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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0일 10시 58분 등록

신화의 힘(조셉 캠벨, 이끌리오)

 

1. 저자에 대하여

1904

뉴욕 출생

* 부모님의 로마카톨릭 신앙에 영향을 받음

1910

(6)

가족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관람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됨

1913

(9)

뉴욕의 뉴 로셀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대한 책을 전부 탐독

1915

(11)

성인도서 서가 출입 허락받고 독학 계속

1918

(14)

병에 걸려 한동안 집안에서 자연 과학 공부.

1919

(15)

코네티컷 뉴 밀포드 <캔터베리 예비학교> 입학(~1921)

* 1919년 집에 화재 발생, 할머니 숨짐

1921

(17)

<다트머스 칼리지> 입학

* 생물학, 수학 전공

* 2학년 때,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읽고 인문학에 눈뜸

1922

(18)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1926)

*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 활동

*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 연주하는

* 가족 동반 유럽여행에서 동양철학의 거장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조우

* 문학 학사학위 취득(1925)

1926

(22)

<콜롬비아 대학> 중세문학으로 석사과정

* 성배에 관한 논문 '가슴 아픈 일격 The Dolorous Stroke' 발표

1927

(23)

프랑스 <파리 대학>으로 유학(~1928)

*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 불어, 프로방스어 공부

* 현대 미술(피카소, 브라크)과 현대 문학(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특히 조이스)을 처음 접함.

독일 <뮌헨 대학>(~1929)

*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

* 프로이트, , 토마스 만, 괴테 등의 작품을 접함

1929

(25)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주 전에 귀국, 준비하고 있던 박사논문을 접고 우드스탁 숲 속에 있는 오두막에 세 들어 살며, 엄청난 양의 독서를 시작(~1934)

1931

(27)

친구 아델 데이비스를 통해, 존 스타인벡 부부, 그리고 생물학자 에드 리켓을 만나 교류(~1932)

* 에드 리켓과 함께 알래스카의 브리티쉬 콜럼비아까지 해안 여행하며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으로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됨

1933

(29)

모교 <캔터베리 예비학교>에서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쳤으나, 그해 말에 퇴직하고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에 열중

1934

(30)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로 초빙, 38년간 대학 문학부에 재직

1938

(34)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의 단원 진 어드먼과 결혼

* 진 어드먼은 캠벨의 학생이었으며, 결혼당시 그녀의 나이는 22살로 캠벨과는 12살 차이

1941

(37)

제프 킹 글, 모드 오크스 그림의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 나바호족의 전쟁의례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A Navaho War Ceremonial'의 주석본을 집필

* 첫 번째 출판물

1942

(38)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The Gospel of Sri Ramakrishna)‘'우파니샤드 (Upanishads)'의 번역과 편집(~1944)

* 스와미 니카라난다와 공동작업

1943

(39)

침머 사망후 그의 부인에게 침머 유작들의 편집을 부탁받고 12년 동안 작업,, 다음 작품들을 출판

'인도의 예술과 문명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1946, 42)

'왕과 시신 The King and the Corpse' (1948, 44)

'인도 철학 Philosophies of India' (1951, 47)

'인도 아시아의 예술 The Art of Indian Asia' (1955, 51)

1944

(40)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출간

* 헨리 모튼과 공동 작업

'그림동화' 주석 집필

'댄스 옵서버 The Dance Observer'지의 편집진에 참여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의 집필 시작

1949

(45)

볼링겐 시리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출간

* 출판 전 두 곳의 출판사에서 수정 요구 및 거절을 받음

* 이 책으로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음

1953

(49)

크리에이티브 영화 재단의 대표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열린 에라노스 협회 '연감 회보'의 편집

* 그 일로 스위스에서 칼 융, 미츠치아 엘리아데, D.T. 스즈키 등을 만남

1954

(50)

인도,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홍콩, 일본 등을 여행

* 안식년 여행

1956

(52)

위싱턴 D.C의 국무부 외교연수원 강의 시작

1957

(53)

에라노스 협회의 첫 번째 화보, '의미없는 상징 The Symbol Without Meaning'출간

1959

(55)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의 의례 (Renewal Myths and Rites of the Primitive Hunters and Planters)' 출간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 시리즈의 1권 출간

* 에라노스 협회

1967

(63)

'예술, 종교, 현대 문학 학회' 운영진 취임

1969

(65)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적 차원의 탐험 (The Flight of the Wild Cander: Explorations in the Mythological Dimension)' 출간

1972

(68)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출간

* 뉴욕시의 쿠퍼 유니온에서 행한 강연집.

