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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9일 10시 11분 등록
 

저자 연구

박완서(朴婉緖: 1931.10.20 ~ 2011.01.22)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 출생

대한민국의 작가(소설가 & 수필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나와는 늙은 엄마, 또는 젊은 할머니가 될 법한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세대 차이나 꼰대스러움을 느낀 적은 거의 없다. 6.25 전쟁의 경험에 관한 글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인 줄도 몰랐을 정도로, 그의 문체는 젊었고 세상을 보고 읽는 감각도 촌스럽지 않았다.

그의 글은 단숨에, 쉽게 읽힌다. 단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도 많고, 생소한 소재에 대해 쓴 글인데도 왜 그렇게 잘 읽힐까? 아마도 실제 경험한 사건을 묘사하는 생동감과 날카로운 문체에 있지 않나 싶다.

박완서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생동성, 문체의 날렵함, 자연주의적 관찰의 탄탄함으로 이룩한 독자적인 스타일이 어우러져 풍부한 사실적 실감이 넘치는 소설로 잘 빚어진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 속내를 후벼 그 안에 숨은 끈질긴 욕망과 위선과 이중성을 파헤치는 그 직정적인 문체는 읽는 이의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준 듯 상쾌함을 넘어서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욕망과 그것을 넓은 테두리로서 감싸는 시대, 그리고 개개의 욕망과 시대가 만나 빚어내는 풍속에 대한 통찰은 뭉툭한 법이 없다. 퍼렇게 벼린 칼로 정확하게 그 핵심을 파고든다.

_by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중에서.

 

스스로를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작가에게 스무 살은 그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나이가 아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는 1950, 바로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다.

그해 5월 숙명여중(지금의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620일에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5일 뒤 6.25 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한다.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도 드물던 시절, 서울대학교에 그것도 당시에는 대학 중에 대학이라 불리던 문리대 국문학과에 합격했으니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을까. 달랑 5일 만에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을 텐데……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名講義)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_본문 25 페이지

 

끔찍한 전쟁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남자와 결혼을 했고, 다섯 아이를 낳아 잘 키우면서 화목한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본인이 짠 비단이 아니어서일까, 작가는 남부러울 것 없는 결혼생활, 엄마 노릇을 속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겉만 빌려 입은 비단옷으로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처럼 자신이 한없이 뻔뻔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고 묘사했다. 그렇게 실제적인 가슴의 통증으로 비명을 삼킬 때도 있었고, 어디 남 안 듣는 곳에 가서 실컷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뭉쳐 병이 될 것 같은느낌은 주머니 속에서 찌르는 송곳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는 통증과 충동을 참지 못하고 글로 토해내서, 1970년 마흔의 나이에 소설 <나목>을 쓰고 등단했다.

1976년 첫 번째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펴냈고 이를 시작으로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1977), <창밖은 봄>(1977), 창작집 <배반의 여름>(1978),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1978), <도시의 흉년>(1979), <욕망의 응달>(1979),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창작집 <엄마의 말뚝>(1980), 장편소설 <오만과 몽상>(198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서 있는 여자>(1985), 창작집 <꽃을 찾아서>(1986), 장편소설 <미망(未忘)>(1990),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9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창작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이런 사람이 어찌 그냥 아내로, 엄마로만 살 수 있었을까. 한 여인으로, 인간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픔을 겪은 작가에게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살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책 머리에

5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6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

여든이 되어도 이런 기분이 드는 구나. 기억하고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해야겠다.

 

1_내 생애의 밑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15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일 것 같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는 흙 위에서 뛰어 놀았다. 언제부턴가 흙은 더러운 게 되었고, 옷이나 신에흙을 안 묻히는 게 깨끗하고 좋은 건 줄 알았다. 요즘은 동네 공원에도 우레탄이 깔려서 일부러 산에라도 가지 않는 한 흙을 밟을 일이 없다. 땅 바닥에 누워봤던 건 그야말로 언제였더라. 바닷가에 가면 모래 위에는 꼭 누워 보는데…… 땅에 누워서 흙의 생명력을 느껴보기. 올해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보자.

 

17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맣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 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할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매니큐어 대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 손가락을 하늘 향해 높이 쳐들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유쾌하고 엽기적인 늙은이를 상상해본다.

여든의 나이에 어떻게 이런 상상력이……

몇 년 전에 아이들 사이에서 손톱은 아니지만 머리에 새싹 모양 핀을 꼽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누가 알까. 몇 년 뒤에는 손톱에 새싹을 달고 다니는게 패션이 될지.

 

18 내 소유가 아니어서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 그게 바로 차경(借景)의 묘미 아니겠는가. 내가 더 늙고 힘에 부쳐 우리 마당이 볼품없는 쑥대밭이 된다 해도 저 숲의 사계절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노후에 빌려 보는 경치가 아름다운 집에 산다는 게 큰 복이다 싶다.

 

20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전쟁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의 평화주의는 부끄럽게도 진상까지도 피해가고 싶을 만큼 비겁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두려움, 부끄러움, 비겁함까지 숨기지 않고 독자들과 공유하는 게 박완서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본다.

 

20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6.25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老軀)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그 해의 5월도 아름다웠다.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5월이었다.

어찌 안 그럴까.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했을 거다. 대학 입학 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3년을 없는 세월 치고 살았으니, 그 꿈을 이뤘을 때, 더구나 그 때가 5월이라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때였을 거다.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 후에 가장 처참한 시간을 맞았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22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 고달픈 소녀 가장을 거쳐서 안착한 사회의 외풍을 막아줄 남자와의 무탈한 결혼생활,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 여성에게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산(多産),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 생활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속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겉만 빌려 입은 비단옷으로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처럼 자신이 한없이 뻔뻔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실제적인 가슴의 통증으로 비명을 삼킬 때도 있었고, 어디 남 안 듣는 곳에 가서 실컷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뭉쳐 병이 될 것 같은 적도 있었다.

 

23 나 혼자만 당한 일이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바로 그 점이 더 괴로웠다. ~ 하나의 생명의 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소멸과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숫자 안에 도매금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피붙이만은 그 도매금에서 빼내어 개별화시키고 싶었다.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죽은 숫자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외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못하면 억울한 죽음을 암매장한 것 같은 죄의식을 생전 못 벗어날 것 같았다. 외침으로써 위로받고 치유받고 싶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소설이라는 걸 써보게 되었고, 비교적 순탄한 작가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받고 위안을 얻은 것처럼 느낀 것도 사실이다.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25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名講義)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니 전쟁이 났어도 이 후에 복학해서 학교를 졸업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되었을 수도 있겠고, 바로 문단에 데뷔해서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으니 어디서 뭘 했어도 뛰어난 작가가 되었겠지만, 그런 잔인한 경험 없이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눈물짓게 하는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전쟁뿐만 아니라 남편과 연이은 아들의 죽음도 그에게는 잔인한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견뎌낸 아픈 경험이 훗날 글의 밑거름이 되었다. 개인에겐 잔인하고 가슴 아픈 시간이지만 수많은 독자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던걸까? 이런 가정을 하는 나도 참 잔인한 것 같다.

 

26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그 두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내 식의 귀향

28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학교에서 가장 선배가 되었을 때, 직장에서 상사가 되었을 때도 부담감에 버거운데,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어른이 될 때의 버거움은 상상도 할 수 없다.

 

29 여긴 어떤 무덤도 잘난 척하거나 돋보이려고 허황된 장식을 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묘지이다. ~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할 테고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문장을 보면 그가 여든이나 된 할머니라는 데에 새삼 놀라게 된다. 글의 재미나 반짝임은 나와 비슷한 또래거나 그 보다 어린 사람 같은데, 내용은 여든 할머니. 작가의 이런 아이러니와 반전 매력이 좋다.

 

30 정회장은 정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 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 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면 먼저 금의환향(錦衣還鄕)부터 떠올린다. 정주영 회장은 그보다 더 할 수 없게 금의환향을 했다. 금의환향 자체가 나쁠 거야 없다만, 많은 사람들이 금의환향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고향을 못 찾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고향, 즉 집(home)은 성공하지 않았어도 잘 되지 않았어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받아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금의환향을 위해 차를 빌리고 없는 돈에 옷을 사 입는 허세보다는 작가의 소박하고 정겨운 귀향이 너무도 공감된다.

