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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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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3일 11시 40분 등록

대동야승(大東野乘)

 

구비문학문헌, 조선시대 야사(野史일화(逸話소화(笑話만록(漫錄수필(隨筆) 등을 모아 놓은 책.

조선 초부터 인조 때까지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다.

대동야승은 총서명(叢書名)으로, 한 개인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에 의하여 편술된 것이 특징이다.

 

조선 중기에 성현이 지은 필기잡록류에 속하며 규장각도서.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까지의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다.

당쟁과 관계 깊은 사화(士禍)옥사(獄事)에 대한 기록이나 임진왜란이나병자호란에 관한 기록물은 역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며, 인물이나 풍속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풍부하여 문화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다.

 

종래에 사본 7272책으로 전해오던 것을 1909에서 1911년 사이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13책으로 출판하여 널리 퍼졌고, 1968년 이것을 다시 전 4책으로 영인, 출판하였으며,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정부 지원에 의한 고전국역총서계획의 일환으로, 원문이 포함된 번역본 17책을 간행한 바 있다.

 

숙종 말에서 영정조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부 7272책이다. 필사본인 서울대학교 규장각본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것이다. 1909년부터 1911년에 이르기까지 조선고서간행회에서 13책으로 인쇄했고, 1939년 계유출판사에서 현토하여 부분 간행하였다.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조선고서간행회본을 대본으로 하여 영인 출판했으며,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1년부터 1975년에 이르기까지 국역한 것에 원문을 첨부하여 17권으로 간행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은 총 59종의 잡록을 모아 놓은 것인데, 각각의 성격이 같지가 않다.

역사적 사건을 일정하게 변개하여 기록한 것에서부터 사대부사회와 민간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기록하거나 나아가 거기에 허구적

요소를 덧붙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잡록에 실려 있는 서사체들도 그 성격이 단일하지가 않다.

야사(野史일화(逸話시화(詩話소화(笑話만록(漫錄수필(隨筆) 등에 해당하는 단편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중 주요 잡록집들을 편찬자의 생존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서거정(徐居正, 14201488)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김안로(金安老, 14811537)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까지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편찬된 조선 초기 잡록집이라면, 안로(安璐)(16세기 후반)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서 편찬자 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까지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편찬된 조선 중기 잡록집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잡록집에는 사회경제정치적 격변의 흔적이 나타난다. 사화(士禍옥사(獄事)에 대한 기록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들은 중요한 사료가 된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 민족 문화 문고를 펴내면서 >

우리는 문화민족이다. 오늘을 슬기롭게 살고 내일을 자랑스럽게 대처하여 나가는데 이런 고전은 바로 우리의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아는 것은 바로 오늘에 사는 지혜이고 지침이다. 이런 면에서 고전은 바로 국적있는 교육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종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15세기 무렵 우리나라의 인정 풍속을 담은 용재 성 현의 수필집 용제총화를 외람되이 편역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시절의 풍속사라 일컬을 만한 용재총화의 저자 성 현은 세종 21년 예조판서의 증손으로 참판의 아들로, 우의정의 조카로, 좌참판의 아우로, 대대로 문장이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하는 한편 관상감, 서역원, 전의감, 혜민서 등의 중요성을 역설, 거기에 딸린 관원을 이전대로 문관 대우를 하게 하는 업적을 남겼다. 성 현은 폭넓은 지식과 풍부한 경험, 뛰어난 문장으로 사물을 비뚤어지게 보지 않는 은혜스런 삶의 바탕 위에서 그의 눈에 비친 가장 영화롭던 15세기의 민속사인 용재총화를 엮었으니 불후의 명작이 아닐 수 없다.

성 현이 겸손하게 자신의 저술에 대해 비록 남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는 없으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심심풀이로 읽기는 족하다고 했으나 후생인 편역자가 감히 말한다면 남의 이목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일을 환히 밝혀 줄뿐더러 만약 심심풀이로 읽었더라도 반드시 마음속에 깊이 깨우치는 바가 있어 오래도록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랑 앓는 사람

--눈길만 한번 줘도    -윤 재상의 딸 정절교육


24 저 선비의 아내 되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밖에는 조금도 사사로운 정분이 없습니다. 술사가 그만한 일이라도 나무를 뽑지 못할 이유가 되기는 넉넉하다고 했다.

 ‘너희들이 만약 훤칠한 선비를 보고도 잠자리 생각을 갖 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다짐에 딸들은 결국 구경나가지 못했다.

 

애달픈 원나라 여인

-조 반의 피난길 사연

 

30 서로의 아기자기한 정이 하도 애틋하여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어서 암수가 떨어지지 못한다는 비익조나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붙은 나무 연리지라 할지라도 이에 비할 수 없었다.

역대 창업한 임금은 거의가 하늘의 멍에 따라 혁명을 하였음은 비단 우리나라 뿐이 아닙니다 하고 은연중에 명나라 일을 빗대었다.

 

충선왕을 울린 여인

--- 이 제현의 충성스런 거짓말

33 익제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귀 하나는 지어 주었다.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에는 분명하게 붉더니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인데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모래 위에 딩굴며 울며 이별

---의주서 관노 말비에 빠져

 

44 말비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만 뒷날 이익을 얻을까 싶어 애교를 부리니 생이 여기에 홀딱 녹아 스스로 아름다운 짝을 얻었다 했다.

강상에 이르러 이별할 때 그가 말비를 얼싸안고 모래 위에 누워 딩굴며 울었다. 조그마한 돌을 쪼개어 서로 이름을 써서 나누어 가졌는데 그는 옷소매에 이를 넣어 보물처럼 여기며 고이 간직했다. 말비가 중국 물건을 얻으려고 더욱 애교를 부리니 생의 사랑은 더욱 간절했고 많은 물건을 주었다.

 

월악산이 무너져도

---전 목의 충주 기생에 속은 맹서

 

47 월악산은 무너질망정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리라 큰소리 쳤으나 뒤에 역승을 사랑하였다.

48 4군을 순유하여 수십 일을 지내다가 달천가에서 이별하게 되어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사문 금생이 옆에 있다가 또한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문장, 무예보다 그게 나아

---어느 처녀의 중매조건

 

문장이 활발함은 수고로움이 많고

활 잘 쏘고 말 잘 타면 싸움에서 죽을게다

못 밑에 있는 밭은 수해를 만날지니돌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에 넘기는 게 내 마음에 드는구나

 

37 오우동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고, 나는 음행을 하지 않는다고 죄를 얻었다.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한결 같지 않은가? 듣는 사람이 모두 옳게 여기었다.

