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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6일 10시 53분 등록
  북 리뷰 1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책: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박병규역. 민음사. 2008
원제: Confieso que he vivido. 1974



***저자에 대하여

시(詩)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이다.

다음은 1971년 12월 13일 그의 노벨상 수상연설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따금, 최상의 시인이란 우리가 일용할 빵을 마련해 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저 우리 곁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빵 굽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그것을 화덕에 집어넣어 노릇노릇 황금빛으로 구워낸 다음,동료의 의무로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건네주지요.”

“내가 복무하는 곳은 때때로 실수를 저지를 수는 있지만 , 그러나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변화에 저항하는 자들의 시대착오와 고집불통인 자들의 조바심에 맞서 매일매일 투쟁을 계속해가는 명예로운 군대입니다. 왜냐하면 장미꽃과 조화로움, 고양된 사랑과 끝없는 그리움 같은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찍이 내가 내 詩 안으로 끌어온 저 쉼 없는 인간사에 대한 연대감도 시인으로서의 나의 의무에 포함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도피중일 때 그를 보호하고 숨겨주었던 사람들은 네루다가 그들과 함께 머무는 것을 ‘그치지 않는 축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파블로 처럼 사는 법을 배웠다. 예를 들어 지극히 사소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쳐 준데 대하여 감사한다. 공원의 나무들, 바다에 있는 바위들, 낡은 책들 ,옷감들 ,냄새, 맛...그는 완벽한 단순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 어떤 현학적 태도도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학술적인 용어로 그와 어떤 이론을 따져보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요리법이나 옛날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에게는 지치지 않는 유머감각과 온화하면서도 강렬한 아이러니가 있었다. 그는 문학전공 학생들이 자기 시에 대해 쓰고 있는 논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무슨 일이건 최신의 소식을 가지고 있어서, 싸구려 신문의 주요 제목들 조차 훤히 꿰고 있었다.” 그를 잘 아는 인순사 의 말이다.

또한 네루다는 자기의 시를 단 한편도 외우고 있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 심지어 <황혼일기>의 작별 같은 시나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중 스무번째 시도 못 외웠다. 그런데 랭보의 시는 프랑스어 그대로 상당한 부분을 암송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한다. 재미있다.

네루다가 서술하고 받아쓰는 형식으로 저술된 이 책 외에도 그는 친구가 많았고 , 사회참여 또한 매우 열정적으로 하며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온 시인이어서 숱한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특히 그의 실수를 통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따라가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자료 또한 풍부하다.


***너무 유명한 네루다, 백과사전이 소개하고 있는 시인에 대하여.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7.12 칠레 파랄 출생~ 1973. 9. 23 산티아고에서 죽음.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on de la fiesta〉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 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 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 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 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네루다의 시 세계

네루다는 초기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에서 관능적 표현의 서정시를 주로 써서 당시 전통적이던 완곡한 애정 표현에 도전했다. 다음 단계에는 시집 '지상에서 살기'(1935)까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들을 썼으며, 스페인 내전(1936)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현실 참여의 시들을 썼다. 그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과 문학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시는 개인적 삶의 솔직한 기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발언이어야 한다. 시의 목적은 고백이 아니라 설득에 있는 것이다."
        (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문학교과서)


* 네루다의 다른 시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 별들은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그한테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잠겨.
광대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詩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어놓지 못한 게 뭐 어떠랴.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녀는 내 옆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내 눈길은 마치 그녀한테 가려는 듯이 그녀를 찾는다.
내 가슴은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같은 밤이 같은 나무를 희게 물들인다.
그때를 지나온 우리는 이제 똑같지가 않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얼마
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 거. 그녀는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지난날의 키스처럼.
그 목소리. 그 빛나는 몸. 그 무한한 두 눈.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잊음은 그렇게도 길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그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여자, 대지, 민중에의 사랑 ( 김경범/ 세종대 겸임교수/서문학 )


중남미 시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네루다에게는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그리고 가끔씩은 자연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고 비평가들은 그의 시세계를 둘이나 셋으로 혹은 다섯으로 나누며 불연속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시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언어의 대지 위에 아주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의 첫 번 째 사랑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여자의 육체 - 대지라는 다소 전통적인 도식이 보이지만 3천5백쪽에 달하는 그의 시 전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관념적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시인은 ‘봄이 벗나무와 하는 행위’에 목말라한다. 그러나 짧은 사랑은 절망과 고통스런 망각이 되고 시인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고 선언하며 절망의 노래를 끝맺는다. 그러나 이 시집이 실연의 상처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지로 이어지고 대지는 시라는 생명을 잉태한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된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바짝 마른’ 그의 조국의 바다, 바람, 비, 나무는 생명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며 빛나는 언어로 재생산된다.

이때 가끔씩 삶에 대한 염증을 내비치기도 한다. 다음은 『지상의 거처』에 수록된 「산책」의 한 부분이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에,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지의 생명력은 스페인 내란(1936-39년)이라는 계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킨다. 내란 중에 반파시스트 진영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그는 내란이 끝나자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 시적 승화가 『총가요집』 이며 특히 『마추피추의 산정』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절규하고 있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은 계속 된다. 다만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될 뿐이다. 즉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간다. 고양된 감정은 양말, 수박, 소금, 질산염, 밤, 책, 새, 나뭇잎, 양파, 과일, 엉겅퀴 속으로 투영되어 차분해지지만 의식은 여전히 투철해진다.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의 징조와 함께 사랑도 다시 시 속에 나타난다.