 

31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맞다. 너무도 비상시적인 시대를 산 부모, 조부모 세대에게 연민과 동정심이 생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피해의식과 잘못된 애국심으로 후손들의 삶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많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이제 그만 let it go.

 

유년의 뜰

33 흙을 상대로 하는 육체노동에는 원초적인 평화와 행복감 같은 게 있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안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서도 봄부터 가을까지 텃밭에서 각종 채소들을 가꾸시나보다.

 

36 수입 화초들은 어떻게 된 게 다음 해에 심을 씨도 받을 수가 없고, 뿌리에서 다시 나지도 않는다. ~ 안 사다 심는다고 놀고 있을 흙이 아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우리 마당에 들어왔는지 확실치 않은 토종 화초들, 봉숭아, 백일홍, 상사초, 벌개미취, 꽈리들 천지가 되고 말았다. 다 내 유년의 뜰에 있던 것들이다. 우리 마당의 흙은 비행기 타고 온 종보다는 바람 타고 온 종을 더 반기는 것인가. 옛날 옛적에 떠난 내 유년의 뜰이 나를 따라온 것인가.

 

40 인간의 참다움, 인간만의 아름다움은 보통 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건 진실인가. 말로 표현된 것의 자유와 한계, 읽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조작한 이미지, 경박한 과장, 분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강가에서

44 집에서 보는 한강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 뜰 무렵이다. 강 건너로는 순한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능선이 부드러운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해가 불끈 솟으면 수면이 금빛으로, 은빛으로 때로는 주황색으로 부서진다. 물속을 노닐던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그 아름다운 비늘을 보여준 것처럼 그 순간은 짧다. 짧지만 그런 날은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몸도 온종일 개운하지만 황사나 안개에 가려 안 보이는 날은 몸도 마음도 울적하게 가라앉는다.

창 밖으로 아파트나 차가 아닌 강과 산이 보이는 집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지금은 아파트 너머로 뜨는 해 밖에 볼 수 없지만 10여년 후에는 강 위나 산 너머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

 

48 가다가 또다시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릴지라도 계속해서 오른쪽 길로 붙어야 한다. 그래야 한강을 놓치지 않는다. 잘못 붙으면 기나긴 굴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굴만 벗어나면 다시 한강을 낀 길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 동안이 아까울 만큼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한강이 아름다워진다. 계절 따라 아름답고 지역에 따라 아름답다. 대안의 경치가 특히 환상적이다. 그 길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이르면 아름다운 강은 위대한 강으로 변한다.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나도 한강을 따라 가는 길을 좋아한다. 나는 주로 경춘 국도나 경춘선 기차를 타고 한강을 따라 가는 길을 좋아한다. 춘천이 좋아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춘천에 다녀온다. 막상 춘천에 가면 막국수를 먹고 공지천의 예쁜 까페에서 커피 마시고 오는 거 말고는 별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춘천이 아니라 춘천 가는 길을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50 도대체 저기가 뭐가 좋다고 저런 데서 사진을 찍나 이해가 안 되는 배경 앞에서 꼭두각시처럼 사진사의 지시에 따라 얼싸안기도 하고 입도 맞추는 걸 보면 저 꼴 안 보고 예전에 딸자식들 여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정도로 나는 식도 올리기 전에 길바닥에서 하는 웨딩촬영에 호의적이지 못했다. 허나 유일하게 감동하고 축복해주고 싶은 웨딩촬영이 있었는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진 두물머리 꼭짓점에서 하는 촬영이었다. 몇 천 년에 걸쳐 문명을 열고 평야를 적시면서 우리를 먹여 살린 두 개의 큰 강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서 청춘남녀가 앞날을 같이 할 징표로 사진을 남긴다는 건 예식장에서 하는 백년가약 못지않게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다. 꼭짓점엔 몇 백 년은 되었음 직한 거목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정말 예전엔 경복궁이나 현대미술관 등 예쁜 건물 앞에서 웨딩 촬영하는 커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건 하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민망했다. 조명도 없고, 바람이 불어서 머리나 치마가 날리는 등 원하는 사진을 찍기 어려워 요즘은 야외 촬영은 거의 안 하는 것 같다. 그냥 보기에도 별로고 불편할 것 같아서 나는 나중에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더랬다. 저 꼴 안 보고 예전에 딸자식들 결혼시킨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니 작가의 개성이 엿보인다.

 

52 강을 향해 들어선 별장풍의 환상적인 집들을 감상하는 것도 그 길을 걷는 낙이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런 집을 갖기를 소망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대신 그런 집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집 한 채를 찍고, 그 집 주인이 친한 친구여서 허물없이 문을 두드리고, 차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었으면…… 그 친구가 그 집에 상주하지 않는다 해도 나에게 여벌 열쇠를 하나 맡겨준다면 때때로 그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자유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공상을 해본다.

집의 여벌 열쇠를 주는 친구라니나는 받아도 부담스러울 듯 하다. 그동안 가족에게도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가 이번에 아프면서 엄마와 동생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도 연락 없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공유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다. 이후에 바꾸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아직 안 바꾸고 있다. 세대차이인지, 그냥 성향의 차이인지…… 작가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런 걸 보면 또 아주 다르다.

 

54 그들이 남긴 업적, 활동, 저서, 어록 등은 지금 우리 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고, 소박하지만 소박해서 더욱 신실한 자유민주주의 사상 그 자체이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행복한 화해이다. 그리하여 그들 실학자들은 당대의 모순이나 부패를 고민한 게 아니라 자식의 자식 대() 손자의 손자 대까지 내다보고 고민한 것처럼 읽힌다. 그것이 바로 같은 지식인이라도 한 치 앞의 이익에 급급한 정치가나 어용학자들과 진정한 지식인의 다른 점이고 선각자의 엄혹한 운명일 것이다. 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자연 그 자체만으로는 감히 위대하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한강을 그렇게 부르고 싶은 것은 위대한 사상의 발상지를 끼고 있고 그들이 오간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강의 원형이 더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싶다.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

55 겨울이 춥지 않으면 해충들이 월동을 해서 다음 해는 농작물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노인네들의 걱정은 북극의 빙하가 녹아 사람 살 땅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대재앙의 예고 앞에서는 한낱 사소하고 진부한 구시렁거림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한 문장이 매우 길다. 박완서의 문장은 긴 문장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길어서 읽기 힘들다거나 뜻이 불분명해지거나 주술이 안 맞는 비문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듯 쓰는 대화체라서 그런 것 같다.

 

56 우리는 어느 나라에 가서도 꿀릴 것이 없는 경제대국이 돼가고 있는데 그 옛날의 대국의 왕인지 칸인지한테 당한 굴욕쯤 나 몰라라 해도 그만이었다.

 

57 나도 따라서 웃었다. 내가 다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이야. 아마 외아들을 잃은 지 삼 년쯤 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으면서 내가 앞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잃은 기둥에 비해 그 아이는 겨우 콩꼬투리만 하였으나 생명의 무게에 있어서는 동등했다. 생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참척(慘慽)이라는 말을 박완서의 책에서 처음 알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라는 말로 참혹할 자에 속을 태우는 슬픔 자이다. “슬픔이라는 말 보다는 참척이 거센 소리로 인해 더 참혹하고 아프게 들린다. 아마도 나는 평생 모르고 살 고통일 수도 있겠다. 다행인건가, 생각하니 왠지 신포도라며 포기하는 여우가 떠오른다.  

 

58 꼬랑내가 살짝 섞인 공기가 남한산성의 순수한 공기보다 오히려 감칠맛이 있었다.

