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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9일 23시 00분 등록
저자 소개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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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참된 꿈을 발견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하라.
꿈을 향해 용감하게 전진한다면 우주는 당신을 위해 벽에도 문을 만들어줄 것이다

 용을 물리치러 떠나는 영웅의 이야기, 혈혈단신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모험, 고난의 여정 끝에 얻어진 빛나는 성공과 만인의 칭송. 어릴적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영웅의 이야기들은 책 속에서, TV 만화영화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신화가 사라져 버린 지금, 우리는 어떤 신화를 꿈꾸어야 하는가.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의 책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저서 <신화의 힘>에서 캠벨은 신화란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지, 그리고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신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풍부하고 다양한 실례와 함께 그 대답을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끔찍한 분쟁과 갈등을 목도하고 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인과 전쟁이 벌어지고, 죄없는 어린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지역적인 신화와 극단적 종교관념에 매몰된 인간들은 모든 것을 신의 섭리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진정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신화를 가져야 하는가, 암울한 이 시대 자체가 바로 지금 우리가 캠벨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캠벨은 1904년 뉴욕의 중산층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날 아버지가 데려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보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신화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1921년 코네티컷의 캔터베리 스쿨을 졸업한 캠벨은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의 내용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단게 된다. 캠벨은 1927년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한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관심 분야가 넓어지자 기존의 전공이었던 중세 영문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박사 학위 과정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대공황이 닥쳐오자 5년 동안 무직 상태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마음이 원하는바에 따라 우드스탁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5년을 틀어박혀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섭렵한다. 그는 5년간의 우드스탁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드스턱 시절은 그야말로 희열을 찾아 나서는 시기였다. 모든 것이 가능성이고,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내게 쏟아져 들어와 비밀을 털어놓고 있었다. 방황을 할 때는 당장 그날 무엇을 할것인지 생각하되,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는 묻지 말아야 한다. 미리 생각해둔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다음 세가지는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 먼저 하는 굶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우드스탁 시절 그의 공부법은 한 작가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었다. 한 작가가 쓴 책을 모두 읽고, 그 다음 그 작가가 읽었던 책들을 읽어 치우는 방식이었다. 그와 같은 방대한 독서는 훗날 그의 학문적 성과의 주춧돌이 된다. 캠벨은 기본 독서와 공부는 이 시기에 다 끝냈다고 회고한다. 뉴욕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그는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그의 첫번째 저서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 <신화의 힘>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87년 식도암 합병증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구루이다. 


인터뷰어 빌 모이어스(Bill Moyers, 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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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위고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노스 텍사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 후,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61년 케네디 정부 산하 평화 봉사단장을 거쳐 1936년 존슨 정부에서 특별 보좌관을 역임한다. 1967년까지 백악관 대변인으로 근무했으며, 뉴스 비평가, 방송인, 프로듀서,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방년 83세로 주요저서로는 <Moyers on Democracy, 2018>, <Healing and thd Mind, 1993>외 수십권의 저서가 있다.

 모이어스는 1986년 그의 아내인 수잔 데이비슨(Suzanne Davidson Moyers)과 Public Affairs Television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들의 첫 작품은 1988년 P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시리즈였으며,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의 6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조셉 캠벨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역자 이윤기(1947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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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삶에는 지금 내 피가 통하고 있는가? 나는 삶에서 무엇을 취하고 있는가? 가죽인가, 뼈인가, 문제는 골수이겠는데, 과연 골수인가?'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이후,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6년까지 미시간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을 지냈으며, 1997~2000년 동대학교 사회과학대 비교문화 연구원을 지냈다. 번역가로서 탁월한 명성을 얻었다. 약 200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그중 특히 1980년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열풍을 몰고온 《장미의 이름》은 그의 번역으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가 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2·3》가 그의 대표작이다. 신화학,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 저서를 남겼으며,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p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 인간에게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듯이, 인간의 유한성은 인간 그 자체를 결정짓는 속성이기도 하다. 번뇌의 씨앗은 인간의 삶 어디에나 촘촘히 박혀 있어 피해가기 어렵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일인데, 이 책에서는 신화를 통해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우리는 영원에 머무는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자연의 장엄함,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웃음, 희생의 숭고함, 그 지고한 순간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잠시나마 신에 이르렀던 것은 아닐까?

