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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9일 09시 1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김경집

 

무엇보다 그가 마음에 들었던 자신의 삶을 등분으로 나눠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25년은 쓰며 살기를 꿈꾼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고 있나. 또한 실제 그렇게 실천해 가고 있다. 그렇게 살려면 그런 능력이 되어야 하는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어찌되었던 부러운 사람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이렇게 3단계를 거쳐야 하지 않을까. 다만 시간 길고 짧음이 다를 뿐이지 않겠는가.  

시대정신과 호흡하고 미래 의제를 모색하는 일에 가장 의미를 두는 삶을 꿈꾼다. 서강대학교 영문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을 전담하여 가르쳤다. 평소 신조대로 스물다섯 해를 끝으로 강단을 떠나면서 그의 인문학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은 대중을 향하기 시작했다. 여러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끊임없는 글과 강연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접근방식을 전환시키기 위한, 그의 작지만 강한 실천 방식이었다. 인문학에서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누구나 쉽게 찾을 있는 위키피디아식 지식은 이상 필요 없는 시대로,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연결하고 융합하느냐이다. 그는 인문학이야말로 휴먼웨어(Humanware)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며, 거기서 나아가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드는융합하는 인문학 세상을 이해하고 편집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시간을 역사로, 장소를 공간으로 만드는융합하는 인문학 통해 사고는 멈추거나 갇히지 않게 되고, 인식의 지평은 넓어지며, 거기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창의성이 발현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인문학은 지금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실용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보다 지속적이고 심층적인 인문학 나눔을 위해 팟캐스트 ‘김경집, 정영진의 빨간약 : 퍼스트 클래스’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대표 도서로는 ‘대통령의 서재’에 꽂힌 《앞으로 10, 대한민국 골든타임》, 창조와 혁신을 위한 새로운 사고 《생각의 융합》, 엄마의 혁명을 꾀하는 《엄마 인문학》, 인문학의 대중화와 새로운 지평을 위한 《인문학은 밥이다》 등이 있으며, 이외에 《고장난 저울》, 《청춘의 고전》, 《나이듦의 즐거움》 등 사유와 성찰을 토대로 한 다양한 책들을 펴냈다.

2010년 《책탐》으로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고,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청소년을 위한 진로인문학》, 《고전, 어떻게 읽을까?, 《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를 최근에 펴냈으며,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고전 콘서트》,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철학 교과서, 나》, 《거북이는 왜 달리기 경주를 했을까?》 등을 함께 썼다. 그리고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프롤로그 - 히말라야는 하나의 거대한 책이었다.

 

6. 히말라야 설산이 배경인 광고물이었다. 갑자기 머릿속까지 시원해졌다. 숨통이 트였다.

꽉 막힌 도로든 어디든 무엇을 생각하느냐, 보느냐에 따라 갑갑해 미칠 것 같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거겠지. 

6. 파란 하늘 아래 만년설의 장관을 마다할 사람 있을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숭고함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눈 덮인 산을 아이젠을 차고 한번 올라가보는 것이 소원이다. 거창하게 히말라야니 에베레스트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눈 덮인 한라산을 한번 가고 싶다. 눈꽃이 가득 핀 한라산. 생각만 해도 좋다.

6. 겸손은 말과 글로 배우는게 아니라 몸으로 느낄 때 실존한다. 히말라야는 그걸 아무 말 없이 몸으로 체득하게 한다.

바다, 호수 등 그 크기를 어림잡을 수 없는 거대한 크기가 나를 압도한다. 자기보다 뭔가 거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작아진다. 그러나 문제는 나보다 작은 존재, 못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하는 태도에 어떻게 대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

7. 갑자기 히말라야로 떠나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기로 했다.

나는 산티아고를 한번 걷고 싶은 꿈이 있다. 저자의 히말라야 처럼. 언젠가는 가겠지. 그리고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 한달에 1만원씩 모아야겠다.

7. 나의 히말라야 걷기는 오로지 한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만나고 다듬고 세우는 과정의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자로서 정체성과 의제에 관한 고민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만도 없었다.

7. 내가 히말라야로 떠난 건 대단한 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나 자신에게 그런 선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보름의 휴가를 누려본 적이 없다.

보름이 뭐냐. 며칠이라도 휴가를 보내봤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걸 안다. 나이가 먹는 건 싫지만 나이는 숫자라고 생각해두자.

7.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여비를 마련하고자 몇 달 동안 차곡차곡 모았다.

여행도 결국 돈이다. 부족한 여행도 좋은 경험이지만 이왕이면 사치를 누려보는 것이 더 좋다.

8.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선물을 하는데 그런 불리함은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

지금의 시대에 그런 불리함을 감수하는 것이 쉽지 않다. 불리함 뒤에도 다시 할수 있는 지위와 능력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8. 인문정신은 역동적이다. 물론 때로 아주 조용히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정신과 미래의 의제가 결여된 인문 정신은 존립 자체가 불가하다. 그저 머릿속에서만 잠시 머무는 성찰과 지식이어서는 안 된다.

역동적인 인문 정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8. 나는 이 히말라야 여행이 액티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험한 길 오래 걸어야 하고 힘든 일 몸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으니 분명 역동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건 내 몸이 길을 따라 움직였다는 점에서 그랬을 뿐, 이 여행은 내게 매우 정적이고 고요한 것이었다.

당연하다. 몸을 고생하면서 여행을 하는 것은 고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고생속에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마라톤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하이러너를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저 아무생각없이 하나의 생각을 고도로 집중되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히말라야 트래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8. 아무 상념이나 잡념 없이 그저 아침에 일어나 묵상하면서 잡은 화두 하나 질끈 부여잡고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고 자연에 묻고 자연의 대답을 얻었다. 그러면서 오로지 나 자신에 충실하게 나와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여행은 혼자 하는 것이다. 여럿이 하면 불가능한게 너무 많다. 그게 아무리 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9. 내게 가장 역동적인 일은 책을 읽는 일이다. 남들은 책 읽는 일이 아주 정적인 일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 책을 읽는 동안 뇌세포는 총동원되어 긴장하고 끊임없이 묻고 캐고 따지는 일에 몰두한다.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 동적인게 아니다. 뇌의 근육과 가슴의 올들이 촘촘히 일어선다. 그러니 그것만큼 역동적인 일은 달리 찾기 어렵다.

이제는 이해가 간다. 지난 1년 동안 독서의 참 맛을 알았다면 거짓일까. 책을 읽는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것.

9. 무엇보다 독서가 역동적인 것은 몰입의 강도가 매우 강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걸으면서 목적지를 잃거나 가야 할 길의 풍경을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

9. 지하철이나 버스에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오로지 혼자다. 혼자 온전히 자신에게만 충실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그 몰입으로 따져도 책 읽는 일은 역동적이다….. 뇌의 운동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하니 분명 그 일은 역동적이다.

9. 그런 점에서 이번 히말라야 걷기는 하나의 책이었다. 아니, 히말라야가 한 권의 거대한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었다.

9. 느슨해진 인문 정신을 다잡고 미래 의제에 대한 성찰을 곧추세우면서 하루에 하나씩 화두를 잡고 뚜벅뚜벅 걸었다. 그것은 하나의 독서였다.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도는, 한 권의 책을 읽은 실존의 독서였다.

10. 이 책은 히말라야 기행문도 아니고 여행 안내서도 아니며 답사의 기록물도 아니다. 내가 나에게 제출하는 생각의 과제물이며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들에게 드리는 나눔의 보고서다. 일상의 삶에서 꺾이거나 접히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갈 우리의 인생에 대한 겸손하고 어눌한 고백서다.

어쨌든 멋있다. 15일간의 여행을 이렇게 책으로 낼 수 있었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11. 시인 천상병은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짧은 소풍이라고 노래했다. 나의 여정은 그 소풍 가운데 작은 산보라도 되었기를 꿈꿔본다. 삶의 마감 때까지 늘 그런 꿈을 품고 살고 싶다. ‘사월과 오월<등불>을 부르면서

 

#1. 설렘 모든 시작에는 그 이전의 시간이 있다.

 

18.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그래서 내가 못 떠나는 것이다.

18. ‘벗어남묶음의 맞선 말이다. 그러니 여행이 벗어나는것이라면 어딘가에 묶여 있는것을 전제한다. 이는 반드시 가정이나 직장에 묶이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생각에 묶이기도 하고 관계에 묶이기도 하며 산다.

멋진 문장이 너무 많다. 한자 한자 얼마나 깊은 곳에서 나왔는지 느낌이 온다. 다른 책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18.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여행의 진짜 즐거움은 지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속박의 정체를 모르고 떠나는 건 새로운 속박으로의 변형일 뿐이다.

19. 여행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선물로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보상이다.

여행의 의미를 얘기해주는 정의이다.

19. 일단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일상의 일도 지루하거나 힘겹지 않다. 그건 바로 설렘 때문이다. 설렘! 살아가면서 설렘을 느끼는 게 얼마 만큼일까. 사랑을 느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겨우 맛본다. 여행은 그런 설렘을 담뿍 허락한다. 그렇게 여행의 맛은 떠나기 전부터 지금 겪고 있는 속박에 대해서조차 너그러워지는 여유에서 시작된다.

20. 설렘, 그게 바로 여행이 주는, 아니 여행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달콤한 선물이다. 막상 여행지에 가면 고생도 해야 하고 뜻하지 않은 일로 힘들기도 하지만 떠나기 전 설렘은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20. 그래서 항상 여행은 그 전주곡이 달콤하다. 때로는 본곡보다 더 농밀하다. 어떤 변주곡이 생길지 모른다. 그건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낯섦을 즐기고자 하는 기꺼움이다. 그게 바로 묶임을 풀고 벗어남을 즐기는 핵심이다.

20. 때로는 그런 여행조차 일상에 쫓기고 허둥대느라 그 전주곡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의 시간을 짜내기 위해 미리 해야 할 일들을 갈무리하고 다녀온 뒤 처리해야 할 일들은 준비해둬야 하는 상황이 그 달콤한 설렘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건 둘째치고 여행지에서 받는 업무상 전화는 정말 여행의 즐거움을 추락시키는 일이다.

20. 사실 우리가 휴가 기간에 떠나는 대부분의 짧은 여행은 거의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그걸 아쉬워하지 않는 것은 여행 자체가 이미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20. 허둥지둥 허겁지겁 대충 마무리하느라 바쁘지만 그마저도 즐겁다.

21. 여행에서 너그러움을 누리고, 그리고 약간 허술한 빈 곳을 마련하는 게 없다면 그건 이미 여행의 미덕을 많이 잃은 것이다.

21. 모든 시작에는 그 이전의 시간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만끽하는 설렘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설렘만큼 새콤달콤하다.

21.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다.

21. 설렘이라고 무조건 짝사랑 상대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듯 콩닥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여행은 용감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여행은 짝사랑이 아니다. 낯선 곳으로 가는 설렘은 영감의 못자리다.

영감의 못자리.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데 같은 문장이면서 단어의 차이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다가온다. 40년간 언어를 사용해왔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다.

21. 설렘은 사라짐에 대한 원초적 인식과 애틋함이 빚어내는 행복이다. 그 설렘이 유한한 순간들을 이어 붙여 영원이 되게 하는 마법의 고리다. 거기에서 영감이 솟아난다. 그러니 설렘은 단순한 여행의 전조가 아니며 여행을 촘촘하고 농밀하게 만들어주는 촉매이다.

여행을 하기 전의 준비과정과 전날의 설렘은 어디서부터 만들어진걸까. 소풍전날의 잠못 이루는 설렘도 비슷하리라. 소풍 전날의 설렘이 소풍 당일을 더 즐겁게 하는 촉매 역할은 확실하다.

22. 일 년 내내 눈을 머리와 허리에 이고 진 설산을 보고 싶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위시리스트에 들어 있으며 동시에 버킷리스트에 올랐을 히말라야 트레킹, 그래 가자! 그게 다였다.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산티아고만 있었는데 오늘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히말라야 트레킹. 사람들은 설산에 가고 싶어한다. 초록이 가득한 산은 너무 눈에 익었고 설산은 왠지 신비감을 준다. 아마 많이 보지 못한 그런 느낌 때문에 그럴 것이다.

23. 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목적이 아무리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라 해도 어떤 한 지점으로 목표를 정해 오직 그 방향으로만 접근한다는 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지금도 방황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때때로 누가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정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도 이런 방황이 즐겁기만 하다. 좀 더 너그럽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23. 그저 그런 표현이 싫다. 그뿐이다.

하긴 왠지 그런 표현은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너무 메마르고 재미가 없는 그런 표현이다. 저자가 말한 책은 릭 워렌 목사의 <릭 워렌과 그를 이끈는 삶의 목적>이다.

23. 여행이란 건 어쩌면 목적지가 정해졌다는 점에서 목적이 이끄는삶의 대표적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여행은 단지 공간이라는 포괄적 대상만 정해졌을 뿐이고, 그 공간조차 못으로 박은 듯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 설레고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화고 있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거기서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23.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건 일종의 형용모순이고 자기기만일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지향적이다.