 

59 그러나 읽으면서 나에게 실감 나게 다가온 것은 ~ 추위였다. 처음엔 마음이 시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실지로 몸이 시렸다. 아직 겨울의 문턱에도 못 미친 만추였고 이상난동이 예상되는 따뜻한 가을이었으니 그건 올해의 추위가 아니라 병자년의 추위였을 것이다. ~ 독감의 징조처럼 기분 나쁜 한기에 이불을 뒤집어쓰면 서러움이 목이 메게 복받쳤다. 김훈의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냉정한 단문이 날이 선 얼음조각처럼 내 살갗을 저미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관념이 아니라 실감이었다. 병자년 추위는 기어코 나에게 감기까지 가져왔으니 말이다.

타고난 감성인걸까, 아니면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걸까? 전쟁이라는 참상을 겪고 난 후,살아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생존자 누구도 스트레스 장애 치료라는 걸 받은 사람은 없었을 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느라, 또 모두가 함께 겪은 일이라 잊은 듯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老軀)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라며 죽기 직전까지 그 때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 상처로 자신들만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까지 힘들게 하는 것이 더 안타깝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나아질까?

 

61 좋은 권력이건 나쁜 권력이건 약한 정부건 강한 정부건 개인이 자기 국적의 국가권력 밖으로 내던져진 기분이 어떠한 건지, 그 외로움과 공포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땅의 구속을 벗어나 지구를 몇 바퀴 훨훨 바람처럼 떠돌고 싶어도 여권이라는 조국의 보증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63 이제 오빠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큰 짐, 나의 족쇄가 되었다. 바퀴 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짐이었다. 바퀴나 지게로 식구를 나르는 사람보다도 단신으로 걸어서 가는 피난민이 더 부러웠다. 나도 오빠만 없다면, 우리 식구만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저렇게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족이 짐이 되는 상황.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짐이 되었다. 친구 중에도 자식뿐 아니라 부모까지 돌봐야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있다. 한 친구는 병에 걸려 회복 가능성은 없지만 당장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 돌아가실 날까지 엄청난 치료비를 부담해야할 부모를 짐, 조금 순화한 말로 평생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고 표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보호자라고 생각했던 부모가 어느새 짐 또는 십자가가 되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걸까?

 

64 손수레 바퀴가 장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빠져 달아나면서 오빠가 천근의 무게로 땅바닥에 내려앉자 내 머리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생각은 차라리 잘됐다, 나 혼자만이라도 이 재수 더럽게 없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자, 하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만이라면 얼마든지 그날 안에 한강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식구들의 철석 같은 믿음은 나에게 차마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박완서 글의 최고 매력이자, 내가 그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잘 보이는 문장이다. 이보다 더 재수없을 수 없겠다, 싶은 순간 더 불행한 일이 생긴다. 그 더할 수 없는 불행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본다. 진짜 희망이라기보다는 블랙 유머에 가깝기에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시리다. 더 감동적인 건 이 모든, 어찌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본인의 치부를 글로 써서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솔직함이다.

 

65 불과 며칠 전에 그 많은 피를 흘린 오빠에게 따순 밥 한 숟갈 못 먹이고 얼음장 같은 냉골에서 추위에 떨면서 생쌀을 씹게 해야 했다. 어떻게 그런 모진 추위가 다 있었을까. 그 추위는 그 후에 우리에게 닥친 온갖 고난의 역정까지를 얼어붙게 하는 무서운 추위였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나는 날짜별로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을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썩어서 소명돼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썩어서 꽃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67 나도 그때 생리만 멎은 게 아니라 성장도 멎어버린 것 같다. 반세기도 넘어 전의 추위, 굶주림, 불안, 분도 등 원초적 감각의 기억은 그로 인하여 감기도 걸릴 정도로 현실적인 데 비해 현재 누리고 있는 소비사회의 온갖 풍요하고 현란한 현상들은 그저 꿈만 같다. 번화가의 환상적인 조명, 무수한 한강 다리를 장식한 아름다운 불빛,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로를 은하수처럼 흐르는 차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는 더 그렇다.

 

아아, 남대문

70 나는 의학드라마 같은 데서 배나 가슴을 가르는 장면을 보여줄 때면 눈을 감거나 외면하는 비겁한 버릇이 있다.

나도 그런데. 나는 이런 장면 뿐 아니라 너무 지저분한 장면을 보여줄 때도 얼른 채널을 돌리거나 안 되면 화면을 손으로 가려버린다. 케이블 채널에서 가끔 청소용품을 광고할 때 더러운 걸 과장하고자 나오는 화면들은 특히나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나와서 너무 싫다. 이게 비겁하단 말을 들을 버릇이었나?

 

73 한 가문의 맥을 한 손에 틀어쥔 것처럼 당당하고 기가 센 종가댁 증조할머니도 매 맞고 우는 어린것들한테는 기꺼이 당신 치마폭을 내주고 감쌌다. 남대문의 석축이 그렇게 부드럽고 여성적으로 보였다. 저 문안의 도성이 살 만한 데가 될 것 같은 안도감이 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 사람이 됐다.

 

74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도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 왔다. 남대문 미()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고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이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6년을 출퇴근 길에 남대문을 지나갔다. 첫 출근을 하기 전에 이미 화재가 났던 터라 한동안은 가림막에 가려진 것만 봤다. 그만두기 1년 전쯤 복구를 마치고 개방된 걸 봤는데, 매일 봐서 그런지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너무 넘치면 부족하니만 못하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이 되는걸까?

 

77 결국은 돈이었다. 유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잘살아보세, 경제를 살리자, 경제제일주의가 만들어낸 파렴치, 책임져야 할 고위층들이 다 같이 형식적인 사죄 끝에 입에 올린 약속도 돈, 신속한 복구 그리고 돈만 있으면 문제없다는 식의 예산책정, , , , 돈자루를 틀어쥔 이들의 또 하나의 파렴치. 재건축아파트를 사고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그게 한 번도 불로소득이란 생각은 안 해본 나의  뻔뻔함. 그러도고 더 많이 벌어 흥청망청 쓰는 사람만 보면 이놈의 세상을 송두리째 깽판 치고 싶다는 열화 같은 정의감의 그 못 말리는 뻔뻔스러움.

내가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던 것은 방화범 개인의 뻔뻔함이 아니라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받들어온 경제제일주의가 길들인 너와 나의 얼굴, 그 황폐한 인간성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79 “~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식사의 기쁨

83 나는 밥을 무지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지은 밥에는 자부심 같은 것까지 가지고 있다.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예고없이 잠깐 들었을 때도 보온밥통 속 밥을 먹이기는 해도 햇반은 안 먹이게 된다. 찬밥이라도 내가 지은 밥을 먹여야 뼈가 되고 살이 될 것 같은 믿음은 근거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위로와 보람이 된다.

우리 엄마도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거다.

 

84 평소에 흉허물 없이 무심하게 대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착하고 불쌍해 보일 때가 있다. 위로해주고 싶어서 한다는 소리도 집에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소리다. 마음에 남는 친절한 대접을 받고 나서 답례로 한다는 소리도 같은 소리이다. 나는 아마도 밥을 여린 마음, 다친 마음 등, 마음에는 무조건 잘 듣는 만병통치약쯤으로 아나 보다. 그러나 그런 격식 차리지 않는 나의 초대에 선뜻 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빈말로 알아듣거나 정말로 알아들었다고 해도 거북한 듯 비켜간다. 초대라면 의례히 진수성찬을 연상하고 부담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하긴 누가 나한테 집밥을 먹으로 오라고 초대해도 그렇게 비켜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새 세상에 자기네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는 초대일리는 없으니까. 그래도 말로라도 그런 초대를 받으면 기쁠 것 같다.

 

85 내가 믿는 집밥의 효능을 믿어주는 건 그래도 피붙이밖에 없는 것 같다. 따로 사는 손자가 오늘 할머니한테 가서 저녁 먹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올 때가 가끔 있다. ~ 그럴 때 나는 막 신이 난다. 마치 내가 지은 더운밥 한 그릇이 녀석에게 새로운 기라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으스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

그러고보니 난 따로 살게 된 이후 한번도 엄마한테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엄마 밥이 먹고 싶다거나, ‘엄마 밥이 제일 맛있다는 크게 거짓말도 아니거니와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일텐데…… 스스로 칭찬을 잘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은 못하고 있었다.