<사라 로렌스 대학> 퇴임

'종교학회' 회장 취임

아이슬란드와 터키 여행

아내 진 어드먼과 뉴욕시에 '열린 눈 극장(Theater of the Open Eye)' 설립

1974

(70)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 출간

1976

(72)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헌으로 멜셔상을 수상

이집트와 그리스 여행 안내

1978

(74)

뉴욕 브루클린 소재 <프랫 연구소>에서 명예박사학위

1982

(78)

하와이로 이주

1983

(79)

'세계 신화의 역사 지도: 1. 동물적 힘의 길 (The Historical Atlas of World Mythology : Vol. 1. The Way of the Animal Powers)' 출간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의 초청으로 스카이워커 랜치 시사회 참석

* 조지 루카스는 캠벨 저작에서 영감을 얻어서 스타워즈시리즈제작

1984

(80)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80세 생일 파티 개최

* 샘 킨, 스탠리 캘러먼, 바브라 마이어호프, 마리자 짐부타스, 로버트 블라이 등을 포함하여 천 명의 하객 참석

1985

(81)

'동물적 힘의 길'로 뉴욕 국립예술회에서 문학 명예 메달 수여

1986

(82)

'바깥 세계의 내적 접근: 은유와 종교로서의 신화 (The Inner Reaches of Outer Space: Myth as Metaphor and Religion)' 출간

1987

(83)

'영웅의 여정: 조셉 캠벨의 세계 (The Hero's Journey: The World of Joseph Campbell)'의 시사회

*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감독/새로운 영화 축제

1030, 하와이 호놀룰루 사망

1988

(사후1)

PBS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 방영

*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현재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중 하나로 꼽히고 있음

<사라 로렌스 대학교>'비교신화학의 조셉 캠벨 강좌' 개설

1991

(사후4)

조셉 캠벨 재단 Joseph Campbell Foundation 설립

<국내에 소개된 저작들>

네가 바로 그것이다 Thou Art That, 박정미 옮김, 해바라기, 2004.

신의 가면 1: 원시신화 The Masks of God Vol. I : Primi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3.

신의 가면 2: 동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I : Ori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신의 가면 3: 서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II : Occidental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신의 가면 4: 창작신화 The Masks of God Vol. IV : Creative Mythology. 이진구 옮김, 까치, 2002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이은희 옮김, 한숲출판사, 2004.

신화의 세계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과학세대 옮김, 까치, 1998.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20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신화와 인생조셉 캠벨 선집, 다이앤 K.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09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데이비드 쿠들러 엮음, 노혜숙 옮김, 아니마, 2014


이십대 후반 5년을 내내 숲속에 묻혀 책만 봤단다. 마침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닥쳐와 다른 일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지만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함께 대공황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이 캠벨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의 부모도 보통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의 용기와 대담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연구원 수련을 위해 휴직을 결정했다. 캠벨의 자신에 찬 권유가 없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결정을 하고 나니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과연 잘 한 걸까? 5년까지는 아니라도 1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벌써부터 주위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일들이 뻥뻥 치고 들어온다. 마치 편의점에 진열된 맨 앞 음료수를 빼내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딸깍 다음 음료병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것처럼.

부처는 깨달음 전에 세 가지 유혹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중의 마지막이 '사회적 의무'. 나는 맹렬하게 밀려오는 각종 의무들을 피해 나만을 위한 깨달음을 위한 시간에 무사히 착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저절로 그리 되지는 않을 듯하다. 특별한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시시각각 나의 길을 막아서며 으르렁거리는 의무의 용들을 나는 어떻게 무찌를 수 있을 것인가? 이 순간 캠벨 할아버지에게로 통하는 핫라인이 있다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달려갈 것 같다. 그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 모든 유혹을 견뎌냈단 말인가?


2010. 4.26 신화의 힘리뷰중에서

(http://www.bhgoo.com/2011/index.php?mid=r_review&search_keyword=%EB%AF%B8%EC%98%A5&search_target=nick_name&page=4&document_srl=112649)

 

무엇으로, 어떻게 이 모든 유혹을 견뎌냈단 말인가?’ 이제는 더 이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굳이 캠벨 할아버지를 소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다시 돌아와 그를 만나고 있는 내 자신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2. 내가 저자라면



우선 대담프로를 그대로 엮은 구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석보고서를 쓰기 위해 거치는 1차적 작업결과물에 해당된다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일까? 독자는 화자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별도의 에너지를 쏟지 않으면 안 된다. 참으로 불친절한 구성이다. 이와 대비되는 같은 종류의 책으로는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 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질의응답이 컨텐츠의 기본이 된다는 근본적인 공통점에도 두 책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워드 커틀러는 달라이 라마와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소화한 과정을 조근조근 풀어내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그들의 대화에 빠져들게 한다직접화법을 고수한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나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임에 틀림없다.

내용은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7. 사랑과 결혼이야기' 부분이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이다. 결혼에 대한 '성실'을 주장하면서도 결혼외적 사랑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 특히나 혼란스럽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영적인 고결함을 인생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사회관습이나 법률적인 차원에서의 '무죄'와는 차원이 다른 본질적인 '고결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보다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필요하고 설명도 더 필요하다뭔가 있는 듯한 그러나 말하기를 꺼리는 듯한 선문답식 대화는 내내 '금제'를 깨는 영웅의 여정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부분에서 머뭇거리는 느낌으로 답답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종합적인 대담형식이라 어쩔 수 없는 생략이었다면 그의 다른 책에서는 보다 명쾌한 대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좀 더 캠벨의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가 봐야겠다.


