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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2일 09시 59분 등록

 

저자 연구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3.23 ~ 1980.3.18)

독일계 미국인으로 정신분석학자이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1900 3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유대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분명하지 않다.

프롬은 1930년대의 10년 동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산실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일원이었으나, 연구소의 다른 구성원과는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 가운데 프롬은 연구소 기관지 <사회연구> 창간호(1932)에 발표한 논문 ‘분석적 사회심리학의 방법과 과제’를 통해 인간의 정신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심리학을 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종합을 꾀한 사회심리학 연구의 계보를 프롬 자신은 이렇게 보았다. “정신분석학적이면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으로 저술한 대표적 학자는 빌헬름 라이히인데, 그의 이론과 나의 이론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사르트르와 비교해 본다면,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정향(定向)의 휴머니즘적 입장에 서서 분석했지만, 임상경험이 거의 없고 용어구사는 현란하되 심리학을 피상적으로 다룬 결함을 보인다.

1933 히틀러가 집권하자 프롬은 탄압을 피해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같은 해 나치가 문을 닫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을 재개하지만, 프롬은 1939년 연구원직에서 물러난다. 1950년 프롬은 두 번째 아내 헤니 굴란트의 건강회복을 위해 멕시코로 거처를 옮긴다. 그런 정성을 기울여도 헤니는 끝내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 뒤늦게 만난 ‘천생연분’ 애니스 프리먼과 프롬은 두 사람 모두 지난날의 불행을 뒤로 하고 평온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프롬과 애니스는 1970년 무렵까지는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1973년 봄까지는 스위스와 멕시코를 오가며 살다가 1973년 여름 스위스에 정착해 말년을 보낸다. 프롬은 1980 3 18일 스위스 티치노(Ticino)주 로카르노(Locarno)군 무랄토(Muralto)시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프롬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사랑의 기술>(1956) 34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팔렸다.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기보다는 하나의 ‘기술’이라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 하여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선 사랑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에 걸맞은 훈련을 해야 한다. 사랑은 ‘창조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1976)에 의하면 소유적 실존 양식은 현대 문명의 재앙을 대표한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대표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 (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 , 명성, 사회적 신분, 지식, 자식, 기억 등-에 묶여 있다.” 이에 맞서 독자성, 자유, 비판적 이성은 존재적 실존양식을 위한 전제가 된다. 지식의 영역에서 존재양식의 가장 높은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가장 높은 목표는 좀 더 많이 아는 것이라고 한다.

 

1965년 프롬은 <사회주의 인간론>을 엮어 펴낸다. 프롬을 포함한 공저자 30여 명은 주로 동구권 출신 학자다. 이들은 휴머니즘을 내세워 스탈린을 비판했다. 서문에서 프롬은 휴머니즘을 “인류의 통합에 대한 믿음이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아를 완성하는 인간의 잠재력”이라 규정한다. 또한 휴머니스트는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믿음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는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 사회주의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프롬에게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이나 마찬가지다. 이론과 실천, 지식과 행동, 정신적 목적과 사회제도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상은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이었다는 얘기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저자의 서문

5 끝으로 여러 벌의 원고를 읽고 언제나 사려깊은 통찰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애니스 프롬 양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11세 연상의 첫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두 번째 아내를 병으로 잃은 뒤, 운명처럼 만난 세번째 아내가 바로 애니스 프롬이다.

 

서장 위대한 약속 그 실패와 새로운 선택

  1. 환상의 종말

1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새로운사회, ‘새로운인간을 목표로 한 운동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부르주아적 생활을 이상으로 한, 즉 미래의 인간을 보편화된 부르주아로 이끄는 운동으로 재빨리 변모되었다.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을 얻으면 무한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한한 생산, 절대적 자유, 무제한의 행복, 이 세 가지가 발전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핵()을 형성하였고, 이 새로운 발전된 세상의 도시하느님의 도시로 대치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13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되는 꿈은 우리의 사상.감정.취미가 정부의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부강한 나라들에만 국한되어,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生態學的)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 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14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상황에 과감히 직면하기 위하여…… 인간은 초인(超人)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理性)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욱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1. 위대한 약속은 왜 실패했는가

17 무한한 쾌락이라는 개념은 규율 있는 작업이라는 이상과 묘한 모순을 이룬다. 이것은 일에 대한 집념을 윤리적 규범으로 인정하는 것과 휴가 동안의 완전한 나태라는 이상, 그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도 비슷하다. 한쪽에는 일관 작업의 벨트 컨베이어와 관료적인 일과(日課)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텔레비전.자동차.섹스가 있어서 이 모순적 조합(組合)을 가능하게 한다.

작업에의 몰두만을 강요받는다면 완전한 나태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은 미치고 말 것이다. 이 둘의 조합에 의해서 사람들은 살 수가 있다. 게다가 이 두 가지 모순되는 태도는 경제적 필연성에도 대응된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일상화된 공동작업은 물론 생산된 상품 및 서비스의 최대한의 소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8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성격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공유(共有)가 아니라 소유가 내게 쾌락을 준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 고객을 속여야 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한다.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내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보다 적게 가진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미소를 머금고 이성적이며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주 나쁜 것 같이 묘사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너무 직접적으로 써서 그렇지, 다음과 같이 표현을 조금 순화하면 많은 마케팅 책이나 경영 수업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내 고객을 속여야 하고’ -> ‘고객의 니즈를 만들어 내야 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하며’ ->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쟁 우위를 가져야 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한다’ -> ‘가능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서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19 소유에 대한 열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계급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계급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제는 무한한 소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고 계급전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또한 전세계적으로는 국제전쟁이 발발하기 마련이다. 탐욕과 평화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

 

20 이 경제체제의 발전은 이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체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순의 날카로움을 감추려고 체제의 성장(혹은 한 거대 기업의 성장)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21 산업사회는 자연을 경멸하고 있다. 또한 기계로 만들지 않은 모든 물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최근의 일본과 중국 등을 예외로 하는 유식 인종들)에 대해서도 경멸을 느끼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계적인 것, 강력한 기계, 생명이 없는 것에 이끌리고 있으며, 따라서 점점 더 파괴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다.