 

86 나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정말 그랬을까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신분의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하나가 되어 우의를 다졌다는 기록은 사대복음서에 공히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니 아마 실화일 것이다. 실화일 터인데도 너무 아름다워 꼭 꾸민 이야기, 소설처럼 읽힌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소설 같다고 폄하하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나는 내가 소설가여서인지 꼭 정말 있었던 일 같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처럼 진실한데 아름답기까지 한 이야기를 소설 같다고 생각한다.

 

89 하워드는 병원으로 모는 차 속에서 여태까지 학벌로나 사회적으로나 탄탄대로를 걸어온 자신과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 양친, 걱정 안 끼치고 다들 유복하고 화목하게 사는 형제자매들, 하나같이 잘나가는 대학동창까지 떠올린다. 아직까지 그에게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앞으로 닥칠 불행에 대한 치명적인 예감인 것을.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작은 실패, 좌절 등을 경험해서 면역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92 그들이 롤빵을 먹는 동안에도 빵장수는 사과를 멈추지 않으면서 그 나이까지 아이 없이 보내는 세월이 어떠한지, 또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는 게 어떤지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꽃장수가 아니고 빵장수인 게, 사람들이 먹는 것을 만드는 일을 그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숨기지 않는다. 그에게 빵 냄새는 언제라도 꽃 냄새보다도 더 좋았다.

 

93 나도 이십 년 전에 참척을 겪은 일이 있다. 너무 고통스럽거나 끔찍한 기억은 잊게 돼 있다던가. 기억력의 그런 편리한 망각작용 때문인지 그 당시 일이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나중에 딸들한테 들은 건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리 집 아닌 어딘가에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온 딸들이 엄마가 듣건 말건 위로가 되라고 한 말이, 장례식에 아들 친구들이 많이 와서 성대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걸 전해 듣자 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친구들 뭣 좀 잘 먹여 보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아아,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는 것이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인가 보다. 그리고 산 사람에게는 먹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 참척의 고통으로 정신을 놓은 와중에도 장례식에 온 사람들 먹을 걸 걱정했다는 게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그렇다.

 

노인, 최신 영화를 보러 가다

96 나는 공부벌레도 못 되면서 교칙에 정해진 일이라면 머리 꼬랑이 길이가 정해진 길이에서 1센티미터만 넘어도 벌벌 떠는 소심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내가 잘못 걸리면 정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짓을 예사로 저질렀는데 그건 학생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세대차이를 넘는 공감을 느낀다. 종류는 다르지만,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나도 선생님들 몰래 날나리등이나 할 법한 일들을 하고 다니곤 했다.

 

107 치매는 더군다나 그렇다. 다들 치매에 대해 공포감을 갖는 건 치매란 인간성 속의 좋은 부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연민, 배려, 수치심 등을 상실하고 가장 추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걸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게 어찌 공포스럽지 않으랴. 수세식 변소 때문에 한 번도 자세히 볼 기회조차 없었던, 자기 X을 남이 가장 잘 보이게 벽에 쳐바르는 치매의 대표적인 증세만 봐도 치매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알 수가 있다.

몇 년 전 이사하면서 20대 초반에 쓴 일기장을 읽다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거의 이십년이 지났으니 당연히 많이 변했고, 또 기억도 왜곡되었겠지만, 일기장 속의 나는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어둡고 화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읽을까 두려워 없애버리려 했으나 아직도 갖고 있다. 이번에 이사할 때는 정말 없애버려야지.  

 

친절한 나르시시스트들

112 목적 없는 여행이었다. 일상생활이라고 무슨 목적이 있을까마는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톱니바퀴에 맞물린 것처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쉴 새 없이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대한 싫증에서 비롯된 여행이었다. 단지 여기가 아닌 딴 데 있고 싶어서 비싼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까지 하는 건 좀 사친가?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단지 여기가 아닌 딴 데 있고 싶어서는 다른 공간이기도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익명이 될 수 있는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꼴 보기 싫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있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싼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을 하는 사치를 부렸드랬다.

 

116 우리나라의 연변 아줌마와 일본의 연변 아줌마의 현격한 차이는 개인의 성격이나 운명의 차이가 아니라 그쪽과 우리의 사람 부리는 요령, 용인술의 차이가 아닐까. 사실 한 사람이 가진 모든 능력을 이용해 최대의 이익을 취하고 있는 건 우리보다는 그쪽이 더하건만 그쪽은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점이 고용과 착취의 차이가 아닐까.

 

121 손뜨개질 옷은 풀어서 다시 뜨는 재미도 여간 아니다. 그러나 헌 옷 푼 오글오글한 실로는 게이지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긴긴 겨울밤 방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여가며 그 증기로 오글오글한 헌 털실을 곧고 폭신한 새 실처럼 풀어내던 내 엄마 노릇의 고달픈 기쁨을 어찌 잊을까.

 

122 나는 그 매장에서 읽던 뜨개질 책과 원예책을 샀다. ~ 뜨개질책은 다시 뜨개질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정확성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서가에 읽기 위한 책 말고 때때로 꺼내보고 애무할 수 있는 책을 가까이 꽂아놓을 수 있는 것도 나의 은밀한 기쁨이다.

나도 해외여행을 가서 서점을 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 중 읽을 만한 영어로 쓰여진 소설책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림이 예뻐서 사는 책도 있다. 내 책꽂이에도 암스테르담의 작은 어린이 서점에서 산 동화책이 있다. 네델란드어로 쓰여진 책이라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림만 봐도 좋다. 서점이 있었던 어둑어둑한 암스테르담 거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여행을 마무리하며 우울하지만 새로운 삶의 기대감으로 인한 설렘이 떠오르기도 해서 좋다.

 

125 하루키의 소설을 접하면서 일본 작가들에 대한 나의 그런 고정관념을 깨트린 새로운 작가의 등장 같은 신선함을 느꼈었는데 그날 밤 그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게 더욱 확실해졌다.

이건 제목 그대로 달리는 기록이다. 일본 국내에서뿐 아니라 그가 돌아다니면서 정착한 세계 각국에서 이사하고 정리하는 동안만 빼고 매일 10킬로미터씩 적어도 일주일에 60킬로미터를 꼬박꼬박 달린 기록이다. 그는 그뿐 아니라 달리기를 시작한 1982년 이래 현재까지 26년 동안을 한 해도 안 거르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있다. 물론 기록은 선수로서의 마라토너의 기록에는 멀리 못 미친다. 그가 유지하고 싶었던, 단지 달리는 사람(runner)으로서의 자신의 기록도 어느 날 깨진다. 그는 그때 충격을 받지만 그렇다고 달리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126 놀랍게도 그는 훗카이도 북부 사로마 호수 주변을 일주하는 100킬로미터 코스 울트라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해서 완주한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를 스친 온갖 잡념, 사유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75킬로미터쯤 달렸을 때 그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서 뭔가가 돌담을 뚫고 훌쩍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맛본다. 그러고는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것 같은 아주 조용한 경지를 맛보고 고통까지 사라진 기쁨을 맛본다. 그 후로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단지 뛴다. 그가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은 열한 시간 사십이 분이다. 거의 하루의 반을 달린 것이다. 음식을 공급받을 때도 앉지 않고 선 채로 먹고 마신다. 앉으면 다시 못 일어설 것 같은 공포감은 그가 초인이 아님을 말해준다. 뛰다가 정 힘들 때는 좀 걷다가 뛰어도 되는데 그는 한 번도 안 걷는다. 안 걷고 달리기를 계속한 데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가 남기고 싶은 묘비명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느꼈구나. 많은 러너들이 그 맛에 달리기를 계속한다고 한다. 나는 비록 10킬로미터 밖에 안 뛰지만 비슷한 걸 느꼈었다. 처음 러너스 하이를 느꼈던 경주에서 매년 봄에 뛰는 게 목표였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아쉽다.