2010. 4.26 신화의 힘리뷰중에서

도무지 맥락을 따라가지 못해 겉돌기만 하던 8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독서체험. 캠벨과 모이어스를 연결하는 주파수 대역으로 빨려들어가듯 읽어내려갔던신화의 힘. 국내에서 소개된 그의 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도 수차례 읽어본 현재의 입장에서 그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1초도 망설이지 않아도 신화의 힘』이.


8년전 신화의 힘.png


한 인간의 80 여생, 그것도 天福에 헌신한 순도높은 80여년이 집약된 수퍼울트라고농축 엑기스신화의 힘. 너무나 강력해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하면 오히려 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책. 이 책이 이렇듯 감당하기 버거운 것은 삶이 우리에게 그런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8년 전 앞 뒤가 안 맞는 모순이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약처럼 느껴지던 캠벨의 이야기가 글자가 아닌 문장으로 아니 이미지 그 자체로 가슴으로 무찔러 들어왔다. 베스트를 추리고 추려도 8년 전 필사 원문의 훌쩍 넘어서 버릴 정도였다.


신화의 힘 리뷰.png


물론 여전히 저자들이 촛점을 맞춘 주제, 설득을 위해 끌어들인 소재, 전체적 뼈대, 전개의 방식과 표현까지 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신화의 힘을 촬영할 당시의 캠벨(80)의 나이, 이 책을 엮어낼 당시의 모이어스(50대 중반)의 나이쯤에 가까워질 어느 무렵, 마치 책을 처음 접한지 8년 만에 그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게 된 지금처럼 문득 그 맥락이 내게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 아닌가? 삶이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할 이유가 또 한 가지 늘었다. 다행이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Best)


개정판_옮긴이의 말

초판_옮긴이의 말

(7)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캠벨의 자기 구원이 곧 우리의 자기 구원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만, 캠벨이 그렇게 이르렀으니 우리도 그의 눈길과 용기와 깨달음을 길잡이 삼아 거기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 른지요? _ 이 책은 캠벨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종합답변서였던 거구나.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쇼를 통해 발견한 씨앗들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질문이 되는데 40여년, 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는데 40여년이 또 필요했던 거구나. 그렇게 그의 삶은 질문을 찾는 절반과 그 답을 구하는 나머지 절반으로 이루어졌던 거구나. 마흔 셋에 이제야 질문 하나를 얻은 나도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 거구나. 8년 전에는 도무지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던 신화의 힘에 이만큼 다가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이 그냥 흐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구나. 다행히 그의 눈길과 용기와 깨달음을 알아볼 눈을 얻었으니 적어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젠 정말 두려움을 내려놓아도 좋겠구나!

 

빌 모이어스의 서문

(9) 이그쥬가르쥬크(에스키모의 샤먼),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_ 상실의 고통은 그것이 응당 있어야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믿음의 허구성을 이해하면 대부분의 고통은 덜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삶의 무상함에 대한 깨달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기본조건이 되는 모양이다.

(13) 우리는, 그 분이 내주시는 일주일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그분과 맞섰습니다. 그 학생이 그랬지요. ‘선생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이 과목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세 과목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독서량을 할당하십니다. 도대체 이걸 일주일에 어떻게 다 읽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캠벨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이러시더군요.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_ 연구원 필독서도 그런 의미인지도 모른다. 제자들에게 평생 두고두고 읽을 독서목록을 주신 것이다.

(14) 언젠가 나는 그에게, 나를 이렇게 제자로 만들어놓았으니 지금부터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깡그리 책임을 져줘야겠다고 한 일이 있다. 그때 그는 웃으면서 로마의 속담을 인용했다.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_ 한 때 내가 스승을 대하는 태도였다. 반 감사, 반 원망. 스승이 웃으셨던 의미를 이제는 알 듯하다. ‘이 길이 네 길이 아니었더라면 내 아무리 달콤하게 유혹했더라도 너는 단 한 발자국도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무엇을 책임져야한다고 우기겠느냐?’

(15) 신화라고 하는 것은 선험자가 그린 내면적인 경험지도 같은 것이겠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내린 살풍경한 정의에 만족하지 않는 눈치를 보였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天球의 가락이다 _ 이제야 그 차이를 알겠다. 어느 누구도 우주의 노래와 천구의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완전히 경험할 수는 없다. 그저 노래와 가락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얻을 수 있을 뿐, 그러니까 신화는 그 감각을 얻게 된 자들이 부르고 추는 노래이자 춤인 것이다.

(16)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 _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하지 않고 새로운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것을 내어놓고 새로운 것을 맞을 때까지의 공백기간, 그 즐거움의 공백기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공백의 기간을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모든 종교의 제1 기능이 아닐까?