 

  1. 인간변혁의 경제적 필연성

  2. 파국은 막을 수 있는가

25 우리의 생존본능이 무력화한 데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은, 요구되는 삶의 변화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감수해야 할 희생보다 차라리 앞으로 닥칠 파국을 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

케스틀러는 한 친구의 별장에 앉아 있을 때 프랑코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랑코의 군대가 밤 사이에 도착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마 총살을 당할 것이다. 그는 달아나야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춥고 비가 오고 있었으며, 집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서 그는 동료 언론인들의 노력으로 거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행동은, 대수술을 요하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내릴 것이 두려워 검사를 받기보다 차라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려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쩜 저렇게 미련한 짓을 할까 싶은데, 나도 이런 짓을 많이 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이라니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편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1장 일반적 고찰

  1. 소유와 존재의 차이의 중요성

28 ‘소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우리 생활의 정상적 기능이다. ~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 소유하는 것 그것도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 을 최고의 목표로 한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반대로 존재의 본질이 소유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을 그들 각 체제의 중심적인 문제로 삼아 왔다.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누가복음 9:24~25)

위대한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고 비게하는 것, 자기의 자아가 끼여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적(靈的)인 부()와 힘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1. 여러 가지 시적 표현의 실례

31 테니슨의 반응은 그것을 소유하려는것이었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그는 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꽃이 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지적 명상으로 시를 끝맺고 있지만, 꽃 자체는 꽃에 대한 테니슨의 관심의 결과로 생명을 잃는다. 테니슨은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생명을 해체하는 수단에 의해 진리를 찾으려는 서구의 과학자들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

테니슨은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꽃을 소유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꽃은 파괴되고 만다. 바쇼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저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꽃은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둔다.

 

32 발견

나는 홀로 숲속을 거닐었다.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처없이.

나무그늘에 서 있는 작은 꽃을 보았다.

반짝이는 별과 같고 아름다운 눈동자 같은 작은 꽃을

나는 꺾고 싶었다.

그러자 꽃이 애처롭게 말했다.

어째서 나를 꺾으려고 하나요? 곧 시들고 말 텐데.

그 꽃을 뿌리째 뽑아 아름다운 정원에 심으려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꽃을 다시 심었다.

이제 그것은 자꾸 번져나가 꽃을 피운다.

 

33 삶을 사랑하고 인간의 해체와 기계화에 대항해서 투쟁한 사람 중의 하나인 괴테는 많은 시에서 소유에 대립되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는 소유와 존재간의 투쟁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소유를 대표하는 것이 메피스토펠레스). 그의 짧은 시에서 그는 존재의 특징을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소유를 대표하는 캐릭터라는 걸 알고 <파우스트>를 읽었더라면 좀 더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었을까?

 

  1. 어법상의 변화

3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기서 동사 대신 명사를 쓰는 결정적인 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인간은 사랑에 속한 인간이 된다. 사랑은 여신이 되고, 인간이 사랑하는 마음을 투영하는 우상이 되며, 인간은 그 여신, 그 우상에게 그의 사랑을 쏟는다. 이런 소외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사랑을 경험할 수 없게 되며, ‘사랑이라는 여신에게 굴복함으로써 그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겨우 접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능동적 인간이 되기를 멈추고, 그 대신 우상의 소외된 숭배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우상과 접촉할 수 없을 때 파멸하는 것이다.

 

37 ‘박사님, 저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집, 훌륭한 아이들,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많은 고 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

최근의 어법은 더욱 높은 소외 정도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신에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주관적 경험은 배제된다. 경험의 가 소유의 그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나는 내 느낌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무엇으로, 즉 문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온갖 종류의 곤란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나는 문제를 가질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가질 수는 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나 자신문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의 창조물에 의해 소유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법은 감춰진 무의식적인 소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영어의 가지다have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구나.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have를 쓰기보다 동사를 직접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그래서 상황에 맞는 동사를 생각해내느라 말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래서 have get 등을 사용해서 쉽게 말하라고 하는데…… 별 생각없이 하는 말에도 이런 심오한 의미가 있을 수 있구나.

 

38 불면증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고 잠을 잘 수 없다는 정신적인 상태이다. ‘잠을 잘 수 없다.’는 말 대신 걱정.긴장.불안의 경험을 보류하고 정신적 현상을 마치육체적 증상인 것처럼다루고 싶어하는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나는 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사람이 그 주체가 되는 내적 행동인 것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있는 것은 없다.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1. 용어의 기원

39 무엇인가를 가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소유가 문제가 되는가?

그런데도 소유의 언어적 역사는 그 말이 실제로 문제임을 나타낸다. 소유가 인간 존재의 가장 자연스런 범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은 언어에 갖는다라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헤브라이 어에서는 나는 가지고 있다.’jesh(= it is to me: 그것은 나에게 있다)라는 간접적 형태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상 나는 갖고 있다.’는 표현 대신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매우 많다.

 

41 1) 존재 또는 소유라는 말을 가지고 나는 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나는 희다.’ 또는 나는 행복하다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주체의 어떤 격리된 특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생존의 두 가지 기본적 양식, 자아와 세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지향(orientation),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성격구조이다. 이들 중 어느 편이 우세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감정.행동이 결정된다. ~

3) 생존의 존재양식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는 뒤 마레의 말에 예시되어 있듯이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살아 있음, 세계와 진실로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또 하나의 형태는 겉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방브니스트적 존재(being)의 어원에 예시되어 있듯이 겉모습과 대조되는, 어떤 사람 혹은 물건의 진정한 본성, 진정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1. 존재의 철학적 개념

43 이데아가 사랑의 경험보다 더욱 실재성을 지닌다면 이데아로서의 사랑이 영구적이며 불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의 실재를 따지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생성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살아 있는 조직체는 생성하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그것들은 변화하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변화와 성장은 생명의 과정에 내재하는 특질이다.

 

  1. 소유와 소비

44 성장의 어떤 시점에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입에 무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유아의 소유의 한 형태로서, 신체적 발달이 아직 소유를 지배하는 다른 형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유와 합체 사이의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우리는 여러 형태의 식인풍습(食人風習)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인간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 사람이 지녔던 능력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다. ~ 용감한 사람의 심장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의 용기를 갖게 되며, 토템(totem) 동물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 토템 동물이 상징하는 신성(神聖)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스테미너가 강한 동물을 먹으면 정력이 세진다는 현대의 풍습이 이런 데서 기원한 걸까? 동물의특정 부위를 먹으며 그와 같은 힘을 갖겠다는 사람들을 보며 아직도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믿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

 

44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영원한 젖먹이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같은 병리적 현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45 요약하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그것도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 사회의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는 없다는 이유에서 소비는 걱정을 없애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은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이전의 소비가 곧 그 만족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나는 존재한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공식으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다고 할 수 있다.