 

126 그의 오만이 전율스럽다. 그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운동도 누구하고 경쟁하고 적수를 의식하는 게 싫어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달리기를 좋아헸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경쟁자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의 적수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이 세상에 나하고 맞설 적수는 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도저한 자신감, 우월감이 또 있을까.

 

빈집에서 생긴 일

131 우체국을 사칭한 전화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기성 전화를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한 번도 걸려든 적 없이 무난하게 살아왔는데 이번에는 왜 동생과 물메기가 먼저 입력이 되면서 딴생각은 전혀 안 떠올랐을까. 사기를 당하려면 꼭 헛된 욕심이 눈을 가리게 돼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 헛된 욕심이 물메기여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메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섬에 사는 동생을 떠올리는 건 언제나 나에게 위로가 되니까.

물론 가장 나쁜 건 사기꾼이지만 속는 사람도 욕심에 눈이 가려져 사리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사기라는 게 뻔한데, 욕심이 개입되면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린다. 잘 알고 있으니 당하지 말고 살자.

 

139 내 어릴 적 시골집에도 살구나무가 있었다. 사랑채에 딸린 대문 말고 안채에서 직접 텃밭 쪽으로 나갈 수 있는 쪽문 밖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서 있었다. 그 동네서 우리 집에만 있는 나무여서 꽃이 활짝 폈을 때는 동네가 다 훤했다. 열매를 먹은 생각은 안 난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집 살구는 빛도 좋고 맛도 먹을 만하다. 꽃은 또 얼마나 화사하게 피는지 벚꽃을 닮았으면서도 벚꽃보다 덜 헤퍼서 훨씬 품위 있어 보인다.

 

141 제때제때 주워 들이지 않으면 풀 위에서도 상하기 때문에 하루에 몇 번씩 나가 풀숲을 뒤지고 다녀도 전혀 피곤한 줄 몰랐다. 아마 수확의 기쁨 때문일 것이다. 딸들에게, 이웃에게, 또 살구가 특별한 약효가 있다고 믿는 친구들에게 나누고 나서도 남아돌아 잼을 만들기로 했다. ~ 나누고도 지천으로 남아도는 살구를 큰 스텐 들통에 쏟아붓고 가스불을 조절해가며 서너 시간씩 고아대는 일은 올여름 노동 중에 가장 중노동이었다. 이 무더운 여름 사흘 동안이나 내리 그 짓을 해서 삼십여 통이나 되는 잼을 만들어냈건만 이상하게 그 일은 지치지가 않았다. 노력 끝에 나눌 사람이 생겼다는 보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소모적인 일과 생산적인 노동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나의 잼 만들기를 감히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풀 뽑기의 고달픔을 자위한다.

엄마도 나누는 기쁨 때문에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감나무에 약을 뿌리는 고생을 마다치 않으신다. 힘드니 그만 하시라고 입에 발린 말만 할 뿐 정작 채소에 물 한번 준 적 없다. 막상 각종 채소와 감을 나눠주면 잘 먹으면서…… 엄마에게 얼마 안 남은 기쁨이자 보람일텐데, 도와주지 못하면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라도 잘 해야겠다.

 

내 생애의 밑줄

142 한가할 때 말고도, 외출할 적엔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말끔하게 정돈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저녁에 잠들 때는 내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지저분한 집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또는 혹시 못 깨어났을 때는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것들, 늘어놓았던 것을 치우기도 하고 안 보이는 데다가 대강 틀어박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를 살고 난 흔적들을 마치 범죄자가 증거인멸 하듯이 깨끗이 없애고 나야 개운해서 잠이 온다.

 

143 옷이건 그릇이건 도구건 그것이 거기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갖고 있고 싶지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 불필요한 것들이 설사 값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쟁여놓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내 집 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공간이건, 다락이나 광 속처럼 눈에 안 띄는 공간이건 간에 썰렁하게 비워 놓고 싶다. 그러고 나면 답답하던 마음에 숨통이 트인다. ~ 비어 있거나 헐렁한 공간을 많이 확보하고 싶은 공간욕(空間慾) –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욕심은 욕심일 것이다.

 

146 딸들이나 손자들, 책을 좋아하는 친구나 이웃이 빌려달라면 서명이 있는 책이나 애장본이라도 아낌없이 빌려주고 안 돌려줘도 찾지 않는 게 나의 후한 책인심이었다. 빌려주고 안 돌아오는 책이 다시 보고 싶으면 사 보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도 책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니 책 인심이 박해서도 안 되지만 좋은 책은 팔아주는 게 동업자끼리의 의리라고 생각한다. 한 달에 평균 너덧 권씩의 책을 사고 몇십 권씩을 솎아내건만 책장은 늘 넘쳤다. 방바닥에 쌓아놓는 건 제목이 일목요연하지 않아서 싫고 어떡하든지 책장에 꽂자니 본의 아니게 침대에 맞춰 발을 자르는 못할 노릇도 책한테 저질렀다.

나의 책욕심과 비슷하다. 나도 책 사는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아서 책을 많이 사는 편인데, 가능하면 적정 권수를 유지하려고 한다. 적정 숫자를 넘기면 바자회 등에 기부해서 책이 넘쳐나지 않게 하고, 빌려준 책을 못 받아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숫자가 많아져서 요즘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다. 비슷하게 옷에도 욕심이 있는데 이상하게 옷은 잘 정리를 못한다. 가끔 한번씩 모아서 동생에게 주기는 하는데, 몇 년씩 안 입고 옷장에만 있는 옷도 잘 못 버린다. 이번에 이사할 때는 정말 정리해야겠다.

 

148 제목만 보고도 처음 읽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감동이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책은 못 버린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

 

148 나에게는 책 자체를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의 피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며느리들과 함께 당신들이 읽던 언문책만 빼고는 할아버지의 한적을 모조리 물에 불려 먹물을 빼고 절구에 찧어 가볍고 튼튼한 커다란 함지박을 만들면서 희희낙락하던 할머니의 피가 같이 섞여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건 그때 우리 집안 여인들이 특별히 난폭하거나 독창적이어서 책으로 그릇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일제가 농촌의 놋그릇을 모조리 빼앗아 가 그릇이 귀해졌을 때 한지를 불려서 묽게 쑨 풀과 함께 찧어서 그릇을 만드는 게 우리 고장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 다들 작은 그릇밖에 못 만들었는데 우리 집은 한서가 많아 큰 함지박을 만들 수 있는 걸 할머니는 몹시 흐뭇해하셨다.

이런걸 웃프다고 하는 거겠지. 손수 만드신 큰 함지박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다.

 

153 “나는 그대를 잊을 걸세.”

그는 사나이에게가 아니라 마음속에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사나이의 몸이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나직하지만 강한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내가 한 번 그 인생을 스쳐 가면 그 사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왜지?”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그때 창밖에서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는 군중의 고함 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다.

 

154 남들이 보던 책이니까, 특히 세계명작으로 알려진 책에서는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발견하는 수가 드물지 않았다. 남의 밑줄을 보는 게 당시 건방기 많은 소녀에게는 은밀한 쾌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 밑줄씩이나, 유치하긴, 하는 우월감까지 먼저 읽은 동무들에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얼마나 겁쟁이인가. 남이 나는 그렇게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밑줄 같은 건 절대로 안 칠 것 따위나 신조로 삼았으니.

나도 책에 줄을 거의 안 치는 편이다. 책을 깨끗하게 보고 싶어서 그러는 이유도 있고, 작가와 비슷한 이유도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의 우월감보다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문장과 부분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폐쇄성이라고 해야겠다.

 

155 그전에 갖게 된 신앙 때문에 그런 극한 상황에 매달릴 데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아무리 매달려도 잡히지 않는 게 하느님이었다. 이 고통이 무슨 뜻이냐고 피 토하게 외쳐도 대답 없는 게 신이었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그 문장을 만난 것이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심오한 뜻을 담아낸 명문어사여서가 아니라 검부락지라도 잡고 싶은 내 절박한 심정과 맞아덜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 이렇게 되기까지 소리 없이 나를 스쳐간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이 아니었을까.