*** 편년체로 기록된 네루다의 일생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빠랄(Parral)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 성명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Jos del Carmen Reyes Morales). 어머니 성명은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또(Rosa Neftal Basoalto).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딸리 리까르도 레예스 바소알또(Neftal Ricardo Reyes Basoalto). 8월 어머니 사망.

1906년 아버지는 떼무꼬(Temuco.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 재혼. 몇 년 후 네루다를 데려감. 네루다는 1921년까지 떼무꼬에서 생활.

1910년 떼무꼬 남학교(Liceo de Hombres) 입학. 1920년 중등과정 수료. 조숙한 네루다는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1917년 7월 일간지 《아침》(La Ma ana)에 「열중과 끈기」(Entusiasmo y perseverancia) 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딤.

1918년 떼무꼬의 잡지에도 시를 발표.

1919년 잡지 《질주와 비상》(Corre-Vuela)에 시 13편을 발표. 아버지는 시인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함. 마울레(Maule) 백일장에서 3등으로 입상.

1920년 당시 떼무꼬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 중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을 알게 됨. 가브리엘라는 외롭고 수줍음 많은 청년 네루다에게 시인의 길을 가도록 북돋아 주었음. 당시 가브리엘라는 31살이고 네루다는 16살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눔. 10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19세기 체코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필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음. 떼무꼬 백일장에서 1등으로 입상.

1921년 불어 선생님이 되려고 수도 산티아고로 유학. 사법학교에 입학. 외롭고 배고픈 학생시절을 겪으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 10월 시 「축제의 노래」(La canci n de la fiesta)로 칠레 학생연맹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1922년 문학단체 브레미야(Vremia)에서 처음으로 자작시를 낭송. 우루과이 몬떼비데오에서 발간되는 잡지 《시대》(Los Tiempos)에 시가 게재됨.

1923년 8월 첫 시집 『황혼』(Crepusculario) 출판. 사츠카(Sachka)라는 필명으로 학생연맹 기관지 《끌라리닷》(Claridad)에 문학평론 등을 기고.

1924년 6월 자신의 연애 경험을 살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 n desesperada)출판. 섬세한 감성,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으로 네루다는 문명(文名)과 대중의 사랑을 한꺼번에 얻음.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집. 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시 창작에 전념. 시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아나톨 프랑스 시선집을 번역하는 등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 산티아고 일간지에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창작과정을 기술한 글을 발표. 네루다는 1974년 사후 출판된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에서 "청년 시절의 불타는 정열을 담고 있으며 [...] 흥건한 애상마져도 삶의 기쁨 속에 녹아있으므로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고 함.

1925년 문학지 《까바요 데 바스또스》(Caballo de Bastos)를 주관. 시집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발표. 이 시집의 인쇄일은 1925년이고 출판일은 1926년.

1926년 또마스 라고(Tom s Lago)와 공저한 산문집 『반지』(Anillos) 출판. 단편소설 형식의 문집, 『삶과 희망』(El habitante y su esperanza) 출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불어판에서 중역.

1927년 여전히 수입은 적고 생계는 어려움. 6월 14일 미얀마 양군 주재 명예 영사로 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마드리드, 파리, 마르세이유를 경유하여 랑군에 도착.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므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림. 조시에 블리스(Josie Bliss)를 만나 동거함.

1928년 스리랑카 콜롬보 주재 영사. 조시에가 찾아왔으나 영원히 헤어짐. 이 시기 네루다는 빈곤, 식민잔재, 정치적 탄압으로 질곡받는 동남아 민중들의 고난한 삶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낌. 네루다의 유명한 여성 편력이 고독과 가난의 산물이라면 반독재, 반제국주의 등 좌파적 성향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체험에서 유래함.

1929년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된 범힌두교 회의에 참석. 네루와 면담.

1930년 자카르타(당시 네델란드령 서인도제도의 수도)주재 영사. 이곳에서 마리아 안또니에따(Mar a Antonieta Hagenaar Vogelzanz)와 사랑에 빠져 12월 결혼. 이 여자는 네델란드 출신으로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

1931년 싱가포르 주재 영사.

1932년 두 달간의 여행 끝에 귀국.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시를 모아 1월에는 『열심히 돌을 던지는 사람』(El hondero entusiasta)을 출판하고 4월에는 또 하나의 명시집 『지상의 거처 (1925-1931)』(Residencia en la tierra)를 발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받은 이 시집은 전통적인 리듬과 시형식을 거부하고 문장 구조마져 파괴한 실험적인 작품. 네루다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무질서, 부패, 소외, 불안을 표현하려고 함.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부임. 그 때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던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 a Lorca)와 친분을 맺음. 이후 가르시아 로르까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34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사로 임명. 10월 마드리드에서 딸 말바 마리나(Malva Marina) 출생. 12월 6일 가르시아 로르까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 낭송회개최.

1935년 2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 ndez) 같은 스페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4월 『스페인 시인들이 빠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집』이 출판됨. 네루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인 께베도(Quvedo)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와 비야메디아나(Villamediana) 백작의 시집이 호화 양장판으로 출판됨. 9월 『지상의 거처』(1925-1935)를 두 권으로 발간.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네루다는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함. 수많은 시인, 작가, 문인들 또한 공화파를 위해 투쟁. 8월 프랑코(Franco) 장군 지지파는 그라나다에서 가르시아 로르까를 암살함. 폭격으로 마드리드 영사관 폐쇄. 네루다는 파리로 건너가서 낸시 큐나드(Nancy Cunard)와 함께 잡지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Los poetas del mundo defienden al pueblo espa ol) 발간. 마리아 안또니에따와 결별. 아르헨티나 출신의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을 만나 결혼.

