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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1일 20시 34분 등록

명상록(13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한자명 안돈(安敦).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두산백과)

 

노예에서 황제까지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기로 치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과 권위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명분에 있다. 건달은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정의를 위해 산다. 그래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듯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 철학이었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토스 같은 노예 출신도 있었고 세네카 같은 정치인도 있었으며,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로 만든 숨은 힘이었다.

 

따뜻한 침대를 버린 꼬마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121,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배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챙기느라 일평생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기념하려고 황제 로마 귀환 기념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 냈을 정도였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이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4)3번이나 지냈던 명문가였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 오는 기록에 따르면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단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렸다. 타고난 건강 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몸을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 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Apatheia)을 강조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가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시합과 마차 경기도 멀리했다.

 

이런 꼬마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들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뜻을 풀자면 정말 진국인 아이정도 될 듯싶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고 슬퍼 말라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의 선생에게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1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게 마련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갔다. 어려서부터 공직에 올라, 재무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순서로 출세 가도를 순조롭게 달렸다. 물론,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여겼던 듯하다. 이 점은 하드리아누스가 명문가의 딸과 그를 약혼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 다음의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누스를 지명하고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 안토니누스가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에서였다. 이로써 조금 해괴한 가족이 생겨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이 차가 열 살밖에 안 났다. 또한, 새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에 들어서 할아버지가 맺어 준 약혼을 깨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다.

 

가족의 모양새는 해외 토픽 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대단히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될 만한 사건이 없었던 탓이란다. 사람들은 그를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도 충실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이렇게 아들을 위로했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뒤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이 닥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런 스토아 철학의 이념에서 나왔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가 그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숱한 사회 문제가 생겨났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빵과 서커스를 베풀어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위태롭기 그지없는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162,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파르티아(고대 이란의 왕국)가 침략해 왔다.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든 것이다. 곳곳에 페스트가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 갔다. 큰 홍수가 거듭 일어나기도 했다. 166년에는 게르만족이 제국의 방어선인 도나우 강을 돌파했고, 169년에는 무어인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전쟁 가운데에서도 과연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와 전쟁터에서 쓰인 것이다. 이 책에는 나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잔인하고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법이 중요하면 다른 법도 중요하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 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선 바자회라 할 만한 것을 열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에서 쓰던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 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를 부하 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얽힌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웠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지닌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검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이 존엄하다는 사실도 당연하다.

 

로마가 내세웠던 세계 시민주의는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이성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법칙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이성에 따르는 것인 만큼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복이 곧 약탈과 파괴로 이어졌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하려 했다. 로마의 대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용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잃지 않은 담대함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180, 평생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고단한 황제에게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럽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게르만족이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국경을 넘어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는 정책을 꾸준히 펼쳤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도록 도나우 방어선 너머까지 영토를 넓히는 최후의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우주적 이성은 황제의 뜻을 알아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 ······ 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 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뒤,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두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코모두스의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에 의해 출발한 사상이다. 원래 스토아 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었듯, 스토아 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 이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 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철학적 반성을 거듭하는 성숙한 개인이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아우렐리우스의 생애는 좋은 생활과 지도자의 품성을 어떻게 일궈야 할지 일러주는 삶의 멘토라 할 만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섭리를 따르는 삶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2017.02.17., 어크로스)

 

 

천병희 옮긴이 (1939~ )

 

1939,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단국대학교(명예교수)이며, 2011년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문을 수상하였고, 현재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명예교수이고 1981~2004 단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번역의 향연으로 초대된 계기

 

제가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교 2학년 때 장익봉 교수라고 있었습니다. 옛날에. 우리 세대는 알죠. 그분한테서 플라톤의 <향연> 그걸 그리스어 텍스트로 읽었어요. 학생 한 서른 명하고 장익봉 교수하고 함께 읽었는데, 그때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왜 이런 책들이 좀 많이 우리나라에 번역돼서 보급이 안 될까. 이런 생각도 해봤고. 또 독일 가서도 그리스 공부를 꾸준히 했어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필두로 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이런 걸 계속 읽었는데 그때 한번 번역해보고 싶다는 그 결심, 그런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늘 항상 마음에 갖고 있었죠. 그걸 실행에 옮긴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번역의 가치와 즐거움

 

번역이 하는 일이 많죠. 우리가 볼 때 일본이 그렇게 급속하게 근대화될 수 있었던 것도 번역을 통해서라고 나는 생각하거든요. 일본은 거의 새로운 전공서적이든 다른 좋은 책들은 금방 번역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을 잘해 놓은 책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창작 이상으로요. 그래서 번역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번역은 번역대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그리고 번역의 즐거움이라면 처음에 그리스어 텍스트를 대하면 완전히 앞이 캄캄합니다. 영어나 독일어하고는 또 달라요. 굉장히 어렵죠. 근데 그걸 여러 가지 번역이나 주석 등으로 도움을 받아서 손질을 좀 하면 괜찮은 번역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내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때 어떤 희열 같은 걸 느끼죠.

