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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3일 17시 59분 등록
난중일기 - 이순신 / 노승석 역

저자연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충무공은 한명의 저자로 폄하(?)시키기엔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위인이다. 심하게 과장한다면, <성경>에 대한 북리뷰를 작성한다고 저자연구에 하느님에 대해 끄적거리는 꼴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무지막지한 과장임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은 변경연 연구원 북리뷰 커리큘럼에서 까다로운 저자연구의 대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충무공의 생애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무슨 일을 했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온국민이 다 아는 사람은 단언컨데 충무공 이순신 말고는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충무공 이순신만큼 신격화된 존재는 없다고 본다. 그런만큼 그에 대해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쓰는 나도 손가락 아프지만, 보는 사람들도 시간낭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를 한번 되짚어 보자.

이순신은 그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1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강직하고 원칙적인 섬품은 당시 썩어있던 벼슬아치들과 많은 트러블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이순신은 좌천과 승진을 거듭해가며 1580년 수군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구태의연한 상식이 무색한 위인이었다. 썩어빠진 세상에서는 이름을 날리기는 커녕 밥먹고 살기 어려운 스타일이지만, 그 강직함은 난세를 만나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이순신이 미관말직에 머무르고 있을 당시, 그 당시 최고의 핫 셀럽이었던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만나자고 청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가문(덕수 이씨)라는 이유로 만남을 고사한 것은 그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혼탁한 세상에서는 청렴하고 강직한 이들이 남들로부터 욕을 먹는 법이다. "쟤는 뭐가 잘나서 왜 저리 뻣뻣하냐, 참 인생 피곤하게 사시네"라는 말을 들으며, 범인들에게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그냥 손가락짓만 당했으면 괜찮았겠지만, 그 강직함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못난 상관들 덕분에 이순신은 좌천에 백의종군을 거듭하며 험난한 벼슬 생활을 이어간다. 그가 미관말직이라도 안 짤리고 녹봉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능력보다는 당시 중앙관료계의 초절정 엄친아이자 그의 절친이었던 서애 유성룡 덕이 컸다.

풍파로 얼룩진 벼슬생활을 계속한지 15년만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 그의 나이 46세였다. 거대한 국난이 다가오기 바로 얼마전 그가 수군의 지휘관이 된 것은 외부의 위기를 대비하기는 커녕 당쟁으로 삐그덕거리고 있던 조선에게 있어 천운과도 같았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일본군이 상륙하면서 조선 최대의 국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7년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은 초토화된다. 전쟁 발발 후 보름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일본군은 그들이 큰소리 친대로 조선을 발판삼아 명나라를 먹어치우기 위해 거칠 것이 없는 진격을 이어나간다. 이순신은 그 해 5월 7일 옥포해전부터 승전보를 울리며 조선군에게 반전의 교두보를 마련해주기 시작한다. 그가 전라도 일대의 바다를 장악했기 때문에, 육로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병참과 수송에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전쟁의 국면을 바꾸게 된다. 드러나는 탁월한 성과에 아무도 이견을 달수는 없었던 바, 이순신은 왜란이 일어난 지 1년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의 모든 해군을 통솔하게 된다.

하지만 1597년 1월,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된다. 그는 혹독한 옥살이를 한 후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백의종군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그는 골수까지 저리는 아픔을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 1597년 4월 13일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 1597년 4월 16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 1597년 4월 19일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1597년 일본군의 재침으로 재개되고,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던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조선의 수군은 궤멸된다. 상황이 악화되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 해 8월,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과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그 임명 교서에 적고 있다. 그 다음 스토리는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순신은 꼴랑 13척 남은 함선을 주워 모아, 9월 16일 명량에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둔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념을 가지고 맨몸으로 모든 압박과 고난에 부딪혀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원한을 품은 일본군이 그의 아산 본가를 급습함으로써, 그는 식솔들과 그가 아끼던 막내아들 면을 잃게 된다. 그에 대한 찢어지는 슬픔 또한 난중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 1597년 10월 14일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노량에서 적선을 격침하던 이순신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선상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가 맞을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왜일까... 전란이 끝난후에까지 살아남았다면, 그는 아마 또다시 닥쳐올 오욕의 세월을 견디기 힘들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임진년 1592년