1937년 4월 세사르 바예호(C sar Vallejo)와 함께 〈대스페인 원조 중남미 단체〉(Grupo Hispanoamericano a Ayuda a Espa a) 설립. 10월 칠레로 귀국하여 〈문화 창달을 위한 칠레 지식인동맹〉창설. 11월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Espa a en el coraz n) 발표.

1938년 〈스페인 공화국 지지 작가회의〉가 스페인 현지에서 개최됨. 아버지와 양어머니 별세. 8월 잡지 《칠레의 여명》(Aurora de Chile) 주간. 10월 칠레 인민전선(Frente Popular) 후보 뻬드로 아기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모임을 개최하고 행사시를 낭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지원.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마누에르 알똘라기레(Manuer Altolaguirre)가 『가슴 속의 스페인』을 발간. 공화파 군인들은 이 시집을 읽고 가슴이 에이고 목이 메었다고 함.

1939년 파리에 본부를 둔 스페인 망명단체 특별 영사로 임명. 연말에는 스페인 망명자들과 함께 위니펙(Winnipeg) 호에 승선, 칠레를 향해 출발.

1940년 1월 2일 칠레 도착. 스페인 비평가 아마도 알론소(Amado Alons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빠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Poes a y estilo de Pablo Neruda) 출판. 이 에세이는 빠블로 네루다 연구의 고전. 8월 16일 멕시코 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함. 네루다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한 사람 있는데 안타깝게도 옥따비오 빠스"라고 대답. 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유감이라는 뜻이다.

1941년 멕시코 국립대학(UNAM)에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헌시』(Un canto para Bol bar) 출판. 이 작품은 훗날 『지상의 거처 3권』에 수록됨.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를 사귐. 10월 멕시코 시티 근처의 꾸에르나바까에서 나치 추종자들에게 피습.

1942년 4월 쿠바 여행. 시 「스탈린그라드 찬가」(Canto de amor a Stalingrado)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멕시코 전역에 부착. 네델란드에 살던 딸 말바 마리나 사망.

1943년 『칠레 총가요집』(Canto general de Chile)을 비매품으로 출판.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시선집이 출판. 2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집단 시 낭송회 아메리카의 목소리(La voz de las Am ricas)에 참석. 멕시코, 파나마, 콜롬비아, 페루를 거쳐 칠레로 귀국. 가는 곳마다 정부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 페루의 꾸스꼬에 들러 마추피추(Macchu-Picchu) 유적을 둘러보고 깊이 감동함.

1944년 산티아고 시문학상 수상. 뉴욕에서 비매품으로 시선집 발간.

1945년 타라삐까(Tarapac ) 지역구 공화당 상원에 당선. 칠레 국가문학상 수상. 7월 8일 공산당 가입. 사웅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에서 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9월 『마추피추 산정』(Alturas de Macchu-Picchu) 집필. 나중에 『총가요집』에 수록됨.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1월 18일 멕시코 정부는 훈장(Orden Aguila Azteca)을 수여함.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Gabriel Gonz lez Videla) 후보진영의 홍보책임자로 임명됨. 체코슬로바키아, 네델란드, 미국, 브라질에서 시집이 번역, 출판됨. 12월 28일 법원은 빠블로 네루다로 개명을 선고함.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지상의 거처 3권』(Tercera residencia) 출판(이후 로사다 출판사는 네루다 시집을 도맡아 발간). 이 시집은 『분노와 아픔』Las furias y las penas, 『가슴 속의 스페인』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수록.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 시집. 10월 4일부터 검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엘나시오날》(El Nacional) 에 '만인에게 보내는 호소문'(Carta ntima para millones de hombres)을 게재. 이 글에서 네루다는 좌파와 협약을 준수하지 않는 비델라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시련을 겪게됨.

1948년 1월 6일 상원 연설. 이 연설문을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으로 출판. 2월 3일 대법원은 상원의원직 박탈. 2월 5일 체포영장 발급. 국내에 은신하면서 『총가요집』을 저술하고 대정부투쟁을 함.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담》(Adam)은 네루다 특집호를 발행.

1949년 2월 24일 한밤중에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 배낭 속에는 『총가요집』 원고가 들어 있었음. 4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평화 당원 대회에 참석. 6월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푸쉬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7월 폴란드와 헝가리 방문. 8월 폴 엘뤼아르와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가 병석에 누워 1연말까지 체류. 마띨데 우루띠아(Matilde Urrutia)와 재회. 독일, 중국, 체코, 덴마크, 미국, 소련, 쿠바, 과테말라,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시집 출판.

1950년 멕시코에서 『총가요집』(Canto general) 출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로 네루다의 대표작.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시께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가 삽화를 그림. 칠레에서도 지하 출판됨. 과테말라를 방문, 정부와 의회의 지원 아래 시낭송회와 강연회를 개최. 이어 프라하와 파리 방문. 10월 파리에서 프랑스 판 『총가요집』 출판을 승인. 로마를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만남. 힌두어와 뱅갈어 등으로 시집 출판. 11월 마띨데 울띠이와 함께 바르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평화 동지대회에 참석. 11월 22일 「깨어나라 나뭇꾼아」(Que despierte el le ador)로 국제평화상 수상. 이 때 피카소도 이 상을 수상했음. 멕시코에서 『총가요집』 보급판 출판. 미국, 소련, 중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인도, 스웨덴에서 시집 출판.

