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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2일 22시 02분 등록
저자소개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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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 신화의 힘 p29

1. 우연이 이끈 운명
캠벨은 1904년 뉴욕의 중산층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국자연사박물관에 가서 보게 된 토템 기둥에 매료되면서 신화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민담을 담은 책들을 즐겨보면서 신화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고, 우연이 이끈 필연적 운명은 신화학자의 길이 천복임을 그의 무의식에 깊게 각인시키게 된다. 켐벨이 스무살이 되던 해 그는 가족과 함께 생애 처음 유럽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때 선상에서 우연히 스물아홉살의 지두 크리스나무르티을 만나게 되고, 둘은 동양철학에 대해 많응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때부터 힌두와 인도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캠벨은 이 여행 이후 가톨릭 신자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2. 야생의 재능이 나를 부를때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영어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하면서 캠벨은 아더왕 전설에 관련된 석사논문을 쓰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읽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더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캠벨은 이때 무언가가 자기를 부르는 듯한 천명을 느끼지 않았을까? 캠벨은 1927년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한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관심 분야가 넓어지자 기존의 전공이었던 중세 영문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그는 박사 학위 과정을 중단하게 된다.
 
3. 끈질기게 원하는 것을 고수하다 
캠벨은 독일에서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신화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입문이 시작된다. 그는 신화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카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가 찾는 신화의 세계는 카톨릭의 배타성, 자연 정복 사상, 인격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호도하고 교회 자체를 맹신하는 것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자신이 카톨릭 신자가 아님을 밝히게 되는데, 이는 당시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고백이었다. 그때문에 캠벨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단이라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책들를 보면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종교라 함은 달을 가리키는 수많은 손가락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베다경>에 나오는 말처럼, 켐벨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방법으로 이를 드러낸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종교의 신들 또한 동일한 선에 맞추어 탐구하는 학문적 추구는 그를 단일 종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지는 못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하늘과 공명하여 그 스스로 택한 천복의 삶으로 완성되게 된다.

캠벨은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하려 했으나, 경제 사정등의 이유로 일단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제 대공황이었다. 캠벨은 직장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마음 먹는다. 평소 동경했던 소로의 윌든에서의 삶을 모방하여 1929년 뉴욕주 우드스탁의 작은 오두막집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4. 침묵의 시간, 재생의 레이스
캠벨은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 동안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서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에만 몰두한다.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마음이 원하는바에 따라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5년을 틀어박혀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섭렵하게 된다. 우드스탁 시절은 훗날의 학문적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1만시간의 재생과정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성이었고, 모든 것이 단서였으며, 모든 것이 그에게 쏟아져 들어와 모든 비밀을 털어 놓고 갔다. 가난은 그에게 어떠한 방해도 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책을 살 돈이 없어서, 뉴욕의 도서상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도서상이 나중에 책값을 갚으라고 흔쾌히 허락해준 덕분에 더욱 독서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캠벨은 굶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읽고, 사색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훗날 찬란하게 빛날 웅후한 내공을 쌓아갔다.


5. 여명처럼 고독을 지키다
5년의 우드스탁 시절, 그가 책을 읽는 방식은 한 작가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었다. 한 작가가 쓴 책을 모두 읽고, 그 다음 그 작가가 읽었던 책들을 읽어 치우는 방식이었다. 한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다른 작가에게 한눈을 팔지 않고, 그 작가만 파고 들었다. 그와 같이 집중적이고 방대한 독서는 범인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수 있을 터, 캠벨은 기본 독서와 공부는 이 시기에 다 끝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 기간동안 8개월정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그때의 방랑을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6. 천둥같은 스승
캠벨은 그에게 영감을 준 스승들을 모두 책을 통해 만났다. 현대문학과 예술의 거장들인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다.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칼 융의 영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우드스탁 시절, 하나의 작가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의 독서법은 책 속에서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젊은 날 선상에서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지두 크리스나무르티 또한 그의 인생경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정신적 스승의 반열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읽고 느낀 감상으로 미루어 보건데, 캠벨이 그 어떤 누구보다 스승으로 추앙하는 이는 부처(석가모니)가 아닐까 생각된다.
 