p10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p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2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p15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그는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 그 살아있음의 '경험'이 바로 자신의 유한성을 잊고 신에게 이르렀던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p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 . 신화와 현대 세계

p29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 구본형 스승님의 책 제목 <일상의 황홀>이 문득 떠올랐다. 일상이 황홀하다는 것, 삶의 경험이 내적인 존재와 현실안에서 공명한다는 것,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만들어가고 싶은 일상의 모습일 것이다. 

p30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 살지 않고서는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다. 진정으로 살다 보면 '의미'라는 것은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는 어떤 잘 정의된 '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간 '경험'에서 온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흔히들 얘기하는 왜 사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할 때가 그러하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라는 것은 지금 진정으로 삶을 경험하고 있지 못 하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진정 삶을 '경험'하고 있다면, '의미'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삶의 경험은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인 것이며 진정한 삶은 자신의 천복을 따르는 것에서 온다.

p33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부부가 첫번째 단계에 머물고 있다면, 아이들이 집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갈라서게 되지요. 

> 실제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일이다. 대부분의 결혼생활의 구심점이 아이들의 존재라는 사실은 참 서글프고도 곱씹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노년에 친구처럼 멋지게 지내는 노부부들은 이런 '연금술적 단계'를 거친 셈이다. 

p42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개인이 전시에 한 일을 상식적인 잣대로 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 그렇다고 전쟁의 광기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반듯한 사람들도 예비군복만 입혀 놓으면 반쯤 모자란 사람이 된다. 예비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장으로 향하는 순간 개인적인 삶은 놓아두고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p50
텔레비젼의 퍼스낼리티라고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신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p55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크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p56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료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 종교의 탄생배경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종교의 역할 중 하나가 종교라는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를 통해 절대자의 섭리에 다가서는 것이다. 캠벨은 이를 소프트웨어에 비유하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명령 체계나 구조는 소프트웨어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모든 소프트웨어의 목적은 동일하다. 

p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 만일 그렇다면(신이 가치 체계의 화신이라면), 신은 내 안에 있는 셈이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 크게 보았을 때 두 종류의 신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회적 신화는 배타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다.

p62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과 자연은 헤어집니다.

p71
인류는 기원전 5백년걍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탐욕입니다.

p73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7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2 . 내면으로의 여행

p83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 이것은 신화뿐만 아니라 역경과 모험이 뼈대를 이루는 전해오는 모든 이야기의 공통된 메카니즘으로 보인다. 즉, 모든 모험의 이야기들은 결국 신화에 기반한다.

p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9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웅은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랍니다.

p91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사적인 꿈은 신화적인 테마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꿈은 신화의 아날로지 없이는 해석이 안 됩니다.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p92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p96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p97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 기독교의 원죄 -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 - 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다. 이런 왜곡이 언제부터 인간의 무의식에 뿌리 박혔는지 모르겠으나, 캠벨은 삶을 시련으로 보는 관념은 고등종교가 생겨나면서부터라고 만들어진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p100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모신을 거부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타락의 책임을 왜 여자가 지게 된 것입니까?"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p101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103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랍니다.

> 철학의 거인들이 만들어낸 사상이라는 것이 결국 차상도 아닌 세번째로 좋은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p105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p106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p107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p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p114
중국의 도덕경  -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p119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고등 종교의 관념입니다. 나는 원시 신화에서는 이런 관념을 접한 적이 없어요.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 글이 글로 연하여 쓰여지는 경지에서 이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코란'을 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처럼 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는 초월적인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의식의 힘으로 더 훌륭한 글이 쓰여지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p124
내 친구는, 카톨릭 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p133
우리가 잘 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p138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 영원이라는 말은 시간으로 이해되지만 그 뒤에 있는 진정한 의미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 결국 시간과 아무 관계도 없는 그 무엇,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바로 그 것.