 

2장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1. 학습

47 소유양식에 젖은 학생들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즉 배운 것을 잘 기억하거나 또는 노트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배운 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아니, ‘소유형의 사람은 오히려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고나 개념에 대해 다소 당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양의 지식에 의혹을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한 형태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고정될 수 없는 개념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지배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처럼 두려운 것이다.

 

48 그들은 스스로가 말과 개념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되는 대신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그들이 듣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고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개념, 새로운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일어난다. 존재 양식을 가진 학생들의 학습과정은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들으며, 자발적으로 그들이 듣는 것에 응답하면서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집으로 가져가서 암기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 개개인은 강의를 통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다. 강의를 들은 후에는, 강의를 듣기 전의 그들과는 다른 인간이 된다. 물론 이러한 학습 양식은 강의가 적극적인 내용을 제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 기억

49 존재 양식에 있어서 기억은 능동적으로, 개념, 광경, 회화 음악 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즉 기억해야 할 단일한 데이터와 관계되는 다른 많은 데이터를 연결시키는 태도이다. 존재양식의 경우에 있어서 결합이란,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도 아닌 살아 있는 결합이다. 하나의 개념은 올바른 단어를 추구할 때 동원되는 생산적 사고(또는 감각)의 행위에 의해서 다른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50 오늘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많은 데이터를 생각한다면, 노트 속에 어느 정도의 기록과 정보를 저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상식적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적어놓은 행위가 우리의 기억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 속에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노래방에 다니게 되면서 노래 가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고,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를 저장하게 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전에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친함의 정도를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하는 번호가 한 두개 정도다. 모든 정보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 의지하게 되면서 점점 기억력은 감퇴된다. 잘 알던 사람들 이름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게 나이 탓이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51 교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받아 적는 학생은, 자신의 이해력을 믿으며 최소한 요점만 기억하는 학생보다 십중팔구 이해력이나 기억력에 있어서 떨어진다.

 

  1. 대화

53 이와는 달리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무장하지 않은 채 상황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즉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그들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관념을 탄생시킨다. ~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집착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 속에서 충분히 활기를 갖는다. 그들의 활기는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가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대화의 범위는 상품(정보, 지식, 지위)의 교환에만 머물지 않고, 누가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대화가 된다. 대결자들은 함께 춤추기 시작하며, 또 그들은 승리감이나 패배감 양쪽 다 무익하다 을 안은 채 헤어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진다.

 

  1. 독서

54 대화에 있어서 진리인 것은 독서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이다(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 특강>에서 유시민 작가는 말하듯이 쓰라고 했다. 그래야 독자들이 읽기 쉽고 이해가 잘 된다고. 독서가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라서 그런가 보다.

 

55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는 이따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조차도 전혀 가치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가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저자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쓴 모든 사실에 관하여 이따금 저자보다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1. 권위

56 합리적인 권위는 능력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의 성장을 돕는다. 비합리적인 권위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에 종속된 사람을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

 

57 존재의 권위(being-authority)는 한 개인의 어떤 사회적 기능 수행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이 고도의 성장과 통합을 성취한 인격의 본질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권위가 저절로 배어나올 뿐 명령하거나 위협하거나 매수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실행해 보이는 고도로 계발된 사람들이다.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그러한 권위자였다. 또 그들만큼 완성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런 인물은 모든 교육수준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발견된다.

 

59 국왕 이러한 형의 권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 칭호를 사용한다면 은 어리석고 부도덕하며 사악함에도, 즉 그는 하나의 권위의 존재이기에는 완전히 무능하지만, 그는 권위를 가지고있다. 그가 그 칭호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그 능력을 구성하는 자질을 소유하고 잇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만일 왕이 벌거벗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고 믿는다.

 

  1. 지식

61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무지(무지)도 지식만큼 좋은 것이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무지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의 무지와는 다를지라도, 무지와 지식은 모두 인식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지식은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의 양식에 있어서는 그것은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1. 신념

63 우리는 신념 없이 살 수 있는가? ~ 실제로 신념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절망적인 것이 되며, 존재의 핵심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전재의 양식에 있어서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내적 지향, 즉 하나의 태도이다. 어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신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1. 사랑

66 소유양식에서 사랑이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조르고 질식시키며 죽이는 행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잇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는가는 여전히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모제(Lloyd de Mause)는 지난 2천 년 동안의 서양역사를 발펴보면, 부모의 자식들에 대한 잔인성에 관해 수많은 기록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잔인성은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고문, 무관심, 단순한 소유욕 및 사디즘에까지 걸쳐 있으며,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기 보다는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임을 믿어야만 한다.

 

3장 구약.신약 성서 및 에크하르트의 저술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1. 구약성서

70 구약성서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는, 그대가 가진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하라. 그리고 존재하라!’라는 것이다.

 

72 안식일은 사람들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적어도 하루만은 해방시켜 준다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휴식일에 불과한가? 확실히 그것은 그렇다. 그리고 휴식한다는 그 기능은 인간의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혁신 중의 하나라는 존엄성을 안식일에 부여했다. ~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의 휴식이다. 어떤 것도 파괴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것도 새롭게 지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싸움에 있어 휴전의 날이다. 사회적 변화도 발생하면 안 된다. 풀잎 하나를 뜯는 일까지도 이 조화를 깨뜨리는 것으로 간주되며, 성냥 한 개비를 켜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73 인간은 안식일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따라서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다. ~ 그날에는 재산이나 돈은 애통이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금기이며, 시간이 타파되고 순수한 존재가 지배한다. ~ 오늘날의 일요일은 즐기는 날, 소비의 날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날이다. 조화와 평화의 보편적인 날로서, 또 인간의 미래를 예견하는 인간적인 날로서 안식일을 재정립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1. 신약성서

77 초기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 짓밟히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구양성서의 몇몇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자들과 유력자들을 혹평했고, ()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철저한 악으로서 비난하며 타협을 거부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은 확실히 대대적인 노 예반란의 연설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분위기는 완벽한 인간적 단결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것은 종종 모든 물질적 재산에 대한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이념 속에 표현되었다.