점이라는 표현. 멋진 문장이다. 발상의 전환. 인문학자 답다.

24. 함께 동행한 일행은 심지어 가는 내내 잠만 자거나 잡담만 나눈다. 그러나 중간에 아무리 멋진 곳을 발견해도 샛길로 빠져 거기서 하루쯤 머물거나 아예 눌러앉아 휴가를 보내는 건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여행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아니 선이라기보다 면에 가깝다. 물론 선도 면도 점들의 집합일 수는 있겠지만, 늘 살아온 습관인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그려내는 것이 여행이다. 자유가 빠진, 목적지에 매달리는 여행은 이미 구속의 일부이다.

얼마나 점 위주로 여행을 했는지. 왜 그런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점보다는 선, 선보다는 면으로서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24. 오르는 길이 목적지를 향한,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과 성취욕이라면, 그건 일상의 삶일 뿐이고, 느긋하게 이 길 저 길 옆길로 샐 수도 있는 하산길이 바로 여행의 느긋함일 것이다. 그런 너그러움이 있어야 대상도, 나도 제대로 보인다.

이제부터 여행은 특별한 계획없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과정을 미리 짜 놓으면 그날 그것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에 정작 여행의 즐거움을 즐길수 없다.

24. 고은 시인의 눈도 그랬던 모양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을 내려갈 때 보았으나, 올라갈 때도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시인도 사람인 것 어쩔수 없나 보다. 그렇게 훌륭하고 노벨문학상감이라고 얘기하던 그가 신인 작가들을 괴롭히는 전문적인 성추행범이라니. 글은 그 사람의 성정이라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이제 그의 시는 시가 아닐 것이다. 그는 끝났다.

24. 올라가면서 나무에게 말도 걸어보고, 새에게 귀를 열어주며, 들꽃에게 눈이라도 맞춰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다다라야 한다는 조바심이 마음도 귀도 눈도 닫아버린다. 그게 우리 일상의 삶이다.

그러나 등산해본 사람은 안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오르는 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오로지 내 발과 숨소리, 땅만 보고 가는데 어디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 틈이 있냐고. 나는 오히려 반대다. 등산을 하는 목적이 여행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등산을 운동으로 본다. 운동을 하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꼭 마음을 닫아버리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25. 본디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라틴어 어원은 힘들고 어려움을 뜻하는 ‘travail’에서 나온 것이나 호사스러움보다는 원초적인, 이미 문명에 젖어 그 원초적 상태까지 내몰지는 못해도 최대한 거기에 가까운 상태를 즐길 수 있을 때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편하고 즐기기 위한 여행도 나쁘지는 않지만 돌아보면 그런 것은 남는 것이 없다. 결핍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근래에 들어 많다. 다만 아이들이 어려서 걱정이다. 다 자란 뒤에는 너무 늙어서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해서 걱정이고.

25. 나의 히말라야 여행이 그랬으면 싶다. 기꺼이 선택한 불편함과 곤궁함, 그리고 바닥까지 던져보는 용기가 이 여행에서 내가 얻고 싶은 자유와 전제조건이 아닐까 싶다.

25. 앤드류 매튜스가 그랬던가? 목적지에 닿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이미 그 과정이 시작되었다.

25. 우리는 일의 모양이 나타나야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자꾸만 특정한 날짜를 정해서 그것을 기리고 의미를 부여한다. 참 허허로운 짓이다. 무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듯 불안하고 허전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 시간은 매순간 살아 있고 의미 있는 것이거늘, 떠나기 전날이 떠나는 날보다 행복하다.

26.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된다. 여행은 직선의 삶에 대한 저항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호흡으로, 더 나아가 신성으로의 회귀를 꿈구는 출가다.

26. 자연주의를 외친 현대미술가 훈데르트바서의 말은 그런 점에서 딱 맞다.

신은 직선을 만들지 않았다.”

직선을 좋아했었던 때가 있었다. 직선은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리고 바르다는 느낌이 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제 곡선이 너무 좋다. 얶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27. 직선은 시간의 낭비를 혐오한다. 직선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충실한 기계의 삶을 만들려는 폭력이다.

27. 점과 점을 이어도 곡선일 수 있다는 발칙함과 저항이 나를 곧추세운다. 속도만 좇다가 풍경을 잃는 것도, 풍경에만 취해서 속도를 놓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27. 살아간다는 건 속도와 풍경을 함께 누리는 법을 깨우치는 과정이다. 그게 나이드는 과정이다.

28. 일상의 날은 특별한 의지나 의도가 없어도 그럭저럭 그냥저냥 굴러간다. 어제의 관성이 오늘을 밀고 간다. 그게 지겹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면 타성이 된다.

28. 나이 한 살 먹는 것도 정월 초하루만 처연하고 비장하지 금세 작년의 나와 비슷하게 살아간다. 매일이 설렌다는 건 여간한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일 설레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설렘이 설렘일수 있는 건 자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레이는 것이 아닐까.

29. 억지로 糖衣(당의)를 입혀놓고 좋아라 하는 건 낯간지러운 일이다. 어제 먹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도 매일의 설렘을 채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저 잠깐 혀를 위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9. 설렘은 누가 주는게 아니다. 한 주의 하루나 이틀 쯤은 그런 사치를 누려도 된다. 누가 시비할 것도 아니다. 봄날의 아침 출근길 바쁜 발걸음에 얼핏 보았던, 봉오리가 막 터지고 있던 녀석이 한낮의 햇살을 받고 얼마만큼 꽃눈을 열었을까 궁금하면 퇴근길 짦은 설렘이 안주머니에서 빙그레 웃는다. 그런 설렘쯤은 누려야 산다. 벤츠니 벤틀리니 하는 고급차 따위 없어도 하루 일과 마친 무거운 발걸음이 설렘의 길을 누리면 걷는 게 축복이다.

29. 그 여리디 여린 꽃눈의 개화 하나가 오늘을 어제가 되풀이되는 하루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사는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오늘을 잠깐이라도 맛보는 나는 어제의 나와 같지 않다.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사는 것. 그러나 어제보다 나아야 된다는 것이 강박이 되어서는 안된다. 참 어려운 일이다. 단지 어제보다 책을 많이 읽어서 공부를 많이 해서 나은 것은 1차원적인 수준이다. 마음의 성장이 중요한 것이다. 어제보다 감사한 마음, 행복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진정 어제보다 나은 것이 아니겠나.

30. ‘어제의 내가 아닌 것(I am not what I was)’ 그게 바로 부활이지. 그러므로 설렘은 부활의 씨앗이다. 산지기가 삼 씨앗 여기저기 뿌리며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언젠가 누군가가 그 잎과 뿌리를 만났을 때 짜릿함과 행운을 혹은 건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가끔은 그 전날 그 설렘의 씨앗을 뿌리고 튀워볼 일이다.

30. 씨앗을 뿌려둬야 싹을 얻고 꽃을 만난다. 오늘은 씨앗 몇 개나마 뿌려둬야겠다. 복사판 같은 내일들을 오직 하루뿐인 그날로 만나기 위해

 

#2. 탈출 - 때론 급진이 필요하다

 

32. 나는 우리가 일단 그 산에 오르기만 하면 눈 앞에 가로놓인 과제에 깊이 몰입하는 바람에 그런 기분은 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33. 살면서 회의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무의미한 삶이다. 회의는 절망과 한숨이 아니라 살아온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해석의 과정이다. 그것은 자아의 타성화된 일상에 타협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다.

33. 그러므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회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여행은 너그러운 회의의 과정이다. 다만 떠났던 지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원점산행과도 같다.

33. 여행은 무언가를 담고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부에서 굳은 더께를 걷어내고 비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히말라야로 떠나고 싶었던 건 바로 그런 욕망에 대한 내적 호응이었다. 내려놓을 건 다 내려놓고, 설산에 묻고 올 것은 다 묻고 오자. 그러면 꼭 지켜야 할 고갱이가 무엇인지는 알 게 될 것이니

더께 : 몹시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 / 고갱이 : 사물의 중심이 되는 부분

34. 내가 탄 택시는 놀랍게도 티코였다. 한국에서도 타보지 못한 것을 네팔에서 타다니! 그런데 좁다거나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내 인생 첫차가 티코였다. 모든 것이 수동이었다. 창문도. 기어도. 언제적 티코인데. 감회가 새롭다. 티코를 탈 때 좁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35. 역시 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가장 진한 곳이다. 그래서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며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라고 하는 것이다.

35. 치열하고 맵기도 하지만 인정이 넘치고 미래의 희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오랫동안 촘촘히 박혀온 현장이다. 상대적 운운할 것도 없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모든 건 아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은 고통스럽고 원망스럽다.

35. 모든 이의 삶은 공평하며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머리로는 안회의 단표누항이니, 단사표음이니 찬양하면서 정작 삶은 욕망의 더께를 덕지덕지 바른다. 나보다 못하면 무시하고 나보다 풍요로우면 선망한다.

참 간사하면서 어쩔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 밖에.

36.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모든 고단함을 견디게 할 것이다. 그건 숭고함이다.

36. 진짜 달콤한 건 생판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날 알아채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며 그저 풍경의 일부로만 여기는 상태로 그저 무심히 앉아 있는 일 자체였다.

37. 낯선 곳에서 하루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러 그냥 멍때리며진공의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는 것도 짜릿할 것이다. 늘 바쁘게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강박을 완전히 걷어내고 생각조차 멈춰둔 채 조용히 숨만 쉬는 것이 최상의 여행일 때도 있다.

37. 일상의 삶은 무미, 무색, 무취하다.

여행을 가니 이런 생각이 드는게 아닐까. 일상도 아름답다.

38. 길고 긴 여정과 점차 희박해질 산소의 환경보다 기껏해야 먹는 일부터 걱정한다는 건 윤택함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까닭이다. 문제는 몸의 기름기보다 정신의 기름기가 아닐까. 하지만 뭐 그리 두려울 건 없다. 겪으면 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살아 있음이 주는 경건한 선물이다.

38. 이 길이 구도자의 길은 아니다. 그러나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존재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다. 구도자는 채워서 확장하는 게 아니라 비워서 확장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비우고 돌아간다면 구도자의 흉내를 조금은 낼 수 있을 것이다.

채우는 여행이 아니라 비우는 여행. 되새겨 볼 만한 여행에 대한 생각이다.

38. 미래는 늘 낯설게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대면하기 불편하고 때론 두렵다. 그래서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 삶에서도 급진이 필요하다. 다만 동시대로부터 비난과 억압과 질시를 받을 것이고 때론 오해를 자초할 것이며 심지어 아주 패악한 인간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39. 이만큼 살았으면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에만 충실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일단 그 정도의 틈새를 마련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살고 싶다.

40. 여행이 익숙하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변종의 출장이다. 낯섦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은 자신의 발견이다. 익숙해서 몰랐던 자신의 면모를 만나는 건 여행이 주는 고마움이다.

40. 누군가의 부재가 공간의 허전함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로 다가올 때 진정한 사랑이다. 낯섦은 삶의 질감을 강화한다.

42. 생계를 외면하고 살수는 없다. 나 또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포기하거나 미뤄야 하는 꿈이 얼마나 많은가. 젊은 날 품었던 그 푸르렀던 꿈들이 생계라는 냉혹한 낱말 앞에 속수무책 접혀야 하는 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청춘들에게는 직업을, 그것도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로서 직업을 얻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업이 되었으니 꿈 운운하는 것조차 민망하고 죄스럽지만

43. 적성에 맞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능력에 맞는 직업을 얻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적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공부만 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한 인재의 적성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인사 관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사는게 힘든건지 모르겠다. 적성이란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40이 넘은 나이에 이제야 적성을 찾아다니는게 웃기긴 하지만 더 늦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43. 10년 단위로 끊어 새로운 직업과 직장을 찾아야 하는게 현실이고 앞으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그러니 끝없이 직업에 대한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것이 더 낫지 않나. 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 꼭 좋은 것이라 할수 없다. 10년에 한번, 아니 더 자주 직업을 바꿈으로써 내 적성을 찾아 갈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자의에 의해서라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43. 물론 직업이 생계, 적성, 능력, 일정 기간등의 말로 주로 묘사되는, 생업의 개념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것만 담겼다면 삶은 너무 비참하다. 직업은 그것을 통해 혹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장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어쩌면 비본질적이되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게 직업이나 노동의 힘이기도 하다.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시키고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43. 직업의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생업을 떠나 자아실현과 직업의 비참함이 단순히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말이다. 겉으로는 좁은 간격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헤엄쳐 건너야 할 한강만큼이나 멀다.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포기할 문제도 아니다. 그게 우리네 일상의 딜레마다.