3 .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3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 육신은 의식에 비해 너무 급격히 그 힘을 잃어간다. 마흔이 되면서 겪는 급격한 변화는 채 준비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는 카운터 펀치와도 같다. 때론 잔펀치로 이제 고작 마흔의 어린 중년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늘어가는 흰머리, 난데없이 찾아오는 불면증,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 의도하지 않은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 나이에 맞는 의식이라는 게 어디 있으랴. 우리는 육신의 변화에 당황하여 의식을 황급히 수습하는 것 뿐이다.

p166
한때 우리의 내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의례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어요. 사회의 의례도 그렇고 개인적인 결혼 의례도 그렇습니다.

P168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해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면의 무의식은 늘 열려 있습니다. 샤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무의식에 빠져들 수 있지요.

>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인 셈이고, 서양으로 치자면 마녀 정도 되려나? 얼마전 TV프로그램에서 아이돌 스타를 꿈꾸다가 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다는 한 남자의 사연을 볼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의식의 세계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p175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4 . 희생과 천복

p179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 결국 타자의 욕망에 몸을 맡긴채 우리 자신의 근원과 멀어지고 있다. 천복을 찾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p187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p189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잀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 그 작가가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게 가능하겠지만, 그 작가가 읽었던 것을 모조리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이다. 그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좋은 책들들을 가능한 많이 읽고, 거기에서 다시 출발을 해서 그 다음 책들을 선택하는 수순으로 가야 할 듯 하다. 이제 구본형 스승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책 꼴랑 한권을 읽었을 뿐이다. 갈길이 멀다.

p191
샤면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자기 부족을 위한 의례 행위로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게 종교의 시작인지요?)
내 개인적으로, 종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p194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 농경신화는 내졔 지향적입니다. 샤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 그러나 농경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명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인류의 생활 양태가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으로 바뀌면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대단히 극적이고 전반적인 변화가 생기지요. 신화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 우리가 동물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 죽고 맙니다. 그 동물에게는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 겉으로 보여지는 행태에 있어서는 동감하는 이야기지만, 만물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관점에서는 쉬이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듯 하다. 생명이 어떤 행태로 세상에 드라나는지 그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든 생명체가 삶과 죽음이라는 주기를 가진다는 사실과 죽음이 다른 삶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때 동물의 삶과 식물의 삶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단 윤회론적인 사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 써놓고 보니 미약한 태클이다... 사실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으로 인류의 생활 양태가 바뀌면서 그에 따라 변화하게 된 신화에 대한 이유로는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식물의 삶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들이 신화적 상상력의 극적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p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 삶의 의미라는 관념 대신 삶의 경험!!

p204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쭃겨난 겁니다.

p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랴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p212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

> 현대사회의 자원봉사자들이 불현듯 연상된다. 삶이라는 것에 대해 수동적 객체의 자세를 탈피하여 적극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

p213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7
종교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이 '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왕은 그리스도와 대응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는 이 상처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고, 이로써 죽은 자를 황무지에서 이 땅의 생명으로 되돌아오게 합니다.

p221
다른 수피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비주의자가,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을 금욕과 죽음을 통하여 반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통 신앙 사회의 기능이다."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 영적인 문제에 관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 영적인 지도자들이 필요하고, 실제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이겠지.

p225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 (P223)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p226
지금 말하는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재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 '불립문자'라고 하였던가. 존재, 의식, 천복과 같은 단어들이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단어들의 본질을 얼마만큼 잘 전달해주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그 산스크리트어 단어들은 언어 너머의 그 의미를 얼마만큼 잘 드러낼수 있는 것인가? 번역된 생각, 번역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언어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사실 그 생각의 오리진부터가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5 . 영웅의 모험

p230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엄청난 변모이기는 합니다. 만일에 이러한 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한다면, 그것을 영웅의 행적이라고 불어야 마땅할 테지요.

p237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p239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47
태양신의 섬에는 금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태양신 헬리오스의 황소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하도 굶주린 참이라 태양신의 황소를 한 마리 잡아 구워 먹어 버립니다. 이래서 배가  파선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영적인 빛의 신이 사는 이 섬에서도 인간의 비천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가능했던 겁니다. 광명이라는 존재앞에서, "아, 쇠고기 샌드위치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p251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는,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험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p252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아버지를 찾으러 가라"는 신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p253
인생은 꿈, 혹은 거품이라는 '마야'라는 힌두교 관념

p254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 경험하지 않고서는 마음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p257
욕망과 공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두가지 감정에 지배됩니다. 욕망이 미끼라면 죽음은 낚시바늘인 것이지요.