 

62 음식과 남녀관계는 사람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까지 여색을 모르는 세 사람이 있다.

제안은 아주 아리따운 아내를 두고도 여자란 더러워서 가까이 할 것이 못 된다고 늘

뇌까렸다. 한 명회의 손자는 늘 홀로 앉아있었다.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 일찍이 아내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배 채우는 데는 감방이 최고

--풀려나자 오히려 먹을 것 걱정

 

67 내 친구 손영숙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 시절에 10여 명이 떼를 지어 절에 돌아다니며 몽둥이로 중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는 장난을

일삼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의금부에 갇혀서 국문을 받았다.

 

죽으면서 글 안 읽게 돼 시원

--글자 두 자를 못 외운 종친

 

68 죽을 때 처자를 모아놓고 마지막 말로 죽고 사는 일은 큰일이니 어찌 관심하지 않으리오마는 다만 영영 종학을 이별하는 것이

 대단히 통쾌하다하였다

--푸하하하하

72 독곡 성 석린의 글씨는 진밀(곱고 세밀하다) 할 뿐인데 나이 80세에 건원릉비를 썼는데도 조금도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글씨의 호매함은 서로 상하를 다투며 늠름하여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73 동래는 많은 힘과 공을 들여서 글씨를 썼는데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써 주어서 세상에 유포된 것이 많으나 유약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된다.

74 안견의 산수화와 최 경의 인물화는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 요새 사람들이 안 견의 그림을 금옥처럼 사랑하여 보관하고 있다.

77 우리 나라의 은 신라의 최 치원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이제 그의 저서를 통하여 보면 싯귀에는 능하나 뜻이 정하지 못하고 사륙문체에는 재주가 있으나 용어가 정리되지 못하였다. 김 부식과 같은 이의 글은 넉넉하나 화려하지 못하고 정 지상의 글은 화려하나 알려지지 않았고 이규보는 눌러 다듬을 줄 알았으나 거두지 못하였으며

78 이 인로는 단련되었으나 펴지 못했고 임 춘은 진밀하나 통하지 못하였다.

포은은 순수하나 풍요롭지 못하였고 삼봉은 장대하나 검속하지 못하였다.

성삼문의 문장은 호종하나 시에는 짧고, 하위지도 대책문이나 소장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유성원은 천재로 숙성하였으나 지식이 넓지 못하였다.

79 이 개는 맑고 뛰어나 영발하고 시도 정절하였으나 선비들이 모두 박팽년을 집대성이라고 추대하였으니 그는 경술, 문장, 필법을 모두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주살을 당하여 저술한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산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외기 때문에 문장의 체를 얻어서 그 글이 웅방호건하여 그와 문봉을 다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검속하지를 못하여 시의 압운에 착오가 많아 과구에 맞지 않았다.

80 음악은 여러 기술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니 타고난 자질이 있지 않으면 참된 취미를 얻을 수 없다. 지금의 현금은 신라에서 나왔고 가야금은 금관에서 나왔다. 대금은 당나라의 피리를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가장 장해서 악의 근본이 되었다.

81 김대정은 일찍 주살당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82 요즘 노녀 조이가 (홀어미의 뜻) 공후의 집에서 쫓겨나와 비로소 그 소리를 퍼뜨렸는데 그 소리가 요묘하여 사람들이 대적하지 못하였고, 이 마지도 옷깃을 여미고 자기도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83 지금 김 도치란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80을 넘었는데도 소리가 약하지 아니하여 거벽 아쟁으로 추대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요묘하여 손에서 기술이 정()하여야 한다.

 

84 대인의 배가 비록 크나

세금 바치는 쌀이야 실을 수 있으리오

몸이 무거우니 태워 주는 역마에게는 재앙이로되

사나운 범에게는 좋은 밥이 되리로다.

 

86 한 중이 나물을 썰다가 칼을 들고 벽에 기대어 섰거늘 주지승이 까닭을 묻자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동하여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하니 주지승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너 잡스러운 말 그만 두어라, 오늘 같은 기생들의 재에 누가 색정이 움직이지 않겠니

 

발등에 잘못 맞힌 오발 오중

--활 잘못 쏜 선비 장수 놀려

 

86,7 이 차공은 우스개를 잘하여 잠간 동안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다섯 번 쏘아 다섯 번 맞히는 이 아니라 내 발에 그릇 맞힌 하였구나

 

미녀 옆에 있고파 판결 빨라 불평

                                                                                                                                  ---서 달성이 절색 화공에 눈짓

 

88 한 눈 먼 김 사문 (유학자를 달리 이르는 말) 에게 개 눈을 얼른 바꿔놓으면 된다고 하며 하는 말이

좋기는 좋으나 다만 거리끼는 일이 있다. 만약 변소 안의 똥을 보면 모두 연석의 진수성 찬과 같이 보여서 먹고 싶어 할 것이다.’ 하자

김 사문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좌우 모 두 포복절도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벌레를 김 자반이라 속여

-황혼에 뜯어보다 부부가 부스럼 나

 

89 자반 가운데 모래가 있어 먼저 먹던 것과는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가슴 속이 메스꺼워 뱃속이 편안치가 않다. 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 토하고 설사하여 며칠을 앓은 뒤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중이 준 매산은 아주 맛있었는데 그대의 매산은 아주 나쁘다했다.

그 후 벌레들을 종이에 싸서 친구에게 보내 부부는 놀랐고, 벌레가 닿은 곳은 부스럼이 났다

--자기가 준 음식으로 배앓이를 한 친구에게 벌레까지 보낸 심보가 고약하다.

 

용연의 신이 늙어서 노망

--알몸에 용 비늘 그려서 중 골려

 

90 겨울인데도 용연가에 뱀이 나타나니 절의 중이 용의 새끼라고 가져다 길렀다.

이를 보고 영태가 옷을 벗고 전신에 오색으로 용비늘을 그리고 중을 놀린 이야기

-용연의 신이 늙어서 노망을 하여 무고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왕이 영태를 물속에 던져버리고 영태는 물을 헤치고 나오니 왕은 너는 어디로 갔다가 오느 냐고 물었다.

- 굴원을 보러 갔다가 옵니다

-굴원이 뭐라고 하더냐?

- 굴원이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강에 몸을 던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을 만났는 데 어찌 되어 왔느냐하였습니다.

   -상으로 은사발 한 개를 줌

그랬더니 옆의 사냥하는 하급관리가 역시 몸을 물에 던졌다. 물에 빠진 이유를 묻자

-굴원을 보러 갔습니다. 뭐라 하드냐? 그인들 뭐라 말하겠으며 낸들 무엇이라 말하겠습니 까? 이 말을 듣고 은 크게 웃었다.

