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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5일 14시 26분 등록
저자연구

신영복(1941 ~ 2016)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끝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故 신영복 <처음처럼> 中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 경제학 강사로 근무했다.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반체제 지하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전향서를 쓰고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신영복은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던 이들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며, 자신의 삶과 이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수감기간은 그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알량한 지식인으로서의 먹물을 빼낼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합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묶어 출소이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고, 책에 수록된 인간미 넘치는 진솔한 이야기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게 된다. 수감중 장기수로 수감중이던 노촌 이구영 선생을 만나 동양고전에 눈을 뜨게 되며, 서도반 활동을 통해 만당 성주표, 정향 조병호 선생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그는 20년간의 수감생활을 대학생활이라고 표현한다. 고통의 시간었지만, 배움과 성찰의 시간이였다는 것이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 및 한국 사상사, 그리고 동양철학에 대해 강의했으며 1998년 3월 13일 사면 복권된다.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신영복은 서예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병 라벨에 인쇄된 '처음처럼'이라는 붓글씨가 그가 쓴 것이며, 이는 그가 2007년 출간한 서화 에세이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았고 피부암의 악화로 인하여 2016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의 자택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나무야 나무야>(1999), <더불어 숲>(1998), <신영복의 엽서>(2003), <강의>(2004), <처음처럼>(2007), <담론>(2015) 등이 있으며, 다수의 역서가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p6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론
p16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에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 힘겨운 시간들었을테고 그에게는 불행이였겠지만, 역으로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시대의 참 지식인을 만날수 있는 행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나를 그렇게 만든 현실에 분노만 하며 그 긴시간을 하릴없이 보내지는 않았을까?(물론 책은 좀 읽을 것 같다). 쳇바퀴 힘들게 굴리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이 힘들다 한들, 감옥생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의 삶과 책에서 얻은 감동과 성찰을 이젠 내 삶에서 좀 뽑아내보자.

p20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23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의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 해가는 운동 원리를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p24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p26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p28
동양사상의 경우 그것의 공간적 존재 형식에 주목하는 경우 우리는 대단히 완고한 선입관에 갇히게 될 위험이 큽니다. 동양 사상을 특수한 것, 전근대적인 것, 그리고 때로는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는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요

> 서양의 논리인 셈이다.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 비단 다른 문화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 다시 말해 타자의 문화를 우리는 어떠한 프레임도 없이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단지 내가 가진 프레임이 정당한 것인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 먼저 차이를 찾아내거나, 차별화를 할 필요는 물론 없다. 그것은 공존하지 않으려는 전제에서 오는 행위들이 아닐까?

p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걔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p30
서양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p31
과학은 다시 자본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p34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의 동양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적 의미 이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다미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이라는 논리입니다.

p35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p36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p37
(서양에서는) 진리란 일상적 삶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제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p41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 그래서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p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것을 인이라 합니다.

> 공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인仁은 애인이며 지인이라고 말이다.

p44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시와 언(시경 서경 초사)
p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3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p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p61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65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두꺼운 소설을 읽으며 내가 했던 생각이기도 하다. 시는 함축적이고 압축적이지만 소설과 산문은 대개 의미의 반복이라는 긴 흐름이다. 이 말대로라면 소설에 대한 독법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읽기는 정신적 허영을 충족시키는 여가활동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영화 또한 그러한가?  물론 시와 같은 소설도 있겠지만, 신영복은 시가 지혜와 교훈을 얻는데 있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듯 하다. 짧은 것과 긴 것 모두 똑같은 효용을 준다면, 당연히 짧은 것을 선택해야겠지. 하지만 단지 혼자 따로 있는 문장 하나에서 감명을 받기보다는 긴 글의 맥락속에서 파악되는 문장으로부터 감명을 얻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또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사람의 생애는 어떠한 한 순간만으로도 빛날수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감동은 삶 전체로부터 오는 법이니깐.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70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 오늘날에 비추어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p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p81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p83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p90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가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p91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경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은 해설입니다.