 

원전 번역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원전 번역이 아닌 중역일 경우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그 번역을 어느 누구도 100% 완전하게 번역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까이 번역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원래의 뜻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표현해 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중역일 경우에는 그 잘못된 것, 애매한 것들이 그대로 넘어오잖아요. 우리말로. 그러니까 독자들께는 이중의 부담이 되고. 아무리 좋은 영역본, 독일어 번역이나 불어 번역이 있다 해도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제대로만 번역되면, 우리말로 된 번역이 훨씬 빨리 들어오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표현의 아름다움도 우리말로 해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원전 번역을 해야 되고 또 원전 번역이 없는 나라하고 있는 나라하고 유럽에서도 그 문화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겠죠. 플라톤 전집이 영어로는 다 돼 있죠. 독일어로도 돼 있고. 그게 다 안 된 나라도 있을 거예요. 유럽이라도. 그거는 좀 선진국이라고 하기가 어렵겠죠.

 

그리스 고전을 쉽게 번역한 사람으로 기억되고파

 

내 책, 번역서가 먼 훗날에도 읽힐지 그건 모르지만, 만일 읽힌다면 어려운 그리스 로마 고전을 쉬운 우리말로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정도로 기억되고 싶고요. 고전의 총서 중에서 하버드 대학에서 나온 'loeb classical library'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데 2006년도인가에 500권을 돌파했습니다. 미국이 500권 갖고 있는데 우리는 100권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중에 한 30권 남짓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후배들이 이제 그 나머지 한 60여 권을 국비지원을 받아서, 개인이 하기도 사실 어렵거든요. 우리나라 교육부에서도 조금 신경 써서 한 100권 정도의 그리스 로마 우리말 고전 번역을 완성해 줬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이 자리를 빌려서 하고 싶습니다.

 

발췌 ; 번역가 천병희의 서재- 천병희의 서재는 작업장이다 (지식인의 서재)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철인 황제의 셀프 리더십 옮긴이 서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이자 5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스토아 철학자였다. (5)

대단하다. 로마시대 사람의 글을 몇 천 년 후의 사람인 내가 읽고 있다는 걸 생각이나 했을까. 창선배님의 책을 읽고 필사해서인지 낯설지가 않다.

5현제의 시대에는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주위에서 지켜본 유망주 가운데 가장 유능해 보이는 인물을 양아들로 입양해 황제의 후계자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6)

그가 친자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로마인에게 내려진 가장 극악한 저주로 불리는 폭군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콤모두스의 폭정으로 로마가 매우 불행한 시대로 진입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을 것이다. (8)

앞에 친자가 아닌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입양해 후계자를 세웠다고 했는데 왜 친자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바꿨는지 궁금하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긴 자식이 부모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도 몰랐겠지.

 

문학과 철학의 걸작 [명상록]

그가 자신만을 향하여, 자신만을 위하여 메모해둔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며 읽어야 할 부분이다. (10)

[명상록]1권은 나머지 권들과 달리 일관성 있게 기술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따로 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1)

그럼 이 책은 그 1권이겠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리스어로 [명상록]을 썼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세기까지 우리나라의 이름난 학자들도 외국어인 한문으로 글을 쓰지 않았던가! (13)

 

인간 중심의 사상,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학파는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주장한 까닭에 사회의 지배계층과 다른 학파, 이를테면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한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의해 매도되기도 했다. (14)

스토아 철학은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사회 개혁이 아닌 개인의 자아 완성으로, 또 개인의 자아 완성은 도덕적 수양으로 한정하고 있다. (15)

스토아 학파의 목표는 자연과 일치된 삶으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16)

 

나의 어머니 덕분에 나는 경건과 선심과 나쁜 짓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도 삼가는 마음과, 나아가 부자들의 생활 태도를 멀리하는 검소한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21)

생활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네. 뒤의 주기를 보니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 남편과 일찍 사별한 것이다.