91 상좌가 사승을 속이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엄격한 계율 및 수직적 인간관계 안에서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났다니 놀랍다

94 어떤 중이 과부를 꾀어 장가들러 가는 저녁에 상좌가 속여 말했다.

밤중에 혼자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흰 기운이 길을 가로 질러 있기에 중이 시냇물로 생각 하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니 메밀꽃이라 성이 났다.

또 흰 기운이 있길래 메밀밭인줄 알았더니 물이어서 옷이 다 젖었다 등등

이래서 지금도 낭패하여 고생한 사람을 물 건너 중이라고 한다.

 

진흙 칠한 부처나 나무 깎은 신주나

---중과 유생의 일문일답

 

97 높은 집에다 단청을 칠하고 나무에다 진흙을 칠하여 부처를 만들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공궤하여서 무슨 소용이 있는고

중이 즉석에서 대답했다.

높은 집에 단청을 칠하고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사월 초하루 보름에 정성을 다하여 공궤한들 무슨 이익이 있소

100 재상 보다 못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집을 빌어서 내 집을 삼고 있는가? 하니

김 복창이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재상보다 못지 않는 사람이 어찌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삼고 있는가?

이 말은 송이 자식이 없어 조카를 후사로 삼았음을 희롱한 것이다.

 --서로 비꼬고 희롱하는 일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더 했던 것 같다.

원컨대 숙부께서는 백 살까지 향수 하소서 하니 중추가 크게 화를 냈다.

내 나이 90이 넘었는데 내가 만약 백년을 산다면 단지 몇 해 밖에 더 못살 터인데 무슨 입이 이렇게 복없는 소리를 하느냐?’

 

슬기로운 사람들

--내 무덤에 풀이 안 나면

--최 영의 청렴결백

 

101 최 영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금을 흙과 같이 보아라 라고 가르쳤으므로 최 영이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니며 잊지 않았다.

국정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데 족할 따름이었다. 그가 항상 임 럼이 임금을 속이고 정권을 농락하는 소행을 분하게 여겨 그 종족을 모두 죽여버렸다. 최 영이 형을 받으면서 평생 동안 나쁜 짓 한 일이 없는데 다만 임 럼을 죽인 것이 지나쳤을 뿐이었다. 하고는 그의 청렴결백을 말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탐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무덤은 고양군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 포기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라 붉은 무덤이라고 한다.

어찌 두 마음을 갖겠나- 정 몽주의 절개

 

102 포은 정몽주는 학문이 아주 깨끗하고 순수하며 문장도 또한 넉넉하였다.

혁명에 즈음하여 천명과 인심이 모두 추대하는 곳이 있었건만 그는 홀로 굳세고 끄떡없어 범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매헌이 포은을 뵈러 갔을 때 활과 전통을 짊어진 무사 수십 명이 포은의 말 앞을 가로막고 가므로 하인들이 비키라 하였으나 무사들은 비켜서지 않았다. 이 때 포은이 매헌을 보고 그대는 속히 가라 나를 따르지 말라해도 매헌이 그대로 따라가니 포은이 노하여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가하므로 매헌이 부득이 작별하고 돌아왔는데 조금있다가 누가 와서 정 시중이 살해당했다하였다.

 

부귀를 뜬 구름처럼- 길 재의 후진 양성

 

104 그는 고을의 여러 생도를 모아 두 재실로 나누었는데 양반의 후손 등은 상재로 삼고 마을의 천한 가문의 아이들은 하재로 삼아 , 를 가르치고 , 를 시험하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 수십 명이었다.

 

시냇가 초가에 혼자서 한가로와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고나

바깥 손님 안 오니 산새와 벗하고

대밭 언덕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서 책을 본다.

 

매헌이 공의 화상찬을 이렇게 지었다.

사람마다 도가 있으나 뛰어난 사람은 드물다. 오직 길 공만은 거의 가깝다. 높은 문관의 영예와 장수의 위세를 뜬구름같이 보고 은거하니 뽕나무 밭 열 이랑에 초가집과 사립문이다.

 

노비를 모두 성균관에

--안 향의 음덕 길이 남아

 

얘들아 나도 맛 좀 보자

--황 희의 넓은 도량

 

105 익성공 황 희는 도량이 넓어서 조그마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방에 앉아서 종일 말이 없으며 눈을 내리뜨고 책을 읽을 뿐이었다. 애들이 복숭아를 다 따 가도 황정승은 느린 소리도 얘들아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 말아라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온 나무의 열매가 깡그리 없어졌다.

 

맨 손으로 호랑이 때려 뉘어

--재상 하경복의 세 번 죽음 모면

구름 같은 왜적 종일 혼자 무찔러

--이 옥의 속죄하는 충성심

111 은문은 데릴사위도 못 들어가는 내실에서 특별히 문생을 상견함을 허락하니 이는 그들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이었다. 같이 급제한 사람들이 은문의 집에 모여 연회할 때에는 술잔을 받들어 친자제가 하듯이 헌수하며 더러는 유숙하기도 했다.

112 태종이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김 한로가 장원을 하고..태종은 열째이었다. 태종이 보위에 오르자 한로의 딸이 제자 세의 부인이 되었는데 항상 진퇴할 즈음에는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들긴 들었으나 빛이 없어

--말좌에 합격해도 다행인데

 

114 ‘최 항 어른은 장원이 되고 우리 상전은 말좌가 되었습니다.’ 종의 말에 상사가 왈칵 성을 내고 허허 이 늙은 도적놈아, 그것이 내가 바랬던 것이었다. 최 항은 나이 젊은 유학이요 박 충은 나이 많은 생원이라 그 종은 말좌라고 부끄럽게 여겼지만 상사는 그 꼴찌마저 다행으로 여기었던 것이다.

 

저 섬섬옥수를 끌어내었으면

-나도 양가집 자제가 아닌가

 

116 한림의 풍속이 처음 들어오는 자는 신래라 하여 술을 내게 하기도 하고 혹은 어러 가지로 침로하고 괴롭히다가 만 50일 만에야 자리에 앉기를 허락이고 이를 면신이라 했다.

재상으로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이에게는 평안도의 각 고을에서 마른 양식을 많이 주어 부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117 그가 일찍이 나라에 아뢰어 이런 폐단을 없애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 가게 되자 먼 길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많은 양식을 갖추고 갔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장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자살함

 

부엌 벽 문질러 거미 잡이 시켜

 

117 의방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이런 풍습의 유래는 오래 되었는데 성종이 이를 싫어하여 모든 신래자를 괴롭히는 일을 엄하게 금했으나 그 풍속이 조금 숙어졌으나 아직도 구습이 그대로 없어지지 않은 것이 많다.