>오호, 경과 전, 경전의 의미로군

p101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 조선시대 무능의 대명사 원균이 그 실례라 하겠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자신의 깜냥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릇이 크고, 발전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더 큰 자리를 맡아 능력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아둥바둥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자리에 맞고 안 맞고 여부는 능력보다는 자질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p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p119
천지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막혀 있다. 군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유덕함을 숨김으로써 난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관록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p122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p124
역경에 처했을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더 큰 고난이 찾아오면 가지를 버리고, 더더욱 큰 고난을 맞으면 뿌리 위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뿌리만 남아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뿌리라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p128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p129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과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p130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p156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죠

p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소위 상품미학의 특정입니다.

p161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64
극좌와 극우는 서로 통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72
번지가 인仁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知人이다"

p175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p180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요지는 적어도 사가 관념적 사고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사가 실천의 의미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전에 생각과 사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학과 사는 그 사이에 단락이 있지 않다. 단락이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p181
학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는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p183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p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의
p213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에 이익이 될까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p225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가지 인의예지의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p227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이라 나와 있지요.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를 구합니다

p229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공자의 '성상근 습상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p236
그것이 곧 인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p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 꽃은 우리가 불러주기까지 꽃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동들도 TV에서 진지하게 봐야지 그나마 내 안의 관계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만나면 더욱더 나의 관계안으로 들어게 될테고 말이다.

식품에 유해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p240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구조기 때문이지요.

p243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p245
'불성장부달' 역시 '불영과불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노자의 도와 자연
p255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의지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72
노자의 기본 사상은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p275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p276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곳이 사라지지 않는다.

p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p284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순리에 대한 내용은 왜 없는거지?

p288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이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p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p292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p294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이 되기 때문이지요

p295 - 노자 11장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의 정치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최고의 정치는 무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패권정치입니다.

> 중국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명의였던 위나라 편작의 삼형제의 이야기 또한 같은 맥락이다. 편작의 큰형은 병이 생기기전에 미리 예방해서 그 동네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환자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환자의 표정과 음색만으로 환자에게 닥칠 큰병을 감지하고 미리 치료했다. 둘째형은 병이 위급해지기 전에 병의 초기단계에서 고쳐서 또한 주위에 아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편작은 자신이 큰 병이 닥친 후에야 병을 고치니 사람들이 큰 병을 고쳐주었다고 그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조선시대 세조가 저술한 의약론(醫藥論)중  팔의론(八醫論)에 나오는 이야기와도 유사한 맥락이다. 의사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의사를 심의(心醫)라고 했다. 그 다음이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는 식의(食醫)가 있고, 약으로 병을 잘 다스리는 의사를 약의(藥醫)라고 하였다. 

p298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는 한강을 생각해봅시다. 한강의 그러한 모양은 수많은 세월을 겪어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북한산의 모양 역시 수천만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수많은 임상 실험을 거친 가장 안정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는가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p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랴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소요
p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p317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329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기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게를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 노인의 가치관에 범접할 구석이 없다. 완고함의 극치이자 극기의 극한이 아닐까.

p332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p337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언어 너머의 세계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죽은 자의 책은 두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수단인 경우가 많기에 어쩔 수 없다. 

p339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 뒤이어 나오는 목수 장석의 이야기에서 장자의 말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p349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우리가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p352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묵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는 통째로 둘러매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p354
장가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때, (...)
제자들이 말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 인지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p368
한비자의 예화 - 진나라 임금이 딸을 진나라 공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 보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지요.

p373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 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p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p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몀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p390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축적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를 벌여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p404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갖오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와 이학파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p405
천은 천명, 천성, 천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p408
하늘이 위대하다고 사모하는 것과, 물자를 비축하여 그것을 잘 마름질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늘에 순종하여 그것을 칭송하는 것과 천명을 마름질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p409 
순자의 체계에서 하늘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p410
여러분은 '천론'과 '천명론'의 차이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자가 천명론에서 명을 제거함으로써 인을 제자리에 놓고 있다는 것을 읽을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p424
숙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대부분의 유가가 치인에 앞서서 수기를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치인이 순자의 체계에서는 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양에 앞서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 유가의 주장이나 순자의 주장이나 극단에 서있는듯 하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 함깨 가는 문제이다. 수기와 치인은 나뉜다기보다는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433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 관중이 말한 것과 같다. "창고에 물자가 풍족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p438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나라의 관중을 듭니다.

p451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계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빡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사람들이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고?"라고 묻자, 그는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라고 답했다.

