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쭌영
  • 조회 수 35932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1월 5일 10시 31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프리드히리 빌헬름 니체 (1844 ~ 1900)

신은 죽었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니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를 마련하고, 기독교를 정면으로 부정했던 그는 사실 굉장히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니체의 할아버지는 목사였으며 니체의 아버지 역시 목사였다. 니체는 평범한 시골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첫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기독교와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던 니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목사였던 사실은 의외이다.

니체의 아버지는 1848년 독일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던 다음해에 죽었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근시였던 아버지가 강아지에 발이 물려 현관 돌계단에 굴렀고, 그때 뇌진탕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니체가 겨우 다섯살때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였던 950년에는 두살이였던 막내 요제프가 치아가 원인이 되어 갑작스런 경련을 일으켜 죽게 된다. 년이어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게 되었던 니체 가족은 그 저주스런 땅을 뒤로하고 자레 강변의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간다. 이때부터 니체는 6명의 여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니체는 특히 누이 여동생이였던 엘자베트와 사이가 좋았다. 누이동생 엘자베트는 니체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였는데, 후에 니체를 연구하는데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여동생 엘자베트는 마음속으로 니체를 존경했고, 니체 역시 여동생을 살갑게 대했다. 성인이 된 니체와 루와 연애할 때 니체와 함께 집에서 살았으며, 병원에 있을 때 역시 그를 극진히 수발하였다. 또 훗날 여동생과의 각별한 인연은 계속된다.

하지만 니체의 여동생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남편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니체가 죽고 나서 니체의 저서들을 왜곡하였다. 히틀러에게는 니체의 초인이 당신을 염두해둔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때문에 니체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였던 사상은 히틀러에 의해 악용되기도 한다.

니체의 유년기는 포르타 학교를 다니면서 고전 교양의 기초를 다끈다. 그 외에 다양한 교양을 배우게 된다. 이 시기에 종교에 회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고 고전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학교에 주는 교육과 지식에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와 진로에 대해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1864년에는 라인 강변의 대학가에 있는 본 대학에서 문헌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신학은 어머니와 타협을 하기 위한 학문이였던 것이였는데, 1865년 부활절 휴가 때 니체는 신학을 포기한다고 어머니에게 말한다.  그 이후 기독교와 결별하고 예배도 참석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니체는 대학에서 성실히 공부하여 리즈 교수의 신임을 얻게 된다. 1865,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고 감명을 한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본의 아니게 보통의 학생생활에 적응하려고 했다가 자신의 참모습을 잃을 뻔 했던 본 시대의 생활을 회상한 당시의 니체가 자기혐오를 느꼈던 것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저한 결벽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어두운 결론이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자진해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성실한 구명심에 대해 니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8년에는 리츠 교수 부인의 소개로 라이프치히의 브로크하우스 저택을 방문 중인 바그너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는 바그너와 소울메이트 관계를 맺게 된다. 또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서 바젤 시절에 몇개의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그너가 점점 기독교화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인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그 이후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출판된 저술만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편의 책을 저술한다. <반시대적 고찰>을 써서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였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통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 이시기에 루 살로메를 만나고 청혼을 시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879,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바젤 교수직을 사퇴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나이 35살의 이야기이다. 그 이후 그는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생의 마지막 1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그의 어머니가 니체를 병수발하였고, 어머니가 죽고나서는 동생이 간병을 하게 되었다. 1900년 니체는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묻었다.

 

저서

1872 :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3~6 :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

1873 :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David Strauss: der Bekenner und der Schriftsteller)

1874 :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Vom Nutzen und Nachtheil der Historie für das Leben)

1874 : 3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ls Erzieher)

1876 :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in Bayreuth)

1878~9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81 : 《아침놀》(Morgenröte)

1882 :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3~5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

1884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1885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 (비공개 출판)

1886 :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개정판 서문

1887 : 《즐거운 학문》 개정판 서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8 : 《바그너의 경우》(Der Fall Wagner),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디오니소스 송가》(Dionysos-Dithyramben), 《니체 대 바그너》(Nietzsche contra Wagner)

 

 

 