 

1. 신화와 현대 세계

(26)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 ★★★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

(30)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_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축복인 이유다.

(32) 결혼에는 전혀 다른 두 단계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_ 이렇게 보면 분명 남편을 사랑하는 게 맞기는 한데....어렵다.._이제는 의심없이 관계라는 신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흔들리는 나를 놓지 않고 붙들어준 나의 신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34)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_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_그러고 보니 나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환경에 살고 있구나. 나는 결혼이라는 현장에서 궁극의 영적 성장을 이루어낸 사람으로 기억되겠구나. 그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마음을 다해 길을 가기만 하면 되겠구나. 삶은 이토록 은혜로운 것이었구나. 나는 이토록 사랑받는 존재였구나!

(35) 고린도 전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_ 지금 이 단계. 내가 알아차려야 할 그것인지도!!! 경계를 너머서는, 경계바깥을 품어낼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야할 시점이 온 것이다. 두렵지만 받아들이자. 받아들여보도록 하자!

(38) 나 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_ 나도 캠벨과 같은 잡학가가 되고 싶다.

(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2)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삶의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5) 인디언의 페요테 사냥 임무야 말로 신비 여행처럼 보입니다. 이 임무에는 신비여행의 전형적인 요소가 골고루 들어있어요.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신비 여행은 영험이 없어지지요. 과실을 빠짐없이 고백한 다음에게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_ 개인사 작성과 레이스 여행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여행의 도정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정신적 변용의 단계를 나타내는 특별한 神堂이 있어요. 이 신당을 모두 지나고 나면 이윽고 페요테를 모으는 일을 시작합니다. 살금살금 다가가 정말 사슴에게 하듯이 조그만 화살을 날리고는, 쓰러진 페요테를 모으는 의례를 연기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과정은 내면 여행과 관련된 체험의 복사판입니다. 이들은 이 의례의 각 단계를 영적인 변모와 정확하게 동일시합니다._ 연구원 수련의 의미...이들이 어디에 있든지, 이들이 있는 곳은 옛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聖地인 것이지요..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까?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영적인 체험은 LSD를 통해 환각 상태에서 하는 체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 _ 맥락을 알고 있는 것은 이리도 중요하다. 맥락을 꿰고 있으면 어디든 성지, 성소, 배움터로 만들 수 있다. 신화는 바로 이 맥락짓기를 도와주는 열쇠인 것이다.

(48)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56) 예수는 누구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고 했어요. 이때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길을 따르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의 길을 통해 아버지에게 이르려 한다고 칩시다. 그러지만 인도의 칼리 여신 등을 통해서, 여신을 찬송함으로써 이르는 편이 나을 테지요. 이것은 우리 삶의 신비에 이르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57)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 뿐입니다. _ 어떻게 쇄신하는 것이 최선일까?

(58) 원수를 사랑하라. 열어라. 남을 평론하지 말라! _ 특히 남을 평론하지 말라..명심하자..너 언젠가부터 사람을 이해하겠다는 핑계로 관찰하고 연구하고 있어.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라는 거 알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는 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거니?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라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 준비란 걸 마칠 수 있는 거니..정말 알고 싶다 _ 이것이 사람을 받아들이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평론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에서 비롯된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64)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77)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 _나의 신화의 조건. 전 생애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줘야 할테니까 _ 그렇다면 자연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지가 아닐까? 대지의 생노병사를 따라가보면 좋지 않을까?

(80)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이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은 삶의 시작이랍니다(81)_저는 거꾸로 살아남은 삶을 끝내고 누리는 삶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_ 대지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겠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9) 몽상가, 심지어는 영적인 지도자, 영웅의 상당수도 신경증의 언저리를 맴돈다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네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_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신경증이 깊어지기 전에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이제는 그 숲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숲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90)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_ 자기 다운 삶의 눈에 보이는 가능성을 열어주신 것이 스승의 용기였을 것이다.

(90) 꿈은 상상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상상력은 우리 육신의 각 기관 에너지에서 흘러나옵니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근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주제를 지닙니다.

(94)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지었구나, 무슨 까닭이나 내가 낳았음이라이로써 그는 그 지으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창조주이니라 _ 이것은 책임감일까? 사명감일까? ‘엄마라는 역할, 낳은 자로서 이 아이들을 어디까지 보살펴주는 것이 최선일까?

(10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5)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자기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_ 사회에 파묻힌 에서 진짜 로 태어나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신기하다.

(115) 종교는 제2의 자궁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_ 읽기와 쓰기는 내게 종교다. 지금은 그렇게 익어가는 과정인가보다. 무리하지 말자.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도록 하자!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라도. 평생이 걸린다 해도 그건 끝이 아닐 거다. 토양으로서 무르익는 것의 유용이야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116)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저긴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118)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승천 이야기는 누군가가 닿아본 적이 있는 해변에서 흘러내려온 병 속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군요.