p263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 변화 경영 연구소 연구원 첫 해 과정, 그리고 내 삶을 통해 계속해야 하는 공부.

p270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 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p271
(인간 존재에 대한 선생님의 시각에서 보실 때, 진리와 환상의 갈등 너머에 우리 삶을 예전의 그 통합의 상태로 되돌리게 하는 지혜의 항구가 있다는 인식에 이르는 일이 가능할는지요?)
모든 종교는 그것의 시대에는 진리였어요. 만일 종교가 지닌 진리의 측면을 인식하고, 여기 세속에 적용되고 있는 것을 분리시킬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세속에 적용되고 있는 종교에서 알맹이만 따로 떼어내어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말고요.

p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 더 정확히 표현하면 천복을 따르는 것에서 오는 가진 것들의 상실 내지는 가질 수 있는 것들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클 것이다.  일단은 천복을 따르는 삶과 실제 삶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p276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p278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죽음을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 영화 <신세계>의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이 말을 베껴서 사용한 듯 하다! 극중에서 중구(박성웅)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숙청당하기 전 생의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나서 내뱉은 말 - "죽기 참 좋은 날이네". 그 말을 하고 있는 마지막 순간 중구는 공포를 극복했을까, 아니면 그건 단지 삶을 체념한 객기에서 나온 한마디 한탄일 뿐이었을까.

p284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p296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9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 삶의 의미 대신에 삶의 경험을 찾으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p300
니르바나는 우리 마음, 혹은 의식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천당처럼 어떤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영원이 시간을 지칭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p301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모색하다 보면, 지금 자신의 삶의 경험과 순간들을 가볍게 여기고 때론 평가절하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파랑새는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p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하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6 . 조화여신의 은혜

p320
모이어스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에요.

p328
신의 죽음과 재생 이미지는 어느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이미지입니다. 흔히 이런 이미지는, 달마다 죽음을 맞았다가는 재생하는 달의 이미지와 관련된 형태로 나타나고는 하지요.

p333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 마음으로 100% 이해하지 못 해도, 삶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 신은 '절대 타자'가 아닌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p335
의례의 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태어남과 죽음은 개인에게 절대적인 두가지의 신화인데, 그 사이의 삶의 마디마디에 신화적인 요소, 즉 의례가 존재한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의례가 가지는 가치나 중요도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자발적인 개인의 의식과 의례를 통해 나의 신화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7 .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0
그전에는, 사랑이람 우리에게 성적 욕망을 야기하는 꼬마 신 에로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이 이해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였던 겁니다. 사랑에 빠지는 건 개인적인 경험인데, 에로스가 끼어든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아모르의 존재를 몰랐나봐요. 하지만 음유시인들이 알기로 아모르는 개인적이었어요.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은 '비개인적' 사랑이었구요.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p343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 경험인 겁니다.

> 에로스, 아가페, 아모르 모두 중요하다. 모두 사랑이라는 큰 원의 단면들이다.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
'크레도'는 '믿습니다'로 시작되어 '믿습니다'로 끝납니다. 교리만 믿겠다는 게 아니라 그 교리라는 것이 하느님이 만든 가르침 그대로라는 것까지 믿겠다는 겁니다.

고해를 할 때는 그동안 지은 죄를 줄줄이 꿰어냅니다. 그런데 죄악에 집착해 있으니까 신부 앞에서"이번 주일에는 죄라고는 하나도 안 지었으니까, 신부님, 저를 축복해주세요!", 이런 말은 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p345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9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p350
파이오니아(개척자)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랴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p351
중세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 충성만 제외하면 현대인들의 필수 미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p355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에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에요. 이 양자는 판이한 겁니다. 그들은 교회에 작접적인 공격을 가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을 관류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삶을 경험의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자고 하는 것이었어요.

p361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 지금 내 삶이 그러하다.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모듬살이가 나와 내 가족의 삶(사회적, 경제적)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마당안에서 밖으로 움직이기 버겨운 것도 사실이다.