내 직업을 항상 다른 누군가와 비교를 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텐데 그마저도 아니라면 늘 직업적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

44. 매일매일이 탈출의 삶이고 짧은 탈출을 접고 귀환하는 삶의 반복이다. 탈출이 꼭 공간의 별리나 변화일 건 없다. 출근길 혼잡해서 도저히 책도 읽을 수 없으면 시집 하나 얼른 펼쳐 시 한편 읽고 천천히 그 구절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것도 하나의 탈출이다. 짦은 시의 대표 격인 하이쿠 한 수로도 족하다.

아직까지 시는 접하기 힘들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얘기한다. 그렇게 한다는 건 분명 다른 문학과 다른 것이 있다는 뜻이다.

45. 모든 관계는 둘과의 인연이다. 그 사이에 벚꽃이건 패랭이꽃이건 피우고 있는 관계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삶을 반쯤은 덮고 쌀 수 있다.

45. 퇴근길은 출근길과 같은 여정이어도 밀도가 다르다. 바쁜 아침 출근길에 보지 못했던 거리의 다양한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때론 말 걸어보며 걷는다. 꼬맹이 시절 하교 시간이 등교 시간의 꼬박 세 배는 족히 걸리던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 처럼, 묶인 시간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시간을 누리는 것 또한 그럴 듯한 탈출이다. 출근길이 의무의 시간이라면 퇴근길은 권리의 시간이다.

퇴근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즐겁다. 내일 다시 출근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그래도 퇴근이 있기 때문에 출근하는 것 아니겠나. 이젠 그마저도 옛날의 추억이 되버렸다.

45. 의무에서 권리로 탈출하는 것이 조석으로 자유로우면 그 또한 여행이고 탈출이다.

45.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퇴근길은 회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매일 탈출한다. 그 반복이 무기력한 되풀이면 지치고 무기력해지겠지만 새로운 하루로 탈출하는 것이라면 그건 성공한 탈출이다.

46. 나의 출근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이 아니었다. 어젯밤 풀지 못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을 화두 삼아 딱 한 문장만이라도 찾아내야겠다고 나서는 발견의 길이었고 씨 뿌리는 농부처럼 하루의 씨앗을 가려 뽑는 출근길이었다. 내 일은 생각을 뽑고 글을 잣는 것이니 그것은 나의 노동이고 출근이다. 그 길에서 얻은 하나의 문장이 하루의 문을 열고 글 밭을 일구는 호미가 되고 가래가 된다.

47. 작업실에서 한 문장을 토해내고 집에 돌아가면서 다시 한 문장을 얻는다. 그것은 내게 생각의 여행이며 판에 박은 생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47. 배부른 소리라 타박할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모든 출근은 직장으로 가는 여행이고 퇴근은 집으로 가는 여행이다.

47. 시간에 쫓겨 짐짝처럼 실려 출퇴근하고 늘 똑 같은 일을 빡세게 반복하는 보통의 직장인의 삶과 다르다고, 팔자 좋은 넋두리라고 퇴박 놓을 일은 아니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글 밭을 일궈야 하는 나의 삶 또한 그런 반복과 다르지 않다.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두개의 시간 사이에 벚꽃 한 송이 피우면우리는 언제나 이전과 다른 시간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48. 부지런히 탈출을 시도할 일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위해

 

#3. 시간 - 서둘지 마라.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54. 사랑하는 사람도 늘 마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금세 질리거나 본질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해넘이를 받아주는 맞은편 산자락처럼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어도 서운해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드러내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내가 누군가의 해넘이를 받아주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시시하지 않을 것이다.

55. 우리는 자꾸만 그런 상관의 올무에 스스로를 밀어넣는다.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만 우리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53. 30대라고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과 타협하면서 품었던 이상은 일찌감치 사위기 시작하고 나였던 아이는 가출하여 행방불명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책임져야 할 가정에 대한 의무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체감할 것이다.

53.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리모컨이나 쥐는 게 일이다. 분명 그런 삶을 꿈꾼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회한에 젖기도 할 것이다.

55. 그 어떤 시간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미 살아서 지나간 시간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바로 지금 맞닿아 있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그저 그런 하나의 순간이 아니다.

56. 삶의 정면만 바라볼 게 아니다. 그런 삶은 단면의 삶이다.

56. 내 삶의 지도가 달랑 개념도 한 장이거나 너무 복잡한 등고선으로 채워진 지도만 있다면 때론 무의미하거나 혹은 때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지치기 쉽다. …. 그러나 걷다 보면 그 길도 어느덧 끝날 것을 알기에 나는 또박또박 걷는다. 그러다 해넘이를 품은 히말라야의 장관과 너그러움을 만나게 된다. 삶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57. 아직 가야 할 길이 많고, 바쳐야 할 시간이 길다. 그러니 해넘이마저 바라보지 못하는 조급함을 덜어내야겠다. 그걸 덜어내기 위해 온 길 아니던가.

58. 3,40대에게 비움은 어색하다. ‘채움으로도 바쁜데 비움이라니. 그러나 비움은 탈진이나 방전이 아니다. 비움은 재충전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며 채움의 재조정이다.

나이대를 기준으로 비움과 채움을 따지는 것은 아니리라.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고, 채움이 있어야 비움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59. 많은 이들이 30대는 참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너무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정작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제 나이를 누리며 사는 게 뜻밖에 어렵다. 제 나이의 힘과 가치를 모르니 그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고 나서야 그걸 깨닫는다.

모든 것이 이렇듯 아쉽다. 어찌 나이뿐이랴.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너무 많다.  

61. 어쩌면 소나기 잠깐 피하며 느긋하게 쏟아지는 비를 마음껏 감상하는 삶의 습관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럴지 모른다.

61. 가만 생각하니 기다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앞으로 전진만 배웠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시간의 낭비요, 가야 할 길에 대한 태만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집이나 작업실에서도 자투리 시간이라도 나면 신문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이라도 하면서 뭔가를 해야 마음이 놓였다. 비워두는 법을 몰랐다.

멍때리는 걸 참지 못했다. 잠시라도 어딘 가를 가면 책이라도 가져가야한다는 강박관념. 이건 이제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고 말았다. 고치기 위해 애쓰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것 보다 차라리 즐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62. 조금 피곤하면 때론 모든 일 멈추고 쉬고 자신에게 관대하기로 마음먹는다. 삶도 사랑도 쉼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을

62. 그래도 내가 누리는 여백의 시간이 있다. 바로 시를 읽을 때다…… 시구 하나에 흠뻑 빠져 내 영혼과 정신은 자유롭게 유영한다.

시는 항상 사람을 맑게 하고 천천히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라고 하면 뭔가 초탈한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62.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은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 백무산

62. 고요의 시간은 정갈한 시간이다. 그것은 물리적 소음이 제거된 시간이 아니라 사방이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오직 나만의 시간에 흠뻑 빠져 몰입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바쁘게 서두르는 시간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시간은 잠깐 멈춰 오직 나에게만 충실한 시간이다. 온갖 대상을 마음의 시선에서 제거하고 눈은 세상을 바라보되 내 정신과 마음에만 내면의 시선을 꽂는 시간이다. 모든 물리적 소음의 훼방에도 상관하지 않는 시간이 고요의 시간이다. 그 고요에 시간을 헹군다.

고요에 시간을 헹군다마음속에 담아줘야 할 표현

63.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떠나고 싶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가 가슴에 저리게 박힌 건 휴식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휴가조차 틀 속에 갇혀 일상의 연장이나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채우고 있는 헛헛한 가장들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이 광고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열심히 죽어라 일했는데 떠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고 내 직업이 초라해 보였다.

63. 장마가 아닌 다음에야 쏟아지는 여름철 한낮의 소나기는 금세 멈춘다. 그건 잠시 숨 고르고 가라는 자연의 배려다.

64. 바쁠수록 돌아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 제대로 멀리 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묵묵히 가면서 가끔은 퍼질러 앉아 쉬기도 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을 온전하게 누리려면 서둘면 안 된다. 갈 길은 멀다. 그러니 서둘지 말고 즐기는 법을 마련하며 살자. 삶도, 사랑도, 일도, 때론 밭게 때론 성기게

 

#4. - 굽어진 길에서 삶을 만나다

 

66. 초록은 힘이 세다. 엊그제 종일 차를 달려 바라보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던 것은 줄곧 녹색과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68. 편안하지 않은 길을 누군가와 함께 달린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마치 힘든 일을 함께 겪은 이가 삶의 결을 함께 느끼는 것과 같다. 물론 거기에 거대한 이익과 권력이 끼어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부분 혁명의 동지들이 혁명에 성공한 뒤에 서로 물어뜯으며 남보다 못해지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다.

69. 아무리 덥고 지천에 물이 흘러도 샤워를 하거나 머리 감는 건 금지란다. 고산병을 예방하는 첫걸음이다.

샤워를 하면 체온이 떨어지고 체온이 떨어지면 혈액순환이 빨라지고 혈액순환이 빨라지면 산소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71. 난생 처음 겪을 통증인데다 짐작조차 되지 않으니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질 뿐이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해야 할 고산병은 내 마음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오랫동안 품어 와서 그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집착과 퇴행성 사고다.

71. 영혼의 속도가 삶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면 어느 순간 다시는 재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영혼의 속도를 조금 가속시키는 여정이어야 한다. 곧은 길 버리고 굽은 길 택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니던가. 굽은 길에서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볼 수 있고 나를 바라볼 수 있다.

72. 낯선 것을 즐기는 것은 용기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실패를 마다하지 않을 용기다. 그러나 주저할 게 없다. 삶의 매 순간이 다 낯설지 않은가. 이 낯섦을 즐길 수 있어야 삶도 즐겁다. 구불구불한 길에서 비로소 삶이 보인다. 삶 또한 도처에 굽이진 것이기에 그렇다.

73. 경사가 있는 산은 지그재로 굽을 만들며 올라야 한다. 직선의 경사로는 거리는 단축시킬지 모르지만 그 한 매듭으로 끝이다. 감당할 수 있는 경사만 허용해야 한다. 직선의 경사로를 빨리 오르는 것 보다 각도를 줄이면서 길게 오를 길을 택해야 더 먼 길을 오래 갈 수 있다.

74. 일상의 길은 직선의 길이 많다. 질주와 경쟁의 길이다. 그러나 자연은 직선의 길을 거부한다. 여유 있게 구불구불 굽은 길은 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천천히 가라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빨리 뛸 수 없는 등산이 그래서 매력적인 이유이다.

75. 속도와 효율로 채근하는 사회이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는 나날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선언적 명제로만 존재할 뿐, 퇴근길도 출근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울 뿐 정작 내게 할애할 시간은 별로 없다.

저녁이 있는 삶. 진짜 해보고 싶었다. 이런 운동은 탑다운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75. 나는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는가, 누구를 어떻게 대했는가, 천천히 커피 한 잔 마시며 돌아보는 여유만 누려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루 정리했으면 많은 정신적 성장을 했을텐데 침대에 눕기 바빴다. 기껏해야 30분 정도인데 말이다.

76. 속도의 삶에서 놓치고 지나간 풍경의 회복이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겪고 나면, 똑 같은 하나의 시간이다. 적어도 물리적 분량으로서의 시간을 같다. 그러나 그 시간을 성찰하는 순간은 모든 것이 내 삶 속에 응축된 형태로 다가온다. 그것은 시간의 단순한 복기가 아니다.

77. 수십 년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재고 따지고 짐작하고 판단하며 속으로는 우월과 열등의 가늠자로 재단했다. 늘 목적이 개입했다.

78. 막내야, 네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야. 한 가지만 기억해두렴. 딱 한 번 사는 인생,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고 그걸 이뤄가는 게 진짜 인생이란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이것만은 꼭 알고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다.

79. 모두 제 나름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그러나 큰 길만 바라보며 살기보다는 골목길도 누려보고 외딴 길도 일부러 찾아보며 길에서 여러 사람 만나고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갈 일이다.

79. 걷은 일은 현재형이다. 삶이 현재형인 것처럼, 걷는 일은 오늘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 온몸 휘도는 피의 흐름을 느끼는, 걷는 일이야말로 하루의 중심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이동의 행위가 아니다. 나는 앉아서도 걷는다. 내 생각도 걷는다. 나는 그렇게 하루를, 오늘을 걷는다.

80. 직선의 길을 탐하고 거기에 매달리지 마라. 기꺼이 곡선의 길을 나서야 해. 그게 너의 길이고 너의 삶이니까.

 

#5. 묻다 - 순례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82.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보 여행자는 아직 어느 것 하나 그 정확한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삶의 차원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82. 좌표가 정해지면 누구나 최단 거리를 찾게 마련이다. 그게 삶이건 길이건, 최단 거리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모르지만 재미는 없다. 남보다 빨리 가고 높은 자리에 다다를지 모르지만 그건 사는 맛도 걷는 맛도 없다.

83. 이미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확인하는 것 자체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입국심사와 마찬가지이다. 나그네는 바로 길과 이름을 묻는 사람이다. 묻지 않고 걷는 것은 입국 비자 없이 밀입국하는 것과 같다.