(118) 천국이나 마찬가지로 재림도 메타포입니다.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淨罪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한 채로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약점이 말끔히 씻기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_ 생의 다음 국면을 즐길 준비가 되지 못한 채로 새 삶을 맞으면 장애물을 씻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디톡스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정죄라고 하나보다.

(119) 재림 혹은 환생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_ 환생이란 정죄라는 과정을 통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깨워 쓸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모양인가보다. 그것이 시선이든 의식이든 내가 아직 짐작도 못하는 또 다른 무엇이건 간에...

(120)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 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_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 그걸 겁내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들어나 보자. 내 안의 이야기들을.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오는 그 이야기들을 찬찬히 받아 적어보자. 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산달이 차서 나오려고 하는 이야기들을 받아적는 것이 우선이다.

(132) 내 이제 그대를 위해 사랑의 책을 한 권 쓸 터인즉, 그 책을 읽으면 그대와 그대의 비는 사실은 하나인 둘이라는 신비를 알게 될 것이요. 브라마가 그 빛으로 그려내는 것 또한 사실은 하나인 둘의 신비일 것이오.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인드라는 출가하여 요가 행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생전에 상징으로서의 영원, 즉 브라마를 체현할 것을 결심합니다. _ 그 책은 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현생의 디테일을 더한 그런 책을 쓰고 싶다. 브라마를 체현하는 삶을 인도하는 가이드로 살고 싶다.

(133)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는 모양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테니까 _ 결국 삶의 길은 같은 대상을 느끼는 센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상을 개선해보려는 노력보다 센서를 개선해보려는 노력이 더 현명한 이유다.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3)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8) 인도의 전통입니다만, 스승이 되는 사람은 찾아오는 사람에게 늘 이런 질문(질문이 있느냐?)을 던집니다. 이들은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3.태초의 이야기꾼들

(142)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_ 캠벨같은 사람도 매 국면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는구나. 신화학자로 무르익고 난 이후에도 이 과정은 변함이 없는 거구나. 그렇게 누구나 죽을 때까지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거구나.

(145) 어디에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이다...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_ 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을 해석이라고 하는 것 같다. 해석은 곧 해석자의 관점 그 자체에 다름이 아니다.

(164) 초경을 치른 여자에게도 입문 의례가 있었다고 해요. 조그만 오두막 안에서 며칠 동안 명상을 하면서 여자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기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두막에서 무엇을 하는 거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 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 _ 이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인은 존재자체가 성취다.

(168) 전통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168) 샤먼은...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적 해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샤먼의 의식은 늘 열려있습니다. 샤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무의식에 빠져들 수 있지요.

(172) 이러한 접신 체험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겠지요? 신화적인 삶이라고 하는 인류의 유산을 해석하게 되겠지요.

(170) 여자는 생명이고 남자는 생명의 종입니다. ★★

(175)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_나는 샤먼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창세부터 거기서 나를 기다리던 바로 나의 운명이었습니다_8년이 지난 지금 역시 그 느낌은 변함이 없습니다.

(179)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라고 하셨습니다. ‘성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셨습니까?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

(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

(189)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_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삶고 싶어요!!_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동안 그러고 싶어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이유들을 거의 무찌르고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190)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런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_ !! 그렇게 하겠습니다! _ 아직도 사부님이 이르신 그 경지가 궁금합니다. 여전히 제가 사부님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190) 샤먼의 권능은 그가 거느린 친교영신, 즉 샤먼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신들로 상징됩니다.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샤먼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자기 부족을 위한 의례행위로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3)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

(194)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

(198) 농경 문화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이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자궁이 그렇게 자주 등장할 수가 없더군요. ★★

(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204)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들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對極,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

(204)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으로는 죽고 으로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이 곧 신입니다. 농경 문화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잘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211)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_삶은 매 순간 아슬아슬한 줄타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지 오래지만 그래도 지친다. 그냥 대충 살 수 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많이.._ 이제는 이해한다. 그리고 험난한 위기를 극복하고 이 자리에 이른 스스로에게 가슴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216) 어머니가, 어머니 대지의 상징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

(217) 미로는 앞길을 막는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지복직관을 경험하지요. _ 자만, 욕망, 공포...에 사로잡힌 채로 머무는 것도 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마저도 존중한다. 손 내밀지 않는 자는 내버려두는 것이 구원이다.

(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열정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서 채용하고 발전시키는 테마가 바로 이 연민입니다...깨달음은 자기에서 사랑할 힘이 나오고, 이로써 길을 열 수 있다는 깨달음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_‘열정그러니까하는 사랑이라면, ‘연민그럼에도 불구하고하는 사랑인 것 같다.