정뭘

p13 초1일 -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 난중일기 전체를 걸쳐 어머니에 대하 극진한 효심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효심으로 출발!

p15 16일 -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랍시고 선생원에서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2월
p19 초10일 - 봉사(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 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다. 그 흉악함은 참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 시대상황을 보면 조선은 붕당정치로 개판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일본은 이미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까지 한 상태였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정치가들은 목전으로 닥친 위기보다는 편을 갈라 싸움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새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현재도 흔히들 보는 정치꾼들의 작태와 마찬가지다.

p21 20일 - 늦게 출발하여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 여기서 말한 영주는 중국전설에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흥양을 영주라 부르기도 했으므로 이순신은 이를 비유한 것이다

p23 26일 - 장전과 편전은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걱정했으나 전투선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기쁘다
> 이순신은 전쟁을 직감하고 있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하다

27일 -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3월
p25 초 4일 -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한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 하니 다행이다
>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전인데, 승군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승군이 조직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각절에 편재된 승군들을 예비군처럼 데려다가 군역을 시킨 것으로 보인다.

4월
p33 16일 - 부산의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 4/13일 20여만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다.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질긴 악연이 거국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p35 20일 - 큰 적들이 치열하게 몰아쳐 와 그 앞을 막아낼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가지고 와서 지원해달라는 일로 장계 올리기를 청한다고 했다.
> 왜군은 보름만에 한양까지 진격하는 초스피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수십년간의 자국내 통일전쟁으로 단련된 왜군들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5월
p36 1일 -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현감 배홍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p39 29일 -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 난중일기에 묘사된 첫 전투의 승전보!

6월
p40 초2일 -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을 되겠고, 그 누각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 승전보는 계속된다! 이리 통쾌할 수가!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50부작을 마라톤하듯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p44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 충의지신이라

p48 국가가 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바로 이는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 기맥만 남아 있는 구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간신히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593년 계사년
2월
p59 21일 -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p70 일의 형세가 지체되어 5월 29일 새벽에 다만 신의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곤양과 남해 땅 노량에 이르렀는데, 경상우수사 원균이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원균은 패군들이 떠난 뒤로 군사 없는 장수가 되어, 별로 지휘할 일이 없었습니다
> 사실을 그대로 보고한 서신이겠지만, 원균에 대한 적의가 느껴진다. 충무공이 이럴지언데, 원균은 얼마나 갖은 음해를 담은 상소를 올렸을까...

p81 우리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여 도무지 방어하여 지키는 형세가 없습니다. 왜놈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가 없고, 수령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도 조금도 감독할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군량은 더욱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방도가 없으니, 수군에 관한 한가지 일도 그 형세상 장차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 어려움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12척의 배로 왜군을 상대하려던 열악함은 임진왜란 내내 계속되었던 것이다.

5월
p84 글로 적기를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 전란중에 일기를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p88 13일 - 이날 저녁 달빛은 베에 가득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 즈음에야 선잠이 들었다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심정이 전란 내내 계속되었으리라.

p90 18일 - 새로 협선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 이런 찌질한 일까지 신경써야 했던가. 사실 리더가 하는 일중 드러나는 일들은 큰 일들일뿐이지만, 실상 잡다한 일을 다루는 것에도 리더의 자질이 드러난다

p95 26일 -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으니 가소롭다
> 이런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기분이 언짢고 괘씸하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p97 30일 -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씀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도 그러하이 어찌하라!
> 원균과 그 수하인 기효근에 대한 분노가 드러난다. 기효근은 종종 등장하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전란이 끝날때까지 위기(?)를 잘 버티며 자리보전을 하는 인물인 것 같다

6월
p107 24일 - 소문에는 진주에는 성이 포위되었는데도 감히 아무도 진격하지 못한다고 한다. 연일 비가 내려서 적들이 물에 막혀 악독한 짓을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잘 돕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다.

7월
15일 -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p118 20일 -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그 거짓말을 형언할 수 없다. 상국 사람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말하기에 족하리오. 통탄할 일이다

p120 29일 - 새벽 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간 사내 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 난중일기 전편에 걸쳐 꿈을 꾼 내용과 그에 대한 자체 해몽이 종종 등장하는데, 거의 칼 융급 수준이다.