. 내 마음을 무찌러드는 글귀

148,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풍요와 활력에서 철학을 할 수 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버팀목으로든, 진정제, , 속죄양, 기분전환, 혹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수단으로든지 간에 아무튼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편 후자에서 철학은 아름다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승리감에 도취한 감사의 기쁨이며, 그마저도 결국 개념의 하늘에 우주적 대문자로 새겨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2, 우리는 낡은 껍질을 벗고 좀더 민감해지고, 더 심술궂은 사람이 되고, 기쁨에 대해 더 섬세한 취미를 갖고 좋은 것들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좀더 명랑한 감각을 지니고 기쁨 속에서 두 번째의 좀더 위험한 순진함을 지난, 좀더 어린애 같으면서도 그전보다도 백 배나 더 섬세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183, 우리는 모두 비밀 정원이나 밭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 말리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분출할 때를 기다리면 성장해 가는 활화산과 같다. 다만이 분출의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차도.

187, 우리는 낡은 것,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에 점차 권태를 느끼며 다시 다른 것에 손길을 뻐친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생활한 뒤에는 더 이상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의 먼 해변이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은 소유됨으로써 대개 시시해진다.

199, , 그것은 죽음을 우리 몸으로부터 부단히 떼어 놓는 과정이다. ,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약해지고 늙은 것들에 대하여 잔혹하고 인정사정 없이 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그것은 죽음에 이른 것, 초췌해진 것, 늙은 것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없다는 말 아닐까? 결국 부단히 살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모세는 말한다. ‘살인하지 말라!’

200, 정치가처럼 명성이 필요한 모든 저명인사나 동지나 친구를 선택할 때는 반드시 숨겨진 속마음이 있다.

205, 노동자는 보통 고용주를, 단순히 교활하고 착취하며 모든 궁핍을 돈벌이 기회로 이용하는 비굴한 인간으로 본다. 여기서 그 인간의 이름, 인품, 의로운 행동, 평판 등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214, 이런 고민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고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보태려는 힘을 느낀다면, 그들은 또한 자기 특유의 내면적 고민을 창조하는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들의 창조물은 더욱 정교해지고, 그들의 만족은 좋은 음악과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세계를 고뇌의 부르짖음으로, 지나치리만치 고뇌의 감정만으로 가득 채워 버리고 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불행을 벽에 그린다. 그들은 항상 타인을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또 다른 타인을 필요로 한다! 나의 친구들이여, 용서해 다오. 내가 감히 나의 행복을 벽에 그리려는 것을.

222, 내가 이제까지 가장 노력했고 지금도 가장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보다 사물이 무엇이라 불리는가 하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일이다.

223, 그들은 이러한 자연과 그 메커니즘을 되도록 감추고 꿈속에서 생활했다. 아아, 이들 과거의 인간들은 꿈꾸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꿈을 꿀 때 꼭 잠자리 들 필요는 없었다! 또한 우리 오늘날의 인간 역시 깨어 있는 낮 시간을 요구하는 좋은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아직도 너무나 잘 꿈꾸는 법을 알고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열망하기만 하면, 즉 느끼기만 하면 갑자기 꿈꾸는 정신과 힘이 우리를 덮친다.

226, 그녀는 지금까지 성격으로 위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랑에 냉담한 듯 위장하는 것이? 사랑? 희국이여 영원하라!

230, ‘덕망 있는 어리석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유된 신념의 신봉자들을 같은 장소에 모여 계속 춤추게 할 수 있는, ‘완만한정신을 지닌 둔감한 메트로놈이 필요하다. 그것이 여기서 요구되고 또 청구되는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 타자는 예외이며, 위험 인물이다. 우리는 어떠한 세상에서도 변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예외를 위해 약간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예외가 규칙이 되려고 하지 않는 안에서이다.

233, 자연으로부터 일탈은 아마도 인간의 긍지를 북돋우는 가장 기분 좋은 만찬이 될 것이다.

234, 아테네인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극장에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소포클레스가 노렸던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이었다! 나의 이러한 이단적인 견해를 관대하게 용서해 달라!

235, 논리란 그들에게는 빵이나 물처럼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순전히 그것만을 섭취해야 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죄수의 음식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다.

237, 시의 기원에 관하여_시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던 저 고대에도 사람들은 결국 이익을 안중에 두었던 것이다.