-번역을 좀 더 신경써야 한다. /엄하게 금해서 그 풍속이 조금 숙어졌으나 구습은 아직도 그대로인 것이 많다/ 가 어떨까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신래자를 대하는 풍속이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왜 남의 기쁨을 괴롭히는지 그 심리를 모르겠다. 남자 대학생들이나 심지어 감옥에서도 이런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듣는다. 빨리 사라져야할 저급 문화이다.

금방 과거에 합격한 신급제로 분속된 자는 신래라 하여 욕을 보여 괴롭혔다

음식과 술을 내라고 요구하여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119 별명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하였는데 이를 33백이라 하여 욕을 당하는 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입자 괴롭히는 신참례

-한 자리에 앉히지 않고 들볶아

 

121 예문관, 숭문관, ....등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미를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를 허락하지 않았다. 신입자들이 바치는 물품은 이름도 다르게 지어 붙이는 은어 풍습도 있었다.

 

고기 싼 종이에 글지어 바쳐

--과장서 명지 없어 당황

 

122 윤담수 선생은 성질이 고지식하고 변통이 없어 친구의 놀림을 많이 받았다.

123 동년례때 마다 담수를 불러 말좌에 앉혀놓고 괴롭히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을 기생 철폐 반대한 깊은 생각

--음양의 도 모른다던 허 조의 지혜

 

127 문경공 허 조는 조심이 많고 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데도 엄격하여 법도가 있었다.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소홀하지 않고 반드시 삼갔다.

고을의 기생은 모두 공가의 물건이니 취하여도 무방하나 만약 이 금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옳지 못하게 여염집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비록 기생이나 물건이라 하고, 사신으로 나가는 남자들이 여염집 여자를 뺏는 일을 쉽게 생각했던 죄악상이다

129 안공은 성질이 엄하고 굳세어 열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으나 털끝만큼도 남의 것을 범한 일이 없으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따랐다.

공은 민간의 사특한 귀신을 제사하는 사당인 음사는 모두 헐어버렸다.

-- 과거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참된 정치인이다.

130 고을 사람들이 그 속에 귀신이 있다하여 앞 다투어 모여들어 복을 빌기에 공이 명령하여 우물을 메우게 했다.

 

다섯 마리 중 떨어진 건 나다

-위세에 눌려 맹세하고 혼자 낙방

 

황룡이 자기 옆에

--깨어보니 태종이 누워있어

 

145 임금이 마침내 황 희를 기용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박 명석을 대신해서 승지가 되었고 마침내 이름난 정승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박공은 사람을 볼 줄 안다고 했다.

 

역마타고 찾았으나 헛수고

----없는 것 내어놓으라니 속였다.

 

153 네가 항상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므로 나도 또한 거짓으로 너를 속여 보았다.

156 점친 말을 듣고 통곡하고 흐느껴 울므로 효순이 위로했다.

그 뒤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서 벼슬하지 않고 파묻혀 지내는 일민으로서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성종이 편전에서 인견하고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강론할 때 전교 를 내려 참으로 훌륭한 인재지만 늙어서 쓰기 어렵다 하고 후하게 의복을 하사하여 돌려 보냈다.

 

계란 한 개 맡기고 큰 닭 한 마리 뺏아

--게걸스러운 공신

 

162 그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날로 재물을 불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갖은 악행을 해서 재물을 빼앗았는데 밤낮으로 마음껏 마시며 즐기더니 나중에 반역하였 다가 목 베이었다.

 

젯밥 먹고 하인 시켜 수저 훔쳐

--구두쇠 재상

 

162 고려 제신 지00는 구두쇠로 살림을 사는데 설날과 한식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지 전을 주워오게 하여 도로 종이로 만들었다.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땅에 묻고 동아를 심 었는데 동아가 매우 잘 되어 얻은 이익이 많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과 안주를 갖고

와서 늘어놓는데 지만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음식 썩어도 하인에겐 안 줘

-인색한 대제학

 

163 세종께서 그의 문장을 존중하여 궁중에서 하사하는 찬이 끊이지 않았고 고관과 동료들도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내왔는데 하나하나 여러 방 속에 저장하였다. 날이 오래되어 썩어도 구렁텅이에 버릴망정 종과 시중드는 사람들에게는 한 입도 먹지 못하게 하였다.

164 교우를 자랑하고자 미리 권세 있는 재상이나 장수의 명함을 써서 종에게 주었다가 손님이 와서 앉았을 때 종에게 그 명함을 바치게 했다. 선비는 그것을 옆에 놓고 일부러 오랫동안 보지 않고 있다가 손님이 이것을 집어보고 노상의 이름이라 놀라서 달아나려 하면 말리며 말했다. ‘노상은 나의 친한 친구이니 동요하지 말라

이런 속임수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 비루함을 비웃었다.

 

임금이 불러도 아프다 핑계

-안성군의 오만

 

165 안성군 이숙번은 큰 공을 이룬 뒤에 그 세운 공을 믿고 교만하여 동열의 재상들을 총처럼 볼 분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아니하니 문후하는 중사가 잇따랐는데 내실에서는 음악 소리가 어지러웠다. 마침내 죄를 얻어 멀리 함양 별장으로 유배되었다.

나중에도 그의 오만한 기질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벼슬 높아도 아는 건 나만 하랴

 

166 생원 이시번은 일찍이 말하기를

소시에 높은 뜻을 품고 주역을 배워 역의 이치를 깊이 해득하고 스스로 가슴 속이 찬연 하다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나를 미치지 못하리라하였다.

자기가 비록 벼슬은 높으나 어찌 역의 이치를 알리오 하며 다만 보기를 하루살이 같이 여기었다. 그 뒤에 이 휘는 죽음을 당하고 윤 암은 일찍 죽었으며 00 과 이 시번은 모두 늙어서 죽었으니 세상의 성쇠란 헛된 것이 아니다.

 

167 임금 앞에서 시험 보는 전강 하는 날에는 옷깃을 여미고 용을 수놓은 방석위에 앉으니 시관이 경의 뜻을 묻는데 마치 도적을 찾아내는 것 같이 하므로 좌우로 대답하였으되 교만한 말이 다른 말을 무는 것 같이 하여 드디어 제일이 되었다.