1951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tore Quasimodo) 등을 주축으로 네루다 시세계에 대한 좌담회가 열림. 5월 모스크바 방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시집 출판. 이디쉬어, 히브리어, 아랍어, 우즈베크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출판.

1952년 이탈리아에 거주. 『포도와 바람』(Las uvas y el viento) 집필 시작. 『대장의 노래』(Los versos del Capit n)를 익명, 비매품으로 출판. 이 시집은 마띨데 우르띠아에게 바침. 8월 체포영장이 취소됨. 8월 13일 귀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대시인을 맞이함. 부와 명예를 얻은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빠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무대)에 별장을 건축. 12월 국제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방문.

1953년 소련에서 귀국한 후 4월에는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문화회의(Congreso Continental de la Cultura)를 개최. 디에고 리베라, 니콜라스 기옌, 조르쥬 아마두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함. 산티아고에서 시선집 『모든 사랑』(Todo el amor)와 『정치시』(Poes a Pol tica) 출판.

1954년 1월 칠레 대학교에서 5회에 걸친 강연회 개최. 7월 『일상적인 송가』(Odas elementales)와 『포도와 바람』 출판. 7월 12일 탄생 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열리고 전세계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축하함. 칠레대학교에 장서를 기증. 칠레대학교는 네루다 재단을 후원하기로 약속함. 페르낭 레게의 삽화가 든 프랑스판 『총가요집』 출판.

1955년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과 이혼. 마띨데 우르띠아를 데리고 산띠아고에 새로 성주한 집(저택명 La Chascona)으로 이사. 년 3회 발행되는《칠레 소식》지 창간. 강연문등을 수록한 산문집 『여행』(Viajes) 출판.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여행.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꼬르도바 지방에서 잠시 체류.

1956년 1월 『신 일상적인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 출판. 2월 귀국. 9월 『인쇄술에 바치는 송가』(Oda a la tipograf a) 출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위대한 대양』(El gran oc ano) 출판.

1957년 1월 『전집』 발간. 4월 1일 아르헨티나로 여행. 4월 11일 아르헨티나 당국은 시인을 체포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감금. 칠레 영사의 항의로 석방. 네루다는 시낭송회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를 출국. 랑군 등 동양을 방문. 칠레 작가협회 회장에 피선. 12월 『송가 3집』(Tercer libro de las odas) 출판.

1958년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 8월 『에스뜨라바가리오』(Estravagario) 출판. 이 책에서 전 해 동양을 방문했던 인상이 투영됨.

1959년 5개월에 걸쳐 베네수엘라 여행. 카라카스 주재 쿠바 대사관에서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를 만남. 11월 송가집 『항해 그리고 귀환』(Navegaciones y regresos) 출판. 12월 마띨데에게 바치는 시집 『사랑의 소네트 100편』(Cien sonetos de amor)를 비매품으로 출판.

1960년 4월 12일 유럽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무훈 찬가』(Canci n de gesta) 탈고. 소련과 동구권을 거쳐 파리에서 한동안 체류. 피카소는 프랑스어판 시집에 동판화를 그려줌. 이탈리아에서 쿠바행 배에 승선.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을 축하하는 시집 『무훈 찬가』 1만 2천부 인쇄.

1961년 2월 귀국. 7월 『칠레의 돌』(Las piedras de Chile) 출판. 10월 『행사시』(Cantos ceremoniales) 출판. 예일대학교 로망스어 연구소 비상근 회원으로 임명됨.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백만부 재판. 미국에서 『네루다 시선집』(Selected Poems of Pablo Neruda) 출판.

1962년 3월 칠레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 니까노르 빠라가 환영 연설을 함. 이 연설은 『네루다와 빠라의 연설문』(Discursos de Pablo Neruda y Nicanor Parra)으로 출판됨. 4월 출국하여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를 여행. 9월 『충만한 힘』(Plenos poderes) 출판. 여행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발빠라이소(Valpara so) 소재의 저택으로 직행.

1963년 이탈리아에서 『요약』(Sumario) 출판. 이 책은 나중에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포함됨. 스웨덴 한림원 회원 룬트크비스트(Arthur Lundkvist) 는 「네루다」라는 긴 논문을 발표. 노벨문학상이 가까워졌음을 예고.

1964년 칠레 국립도서관 주최로 탄생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림. 7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Memorial de Isla Negra) 5권 발간. 9월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번역 출판. 네루다는 칠레 전역을 다니며 대통령 선거전에 열중함.

1965년 2월 유럽 여행. 6월 옥스포드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파리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 헝가리에서 아스뚜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와 공동으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Comiendo en Hungr a) 집필. 유고슬라비아 블레드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석. 레닌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방문,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수상.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귀국.

1966년 6월 펜클럽 특별 초청인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뉴욕, 워싱턴, 버클리에서 시낭송회 개최.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시낭송회 개최. 페루 문인협회의 추천을 받은 페루 정부는 훈장(Sol del Per )을 수여. 10월 외국에서 식을 올린 마띨데 우르띠아와 결혼이 합법화됨.

1967년 유럽 여행. 이탈리아에서 비아레죠(Viareggio) 국제문학상 수상. 극형식의 칸타타 『호아낀 무리에따의 치열한 생애』(Fulgor y muerte de Joaquin Murieta) 출판. 이 작품은 이 해 산티아고에서 초연됨.

1968년 『한낮의 손』(Las manos del d a)출판. 2월 우루과이 방문 강연회 개최. 4월 프랑스 정부는 퀴리(Joliot-Curie) 훈장 수여.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임명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학에서 낭송회 개최. 귀국. 잡지 《에르시야》(Ercilla)에 칼럼 기고.