84. 교리와 이념은 달라도 대부분의 종교는 착한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사는 등대 역할을 한다.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도덕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85. 종교나 신앙은 자유가 본질이다. 미망이나 권위에 흔들리거나 억압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낼 힘을 내 안에 마련하는 것이니 그것은 자유의 원천이다. 그런데 자유를 버리고 오히려 강요와 억업을 행사하는 건 폭력이지 종교가 아니다. 저이들의 나마스테인사를 받고도 그걸 깨닫지 못하다면 청맹과니다.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 또는 나는 당신에게 마음과 사랑을 다해 예배드립니다라는 뜻의 나마스테는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라는 의미가 아닌가.

나마스테. 기억해둬야 할 인사말이다.

87. 낯선 곳에서의 걷기는 전혀 예측하지 않는 물음들을 자연스럽게 꺼내게 만든다. … 신에게 묻는다. “신이여, 제 삶은 제대로 가고 있습니가?”

87. 길은 걷는 곳이기도 하지만 묻는 곳이기도 하다. 단순해지니 저절로 물음이 쏟아진다. 주변에 빼앗겼던 정신을 되찾기 때문일 것이다. 곧게 난 삶의 길도 조금은 일부러라도 구부리고 투박하게 만들면 삶도 달라질 것 같다. ….. 삶이건 길이건 가끔은 낯선 길로 떠나는 건 바로 그런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다.

88. 신앙이란 끝없이 신에게 묻고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거대한 무한성에 겸손해지며 스스로 무릎 꿇는 용기에서 신앙이 가능하다.

88. 매일매일 일상의 삶이 순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91. 내가 없는, 혹은 나를 만나지 못하는 순례는 단순한 공간의 이동에 그칠 뿐이다.

순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91. 사막은 어떤 나약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교육자다…. ‘멀리 그리고 분명히 본다는 것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사막도 한번 걸아가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이다. 너무 욕심이다.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이 부질없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나에게는 순례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91. 순례는 내가’ ‘멀리 그리고 분명히 보는힘을 얻는 과정이다. 그런데 자칫 나는 놓고 순례지에만 마음을 쏟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91. 우리는 황무지라고 여기는 사막이 아니라 온갖 풍요가 넘친다고 여기는 도시가 훨씬 더 황폐할 뿐 아니라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넘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적절한 지적이다. 모든 것이 있는 도시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폐허와도 같다

92. 아흔을 넘긴 테오도르 모노의 말은 감탄을 넘어 엄숙하고 숭고하다.

세계의 처음과 새로운 내일을 발견하려는 내 탐구심이 고갈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평생 배우고 인내하며 나누고픈 목마름과 열정을 내게 선물한 자연에 늘 감사한다. 과잉의 세계에서 침몰하지 않고 한결같이 나를 지켜준 내 작은 배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피안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설렌다.”

아흔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44살의 나도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은 10대 청년 못지 않다. 나도 죽을때까지 호기심을 잃고 싶지는 않다.

92. 묻는 것은 자아를 찾는 것이고 묻는 자아가 바로 주체적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례는 묻는 것이고, 순례자는 묻는 사람이다.

92.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

93. “산이 높다는 걸 알기 위해 산에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굳이 산에 오르지 않아도 높다는 걸 안다. 산에 가는 것은 산과 교감하는 나를 만나기 위함이다.

아직 이렇게 산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정상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오르고 있다.

93. 우리는 배를 항구에 묶어두고 그 안전함과 소유 의식만 만끽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코엘료는 덧붙인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좋은 비유이다. 배는 부서져도 바다 한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94. 순례는 정화의 과정이고 기본적으로 순례는 느리게 걷기이다. 느린 걸음을 통해 영혼의 속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뭉텅이 시간을 덜어내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꿈만 꾸다 포기한다. 순례지만 생각하지 순례자는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95. 사실 우리는 매일 순례자로 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순례자라는 인식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순례자로 마음먹으면 모든 걸음 모든 호흡이 순례자의 그것들이 된다.

95. 룸비니 순례를 다녀와도 내 안에 들어 있는 불성을 먼저 만나지 못하는 건 점심 식사 후 조계사나 봉은사 경내를 걸으며 누리는 잠깐의 탑돌이만 못하다.

산티아고나 다른 순례지를 간다면 거기에 가는 목적을 정확히 설정해야 할 것이다. 단지 순례지만 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95.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돌들을 밞으면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맨몸으로 맞으면서, 지척이는 진창길의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어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울 때 오히려 자연과 교감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교감은 바로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95. 운수납자의 만행은 가장 처연하면서도 대담한 순례다. 그들은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묻고 캐며 길을 나서고 도를 찾아 이 절에서 저 절로, 세상 도처의 부처를 찾아 나선다.

운수납자 : 누더기를 입고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떠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승려.

96. 돌아서 눈에 담아둬야 돌아올 때 길을 잃지 않는다. 가는 것만 생각하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가다 보면 길을 잃는다. 사는 것 또한 그렇다. 그 길 되돌아보지 못하고 내처 앞만 바라보고 내달리니 돌아올 제 몸, 제 정신, 제 거처를 잃는다.

96. 낯선 곳에서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 즐겁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많은 까닭일 수도 있고, 이미 여러 사람이 그곳에 있었거나 지나갔기에 사람을, 삶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97. 순례가 힘겹고 지루할 까닭은 없다. 그런 순례는 자학이나 고립일 뿐이다. 순례는 나를 만나는 길이다. 순례는 잠시의 일상의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나에게서 비일상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말 거는 것이다. 굳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서지 않아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서 순례에 나설 수 있고 책상에 앉아 작업하면서 순례자가 될 수도 있다. 나를 만나러 떠나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언제나 순례자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매일 책을 읽는 나는 순례길을 1년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6. 낯선 생각 - 풍경을 읽어내는 건 각자의 몫

 

101. 얼마나 익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봐왔을까, 그리고 그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말과 판단을 쏟아냈을까.

102. 우리 삶은 끝내 탐욕과 무지를 침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때까지 미련스레 담아간다.

정말 어려운 거겠지. 욕망을 넘어선다는 것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거기에 너무 젖어있기 때문이다.

102. <논어> <자로 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하는 사람이며 조화롭게 살되 자신을 잃거나 놓치지 않은 삶을 산다고 했다. 나와 다르다고 일일이 타박하고 간섭하며 제 잘난 맛에 취해 사는 건 군자의 몫이 아니다. 조화는 대충 어울리는게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받아 들이고 그의 생각과 느낌을 인정하되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103. 우리는 쉽게 남과 같아지려 한다. 상대가 나보다 더 강하고 부유하며 똑똑하면 최대한 거기에 맞추고 따른다. 그건 쉽다. 하지만 그런 동이불화는 소인의 몫이다.

소인으로 살았다. 남과 같이 되고자 했다. 자기가 자신다워야 한다는 걸 몰랐다.

103. 문제는 어울림이다. 같음은 쉽다. 그러나 어울림은 어렵다. 같음은 나를 버리고 상대에만 맞추면 된다….. 어울림은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내 생각과 판단을 곧추세우는 것이다.

103. 여행은 낯선공간, 낯선 사람과의 해후고 공감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어울림으로 이어진다. 그 안에서 삶의 어울림을 배운다.

어울림이란 말 그 자체가 아름답지 않나. 같음과 어울림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어울림이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다.

105.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길이나 풍경이었던 적이 있을까? 내가 풍경이 되어 내 앞을 혹은 내 옆을 지나는 이들에게 먼저 말 건네고 도닥였을까? 다른 모든 대상은 오로지 나에게 풍경이었을 뿐이지 내가 풍경이 된 적이 없다면 그것만큼 이기적인 것은 없다. 마냥 가는 길의 풍경은 그런 따끔한 성찰을 요구한다.

106. 삶에서의 그런 임계 초입을 읽어낼 수 있으면 쉽게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 사람의 몸에서,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에서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지하지 못하고 꼭 몸이 고장나거나 무엇을 상실한 뒤에야 알아채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 몸의 빨간불을 밝혀주는 장치가 있으면 좋으련만

106. 늘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삶이기 때문에 몸에 쌓이는 증세조차 무감각해지거나 무시하게 된다. 몸이 버텨줄만 하니까, 아니 몸이 그렇게 적응해가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르면 몸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무너진다.

107. 나무와 꽃이 고산병을 예방하는 예비약인 셈이다. 평지에서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저 아름다운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삶에서도 그런 증세를 예방하고 덜어낼 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 몸이 이상하면 어떤 신호를 보내기 마련이다. 그것에 관심을 잘 기울여야 한다.

107. 힐링은 환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임계점조차 모른 채 불쑥 힐링에만 맡길 일이 아니다.

107. 풍경은 내가 그 곁으로 가서 말을 걸 때 비로소 말문을 연다. 그것은 풍경의 사립문에서 얻는 대화다.

107. 공자의 말씀이 다시 변주된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 본 것은 이해한다. 聽卽振 視卽記 爲卽覺풍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말을 거는 것이다.

108. 익숙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여행은 이미 여행이 아니다. 낯선 풍경에만 취할 게 아니라 낯선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111. ‘간결하게 서 있는자연 앞에서는 나도 간결해질 수 밖에 없고 숭고하게 서 있는산 앞에서는 나도 숭고할 수 밖에 없다.

111. 우리는 자연 안에 머물 때 가장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인격적이다.

112. 왁자지껄 떼로 몰려드는 등반객들을 보면 얼른 다른 길로 빠진다. 그들은 오로지 정상을 향해서 오를 뿐이기에 정상을 버리면 실컷 조붓한 길의 정취를 누릴 수 있다.

112. 다 채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미치고 말 것이다.

112. 사랑조차 여백이 없으면 숨 막히는 구속이고 속박일 뿐이다. 그건 충실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파괴하는 사랑이다. 뭐든지 여백이 마련되어야 한다.

113. 한 가지 감각에만 함몰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감각을 열어놓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밀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애야 삶의 결을 다듬을 수 있다.

주위를 봐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이는 것처럼

114. 달라지는 풍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달라지는 내 마음의 밀도가 중요한 것이니…… 지루함이나 피곤함이 아니라 설렘의 온기를 천천히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7. 독서 - 고독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116. 축제는 공동체 연대의 힘을 지닌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지. 축제하면 그냥 진탕마시고 노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인식의 변화와 축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119. 한국의 학교는 꿈이 영그는 곳이 아니라 공장이 되었다. 욕망을 찍어내는 공장, 교육조차 속도와 효율에만 함몰되어 호기심이나 질문도 박제되고 그저 외우고 푸는 정교한 기계로 만드는 곳으로 전락했다.

120. 롯지에서도 유럽인들은 테라스에 앉아 틈틈이 책을 읽는다. 그 모습이 부러웠다. 여행지에서 읽는 책은 특별하다. 그 책에는 지은이의 글만 담겨져 있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의 풍경이며, 사람이여, 자잘한 사건들까지 담뿍 담긴다. 책 두 권을 가져오길 너무 잘했다.

이런 면에서 서양인들이 부러웠다. 어딜 가나 책을 보고 있더라. 수영장에서도 해변에서도. 우리는 책을 보면 속으로 여기까지 와서 무슨 독서냐이런 생각들이 은연 중에 있다. 이제는 나는 그런것에 눈치를 안보기로 했다. 오히려 나의 이런 작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지 누가 알겠나. 나는 목욕탕까지 책을 들고 들어가고 싶은데 거기까지는 못하고 있다.

120. 현대인은 고독의 가치를 잃고 산다. 고독은 쓰고 괴로운 게 아니다. 고독은 온전히 내게만 몰입하고 나와 세상이 일대일로 맞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독을 피한다. 두려워한다. 고립과 혼동한다. 고립은 타의적 고독이라서 괴롭다. 따돌림이다. 그 따돌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아이도 어른도 두렵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그러니 고독은 자발적 고립이다. 따라서 고립은 주체적이다. 모든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향하는 내밀한 시간이다. ㅡ리고 다시 세상을 전 존재로 대한다. 그것은 시시포스의 운명이고 프로메테우스의 숙명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을 되찾을 길을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 기꺼이 고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

121.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모두가 고독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고독의 가장 좋은 벗 가운데 하나인 책과 그것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카페와 다른 점이다.

도서관의 분위기가 너무 좋다. 나는 도서관이 너무 좋다.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책 읽는 도서관으로 바뀌니까 더욱 더 좋다.

122.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가방에 담긴 책 한 권이 언제나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다.

124. 앎 그자체가 목적이거나 지식의 과시가 속셈인 책 읽니는 빛이 아니라 빚일 뿐이다. 책 일는 사람이 경계해야 하는 건 바로 책에 대한 맹신이나 과욕이다.

124. 이권우는 <책 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2.0>에서 그렇게 스스로를 경계한다.