168 서후산은 자기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형님이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이 말했다. “사람됨이 너무 강직하고 사나와서 할 말을 다하기를 좋아하니 그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으리요.” 얼마 안 가서 피살되자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파리가 네 서방이냐

--성미 급한 신 재상

 

169 신 재추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모여들어 쫒아도 다시 모여드니 재추가 벌컥 성을 내어 밥그릇을 내동댕이쳤다. 부인이 미물벌레가 무지하거늘 어찌 이다지도 노하시오하니 재추가 쏘아보며 꾸짖었다.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

 

172 강감찬은 복시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수상에 이르렀으나 몸집이 작고 얼굴이 못났다. 송나라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는 두 손을 들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에 있습니다하였다.

175 공의 사람됨이 너그럽고 느릿느릿하여 평생에 빨리 말하지 않고 바쁜 기색이 없었다.

왜구가 승천부를 함락하였는데도 그는 오히려 집에서 책만 읽고 있으므로 종이 서둘며 말했다

왜구가 왔습니다.” “아직은 활쏘기를 익히고 황급하게 굴지 말라

 

한양 천도 때 남대문 밖에 집터 잡아

 

178 이 곳이 비록 쓸쓸하고 변두리여서 사람이 없으나 중엽에 이르면 반드시 인가가 즐비할 것입니다. 저는 산림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이지 우애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179 상곡은 정원 속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위생당이라 하고 항상 집안 아이종을 모아 매일 약을 조제하는 것으로 일은 삼았다.

 

깨끗한 새 집의 흰 판자문이 새롭고

도서와 꽃과 대나무는 깊은 정이 있도다

담머리에 세 그루 느티나무는 연한 초록빛인데

좋구나 꾀꼬리 한두 마리 우는 소리


이 차에 네가 두 가지 생수를 부었구나하였다. 그는 물맛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충주 달천수를 제일로 삼고, 금강산에서 나와 한강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를 제이로 삼고 속리산의 삼타수를 제삼으로 삼았다.

185 옷은 누추하고 머리에 쓴 갓은 반이나 찢어진데다가 키가 작고 얼굴이 여위어 풍채가 아주 볼품이 없었으므로 기생들이 놀라 코웃음만 쳤다.

 

하루 근심은 술, 일생 근심은 악처

--격언이 되는 속담

 

185 하루의 근심은 아침 술이요, 1년의 근심은 맞지 않는 가죽신이요, 일생의 근심은 성질

나쁜 아내다.

적선한 집에 3대 장님이라니

--독곡 집안 보면 하늘 이치 모를 일

 

188 적선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는 법인데 독곡은 평생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몸가짐이 청렴하며 행동함에는 반드시 인으로 하였으니 그 자손이 번화한 경사를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 참으로 하늘의 이치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189 제학이 죽음에 다달아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나는 때문에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다시는 과거를 보지 말라하였다.

 

공신되어도 계집종 아내 안 버려

--분수지킨 계성군

 

192 계성군 이 양생은 본래 서자 출신으로 미천한 사람이다. 성품이 순진하고 근엄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없었다. 일찍이 옛 장터를 지나다가 이전에 미천하였을 때 사귀던 친구를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얼싸안고 서로 이야기한 뒤에 떠났다. 그의 아내는 나의 종년인데 용모가 추하고 보잘 것 없는데다가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새장가 들기를 권했다.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 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며 천인으로서 양가의 딸을 취함은 의에 해가 되니 옳지 못하다 하였다.

성품과 국량이 넓고 커서 비록 비단옷을 남에게 벗어 주더라도 조금도 아까와 하는 뜻이 없었다. 매양 호랑이 잡고 도적잡은 일이 생기면 조정에서는 그에게 위임하였다.

194 임금이 최 지를 불러 를 강론하는데 듣는 대로 술술 대답하여 경사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정밀히 이해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이 유생이 이학에 정밀하거늘 늦게야 알게 된 것이 한스럽다하고 곧 최 지에게 사예벼슬을 시켰다.

효령대군의 아들인 영천군 정은 사람됨이 활달하여 꿀리지 아니하고 성품이 또한 순진하고 근엄하여 무슨 일이든 곧게 행하여 시사가 청신하고 또한 기이하였다.

한 병 술을 얻더라도 풍악이 뜰에 가득하여 매일 취했다. 그는 술에 취하여 남루한 옷을 입고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만났다.

 

약값은 한 푼도 안받아

-가난하게 지킨 인술

지렁이를 이빨로 끊어 낚시질

 

198 그는 시를 잘 짓고 시사가 호건하며 중국말에 능통하여 여러 번 명나라 서울을 왕래했는데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루 저녁에 여러 말 ()의 술을 마시고 그만 죽었다.

괴애가 만사를 지었는데 실컷 마실 제는 첫 잔 술을 중히 여기고 뜬 인생은 새털만큼 가볍게 여기도다 하였다.


활 잘 쏘아 칭찬받은 세자

-공부 싫어한 양녕의 기행

 

199 무릇 세자에게 과실이 있으면 이 내는 반드시 반복하여 극간하니 세자가 이 내 보기를 원수와 같이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성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지며 꿈속에서라도 계성을 보면 그날에는 반드시 오한이 난다하였다.

태종이 궁중에 감나무를 심고 달린 감을 무척 사랑하였는데 까치가 쪼아 먹으므로 태종이 활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까치를 쏘도록 명했다. 그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세자를 추천했다

세자는 번번이 맞추었다. 태종도 항상 세자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래 보지 않다가 이날만은 비로소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옥으로 바둑판 바둑알 만들어

---안평대군의 선비 사귐

 

199 안평대군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하였으며 서법이 하여 천하 제일이었다. 또 그림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하였다. 남호에 임하여 담당정을 지어 많은 책을 모아 두고 문사를 불러모아 12경시를 지었으며 또 48영을 지어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혹은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혹은 언귀를 짓고 혹은 바둑 장기를 두고 풍류가 끊이지 않았다.

항상 술 마시고 놀았으니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고 무뢰하고 잡업을 하는 이도 많이 모여 들었다. 대부인께서 왕자의 도는 문을 닫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패할 것이 뻔하니 너는 사귀지 말라하시므로 그 뒤에 재삼 불렀으나 가지 않았더니 얼마 안가서 패사하였다.

 

납채 : 채단 수십 필씩 보내

창경궁 뜰에서 가면놀이

처용놀이 : 섣달 그믐밤 궁중서 춤과 노래

불놀이 : 불화살, 폭죽, 불거북 불 뿜어


204 관화의 예는 군기시에서 주관한다. 미리 기구를 뒤뜰에다 설치하는데 대 중 소의 예가 있고 비용이 많이 든다. 터질 때 마다 소리가 나고 그 모양은 유성과 같아서 온 하늘이 훤하다

...이런 것이 대략인데 임금이 후원 소나무 언덕에 납시어 문무 2품 이상의 재상들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한다.