루스티쿠스 덕분에 나는 내 성격을 개선하고 손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소피스트들을 흉내내는 데 열을 올리지 않고, 공허한 주제에 관하여 글을 쓰지 않고, 훈계하는 말을 하지 않고, 금욕가나 박애주의자인 척하지 않고, 수사학과 시학과 교묘한 말을 멀리하고, 성장을 하고 집 안을 산책하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 않고, 그가 시누엣사에서 나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처럼 단순한 문체로 편지를 쓰고, 나를 화나게 하고 모욕한 자들과도 자신의 행동을 취소할 뜻을 보이기만 하면 당장 흔쾌히 화해하고, 책을 읽을 때는 정독을 하고, 피상적인 사고로 만족하지 않고, 수다쟁이들에게 서둘러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22)

이게 한 문장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도 놀랍다. 루스티쿠스가 누군지 궁금하다. 뒤의 주기를 보니 스토아 철학자다. 배운다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는 것이 가장 놀랍다. 그런데 왜 아들은 그렇게 못 키웠을까.

프론토 덕분에 나는 악의와 변덕과 위선이 폭군의 특징이라는 것과,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대체로 인정머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4)

귀족들이 인정머리 없는 것은 프론토 덕분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겪어보고 알게 된 것 아닐까.

소년들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셨다. (26)

양아버지에 대한 내용인데 이건 뭘 말하는 걸까. 아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인가? 뒤의 주기를 보니 맞네. 로마시대엔 지금과는 다른 성문화였다고 했다. 마지막에 그것 때문에 망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분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수사학이나 법률이나 관습이나 다른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시기심 없이 인정하고, 각자가 자기 특기에 맞는 명예를 얻도록 도와주시는 것이었다. (27)

나를 시험에 들게 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은 오직 신들의 은총 덕분이다. (29)

내가 수사학과 시문학과 다른 학문에서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내가 거기서 큰 재능을 보였더라면 거기에 매달렸을 테니까 말이다. (29)

내가 이런 생활을 하는데도 내 몸이 그토록 오래 견뎌준 것도, 베네딕타와 테오도토스를 건드리지 않고 나중에 연정에 빠졌다가 건강을 회복한 것도, ... 신들 덕분이다. (30)

노예였다고 하던데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왜 신들이 덕분일까 했는데 아마 남자 노예인가보다. 전쟁터에 오래 있었는데 건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30)

아내 덕분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아내가 고분고분한 게 왜 신들 덕분이지. 아내의 인격이 좋은 거지. 이때는 아내는 칭찬하는 게 아니었을까. 검소한 것을 가치에 둔 것은 아우렐리우스니까 그랬겠지. 로마가 궁정의 사치 때문에 망한 거라고 했다.

 

날이 새면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주제넘은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교만한 사람을, 음흉한 사람을, 시기심 많은 사람을, 붙임성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라고. (32)

창선배의 [명상록을 읽는 시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고 기억에 남는 누구나 사람은 힘들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두 줄 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해낸 창선배도 대단하다.

네가 불평하면서 죽지 않고 즐겁고 참되고 신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으려면 책에 대한 갈증을 버려라! (33)

뒤의 주기를 보고 그에 해당하는 다른 권들을 살펴봤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만물은 섭리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책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 같다. 그리고 이라는 것이 여기선 에 해당하는 것이다. 옮긴이 서문에 12권이라고 한 것이 12장인 것이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들을 미루어왔으며, 얼마나 자주 신들이 너에게 기회를 주었건만 네가 이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상기하라. (33)

예전엔 그랬을 수 있다. 이젠 신이 주신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네 모든 행동을 네 인생의 마지막 행동으로 간주한다면, 온갖 무목적성과 이성적 판단으로부터의 격정적 일탈과 위선 이기심과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 (34)

사람들이 흔히 그런 비교를 하듯, 테오프라스토스는 열 가지 과오들을 비교하면서 욕망으로 인한 과오가 분노로 인한 과오보다 더 무겁다고 철학자답게 말하고 있다. (35)

분노는 오히려 솔직하다. 분노가 없어지면 자연 해결된다. 하지만 욕망은 솔직하지 못할 수 있고, 쉽게 없어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본인의 욕망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할 수 있다.

