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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2일 21시 06분 등록
논어(김형찬 옮김, 홍익출판사)

저자연구

공자( BC 551년 ~ BC 479년)

생애 요약

공자는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으로 기원전 551년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오늘의 중국 산동성 곡부 지역으로 공자는 하급 귀족 무사였던 아버지 숙량홀(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홀은 60이 넘은 나이에 안씨를 만나 공자를 낳았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둘의 혼인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야합에 의한 것이라 전한다. 공자가 3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어서, 공자는 젊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그런 연유로 체계적인 공부를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공자가 17세 되던 해에 어머니 또한 죽고, 19세에 송나라 출신 기관씨라는 사람의 딸과 혼인했다.

어려운 생활고 속에서도 공자는 남들로부터 배우기를 즐겨했고, 열다섯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창고지기나 가축관리등과 같은 천한 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도 공자는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공자는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면서부터 공자는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나라에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이후 토지 문제를 관리하는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등 적지 않은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공자는 노나라의 계씨를 비롯한 세 대부가 나라를 휘어잡고 흔드는 현실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그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인과 예에 입각한 자신의 사상을 현실 정치속에서 펼치고자 했으나, 제후들은 공자의 생각을 이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따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3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공자가 전념한 것은 교육과 저술이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악(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공자는 이 시기에 <시경(詩經)>, <서경(書經)경)>, <예경(禮經))>, <역경(易經)>, <악기( 樂記)>, <춘추(春秋)> 등 이른바 육경( 六經)을 편찬한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문헌, 기록을 통해 본 공자의 삶(<사기 - 공자 세가>에서 발췌)

공자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군자였지만, 입신양명을 위해 떠도는 유자(儒者)에 불과했다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제나라 군주 경공이 공자를 흠모하여 공자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명재상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안영(晏嬰)이 반대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 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형식과 겉치례에 치우치기 쉬운 유학의 폐단이 그 시기에도 만연했음을 안영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서 펼치고자 했기에, 관직에 나가고자 하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조용히 숨어살아야 한다. 나라에 도가 행해지는데 가난하고 천하게 산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 논어 태백 13

공자는 관직에 머물렀을 때는 사리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정치를 하였는데,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그 뒤에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 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

공자는 노나라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불러들이자, 결국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공자 또한 비루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으며 대신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공자가 72살 되던 해 자로가 위나라에서 정변에 휘말리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공자는 병이 깊어졌고, 자공이 공자에게 병문안을 왔을때 공자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

그렇게 말한후 7일 뒤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예를 중시하고 현실 정치를 통해 이를 펼치는 이상을 꿈꾸었으나, 결국 공자는 살아있는 동안 그 꿈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공자는 사후 그의 가르침들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할 것임을 알고 있었을까? 공자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동아시아 전역에 끼친 영향을 실로 지대하다.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교가 동아시아의 사상을 지배한 원인은 다름아닌 유교가 지닌 보수성과 함께 체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 이념으로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모여 3년상을 치렀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다시 3년을 더 보냈다. 도합 6년상을 치른 셈이다. 그의 제자와 공자를 추앙하는 무리들이 그 지역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고, 마을은 ‘공리(孔里: 공자 마을)'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자의 삶은 사마천의 평가로 표현될 수 있다.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내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

서문
p24 공자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를 잘 모시고 싶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데 착안하여,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인간 관계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상정했다. 이러한 효도의 마음을 형제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나라와 천하에까지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바로 인이라는 인간 관계의 실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예라는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공자의 수제자 중 한사람인 증자가 공자사상의 핵심으로 지목한 충서를 들 수 있다. 주희의 풀이에 따르면 충이란 진심을 다하는 성실한 마음이고, 서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서 타인이 바라는 바를 먼저 해주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1 학이
1 공자왈 -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2 유자왈 - 군자는 근본에 힘쓰는 것이니, 근본이 확립되면 따라야 할 올바른 도리가 생겨난다.

> 공자 사상의 핵심을 한 글자로 표현할 때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은 人+二 로서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조화롭고 안정된 관계를 포괄적으로 함축한 개념이다.

3 공자왈 -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사람들 중에는 인한 이가 드물다
> 교언영색

4 증자왈 -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 원문은 충忠이다.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모양으로 마음의 한 가운데, 즉 진실된 마음을 뜻한다.

6 공자왈 - 말과 행동을 삼가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이렇게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글을 배우는 것이다

13 유자왈 - 약속한 것이 도의에 가깝다면 그 말을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함이 예에 가깝다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 의탁하여도 그 친한 관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 원문은 '신근어의'로,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도의에 맞느냐 하는 것이다.