8월
p125 12일 - 식은 땀이 시도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 몸이 좋지 않음을 표현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영웅이든 성웅이든 찌질한 사람이든 몸부터 건강해야 만사형통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인은 다른 법이니, 위인 발꽁무니는 못 따라가더라도, 디스크로 고생하는 허리를 핑계삼아 누워있지만 말자

p127 26일 -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 그렇게 싫어하는 원균이지만, 비지니스 문제 때문에 이순신장군은 그와 자주 대작하였다. 그럴때마다 원균의 해괴함에 치를 떨었으니, 그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지 않을수 없다.

9월
p129 초2일 - 기효근의 형편없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 원균과 환상의 듀엣 기효근 재등장이오

p134 지난 해 변란이 일어난 뒤로 수군이 전투한 것이 수십차례나 되는데, 큰 바다에서 교전하면 그 적들은 무너져 파괴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 무패신화에 대한 자부심!

p136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 이순신의 검명에 나오는 글이고 영화 <명량>에도 나온바 있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자, 피가 강산을 물들였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p138 추악한 적에게 함란된 지 장차 두 해가 되어 가는데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 그렇다. 내일도, 모레도, 내년도 아닌 바로 오늘이다!

갑오년 - 1594년

1월
p143 14일 - 늦게 동헌에 나가 장계를 작성하고 또 승장 의능의 천민신분을 면제하는 공문도 함께 올렸다

p146 21일 - 아침에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술을 먹였다
> 아침에 먹이는 술은 전투와 노동력강화를 위한 스테로이드. 

2월
p150 초1일 - 경이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
>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p155 초10일 - 경상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술 10잔에 취하고 미친 말을 많이 하니 우스운 일이다
> 살짝 원균에게 호감이 가는 까닭은??

p156 12일 -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p158 16일 -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진회는 중국 남송 고종 때의 재상으로 명장 악비를 무고하고 죽인 희대의 간신이며, 무목은 악비를 칭하는 시호이다.

5월
p176 9일 -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 고뇌에 찬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문장들이다.

p179 25일 -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6월
p183 15일 - 신경황이 들어왔는데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7월
p190 11일 - 궃은 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부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 길이 고되지 않을까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 집안의 어른으로서, 아비로서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p194 19일 -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 한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 이순신에게 원균은 정말 비호감이었던 것 같은데, 원균이 쓴 뭐라도 남아있으면 좋겠구만...

8월
p200 13일 -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p203 27일 -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

p204 30일 -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에 미칠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 아내에 대한 글을 보면 이순신이 어머니를 향해 쓴 글이나, 자식들에 대해 쓴 글보다 그 격감이 좀 덜한게 사실이다. 그게 그 시대상이었으니 깊게 따질 일은 아닌듯 하다.

9월
p206 초 3일 - 새벽에 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3년동안 해상에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은거하고 있는 왜적을 가볍게 나아가 칠 수가 없을 뿐이다. 더욱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와 걱정이 드러나 있다. 

초4일 - 활쏘기를 하였는데 원수사가 열에 아홉을 지고는 술이 취해서 갔다
> 아, 원균 ㅋㅋㅋ

p210 20일 -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11월
p225 25일 - 새벽꿈에 순변사 이일과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는데,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배짱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요? 또 수군 각 관청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라고 하니, 순변가 말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 순변사 이일은 과거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근무하고 있을시에 트집을 잡아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만들었던 상관이었으니, 이 꿈의 배경에는 그와의 악연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p230
무제시

비바람 몰아치는 밤
밈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요
배를 몰던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를 사모하네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긴 듯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양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린 듯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양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띄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2백년에
화려한 문물은 3천 모양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네
여러 해 방비할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회복한 제갈랴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를 사모하네


을미년 - 1595년

4월
p256 20일 - 이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남해현령을 효시하라고 했다
> 기효근이 드디어 최후를 맞는 것인가? 스포를 뿌리자면 No~~~

5월
p260 13일 - 하루 걸릴 탐후선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아서 어머님이 평안하신지를 알 수가 없다. 애태우는 마음 어찌 다하랴

p261 14일 - 동지 권준이 왔다
> 순천부사 권준은 이순신의 신뢰하는 수하로서, 때론 친구와 같은 지기로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된다. 

p264 29일 -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지 그 겸손함과 충의의 끝은 어디란 말이더냐

6월
p267 13일 -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 대신으로 권준이 임명되고, 님해현령 기효근은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 배설과 기효근, 이들을 악역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조연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이순신은 기효근이 유임되었다는 사실에 놀란듯 보인다. 불과 몇 달전에 기효근에게 참수명령이 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나도 좀 놀랍다. 어쟀든 기효근은 처세의 달인인 걸로 인정.