7. 나 를 넘어서는 더 커다란 것 
그의 저서 <신화의 힘>과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은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선불교의 향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표상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생각이 무용해지고, 그 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를 캠벨이 얻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 당시의 다른 이들처럼 하나의 종교에 귀의하여 천운이 주어지는 경우 초월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들을 섭렵하면서 깊이 탐구하여 그 안에서 공통된 진리를 찾는 것이었다.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 <신화의 힘> p56

결국 캠벨이 선택한 길은 후자의 길이였고, 그 길은 비록 그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은 주지 못하였지만, 그의 저작을 통해 인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많은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위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p5
죵교교의에 녹아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p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p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신이 창조한 이 세계와 자연처럼, 신화 역시 자연적으로 생성된 세계의 영혼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의식 안에 모두 근원적인 신화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p15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p18 
다행스러운 것은, 정신 신경증 환자가 아닌 한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성적 충동을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p22
원시종족사회나 과거에 융성했던 문명 세계로부터 보고된 갖가지 제의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p25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 이야기 Standard metamorphoses 일 뿐이다.

p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 >와 <변용 transfiguration >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이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무의식의 힘'이 바로 이것이며,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두뇌의 20%도 쓰지 못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p33
꿈은 인격화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p41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p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히어야 한다.

p43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p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47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 고타마 싯다르타가 정각을 얻은 부처로 변하는 과정이다. 먼저 속세에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마지막은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다.

p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p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p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2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 변신 이야기에서 신이 저지르는 강간과 폭압의 역사가 이로써 정당화, 아니 선과 악의 범주를 벗어나게 된다.

p65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1 . 출발

1-1. 영웅에의 소멸

p69
옛날 옛적, 직심스럽게 빌면 더러 이루어지는 것도 있던 시절에,

>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신이 터치하면 까마귀로 변하던 시절을 말한다. 깨알같은 번역!

p71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p73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을 상징한다

p80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수도 있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상된다. 가령 오지, 숲, 지하 왕국, 해저, 천상, 비밀의 섬, 험한 산꼭대기, 혹은 꿈꾸는 상태로 표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는 항상 변환 자재하는 존재, 다형태를 취하는 존재, 뜻밖의 고통, 초자연적인 행위,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희가 있다.

> 미지의 영역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 미지의 영역은 사실 우리가 무의식 안에서 이미 여행을 다녀온 곳이리라.

1-2. 소명의 거부

p82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p85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토록 많이 보았던 이 명언이 여기 숨어있었구나! "부모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한다"에서 부모의 징벌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참 많다. 하지만 재생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두려운 것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1-3. 초자연적인 조력

p95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p96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케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p97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이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선 성령이다.

>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남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자연적인 인간세상의 조력자는 여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듯 하다. 

p98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하고 부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p105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 여기까지만 보았을때는 그들(카마르 알 자만과 공주)에게 이제 해피엔딩만 남은 줄 알았다. 변신이야기를 그렇게 읽었는데도, 신들의 개입은 길보다는 흉이 많다는 것은 잊었더냐...


1-4. 첫 관문의 통과

p109
판은 실수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괴롭히는데 이때 인간이 판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황Panic>, 공포, 그리고 엄청난 경악 같은 것이다

p118
이제 독자들도,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의 말 뜻을 헤아렸으리라.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p119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

여섯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 다른 말로 깨달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벼락같은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보다.

p120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 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 쉼플레가데스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 우리는 이 쉼플레가데스를 건너야만 한다. 지금 못 건너더라도 언젠가는 건너야 한다. 


1-5. 고래의 배

p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p123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p12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p125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계였다.