(223)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과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씩 정도는 약 반 시간씩 개인 면담을 하고는 했어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붙잡고, “이 학생은 여기에 매달리게 해주어야 겠구나”, “이런 결심을 하고는 합니다. ★★

(225)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_아직 이걸 벗어나지 못 한 거 같아요.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엄청 스트레스받고 있는 스스로를 느낀답니다. --;;_ 이제야 이 말의 의미를 이해했어요. 그리고 이제야 답합니다. ”!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이 길 위에서 행복할 자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정확히 알았으니까요.“

(226)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사트’‘취트’‘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 _ 그렇다.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그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내게 여전히 남아있는 시간의 이유임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서두를 이유는 없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흠뻑 적시고 넘치는 생명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넘치는 사랑은 우선 나 자신을 타겟으로 쏟아부어보도록 하자! 그것만이 내 사랑을 전하는 유일한 길일테니까.

 

5. 영웅의 모험

(229)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_ 지금 나는 스승이 깔아놓은 그 실을 찾아 따라가는 중이다. 스승의 실이 여전히 길고 길게 남아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하면서. 요즘 부쩍 사무치는 사부님,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230) 아이의 시기에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_ 죽음과 재생의 경험, 지금 내게도 반드시 필요한 경험. 적당히 피해갈 생각은 않는 것이 좋겠다!!

(231)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는 밖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더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요. 돈벌이가 훨씬 더 광고가 많이 되어 있으니까요...얼마나 영웅적인지 상관없이, 늘 일어나는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모성은 이제 별로 신기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어머니가 영웅이라....참 근사한 발상이군요.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지요. 내가 신화를 읽고 알아낸 거랍니다. 어머니의 행적도 일종의 여행이군요. 그렇지요.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여행에서 아기를 안고 귀환하여 이 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가 될 수 있겠지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삶을 미리 사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지요. 오토 랑크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보호를 받아 마땅한 영웅적인 행위로 본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 _ 모성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을 하고 싶다.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이 축복을 다른 엄마들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참 좋겠다!

(233)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 예비해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233)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인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_ 그렇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으로 나를 보존하는 길이 이 길뿐이기 때문이다.

(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7) 통찰의 탐색(vision quest)이라고 불러도 좋은 특정한 신화 유형이 있어요. 통찰의 탐색은 홍익의 탐색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것은 세계의 모든 신화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나의 첫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이 문제의 제시를 시도한 것이지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_ 자신이~만납니다 이걸 바로 깨달음이라 부르는 것이구나!! 귀환이란 이 깨달음을 자신이 속하던 세계로 갖고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242)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어요. 과학은 머지 않아 신화가 이야기 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_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는 고마운 메시지!

(252) 원시인들의 입문의례는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년에게 가해지는 입문의 시련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것보다 훨씬 가혹합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것 뿐입니다. _ 그렇다면 문제는 소녀에게 소년의 여정을 가르쳐온 문화인지도 모른다. 소년의 여정을 준비하던 소녀는 별안간 찾아온 몸의 신호에 당황하게 된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도 마치 반드시 가야할 여행에서 낙오된 것 같은 당혹에 빠지고 만다. 이 격차를 처리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자신의 삶으로부터 이탈해버리는 상태가 된다.

(252)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_소년만 그럴까요? 삶이 여성을 편애한다지만 요즘의 여성은 그래서 도리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놓인 듯 합니다. 소녀의 문제는 오히려 어머니로부터의 독립’ ‘스스로에 대한 몰입을 허락받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뭘 해도 마지막 순간엔 그 노무 여성적 특수성이 발목을 잡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여행의 범위를 한정짓기 위해 발목에다 끈이라도 묶어 놓은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저만의 피해의식이라구요.그렇다면 차라리 좋으련만..._ 이제야 내 발목에 묶인 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깊은 영적 여정이야 준비만 되어있다면야 어디서도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것도.

(254)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_ 이제야 알겠다. ‘초연하겠다 마음먹고 현장에서 물러나 초연의 경지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 ‘초연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연하지 못한 실패의 누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삶의 현장,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원이다. 해탈을 꿈꾸는 나에게 어찌 실패가 두려운 것이겠는가?

(257) 그날 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그로부터 50여 년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지요.

(257) 욕망과 공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감정에 지배됩니다.

(257) 아담과 이브는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나 석가는 흔들리지 않아요. 아담과 이브는 이로써 자식을 가지고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석가는 삶의 공포에서 놓여나는 방법을 가르치지요. _ 아담과 이브는 열등하고 석가는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과 이브의 흔들림은 흔들림 없는 석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다. 만일 이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석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면 그들은 아직 삶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배아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271) 세속에 적용되고 있는 종교에서 알맹이만 따로 떼어내어 볼 수 있다면 새로운 신화의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271)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 육체가 우리의 깊디깊은 삶의 정체를 깨달아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조만간 무엇이, 이 이승의 삶이라는 꽃을 잘 가꾸는가를 알아내어 그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

(272)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일반적으로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_그런데..아직 무서워요. 머리는 알겠는데..그래도 마음이 아직 무서워해요. ‘는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명을 얻는 존재. 그러나 이를 인정하면 지금까지 나를 독점하고 있던 존재(남편, 아이들..)들이 차별성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요. 피할 순 없을 거예요.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제 삶은 응당 그래야 할 방향으로 진행될 테니까요. 제가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준비도 채 못한 상태로 내 던져지겠죠? 지혜로운 조화를 구하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_ ! 8년 전에도 나는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명을 얻는 존재임을 알아차리고 있었구나!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 천복을 좇으면 오히려 삶이 조화로워진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거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세월을 보낸 내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럽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_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천복을 찾는 것과 같은 의미다. 무엇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 생명 에너지장에 접속되는지를 알아내어 그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세상에 그 에너지를 전할 수 있게 된다.