239,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찬미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것뿐이다.

242, 우리가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정체를 폭로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서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244, 실제로 사람들은 좋은 시를 마주 대했을 때에만 좋은 산문을 쓰는 것이다!

250, 이 철학자의 이렇나 종류의 탈선이나 악덕은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탈선이나 악덕은 항상 가장 쉽게 모방되고, 오랜 준비훈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1, 유대인에 대한 바그너의 증오는 쇼펜하우어적이다. 유대인의 가장 위대한 행위조차 바그너는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실로 그리스도교의 발명자가 아닌가!

269, 붓다가 죽은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 세기 동안 동굴 안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했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이기에 분명 앞으로도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온갖 동굴이 존재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계속 신의 그림자를 정복해야만 한다!

257, 독일인도 아름다워진다! ()가 그 매혹적인 영향 'I융 독일인들에게까지 미치는 것 같은 그러한 절정의 예감이, 독일 예술가들을 고양하고 지고의 고귀함과 분방한 정열로 몰고 간다. 다시 말해 추함과 어색함을 넘어로 - 보다 좋고, 보다 가볍고, 보다 남국적이고, 보다 햇빛 비치는 세계 저편으로 까고자 핸, 아니면 하다못해 그쪽을 엿보기라도 하고자 하는 실로 깊은 바람이 그들을 내모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경련은 종종 단지 그들이 춤추고 싶다는 징후에 불과하다. 그 내부에서는 숨겨진 님프들과 숲의 신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때로는 보다 높은 신들도!

269, 붓다가 죽은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 세기 동안 동굴 안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했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이기에 분명 앞으로도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온갖 동굴이 존재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계속 신의 그림자를 정복해야만 한다!

275, 우리는 본 것을 과거의 모든 경험에 의존하여 새로운 상으로 구성해 낸다. 우리의 정직과 정의의 수준에 따라 했던 경험에 의존해서. 모든 경험들은 감각적 인식의 영역에서조차 도덕적 경험들이다.

275, 인간은 오류를 통해 배우곤 한다.

276, 도덕성을 개인들 속의 군집본능이다.

276, 과거 인류의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재했던 양심의 바늘은 현재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느낀다. 아울러 자신 속에서 자부심을 발견한다. 모든 법학자들은 개인의 이러한 자부심과 즐거움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277, 우리는 호의 속에서 소유하려는 충동이나 복종하려는 충동을 구별해야만 한다. 즉 강자와 약자가 각각 호의를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렇게 해양 한다. 어떤 존재를 자신의 한 기능으로 변형시키려고 하는 강자에게는 기쁨과 욕망이 함께 나타난다. 반면 하나의 기능이 되고자 하는 약자에게는 기쁨은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바람과 함께 나타난다.

279, 그리스도교도 역시계몽을 위해 큰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매우 통렬하게 효과적으로 도덕적 회의주의를 가르쳤다. 즉 불굴의 인내와 교묘함을 발휘해 인간을 비난하며 한층 더 비참하게 하였다.

287, 이에 반해 그리스인들은 차라리 죄는 하나의 고귀함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인식을 지녔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이 경우에서처럼 도둑질조차도, 또 아이아스의 경우처럼 미칠 듯한 질투심의 표현으로 가축을 무분멸하게 살해하는 것조차도, 그리스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의 위엄을 창안하려는 욕구에서, 또 그 안에서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려는 욕구에서 비극을 창작하게 되었다.  반면에 모든 문학적 재질들과 숭고함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비극에 내재된 심오한 본질을 알지 못했다. 그 비극은 하나의 예술이요 쾌락이다.

295, 너희는 술에 취해 종종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을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취한 덕분에 떨여져도 갈비뼈를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너희 근육은 너무 느슨해져 있고 너희 두뇌는 너무 어리석어, 계단의 돌들이 얼마나 딱딱한가를 알지 못한다. 너희에 비해 우리에게 인생은 커다란 위험이다. 우리는 유리로 만들어졌으니까. 단지 서로 쿵하고 부딪치기만 해도 우리는 고통스럽다! 만일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296, 에고이즘은 감정의 원근법이다. 가까운 것일수록 크고 중요해 보이며, 반대로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 그 크기나 중요성은 줄어든다.