2 . 입문

2-1. 시련의 길

p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p132
게자 로하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개개인의 무의식의 상당부분을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기에 샤먼, 무당과 같은 무의식에 기반을 둔 초현실적 행위자들이 타자와 교감할 수 있는 것 같다.

p133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불현듯 한국영화 '곡성'이 떠오른다. 영화에 나왔던 이미지들이 현실의 이미지들인지 무의식의 이미지들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셰계이며, 단지 보이고 인식되는 것들과 보이지 않으며 인식되지 않는 것들로 나뉠 뿐이다.

p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p143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2-2. 여신과의 만남

p145
<내 맹세코 이르거니와, 여기서 좀 쉬기로 하리라>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로 올라가 엿새 밤낮을 거기에서 떠나지 않았다.

> 뭘 맹세한다는 것이며, 병 걸린 여왕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데 쉬기는 왜 쉰다는 말이냐. 왕자여, 침대 위에서 엿새 밤낮을 무엇을 한 것이냐? 

p152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p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p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2-3. 유혹자로서의 여성

p160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p162
오이디포스 - 햄릿의 부정적 흥분 상태가 영혼을 유혹하고 있는 동안은 세계, 육체, 그리고 특히 여성은 더 이상 승리의 상징이 아닌 패배의 상징 노릇을 한다. 금욕적, 청교도적,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윤리 체제는 즉시 극단적인 모든 신화 이미지로 변용된다. 이렇게 되면 영웅은 육욕의 여신과 더 이상 순진한 평화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여신이 이 시점에 이르러 죄악의 여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4. 아버지와의 화해

p168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히 이겨나간다.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말라는 시늉을 한다.

p173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 아버지를 찾아나선 여정의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모험을 떠난 이가 영웅감이 못되는 경우 불쌍한 파에톤처럼 그 말로가 비참할 수도 있다. 

p177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 내가 아버지가 되어, 지난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이 말에 수긍하게 된다.

p180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이 기나긴 일련의 의식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은 할례 집도자의 무시무시하고 고통스러운 공격을 통하여 남근을 그 포피로부터 해방시키는 대목이다.

>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포경수술은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수술없이 군대에 들어온 이들은 군대에서 수술하느라 고생깨나 했었는데(마취없이 수술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수 없다 ^_^;;), 요새는 포경수술의 무익함이 더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의례라는 측면에서 되돌아보면 수술하고 나서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p184
오라, 오, 디튀람보스
나의 이 남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라

p185
죽음을 당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의 비문이기도 한 이 <디튀람보스>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은 <두 문을 지난 사람>, 즉 재생의 무서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p191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p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뜷고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p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2-5. 신격화

p196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거서게 된> 상태다.

p198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보살의 양성구유적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들의 마음을, 객관적인 체험을 초월한 상징적 영역,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인도한다.

p199
2세기의 그노시스파 기독교인들의 기록이나, 중세 유태인 신비주의자들은 육으로 된 말씀을 양성구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여성적 측면의 이브가 형태를 얻기 전, 갓 창조된 아담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내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p200
창조의 신비를 상징하는 기본적인 방법.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 카오스로 표현되는 절대적인 영원의 소용돌이에서 신들이 탄생하고,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우주속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탄생했다. 신의 탄생을 모방한 현상계의 창조는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생물로 진화하면서 암수의 구별이 탄생하고, 시간이라는 도구를 기반으로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p208
아버지의 이미지를 토템의 차원까지 퇴영시키기도 한다.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났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악마의 도시 Civatas Diaboli>에 대한 <신의 도시 Civatas Dei>의 성전을 선포한 이래 격동의 몇 세기 동안 몹시 어지러웠기 때문에, 세계종교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현대인은 마땅히 다른 위대한(그리고 훨씬 오래된) 우주적 친교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p211
양성적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제의 궁극적 요체다.