다만, 최근들어 내가 경계하는 것은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읽었던 많은 글과 작가의 이야기, 세상의 진보와 따뜻함을 알게 해 준 많은 책 속의 만남과 주장은 내가 발 딛고 있는 일상에서 확인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쳐 온전한 나의 것으로 추동되지 않는 한 껍데기에 불과할 터

한때는 그냥 책 읽는 것이면 어떠냐 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다면 자신이 변화해야 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24. 내 것으로 추동되지 않는 독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상실한 책 읽기다. 지식은 축적될지 모르지만 삶은 축적되지 않는다. 책은 무뎌진 내 삶을 성찰하고 삶의 속도와 영혼의 속도를 조절하는 계기판이다.

124. “세상에서 느끼는 추위에 지쳤을 때 손을 데울 따뜻한 호주머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다. 이는 남들과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 내 자신을 다르게 만들어준다.”

125. 단 한 줄의 문장이더라도 그게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 삶의 한 귀퉁이를 마련하면 그것으로 이미 책은 모든 소명을 충분히 실현한 셈이다. 그런 문장 하나 없는 책이 있겠는가. 그러니 세상 그 어느 책도 존재 의미가 없는 책은 없다.

읽고 나서 별로다 하는 책이 사실 많지만 그래도 한문장은 건질게 있다.

126. 느슨해졌다 싶으면 커피를 마시고 빡빡하다 싶으면 차를 마신다.

이거 괜찮은데. 커피만 마실줄 알았지. 다른 건 생각못했는데

126. 묘하게도 공간과 환경에 따라 책 읽는 맛이 다르다. 그걸 비교하며 읽는 맛이 절묘하다. 일단 시동이 걸리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130. 사전적 의미로서의 겁은 무서워하는 마음, 또는 그런 심리적 경향을 뜻한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낯섦에 기대를 가지면 설렘이 되지만 두려움이 앞서면 겁이 된다.

131. 이제는 그 둘은(겁과 비겁) 분명하게 나누고 가리며 살아야겠다.

132. 겁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은 갖춘다. 그걸 놓치면 비겁해지기 쉽다. 해야 할 것은 두려워서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힘센 사람 눈치 보느라, 돈 많은 사람 마음에 들고자 알아서 기면 비겁한 것이다.

어쩌면 비겁하게 살아온 인생인 것 같다. 영 개운치 않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폭력 앞에 한 없이 작아지게 마련이라. 예를 들면 깡패 같은 사람이 약자를 괴롭히고 있다. 과연 내가 나설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내가 싸움을 잘하면 모를까.

132.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나이 들어가면서 얻게 되는 지혜는 그것을 분별하고 가리게 해준다.

132. 계속 걷기만 하니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진짜 동의하는 부분이다. 힘들면 진짜 아무 생각이 안나거나 그냥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다.

133. 등반길에 산사태를 만나면 죽음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산사태는 그것 자체가 장관이다.

산사태는 왜 일어날까? 결국 축적되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무한정 채울수는 없을 것이다. 가득차면 비워야 하는 자연의 법칙아닐까.

133.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일에 늘 두렵고 겁먹는다. 그리고 몇 번 그 겁을 경험하면서 적당히 스스로와 타협하면 나도 모르는 새 비겁의 영토로 넘어간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모른 척하고, 맞서 싸워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정말 얼마나 후회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한 두번 타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다시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스멀스멀 다시 그런 생각들이 기어오른다.

134. 그녀는(마거릿 헤퍼넌) 똑똑한 사람일수록 눈을 더 잘 감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면서 그 이유는 진화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자리잡은 뇌 행동의 패턴의 결과를 마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을 내렸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34.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고, 눈감게 하는 요소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자신이 믿는(아는 것이 아니다!) 것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이의 새로운 지식이나 자료 따위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강박에 갇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상황을 잘 안다는 그 믿음이 자신을 청맹과니의 감옥에 가둔다.

134. 계곡에 흐르는 물이 깨끗한 것은 바닥의 울퉁불퉁한 돌들 때문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134. 밥의 욕망에 따르면서도 자신의 선택은 삶의 의무감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물론 그런 합리화쯤도 가끔 뻗대야 이 모순의 세상에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습관이 되면 병이다. 처절한 밥의 욕망에 흔들리는 건 겁이지만 밥의 윤기에 휘둘리는 건 비겁이다.

134. 어느 시인의 말처럼 매일의 삶은 보리밥 냄새에 혹하고 윤기 흐르는 쌀밥에 흔들리며 싸워야 하는 것들과 싸우기보다 주저앉아 무릎 꿇고타협하는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게 꼭 비겁의 몫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 타협하고 생명을 위해 흔들린다. 그건 본질적으로 겁의 영역이다.

135. 어느 순간 영토를 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그때는 비겁의 신민이 된다. 비겁의 목적은 사실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높은 자리, 두둑한 지갑, 멋진 자동차, 화려한 식사 따위에 굽신거리며 자신을 판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것은 차라리 정직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방도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135. 설산의 갑작스러운 눈사태는 그런 것들이 사소할 가치조차 없는, 그야말로 먼지 터럭만도 못하다는 걸 깨닫게 한다.

135. 진짜 비겁한 사람은 힘을 가졌으면서도 약자에게 잔혹하게 구는 사람이다.

136. 대심문관은 민중을 자신이 준 빵과 자유를 맞바꾼 존재로 여길 뿐이다. 물질로 복종을 얻어낸 권력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설파하는 예수는 불편한 존재다. 그것은 이미 비겁을 넘어 야만이다. 우리 모두는 유혹에 흔들린다. 유혹은 겁이 아니라 비겁의 영토로 이끈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 지상에서 받게 되는 온갖 역사적 모순을 한데 모이게 만든다. 그게 바로 비겁의 영토에서 발행되는 여권이다. 그러나 진짜 비겁한 자는 그 여권을 흔들며 지배하는 자

137. 결국 비겁은 악마를 따르는 것과 같다. ….비겁은 늘 우리에게 인지부조화를 유도한다. 그래서 비겁해지면서도 겉으로는 당당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용감하게 수행하고 있는것처럼 착각한다. 내가 비겁에 빠비변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37. 완보에는 완심이 제격이다.

138. 공자는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이 비겁이라고 말했다. 뜻밖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정작 그 실체를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더 두려워한다.

138. 그 따위 대상은 사실 두려울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왜 두려워하는가. 적당한 두려움의 대상을 내 안에 품어야 적당히 타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움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할 때 비겁이 비집고 들어온다.

139. 위험에 대한 공포는 위험 그 자체보다 천 배나 더 무겁다고. 악은 끝까지 성실하다. 반면 선은 걸핏하면 돌부리에 엎어진다.

139. 비겁은 공포를 빌미로 가장 못난 나와 타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가장 큰 비겁은 가장 작고 가벼운 일에 대한 합리화의 변명이다.

합리화해버리면 너무나 간단하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찝찝함까지 씻어낼수는 없다.

141. 축제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음껏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넘나들며 지평을 확장시키는 사회적 경험의 마당이다.

142. 더 이상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정의가 뭉개지고 퇴행하는 것을 참다못한 시민들이 모였다. …엄동의 혹한과 매서운 바람도 그들이 치켜든 촛불을 끄지 못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사라지고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했다. , 이미 우리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축제와 두려움, 혹은 축제와 비겁은 양립할 수 없다. 비겁은 악이 원하는 환경일 뿐이다.

그때 나는 어디 있었나? 직업적 소명아래 뒤에 숨었다.

143. 그동안 우리는 비겁했다. 누구나 불의에 분노한다. 그러나 정작 그게 내 일만 아니라면 적당히 눈감는다. 저항하다 손해를 보면 그것에 더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거기에 휩쓸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기특해한다. 물론 처음에는 미안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몇 차례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인지부조화의 방어벽 뒤로 숨는다.

내 입장을 정확하게 얘기하는 것 같아 부끄럽네.

144. 거대한 불의와 폭력 앞에서 혼자 싸우는 것은 어렵다. 두렵다. 그 비겁이 사회를 타락시키는 데 한몫을 했고 우리의 비겁이 악의 세력에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1:99의 사회에서 소수의 강자는 약자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만든다. ‘없는 것들끼리치고받고 싸우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에 유리한 것은 없다.  

144. 늘 그래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 교묘하게 더 악랄하게, 우리의 비겁과 분열을 미끼로,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99의 연대다. 비겁한 개인은 두렵지만 연대로 뭉칭 정의로운 함께는 두렵지 않다. 모든 불의와 폭력 그리고 착취에 대해 외면하지 말고 뭉쳐 싸워야 한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비로소 내 목소리를 낼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99의 연대에 나 자신을 추가해야할 때이다.

145. 인간은 축제를 통해 성숙한다. 축제는 가장 행복한 연대다. 두려움과 비겁을 버리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한 축제는 인격을 회복시키고 공공선을 증진시킨다. 축제가 우리 몫이어야 한다.

145. 비겁과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 몫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서서히 죽이는 독약이다.

 

#9. 자연 -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축복하며

 

148. 나마스테.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당신의 신께’, ‘당신 안의 신에게 절합니다. 신이 당신에게 준 재능에 경의를 표합니다.’

149. 나는 그들이 허둥지둥 혹은 건성으로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정중하고 진지하게 합장을 대한다. 그러면 내 영혼이 고결해지는 느낌이고 그의 축복이 고마워 나 또한 그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그의 신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151. 극도의 긴장은 그런 고통마저 잠시 잊게 한다.

154. 잠시만 한눈팔아도 치명적이라는 건 달갑지 않다. 매순간을 그렇게 빡빡하게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매순간이 그런 것들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고 사건이다. 그런데 일상적이어서 놓치거나 가볍게 여길 뿐이다.

154. 소중하고 귀한 것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고 쉽게 얻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허투루 살 수 없다.

154. 욕망은 행복을 앞지른다.

156. 누군가를 위해 그런 축복의 기도를 진심으로 전력으로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157. 아는 사이건 모르는 사이건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축복하며 살아간다. 그런 축복의 교환이 삶을 버티게 한다. 그 교환의 힘이 바로 자연스럽게 연대로 이어진다. 그렇다. 축복은 바로 연대의 시작이다….. 연대의 바탕에는 따뜻함과 존경이 깔려야 한다. 그걸 선언이나 이념으로만 외치니 공염불이 된다.

161. 이 짧은 순간 빗방울에서 나는 자연의 흐름을 느낀다. 소로의 표현을 빌자면 분에 넘치게 총애를 받는 느낌이다.

161. 그가 월든으로 들어간 것은 자연의 원형 속에서 온전하게 자신과 삶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소로를 만나게 될 줄. 참 괜찮은 책이었다.

161.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건 장마철 마루에 앉아 한없이 쏟아지는 작달비를 하릴없이 바라보는 일이었다.

161. 비는 눈에 그대로 보일 뿐 아니라 소리까지 얼마나 섹시한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비가 내리는 걸 본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비는 참 좋은 친구이다.

162. “좁쌀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있다는 장일순 선생의 말은, 생명의 진수가 물질 하나에도 다 들어 있다는 말이다. 좁쌀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 있는데 어찌 다른 것에 우주가 없으며 하물며 사람에게 우주가 없겠는가. 그런데도 자꾸만 밖에서 그리고 거창한 것에서 고작 작은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집착에 빠져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멸의 위기를 자초한다.

163. 그깟 잠깐의 권력이 뭐라고 정의를 우롱하며 권력자에 기생하고 아부하며, 그깟 돈이 뭐라고 한 뼘의 면적을 얻기 위해 남을 착취하는지, 그깟 명예가 뭐라고 온갖 지식으로 자신을 치장하느지, 그래봐야 좁쌀 하나만도 못하다면, 그 안에 우주가 있음을 모른다면 그저 공허한 한 줌의 삶에 불과할 뿐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착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 경쟁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는게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

163. 물론 권력, 재력, 명예의 욕망을 탓할 건 아니다. 다만 과유불급을 경계해야 하고 중용의 미덕을 찾아야 한다. 최고 권력을 차지한들 고작 5년에 불과할 뿐인데 권력에 취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정의를 조롱하여 시대를 퇴행시키면 역사에 죄를 지는 것이다. 그 권력에 기생하여 지푸라기 권력을 얻은들 그것을 묘비명에 쓸 것인가.

163. 호연지기란 수컷의 마초성을 드러내는 따위의 저급한 게 아니다. 진짜 호연지기는 좁쌀 한 알에서 우주를 찾아내는 것이다.

163. 나이 들면서 깨닫는 고마운 지혜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하게 과분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다. 그 자유를 자연에서 배우고 얻는다. 그 자유는 단순한 해방이나 다운사이징이 아니다. 너그럽고 따뜻해지면서도 중요한 일과 가치에는 집중할 수 있는 조절의 능력을 키운다.

164. 소로가 월든의 호수에 살면서 신과 천국에 가까이 있다는 일체감을 느꼈을 때 비로소 그의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겼다.

