 도처에서 방랑벽과 움직이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을 테마로 하고 있다. 묘사된 정경은 마치 행렬의 여러 장면들처럼 감상자 옆을 지나 간다. 감상자는 구경꾼이자 무대상의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엄중한 구별을 없애버리는 이 ‘노변적’ 시각이야말로 이 시대의 역동적인 생활감정의 독특하고, 말하자면 영화적인 표현이다.(345-346P)

한가지 확실한 것은 미술품이 중세 초기에도 아직 갖고 있던 일종의 마력, 일종의 후광을 점차로 잃어버리고 시민계급의 합리주의적 정신에 의한 ‘현실의 탈마술화’(Entzauberung der Wirklichkeit)에 대응하는 발전경향을 보여주었다면 그 원인의 일부는 기계적인 복제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미술품이 전처럼 교환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유일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349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이 책은 한마디로 대학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역사 특히, 사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구석기, 신석기, 그리스?로마, 중세시대(1편 기준)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지 독특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나 인류사, 문명 등에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예술과 문학 만을 ‘콕’ 집어서 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독특한 것은 저자가 예술 중에서도 특히 조형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조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있으며, 시대적 사상과 사고, 사건이 어떻게 조형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집중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십분 발휘된 책이기도 하며, 이 책이 왜 세상에 나온지 5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명저로써 대접을 받는 지 알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데는 무려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강산이 한번 바뀔만한 긴 시간이다. 아마도 일반적인 작가라면 못해도 5권 이상의 저작을 발표할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관심사에 대하여 연구하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의 논문과 작품을 뒤지고 다시 연구하고 분석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그의 땀과 눈물 그리고 절절한 노력들이 담겨져 있다. 그는 이 책에 그의 생각들을 단순하게 싣지 않았다. 가장 신빙성있고 사실에 가깝다고 하는 학설을 분석하되, 그것을 다시 다른 학설들과 비교 분석하여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되어지는 생각만을 기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론적 전제와 내가 발견한 것으로 믿어지는 규칙성들을, 역사현상을 기술하고 서술하는 과제에 완전히 종속시킨 연구서이다.“

역사 속 진실론

진실이란 무엇일까. 특히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실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만 정확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학교에서 책에서 방송에서 배우고 익혀온 역사 속 사실들은 과연 진실인 것일까. 얼마 되지 않은 20세기의 사건들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진실여부가 달라지는데, 우리가 직접 겪지 못했을뿐더러 얼마 되지 않는 역사 기록 속에 남겨진 유물만을 가지고 그 시대의 사건, 배경들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을까.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 즉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중세시대까지의 예술과 문학에 대한 주장들은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하우저는 책에서 기존의 학설, 이론, 저명한 학자의 주장 등에다가 그의 연구분석, 추정 등을 덧붙여 최적의 적절한 이론을 이끌어낸다. 가장 그럴듯하며,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을 엮어 풀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이러한 자신의 주장이 100% 맞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들을 같이 살펴보자.

“자연주의적?유물론적인 경향을 지닌 인상주의는 그 자체와는 정반대의 양식인 유심론적 표현주의의 길을 열었고, 이 점에서는 알다시피 신석기시대 기하학 양식의 모태가 되었던 구석기시대 회화의 표현주의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두 가지 사례는 모두 개개의 예술양식이 얼마나 많은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얼마나 상반되는 세계관의 표현양식이 될 수 있는가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158P)

문학작품은 그 자체의 전설과 그 스스로의 영웅적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시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만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도 존속해간다. 문학의 각 시기는 그 자신의 호메로스와 그 자신의 『니벨룽엔의 노래』『롤랑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시기는 이들 작품에 자기 유의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해석들은 작품에 대한 직선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품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대가 내리는 해석이 언제나 전보다 더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의 정신에서 출발한 모든 진지한 해석 노력은 작품이 갖는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게 마련이다. 역사적 현실의 기반 위에 영웅서사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이론도 모두 적극적인 의의를 띤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는 역사의 진실이라든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라는 것보다는 대상의 핵심에 닿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2-233P)

결국 그가 말하는 진실은 시대에 따라,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개개인마다의 『니벨룽엔의 노래』,『롤랑의 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혹은 애초의 원작자가 그 작품에 담은 본질적인 울림은 동일할 지 몰라도,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그 작품은 새로이 변화된 다른 의미와 느낌의 울림으로 구현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해석이자 새로운 접근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역사 속 작품 속에서, 사건 속에서 이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진실의 의미를 그대로 깨우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우저의 이 역작도 진실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새로운 시각, 새로운 해석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하우저의 노력에 의해 역사 속 문학과 예술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배우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예술, 문학 그리고 문화

자, 오늘도 단어 공부를 다시 해보자. 예술, 문학 그리고 문화의 차이이다.

○ 예술

1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공간 예술, 시간 예술, 종합...

○ 문학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런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따위가 있다.