 

연회: 술장 사치스럽고 술주정 심해

 

206 근래에는 연회가 모두 사치스럽다. 술상을 가득 차리고 또 밥 반찬을 마련하니 좋은 안주와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 없고 탕이나 구운 고기는 모두 쌓여서 그득했다. 종일토록 일을 안 보고 또 저택에 세 사람만 모여도 반드시 기생과 풍악을 쓴다.

여러 관청의 사내아이 종을 남에게 빌려와 음식을 장만하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반드시 매질을 하니 종들이 날로 피곤해진다. 각 관청의 잔치 때에 참여한 예기나 하인에게 주는 금품을 주지 아니하고 아침 저녁으로 뛰어다니게 하여 의복이 해지고..

 

에누리 : 부호들 사치에 물건 값 마구 불러

 

207 옛날에는 저자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에누리가 없어서 물건 값을 올려 부르지 않았는데 오늘 날에는 간사하고 교묘한 꾀가 날로 심하여 물건에 반은 잡것이 섞여 있고, 한 자 되는 생선을 겉 곡식 한 말과 서로 바꾼다. 부호들은 사치를 일삼아 값을 다투지 않아서 값만 더할 뿐이다.

 

소격서 : 왕자 나면 복많은 대신 뽑아 제사

 

208 대개 소격서는 중국 도가 행사를 모방하여 태일전에서 칠성과 제수를 제사 지내는데 그 상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모양이었다. 삼청전에서는 옥황상제 자동제군 등 10여 위를 제사 지내었는데 모두 남자의 형상이었다. 그 외에 안팎의 모든 단에는 사해용왕, 신장명부시왕, 수부의 모든 신을 모시어 위패에 이름을 쓴 것이 무려 수백이었다.

분향 백배하고 도사류는 머리에 소요관을 쓰고.....축사를 푸른 종이에 써서 소지를 올리는데 그 하는 일이 어린애 장난과 같지만 조정의 벼슬아치가 헛되이 를 받드니 한 번 제사지내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도 많았다.

----귀신 불, 불이 있다 없다 할 불 : 제사할 사

 

남궁의 학사 머리가 희뜩희뜩한데

검은 두건 쓰고 부지런히 신령께 비는구나

오히려 동료들이 비웃을까 두려운데

노군이 와서

노자의 뜰에서 예하도다

 

210 우리나라는 도읍을 설치하였던 곳이 하나가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 상주는 사벌국, 남원은 대방국, 강릉은 임영국, 춘천은 예맥국의 도읍지 였다. 모두 좁은 땅에 웅거하여 분계하였으니 지금의 소읍과 같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평양 : 영명사는 동명왕의 구제궁

 

211 북쪽에는 물이 없어 몽고병이 거침없이 달려왔고, 남쪽은 강을 띠고 있어 묘청이 성을 차지하여 반역을 하였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8도 중에서 오직 이 도성만이 대도와 서로 갑을을 겨룰 만하다.

부여 : 탄현, 반월성 옛터 완연

 

211 부여는 백제가 도읍했던 곳이다. 탄현 안에 반월성의 옛터가 지금도 완연하다. 백마강을 (구덩이 참) 으로 삼았으니 좁고 얕았으니 왕자가 살 만한 곳이 못되어 소정방이 이것을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철원: 태봉 궁궐 터엔 화초 만발

 

212 지세가 막혀 는 조운이 어렵다.

 

송도 : 물 맑아 가볼만한 곳 많아

 

오직 송도만은 왕씨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년 기업이 굳혀진 곳이다. 곡봉이 주악이 되고 지맥이 나누어 뻗어나간다. 수천이 깨끗하여 방방 곡곡에 놀 만한 곳이 있다.

 

한양 : 왕과 재상, 지차 출신 많아

 

213 산성 도충에 가경이 적기는 하나 그 중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다음이며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를 몇 리를 못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를 이룬다. 그 위의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두견과 단풍잎이니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벼슬아치들이 많이 와서 논다.

214 인왕동은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김자고가 시내를 끼고 집을 지어 북숭아 나무를 심고 무릉을 모방하니 강 진산이 를 지었다. 김자고가 문아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호준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놀았다.

216 목멱산 남쪽 이태원의 뜰에는 높은 산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고 절동쪽에는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차 빨래하는 성중 부녀자들이 많이 이곳으로 간다.

 

2

해설

 

이 책은 이조 초의 학자 서 거정과 이제신이 그때그때 보고 듣고 겪은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역대 왕세가 및 공경, 사대부들의 도덕, 언행, 문장, 정사들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것들과 국가의 전고 여항의 풍속 문물의 연혁 등 사회교육에 관련되는 사례로서 국사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 많이 간추려져 실려 있다.

서거정은 세종 이후 성종조까지 5조에 역사한 분으로 각 부문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이 책 외에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역대연표 사가집등이 전해지고 있다.

 

필원잡기 원서 1

 

13 사가 선생은 큰 문장으로 평생에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대체로 구양문충공의 귀전록 체제를 따랐는데 국로한담, 동헌잡록 등은 사관이 기록하지 않은 조야의 한담들로 보는 이들에게 있던 사실을 알리고자 하신 것이었으니 후세를 도우심이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서 2

 

16 공이 주신 책을 사무에 쫒겨 펴보지 못하다가 쉬는 날에 두세 펀 읽어보니 모두 우리나라 일로서 위로는 조종들의 선사 예지 창업의 재덕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범적인 공경, 대부들의 도덕, 언행, 문장, 정치 등과 국가의 전고, 촌락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사회 교육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국사에 실려 있지 않은 것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17 옛날 글을 지어 언론을 세운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 자기의 주장이 당시에 행해지지 못하여 후세에라도 행해 보려는 것이었으니 만약 때를 만나 자기의 주장을 행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책을 짓는 일에 그토록 골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이 지으신 책들은 모두 세상의 흔들리는 도를 붙들어 바로 세우고, 밝은 가르침을 전하는 데 긴요한 것으로 모두 후세에 행할 만한 것이다.

옛 사람 말에

은 덕을 세우고

다음은 공을 세우고

그 다음은 을 세우는 것이니

이것을 썩지 않는 것이라 한다.

 

원서 3

 

17 우리나라는 기자가 봉함을 받은 뒤로부터 문물제도가 중국과 비슷하다하였다.

18 비록 낳은 때는 달랐으나 주장은 같았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은 다르나 도는 한 가지이기때문이 아니겠는가

    


단군의 향년

 

21 단군이 그렇게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이 미비하였다 하겠으나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의 기록도 비치지 않았겠는가

 

씨의

22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백제 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탈취한 사실만을 적고 기씨 세계는 명백히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에도 분명히 상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3 덕으로써 강포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여 중국의 번방이 되었다.