신들은 인간에게 진정한 악에 빠지지 않을 능력을 주었다. 그 밖에 또 다른 악이 있다면, 거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도록 신들은 거기에도 미리 대비해두었을 것이다. (36)

신의 존재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고 인간사에 관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37)

이 부분은 마치 불교 같다.

네가 삼천 년을 산다 해도, 아니, 삼만 년을 산다 해도, 아무도 지금 살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삶을 잃지 않으며, 지금 잃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따라서 가장 긴 삶도 가장 짧은 삶과 결과는 마찬가지다. (38)

 

우리는 생명이 날마다 줄어들고 생명의 남은 부분은 점점 작아진다는 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살 경우 과연 우리의 사고력도 연전하여 능히 사물들을 이해하고 신에 관한 일들과 인간에 관한 일들을 고찰을 통하여 알 수 있을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41)

그 시대에도 노망이란 것이 있었구나. 하긴 시대만 다를 뿐 사람이니 당연한 거다.

네 생각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마라. 수다를 떨지 말고, 일을 많이 벌이지 마라. (45)

너는 똑바로 서야지, 똑바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45)

 

작은 불길은 자기에게 던져진 것들에 의해 꺼지겠지만, 환한 불길은 그것들을 금세 자기에게 동화시켜 집어삼키며 그것들로 인하여 더 높이 솟아오른다. (52)

사람들은 시골에서 해변에서 산속에서 자신을 위한 은신처를 찾는다. 너도 무엇보다 그런 것을 그리워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너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네 자신 속으로 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은신처는 없다. (52)

일상에서 벗어나야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고 느껴지기 때문 아닐까. 나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해 막연히 선망이 되고 있다.

사물들은 네 영혼을 장악하지 모사고 꼼짝없이 영혼 밖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불안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의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54)

마음의 평정을 바란다면 일을 적게 하라.” 하고 그는 말하고 있다. (60)

맞는 말이다. 요즘 직장 생활할 때보다 일정이 더 많다. 연구원 정규과정이 끝나면 덜 복잡하겠지만 일정이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우주가 너를 위하여 정해놓고 자아놓은 것이다. (61)

언젠가부터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우주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신이라고 여긴다.

무엇을 행하든 그에 대한 열성은 그 가치와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는 사소한 일들에 과도하게 몰두하지 않음으로써 싫증이 나서 그만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63)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모두 하루살이다. (64)

너는 시신을 짊어지고 다니는 작은 영혼일 뿐이다.” (66)

앞으로는 너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잊지 말고 다음의 원칙을 적용하라.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은 행운인 것이다.” (69)

난 행운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안 좋은 일을 겪고 나서 그 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아들의 학폭 경험이 아들에겐 예방주사가 됐고 나에겐 또 다른 경험의 자산으로 남았다. 그 당시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어떤 종류의 자연도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들에게 이롭지 않는 것을 결코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76)

자연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고다. 그러니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다. 현대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여긴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얼마나 오만한가.

네 마음은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80)

다른 사람이 내게 나쁜 짓을 한다고?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기질과 나름대로의 행동방식이 있다. (83)

생겨먹은 게 그렇다는 것,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 났다고 봐야겠지.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네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90)

무서운 말이다.

가식은 무서운 사기꾼이다. 그리고 네가 진지한 것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을 때 가장 현혹되기 쉽다. (92)

인간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이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94)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선한 것들이나 악한 것들로 판단한다면, 그때는 신들을 탓하거나 인간들을 적대시할 이유가 전혀 없으리라. (102)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니 당연하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어쩔 수 없는 거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소질과 본성에 맞는 것은 유익한 법이다. (103)

 

악이란 무엇인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라. (108)

내 사고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내 사고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너는 똑바로 서는 것이다. (108)

대화할 때는 말해지는 것의 표현에 유의하고, 추구할 때는 그 결과에 유의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노리는 목표가 무엇인지 즉시 알아야 하고, 저자의 경우에는 말해지는 것의 진의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109)

충분하지 못하다면, 나는 그것이 내 의무가 아닌 한,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그 일에서 물러서거나, 또는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하되, 내 지배적 이성에 힘입어 지금 이 순간 공동체의 이익에 적절하고 유익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109)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거기다 물러난다는 것도 쉽지 않더라. 난 잘해서라기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많고 단, 그것을 통해 보상을 원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하긴 이제 하고 싶다고 나서거나 시킨다고 다 하지 않는다. 거절 또한 책임임을 안다.