 

#10. 단순함 - 단순함이 주는 미덕

 

167. 결핍은 모든 것의 단순화를 요구한다.

168. 결핍의 반대말은 충분이 아니라 불만족이라더니 들락날락하는 햇살조차 고맙고 행복하다. 아마도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지속적 욕망일 것이다.

169. ‘착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의 심리에는 늘 손해본다고 느껴 갖게 되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있기 쉽다.

169. 결핍의 과잉 또한 문제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적절한 과잉이 있고 또 알맞은 결핍이 있는 걸까? 고산병 증세는 문명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다.

169. 그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그간 누렸던 과잉을 덜어내고 결핍을 감내함으로써 균형을 갖추게 하려는 자연의 섭리다. 그것은 단순화의 과정이다. 이 단순화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삶의 본질을 깨닫는다. 본질은 단순한 것이다.

171. 진정 단순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직관과 영감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것은 응축이고 일종의 방정식이다. 단순함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단순함이란 자명한 건 덜어내고 핵심적 의미만 남기는 것이다. 의미마저 잃으면 단순이 아니라 무지와 몰지각이 된다.

172. 과잉이구나, 낭비구나. 나는 히말라야 고지에 갈 옷을 입고 동네 산을 폼 잡으면서 올랐던 셈이다.

등산복을 입고 산에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되버렸다. 나도 산을 올라갈때면 등산복부터 챙긴다. 언제부터 등산복을 입었다고.

175. 소로의 <월든>을 읽으면서 여전히 비싼 장비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건 자기 모순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175. 우리는 여전히 과시욕구가 강하다. 과시는 단순함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자기낭비다. 남들 시선 때문에 자꾸만 과한 물건을 사들이는 습속부터 버려 그런 집착에서 자유로워질때 조금이라도 단순해질 것이고 삶이든 사람이든 혹은 일이든 모든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다.

175. 타락이라고까지 할 거야 없지만 그저 편안하고 크고 좋은 것만 바라보고 그 아래의 것들은 내려다보려는 천박함에 길들여진다.

176. 히말라야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만큼만 있으면 족한지 알 것이다. 그 각성을 얻어가면 그 여정은 성공한 것이 되리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11. 버티는 힘 - 두려워도 불가피하다면 버텨낼 수 있다

 

178.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운데 일야구도하기즉 깊은 밤 아홉 번 강을 건너는 체험칠흑의 깊고 어둔 밤 일행과 함께 강을 건너던 연암이 느낀 공포는 벼락소리 같이 울리는 강물 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이 나라가 크니 강도 크고 물소리도 크다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다음날 낮에 다시 그 강을 거슬러 가면서 보니 그리 큰 강이 아니었고 물소리도 조선의 여느 강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의미도 있겠구나.

179. 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179.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학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181.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견뎌야 하는 건 그걸 이겨낼 마지막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2. 사는 건 아주 단순함을 새삼 깨닫는다. 산소만 있어도 살 것 같다. 아무런 욕망도 없다.

일상에서는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어떤 극한 상황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가 어찌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는지

183.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래도 그 간격을 조금은 줄여야 한다.

183. 칸트는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해내야만 할 일이기 때문이다.”

183. 한계 상황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그게 삶의 한계 상황 너머에 있기 때문이며 언젠가는 그 언저리에 다다를 것임을 알기에 생기는 근원적 저항과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 제외하고는 하나의 한계를 견뎌내면 그것을 넘어서는 힘을 얻게 되고 또 다른 한계를 돌파하고자 시도하는 용기가 생긴다.

183. 삶의 분투를 가능하게 하는 건 그런 믿음일 것이다. 두려워도 불가피한 것이라면 버텨낼 일이다. 일단 버티면 버텨진다.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은 것이어서 소중한 밤이다.

184. 나 자신을 어떤 울타리에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한계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깨뜨려야 할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

190. 의미를 상실한 길은 급격한 피곤과 망설임을 동반했다.

슬럼프가 그래서 찾아온다. 내가 하는 일이 갑자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면 모든 것이 하기 싫어진다.

191.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몸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몸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는 다다라야 그 한계를 알게 될 것이다.

191. 단순히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임계점까지 자신을 밀어봐야 한다.

193. 아이의 길이나 어른의 길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격려하며 버티고 나아가면 어느 순간 목적지에 도달한다. 한계란 그렇게 하나씩 극복되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193. 삶이 뭐 별거 있겠는가.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이고 길이다. 버티고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무모해 보이는 우직함이 필요하다.

 

#12. 삶의 고개 - 희망이 없다면 미래를 살아낼 수 없다

 

198. 살아가면서 임계점인지조차도 모르고 마구 넘나드는 만용은 얼마나 많았을까. 벼랑에 서 잇으면서도 그게 벼랑인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이다.

20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때론 그렇게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202.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면 허탈해진다. 달콤한 허탈함이고 포만감 가득한 허탈함이다. 그 허탈을 맛보기 위해 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달린다.

202. 시시포스의 허탈함은 반복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바위를 위로 굴려 올리는 것이라서 처절하지만 이 허탈함은 반복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허탈감일 것이다.

204. 죽음은 삶의 마지막 관문이 아니라 언제나 공존하는 삶의 일부다. 아무리 힘들었던 길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멋진 풍경의 일부가 된다.

209. <라틴어 수업>을 읽다가 해지고 닳아 헐거워진 내 영혼을 다듬는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문구 하나가 바로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이 대목을 읽다가 눈물이 왈칵 났다. 그렇구나. 우리는 제대로 상대의 안부도 묻지 못하고 늘 자기 말만 지껄이며 살았구나.

209. 로마인들의 편지에 이 구문은 일종의 상투어처럼 쓰였다고 한다. 그것도 편지의 첫 인사란다. 당신이 평안해야 비로소 나도 평안합니다라는 인사는 상대의 존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고마움이 가득한 말이다.

209. ‘당신이 잘 있으면이라는 말 자체가 가장 감사할 마음이다. 그런데도 나만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읽어낼 때 아무리 큰 성취가 이뤄져도 진정한 감사는 우러나지 않는다.

211. 어떠한 괴로움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고 그때 우리는 저절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감사는 모든 마감과 매듭에 대한 존재론적 고백이어야 한다.

211.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은 반드시 나를 망칠 독이지만 때론 스스로에게 최고의 존재라는 격려와 존중을 부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럴수 있는 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211. 소소한 것 어느하나 내 삶에서는 허투루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론 맵고 시려도 그것들이 있어서 내 삶이 튼실해지고 단단해지는 매듭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대나무의 매듭이 그렇듯이.

 

#13. 관용 - 무엇에 너그러워져야 하는가

 

216. 그저 늘 그가 있음으로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사랑한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고 더 많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행복이니, 그 행복의 근원이 바로 사랑하는 상대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살면 끝까지 그 사랑이 무뎌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216. 끝까지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오히려 더 못줘서 미안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요체다. 겸손하면 행복해지고, 화를 자초할 일도 없다.

217.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은 콤플렉스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너는 완벽하지 못하지만 나는 완벽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상대를 압도하고 싶은 욕망때문일 수 있다. 그러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너그러웠는가. 무엇에 너그러워져야 하는가. 어떻게 너그러울 것인가

219. 흔히 문명의 때가 아직 덜 묻은 사람들을 보는 시선은 두가지. 하나는 그들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거나 혹은 깔보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가장 소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선망이다.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이다.

220. 문명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삶이다. 성공이라는 허울도 결국은 욕망의 실현을 다른 말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적 가치를 망가뜨리더라도 외적 실현에 매달리는 욕망이 늘 우리를 사로잡는다. 문명의 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떨쳐내는 일은 어렵다.

220. 세상에 태어나고 배우고 자란 우리가 문명과 그 욕망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가혹할만큼 어렵다.

221. 시골생활은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삶의 한 예이자 본보기이다. 시골생활은 사회와 접촉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자연과의 접촉방법이다.

222. 불필요한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오롯하게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철학과 영성이 있어야 한다.

222. 아무리 몸이 자연에 있어도 정신이나 삶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못할 때 그것은 공간에서의 유체이탈일 뿐이고 새로운 욕망의 전원풍 삶일 뿐이다.

222. 식물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넉넉하게 받아준다는 태도로 몸을 한쪽으로 밀어넣는다. 굳이 저항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버릴 까닭이 없음을 안다는 듯.

227. 로크는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각자의 이성과 양심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신을 믿어야 한다. 만약 강제적 권력에 의해 마지못해 믿는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230.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걸 몰랐네. 그냥 순례길인줄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인지 몰랐다.

230. 그런 어리석음과 폐쇄성을 걷어내고 관용의 길로 서서히 바뀌었을 것이다. 내 길을 내주는 건 내 마음을 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으며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깊은 성찰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길에는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길의 진정한 가친느 바로 그 너그러움이다.

230.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것은 나만의 것을 지켜내는 뿌듯함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신의 성 안에 갇혀 사는 삶이다. 길은 자신을 찾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바람이건 빗물이건 넉넉히 받아들인다. 그 길을 걸으며 그 넉넉함을, 관용을 가끔은 느껴야 하지 않을까.

231. 길은 장소와 장소를 이어주는 다리만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그 길을 통해 만나고 모든 것이 조우하는 곳이다. 그렇게 섞이고 부대낄 때 관용은 필수적이다. 관용은 주체적이다.

231. 계몽주의의 관용은 인간 개개인을 이성적 주체로 파악하고 사상이나 이념이 다를 때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각 개인이 종전에 지녔던 생각보다 더 나은 생각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너그러운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게 바로 톨레랑스다. 톨레랑스라는 말에는 참는 것, 인내등의 의미가 깔려 있다. 서로 다른데 기분 좋을리 없다. 그러나 그런 차이와 불편에 대해 참아야 한다. 그 참음이 관용의 뿌리다.

232. 당시의 톨레랑스는 나와 다른 신앙, 사상, 행동 방식을 가긴 사람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나의 신념이 중요하다면 너의 신념 또한 소중한 것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의 결과였다. 이런 관용의 정신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체계적인 사회조직의 원리로 발전했다.

232. 약자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이나 힘을 빌어 자신을 보호한다. 그런 이에게 관용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 그에 비해 진정한 강자는 자신을 고집하거나 자신의 능력과 힘을 과신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건 열등감의 발로.

233. 볼테르 나는 당신의 주장을 비난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당신의 권리를 죽음으로 지키겠다.”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길은 방향으로만 걷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기 때문에 마주치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손을 흔들거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다. 그게 길의 관용이 주는 즐거움이다.

 

#14. 공존 함께한다는 것

 

236. 흔히 부처가 인도 출신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는 바로 네팔에 있다.

어설프게 아는 건 모르는 것과 같다. 왜 불교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

237. 우리가 그렇게 알게 된건 영국이 인도와 네팔을 식민지로 삼고 있을 때 영국 학자들이 부처의 출생지를 인도로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다.

237. 룸비니가 네팔의 영토라는 건 작은 나라 네팔이 자존심을 회복할 다행스러운 일이다. 흥미로운 건 그걸 가지고 무력 갈등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성지가 기독교나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지인 까닭에 그토록 긴 세월을 두고 엄청난 피를 흘려왔고 아직도 그 분쟁의 불씨는 여전한 것과 비교하면 이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공존의 정신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 대표적 성지가 바로 이곳 묵티나트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울타리 안에 힌두교 성지 사원과 불교 성지 사원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중동의 전쟁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다. 알라나 예수가 그렇게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을 텐데

237. 각자의 신앙을 서로존중하는 성숙한 모습을 다른 어떤 곳에서 볼 수 있을까? 부처의 출생지 논란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가 남긴 가르침이 지금도 인류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것이다.

237. 초기 불교가 힌두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불교가 흥성했던 인도에서 공존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평화롭게 공존하다.

힌두교와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제가 있는 힌두교가 어떻게 득세할 수 있었을까.

240. 기원의 성지가 아니라 정화의 성지라는 건 참 아름답다. …. 묵티나트라는 말이 신이 정죄, 정화시켜주는 곳이라는 의미를 실감했다.

241. 묵티나트의 이 조화로운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날 듯하다. 서로 시기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함께 합장하며 인사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242. 사원 안의 네팔인 불교도들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지도 않는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한다. 나는 그들이 공존하는 각자의 사원에서 서로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바라본다.

242. 겸손하면 공존할 수 있다. 겸손은 가장 우월한 자기표현이다.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더 우월한 당당함은 없다.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이 함께 성지를 찾아 경배를 드리는 모습이야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242. 오만과 편견, 독선과 아집, 탐욕과 갈등을 내려놓고 함께 격려하고 도닥이며 사랑과 자비를 무한무량으로 나누면서 살기를 고대하며 힌두사원에, 그리고 불교사원에 손 모아 그들의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마스테!”