(274)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여자는 자기의 용을 죽인 것이지요. _ 모든 고통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도 용 한 마리는 죽인 것 같다.

(275)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을 만나는 일입니다. ★★★

(277)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278)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바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_ 영웅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끔찍하게도 두려워하던 실패에 대한 공포, 거절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진 나를 느낀다. 실패도 거절도 내 존재에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오히려 초대해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굳이 이것들을 초대할 경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와 거절이 두려워 응당 맞이해야할 것을 피해다니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283)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285) 아이들은 그 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나도 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아요. 아이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겠지요. 맡겨서 홀로 서기에 충분한 힘이 있게 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지요. 새끼 새는 자기가 날 수 있을 때가 되었다는 걸 압니다...내 생각에는, 사람 안에도 이런 것이 있지 싶어요.

(285) 예술 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

(285)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286)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90) 여자가 물 속에 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수중 여행 모티브는 거의 다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노인의 손을 잡고 물 밖으로 나온 여자는, 물가에 서 있는 그 노인과 똑같은 수많은 노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천상계의 권능자인 천둥의 신들입니다. 여자는 물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 물 밖 역시 인간 세상은 아닙니다...이제부터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자기 힘의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이용하는 겁니다.

(292) 위험한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곧 말라버려요.

(292) 개인적인 삶은 곧 원형적인 여행으로 번역되는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전혀 개인적인 존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은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신에 버금가는 원형적인 삶의 심오한 영적 차원을 사는 것이지요. _ 어떤 느낌인지 알 듯하다. 그러나 보통사람의 경우 개인적인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그런 역할을 맡으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 같다.

(293)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295) 탁발승, 세상의 삶을 등졌기 때문에 욕망도 공포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그 말을 들은 왕자는 돌아오면서도 자기도 아버지의 궁전을 떠나 삶의 고통에서 놓여나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합니다.

(298) 앞에서 말한 내 친구는 늘,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의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

(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 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은 바로 이 정점에서 생겨납니다...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부처가 말하는 니르바나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평화의 중심점입니다. ★★ _ 요가하면서 핵심적으로 몸에 익혀야 할 감각!

(300)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쫒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습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서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305)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

(306)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이고 초월적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

(308) 여신이 가장 중요한 신화 이미지가 되는 곳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의 나일강 문화권 같은 고대의 농경 문화권입니다...여신이 창죈일 때 이 여신의 몸은 곧 우주가 됩니다. 이 여신은 바로 우주와 동일시됩니다. 우리가 이집트 신전에서 본 여신 누트의 상이 바로 이런 여신입니다. 누트 여신은 삶을 송두리째 감싸 안는 거대한 하늘입니다. ★★

(309) 여성은 시공 그 자체인데, 이 여성 너머에 있는 신비는 곧 한 쌍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

(311) 요즘의 젊은 과학자들은 형상을 낳는 장이라는 뜻으로 형태 발생의 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이것이 바로 여신입니다. 바로 형상을 낳는 장입니다. ★★

(320)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석가도 같은 의미에서, 어머니의 가슴 차크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322)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28) 나는 만물이 自然母인 여신이다. 나는 만물의 연인이자 지배자다. 나는 지옥에 있는 여신들, 천상에 있는 으뜸자리 여신들을 힘으로 다스린다. 그래서 나는 홀로, 오로지 한 형상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신과 여신으로 현현한다. ★★★

(329) <황금나귀>, 주인공은 탐욕을 부리다가 그만 나귀가 되고 말지요. 이시스 여신의 은혜를 입어 본 모습을 되찾는 구원을 얻으려면, 주인공은 일련의 험한 고통과 능멸의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나귀가 온갖 시련을 겪고 있는 참에 이시스 여신이 한 송이 장미를 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나귀가 된 주인공은 그 장미를 먹어버림으로써 사람의 모습을 되찾지요.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여느 사람이 아닌, 깨달은 사람, 곧 성인입니다. 말하자면 이 주인공은 처녀를 통한 거듭나기를 경험한 셈이지요. 결국 주인공은 처음에는 獸性을 지닌 범용한 인간이었다가 영적인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재생하게 됩니다. 재생은, 영적으로 화신하는 고귀한 또 하나의 탄생입니다. 이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여신이지요. 재생은 영적인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어머니가 바로 성모 교회인 파리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의 노트르담(성모)인 것이지요. ★★

(329) 여성 원리는 거듭 생성시키는 힘이 됩니다.