찌푸린 얼굴은 자연에 아주 어긋난다. 그것이 자주 반복되면 상냥한 얼굴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소멸되어 전혀 되살리 수 없게 된다. (114)

그래서 인상이 된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얼굴이 결국 자신이다.

네 안을 들여다보라. 네 안에는 선의 샘이 있고, 그 샘은 네가 늘 파내어야 늘 솟아오를 수 있다. (122)

네가 그 한계를 생각하고 상상력으로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지만 않는다면,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123)

행복하게 사는 데는 아주 적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125)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양 살아가되 흥분하지도 나태하지도 위선자가 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완전한 인격의 특징이다. (125)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볼수록 불교와 비슷하다.

 

네가 화가 나 폭발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129)

네게 가장 정당해 보이는 것을 말하되 늘 상냥하게 겸손하게 거짓 없이 말하라. (130)

쉽지 않은 일이다. 말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최대한 조용하고 예의를 갖춰서 해야 한다. 그래야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후회는 뭔가 유익한 것을 놓친 데 대한 일종의 자책이다. (131)

너의 생각을 바꿔 네 잘못을 시정해주는 자를 따르는 것이 의지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음을 명심하라. 네 충동과 네 판단과 또한 네 이성에 따라 행하여지는 행동은 네 행동이기 때문이다. (132)

유유부단하고 소신이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좋은 것을 수용하는 태도, 열린 자세라고 봐야 한다.

네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너는 오늘보다는 내일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34)

이 문구를 보니 내일 더 아름다워지려는 당신을 돕습니다.” 라는 변경연 연구원 모집 문구 일부가 생각난다.

겸손하게 받고, 흔쾌히 내어주라. (137)

네가 겪었고 겪게 될 온갖 어려움을 한꺼번에 떠올리지 말고, 그때그때 현재의 일과 관련하여 이번 일에서 참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보라. (138)

내가 상담을 해보니 많은 부모들이 지금의 문제에 앞으로 생기지도 않을 문제까지 한꺼번에 고민하더라. 그럴 때 전 절차를 알려주긴 하지만 그건 그걸 알면 더 불안하기 때문이지 그걸 지금 고민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할 것들에 대한 고민만 하고 만약 앞으로 다른 일들이 생겨난다면 그건 그때 고민하면 된다. 왜냐하면 미리 고민한다고 잘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막상 그때가 되면 고민했던 것과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동물의 소질에서 나는 정의와 상반된 미덕은 보지 못하지만, 쾌락과 상반된 미덕은 본다. 절제 말이다. (139)

현대사회는 더 이상 절제가 미덕이 아니다. 쾌락을 좇으라고 한다.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오히려 감정은 무뎌지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로마시대 황제라고 생각되지 않게 절제와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행동할 때 굼뜨지 말고, 대화할 때 뒤죽박죽 섞지 말고, 생각할 때 헤매지 마라. 다시 말해 네 영혼이 자신 안에만 갇혀 있거나 궤도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게 하고, 생활에서 너무 분주하지 마라. (144)

인간들은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니 가르치거나 아니면 참아라. (146)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자는 기만에 의하여 부정한 짓을 하는 한 불경죄를 짓는 것이다. (148)

죽음을 멸시하지 말고, 죽음을 기뻐하라. 죽음도 자연이 원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150)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죽음도 자연의 일부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무엇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151)

그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잘못을 저지른 자를 타일러라. 가능하지 않다면, 그런 경우를 위하여 관용이 네게 주어졌음을 명심하라. (153)

상담을 하다보면 관용이나 용서란 없더라. 처벌, 복수 이런 감정이 일을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가는데도 그걸 모른다. 당장의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

오늘 나는 모든 방해에서 벗어났다. 아니, 모든 방해를 내던져 버렸다. 왜냐하면 방해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판단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54)

모든 번뇌가 내 안에 있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 고요는 중심을 잡으면 생긴다.

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를 회고해보라. 이 시기의 변화도 모두 일종의 죽음이었다. (155)

이런 표현을 한다. 어제의 내가 죽고 오늘 난 다시 태어났다고. 변화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아우렐리우스도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겠지.