 

81 예수와 사탄은 여기서 두 가지 정반대되는 원리의 대표자로서 나타난다. 사탄은 물질적 소비의 대표자이자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의 대표자이고, 예수는 존재의 대표자이자 소유하지 않음이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이념을 대표한다. 복음서의 시대 이후 세상은 사탄의 원리를 추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의 승리마저도 예수와, 예수 이전과 이후에 살았던 여러 위대한 스승들이 표현했던 완벽한 존재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82 다른 사람의 옷을 가져가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83 “나는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쓴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 것이 아닌 것을 쓰고 있다. 방탕하고 이기적인 과소비는 당신의 것을 당신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든다. 당신은 냉담한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당신의 것을 당신만이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260? ~ 1327)

86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개념은 지식을 소유함인식행위간의 차이점과 관계가 있다. ‘인식행위란 사물의 근본까지 파고들어 원인을 알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어떤 특징의 사상과 과정을 참으로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신을 아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랑은 욕망과 목적에 관련이 있지만, 지식은 어떤 특별한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사심 없이 신에게 달려가 벌거벗은 채 신을 접하고 그를 끌어안는 것이다

 

90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존재는 능동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능동적이라는 것은 분주하다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고, 자기의 인간적 힘을 생산적으로 나타내는 고전적 의미이다. ~ 그는 존재는 끓는과정, ‘낳는과정,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 밖으로 자꾸 흐르는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때로 그는 능동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달린다(running)’는 상징을 사용한다. ‘평화를 향해 달려 들어가라! 달리는 상태, 평화 속으로 끊임없이 달려 들어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 ~ 능동적이고 활발한 사람은 채워짐에 따라 커져서 결코 가득 채워지지 않은 그릇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은 소유양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윤리체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이 내적 능동성의 전체는 모 든 형태의 자아구속과 갈망을 넘어서는 것이다.

 

2편 두 가지 존재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4장 소유양식이란 무엇인가

  1. 취득적 사회 소유양식의 토대

93 오늘날은 사유재산제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체 인류의 역사(선사시대를 포함해서)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특히 경제가 생활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던 유럽 이외의 문화를 생각해 보면, 사실 사유재산제는 통상적인 예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인 것이다.

그러게. 나도 사유재산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긴 땅이고 산 등은 당연히 개인재산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다는 공공 소유라고 생각했는데, 유명한 관광지 바닷가에 가면 멋진 비치는 모두 큰 호텔 소유다. 정작 그 동네 사람들은 못 가고 호텔에 머무는 외국인 관광객만 이용할 수 있는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었는데사유재산 개념이 없는 나라의 사람들이 와서 보면 우리나라의 개인 소유 산을 보고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94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남자라도 재산가였다. 그의 아내, 자녀, 가축을 소유하고서 자신이 절대적 지배자로서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적어도 가부장적 사회의 남자에게 있어서는 자녀를 많이 갖는 것이,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일할 필요도 없이, 또 자본 투자도 없이 인력을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생각할 때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자녀의 생산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독자적 소유형태를 갖는다. 어린 시절의 자식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연쇄관계는 끝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녀들을 착취하며, 청년기에 접어든 남자는 그들의 아버지의 대열에 가담하여 다시 여자를 착취한다.

 

95 ‘개인주의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자기소유(自己所有)’를 뜻한다. 즉 자기의 에너지를 성공에 투자할 권리 그리고 의무 를 말한다.

이게 왜 부정적인 의미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성공을 의해 자기의 에너지를 투자한다는데……

 

96 옛날에는 소요한 물건은 무엇이나 소중히 여겨졌고, 손질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사용되었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소중히 간직하기보다는 소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구입은 쓰고 내버리기 위한것이 되었다. 산 물건이 자동차이건 옷이건 기계이건 간에 얼마 동안 쓰고 나면 싫증이 나서 낡은것을 처분하고 최신형을 사기를 열망한다. 취득 일시적 소유와 사용 폐기(혹은 가능하면 더 좋은 모델과의 유리한 교환) – 새로운 취득, 이것이 소비자 구매의 악순환을 형성하고 있어 오늘날의 표어는 새로운 것은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7 차를 재산으로 소유하면서도 그 차에 대한 차주들의 관심이 그토록 짧게 지속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매우 모순된 것 같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차와 소유자간의 관계가 비인격적으로 고착된 관계라는 점이다. 자동차는 그 소유주가 좋아하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고 지위의 상징, 힘의 연장, 즉 자아를 구축해 주는 것이다. 자동차를 획득함으로써 소유자는 새로운 한 부분적 자아를 획득하게 된다. 두 번째 요소는 새 차를 6년마다가 아니라 2년마다 삼으로써 취득에서 오는 기쁨이 그만큼 증가된다는 것이다. 새 차를 자기 것으로 하는 행위는 처녀를 정복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 즉 지배감을 높여주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자주 일어날수록 의기양양한 느낌을 더하게 된다. 세 번째 요소는 차를 자주 산다는 것은 거래할기회를 그만큼 자주 갖는다는 점이다. 즉 교환에 의해 이익을 남길 기회를 자주 갖는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뿌리박혀 있는 만족감이다. 네 번째 요소는 중요한 것으로서 새로운자극을 경험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익숙해진 자극은 금세 싫증이 나고 무료해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과거 1세기 반 동안에 일어난 사회적 성격의 변화이다. 축적적성격이 시장적성격으로 변화한 것이다.

차는 아니지만 나도 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서 쇼핑을 했었다. 백화점에 그냥 놀러갔다가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예뻐서, 입어 보니 잘 어울려서 산 옷이나 가방도 많다. 차를 좋아하지 않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1. 소유의 본질

102 뭔가를 영원히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체가 영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다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내가 어떤 물체를 보유, 소유, 지배한다는 것은 사는 과정에서 스쳐가는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3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는 없다. 그것과 나는 물건이 되어 버리며,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의 관계도 성립한다.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나의 주체의식, 즉 정신이 내가 그것을(그 밖에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관계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와 주체를 모두 물체로 만들어 버린다. 그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며, 죽어 있는 관계이다.

 

107 소유양식 안에서는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 , 그리고 좀더 분석해 보면 정복하고 빼앗고 죽이는 자기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존재양식 안에서는 행복은 사랑, 공유(共有), 주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1. 소유양식을 지탱하는 그 밖의 요소

  2. 소유양식과 변태적 성격

110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프로이트의 시각에서는 신경증적이고 정신적으로 병든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성원이 변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결론이 나온다.