p212
신이 종족적, 인종적, 국가적, 혹은 분파적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다. 그러나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 <신화의 힘>에서도 많이 언급된 내용이지만, 지역적인 신화는 결국 갈등과 반목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라 함은 비단 총칼로 무장한 이슬람의 IS 전사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폭탄을 두른 상태로 거리로 내모는 극단적 종교주의자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p213
아버지와의 화해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그>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214
혼의 역학에 대한 이 고대 신화적 이론이 현대 프로이트 학파의 주장과 흡사한 데 놀랐을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의 용어에 따르면,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은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

p215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자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p216
중생은 자신의 욕망과 적의와 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p217
일체 만유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 왈,
"좋아, 그럼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p219
일본의 다례는 도교 신봉자의 지상 낙원의 정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손님은 뜰길을 따라 들어와, 허리를 구부리고 문을 들어서야 한다. 이어서 그림이나 꽃꽂이, 소리를 내며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에 예를 표하고 바닥에 정좌한다. 통제된 단순성에 의해 지배되는 극히 단순한 분위기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 안에서 무한한 존재의 비밀을 안은 침묵으로 일관된다. 손님은 자신과 관련된 경험을 묵상할 수 있다. 다도 모임에 차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그 축소된 우주와 불사의 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 스님들과 정신적 수행을 하는 이들이 다도를 즐기는 이유가 차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다도의 과정이 곧 수련이기 때문인듯 하다.

p222
임제선의 비조 임제가 어릴 적에,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 법당 안에서 방뇨하자 스승이 몹시 꾸짖었다. 어째서 거룩한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방뇨하느냐는 꾸중을 듣자 임제가 되물었다.
"그럼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일러주십시오. 거기에 가서 누겠습니다."

> 아우, 똘망똘망한 놈~ 될성 부른 잎은 떡잎부터 다르다더니.

p223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져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 빛은 우리가 애써 찾아 나서야 할 존재이고, 어둠은 우리가 태어나서 돌아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2-6. 홍익

p231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사크림니르 Sachrimnir, 즉 우주적인 돼지 Cosmic Boar의 고기를 포식한다.

p232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천국을 떠나면서 단테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내가 지나는 물은 일찍이 아무도 건넌 바 없다.
미네르바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아폴로는 내 길을 인도하며,
아홉 뮤즈는 내게 북두칠성을 일러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무용해지고, 이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다.

> 캠벨이 그 경지를 경험해보았을까? 캠벨 자신도 손가락이 기리키는 곳을 보려 애쓰기만 한 것은 아닌지? <신화의 힘>의 인터뷰에서 잠깐 언급된 내용들을 보면 캠벨 자신은 그런 각성에는 이르지 못한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모든 깨달음은 학문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것들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생각이 무용해지고, 그 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를 캠벨이 얻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 당시의 다른 이들처럼 하나의 종교에 귀의하여 천운이 주어지는 경우 초탈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 <신화의 힘> p56

그가 선택한 길은 후자의 길이였고, 그 길은 비록 그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은 주지 못하였지만, 인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p233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주제를 다룬 출판물은 꿈의 재료가 된 상징과 무의식에 대한 그 꿈재료의 의미와, 정신에 대한 그 재료의 효과와 작용까지 분석한다. 그러나 위대한 거장들이 그러한 상징을 의식적으로, 비유에 이용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더구나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은 여과되지 않은 환상을 짐짓 계시로 착각한 신경증적 환자라는 성급한 가정까지 엿보인다. 같은 뜻에서 많은 문외한들은 정신분석의 결과를 프로이트 박사의 이른바 <호색적인 마음>의 산물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역자 주>

p236
고대 탄트라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신들은 정도(正道)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상을 표상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학파의 이론에서도 그와 같이 설명한다. 교화된 여행자가 마침내 눈을 들어 성부, 성자, 성신의 시현을 뚫고 영원한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단테의 마지막 시구에서 암시하는 것 역시 이 같은 고등 신학적 통찰과 일맥 상통한다.

p237
이 기적적인 에너지 본질만이 불멸적인 존재이며, 도처에서 이 에너지를 현현시키고 나누어주고 표상하는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p248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p251
그(부처)가 마음의 칼로 우주의 거품을 찌르자 거품은 흩어져 무화됐다. 대륙, 하늘, 전통 종교 신앙의 지옥같은 자연적 경험 세계는 그 신들과 마귀의 개념과 함께 일거에 폭발했다.