296, 위대한 승리의 가장 좋은 점은, 그 승리자에게서 패배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져도 괜찮지 않을까? 나에게는 지금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있다.’

298, 자신을 깊이 있게 알고 잇는 사람은 명석함을 얻기 위해 힘쓴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는 사람은 애매함을 얻으려 애쓴다. 대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든지 깊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301, 그는 사상가이다. 이것은 사물을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보다 더욱 단순화하는 법을 그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304, 그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아이를 갖지 않기를 바라자. 그는 아이에게도 질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아이가 될 수 없으므로.

305, 어떤 현자가 어떤 바보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 바보는 가장/싸운 도시로 가는 길이라도 가르쳐 주듯 바로 대답하였다. ‘너 자신을 찬!빠는 것, 그리고 번화가에서 사는 것이다.’ ‘기다려!’ 현자가 외쳤다.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하는구나. 자신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바보는 반격했다. ‘하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경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찬미할 수 있겠는가?’

305, 덕은 오직 그 덕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행복과 축복을 내린다. 그러나 자기에 대하여, 또 모든 덕에 대하여 깊이 불신하는 데에서 자신의 덕성을 발견하는 보다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 결국축복을 내리는 것은 신앙이지 덕이 아니다!

310, 나의 지식에 대한 욕망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는 이미 나에게 속해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물로부터 얻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것은 그 상태 그대로 사물 가운데 남아 있다. 한 인간이 도둑이나 강도가 되는 것 따위가 애초에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311,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숭배자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고통을 11눈다. 그들은 사명에 따르는 희생이나 헌신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 견딜 수 없는 몇몇 순간에 나타나는 천하고 쓸모 없는 격앙 때문에, 요컨대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회의 때문에 가장 격렬하게 고통받는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동정을 느끼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동안은, 행 사하고 위대하다. 그러나 제우스를 시기할 때, 그리고 인간들이 제우스에게 바치는 존경을 질투할 때 그는 고통당한다!

326, 이들 홀이나 정원에서 산책할 때, 우리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돌이나 초목으로 바꿔 우리 자신 안으로 산책하기를 바란다.

327, 정신의 어떤 태도들 때문에 위대한 인물조차도 그가 천민이나 반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곤 한다. 무엇보다도 그 점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 사상의 걸음걸이이다. 그들은 걸을 줄 모른다.

341,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나는 싫어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면에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해서 하도록 하고, 밤은 밤대로 그것을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그리고 그 일을 되도록 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선동하는 도덕이다.

342,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가 내버려 두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 둔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요 나의 신조, 플라시툼이다. 반대로 나는 누을 크게 뜨고 자신의 영락을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부정적인 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덕의 본질은 부정과 단념이기 때문이다.

354, 이익을 좇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끈임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언제나 정신을 기진맥진하도록 소모해 버릴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한 미덕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해치워 버리는 것, 그것이다.

356, 인식은 비웃고, 한탄하고, 욕하고자 하는, 서로 모순관계에 잇는 여러 충동으로부터 생겨나는 결과가 아닐까?

356, 음악의 눈길이나 표정을 견디며 잘 응대해 주어야 하고, 그 기이한 점도 관대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우리가 음악에 길들여진 순간, 다시 말해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없으면 적막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세상으로부터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원하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감동한 연인들이 될 때까지, 그 음악은 우리를 강제하며 박력있게 매료하기를 계속한다.

357, 우리는 결국 생소한 것에 대해서 우리의 선의와 인내, 공정함, 부드러움을 베푼 보상을 받는다. 점차 그것은 베일을 벗고 그려낼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다.

365, 소크라테스, 그는 삶을 고통스럽게 견뎌 왔다! 게다가 그는 이에 복수를 했던 것이다-이 완곡하며 무시무시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동시에 모독적인 말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조차 그러한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지나칠 만큼 넘치는 그의 덕목들 안에서도 조금의 관대함이 부족했던 것인가? - ! 친구여, 우리는 그리스인도 극복해야만 한다.