7월
p271 초1일 -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11월
p294 초1일 -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술을 먹였다.
> 앞선 멘트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동력 착취를 위해 스테로이드를 복용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병신년 - 1596년
2월
p318 16일 - 이 날 밤은 너무 취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봄철의 노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
> 여러가지 심회가 얽혀 잠못이룬 하룻밤을 봄철의 노곤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

3월
p324 5일 - 그래서 식사 후에 우수사를 만나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
> 수하에게도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가 좋다

p327 12일 - 그 편에 들으니 원흉은 곤장 40대를, 장흥 부사는 20대를 맞았다고 했다
> 이제 원균을 원흉이라고까지 쓰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맺힌 것이 많긴 한 것 같다

4월
p337 - 27일 - 저녁에 목욕을 한차례 했다
> 이 시기에 유독 목욕을 했다는 얘기가 일기에 자주 나온다. 그 전이나 이후에는 목욕을 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반신욕을 시작한 것은 아닐테고...

5월
p339 5일 -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7월
p353 10일 -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위에 있어야 할 갓이 걷어 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p354 13일 -어두어질 무렵 항복해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 원칙론자였지만, 융통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p356 19일 - 남여문이 연이기, 사이여문 등의 목을 베었다
> 남여문은 투항한 왜군으로서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투항한 왜적으로서 왜적을 처리하게 하는 것은 이이제이의 수법이라기보다는, 적을 잘 알고 있는 귀순 부하에게 적들을 관리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8월
p361 초4일 -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밤에는 낮보다 갑절이나 앓아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윤8월
p369 14일 -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그 참혹한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우선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마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p370 22일 = 늦게 병영에 이르러 원균을 만나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 원흉 원균과 밤늦게까지 무슨 이야기를 한건지... 보통 사이가 안좋으면 이야기가 길어지기가 힘든 법인데 말이다. 이런 기록들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원균이 단순히 악독하거나 저열한 인간으로만 묘사되지 않는 듯 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최재성이 연기한 원균이라는 인물의 모티브를 여기에서 얻지 않았을까...

9월
p373 8일 - 나라제삿날이라 아침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으나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정유년 1597년
4월
p383 초1일 - 옥문을 나왔다. (...) 더해지는 슬픔을 이길 길이 없었다
> 원균의 무고로 옥사를 치르고 나오는 길이다. 

p385 5일 - 해가 뜰 때 길을 떠나 선산에 이르렀다. 수목이 거듭 야화를 겪어 말라비틀어졌으니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p387 13일 -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 충무공은 이 일기를 쓰고 있을 당시의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p388 16일 -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 이와 같지 않겠는가

p389 19일 -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 어찌하랴 어찌하랴...

5월
p394 5일 -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균의 흉포하고 패악함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이탈하여 반역하니, 그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 충무공에게 개인적으로 닥친 시대를 잘못 타고나는 불운은 조선에게는 대운이자 천운이었다

p401 20일 -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가운데에 "일찍이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던 바, 그 심정이 미심쩍었으나 어떤 뜻인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p403 25일 -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비 때문에 가지 않고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하랴

6월
p415 22일 -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았다. 그의 처사가 무례함을 말하며 무엇하랴

7월
p420  7일 - 꿈에 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균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 점쟁이가 따로 없다. 

p426 18일 -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 (...)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 않았다.