3 . 귀환

3-1. 귀환의 거부

3-2. 불가사의한 탈출

p257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며,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p264
공포에 질려 혼비백산 도망치는 영웅이 추격자 쪽으로 던진 불가사의한 장애물(자기 방어적 해석, 원리, 상징, 정당화 같은 것)은 공격해 오는 천상의 사냥개의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흡수하여, 영웅을 그가 얻은 전리품과 함께 안전하게 고향으로 귀환시킬 수가 있다.

269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3-3. 외부로부터의 구조

p270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있던 모듬살이는 그 모듬살이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회성을 내포한다. 영웅의 업적을 쌓았다고 모두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모험을 마친 영웅들에게는 속세라는 시련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p276
그러나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 칼은 벼락을 상징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인들이 동지(크리스마스)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p280
초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3-4. 귀환 관문의 통과

p281
초월의 세계에서 보내진 은총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 버리니, 다른 영웅이 나와 말씀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p286
그(오이신)의 전인격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영역의 형식과 형상에 동화되어 버린 다음이어서, 시간이 존재하는 곳의 형식과 형상의 충격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p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 모험 자체가 내가 떠난 그 길에서의 시련이었다면, 귀환 후 내가 떠나온 곳에서 맞는 두번째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3-5. 두 세계의 스승

p297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변모한 당시의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p299
이 영원의 순간이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카마르 알 자만의 로맨틱한 자각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세계의 문턱을 넘나드는 훌륭한 통로가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안식으로 발견할 수 있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 매번 나오는 이야기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 그 자체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p307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p313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4 . 열쇠

p317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  유출

1-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p326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p331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 = 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우리가 우주적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놓는다.

> 초의식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공즉시색, 색즉시공 - 초월적인 것이나 현상적인 것은 모두 무無로부터 시작되고 무로 돌아간다. 무 그 자체이다.

1-2. 우주의 순환

p338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

> 마지막 단계인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가 곧 깨달음으로 충만한 상태다.


1-3. 허공에서 - 공간

p342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1-4. 공간의 내부에서 - 생명

p348
마오리족의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족보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언어가 풍성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언어가 밤을 만들었다.
큰 밤, 긴 밤,
낮은 밤, 아주 높은 밤,
두껍게 느껴지는 밤,
만져지는 밤,
보이지 않는 밤,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

p354
<인도의 신화>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Self 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 I am he" 하고 소리쳤다.

드디어 그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물을 지었으니, 내가 곧 창조로다.>

p357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1-5. 하나에서 여럿으로

p366
중심적인 원인의 평화에서 말초적 결과의 소용돌이를 향한 급전직하의 예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 졌다. 낙원의 복락은 그들에게 닫혔고, 그들은 변형의 베일의 다른 쪽에서 창조된 세상을 보았다. 그로부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얻기 위해서는 수고해야 했다.


1-6. 창조의 민화

p372
이 어리석음 뒤로는 단일한 원인이 세계의 이원적인 결과의 틀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2 . 처녀 잉태

2-1. 어머니 우주

p374
세계를 생성시키는 아버지의 정기는, 변용하는 매체를 통해 다수의 지상적 체험으로 변한다.

p379
머리 하나 가득 물을 뒤집어쓴 채,
손으로 파도에 저항하여,
이윽고 인간은 바다로 나왔다.
이윽고 영웅은 파도 위로 나왔다.


2-2. 운명적 모태

p383
금성이 새벽별로 반짝일 때 우주적 여성은 처녀였고, 저녁별일 때엔 달의 배우자인 밤하늘의 매춘부, 일출과 더불어 그 모습이 사라졌을 때엔 지옥의 마귀할멈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향권 안에 있던 곳에서는, 여신의 특징은 늘 이 변화하는 별빛의 영향을 입었다.

> 본질은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인식이 변화하는 것이다.