1969년 부다페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 동시 출판. 5개국어로 번역됨. 『세상의 끝』(Fin de mundo) 출판. 5월 칠레 어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 킬레 카톨릭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 칠레 상원은 훈장(은메달) 수여. 7월 3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지명됨.

1970년 민중연합 단일 후보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박사를 추천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 유럽 여행.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연회 개최. 『불타는 칼』(La espada encendida)과 『해양 지진』(Maremoto) 그리고 『하늘의 돌』(Las piedras del cielo) 출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옌데 대통령은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 아옌데 정권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 정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1960년 쿠바 혁명과 더불어 아옌데 정권의 등장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함. 한편, 남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봉쇄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옌데 정권의 붕괴를 시도함.

1971년 1월 7일 빠스꾸아 섬(Isla de Pascua) 여행. 칠레 텔레비젼방송국은 도큐멘터리로 촬영. 1월 21일 칠레 상원 프랑스 대사직 승인. 3월 파리로 부임. 10월 2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12월 13일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는 수상 연설에서 194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림.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병이 깊어져 침대에 누운채 귀국.

1972년 소련 방문. 『무익한 지도』(Geograf a infructuosa) 출판. 10월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 선임. 암으로 투병하던 네루다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고 귀국. 국립경기장에서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림.

1973년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서 투병생활. 아옌데 대통령이 이슬라 네그라를 방문하려고 준비하던 2월 5일 파리 대사직 사임. 2월 『닉슨 암살 선동과 칠레 혁명 만세』(Incitaci 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 n chilena) 출판.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을 등에 업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 대통령 관저(일명 모네다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피살됨. 이날 산띠아고는 맑은 날이었으나 어느 라디오 방송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멘트로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타전했다고 함. 네루다, 9월 23일 산따 마리아 병원에서 영면.

1974년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이 사후 출판됨. 『노란 심장』(Coraz n amarrillo), 『질문』(Libros de las preguntas), 『비가』(Eglogas), 『간추린 결점』(Defectos escogidas) 출판.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모델이 되었던 알베르띠나 로사 아소까르(Abertina Rosa Az car)와 네루다 사이에 오간 편지가 『빠블로 네루다의 연애편지』(Cartas de amor de Pablo Neruda)라는 제목으로 출판.

                 -출처 : http://w1.hompy.com/hohotwo/bioneruda.htm
 

- 스페인 내전의 역사적 배경

1931년 스페인은 제2공화정을 수립한다. 공화정부는 토지, 교회, 군대의 개혁을 시도하지만 기득권 계층과 우익세력의 반발로 좌절된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에 모로코에 좌천되어 있던 프랑코 장군의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은 시작된다. 공화파 정부와 대립하던 대지주, 자본가, 교회, 군부가 호응하면서 내전은 확산되었다.

농민과 노동자가 중심이었던 민중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아라공, 말로,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이 총을 들고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고 그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보수와 진보, 파시즘과 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이 스페인 내전에 응축되었다. 그러나 민중은 패했다. 3년을 끌어온 내전은 공화파의 패배로 끝났다. 파시스트들의 국제적 연대가 공화주의자들을 압도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화력을 지원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반란군은 1938년 1월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켰고 1939년 3월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고 미국도 뒤를 따랐다. 내전 이후에 공화파에 대한 체포와 즉결처형이 줄을 이었다.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36년이라는 기간 동안 철권정치로 스페인을 통치했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노동자, 농민, 지식인)와 국가주의자(파시스트)간의 이념적 충돌이다. 내전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공화파 지원,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의 국가주의자에 지원이 대립하면서 전 세계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유럽각국의 문인들과 지성인,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스페인으로 달려가서 국제의용군에 입대한 것이다. 각국에서 온 이들은 언어는 다르지만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등지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런 사건은 과거에는 볼 수없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훈련도 받지 않았고 무장과 보급도 열악했지만 기꺼이 총을 들었다.

스페인 내전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게르니카 폭격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도시인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 공군기들에 의해 3시간동안 32t의 폭격을 받았다.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고 독일 공군기들은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1500여명이 살해당한 대학살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충격을 안겨주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프랑코 장군에 대한 나치의 지원이었지만 히틀러의 전력 테스트라는 설이 유력하다. 게르니카는 군사 기지도 아니었고 중요한 전략 요충지도 아니었다. 그런 게르니카를 나치가 폭격한 것은,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히틀러가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테스트였다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또는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희망’ 조지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클로드 시몽의 ‘농사시’ 카밀로 호세 셀라의 ‘파스쿠알두아르테 일가’ 등이 있다.


*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시골소년

14. 이 책에 수록된 회고랄까 추억은 듬성듬성하다. 간혹 잊어버린 일도 있다. 바로 그런 게 인생이다. 우리는 듬성듬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이 회상은 다르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준다.

나는 어쩌면 내 자신이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 지면에 남긴 내 글에서(가을철 수목이나 수확기의 포도처럼) 죽음을 맞는 노란 낙엽이 떨어질 것이고 신성한 포도주로 새 생명을 얻는 포도가 떨어질 것이다.

내 인생은 시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16. 칠레의 숲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삶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17.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25. 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33.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34. 나는 집으로 데려가려고 백조를 안았다. 그 순간 리본이 풀어지는 느낌, 검은색 팔이 내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백조의 긴 목이 축 처진 것이다. 그때 백조는 죽을 때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6. 나는 시적 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본 후에 되돌려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의논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문학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38. 정말 끝도 없이 무한하게 펼쳐진 해변이었다. 칠레를 감싸고 있는 해변은 행성을 두른 띠 같고 남극해의 표효에 시달리는 반지 같으며 칠레 해안을 돌아 남극 너머로 뻗어가는 경주로 같다.