 

  1. 금용주의와 평등

112 문제는 사치와 가난이 뿌리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은 물질적 자산의 양적 균등을 의미해서는 안 되며, 소득이 각각의 다른 그룹에게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창조할 정도로 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철학적 원고>에서 이것을 소위 미숙한 공산주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 유형의 공산주의는 이런 시기심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며, 최소한의 소유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 평준화의 완성이다.

 

  1. 생존적 소유

113 생존의 소유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격학적 소유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공명정대하고 성스러운인간일지라도 그가 인간인한 생존적 의미의 소유는 불가피하다. 반면 보통 사람은 생존적 의미의 소유와 성격학적 의미의 소유 두 가지를 다 바란다.

 

5장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1. 능동적이라는 것

1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지향을 포기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런 시도는 심각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안전대가 파괴되고,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넓은 바다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은 재산이라는 목발을 던져 버려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 없으리라는 환상,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라는 환상이다. 그들은 한번 쓰러지면 결코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적 도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름발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소유라는 목발을 쓰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1. 능동성과 수동성

119 소외되지 않은 능동에 있어서는 나는 나 자신을 내 능동의 주체로서 경험한다. 소외되지 않은 능동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과정이며, 내가 생산한 것과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나의 능동성이 내 힘의 표현이며, 나와 나의 능동성과 그 결과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120 생산성은 정서적으로 불구가 아닌 한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지향이다. 생산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탄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에도 생명을 불어넣는다.

 

  1. 실재(實在)로서의 존재

128 무의식은 근본적으로 사회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는 불합리한 열정을 만들어내고 그 구성원들에게 갖가지 허구를 공급해 줌으로써 진실을 사이비 합리성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

 

130 ‘존재는 거짓된 환상의 그림이 아닌 실재와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영역을 증가시키려는 어떤 시도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세계의 실재에 대한 통찰의 증대를 뜻한다. ~ 그것은 존재에의 길은 표면을 꿰뚫고 실재를 통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1. 주고, 나누고, 희생하려는 의지

131 4) 학습행동.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게을러지는 것은 학습자료가 그들의 진정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없이 무미건조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강제와 권태가 제거되고 학습자료가 생생한 방식으로 제공된다면 현저한 능동성과 자발성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132 경험에 의하면 그리고 적지 않은 경영자들이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전에는 아주 무관심했던 많은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펼칠 기회, 책임을 맡아서 전체 작업과정 및 그 과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지나, 곧 놀랄 만큼 태도의 변화를 보여서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출하며 결국 한층 만족스러워하게 된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이겠지. 많은 매니저들이 알고 있을텐데, 정작 부하직원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하는 매니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134 반대로 우리는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풍족한 가정 안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치와 이기심을 참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그들의 고립된 삶과 생명 없는 삶에 대해서 저항한다. 실상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6장 소유와 존재, 그 새로운 측면

  1. 안정감과 불안감

140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 실제로 그 발걸음은 일단 내디딘 후에는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는그 너머에 펼쳐질 새로운 국면은 위험해 보이고, 따라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낯익은 것, 시험된 것만이 안전하다. 혹은 그렇게 보인다. 새로운 발걸음은 늘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유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141 영웅들이란 그들이 가진 것 그 토지, 가족, 재산 등 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이다. ~

유태교의 전통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영웅이다. 기독교의 영웅은 예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모든 인류에 대한 충만된 사랑에서 행동한 영웅인 것이다.

 

142 용의주도하고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 명성. 자아 자기 외부의 어떤 것 에 의존하고 있아. 만약 그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로 무엇이든 소유한 것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위, 친구 등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사람은 언제 어떤 순간에 생명을 잃을지 모르고, 언젠가는 반드시 잃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143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나는 존재하는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잇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 안에 있으며 나의 존재능력, 나의 기본적 힘의 발현능력은 내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 삶의 과정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것이다. ~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반면 존재는 실행에 의해 증대한다(없어지지 않는 불타는 나무는 바로 이 역설에 대한 성서적 상징이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지적 창조력 등 모든 본질적 힘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증대한다. 사용되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반대로 보관하는 것은 잃게 된다.

 

143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감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내 자신 속에 있다. 삶에 대한 신뢰의 결핍, 내 생산적 능력에 대한 믿음의 부족, 퇴보적 경향, 내적 나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생활을 떠맡게 하려는 의지 등에 그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 상실의 위험은 항상 소유에 내재한다.

 

  1. 연대(連帶)와 적의(敵意)

146 다시 말해서 탐욕은 소유지향의 당연한 결과가 된다. 그것은 수전노(守錢奴)의 탐욕일 수도 있고,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의 탐욕일 수도 있으며, 난봉꾼이나 바람둥이 여자의 탐욕일 수도 있다. 그 탐욕이 어떤 것이든 탐욕스러운 사람은 결코 충분히 가질 수는 없으며, 만족할수도 없다. 배고픔 같은 육체의 생리에 따르는 일정한 충족점이 있는 생리적 욕구와는 달리 정신적욕구는 모든 탐욕은 그것이 육체를 통해 만족될지라도 정신적인 것이다 아무리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정신적 탐욕이 애초에 극복해야 할 내적 공허감, 권태, 외로움, 침울 등은 그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으로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150 가장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의 한 사람인 게오르크 그로데크(Geroge Groddek)는 남자는 결국 단 몇 분 동안만 남자일 뿐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로데크의 이 말은 남자의 전체적 존재가 어린아이가 된다는 뜻은 아니고, 많은 남자들이 자기가 남자인 증거로 내세우는 바로 그 측면만을 말한 것이다.

 

  1. 기쁨과 쾌락

151 기쁨은 생산적 능동성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끝나버리는 절정 경험(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평원이며,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하는 감정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沒我)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말초적 흥분은, 이른바 절정에 다다른 뒤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흥분은 경험했지만 그릇은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다고 결국은 삶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154 스피노자 또한 그의 인류학적 윤리체계에서 기쁨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쁨은 보다 작은 완성에서 보다 큰 완성으로 나가는 인간의 통로이다. 그리고 슬픔은 보다 큰 완성에서 보다 작은 완성으로 나가는 인간의 통로이다.” ~

따라서 기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1. 죄와 용서

156 사람들이 법률을 존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불복종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죄의식은 권위 자체만이 부여할 수 있는 용서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일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가 바로 그들의 영웅이다. 제우스가 가장 잔혹한 형벌로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는 복종하지 않으며, 또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갖다준 것은 훌륭한 행위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종하지 않았지만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인류의 다른 여러 영웅(순교자)처럼 그는 불복종과 죄의 등식(等式)을 극복했던 것이다.