16 공자왈 -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위정
2 공자왈 - <시경>에 있는 삼백 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생각에 거짓됨'이 없다는 것이다

3 공자왈 - 백성들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별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별을 면하고도 부끄러워함이 없다

6 맹부백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 왈 - 부모는 오직 그 자식이 병날까 그것만 근심하신다

12 공자 왈 - 군자는 그릇처럼 한 가지 기능에만 한정된 사람이 아니다

14 공자 왈 - 군자는 여러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당파를 이루지 않고, 소인은 당파를 형성하여 여러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 한다

15 공자 왈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사색과 즉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8 자장이 출세하는 법을 배우려고 하자 공자 왈 - 많은 것을 듣되 의심스러운 부분은 빼놓고 그 나머지를 조심스럽게 말하면 허물이 적다. 또한 많은 것을 보되 위태로운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조심스럽게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출세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팔일
4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쭙자 공자 왈 - 대단한 질문이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례는 형식을 잘 갖추기보다는 오히려 슬퍼하는 것이 낫다
> 그렇게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에는 왜 이리 허례허식이 많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6 공자께서는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물으셨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누가 추 땅 사람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더라"
공자 왈 - "그것이 바로 예이다"

22 공자 왈 - 관중은 그릇이 작았도다

23 공자 왈 - 음악은 배워둘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여러 소리가 합하여지고, 이어서 소리가 풀려 나오면서 조화를 이루며 음이 분명해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져 한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리인
2 공자 왈 -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오랜 동안 곤중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안락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인한 사람은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5 공자 왈 -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려서는 안된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부당하게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의지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8 공자 왈 - 아침에 도를 들어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10 공자 왈 - 군자는 천하에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으며, 오직 의로움만을 따를 뿐이다

11 공자 왈 - 군자는 덕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편히 머물 곳을 생각하고, 군자는 법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혜택받기를 생각한다

14 공자 왈 -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걱정해야 하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이 알아줄 만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5 공자왈 -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 (...) 증자왈 -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16 공자 왈 -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18 공자왈 - 부모를 섬길 때는 잘못하시는 점이 있더라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야 하고, 그 말을 따르시지 않을 뜻을 보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부모의 뜻을 어겨서는 안 되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22 공자 왈 - 옛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24 공자 왈 - 군자는 말에 대해서는 모자라는 듯이 하려 하고, 행동에 대해서는 민첩하려고 한다

25 공자 왈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26 자유 왈 - 임금을 섬김에 번거롭게 자주 간언을 하면 곧 치욕을 당하게 되고, 친구에게 번거롭게 자주 충고를 하면 곧 소원해지게 된다

공야장
11 자공 왈 - 저는 남이 저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일을, 저 또한 남에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자 왈 - 사야, 그것은 네가 해낼수 있는 일이 아니다.

12 자공 왈 - 선생님의 여러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14 자공이 여쭈었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습니까?" 공자 왈 -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므로, 문이라고 한 것이다

20 공자 왈 -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는 지혜롭게 행동했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어리석은 듯이 행동했다. 그 지혜는 누구나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아무나 따를 수가 없다

27 공자 왈 - 열 집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진실됨과 미더움이 나만한 사람이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옹야
4 공자께서 중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얼룩소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번듯하다면, 비록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한들 산천의 신이 그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10 염구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 능력이 부족합니다"
공자 왈 - 능력이 부족한 자는 도중에 가서 그만두게 되는 것인데, 지금 너는 미리 선을 긋고 물러나 있구나

16 공자 왈 -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촌스럽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형식적이게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다운 것이다.

18 공자 왈 -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 공자 왈 - 중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것을 말할 수 있으나, 중간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다.

28 공자 왈 - 인이란 것은 자신이 서고자 할 때 남부터 서게 하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을 때 남부터 뜻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루어서 남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의 실천 방법이다

>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루어서 남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바로 서恕이다

술이
6 공자 왈 -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닌다

11 공자 왈 - 부가 만약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드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 그러나 추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

15 공자 왈 -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게 삼고 누워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27 공자 왈 -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많이 듣고 그 중 좋은 것을 택하여 따르며, 많이 보고 그 중 좋은 것을 마음에 새겨둔다면 이것이 진실로 아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체 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을 창작의 대상으로 해서도 안 된다

29 공자 왈 -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은 다가온다

태백
9 공자 왈 - 백성이 도리를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도리를 이해하게 할 수는 없다

13 공자왈 -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조용히 숨어살아야 한다. 나라에 도가 행해지는데 가난하고 천하게 산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자한
4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사사로운 뜻을 갖는 일이 없으셨고,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셨으며, 무리하게 고집부리는 일도 없으셨고,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으셨다

18 공자 왈 - 비유하자면 산을 쌓다가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그만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그만둔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땅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한 삼태기의 흑을 갖다 부었어도 일이 진전되었다면 그것은 내가 진보한 것이다.

22 공자왈 - 후배들이란 두려운 것이니, 그들이 지금의 우리만 못하리란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

> 난 두려워만할 사람이 못되는 걸로 ㅜ.ㅜ

27 공자왈 -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28 공자왈 -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인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29 공자왈 -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함께 도로 나아갈 수는 없고, 함께 도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입장을 같이 할 수는 없으며, 입장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른 판단을 함께 할 수 없다.