8월
p430 초2일 -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3일 -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 궤멸된 수군의 총대장이라, 나라면 집어치웠을 것이다.

p435 19일 -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오만한 태도가 차마 말할 수 없기에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 원균이 없으니, 이제 배설이 말썽이로구나

9월
p437 2일 -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p440 16일 -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 둥둥! 결전의 서막이 다가온다

p441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것 같으냐?"고 했다

속 정유년 8월
p450 6일 - 아침 식사 후에 길을 떠나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쓰러져 가득하며 남녀가 서로 부축하여 갔다. 그 개탄스런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하였다.

p452 12일 - 그 편에 경상수사배설이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 배설이 이때부터 찍힌듯 하다

속 정유년 9월
p460 15일 -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 이날 발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명량대첩 전날 밤이다. 푹풍전야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10월
p465 초1일 -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 비열한 일본놈들같으니라구. 

p469 14일 -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470 16일 -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p471 19일 -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p482 5일 -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 모친상 3년동안 육식을 하지 않는 이순신에게 선조가 고기반찬을 하사하다

무술년 1598년
9월
p493 15일 -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일제히 군대를 움직여 나로도에 이르러서야 잤다

11월
p499 초 8일 -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의 왜교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p500 17일 -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 난중일기의 마지막 기록이다. 17일 노량으로 출전한 충무공은 19일 전황중에 왜구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한다


내가 저자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큼 온 국민이 다 아는 위인은 세종대왕 빼고는 없으리라. 이미 그 이름은 거룩한 표상이 되어, 우리는 그를 성웅이라 일컫는다. 그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나, 탁월한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다간 커다란 혼란의 시기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아니였다면, 이순신은 훗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시골의 관리로 그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순신만큼 위기를 전면에서 맞서 영웅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은 고금에 손꼽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전란에서의 생애가 남긴 난중일기를 대하는 독법은 조심스러울수 밖에 없었다. 한글자 한글자 허투로 읽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기록과 되풀이되는 감정선의 단순묘사들은 여느 책을 읽을때보다 독서를 힘들게 했다. 그냥 죽 읽어나가기엔 여러 모로 무리가 있는 책이다. 그 당시 역사와 사건들을 대조해가며 읽는 독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난중일기를 한달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난중일기만 정독했는데 한달이 걸렸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과 기록, 그리고 그 의의를 모두 일일이 찾아 일기와 대조해가면서 책을 읽었다는 얘기다. 일주일도 안되는, 그것도 하루 몇 시간도 할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독법은 가능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인터넷을 뒤져가며 많은 시간을 난중일기 독서에 할애했다. 난중일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역사와 대조해가며, <징비록>과 같은 다른 동시대의 책들과 함께 읽어가며, 10일 이상의 기간을 독서만을 위해 할애해야 한다고 본다. 

난중일기에 있어 '내가 저자라면'이라는 가정 자체는 성립이 어렵다고 본다. 비단 이것이 역사와 전란의 기록이라든지, 개인의 일기라든지 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난중일기를 쓰던 당시의 충무공의 고뇌의 1/10이라도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는 문학적 가치, 역사 기록적 가치를 벗어난 독법으로 봐야 한다. 난중일기에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자신을 죽여 나라를 살리고자 했던 충의지사,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를 다하는 아들, 좋지 않은 건강상태와 떠날줄 모르는 번민과 고뇌로 잠을 못 이루는 한 개인의 모습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인간이였다고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물의 A부터 Z까지 모두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고, 우리고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자라면, 아니 내가 이순신 장군이었다면, 전투계획이나 전술등도 일기에 좀 기록했으면 하는 후대인으로서의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 전투, 전술기록은 일급군사비밀이어서 원칙적인 충무공이 일기에 담기에는 마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서로서 이 책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후기를 보건데 역자 노승석은 <난중일기>의 완역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난중일기>를 완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역易의 결과가 오롯이 독자를 위한 것이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각 장에 달린 주석들은 <난중일기>의 독서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연대기에 대해 빠삭한 독자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난중일기를 처음 보게 되는 많은 독자들은 대부분 단순한 지명의 해석보다는 그 일기가 쓰여진 그 날에 있었던 실제 역사의 기록이 더 궁금한 법이다.

곧 현충일이 다가온다. 6월의 첫번째 북리뷰 대상도서로 <난중일기>를 포함시켜 놓은 의식있는 변경연 커리큘럼에 찬사를 보내며, 책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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