 

  1. 죽음의 공포와 삶의 확인

162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그것은 석가, 예수,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언뜻 삶의 정지에 대한 두려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우리 곁에 없으며, 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63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와 같이 불합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삶이 소유로서 경험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 경우의 공포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소유한 것을 잃는 데대한 것이다. 내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재산, 내 주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며, 비주체(非主體)의 심연을 대해야 하는 두려움,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다. ~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것은 죽음을 위한 준비로서가 아니라 소유양식을 감소하고 존재양식을 증대하는끊임없는 노력으로서 시작되어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의 갈망, 특히 자아의 속박을 벗어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1. 지금, 여기 과거, 미래

166 존재양식에서는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그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존중은 소유양식이 지배하는 때는 굴복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반면 존재양식에서는 시간은 왕위를 잃고,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166 산업사회에서는 시간이 최고의 지배자가 된다. ~ 시간은 기계에 의해서 우리의 지배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유시간에 한해서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업을 조직화하듯이 우리의 여가까지도 조직화한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게을러짐으로써 시간이라는 전제군주에 반항한다. 시간의 요구에 불복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지만, 실상 우리는 이때 시간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잠시 가석방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3편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7장 종교. 성격. 사회

  1. 사회적 성격의 기초

170 순수한 정신적 변혁은 항상 사적인 범위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스에 한정되어 있으며, 정신적인 가치관에 관한 가르침에 반대되는 가치관의 실행과 결합될 때는 완전히 무력해지곤 했다.

 

  1. 사회적 성격과 종교적욕구

172 그러나 흔히 개인은 개인적 헌신의 진정한 대상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공식적인신앙을 비밀스럽지만 진정한 종교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숭배한다면, 권력의 종교는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종교이며, 그에 대해 그의 이른바 공식적인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174 우리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으며 주위 사람들과의 의견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생각에 관해 자신을 갖는다. 설사 지도가 틀렸더라도 그것은 심리적인 기능을 이행한다. 그러나 지도가 완전히 틀린 적은 없었으며, 또 완전히 옳은 적도 없었다. 지도는 언제나 삶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여러 현상을 충분한 근사치로서 설명한다. 지도는 삶의 실제가 모순과 불합리성으로부터 해방되는 정도까지만 현실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1. 서구세계는 과연 기독교적인가

179 ‘기독교의 영웅은 순교자였다.’ 유태교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성취는 신이나 동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는 그리스와 게르만의 영웅들로 대표되는 이교의 영웅들과는 정반대이다. 그들 영웅들의 목표는 정목하고, 승리하고, 파괴하고, 강탈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삶을 충족시키는 것은 자부심과 권력과 명성과 훌륭한 살육의 기술이었다(성 아우그스티누스는 로마의 역사를 강도단의 역사에 비유했다). 이교의 영웅들은 인간의 가치를 권력의 획득과 그 고수에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의 순간에 전장에서 기꺼이 죽었다. ~ 순교자의 특징은 존재하고, 주고, 나누어 갖는 것이며, 영웅의 특징은 소유하고, 약탈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181 지금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면 어째서 유럽인과 아메리카인들은 현대에 맞지 않는 기독교를 깨끗이 포기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규율을 잃고, 나아가 사회적 결합이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즉 위대한 박애자인 동시에 자기를 희생하는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은 소외된 방식으로 이 믿음을 변형시킬 수가 있다. 이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대신하여사랑을 한다는 경험으로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우상이 된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인간 자신의 사랑의 행동을 대신해 주는 것이 된다.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온갖 사랑을 다하신다. 우리는 그리스 영웅적 행동을 계속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외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의 대용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자신의 탐욕스런 태도에 대한 손쉬운 구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사랑에 대한 신앙을 공언함으로써 전혀 사랑이 없다는 데 대한 무의식적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을 어느 정도는 느끼지 않게 된다.

 

184 아버지의 사랑은 정의(正義)’이다. 부드러운 어머니다움과 억센 아버지다움이라는 이 두가지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 남성다운 측면과 여성다운 측면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과 여성으로 하여금 자비와 동시에정의에 대한 욕구를 갖게 한다 ~

모든 것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의 동정녀 마리아와, 어머니답게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사랑의 모상(母像)으로서의 교황과 신부가 있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교황을 정점으로 부계 중심의 관료제라는 엄격한 가부장적인 요소가 또한 병존하고 있었다.

 

187 시장적 성격이 목적으로 삼는 것은 퍼스낼리티 시장의 모든 조건 아래에서 바람직한 인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완전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시장적 성격의 퍼스낼리티(19세기 사람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집착할 만한 자아,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변하지 않는 자아를 소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킨다.

이와 같이 시장적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은 계속 움직이며 모든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그렇게 바삐 움직여야 하는가, 또는 왜 그토록 능률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그럴듯한 대답을 못한다. 그저 더 많은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또는 회사를 더 키우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한다.

 

188 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또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계가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핵무기의 위험이나 생태학적인 파멸에 대해 그 위험성을 알려주는 온갖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왜 그 점에 관심을 쏟지 않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188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째서 물건을 사거나 소비하기를 좋아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산 물건에 대해 애착이 없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시장적 성격이 갖는 허상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물건이 주는 위엄이나 위안이고, 물건 그 자체는 아무런 실체도 갖고 있지 않다. 물건이란 오로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친구나 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깊은 연대감이 없기 때문에 그들 역시 소비의 대상인 것이다.

 

189 “내 머리는 많은 사실들 가운데서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게 즐기던 취미의 상실은 바로 행복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의 정서적인 요소를 약화시킴으로써 지성에 해를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도덕적 인격에까지 해를 주었던 것 같다.”