 

156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야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

159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허술하게 입고 살 때였지만 배꼽을 내놓는 건 질색이었다. 아이들이 특히 계집애가 아무렇게나 뒹굴다가 낮잠을 잘 때 배꼽이 나와 있으면 어른들은 질색을 하고 배꼽만이라도 가려주었다. 배꼽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기가 나오는 데니까 그러려니 했다. 어른 아이 식구들끼리 배꼽에서 배꼽으로 이어진 연속성과 소속감은 정서적으로 여간 편안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야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니. 내쫓길 정도로 야단맞은 것도 아닌데도 뛰쳐나가 굴뚝 모퉁이 같은 데서 청승을 떨곤 했다.

 

162 그 다리에다가 낙타를 매 놓기 전의 다리 이름은 만부교였다고 한다. 낙타가 굶어 죽고 나서 사람들이 낙타교(駱駝橋) 또는 낙교라고 부르다가 낙타를 흔히 약대라고 부르는 속어를 따르다 보니 야다리가 된 거였다. 사신을 꾸짖어 귀양 보낸 건 국가의 위신을 위해 잘한 짓이었다 해도 말 못하는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고 굶겨 죽이기까지 했을까. 하긴 건조하고 광활한 땅에 살던 짐승을 이 비옥하고 아담한 땅에서 기르기도 난감했을 터. 다리 이름을 고쳐 부르기까지 한 걸 보면 말 못하는 짐승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느껴진다.

 

구형 예찬(球型禮讚)

164 이 나이에도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나는 내가 축구에 열광할 수 있으리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내 말이. 아직 사십대이긴 하지만 이 나이에도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내가 달리기를 하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꿈에서도 한번 달려본 적이 없었으니, 꿈에도 몰랐다.

 

166 어떻게 저런 춤을 출 수 있을까. 그 기쁨, 그 신명, 그 자유, 그 가벼움은 현재 진행형이면서도 그들 핏줄의 먼 근원으로부터 샘솟는 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저런 나라는 도대체 어디 붙었을까. ~ 저런 신선한 에너지와 신명을 분출시킨 땅이 어디 붙었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내 눈으로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붙은 그 나라를 확인했다. 비로소 세네갈이 내 의식 속의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여태까지의 내 골통 속의 세계지도는 얼마나 단순 무지몽매했던가.

 

167 나처럼 평생을 빨갱이 콤플렉스에 짓눌려 산 세대에게는 붉은색을 단지 역동적이고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기쁨의 색일 뿐이라고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마치 신인류의 등장처럼이나 눈부셨다. 붉은색은 떠오르는 태양도, 젊은 피도, 노을도, 장미도, 봉숭아도 취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진한 원색일 뿐이라는, 태곳적부터 있어온 사실이 왜 그렇게 놀랍고 신선했던지.

 

169 붉은 악마들은 우리 세대의 이런 고질적이고도 황당한 빨간 빛깔과의 악연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들은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런 선입관도 없이 곧이곧대로 빨간 빛깔을 다만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눈에 잘 띄는 빛깔로 느꼈고 그 색채효과를 충분히 활용해 역동적인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일체감을 뜨겁게 달구고, 기쁨을 만끽했다.

 

170 그때 황선홍 선수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피를 보자 내 본색이 드러났다. 나는 비겁한 데가 있는 인간이다. 더 이상의 혈투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력투구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슬쩍 발을 빼고 뒤로 물러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저렇게까지 해서 꼭 이겨야 될까. 계속해서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는 붉은 악마도 너무 잔인해 보였다. ~ 나는 TV를 껐다.

이것도 나와 매우 비슷하다. 나도 결정적인 순간에 슬쩍 발을 빼고 뒤로 물러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걸까?

 

170 급한 원고가 있을 때도 전혀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건 나의 못 말리는 고약한 버릇이다. ~ 가장 불필요한 일을 하는 한가한 시간을 또 다른 긴박한 시간이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감정의 혼란과 시간관념에 착란이 왔다.

이것도 비슷. 이건 정말로 고약하고 나쁜 버릇이다. 여든까지 가기 전에 꼭 고치고 싶은 버릇 넘버 원이다.

 

174 16강에 들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다가 8강까지 갔으면 초과달성인데 4강까지 간다는 건 너무 넘치는 것 같아 불안했다.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자라는 듯할 때 편안한 게 나라는 인간의 그릇의 한계이다.

 

177 내가 아들을 잃은 건 88년 서울 올림픽 때였다. 내 아들의 죽음은 나라를 위해서도 공익을 위해서도 아닌 순전히 개 인적인 팔자소관이었건만도 내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잠겼을 때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는 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었는지,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것 같다.

사진 속의 작가는 대부분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활짝, 소탈하게 웃고 있다. 작가의 문체는 살짝 냉소적이긴 하지만 밝고 유머코드가 나랑 비슷해서 어둠이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전쟁의 고통이나 아들을 잃은 슬픔을 쓴 글을 읽으면 어찌 그 시간을 견뎌냈을까 싶다. 시간이라는 신의 힘에 더해 글쓰기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80 구형의 표면에선 아무 데나 자기가 선 자리가 중심이 된다. 만인이 중심일 수 잇는 조형물은 신의 상상력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 공 모양을 평면에 그려넣기 시작한 인간의 지혜 때문에 중심과 변방이 생긴 평면 지도를 보는 것보다 한결 지구촌이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2_책들의 오솔길

꿈이지만 현실, 진실이지만 거짓인 세계_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

185 엄마한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린 시절은 나의 일생 중 완벽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무서운 얘기도 많았지만 결국은 착한 사람이 이기고 못된 인간은 멸하거나 개과천선하게 돼 있었고, 동물이나 식물하고도 교감할 수 있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래서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엄마처럼 안전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아니 내쫓겨야 할 세계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덜 쓸쓸한 법이지_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191 요즘 나의 아침상은 새와의 겸상이다. ~ 입맛이 없는 날은 새가 날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릴 적도 있다. 기다릴 사람 없는 밥상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훨씬 덜 쓸쓸하다. ~ 나를 목메게 하는 건 진밥이 아니라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의 더께, 터무니없이 무거운 돌대가리와, 누추하고 육중한 몸으로 감히 창공의 자유를 꿈꾼 헛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시가 와서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 간과 만나니 나 같은 속물도 철학을 하게 만든다. 시의 힘이여 위대하도다.

새와의 겸상. 이 정도 감성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건가? 남 다른 감성도 특별한 경험도 큰 아픔도 없었던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갑자기 회의가 든다.

 

증손자 볼 나이, 지금도 엄마가 필요해_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193 이 나이에, 머지않아 증손자 볼 나이에도 지치거나 상처받아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이불 속에서 몸을 태아처럼 작고 불쌍하게 오그리고 엄마, 엄마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서럽고도 서럽게 엄마를 찾아 훌쩍인다면 누가 믿을까.

정말 안 믿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너무 일찍 독립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엄마가 서운해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194 내 시름에 겨워 엄마,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 끝도 없이 옛날 생각이 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부르면서 마음이 훈훈하게 젖어오면 오그렸던 몸이 펴진다.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은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젖줄이다.

 

195 우리 엄마도 ~ 자식들이 밥 먹고 살만해진 후에도 자식들에 대한 안부는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났다. “밥은 잘 먹는 게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감기가 들었다고? 억지로라도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 ~”

엄마들은 다 똑같은 가 보다. 잘 먹고 다닌다고, 내가 해먹기도 하고, 못 하는 건 사먹는 다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가 해주는 거랑 같냐며, 못 먹고 다닐까봐 걱정을 하신다. 살찔까 봐 일부로 덜 먹는 거지, 못 먹는 게 아닌데도 걱정이시다. 살을 좀 찌워야 걱정을 덜 하실까?