2. 도시의 방랑자

56. 수줍음이란 마음이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이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66.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하며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칠레를 매우 사랑한 우나무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이성 또는 힘으로’라니. ‘이성으로, 항상 이성으로.’ 이렇게 말해야지.”

69. "이 철학서를 2월 24일 밤 루나 공원에서 나에게 야유를 퍼붓고, 또 나를 죽이라고 고함치던 4만 명의 개자식들에게 바친다.“-오마르 비뇰레의 <소와 나눈 대화> 중 헌사-

72.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내 시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더니만 이제는 나를 공격하고, 내 눈을 빼먹으려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내 침묵을 받을 만한 가치는 있다. 나는 적들과 다니면서 내 자신이 오염될까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오직 민중의 적만이 내 적이기 때문이다.

77. 첫 시집! “작가와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깍은 목각품이다.” 그러나 어떤 장인도 시인처럼 자신의 손으로 처음 창조한 대상에서 이러한 도취의 감정이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운 책이 되고, 시인의 언어는 향기를 품고 노래하는 포도주처럼 다른 언어라는 술잔에 옮겨져 지구 곳곳을 누비겠지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78.우리 시인들은 작품 가운데 단 한 편만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알레르기가 돋는다. 이러한 알레르기는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반응이다. 앞서 말한 독자들의 애착은 시인을 특정 순간에서 못 빠져나오게 만든다.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83.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3. 세계의 길

94.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 있는 공포의 꽃잎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웅이다.. 항구의 기억 속에 천재지변, 흔들리는 땅의 전율,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표효소리가, 마치 바다 밑 도시나 땅 밑 도시가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리며 인간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알려 주는 듯한 소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96. 계단!

어떤 도시도 발파라이소처럼 계단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는다. 어떤 도시도 자기 얼굴에 이처럼 고랑을 파 놓지 않는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내려가는 듯이 삶이 오가는 계단! 중간에 자주색 엉겅퀴 꽃이 피어 있는 계단! 아시아에서 돌아온 선원이 텅 빈 집이나 화목한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 술 취한 사람이 검은 유성처럼 떨어지는 계단! 태양이 언덕과 정사를 나누기 위해서 오르는 계단!

발파라이소의 계단을 전부 돌아다니면 세계를 한 바퀴 돈 셈이 된다.

98. 그때 발파라이소가 밝아 왔다. 처음에는 짙은 황금빛이더니, 이내 바닷가 오렌지나무로 변하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늘을 드리우고, 눈부신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다.

100. 나는 다만 종소리와 굽이치는 기복과 이름을 따라갈 뿐이다. 특히 이름을 따라간다. 이름에는 큰 뿌리와 잔뿌리가 있고, 공기와 기름기가 있고, 역사와 오페라가 있으며, 그 음절에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117. 결국 애국심을 가장한 이 엉뚱한 제안으로 우리는 타협점을 찾았다. 영사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영수증에 우리 서명을 받고 돈을 건네주었다. 실제 수령액을 세어 보니 영수증에 기입된 금액보다 적었다.

“그건 이자입니다.”라고 영사가 설명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 랭군에 도착해서 빌린 돈을 수표로 변제했다. 물론 이자는 제외했다.

4. 빛나는 고독

127.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37.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속이 텅 비고 온 몸이 나른해졌다.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이를테면, 팔꿈치나 목을 움직인다든지 멀리서 들려오는 마차 소리, 경적 소리, 길거리 사람들의 목소리라든지) 한데 어우러져 느긋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138. 몽롱한 침묵은 아편굴이라는 물웅덩이에 가라앉은 부서진 꿈의 침전물이다. 눈을 반쯤 감고 섬세하고 감미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는 그 사람들은 바다 밑에서 한 시간 동안 지내는 꿈을 꾸거나 언덕 위에서 하룻밤 지내는 몽환에 젖어 있었다.

142.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3. 소년인지 여인인지 떨리는 듯 흐느끼는 목소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음으로 치달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어둠이 물든 저음으로 내려왔고, 프랑기파니 향에 달라붙어 아라베스크처럼 굽이치다가 분수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수정처럼 맑은 높이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재스민 꽃 사이로 사그러졌다.

149.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는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5. 가슴 속의 스페인

179. 에르난데스는 종종 동물과 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마치 다듬지 않은 돌처럼, 순수한 숲과 굽이치는 생명력을 지닌 자연에서 솟아나온 작가였다. 잠든 암염소의 배에 귀를 대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지도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젖통으로 젖이 흘러들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인데, 저 염소 시인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일 것이다.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데를 키울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186. 로르카는 사방에 빛을 뿌리는 요정이었다. 가슴에 모아 둔 기쁨을 주변에 퍼뜨리며 행성처럼 삶의 행복을 반사하는 사람이었다.

로르카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8.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195.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209.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210.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1. 운 좋게도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알베르티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쓴 찬란한 시를 의미한다. 알베르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장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린 붉은 장미처럼 공고라의 눈송이, 호르헤 만리케의 뿌리,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꽃잎, 구스타보 아돌표 베케르의 서러운 향기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 시의 정수가 알베르티의 시라는 크리스털 잔에 녹아 있는 것이다.

214.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5.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는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이글라네그라에의 거친 해변과 사나운 물결 덕분에 나는 이 시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228.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228.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228.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28.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 했다.