(332) 그대들 남성은, 궁극적인 존재의 신비에게서 힘을 부여받았는데 조금 전에 그대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신비는 그대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 힘을 거두어 갈 수도 있다...생명을 주신 여신이자 형상을 주신 어머니 ★★

(333)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_ 내가 종교와 친해질 수 없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335)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살면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곧 인데 어떻게 영적으로 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의 욕망은 영에 반하고 영의 욕망은 육에 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옛날에는 스승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즉 옛날의 스승들에게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삶의 단서를 줄 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사제들이 있었고, 의례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50) 하지만 개인이 모두 나름의 사랑만 좇고 섬긴다면, 그럼 단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머리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머리와 가슴은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겠습니까? 전쟁을 치르면 안 되지요. 상호 부조해야 합니다.

(351)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절제, 용기, 사랑, 충성, 예의바름...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 어떤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다섯 기능 중 하나의 기능이 전체적인 질서를 섬기지 못하고 한 사회를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355)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예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예요...그들을 관류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경험을 영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자고 하는 것이었어요.

(356) 성배는 한 쌍의 대극의 사이, 곧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하는 것이지요...성배는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360) 이때부터 5년 동안이나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뒤에야 그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왕을 치료하려면, 병든 사회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끝없는 자비, 끝없이 함께 고통스러워하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371)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_ 완전한 공감!!

 

8. 영원의 가면

(378)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379)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사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행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 _ 나 그 체험 한 것 같다!

(382)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 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383)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隱修士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_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 같다.

(385) 증명되어 버린다면 믿음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_ 증명되지 않는 불안을 견디는 힘이 믿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음이 맹목적인 내맡김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제3의 감각이라는 입장이다. 비록 남에게 검증해 보여줄 수는 없지만 본인에게는 분명히 느껴지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자신 만의 감각을 얻지 못한 자가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다.

(387)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이런 삶이란 남의 삶에서 의 삶을 인식하는 것, ‘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387)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388) 마술사는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주위에다 원을 하나 그립니다. 그의 마술은 바로 이 원, 신비스럽게 성화된 영역에서만 가능합니다.

(389) 수메르의 공식적인 1년은 360일입니다. 물론 5일간의 聖日이 더 있습니다만, 수메르인은 이것을 1년에 가산하지 않습니다. 이 닷새는 시간의 장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 닷새는 그들이 삶에 천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온갖 의례에 쓰여 집니다. ★★★

(390) 어떻게 해서 원이 보현적인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늘 경험하는 것이니까요. 하루에서도 경험하고 일 년에서도 경험하고, 사냥도 좋고 모험도 좋고, 하여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데서도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의 경험도 있어요. 자궁과 무덤의 신비가 바로 그겁니다.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재생을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매장속은 바로 재생이라는 관념에서 시작합니다. 고대의 여신 이미지를 보면, 여신이 死者의 영혼을 다시 받아들이는 어머니로 그려져 있답니다. ★★

(392)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체계를 명상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 두 체계의 자리를 정하고 다음에는 자기의 주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토해 봅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한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394)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_ 어차피 빈손이었던 시작을 생각하면 잃을까봐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그 때도 살았는데...하는 기억이 자신감이 되어준다.

(397)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어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398)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398)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기게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상대편 선수는 나보다 30야드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긴다고 확신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길 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 경험입니다. 그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402)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_내게는 감정이 그런 존재다. _ 이제는 그 괴물과 둘 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

(413)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


IP *.130.1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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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22:01:46 *.124.22.184

마지막 글귀는 도대체 별이 몇 개인건가요? ㅎㅎㅎ

전 감히 다시 읽을 엄두를 못내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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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00:16:57 *.130.115.78
이 한 구절을 얻은 걸로 2주간의 노고를 보상받은 듯핫 느낌이었거든요. ㅎㅎ

언젠가 꼭 한번 재독 도전해보시길 강추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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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22:26:02 *.215.110.24

천복을 찾아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선배님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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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00:17:35 *.130.115.78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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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12:02:37 *.39.102.67


문득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기나긴 중동전쟁'이 떠오르네요.

결과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죠.


이 전쟁의 성패를 좌우한 요소 중 하나가 '장교'였답니다.

이스라엘의 장교들은 아랍군의 장교보다 앞도적으로 많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제 전장에서 장교들의 구호가 달랐답니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나를 따르라!" vs 아랍장교들은 "돌격, 앞으로!"


이스라엘 장교들은 몸소 실천했던 거죠.

북리뷰까지 몸소 실천하는 교육팀장에게서 이스라엘 장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멋지다,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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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14:52:35 *.130.115.78
다른 건 모르겠지만 매주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만은 정확히 보신듯요. ㅎ

반백의 전우를 묻고도 살아있다면
그땐 저 '피닉스'라고 부르셔도 대답하겠슴다! ^^

늘 따뜻한 응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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