p365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 진행형 성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더 정확하게는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 음양의 상징인 태극과 같습니다. (...)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우리'라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p366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 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진짜 결혼의 초보 같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8 . 영원의 가면

p375
<우파니샤드> -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 자신의 천복을 좇아 기쁨으로 하루를 보내고, 황홀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 또한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나 자신을 자연에 동화시키는 신의 일에 많이 참여하고 싶다. 

p376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다만 -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 서양적 사고방식과 동양적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갈리는 또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겠다. 서양의 사고는 사람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고(다시 말해 지극히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대하는 것 같고), 동양에서는 사물을 사물 그대로 대하는(존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로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물마다 신이 깃들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p378
(마음을 플라톤의 이른바 '불멸하는 생각, 신적인 생각'에 집중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물론이지요.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

p379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 분석 심리학자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신비가 일련의 개념이나 관념으로 환원되어버린 지금, 이 개념이나 관념을 강조하다 보면 언어 밖에 있는 초월적인 체험에는 단락이 생깁니다. 우리는 강렬한 신비의 체험을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p380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p387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p388
'종교(religion)'이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어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p389
우리는 수메르로부터 기본 사방과 360도의 방위각이 들어 있는 원을 물려 받았습니다. 수메르의 공식적인 1년은 360일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원의 상징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에게는 디지털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 이 디지털 시간을 벗어나야 우리는 진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p391
물고기와 같은 본성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수성에 속하지요. 종교라는 낚싯줄은 바로 그런 수성에서 인간을 건져올리는 겁니다.

p392
'만달라(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p396
종교 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 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왜,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p399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단순 평이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한 직관적인 진실이 드러남)입니다.

> 에피파니: 그리스어로 신의 출현을 의미한다. 귀한 것이 나타나다 정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문학적, 예술적으로는 일상의 어느 순간 마주치게 되는 진실의 순간을 의미한다. 책의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경영학적 관점에서는 기존의 것에 새로움을 입혀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하는 혁신을 말하기도 한다.

p405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 아니, 캠벨 이 양반이 천국을 다녀와봤나? ^^ 현세에서 경험하는 천국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천국이 어떤 기쁜 상태나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공감, 동감!

p406
시바 신의 춤, 이것이 곧 우주입니다. 시바 신의 머리에는 해골과 초승달이 있습니다. 해골과 초승달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지요.  그의 한 손에는 째깍거리는 조그만 북을 들고 있어요. 이게 바로 시간의 북입니다. 이 시간의 째깍거림이 영원에 대한 앎을 가로막지요. 우리는 시간에 갇힌 존재랍니다. 그러나 시바 신의 다른 한 손에는 시간의 너울을 태우고 우리 마음을 영원으로 열어주는 불꽃이 있습니다.

> 시바신의 한손에 들려있는 시간의 째깍거림에 붙들려 있지 말고, 다른 한손에 쥐어진 영원으로 가는 불꽃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

p411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p412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아무렴, 인생이 마트에 진열된 상품도 아닌데 목적이라는 것이 바코드 태그처럼 인생에 부착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의 마디마디에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 목적이 있을 수는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에 의해 생겨나는 부산물이리라.

p415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아...


내가 저자라면


 캠벨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깨달은 선승의 설법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그의 신화 사상의 핵심은 불교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가리키는 언어너머의 통찰이 책의 곳곳에서 번뜩인다. 책을 읽다 보니 불교 서적을 탐독하고픈 욕구가 생기고, 언표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낀다. 캠벨은 학자라기보다는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구루와 같은 느낌이다. 그의 글은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으나, 우리가 언어 너머의 진리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 '이해'라는 말 자체부터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캠벨이 집대성한 태초부터 인간을 지배해온 우주와 지구의 모든 이야기가 녹아 있다. 캠벨의 스펙트럼은 그리스 신화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인디언 신화와 인도신화, 불교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은 물론 20세기 영화 <스타워즈>까지 섭렵한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신화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내면의 안내자이자 지혜 그 자체이며, 결국 우리 자신의 내부에 신화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담 형식으로 풀어간 <신화의 힘> 한 권만으로도 온 우주의 신화를 엿볼 수 있다.