○ 문화

1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2 권력이나 형벌보다는 문덕(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

3 학문을 통하여 사람들의 인지(人智)가 깨어 밝게 되는 것.

잘 읽어 보다보면 등호, 부등호의 관계가 보인다. 다음과 같을 것이다.

문화 〉 예술 〉 문학

책을 읽다보니 제목은 예술인데, 실지로는 미술(조각, 회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언급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면서 예술과 미술, 그리고 문학 등의 차이점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문화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지도 궁금했다. 한마디로 문화는 예술과 문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문화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너무 그 범위가 넓다 보니 예술 특히, 미술과 문학 만을 별도로 빼내어 구성한 것일까? 매우 궁금해진다.

문화까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우저는 책에서 예술과 문학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이 개념은 많이 변화되었지만 중세시대에 예술의 대표주자 미술가와 문학의 대표주자 시인에 대한 차이점이 매우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이 관점에는 육체노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추가되어 있어 중세시대에 육체노동에 대해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 지도 알수 있다.

“시인이 때때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 선지자나 예언자, 인간에게 명예를 주고 신화를 해석하는 자로 간주되곤 했다면, 조형예술가는 비천한 장인의 위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돈만 주면 그만인 부류로 여겨졌다. 즉, 조형예술가의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고 육체적인 노력에 의한 고달픈 작업임에 비하여 시인의 노고는 전혀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중세 기사계급과 기사도 정신

새롭게 알게 된 것 중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 바로 현재 우리가 기사도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 중세 기사계급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우리는 기사도 정신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사도정신에 의해 그전까지 종족번성을 위한, 육아를 위한 다소 낮은 역할의 관점으로만 보던 여성을 보다 높은 시각으로 존중하고, 위하며, 따르게 된다. 한마디로 기사도 정신이란 여자를 위한, 여자에 의한, 여자의 기사라 표현해도 될 듯하다.

여지까지 기사도 정신하면 중세의 기사들은 여자들에 대하여 상당히 젠틀하고 예의범절을 갖춘, 귀족적 면모를 가진 그러한 계층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봉건영주의 보호 아래 성안에 기거하며 생활하는 젊은 기사들이 대할 수 있는 여성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모시고 있는 영주의 귀부인들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그녀들에게는 영주에게 하듯 모든 충성과 성의를 다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여자의 향기를 맡는 젊은 그들에게 성욕이 어찌할 수 없는 큰 문제로 다가온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었으리라. 그들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태도가 후세에 겉모습만 남아 ‘기사도 정신’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웬지 중세의 기사들이 매우 불쌍해 진다. 그리고 ‘기사도 정신’ 정말 허울 뿐인 단어이다. 속지 말지어다. 여자들이 기사도 정신 운운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 이제부터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웬 기사도 정신? 니들이 기사도 정신의 그 슬픈 속 사정을 알기나 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엉? ^^;

하우저는 기사도 정신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사계급의 새로운 생활감정이 가장 순수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특색인 ‘기사도의 덕목’과 좁은 의미에서의 ‘귀족적인 덕목’이다. 즉 한편으로는 패배자에 대한 관용, 약자의 보호와 부인에 대한 존경, 훌륭한 범절(courtoisie)과 여인에 대한 멋스러운 예우(galanterie) 등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신사’(gentleman)에게 남아 있는 특성들, 예컨대 너그러움, 돈이나 이해관계에 대한 초연함,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경우 바르고 체면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는 태도 등이다.”(279P)

아쉬운 점

첫째, 역사 이야기 치고는 연대가 나와있질 않다.

둘째, 동양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반쪽 자리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회사다.

셋째, 길다, 길어도 한참 길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숨이 차다. 책 읽다 병원에 실려갈 뻔 했다.-_-;;

넷째, 너무 문법적인 단어들로만 번역을 했다. 풀어쓰지 않고 한자(漢字)로만 나열하여 이해가 어렵다.(사실 나의 한자능력 부족도 있다. 그리고 1999년 번역작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문명의 발전에 대한 선지식이 없는 사람은 다소 쫓아가기가 어려워 보인다.

마무리

책을 다 읽었다. 뿌듯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이러한 류의 책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완독은 커녕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가 대견하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변화에 나 자신도 놀랍다. 다 읽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읽는 동안 흥미가 유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이 책이 명저라고 하는 지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게 되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해 앎의 범위가 많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그리고 편향된 사고에서 보다 넓고 깊은 사고의 틀과 함께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음을 느낀다. 행복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부족함을 느낀다. 그에 더하여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체득하게 된다. 평생 배우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넓어지고 깊어가는 앎의 범위에 대해 행복해하고 즐거워 할 것이다. 이번 주는 저자인 아르놀트 하우저의 이 책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로 그의 독특하고 특별한 시각과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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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afds
2010.10.09 10:55:39 *.204.22.66
 The three secondary professions wow goldare fishing, cooking, and first aid. A player has to choose two primary professions and can train in all three secondary professions. Something that people do not care for with Diab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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