26 전하는 말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징벌하여 안시성까지 왔다가 화살이 그의 눈에 명중되어 돌아갔다 하는데 당서나 통감에 모두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유공권의 소설에도 부상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비록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관은 중국을 위하여 반드시 숨겼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의 왕

 

일본의 대내가 , 그의 선조가 우리나라에서 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라 수 이전에 연오와 세오 이야기에 나온다.

 

삼국사의 공신력

 

29 김부식의 삼국사는 통감 삼국지 남북사 수 당서에서 주워 모아 전, , , 지를 만들었으니 이미 사실을 전하는 서적이 아니요, 사건을 기록하는데 있어서도 이미 나온 서적의 것을 인용한 것 뿐이었으니 더욱 역사를 저작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왕 중의 왕

 

39 세종은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셨다. 세자가 되기 이전의 일이라 한다. 늘 글을 읽을 때는 백 번씩 읽었으며 좌전과 초시는 다시

백 번을 더 읽었다 한다. 왕 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읽지 않은 책이 거의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부는 모든 왕에서 뛰어났었다.

만년에 정무는 거의 돌보지 않으시면서도 학문에 관한 일에는 더욱 열의를 보여 유신들을 국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책을 편찬케 하시니 고려사 치평요람, 병요, 한글, 운서, 오례의 사서오경음해 등이 동시에 편찬되게 되었는데 모두 재결을 거쳐 이룩된 것이며 하룻동안에 열람한 책이 수십 권씩에 달했다 하니 줄기찬 정성이 샘솟듯 했다고 하겠다.

아악 등의 창제 - 중추 박 연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 그는 앉으나 누우나 늘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계를 잡는 등

40 많은 공장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는 거의 없었고, 호군 장 영실만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기교를 부려...

사람들은 모두 박연과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제작을 위해 태어났다고들 하였다.

41 세종의 문치는 만고에 뛰어났다.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조석으로 연구케 하니 문장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좋은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42 ...나같이 (서 거정) 무능한 사람도 그 사이에 낄 수 있었다. 세종께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수십 년간 양성하니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나...

 

생불과 사불

 

44 세조께서는 천성이 호매하시어 평소에 늘 당태종을 사모하고 한 고조는 시원치 않게 여기셨다.

45 옛사람 말에 천군의 활은 작은 쥐를 보고 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선 유의하십시오.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절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이 정도로 중국을 따랐네...

47 관중추 이효첨은 입술이 두꺼웠는데 한 번은 세조께서 희롱하시기를...크게 웃으셨다.

49 거리가 천 리면 풍소곧 다르고 백 리만 떨어져도 습관이 다른데 ..

50 책 등에 손수 예종이라 쓰시고 또 죽어서 이 시호를 얻으면 족하겠다 하셨는데 몇 달 안 되어 예종이 승하하시니 군신들은 예종으로 시호를 올렸다.

 

공자도 지호색

 

51 포은 정 문춘공은 평생에 지절이 있었고 남들을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색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잖은가. 공자도 착한 일 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라했으니 공자도 색의 좋음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일세.

52 혼례에 당물을 쓰는 것이 예로 되어 있으니

 

수염을 뽑아도 허허

 

52 황 희는 도량이 넓고 컸다. 30년이나 정승 자리에 있었고 90살이나 살았다. 나라 일을 의결할 때는 관대하기에 힘썼고 평상시의 마음 씀은 담박하기만 하였다. 종의 자식이 편지지에 오줌을 누워도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그 덕량을 알 만한 일이다. 한 때 남원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운서 한 질을 들고 모든 정신을 책에만 집중시켰다 한다. 그 후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의 음의와 편방 점획에 있어 백에 하나 틀리는 게 없었다 한다.

 

55 일을 아뢰러 오는 이가 동구에 이르러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있는 것을 알고 피리 소리가 안 들리면 공이 없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맹사성)

56 문정공 유 관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신하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평생 담박하였다. 퇴청하여서는 부지런히 후생들을 가르쳤으므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57 정절공 정 갑손은 성품이 맑고 곧아 자제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청 드리지 못했다.

정절공은 대사헌이 되자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어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59 문정공 허 조는 간엄 방정하고 청렴 근신했다. 행동은 성현을 사모하여 늘 닭이 울 때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관대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피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고 집안일을 말하는 적이 없었다.

---요즘 정치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6년 동안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어치웠네

 

60 충렬공 구 치관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그는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뇌물이나 청탁을 받는 일이 없었다. 비록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미워해서 혹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승진시킬 것도 승진시키지 않았다. 천도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굽혀 둘 수가 있는가 하고 현직에 추천하였는데 과연 치효가 있었다.

64 저 비둘기도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동쪽과 서쪽에 서로 떨어져 살고 있지 하고 슬피 울었다.

65 널리 듣고 많이 보는 것을 문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들으니 천 사람의 눈을 열어 주는 이는 를 받는다 한다.

죽을 무렵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을 잡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가족들이 통곡을 하자 공은 울음을 그치게 하고 내가 벼슬에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오래 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올바르게 죽는 것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랴했다.

67 중국 사람들이 늘 우리나라의 표사가 정확 적절하다고 일컬은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겨울이거나 여름이거나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게으른 모양을 보이지 않았고 말을 서두르거나 급한 표정을 짓지 않으니 (문정공 최항)

70 수찬 성 간은 어려서부터 널리 복 많이 알았으며 읽지 않은 책이 거의 없었다. 어느 사람의 집에 희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어떻게 하든 구해 보고야 말았다.

그는 늘 장서각 속에 파묻혀 좌우의 책들만 열람했다. 밤이 되는지 말이 새는지도 몰랐으므로 서음전벽하다고 기롱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서에 너무 과로하여 몸이 바싹 여위더니 나이 30에 죽었다.

73 무절공 신 유정은 사람들은 맹장이라고 일컬었는데 성질이 너무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심하게 꾸짖은 다음에야 그쳤다.

우리들이 소시 적에 선생님이나 어른들 앞에서 그보다 더 실언을 한 경우도 있는데 무얼 그리 면구스러워하나

81 중국 사람이 간행하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전에 북경에 갔을 때 한 선비가 당신네 나라 것으로는 목은집이 가장 좋습디다. 소동파 황산곡과 더불어 오르내릴만하더이다 하였다.