 

사람을 부르고 동행을 부추기는 제주도 흙길_서명숙 <놀멍 쉬멍 걸으명: 제주 걷기 여행>

199 서명숙과 그의 친구들이 제주에 낸 길은 그런 폭력적인 길이 아니라 사람을 부르고 동행을 부추기는 평화적이고 자유롭고 다정한 길이다. ~ 제주의 수많은 오름과 오름 사이를 잇는 길이요, 제주에만 남아 있는 원시와 문명이 남긴 명소를 잇는 길이요, 적대적이니 것으로 보이는 육지와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사이로 만드는 길이요, 마을도 농토도 다치지 않고 비켜가고 돌아가는 느려터진 길이다. 그리고 보나 마나 흙길일 것이다.

 

지도 밖의 땅그들은 왜 봉천으로 갔는가_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203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은 왜 아직도 계속되는 걸까. 애국이 뭐기에 인간애 없이 조국을 사랑한다고 날칠 수 있단 말인가. 어둠을 걷어내는 건 빛이고 빛은 앎일 터.

인간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204 상상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작가가 기울인 노고 속엔 사랑까지 포함돼 있다는 게 도처에서 느껴진다.

 

돈만 아는 세상, 괴짜 기인들을 만나다_정만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207 지금 우리는 단군 이래 최고로 잘살 뿐 아니라 지구상의 많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동안 한눈 한 번 안 팔고 오로지 돈만을 신봉해온 결과다. 잘살건만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불안하고 답답하고 자꾸만 초라해지는 건 무슨 까닭인가.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가가 이 글을 썼을 때보다 지금은 더하다. 양극화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208 아아, 분단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얼마나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인가. 과거에다가 만약을 붙여 가정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은 없는 줄 아나 이 돈만 아는 세상을 살기가 하도 편치 못하여 해보는 소리이다.

 

겸손한 서향이 가슴에 번지네_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210 이렇게 짜증을 다스리면서 내가 애장하고 있는 책 중에서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를 꺼내 여기저기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읽고 또 읽었다.

짜증이 가라앉으면서 내가 하필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게 기뻤고, 갈 수가 없어서 원망스럽기만 하던 고향 땅조차 최순우의 고향이기도 하여 자랑스러웠다.

 

212 그때 비둘기 두 마리가 후원에 날아와 구구거렸다. 네가 바로 성북동 비둘기로구나. 무명의 비둘기가 김광섭 시인으로 하여 이름을 얻었다.

나는 새가 싫다. 특히 떼로 몰려 있는 비둘기를 보면 무서워서 얼어붙거나, 피한다. 비둘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시인, 그 이름을 알아봐주고 불러주는 소설가. 역시 글쟁이로 사는 이유가 있다.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_<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애송시 100>

214 시집 표지가 이렇게 예쁘거나 야해도 되는 걸까, 고독하고 높은 정신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놓아도 되는 걸까, 그런 염려도 되었지만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 데나 읽어도 내 정신도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다시 읽어도 거듭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건 좋은 시만이 줄 수 있는 큰 복인 것 같다.

 

215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글을 쓰는 초반에는 걷거나 달릴 때 글감이나 표현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이제 시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

 

216 시는 낡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다고 한물가는 시는 시가 아닐 것이다.

 

맛있고 몸에 좋은 것만 찾는 세상이 얄밉다_공선옥 <행복한 만찬>

218 우리 흙이 어떤 흙인가. 우리 삶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고 소박했을 땐 흉년도 잦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을 때도 우리 산야는 도처에서 먹을거리를 키워내서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예로부터 구황(救荒) 음식이라 일컬어 온 이런 것들은 혀에 달지 않다. 오히려 쓰거나 떫지만 속 맛은 깊고 달고 살찌는 양분 대신 강단을 키워준다.

 

219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도 그 생애는 한 권의 소설책이듯이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은 푸성귀나 푸성귀에도 못 미치는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까지도 동화 같은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주고 있다.

 

219 행복한 성장을 한 먹을거리들은 먹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먹을거리득의 생장 조건은 갈수록 불행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먹고 살아도 우린 정말 괜찮을까? 먹을 것들의 불행한 생장조건이 불안하다면, 맛있는 것과 몸에 좋은 것만 찾는 습관을 버릴 일이다. ~ (그의 서문에서)

100퍼센트 동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담 밖 세상을 눈뜨게 해준 스승_이청준 <별을 보여드립니다>

224 그가 먼저 간 문단이 이렇게 크게 쓸쓸할 줄이야. 스승이 먼저 간 것은 순리일 수 있겠으나 나이로 치면 순서를 어겼으니 살아남은 늙은이를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지루한 여름날을 넘기는 법_조나 레러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26 물론 내 머릿속에도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나만의 기억들이 있다. 그걸 무심히 발설했다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절대로 그건 아니라고 머리 좋은 동생이 박박 우기는 일에 부딪혔다. 아니면 그만이라고 넘겨도 될 텐데 그렇게 쉽게 양보가 되지 않았다. 왜냐햐면 유년기의 그 기억은 내가 우리고 우려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소설가로서의 나의 소중한 밑천이기 때문이다. 요새 자주자주 부딪히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해 스스로 마련한 대답도 나는 기억의 덩어리일 뿐이다인데, 수없이 가지치기를 한 원체험이 없었던 일이라면 그럼 내 소설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한 것인가. 혹시 나는 치매가 아닐까.

 

죽기 전, 완벽하게 정직한 삶 살고 싶다_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29 아니 이건 솜씨로 된 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시가 와서 당신은 그냥 받아쓰기만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꾸밈없이 자연스러웠다.

 

230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얼핏얼핏 들은 것 같은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당신이 어머니를 닮아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꿈속에서 자주자주 어머니를 찾아 헤맨 얘기도 해주셨는데, <어머니> 라는 시에 그때 들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아무리 걸출한 여성에게도 어머니는 극복하고자 하나 극복되지 않는 악몽인 동시에 결국은 그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의지처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엄마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

 

231 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다음 세상에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대신 내가 십 년만 더 젊어질 수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긴 하다. 죽기 전에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그까짓 마당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나 혼자 먹고살 만큼의 농사를 짓고 살고 싶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세금 걱정도 안 하고 대통령이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살고 싶다. 신역(身役)이 고돼 몸보신 하고 싶으면 기르던 누렁이라도 잡아먹으며 살다가 어느 날 고요히 땅으로 스미고 싶다.

 

반 고흐의 손이기도 했다, 감자를 먹는 저 손정직한 노동을 한 저 손은_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34 어려서부터 좋은 그림과 접한다는 것은 요새 태어난 아이들의 큰 복이지만 그 애들이 떠드는 것은 나로서는 참기 힘들었다.

그림뿐이랴. 음악도 마찬가지다. 방학 때면 성인용 오페라 공연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나 할머니를 종종 본다. 어른들도 지루해서 잠이 들거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태리어로 된 오페라 공연에 초등학생을 데려오니 당연히 몸을 비틀고 떠들기 시작한다. 좋은 예술 콘텐츠를 접하는 것 만큼이나 공연장에서의 에티켓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할텐데떠드는 아이를 주의시키거나 데리고 나가는 부모를 본 적은 없다.

 

234 그러나 <감자 먹는 사람들> <베 짜는 사람들> 등 그가 파리로 가기 전, 누에넨 시절의 어두운 그림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가 칠한 어둠은 너무 무겁고 깊고 강렬했다. 한꺼번에 많은 미()를 본다는 건 원래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지만 고흐의 그림은 특히 더 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맥을 못 출 만큼 피로감이 유난히 오래갔는데, 그건 여독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정신한테 허약한 정신이 한바탕 휘둘리고 난 후유증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집에는 컵, 시계, 우산, 코스터 등 고흐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물건들이 많다. 특별히 고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 1위 답게 사은품이나 선물 등, 내 뜻과는 달리 나에게로 온 물건들이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고흐에게 물들었는지 유럽 여행 때 고흐가 살았던 프랑스의 아를즈나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 등을 일부러 방문했다. 나는 고흐 박물관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을 처음 봤다. 그러니까 내가 알던 고흐의 화려한 색채의 그림 – <별이 빛나는 밤>이나 <까페>, <해바라기> 은 프랑스로 이주한 후에 그린 그림들이었다.