2-3. 구세주를 낳는 자궁

p389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사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2-4. 미혼모의 민화

p395
외조모가 대합을 열자 그 안에서 아름다운 여자 <강물이 내 집 같은 히나>가 나왔다.

시닐라우는 사람들을 시켜 가마를 데우게 하고, 다른 아내들과 자식들은 모조리 거기에 넣어 죽이고 이로써 빵을 만들게 했다.

> 이제 이런 이야기들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끔찍한 것은 사실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의식은 온갖 선입관과 편견, 그리고 이 사회가 주입해놓은 도덕률로 가득차 있기에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에둘러 가는 길이 필요하다.


3 . 영웅의 변모

3-1. 최초의 영웅과 인간

3-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p400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p402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p403
이 두번째 근친 상간을 깨달은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참회하느라고 17년간이나 바다 한복판에 있는 바위섬에서, 사슬에 묶인 채 보냈다. 참회를 시작하면서 그는 사슬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바다에다 던져버렸는데 이 열쇠는 그의 참회가 끝날 즈음 물고기 뱃속에서 발견되었다.

> 역사가 기록된 이후 신화의 형태로 변모된 역사적 허구로 보인다. 먼 곳에서 찾을 것 없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위인들만 보더라도, 불과 몇백년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기에는 적어도 한두개의 초자연적이고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p407
그러나 달이 지자 그는 소리쳤다.
<이 역시 신이 아니다. 어디엔가 저들을 움직이는 분이 계실 것이다>

p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p417
꼬마 전사는 벌거벗은 수많은 여자들의 나체에 당혹, 혹은 압도되어 고개를 돌리다 군사들의 손에 붙잡혀 차가운 물통 속으로 처박혔다.

3-3. 전사로서의 영웅

p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3-4. 애인으로서의 영웅

p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3-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p432
아무리 단순한 민화라도 사생자가 어느 날 문득 자기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 민화는 갑자기 의미 심장해진다.

> 모험의 시작이닷!

p437
인간의 시각이 평형 상태의 인간적 측면으로 기울어질 때,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3-6. 구세주로서의 영웅

p440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크리슈나에게서 자기의 모습들을 보았다.

p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3-7. 성자로서의 영웅

p444
그들의 전설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나, 경건한 자세와 그들의 전기가 전하는 교훈은 진부한 상투적 문구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p456
아난다여, 몇몇 신들은 하늘에 있되 마음은 세상에 있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울부짖고, 두 팔을 내저으며 울부짖고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이리저리 구르면서 소리를 지른다.


4 . 소멸

4-1. 소우주의 끝

p458
그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p462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연옥편>은 육신의 욕망과 행위에 얽매인 영혼의 참담함을, <정화편>은 육신의 경험이 영혼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국편>은 정신적 자각의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 신화의 세계를 사파리 관광하듯 탐험중인 이번 달이 지나면 시간이 날때 단테의 <신곡>에 도전해봐야겠다. 시간이 나려나?? 시간보다는 내 독서의 컨텍스트가 더 문제겠지만...


4-2. 대우주의 끝

p468
이것이 바로 우주가 부서지는 시점인 회겁이다.

p473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에필로그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튀르켐은 개인을 집단에게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햇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p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인격체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신부로서, 과부로서, 성직자로서, 추장으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 전 페이지에서 언급된 신화의 정의중 뒤르켐의 정의에 가까운 신화의 기능이라 생각된다.

p480
진정으로 종교적인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동양과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신화에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p482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p484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p486
우리는 지금 쉼플레가데스의 두 바위 산이 서로 부딪히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쉼플레가데스를 지나가야 한다.