 목차는 별게 없다. 인터뷰한 내용을 기반으로 큰 주제별로 묶었을 뿐이다. 목차의 배치가 책으로부터 얻는 가치에 주는 영향은 극히 미미해 보인다. 목차의 구성은 일단 논외로 하고 각각의 장절에 대해 정리한 바와 좋았던 점을 목차별로 간략히 적어본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삶의 의미는 '살아 있음'의 경험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삶은 실재하는 것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 진정 삶을 '경험'하고 있다면, '의미'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삶의 경험은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인 것이다. 꿈은 개인적 차원의 꿈과 세계적 차원의 꿈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계의 꿈이 바로 신화이다. 세계의 신화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지역적, 사회적 신화이며 다른 하나는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이다. 성서적 신화가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캠벨은 이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적 가치관이 지역적인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인 반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는 자연과 조화하는 동양적인 가치관을 표방한다.  

2. 내면으로의 여행 
암흑에서 희망이 솟아 오른다. 불타고 남은 재 속에서 새 싹이 움튼다.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여는 주체가 바로 영웅이며, 영웅은 재탄생의 시련을 겪어야만 한다. 언표할 수 없는 사상 너머의 것을 우리에게 인도해 줄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신화이며, 신화를 통해 우리는 영원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영원은 시간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언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지금도 마음을 울린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태초의 이야기들 - 신화와 의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들은 모두 자연에 기반하거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들이다. 자연의 정복이 저주로 되돌아 오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태초의 신화와 의례의 가치에 주목해야만 한다.

4. 희생과 천복(天福)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삶의 사명이며 영웅의 길이다. 그리하여 천복은 누구의 선택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난다(Ananda)로 표현되는 천복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나온다.

5. 영웅의 모험 
천복을 찾았으면 이제 모험이다! 나에게 1년간의 연구원 과정은 모험의 제 1장이다. 캠벨이 제시한 다독을 통한 실마리 붙들기는 유용해 보인다.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모험을 떠나야 한다.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된다.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수렵의 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변화는 여신을 신화의 전면으로 등장시키지만, 자궁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보금자리는 곧 남근과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신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조화여신의 지혜는 바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우리 밖에도 존재한다. 이는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화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는 중세 신화의 클라이막스이다. 삶의 충동은 죽음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메멘토 모리(Mem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아모르 파티(Amor fai),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네 안의 신을 찾아라!

8. 영원의 가면
감탄, 명상, 몰입, 자연과의 합일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들이자만, 언어 밖의 깨달음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종교는 단순히 그 연결 수단일뿐이다. 시간 너머의 영원에 머물러야 한다. 시를 통해 우리는 그 황홀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인생이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이며 그 세포 깊숙히 우주의 신화가 각인되어 있다. 

 한번의 독서로는 책의 심오함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책의 내용중 제대로 이해한 것이 20% 정도는 될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그 구성을 논하는 것은 참람한 짓이다. 다만 각각의 장, 그리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이 물 흐르듯이 연결되지 않고, 여기 저기 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인터뷰 형식의 책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 이제야 신화의 기초에 들어선 자가 물 흐르듯 책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내 능력의 부족이다. 아는 척 하며 작성한 북리뷰를 보고 훗날 부끄러움에 몸서리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셉 캠벨이였다면 이렇게 한번 책을 바꿔 보겠다는 얘기는 아직은 시기상조이고, 내가 원저를 출간한 모이어스였다면, 아니면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한 역자 이윤기였다면 어떻게 책을 구성해 보았을까 생각해 본다. 단순한 번역으로 그치지 않고 원저를 뒷받치는 풍부한 예시와 해설을 통해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는 제 2의 번역, 즉 해설서 형식으로 또 다른 버젼을 출간하는 것도 나와 같이 신화에 무지한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너무 친절한 설명은 오히려 원저의 진리를 가리는 법이다. 하여 그 중용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을 듯 하다. 번역도 창작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이 책을 보며 느낀 또 다른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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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20:11:01 *.130.115.78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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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13:54:04 *.103.3.17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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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21:58:59 *.124.22.18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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