향당
12 마굿간에 불이 났었는데, 공자께서 퇴근하시어 "사람이 다쳤느냐?"라고 물으시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선진
15 자공이 여쭈었다. "사와 상은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왈 "사는 지나치고 상은 부족하지."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공자왈 -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마찬가지이네

21 공자왈 - 구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한 것이고, 유는 남을 이기려 하기 때문에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안연
1 공자왈 -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

2 공자왈 - 집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드는 긋 하며,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고, 집안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4 공자왈 - 군자는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사마우가 "근심도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곧 그 사람을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왈 - 속으로 반성하여 거리낌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16 공자왈 -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룩하도록 해주고 남의 나쁜 점은 이루어 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19 공자왈 -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입니다

22 번지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왈 -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앎에 대해 묻자, 공자왈 -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 애인愛人, 지인知人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요체이자 실행이다

자로
2 중궁이 정치에 대해 여쭙자 공자왈 - 먼저 실무자들에게 일을 분담시키고, 작은 잘못은 용서해주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거라
"어떻게 현명한 인재를 알아서 등용합니까?"
공자왈 - 네가 아는 사람을 등용하거라. 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이 그를 내버려두겠느냐?

16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 왈 -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먼 데 있는 사람들은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17 자하가 정치에 대해 여쭙자 공자왈 - 빨리 성과를 보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라. 빨리 성과를 보려 하면 제대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21 공자왈 -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꿈이 큰 사람이나 고집스런 사람과 함께 하리라! 꿈이 큰 사람은 진취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은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26 공자 왈 - 군자는 느긋하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되 느긋하지 않다.

헌문
11 공자 왈 -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위령공
7 공자왈 - 더불어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더불어 말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도 않고 말을 잃지도 않는다

11 공자왈 -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

29 공자왈 -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

30 공자왈 -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서 사색을 해보았지만, 유익함은 없었고,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36 공자왈 - 군자는 바른 길을 따를 뿐이지. 무조건 신념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계씨
2 공자왈 -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일반 백성들이 정치를 논하지 않는다

9 공자왈 -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백성들 중에서도 최하이다

> 난 지금 곤란한 지경에 처해 배우는 중이니 3등이군

10 공자왈 - 군자에게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아홉가지가 있다. 볼 때에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에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몸가짐은 공손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말을 할 때는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을 할 때에는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이 날 때에는 물어 볼것을 생각하고, 성이 날 때에는 뒤에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며, 이득될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를 생각한다

> 결론은 군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법륜스님이 TV예능그로그램에 나와서 한 얘기가 있다.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화를 내서 자기가 손해를 얻는다는 것이다. 공자가 얘기한 성이 날 때에 뒤에 겪을 어려움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양화
2 공자왈 -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성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

8 공자왈 - 인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페단은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움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그 폐단은 분수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신의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곧은 것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박절하게 되는 것이다.

9 공자왈 - 시를 배우면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잘 볼 수 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원망할 수 있다.

25 공자왈 -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

26 공자왈 -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런 사람은 끝난 것이다

> 공자님, 너무 각박하신듯

자장
2 자장 왈 - 덕을 지키되 폭넓지 못하고, 도를 믿되 독실하지 못하다면 어찌 있다 없다는 논할 수 있겠는가?

8 자하 왈 - 소인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낸다

9 자하 왈 - 군자에게는 세 가지 변화가 있다. 그를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서 대해 보면 온화하며, 그의 말을 들어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요왈
2 자장이 말하였다 "무엇을 네 가지 악덕이라 합니까?" 공자 왈 "가르쳐 주지도 않고서 잘못했다고 죽이는 것을 학대한다고 하고, 미리 주의를 주지도 않고서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포악하다고 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은 태만히 하면서 기일만 재촉하는 것을 해친다고 하고,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어야 함에도 출납을 인색하게 하는 것을 옹졸한 벼슬아치라고 한다."

3 공자왈 -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당당히 나설 수 없으며,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저자라면

조선을 반상의 헤게모니로 쥐어잡고, 쇄국에서 망국으로 이어지는 조선 역사의 주춧돌이 된 유학의 아버지 공자님의 저서 <논어>를 다시 읽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어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공자의 사상은 처세의 교본이자 도덕책의 왕중왕이라 할 수 있다. 역시 도덕책은 나이가 들어서 읽어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듯 하다. 고루한 얘기로 치부되었던 문구들이 이제 구구절절 감명 깊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내가 나이가 들긴 했구나 생각이 든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라고 볼 수 있으나, 공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그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 후대에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 구성은 학이 편부터 요왈 편까지 총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각 편이 일관된 주제로 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편명은 단지 맨 처음 경구에 대한 제목일 뿐으로 어떤 분류기준에 의해 경구들을 구성했는지 잘 모르겠다. 보다 목차와 내용 구성을 일관성 있게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인,의,예,지 및 정치, 효孝 등 소주제별로 내용을 구성했다면 더 읽기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각 편에는 고사나 짧은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대부분 공자가 말했던 짧은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짧은 문장으로 깊은 성찰을 유발하는 경구들이 많기에 유교의 성전으로 불릴만 하다. 허나 내가 저자라면 좀 더 많은 고사와 이야기로 경구들을 뒷받침하지 않았을까 싶다. 각주의 부연설명은 적절하고 독서에 도움이 되었다. 비록 읽은 책은 해설서가 아니였지만, 각 편의 앞이나 뒤에 해설을 곁들였더라면 더 풍부한 독서체험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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