반면 네델란드에서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우울해보였다. 고통까지는 아니었지만 피곤했던 것 같기는 하다. 오래 걸어서 힘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나도 그의 강력한 예술혼에 후달렸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35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고 그를 더 깊이 이해한 것처럼 느꼈고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날 돈 걱정이 떠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피할 수 없는 우울과, 자신의 그림이 후세에 남을 것이라 믿는 오만과, 살아서 유명해지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까지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 전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테오 같은 동생을 둔 고흐가 부러웠다.

 

235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에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236 이 책을 덮으면서 책 팔아 돈푼도 만지고 길에서 알아보고 사인해달라는 독자도 더러 생기게 되니, 내가 무슨 대가라도 된 양 자족하는 자신에 대해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대가십니다.

 

3_그리움을 위하여

천진한 얼굴을 가지신 아담한 노신사_김수환 추기경 선종

240 병환 중에도 남을 배려하기 얼마나 힘드실까. 이승에서 마지막 안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도 추기경님을 위하는 길인 것 같아 뵙기를 단념했다. 선종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때 뵐걸, 내 적극적이지 못한 성품에 대한 후회였다.

 

240 나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 치열했던 1980년대에 가톨릭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몇 번의 재수 끝에 1985년 영세를 받았다. 가톨릭에 대해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 그분이 계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 정의의 투사에게도 그분의 그늘이 필요했겠지만, 자유를 위해 피 한 방울 흘리기 싫었던 나처럼 소심한 비겁자에게도 그분의 그늘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이정도가 아닐까?

 

242 더욱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일어나셔서 어찌나 열렬하게 오랫동안 박수를 치시는지 연예인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과 다름이 없었다. ~

그러나 나는 누구도 어린이같이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지 못할 것이란 성경 구절이 생각나 저 어른이야말로 천당은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좀 무엄한 생각을 했었다.

 

신원(伸寃)의 문학_박경리 선생 추모

244 평소 유난히 손이 찬 저는 그날은 마음까지 시려서 차갑게 경직된 두 손으로 선생님의 따순 손을 마냥 조물락거렸습니다. 제 언 손을 녹이고자였습니다. 그리고 따님에게 위로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이렇게 손이 더운데 쉬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장담을 했지요. 실은 두려워서 떨리는 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는 선생님의 따순 손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245 선생님은 제가 원주에 갈 적마다 뭔가를 먹이지 못해 애타하셨고 돌아올 때는 선생님이 손수 가꾸신 걸 아낌없이 구메구메 싸주셨습니다. 김장이나 된장은 선생님을 믿고 아예 담그지 않았고, 일부러 감자 캘 때나 옥수수 익어갈 때를 맞춰가서 바리바리 얻어다가 자식들하고 나누기도 했지요.

 

246 제가 죽을 것처럼 힘들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세상을 안 볼 것처럼 자신 안에 꼭꼭 칩거해 있을 때 저를 반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건 <한국일보> 장명수 고문이었을 겁니다. 그 최초의 외출이 단구동 선생님 액이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무작정 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그렇게 시키셨겠지요. 손수 지으신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때 선생님이 지으신 따순 밥과 배추속댓국을 눈물범벅으로 아귀아귀 먹게 하신 선생님의 사랑인지 그 우격다짐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어버리면 사람도 아니지요. 대범한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보이신 따뜻한 속정에 저는 비로소 버림받고 헐벗은 채 친정으로 돌아온 딸처럼 마음 놓고 울었다 웃었다 술주정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다시 선생님이 제 등을 떠미시니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가 한결 수월해지더이다.

그러고보면 음식의 힘은 그냥 배부름을 주는 힘이 아니다.

 

248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249 선생님은 입으로 하는 직업적인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사실, 땅이 거저 이자를 붙여줍니까. 인간의 피땀과 등골을 있는 대로 빼먹어야 거기 합당한 이자를 붙여주는 게 땅 아니던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땅의 그런 느리고 인색한 보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까짓 땅기운을 아예 시멘트로 틀어막고 아파트를 지어 큰 이익을 남기게 되지 않았을까요.

 

251 돈으로 치면 몇 푼 안 되는 푸성귀를 얻기 위해 땅을 기던 선생님, 쌀 한 톨을 위해 부엌 바닥을 기던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정말 그렇더라. 봄부터 가을까지 엄마가 직접 키운 채소를 주셔서 몰랐는데, 마트에 가보니 모듬쌈 등의 채소가 너무 쌌다. 엄마의 노동력이 폄하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서 싸게 사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255 생각해보니 선생님과는 한 번도 허튼수작을 해본 적이 없네요. 농담 한 번 안 하고 이 풍진 세상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선생님이 가여워졌습니다. 이런 걸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연민이라 한다면 너무 외람될까요.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_박수근 화백 추모

260 내 식구뿐 아니라 화가들 식구의 밥줄까지 달려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조금씩 내 말문을 열게 했다. 화가들이 나에게 불평을 할 때도 박수근은 거기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이고 말수가 적어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261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양갓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장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거의 도취해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263 내가 기분이 언짢으면 함부로 빠꾸 받는다는 걸 알고 내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을 깔보고 한껏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하찮은 그들을 위해 나의 그 대단한 자존심을 팔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색을 내도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싹수없이 못되게 굴었나는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틈만 나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 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264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일하는 촌부(村婦) 그림이었다. 일제시대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자기의 그림이라고 했다. 내가 함부로 대한 간판장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 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바로 깨달았다니 그렇게 막된 사람은 아니었던 게다. 그저 단지 불행했을 뿐……

 

264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 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졌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장이와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으킨 내 심정을 축여오는 듯했다. 비로소 내가 막되어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 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266 그와 내가 한 직장에서 보낸 그해 겨울, 같이 퇴근하던 폐허의 서울에도 나목이 된 가로수는 서 있었다. 내 황폐한 마음엔 마냥 춥고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

이게 예술가의 감성인가 보다. 작가가 박수근 화가에게 느꼈을 감정을, 지금 나는 작가에게 느끼고 있다. 도대체 나의 감성은 얼마나 황폐한 건가.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내 생애의 밑줄이라는 제목 이지만, 다양한 소재와 시.공간으로 구성된 산문들이다. 산문집이 그렇듯이 1부 내에서 특별한 순서가 있는 건 아니다. 1부의 제목도 전체를 대표하는 제목은 아니고, 한 꼭지글의 제목이다.

    2책들의 오솔길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았다. 책을 읽고 느낌과 관련된 일화 등을 쓴 글이지만 저자 말로는 서평도 독후감도 아니고,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고 한다. 한 꼭지당 2~3 페이지 밖에 안 될 정도로 짧아서 읽기 쉽지만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3그리움을 위하여는 저자가 존경했던 인물들에 대한 추도글, 말 그대로 그리움을 적은 글이다.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작가, 박수근 화가 등 잘 알려져있지만 개인적으로 알기 어려운 인물들의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작가의 사랑을 잘 표현했다.

    조금은 다른 형식과 주제의 글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지만 작가의 기존 책들에 비해 완성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도 든다.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건 2부 때문인 것 같다. 2부를 빼고 1부에 있는 종류의 글을 더 쓰고 3부를 부록 같은 느낌으로 구성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부는 조금 보완해서 별도의 책으로 만들었어도 괜찮을 것 같다.

  2. 보완할 점

  3. 장점

    : 내가 겪지 않은, 겪고 싶지 않은, 그리고 어쩌면 절대 겪지 못할 일들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어찌 한 사람의 삶에 이런 많은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참담한 내용을 참담하지 않은 문체로, 그저 살다보니 겪을 일 정도로 담담하게 썼다. 아픔을 지나치게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옆에서 같이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썼다. ‘직접 말하지 않고 그리는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문체를 닮고 싶다.

  4. 내가 저자라면

    : 작가 생전에 나온 마지막 책이다. 내가 저자라면 여든의 나이에 글을 쓰고 책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이 들었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 나이에도 책을 그것도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은책을 쓸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천복이라고 믿는다. 나도 이런 천복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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