367, 나 또한 너처럼 몰락해야만 한다! 나는 내가 이제 내려가고자 하는 곳의 인간들이 말하는 대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388, 도덕적 위장이 필요한 쪽은 무서운 맹수가 아니라 심각한 평범함과 불안, 권태를 지닌 무리동물이다. 도덕이 유럽인들에게 화장을 시키고 그것을 고백하자 그들을 더욱더 고귀하게 중요하게 당당하게신성하게보이도록 꾸미는 것이다.

395,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사회를 이루는 재료가 아니다. 이 것이 이 시절의 진리이다!

404, ‘목표목적이라는 것은 흔히 배가 우연히 급류에 휘말려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는 허영심에서 비롯된 자기기만, 즉 현실을 미화할 핑계가 아니던가? 배가 거리고 갈 수 밖에 없는 까닭에 거기로 가려 한다는 것. 분명히 방향은 잡혀 있지만 전혀 키잡이는 없다는 것, 이런 사실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허성심이 사후에 만들어 낸 자기기만이 아닌가? 우리는목적이라는 개념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409,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사상으로 더듬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문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걸으면서, 뛰면서, 오르면서, 춤추면서, 우리는 즐겨 적막한 산이나 바닷가의 길을 사색하며 걷는다. 길조차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길가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 인간, 음악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걸을 수 있는가? 더욱이 춤출 수 있는가?’

430, ‘내 참을성 없는 친구들이여! 좋다! 누가 너희에게 반대하겠는가? 내 피리는 이미 기다리고 있다. 내 목청 또한 그렇다_단지 그것은 조금 거친 목소리가 날지 모르지만 참아달라! 사실 그 때문에도 우리는 산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너희가 듣는 것은 새롭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수를 오해한들 신경 쓸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이가수의 저주라는 것이다. 너희가 그의 음악이나 곡조를 잘 알아들으면 알아들은 만큼, 그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한층 잘 춤출 수 있다. 그대들은 그것을 원하는가?.

336, 반면에 나는 지속적인 습관을 싫어한다. 마치 폭군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지속적인 습관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사태에서, 나는 내 신변의 공기가 나를 짓눌러 오는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관직이나, 똑 같은 인간들과 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 고정된 주거, 변함 없는 건강 등이 그런 것들이다.

 

 

 

. 내가 저자라면

책이 참 어렵다. 백년전 책이여서 문체나 스타일이 달라서 그런건가? 아님 해석이 세련되지 않았던 건가? 글의 구성이 좀 특이했나? 아니면, 니체가 어렵게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던건가? 딱히 잘 모르겠지만 전공서적 읽는 것과 다른 답답함을 느꼈다.

거기다가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곱씹어야 할 부분을 자꾸 넘어가게 된다. 두번, 세번 읽어보고 책을 덮고 생각해봐야 하는 문장들은 그냥 이해하지 못한채 넘어갔다. 한번에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체없이 포기했다. 소화가 되지 않은 고급 스테이크처럼 지금의 나에게 맞지 않은 음식 같았다. 읽는 내내 답답하고 힘들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지금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그냥 책장을 넘기고 있는건지 모를 정도였다. 그냥 나중에 여유있을 때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며 위안을 했다.

고해성사 하듯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니체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였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존경받는 그를 이렇게 드문드문 안다는 게 미안했다. 일생을 거쳐 사유하고 고민했던 그의 주장들을 곱씹지 않는 것도 미안했다. 과연 이 책이 밀린 숙제하듯 급하게 읽어도 되는건지도 미안했다. 니체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계속 느꼈다.

하지만 일주일의 기간동안, 그것도 피곤이 몰아치는 퇴근시간 짬을 내어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정도였다. 니체에 대한 미안함과는 별도로 짜증과 무력감이 번갈아 찾아왔다.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렇게 읽어도 되는지 고민과 자책의 연속이였다.

책은 그가 생각나는대로, 사유한대로 기록한 것처럼 보였다.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과 연관성이 적어서 부담없이 읽을수 있는 반면, 집중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시집말고는 이런 식의 책 구성을 접해보지 못해봐서인지 무척 낯설었다. 무엇보다 니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어렴풋이 느껴질 뿐 명확하게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짧은 기록들, 그의 순간의 생각들을 통해, 책 한권을 통하는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번 리뷰를 하면서 인문학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니체가 왜 <즐거운 지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당시의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중에 반드시 따로 곱씹으면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

IP *.251.224.3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