> 오디세우스가 쉼플레가데스를 통과한 이 후 두 바위섬은 서로 부딪히는 것을 멈췄다고 한다.  우리는 쉼없이 쉼플레가데스를 통과하고 또 통과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두 바위섬의 부딪히는 속도는 점점 느려질 것이고, 우리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질 것이다. 쉼플레가데스의 움직임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때가 오면 우리는 쉼플레가데스는 멈춘 것으로 선언해도 좋다. 바로 그때 우리는 천복을 누리는 삶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영웅의 모험은 크게 출발(분리), 입문, 귀환(회귀)의 세 단계를 거친다. 책 역시 이 틀에 맞춰 목차가 구성되었고 세부적인 내용이 진행된다. 원질신화에 기반을 둔 신화의 여정은 영웅이 소명을 깨달으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영웅의 소명은 대부분 비자발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기에 흔히 거부의 과정을 거치는데,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를 통해 소명을 더욱 공고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생겨나게 된다. 모험의 출발은 영웅이 살았던 세계와의 분리를 의미하며, 초자연적인 조력을 통해 첫 관문을 통과한 후 '고래의 배'로 상징되는 밤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그 출발과정이 마무리된다.

영웅의 입문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시련의 길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신들은 가혹한 장애물과 관문을 내려줌으로써 영웅을 시험한다. 이때 영웅은 여신과의 만남을 통해 유아기적 행복을 다시 찾게 된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여성은 유혹자로서 등장하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모험의 완성도는 달라진다. 영웅이 모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서 그가 알지 못 했던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의 세계와 극적인 화해를 하는 것에 있다. 그 결과 주어지는 황금 사과를 들고 영웅은 귀환을 할 것인지, 꿀이 흐르는 신천지에 계속 머물 것인지를 선택하는 기로에 이른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있던 모듬살이는 그 모듬살이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영웅이 획득한 보물은 영웅 그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가 속했던 모듬살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홍익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웅은 그가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을 할 수 밖에 없으며, 모험을 마친 인간에게는 반드시 속세라는 시련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캠벨은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라고 말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에 이른 후, 대중들에게 그 설법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그런 무無귀환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차원의 일이었을까? 설사 그렇다해도 필경 다른 선각자들이 등장했을테고, 또다른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결국 유사한 역사와 신화가 우리에게 이어 내려왔을 것이다. 영웅의 귀환은 사회의 거부, 다시 말해 안정과 관습이라는 기득권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모험의 초기 과정에서 영웅에게 초월적 조력을 보냈던 신의 도움은 아직 유효하다. 영웅은 귀환관문을 통과함으로써, 그가 모험을 겪었던 세계와 다시 돌아온 (그가 원래 속했던) 세계, 그 두개의 세계의 조화를 완성시키고, 마침내 두 세계의 스승이 된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영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에 대한 범우주적 에피소드이다. 무無에서 비롯된 우주의 형상, 처녀 잉태를 통한 신화의 창조 과정과 우주와 인간을 넘나드는 어머니의 힘과 신화에서의 의미,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 영웅의 모습들을 다루고 있다.

역시나 개인적으로 신화의 힘>과 마찬가지로 한번 읽고 소화해내기는 역부족이었던 책이었던 것 같다. 
<신화의 힘>이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구성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것에 반해,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은 영웅의 모험 단계별로 잘 짜여진 플롯 덕분에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는게 훨씬 수월했다.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이 <신화의 힘>보다 먼저 나온 책인데, 읽는 순서를 책이 출간된 순서대로 했다면 또 다른 느낌의 독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화의 힘>은 전체의 흐름을 담기는 어려워도 개별적인 이야기나 문장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쉬웠다. 이는 인터뷰를 옮겼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은 전체 플롯을 따라가고 큰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으나, 개별적인 이야기들과 문장이 담고 있는 함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신화의 힘>을 다시 한번 읽고, 그 다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또 읽는다면 분명 더 많은 것들이 새롭게 시야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의 심오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원저자조차도 자신이 의도하는 바와 그 느낌을 글로 정확히 표현하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책은 명저로서 하나의 조건은 갖추게 된다. 번역 또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천이 얼굴은 한 영웅>의 번역은 나쁘지 않다. 역자의 맛깔스러운 번역도 군데군데 눈의 띈다. 다만 독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 하는 것은 내 자신의 한계가 9할이요, 번역의 태셍적 한계가 그 다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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