> 맹목적인 프로세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우화이기도 하다

p456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p457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 한 법이다

강의를 마치며

p472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 사상입니다

p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곳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없고 작은 미물이더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p479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로 공동화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p482
철학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

> 다시 말해 철학은 보편적인 것이리 아닌 상대주의적 문화일 수 있다는 것

p487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 둘째 백성을 천애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가지를 3강령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8조목입니다

p495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이 편은 바로 공문에서 전수한 심법이니, 자사는 그것이 오래되어 어긋나게 될까 염려하였다.

p497
대개 사람이 자기의 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천에서 나온 것임은 알지 못하며, 사물의 법칙이 있음은 알지만 그것이 성에서 말미암은 것임은 알지 못한다.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나의 고유한 바로 인하여 제재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理입니다. 성즉리입니다. 이는 법칙성입니다. 이 이가 성이며 성이 천명입니다. 이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임은 물론입니다. 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즉 솔해야 하는 것이며, 솔은 노라 하였습니다. 이 도를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교입니다.

p501
주자의 이론이 성즉리임에 반하여 심론의 요지는 심즉리입니다.

p502
효친의 마음이 없다면 효도의 이가 있을 수 없으며, 충성의 마음이 없다면 충성의 이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충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충성과 효심이 생긴다고 하는 주자의 입장과는 정반대입니다.

> 양명학의 입장

p507
동양고전의 독법에 있어서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얻었다면 미차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고전 장구의 국소적 의미에 갇히지 않고 그러한 관점을 유현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창신의 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뗏목을 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얘기인데, 과연 그러한 경지에 언제 올라설수 있을지...

p510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사상의 장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내가 저자라면

신영복 선생의 글은 한자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얼핏 구시대의 먹물의식이 드러나는 듯 해보이지만, 문장으로 단락으로 표현된 그의 글에는 어떠한 먹물의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현학적으로 보이는 글이 이리도 잘 전달되고 이해될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신영복 선생의 글을 볼때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선생의 글은 한자 한자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한 20년 내공의 수준은 여타 현학적인 학자들의 글과 달리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삶과 지극한 성찰에서 묻어나오는 글이 너무도 아름답다. 

"학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는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  본문 p181

그의 글은 현실적 조건이 밑바닥까지 배어있는 보편주의적 이론이자, 그가 경험했던 특수한 경험적 지식이 독자의 공감으로 보편화되는 완결된 고리를 이룬다. 속칭 살아있는 지식인의 화신이다. 

책의 구성은 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법가 순이다. 강의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그 가르침이 생생하다. 경제학자였던 선생이 수감생활을 거치면서 찾은 지복의 길은 동양사상에 있었던 듯 하다. 그것은 20년의 수감생활동안 좁은 감방에서 수감자들과 부대끼며 체득한 관계론에 기반한 것이리라. 개인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서로의 관계를 그 존재 기반으로 하는 동양의 정신은 신영복 선생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찾아낸 지고지순의 최고 가치였을 것이다. 

선생은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하는것은 비단 시인 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전환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일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세계로부터 보편성을 이끌어내어야 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세울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이 세상을 통섭으로 연결해야 창조가 가능하다. 선생의 삶과 책은 이에 대한 명확한 전범이다. 

한가지 독자로서 아쉬웠던 부분은 중국의 사상과 한국의 사상에 대한 연계가 책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중국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으나, 각 동양 고전의 사상들이 우리의 사상에 끼친 구체적 영향에 대해서도 소개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중국의 사상들이 한국 사회와 역사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동양고전을 읽는 더욱더 깊이 있는 실천적 독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책의 부제는 엄밀히 말해 '중국 유가 고전 독법'이라는 부제로 대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책의 말미에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지만 , 그것은 참고를 위한 레퍼런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저자라도 불교를 학문이나 고전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았을테고, 춘추전국시대 형성되어 동양을 지배한 유가 사상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 책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이런 소소한 딴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내게 유가 경전의 독법에 있어 절대적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은 거의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구본형 스승님도 가고, 신영복 선생님도 가셨다. 그들이 남긴 책을 통해 그들을 사숙하는 과정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앞으로도 더욱 중요한 부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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