229.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232. 멕시코는 진홍색과 번쩍이는 청록색이 어우러진 숄의 고장이다. 멕시코는 막사발과 항아리의 고장이고, 곤충이 갉아먹은 과일의 고장이다. 멕시코는 노란 가시와 강철처럼 파르스름한 잎을 자랑하는 용설란의 고장이다.

251. 역사는 정복자들이나 정복을 향유하는 자들이 쓴다.

254. 멕시코는 지금도 내 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독수리처럼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환한다. 이 독수리는 내가 죽은 다음에야 심장 위에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

8. 암담한 조국

256. 나는 돌로 만든 세계의 배꼽,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도 속해 있는 세계의 배꼽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나 자신이 초라한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득한 옛날 내가 여기에 살면서 밭이랑을 갈고 돌을 다듬은 것만 같았다.

257. 지금 이야기하려는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나와 인터뷰한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이탈리아 소설가)는 신문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259. 강가에 펼쳐진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 풍경이 말을 걸어 온다. 그러나 사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나는 사막의 언어, 다시 말해서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262.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았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262.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63. 내 시와 삶은 아메리카 대륙의 강처럼 흘러 갔다. 남반구의 깊은 산속에서 발원하여 쉼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칠레의 거친 물살처럼, 내 시는 그 물살에 떠내려가는 어느 것 하나도 배척하지 않았다.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었다

272. 칠레에서는 하찮은 돌멩이까지도 내 목소리를 알아먹는다…무성한 숲과 호수의 화산과 밤을 손아귀에 집어 넣은 빗줄기는 이 인간의 은신처가 다른 법을 따르고 또 자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격노한 나머지 계속 공격해 댔다.

286. "기자 양반. 이렇게 쓰세요. 나는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다른 칠레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쓰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이름 또한 파블로 네루다라고요."

291.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 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 주며, 식물 왕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

9. 망명의 시작과 끝

297. "나는 시의 미래를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나짐 히크메트-

298.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잔인한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집요한 식민주의자들과 온갖 종류의 우민화를 자행하는 세력에게 포위된 저 소련의 민중들과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문학이나 예술이 이처럼 본질적인 사안을 외면하고 공허한 자율성만을 고집해도 된다는 말인가?

300. 작가의 작업도 저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10. 여행과 귀환

341.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341.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또 대다수 사람들이 읽고 듣고 번영하기를 바란다.

342. 나는 지금까지 한 길을 추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이 우리 모두를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우리는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꺾을 수 없다.

349.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바위 꼭대기에는 신선의 도포 자락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동양화의 거장들이 즐겨 그린 그림이고 날아가는 새였다. 심오한 시는 이런 장엄한 자연에서 흘러나온다. 새의 날갯짓 같고, 고여 있는 듯이 흐르는 시냇물의 반짝거림 같은 간결하고 투명한 시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354. 스탈린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이며 우리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이 창조를 한 사람이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 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375.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우리 시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나는 칠레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포들에게 내 시를 뿌렸다.

11. 시는 직업이다

377.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독했다.

378.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고 있었다..사람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이런 걸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을 것이다.

386. 시는 이미 독자와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7. 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 당겨 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 또한 예상 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8.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하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

391.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그러나) 시인의 자부심은 보여주고 싶다…적어도 몇몇 작들은 신성한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다.

392.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3.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삐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394.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을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395.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성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서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 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는 자신의 시를 방어하기 위해 일반 대중이 부여한 자격을 등에 업었다.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해야 한다.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396.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휙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 그리고 감정이라는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신비한 영감이라든가 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은 불손한 의도를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순간에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압력이나 이전의 독서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얼마간은 타인의 것이다.

398.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때마다 2000년은 더욱 가까워진다. 2000년의 종소리,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이 시대의 우리 시인들은 노래하고 투쟁했다.

399.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

411. 인생이란 동반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 엘뤼아르

419. 나는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며 내 고향 아라우카니아의 나뭇잎으로 만든 향기로운 왕관을 드높이 쳐들어,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보낸다. 바람과 생명이 이 왕관을 살바토레 콰지모토의 이마 위에 내려놓기를 기원하면서. 그러나 이 왕관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초상화에서 흔히 보는 아폴로 신의 월계관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칠레의 숲 속에서 아직은 이름이 없는 나뭇잎, 남극 오로라의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으로 만든 왕관이다.

434. 시의 분자란, 꽃가루처럼 가볍든 납덩이처럼 무겁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다가 밭고랑이나 사람 머리 위에 떨어진다. 이러한 씨앗들이 봄기운을 만나면 꽃이 되고, 천장에서는 탄환이 된다.

436. 시의 영예란 거리에 나가서 이런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파괴 분자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았다. 생명은 모든 구조를 초월하며, 영혼은 새로운 규범을 찾는다. 씨앗은 도처에서 싹을 틔우며, 모든 생각은 이국적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며, 인간 질서의 변혁을 열렬하게 고대한다. 봄은 반역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446.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495.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496.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나는 군중이란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506. 낯선 식물이 도시의 담벼락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증오의 이끼였다.

517. (아옌데)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옮긴이의 말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 시가 뭔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

이처럼 네루다를 끊임없이 노래하게 만든 영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534. 거의 모든 비평가가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대자연이다. 산과 숲, 벌판과 꽃, 식물과 동물, 하늘과 땅, 비와 바람이다.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시에서는 물론이고, 끈끈한 고독이 묻어나는 시, 분노와 함성이 메아리치는 시,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의 소박한 정취를 노래한 시에서도 항상 텁텁한 흙냄새가 나고 신선한 초목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기에 네루다 또한 이렇게 고백한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535. 이 회고록에서 네루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중에 대한 사랑이다. 계기는 1936년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 네루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이렇게 사회와 인간에 눈을 뜬 네루다는 한평생 사회적 약자들, 버려진 영혼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노래하고 투쟁했다.