82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하다

86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이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공을 과거에 오르지 못했다 하여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99 김 담은 성품이 온아하고 담담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108 최보순의 표문 내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적절하지 못한 일을 인용하여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권근이 길에서 비를 만나 의 갈모를 빌려 쓰고 돌려 주었는데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으며 값을 요구하였다.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사람들의 사기치고 거짓말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109 이 색은 큰 유학자였지만 명 태조가 큰 인물이었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면 지혜로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명태조가 한광무가 마원을 대접하듯 이 색을 대했더라면 기필코 이런 말은 안했을 것이다.

 

중국 사신들의 행패

 

111 늘 고 운의 소작을 볼 때마다 노기가 치솟아 얼굴빛이 변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그것을 찢어 땅에 던지기도 했는데

119 문량공 강희맹은 어느 날 요즈음 보니 젊고 괄괄한 신진들이 날마다 인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그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고 걱정하였다.

영광의 첫째들

 

125 우리나라에서 장원으로 정승에 오른 이는 정 인지, 권 람, 최 항, 고려조의 장원으로는 유양 맹사성이었다.

126 총명한 것이 많이 읽는 것만 못하다. 나는 모든 책을 1백번씩 꼭 읽었다. 그래서 늙었지만 읽지 않고 있다

127 권 도는 뒤에 이름을 제로 바꾸었는데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임금이 내린 것이었다.

-4등한 권람을 이 글이 진실로 장원감이라 하고 친히 1등으로 고치셨다.

128 세종 말년에는 선비를 직접 뽑으시고 기뻐하심 , 신하들은 한결같이 문생과 좌주의 예로 잔을 올렸다. 이처럼 큰 은총은 우리나라 고금에 없었던 일이었다.

129 권 람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남보다 재명이 뛰어났으나 어려 번 과거에 낙방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 늘 태연하였고, 초조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문 밖에만 나가면 바로 막히니

누가 천지를 넓다고 하였던가

 

130 과거에 합격하고 못하고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중에 그는 35세때 장원에 뽑혔고, 46세에 정승에 올랐다.

131 영의정 남 지와 영의정 황 수신은 다 수상이 되어 당대에는 비길 바 없는 부귀와 공명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사내로 태어나 홍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면 그 밖의 것은 볼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흠을 한으로 여긴 때문이었다.

--인간의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어디까지일까...

134 근래에 와서 대간된 자들이 대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조그만 과실만 있으면 심각한 법으로 죄를 얽고 극렬한 말로 비방 중상 하니 차자의 실시가 될어 사람을 해치기에 알맞은 것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법을 만들어 폐단이 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 시대의 망령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지식인들의 회칠한 무덤 같은 모습

135 도덕을 널리 들은 것을 이라 하고 몸을 공손히 갖고 말수가 적은 것을 이라 한다

136 지금 홍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가 고의로 사문회를 피하려 하는 것은 대개 대인 소리가 듣기 싫은 때문이다.

137 본조 개국이래로 사퇴해야 하는 법은 있었으나 대소의 조관들이 녹을 탐하여 연한이 지났는데도 거의 모든 사람이 그대로 벼슬자리에 앉아 버티는 것이 보통이었다.

138 간원에서는 간쟁하는 것을 직책으로 하고 다른 송사나 옥사를 심의 판결하는 일이 없었기에 날마다 술이나 마시는 것이 본업처럼 되어 있었다.

 

한 잔, 한 잔, 다시 한 잔

대간은 크게 취해 춘풍 앞에 쓰러졌네

 

140 헌부에서는 모든 관리들의 비위 사실을 적발하고 살피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번거롭고 많았으나 모든 일을 엄정하고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했다.

내가 취하여

일찍이 귤이 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금이 물을 건너면 은이 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고 한 구절의 시를 짓자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옛 선비들은 뭐든지 시를 지어 마음을 나누었다.

144 비문을 짓는데 있어서는 마땅히 도덕을 기술할 것이요 운명을 점치는 것을 논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156 선비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과거에 있어서는 더욱 정당한 길로 출신하여야 한다. 만일 혹시라도 뒷구멍으로 남을 글을 빌어 명예를 도둑질하게 되면 이것은 한 평생의 흠으로 남으며 고치거나 뉘우칠 수도 없는 허물이기 때문에 그 뒤로부터는 아무리 충성스런 말을 하고 바른 논의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두 속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누가 둥근 달 중천에 있다더뇨?

취해보니 분명히 술잔 밑에 박혀 있네

가을이니 달 또한 내 속으로 드는구나

안팎의 맑은 빛 더욱 좋아라

 

174 황 치신과 황 수신은 다 익성공 황 희의 아들이었는데 익성공이 살았을 적에 두 아들은 이미 정승이 되었었다.

 

< 내가 저자라면 >

 

옛날에는 학교를 돌아다니며 책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좋은 책들을 많이 팔았다. 교사들은 월부로 그 책들을

사주곤 했다. 나도 역시 월부로 책을 사서 거의 장식용으로 책꽂이에 늘어놓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젊었을 때는 재미삼이 읽어보았는데 지금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문화를 가진 선조들에게서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고 있는가가 궁금해서 정식으로  읽어보았다.

감추지 않고 다 기록한 것을 읽어보니 그 시대가 조금 눈에 보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방대한 책이라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대동야승 2권을 읽었다.


 아쉬운 것은 속임수를 익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거짓은 거짓인데 그것을 익살로 받아들이면 참된 삶을 모를 것이다.

당하는 사람은 재미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여자를 함부로 대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생, 첩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 서양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첩, 기생 이런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 것은 남녀 서로간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름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기생을 품에 껴안고 풍악 소리를 내어 하늘에 용솟음치게 하고 술에 취해 주정하고 장난하니 뱃사공이 모두 외면하고 돌보지 않았다.'

는 식의 기록이 여기저기 나와있는 것을 보면 요즘 시대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멋있는 동물인 호랑이가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것은 너무 아쉽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민가에 호랑이가 출몰한 일이 자주 써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숲이 울창하면 그럴까

지금의 콩크리트 시대가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리고 선비들이 전부 중국의 책에 나온 고사를 인용하기 바빴다. 그 당시는 중국이 천하였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

'왕자의 도는 문을 닫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패할 것이 뻔하니 너는 사귀지 말라'

는 글에서는 왕자의 고통이 느껴진다.


'병을 핑계로 벼슬하지 않았다'  는 기록도 여기저기 나온다.

그 당시의 정권에 대한 작은 반항이었겠다.

이 병을 핑계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통령 조차 6.25 기념식에 감기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그러니 일반 사람들은 오죽할까 여기저기 병을 핑계로 할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걱정이다.


수많은 사람이 필진으로 참여해서 사기열전 같은 책을 남겨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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