 

192 인간은 신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를 잘 다룸으로써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이 같은 공식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실제로 심한 무력상태에 있는 인간이 과학과 기술에 관련하여 자신이 전능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70년대 중반에 이런 글을 썼으니, 지금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보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1. 휴머니즘의 저항

198 “ ~ 만일 당신이 예술을 즐기고 싶다면, 당신은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가 당신이 바라는 대상과 당신의 현실의 개인적인 생활의 대상과 일치하는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기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202 “2, 3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인간적존재로서가 아니라 일하는존재로서만 살아왔다.” 인간의 본질은 위축되고 그런 위축된 부모들에 의해 어린아이들이 양육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인간적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핍되고 말았다. “후에 성인이 된 그 자신 또한 지나치게 직업에 예속되어 점점 더 천박한 오락에 탐닉, 거기에 굴복하게 되었다…… ‘자아의식의 상실과 분산, 그리고 절대적인 수동성은 현대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적 욕구가 된다.’” 이렇듯 슈바이처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권장하고 과잉소비와 사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204 석가와 에크하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슈바이처의 사상에는 뚜렷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소유지향의 포기에 대한 극단적인 요구, 완전한 독립의 주장, 형이상학적인 회의론, 신과 무관한 종교성, 그리고 동정과 인간적 유대감을 갖는 사회적 능동성의 요구 등이다.

그런데 이들 스승들은 때로 이러한 요구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에크하르트는 그의 비신론적(非神論的) 요소를 의식하지 못했고 마르크스는 그의 종교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특히 에크하르트와 마르크스의 경우, 해석의 문제에 있어 그것이 워낙 복잡해서 사랑에 입각한 능동주의의 비신론적 공교를 적절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종교가 바로 이들을 새로운 인간의 필요성에 알맞은 새로운 종교성의 창시자로 만든 것이다.

 

206 경제학자인 슈마허(E. F. Schmacher)<인간 부흥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실패는 우리의 성공의 결과이며, 우리의 기술은 진정한 인간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활의 내용으로서의 경제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무한한 성장은 이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를 생활의 내용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 되어 왔으며, 경제가 생활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명백해졌다. 만약 그 치명적인 질병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처럼 일종의 중독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중독이 좀더 이기적 형태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형태인지, 또는 거친 물질적인 방법으로 만족을 취하는지, 아니면 예술적이고 문화적이고 과학적인 세련된 방법으로 만족을 취하는 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은박지로 포장을 했어도 독약은 독약이다…… 만약 인간의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문화가 무시된다면, 그때야말로 이기주의가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또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 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체제보다도 이 같은 지향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리게 된다.”

 

208 5) 인구증가는 치명적인 역병(疫病)의 세계적 만연과 핵전쟁의 가능성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그 두 가지는 어느 것이나 인구문제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해결방안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문명의 파괴와 심지어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

 

8장 인간변혁의 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질

213 2) 안정감, 동일성의 감각, 확신을 가질 것. 이 확신은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 자기 주의의 세계에 대한 상호 관련성, 관심, 사랑, 유대를 지향하는 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그러한 욕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3) 자기 이외의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철저한 독립성과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사랑과 공유(共有)에 헌신하는 가장 충족된 행동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4) 현재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

5) 축재(蓄財) 또는 착취가 아니라, 베풀고 나누어 갖는 데서 오는 기쁨을 가질 것. ~

9)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비판적이고 냉철한 사고능력과 함께 발전시킬 것. ~

11) 자기 및 동포들의 충분한 성장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을 것.

12)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양과 현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알 것.

13) 또한 어떤 성장도 그것이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 또한 생명의 속성으로서의 구조와, 비생명(非生命), 즉 죽음의 속성으로서의 질서라는 구조 사이의 차이를 알 것.~

16) 자기 자신을 알 것. 알고 있는 자아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자아까지도 알려고 노력할 것. 자기가 모르는 자아에 대해서는 막연한 지식밖에 가질 수 없겠지만. ~

18) 방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를 구할 것. 여기서 찾는 자기는 탐욕의 덩어리가 아니라 성장이냐 파멸이냐, 삶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한 순간에도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20) 이러한 모든 품성의 완성에 도달한 사람을 몇 명 안 된다는 사실을 알 것. 그러나 반드시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야망을 갖지 말 것. 그러한 야망은 탐욕과 소유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알 것.

21)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든 그것은 운명에 맡기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동성의 과정에서 행복을 맛볼 것. 가능한 한 충족된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자기가 과연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9장 새로운 사회의 특징

  1. 새로운 인간과학

217 3) 경제적 파국이라는 모험을 피해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목표를 선택적 성장이란 목표로 바꿔야 할 것이다.

4) 물질적인 이익이 아니라 정신적 만족이 효과적인 동기가 되는 사회풍조와 노동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5) 과학적인 발전을 촉진함과 동시에 이 과학적 발전이 실제로 응용됨으로써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

8) 개개인이 노동에서보다는 삶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가능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노동에 있어서도 이제는 개인의 창의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매우 훌륭하지만 현실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놀랍다. 대부분 소유를 초월한 삶을 산 사람들의 모습이 개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쉬웠는데, 어쨌든 사회와 국가 차원으로 확대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223 ‘건전한 소비는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만 근거하여 생산을 결정하는 대기업의 주주나 경영자의 권리를 우리가 철저하게 제한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해진다.’ ~

이러한 모든 변혁은 시간을 두고, 그것도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해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새로운 경제체제와 자본주의의와의 차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소련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자본주의나 스웨덴의 전반적인 복지관료주의간의 차이만큼은 될 것이다.

 

228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거가 여론조사보다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선거는 반최면적인 방법을 써서 사고력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거는 정치적인 논점이 아닌 후보자의 소망과 포부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주간 연속극이 되어 버렸다. 유권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자에게 투표를 함으로써 이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내려고는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투사(劍鬪士)가 아닌 정치가들이 투기장에서 싸우고 있는 현대적인 로마식 구경거리에 열광한다.

 

231 아이히만(Eichmann)은 관료의 극단적인 예이다. 그가 수십만의 유태인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던 것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을뿐이다. 그는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마치 그들을 독일로부터 신속히 이주시키는 책임을 맡았을 때처럼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는 단지 학생시절 수업 중에 빈둥겨렸을 때와 공습기간 중에 대피하라는 명령을 어겼을 때의 두 경우에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형사가 떠오른다. 그는 물론 장발장을 증오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증오하게 된 것도 애초에 자기 의무를 다 하려고 했던 거니…. 자신의 생각이 없거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의 일만 다하려 할 때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 소설에서는 한 명만 쫓아다녔는데, 현실이 더 무섭다.