536. 히틀러와 프랑코로 상징되는, 전 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저항 세력이 공산주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마찬가지로 네루다에게도 공산주의는 권력이 아니었다.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파블로 네루다의 69년의 인생은 그자신이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만큼 세계사에 매우 가깝게 닿아있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우선 시인으로서의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칠레산 포도주와 여인과 노래를 뜨겁게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시를 사랑하고 민중을 사랑하고 친구가 많았던 네루다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그의 일생을 우리와 나누고 있다.

우선 이 책 <네루다의 자서전>은 그의 구술을 받아 적는 형식으로 짜임새없이 그의 마음이 가는데로 써놓은 글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척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삶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다. 아름다운 인생이고 아름다운 회고록이다.

내가 제2의 텍스트로 선택한 책은 시인의 탄생 백주년을 맞아 특별히 기획된 영어로 씌여진 최초의 네루다 전기이다. 참고자료가 매우 풍부하고 네루다를 기억하는 실존인물들의 인터뷰를 기록해둔 글이어서 모두 702 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애덤 펜스타인이 지었고 김현균 최권행이 옮긴, 생각의 나무에서 발행된 책이다. 원작이 2004년에 나왔고 2005년에 한국어로 간행되었다.

전기물을 계속 읽어오면서 이 두번째 책처럼 자세하게 한사람의 인생이 분석된다면 그 주인공으로서는 그다지 반가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지극히 서술적인 표현 방식때문인 것 같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네루다가 사랑했던 여인들에 대한 자세한 추적인데...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마치 사설탐정이 오랫동안 추적해온 것 같은 시간에 따라 사건을 분석하고 있다. 이럴때는 인터뷰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전하는 말의 뉴앙스도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인의 직관과 은유와 상징의 그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사실을 파헤치는 것은 마치 일요신문을 읽은 것처럼 씁슬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활동도 그의 흔적을 거의 정확하게 따라갔다. 한편으로는 유명세를 치루는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참 훌륭한 시인의 삶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우선 제목이 그냥 < 파블로 네루다> 다. 부제가 없다.

그 구성은 편년체이다.

1904-1920 비밀, 그림자, 포도주 그리고 비 25
1921-1927 산티아고의 보헤미안 59
1927-1932 아시아의 고독 99
1932-1934 귀향, 새로운 투쟁 그리고 부웨이노스아이레스 145
1943-1937 스페인의 비극- 터닝 포인트 179
1937-1940 생명구출의 임무 221
1940-1943 멕시코의 매혹, 결혼 그리고 비극적 전보 251
1943-1948 풍요로운 맞추픽추 산정에서 흙먼지 이는 지상의 가난으로 283
1948-1949“눈먼 쥐들의 해”-네루다의 도피생활 329
1949-1952 델리아와 마틸데-동우럽의 곡예 385
1952-1959 승리한 영웅 돌아오다 457
1959-1966 새로운 체제 519
1966-1968 또 다른 쿠바위기 553
1968-1972 노벨상 그리고 최후의 열정적 사랑 579
1972-1973 마지막 시간-독수리의 혼 629

이상이 제 2 텍스트의 차례이다. 매우 독특한 분류이며 목차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시인 네루다의 움직임이 거의 물샐틈없이 보고되고 있다.

피카소와의 교유와 우리가 알고있는 수많은 작가들과의 교류, 한번씩 파티가 열리면 2-300명은 거뜬히 모이고 언제나 그의 집을 개방해서 함께 시를 낭송한다든지 토론을 하는 것은 한편 부럽기도 한 고급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교류의 장이 아니었을까 부럽기도 했다.

특히 민중을 감싸안고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서 항상 그들의 편에 서 있는 시인에 대한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소외되고 가난한 민중은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마음을 뜨겝게 토해내는 네루다의 시를 듣고 따라 읊으며 온갖 위로와 공감받는 기쁨을 누리니... 정말 시대와 함께가는 칠레, 남아메리카의 땀과 눈물과 피마저 시인과 함께 춤추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감수성과 전기작가의 객관성을 나란히 놓고보는 사람읽기의 다면적 각도가 또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한편 시인의 시가 씌여진 시기와 발표된 시기,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분석해보면 그 시에서 좀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다. 아직은 우리나라에 그의 모든시가 다 들어와 있지 못해서 좀 어렵겠지만 마음먹으면 해볼 수 있는 작업이란 생각도 들었다.

한편의 소설처럼 흥겹게 읽어내린 네루다의 자서전과 꼼꼼한 사실의 기록을 따라간 객관적인 작가의 눈이 이 “내가 저자라면..”을 보는 방법 하나를 새롭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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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6 18:21:23 *.12.21.21
다양한 각도의 네루다에 대한 정보가 유용하네요. 자신의 시를 한편도 못 외웠다는 사실도 재밌네요. 저는 유럽에 있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놀랍더라구요.  스페인 내전 자세히 알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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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0:27:50 *.40.227.17
역시.. 좌샘의 저자 리뷰는 탁월하세여~^^

한 두권의 책이 더해져서는 이러..이러..이럴 수가 읍어여~
좌샘의 내공과 너른 안목에 어머..어머.. ^^

지식의 샘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 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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