243. 함께한다는 것, 그것은 자연의 이치며,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상대가 나와 다를 때 다른 점을 찾는 것보다 같거나 비슷한 점을 찾아보면 공감과 공존의 가능성이 커진다.

243.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라고 짧은 삶인데 조금 다른 게 뭐 그리 대단하고 중요하다고 헐뜯고 미워하고 싸우는가. 좋은 점만 보고 살기에도 바쁘고 짧다.

246. 한 사람의,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그릇의 크기가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남긴 셈이다. 우리는 길상사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살갑게 인사한다. “성불하십시오.”

관음상을 기독교 전문 조각가에게 부탁해서 세웠다는 법정스님의 일화에 왜 그가 그토록 추앙을 받는지 알겠다. 그의 책부터 시작해보자

246. 공자는 군자는 함께 어울리되 자신의 결을 놓치지 않는和而不同 반면 소인은 같아지면서 정작 어울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결은 잃어버린다同而不和고 일침을 가했다.

246. 사실 종교만큼 자기 정체성에 충성도가 높은 것도 드물다. 하지만 내 신념이 존중받으려면 다른 신념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만과 독선에 빠지거나 급기야는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 ‘다른 종교가 아니라 이웃종교라는 최소한의 배려는 그래서 필수적이다.

246. 어떤 이는 절에 가서도 부처님께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신념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의 주인에게 인사쯤은 하는 아량과 예절을 갖춰야 한다. 두손 모아 합장해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흐뭇하게 답해주실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 친구와 절에 갔다가 같이 절하자고 했다가 친구가 정색해서 무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쪽으로도 생각할수 있겠구나 싶다.

247. 우리의 현실은 종교 간이 교류와 화합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같아 안타깝다. 이 좁은 땅에서 지역으로 갈리고 정치적 호오로 나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찢기며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기만 한다.

247. 요즘은 너 나 없이 그저 소리만 질러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세상이 모두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 그런 세상이 되었다.

247. 상대방을 나의 이해관계에서 셈하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그의 신념과 정신까지도 존중하고 예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 인사를 마음 깊이 동감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은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의 군자의 모습 그 자체다.

248. 어떤 이는 내가 절에 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웅전에 들어가서 합장하며 부처님께 인사하는 게 영 마뜩잖은 눈치다. 내가 카톨릭 신자인 걸 아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처님의 집을 찾았는데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스님들께 합장하며 인사드리는 것도 허물은커녕 마땅히 따라야 할 예의다.

분명 하느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지 그런 행동을 한다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하느님이면 그건 더 이상 종교가 아닐 것이다.

248. 나는 불가에서 성불하십시요라는 인사처럼 멋진 건 드물다고 믿는다. 성불이란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온전히 깨닫고 꺼내어 내 삶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오랜 수양과 동안거와 하언거를 비롯한 용맹정진의 과정도 필요하지만 성불의 화두는 초발심의 불성을 되살려내며 스스로 부처의 삶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불하세요라는 기원은 상대 뿐 아니라 그 인사를 건네는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248.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저 나만 생각하고 내 이익에만 몰두하여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고 소금까지 뿌리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나무만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은 같은 땅에 함께 자라면서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고 제 몫만큼만 차지하며 어울려 산다.

나무 같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닐까. 어울림은 물론 나무는 스스로를 모두에게 돌려준다. 과실로 낙엽으로 산소로 마지막에는 땔감으로서까지 모두 내어준다.

249.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만을 요구하지 않고 상대의 신앙을 존경하는 것, 그것만큼 성스럽고 평화스러운 건 없다.

 

#15. 청춘 모든 삶에는 오아시스가 있다

 

255. 선택은 셈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인연은 관계고 공존이다. 서로 씨가 되고 그 씨를 덮어주는 잎이 되어 사는 것이다. 혼자 사는 건 사는게 아니다. 그러니 나 혼자만 잘 살아봐야 그건 재미있는 삶이 아니라는 전우익 선생의 말씀은 그냥 재미를 위해 사는 삶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제대로 사는 건 더불어 사는 것이고 그게 진짜 사는 맛이고 재미라는 것이다.

256. 공감의 눈은 아래에서 느끼는 것이지 위를 향한 공감은 선망이고 욕망일 뿐이다.

256. 누구에게나 삶은 진지하고 가치 있다. 그러니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마련하여 모두가 그 꿈을 실현하는 세상을 함께 꿈꿀 일이다. 기억할 사람이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한 걸음만 헛디디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험로에서 서로의 안전을 빌어주는 공동체 느낌은 누가 시켜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257. 매순간 빡빡하게만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매순간이 그런 것들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고 사건이다. 그런데 일상이라서 놓치거나 가볍게 여길 뿐이다. 누구든 어떤 길을 택하든 분명히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기에 간다. 그대에게 가는 길 또한 그대가 얼마나 대단하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어찌 소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257. 시시하게 살지 않아야 그대를 시시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고 쉽게 얻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허투루 살 수 없다.

258. 혼자 살아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갈 세상을 꿈꾸기를, 어른은 반드시 청년의 삶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을 바꿔야 한다.

258. 오아시스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선물이 아니라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파놓은 우물이다. 인생에는 반드시 오아시스가 있다. 어떠한 형태건 내용이건

261. 한때는 젊은이들이 부러웠다. 무엇보다 청춘의 시절에 능력만 되면 혹은 힘들게 저축해서 마음껏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부러웠다.

지금도 부럽다. 뭐든지 할수 있다는 그 자신감을 가질수 있어서 부러운 것이다.

261. 우리 세대는 취업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죽어라 일만 했다고 푸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생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준비 하는 걸 보면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이 안된다고 하니 얼마나 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인가.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263. 그 극단의 선택은(청년들이 히말라야를 여행지로 선택한 것)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의 여러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기보다 비교를 통한 상대적 절망감 대신 절대고독과 문명이 모두 제거된 원초적 모습을 보며 자신과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그 청년들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편하고 쉬운 여행이 아니라 자신을 대면하기 위한 여행말만 들어도 멋지다.

263. 청춘에게 절망은 어울리는 말도 아니고 그들이 선택한 주제도 아니다. 히말라야로 떠나온 청년들은 절망이라는 말도 사치라고 여기며 근원적 자기성찰을 통해 담대하게 삶을 이끌어가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265. 자연 앞에 서면, 특히 히말라야처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는 누구나 알몸뚱이 그대로 감당해야 한다. 거기에 권력과 재산과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무슨 힘이 있을까. 거기에서는 당당한 청춘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

266. 자식 세대인 지금의 청춘들의 삶을 바라보면 죄책감과 모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하는 제 자식 세대의 몫이고 권리다. 그런 삶을 마련해주는 게 부모의 의무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힘들고 세상이 매워서 제 몸 건사하기도 버겁다. 그래서 청춘들을 공감할 틈이 없고, 그러나 대책을 세우거나 환경을 마련해주지도 못한다.

266. 아프니가 청춘이라는 건 조롱이지 격려가 아니다.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 그 병을 이겨낼 방편이 있는지를 먼저 묻고 따져야 한다. 지금 청춘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방이 트여 있지만 방향을 잡을 수 없다.

267. 낮이건 밤이건 제 몸 하나 피할 곳 없는 고립무원의 사막에 청춘이 걷고 있다.

267.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수록된 한 구절을 전하고 싶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268. 인간에게 희망이 없으면 존재의 힘이 사라진다. 누군가의 희망을 앗아가는 사람은 가장 잔인한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그것도 희망의 본 주인인 청춘들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있다. 이제 그 탐욕과 무지를 버려야 할 때다.

268. 우리는 모두 걷는다. 삶은 걷는 일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나는 걷는다>에서 고백한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269. 그는 권고한다. “이 장면을 마음 속에 잘 간직했다가 세상이 번잡함으로부터 평정을 잃으려 할 때마다 꺼내 보리라.” 멈추면 그 길을 모른다.

269. “침대에서 죽기를 바랐다면 떠나지 말아야 했다. 자신이 침대에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래서 절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올리비에의 비장함은 힘겨움에 대한 탄식과 원망이 아니라 강한 희망이며 결코 어설픈 삶과 세상에 패배하지않겠다는 의연한 외침이다.

 

#16. 가족 사랑할 사람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274. 늘 정시 출발과 직통 노선에 익숙한 내가 조금도 짜증내지 않는다는 건 조금은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이들의 삶의 속도에 조금은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고, 모처럼 내가 그들의 여유와 관용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버스는 그저 운송수단일 뿐이고 고마운 현대판 낙타에 불과한 데다 이미 낡아버려 그 정도는 괘념하지 않는 자유를 지녔다.

278. 가족의 힘, 종교적 정화와 순례가 주는 행복, 미래에 대한 꿈이 니산의 짧은 여정이 아니라 그의 평생 오래오래 지속되며 그를 키워내는 힘이 되기를. 이렇게 누군가를 아무 조건 없이 애틋해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것이구나. 나므스테. 니산!

279. 가족의 힘은 가난한 삶에서 오히려 더 강해진다. 적당한 결핍은 믿음과 연대를 더 강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풍족함은 얻었지만 가족의 유대감은 잃고 있다.

279. 진정 사랑하는 건 모든 걸 다 잃어도 사랑할 사람만 있다면 아무 두려움 없고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284. 어떤 산보다 높고 어떤 바다보다 깊은 그 엄청난 사랑의 중심. 그것은 논리도 이성도 감성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영혼의 초월성까지도 넘어서는 위대한 이유. 그게 가족의 힘이다.

285. 공자는 효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그 대답은 늘 달랐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달랐던 건 처지가 다르고 품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286. 흔히 철들고 효도하려 했더니 부모님은 이미 이 세상에서 계시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치사랑만 효가 아니다. 내리사랑도 효다. 효의 의미를 훼절한다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조건 자식을 끼고 도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키우고 그가 살아야 할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 되도록 키우고 그가 살아야 할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결국 효의 한 방식이다. 부모가 내게 원하는 것을 따르고 행하는 것이 효라면, 그분들의 손자손녀가 잘 되게 하는 것 또한 효행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287. 그래도 제가끔 하고픈 꿈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 어디선가 언젠가 깊은 좌절과 시련을 겪을 것이다. 그것을 부모가 대신 해줄 수는 없다. 다만 힘겹고 어려울 때 잠깐이라도 돌아와 기댈 언덕은 되어야 한다.

287. 일단 후퇴해서 숨고르고 힘을 비축할 최후의 보루가 가정이고, 부모라고, 그러니 언제든 그럴 때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지나친 고민으로 기운 쏟지 말고 돌아오라고, 어찌 부모로서 그런 모습의 자식을 보고 마음 아프지 않을까만 실망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내 몫이리라.

287. 세상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그저 사랑 하나면 족한 것이다.

 

#17. 휴식 틈틈이 자신의 리듬을 만들어낼 것

 

291. 일상에서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샤워가 이렇게도 대단한 즐거움이라니! 지나친 결핍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적당한 결핍은 만족과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요소다. 일부러라도 그런 결핍의 리듬을 갖는다면 불평할 일도 덜어질 것이고 소소한 일상도 고마울 것 같다. 샤워 한 번에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던가?

293. 돌아보니 늘 달렸다. 한가하게 완전한 게으름으로 며칠을 털어내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달리다 보면 관성이 붙어서 가속으로 달린다. 쉬는 법을 배운 적도 별로 없다.

293. 스스로에게 휴식이나 휴가를 주지 못하는 건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다.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 휴식, 좌우로 히말라야의 산맥이 거대한 협곡처럼 보이는 이 온천은 소박하지만 그 어떠한 호화로운 온천보다 호기롭다. 오늘은 마음껏 내게 선물한다.

혼자 떠나는 휴가를 보내고 싶다. 아이들과 집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딱 일주일만 떠나고 싶은데 현실은 안되겠지.

294. 고생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앞의 풍요보다 뒤의 안온함이 분명 더 낫다. 그러니 삶의 리듬을 잘 마련해야 한다. 삶의 리듬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일이 그렇게 만드는것만도 아니다. 내가 적당히 조절하며 때론 밭게 때론 성기게 조절해야 한다. 잠깐의 산책과 짧은 명상만으로도 하루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휴식조차 전투적이다. 혹은 눈치 봐야 하는 방학이다. 일한만큼 쉴 줄 알아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초기단계이다. 십년정도 지나면 아마 나아질지도 모른다.

295. 휴식의 극상은 자연속에서 완전히 자연과 하나되는 물아일여의 즐거움이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휴식을 누리지 못하면 남들도 혹사시킨다. 자신에게는 휴식을 주면서 타인에게는 휴식을 강탈하는 자가 약탈자다.

296. 유목민처럼 가볍게. 말은 쉽다. 쉬엄쉬엄 조절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그리 만만하지 않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그게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게 아니기에,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에는 일에 쫓겨 못하거나 혹은 운 좋게 사업이 잘 굴러가는 경우에도 잠깐 방심하면 언제든 삐끗하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내가 움직이는 만큼 돈이 된다는 걸 알기에 결코 내 마음대로 쉬며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한가한 소리하지 말라고 타박한다.