 

232 병원에 근무하는 어떤 관료가 환자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는 그 병원의 규정 때문에 위독한 환자의 입원을 거부했다면, 그의 행동은 아이히만이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관료주의적 규정의 어떤 조항을 위반하기보다는 빈민을 굶주리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사회사업가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태도는 단지 관리들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사, 간호사, 교사, 교수들 속에도 많은 부부관계와 부자관계 속에도 존재한다.

 

235 2)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의 격차는 좁혀져야 한다. ~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백인사회의 요새 속으로 역병이 순식간에 퍼지거나, 기근으로 절망에 빠진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아마도 산업화된 세계의 동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파괴행동을 자행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조그마한 핵무기나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여 백인의 요새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236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 지구상에 현재 살아 있는 같은 시대의 인류들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들 후손들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함한다. 지구의 자원을 계속해서 낭비하고 지구를 오염시키며 핵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행위보다도 우리의 이기심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 이처럼 파손된 지구를 서슴없이 유산으로 물려주려 하고 있다.

3) 오늘날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이 생각의 요지는 모든 인간이 그가 일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살 곳을 소유할 절대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우리의 애완동물에게나 보장된 권리이지 인간들에게 보장된 권리는 아니다. ~

4) 여성은 가부장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양성(兩性)간의 투쟁은 계급투쟁만큼 역사가 깊은 것이지만, 한결 복잡한 형태를 취해왔다. 왜냐하면 남성은 여성을 일하는 암컷으로서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 애인으로서, 또 위안자로서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양성간의 투쟁형태는 때로는 노골적으로 잔인한 형태를 띠지만, 대부분은 잠재적이다. 여성은 힘의 우위에 굴복하지만, 여성 특유의 무기로써 반격했다. 남성을 조롱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무기이다

 

240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여성해방의 시작과 남성우위의 붕괴라고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남성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전반적 관계 (성적인 관계를 포함하여)는 가상적인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들은 이미 남성우위의 신화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여성들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41 6) 유효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정보는 효과적인 민주정치의 구성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정보를 은폐한다거나 왜곡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부당한 정보의 은폐가 없다 하더라도 현재 일반시민에게 주어지는 필요한 진짜 정보의 양이 거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243 8) 이상 제시된 제안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여기에다 새로운 사회의 또 하나의 필수조건, 핵무기의 철폐를 첨가하게 되면 이 어려움은 거의 극복하기 어렵게 된다.

대규모적인 군수산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우리 경제의 병적인 요소의 하나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에서조차 군사예산의 부담 때문에 건강과 복지와 교육에 관한 예산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살상의 수단으로 밖에 쓸모가 없는 총포의 생산 때문에 그 재원을 탕진하고 있는 한 국가가 사회적 실험을 위한 비용을 감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1. 새로운 사회, 그 실현 가능성

246 또 한가지 희망적인 전조는 오늘날의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세기의 불안(la malaise du siècle)’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억제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억압을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황량한 고독감과 공존속에서도 공허감을 느낀다. 그들은 또 스스로의 무력감과 스스로의 삶이 무의미함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느끼지는 못하지만, 다른 누군가 말해 주기만 하면 충분히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오늘날의 공허한 소비생활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무력하며 개인적인 책임감도 거의 없는 전체 중산층의 것이 되어 있다. 서구사회의 과반수는 소비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그리고 그런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많이 소유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깨닫기 시작했다. ~

중산층적인 사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낡은 환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서구사회의 중하층과 사회주의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이다. 사실상 소비를 통한 행복이라는 부르주아적 희망은 아직 그 부르주아적 꿈이 성취되지 못한 나라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다.

 

249 이런 희망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사회적 변혁의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이상이 손짓하는 강력한 매력이다. 체제의 변혁이 없이 이런저런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결국 헛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강력한 동기(동기)라는 추진력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적목표가 오늘날 지도자들의 현실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의 실현은 이윤, 권력, 지식과 같은 낡은 동기가 존재, 공유, 이해와 같은 새로운 동기에 의해 대치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시장적 성격이 사랑하는 능력을 지닌 생산적 성격으로 대치되어야 하며, 사이버네틱스 종교는 급진적인 인도주의의 새로운 정신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250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창한 것은 사람들이 신의 나라의 이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된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에서 활력을 얻음으로써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이상은 바벨 탑의 이상으로 타락했다. 이제 그것은 무너지기 시쟉했으며 결국은 그 폐허 속에 모두를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이라면 하나의 새로운 ()’, 즉 중세 후기의 사회의 정신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인 사고 및 발달된 과학의 총합이 이 혼돈에 대신하는 오직 하나의 선택이다. 이 총합이 곧 존재의 나라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 1편에서는 먼저 소유와 존재의 기본 개념에 대해 용어의 기원과 어법 등을 통해서 정의 한다. 이후 일상에서 소유와 존재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2편에서는 두 가지 삶의 양식을 보다 깊이 있게 분석해서 왜 존재 양식의 삶이 우월하고, 그런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결론 부분인 3편에서는 존재 양식의 삶을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 국가 차원에서 실행하기 위한 제도 등을 제안하며 마무리 한다.

    책 자체가 크게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인의 사상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해 아주 잘 구성된 논리적인 목차라고 생각한다.

  2. 보완할 점

    : 번역서의 단점인 번역문투가 심하게 드러난다. 복문을 그대로 번역한 듯 문장이 너무 길고, 장황해서 몇 번을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된다. 문체가 아니라 내용 때문이긴 했지만, 글쓰기 참고 서적으로 추천받고 읽은 거라 더 실망이 컸다. 복문을 단문으로 자르고, 문장 구조를 좀더 우리말 구조에 맞게 바꾸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 소유와 존재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국가, 전 세계까지 확대하고 실천방안을 제안한다. 저자도 인식하고 있듯이 실천방안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실천되기도 어려울 것 같지만 이런 제안을 해서 독자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본다. 또한 소유와 존재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은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4. 내가 저자라면

    나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 중에 존재양식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넣겠다. 중간 중간에 존재양식의 삶을 살다 간 인류의 큰 스승 예수, 석가모니 등 의 예가 나오긴 하지만 그들은 일반 인간과는 다르다. 그런 성인들의 삶만을 담아서는 오히려 일반인은 불가능한 생활 양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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