296. 흔히 수컷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몰두하는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자신이 일해야 가족이 먹고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297. 불행히도 우리는 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쉬는건, 노는 건 비생산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압력의 교육뿐이었지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놀고 쉬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왜 그래야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가르치는 부모나 교사가 노는 법을 모르니 자식이나 학생들에게 그걸 가르칠 수는 없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 둔 지금도 제대로 놀지 못하는 것 같다. 잠시라도 뭘 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여전하다. 하나씩 천천히 나사를 풀어야 할 때이다.

297. 쉬는 것도 요령이다. 그 내용을 채우는 건 능력이다. 지금 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당장 엎어지거나 일이 엉망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안다.

297. 연례행사 같은 여름휴가 사나흘인데 그것마저도 약속이나 한 듯 7월 말에서 8월 초에서 다 몰린다. 왜 꼭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이 나라의 학원들이 그때 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맟춰지는 것 아닌가 싶다.

여행도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있다. 나역시 사람들이 몰리는 성수기 보다는 비성수기에 여행을 가고 싶은데 집사람이 방학외에는 꼼짝을 못하니 아쉽다. 예전에 학교에 개근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아이들의 경험이 중요하지 학교 며칠 보내지 않는 건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297. 노는 것도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야 놀았다고 말한다.

298. 과연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았는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특성을 호모루덴스’, 유희하는 인간혹은 놀 줄 아는 인간이라고 정의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결국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298.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식은 조용히 숲길을 걷는 일이었다. 가끔 가벼운 책 한 권 들고 걷다가 좋은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일만큼 관능적인 일은 없다. 휴식이라는 말을 뜯어보면 참 재미있다. ()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댄 모습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서 호흡하는 일 자체가 가장 완벽한 휴식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라는 글자도 예사롭지 않다. 스스로自 마음心을 들여다보는 형상이다. 일에 몰입해서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 목적이나 욕망 없이 조용히 숲에 들어서 나무에 기대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문을 열어보는 것이 휴식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299. 마음이 심란하면 찾아가 기댄 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무나 숲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휴식의 진면목을 즐기는 사람은 일의 몰입과 창조적 발상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좀 쉬며 살아야 한다.

300. 일상에서 늘 잉여의 칼로리를 살면서 처분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연소시키지도 못한 채 쓸데없이 지니고 사는게 얼마나 많은가.

식탐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아들도 날 닮아서 그런지 식탐이 많다. 그런 아이를 보면 짜증이 나는데 다른 사람이 날 보았을 때도 그랬을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식탐에 비례해 배가 불룩해진다. 괴로우면서 계속 먹는다. 이제는 버려야 할 때다. 제일 싫었던 배 나온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건 없다. 자기 합리화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한계를 넘고 있다.

300. 소크라테스는 한가로운 시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늘 바쁘다. 하지만 바빠서 여유가 없을 때, 그때가 바로 쉬어야 할 때다.

300. 여전히 일하라고 다그치는 사회에서 휴식과 놀이는 늘 찬밥 신세였고 부정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휴식은 단순한 게으름도 아니고 아무 곳이나 털썩 주저앉아 멈추는 것도 아니다. 쉬는 것이 선물이고 생산적이라는 걸 가르쳐야 한다.

300. 나만의 쉼터를 먼저 마련하는 게 휴식의 조건이다. 진짜 휴식은 그것을 통해 내적인 성찰과 위안을 얻고 영감까지 찾을 수 있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301. 도심에도, 주거지에도 그리고 시골에도 그런 공간을 다양하게 마련하여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서 자신을 정리하는 그런 공간이 마련될 때 비로소 밀도 있는 삶도 가능할 것이다.

301. 휴식은 몸이건 영혼이건 삶에서의 엇박자를 정박자로 돌려놓는 장치다. 삶의 리듬을 잃으면 그건 기계의 삶일 뿐이다.

 

#18. 어쨌든 삶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307.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닌 것처럼 세상도 삶도 사람도 다양한 모습과 색채로 채색될지 모르지만 그 바탕은 다 똑같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고, 왜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지, 왜 우리가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지 바탕이 된다.

309. 값을 먼저 셈하는 삶은 피폐하다. 물론 농부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늘 값을 먼저 따지고 셈을 궁리하는 건 곤궁한 삶이다.

309. 100억을 가진 사람은 100억 원만큼의 근심이 있을 것이고 논 한마지기 가진 농부는 그 만큼의 근심만 있을 것이니 행복을 양으로만 따지는 셈은 불공평하다.

313. 저 아이들과의 해후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세계 시민으로서 어떤 의무감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314. 노력하면 혹은 독하게 마음먹으면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꿈을 위시리스트에 올린다. 어쩌면 히말라야 트래킹은 가장 쉬운 위시리스트일지 모른다. 시간을 내고 몸이 버텨주면, 어느 정도의 돈만 마련되면 가능한 일이니까. 진짜 삶의 위시리스트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다는, 그래야 한다는 자신감이 이 여정의 선물이다.

316. 사는 거 별거 아니다 싶다. 사람 사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조금 더 편리하게 사느냐 불편하게 혹은 조금 가난하게 사느냐의 차이일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꾸만 거죽에만 매달린다. 그래서 삶이 고달프고 슬퍼진다.

318. 절해고도라는 말 그대로 격리된혹은 유배된이미지와 완벽한 탈출과 만끽할 고독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숙한 곳에 내재된 의미나 이지미는 상상력의 보물창고라는 엉뚱한 설렘이다.그래서 섬은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수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는 기대로 다가온다.

319. 알베르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은 달콤하기보다 쌉쌀한 글맛으로, 문학적 아름다움과 철학적 사유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아우려졌으면서 어느 문장 하나 허투루 박힌 게 없다. 질긴 사유와 담백한 심성이 빚어낸 보석이다.

319. 장 그르니에의 섬과 르 클레지오의 섬은 확연히 다르다. 하나는 조용하면서도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섬이고, 다른 하나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화산 바위섬으로 병과 죽음의 감옥과도 같은 모험을 담은 섬이다. 그러나 그 끝은 맞닿아 있다. 실존 또는 정체성이라는 주체는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320. 섬은 절대 고독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작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목적지가 된다. 우리가 명상을, 꿈을 품지 않으려는 건 바로 그러한 두려움과 자기 실망에 대한 변명이다.

320. 섬은 바다에 떠 있는 꽃이다.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이다.

320. 그 격리는 차단이 아니라 온전하게 자신만을 직시하고 자신과 대화하는 행복한 자기 유배다.

321.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 삶의 주제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섬은 내 삶의 여행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321. 섬은 바다가 빚어낸 꽃이다. 섬은 막연한 동경이 아니다. 섬은 모든 것과 차단되어 있지만 모든 방향으로 개방되어 있다. 섬은 고독하지만 의연하다. 조용하고 의연한 삶의 못자리다. 나를 놓치거나 잃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나의 섬으로 찾아간다.

 

에필로그 삶은 여전히 남아 있는 미지의 길, 그래서 걷는다

 

323.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내게 각별히 행복했던 건 무엇보다 그것이 내게 그것이 초행릴, 즉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함에서 오는 여유도 좋지만 처음의 설렘에 미치지는 못한다.

323. 경험이 미숙한 초보 산악인에게 안겨주는 최대의 이점은 그가 전통이나 선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모든 게 다 간단해 보이며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간명한 해결책을 선택한다. 물론 그로 인해 종종 그가 추구하는 목표가 실패로 돌아가고 비극적인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목표를 시작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

324. 어차피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초보자다. 초보자가 누리는 이점은 괜히 아는 척, 가본 척 하지 않고 호기심을 잃지 않으며 선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서 얻는 지혜의 힘도 인정한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안전하게 가고자 하는 곳까지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대부분의 충고는 그런 목적을 담는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런 충고나 도움은 사양하고 싶다.

325. 중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의무로서의 삶을 어느 정도 마쳤으니 비로소 권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기이며,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없는 도전과 전진을 누려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진보적이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들, 겪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이 나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외려 내 발목을 잡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발목을 잘라내고 싶다.

325. 장 그르니에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여행은 왜 하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 희귀한 감각을 체험해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 말이다. 그 감각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325. 여행은 늘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나게 해준다.

326. 나이 예순을 앞두고 열정과 설렘, 그리고 그리움의 대상을 다시 가득 품고 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삶은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진작 깨닫고도 남을 나이가 지났으니 구시렁거릴 것도 없다만

326. 송나라 시대 곽희는 산수를 그리고 그 그림을 방 안에 걸어두는 까닭을, 인간은 자연을 느끼고 거기에서 배워야 하는데, 삶의 조건과 상황이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니 그림을 그려서라도 들여놓고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우리 집에 그림이라고는 없다. 너무 삭막하다. 그럴듯한 자연의 그림부터 하나 걸기 시작해야겠다.

326.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 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석가모니의 이 말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하다.

327. 석가모니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결국 스르로 경계하고 깨우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읽을수록 심오하다. 자신의 불을 밝히지 못하면서 세상 부를 밝힐 수는 없다.

327. 결핍의 반대는 풍요가 아니라 불만족임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얼마나 많은 과잉 속에 살았는지 새삼 확인한 고마운 여정이었다.

328.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핍의 상태에서는 더 이상 요구하거나 쓸데없는 희망과 바람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념과는 다르다. 체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수용은 내가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만족이며, 과잉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328. 결코 다 채우려 하지 말아야 한다.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쓰는 글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저절로 우러나야 하고 기다리는 수양이 필요하다.

328. 발상을 영감으로 정화하고 지혜로 걸러내 글 밭으로 옮겨 심어야 한다. ‘자등명법등명이라는 부처의 마지막 가르침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극적 효과를 좀 더 조명해본다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자등명의 기회를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다.

329. 인간은 미지의 세상과 끊임없이 조우하며 살아왔다. 처음에 그 길은 탐험이었다. 탐험은 두려움과 경계의 길이다. 그게 익숙해지면 그 길은 여행의 길로 진화한다. 그리고 거기에 편안함이 더해지면 관광으로 퇴화한다. 히말라야가 매력적인 이유는 적어도 그 트레킹은 더 이상 모험은 아니지만 끝까지 관광으로 내몰리지 않고 의연하게 여행의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이에게 그 길은 탐험은 아니지만 미지의 여행이다.

329. 삶은 여진히 남아 있는 미지의 길이다. 안나푸르나에서 걸었던 일이 늘 그 미지의 길에 겹칠 것이다. 의연하게 살아갈 힘을 얻어간다. 그 힘이 나를 버텨줄 것이라 믿는다. 삶이라는 긴 여정 내내,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독자의 눈으로-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18가지에 대한 저자의 진솔한 생각을 펼쳤다. 설렘, 탈출, 시간, , 묻다, 낯선 생각, 독서, 두려움, 자연, 단순함, 버티는 힘, 삶의 고개, 관용, 공존, 청춘, 가족, 휴식,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주제들이 묘하게 히말라야 트레킹의 순서와 흐트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 등)

프롤로그를 읽을 때 책이 별로겠다 싶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인문학 책이었는데 여행에 관한 책이겠다 싶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보통의 여행문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정작 히말라야에 관한 이야기는 세세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냥 18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밑밥정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얘기한다. 이 책은 기행문과 인문학책의 중간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현재 대부분의 기행문들은 여행 경로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뤄, 독자로 하여금 같은 길을 걷는경로의존적인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데에 반해 김경집 작가는거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기록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여행책들과 차별화된 점이었고 읽는 내내 인문학적 감성이 충만했다.

똑 같은 여행책이지만 분명히 다른 여행책이다. 앞으로 책을 쓸려면 이런 식의 접근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히말라야는 하나의 거대한 책이었다”고 말한다. 인문학자다운 이야기다. 일반독자에게 어찌 히말라야가 책일수 있게냐만은 히말라야 트레킹, 즉 걷는 것을 통해 하나의 화두를 질끈 부여잡고 생각하며 자연에 묻고 자연에 대답을 얻는, 오로지 나와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는 성찰, 그것은 매우 역동적인 일이면서 책을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저자는 하루에 하나씩 18가지 삶의 화두를 잡고 뚜벅뚜벅 걸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던지는 미래의 의제들이다. 극도로 단순하고 힘에 겨운 히말라야 여정 속에서 일상적 풍경을 묘사하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청년실업 문제, 촛불집회, 독서, 가족, 종교, 여행, 쉼 등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문학자의 눈으로 말해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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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21:13:49 *.18.218.234

"그래서 내가 못떠나는 것이다"라고 평한 페이지 수가 18이네 ㅋ

저자의 화두는 18가지이고

기상씨는 2018년이 큰 변화의 해이고 

딱 18일만 떠나요. 이건 뭔가 계시의 숫자야. ㅎㅎ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이 등장하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임. 

기상씨 북리뷰 애독자로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3월까지 연재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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