자연이 지금 너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라. 할 수 있는 한 활동하고, 누가 보아줄까 주위를 둘러보지 마라. (158)

외적 원인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동요하지 말고, 네 안에 있는 원인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정의롭게 대처하라. (159)

너는 누군가의 몰염치에 기분이 상할 때마다 세상에 몰염치한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즉시 자문해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163)

네가 그런 성격을 가진 자가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든, 네가 호의를 베풀되 아무 조건 없이 또는 네 행동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베풀었든, 잘못은 명백히 너에게 있다. (164)

볼수록 좋은 책이다. 남을 탓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남 잘못이 아니다. 나만 제대로 하면 된다. 남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잘 잘못을 내가 따질 필요가 없다. 창선배가 이 책을 읽고 이 책 한 권에 모든 삶의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 이유를 알겠고, 선배가 했던 말들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보인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태곳적부터 너에게 미리 정해져 온 것이다. 그리고 원인들의 연쇄는 태곳적부터 네 존재와 이 일의 발생을 함께 엮어놓았던 것이다. (167)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운명이다. 그렇게 느끼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신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누가 자신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또는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정의롭게 수행하고, 지금 자신에게 할당된 것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에 진심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171)

보편적 본성이 각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각자에게 유익하며, 보편적 본성이 가져다주는 바로 그 순간에 유익하다. (174)

주인에게서 달아나는 자는 도망자다. 그런데 법이 주인이니, 법을 어기는 자는 도망자다. (175)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은 전에도 일어났음을 늘 명심하라.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임을 명심하라. (176)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를 통해 배워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한다. 하지만 인간처럼 어리석은 동물이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단명은 만물에 공통된 것이다. (180)

남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도 되도록 너 자신에게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라. “이 사람은 무엇을 노리고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러나 너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너 자신부터 먼저 심문하라. (182)

이거 괜찮은 방법이다. 나에게 먼저 물어보라. 자문하라는 거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끊임없이 물어보는구나.

 

신 희극은 점점 인생을 모방하는 기교로 타락하고 말았지만 이들 작가들도 쓸 만한 말들을 남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186)

연극이 서구에서 차지하는 것은 우리보다 큰 것 같다. 분명 시대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고 희곡을 읽기 때문에 우리는 재미를 못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는 남이 베지만, 인간은 이웃을 미워하고 등을 돌림으로써 자신이 이웃과 자신을 분리한다. (186)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자기가 먼저 밀어낸다.

너는 이 두 가지 원칙을 한결같이 고수하도록 하라. 네 판단과 행동을 견지하는 것과 너를 방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너를 화나게 하는 자들에게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다. (187)

어떤 자연도 기술에 뒤지지 않는다.” 기술들은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188)

자연에서 모방했지만 이젠 그 이상이 되긴 했다.

네가 산란한 마음으로 좇고 피하는 대상들은 너에게 다가오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그것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것이고, 네가 좇거나 피하는 모습도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188)

인간의 내면은 그런 것이어야 하며,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신들에게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네 본성에 맞는 것을 행하고, 어떻게든 공동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사명을 받은 인간으로서 보편적 자연이 지금 너에게 시의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네게 무슨 불상사가 일어나겠는가? (189)

본성에 맞게 행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동물적 본성이 아닌 이성적 본성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타고난 대로의 사주가 떠오른다. 음양오행의 원리도 그렇고 고대 로마의 철학이나 사주 명리학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영혼 안에 내재해 있다. 누군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190)

너도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너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191)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들의 행동보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더 괴로운 것인지 생각해보라. (193)

너는 빈정대거나 나무라는 말투가 아니라 마음에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다정하게 지적해주되, 학생을 훈계하듯 하거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감탄 받으려 하지 말고, 옆에 다른 사람들이 있더라도 단 둘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193)

~ 이렇게 한다면 다들 좋아하겠다. 성인의 수준 아닐까.

슬픔이 허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허약함의 표시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상처 받고 항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의견을, 아이들을 놀라게 하는 도깨비인 라미아라고 부르곤 했다. (196)

너는 노예로 태어났으니, 이성(logos)과는 상관없다. (197)

다른 책에선 언변이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이성보다는 언변이 더 나은 것 같다. 이성이야 인간이면 누구나 있는 것이니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육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가 옷이나 집이나 명망이나 그런 종류의 장식품이나 겉치레로 시간을 낭비하게 되겠는가? (201)

어째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도 자신에 관해서는 남들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덜 평가하는지 나는 가끔 의아했다. (202)

신이 칭찬하게 될 것만 행하고 신이 할당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인간은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있는가! (204)

신이 할당하는 것이 꼭 즐겁고 기쁘고 좋은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을 준다고 한다. 그 시련을 통해 단련시키고 성장시키기도 하니까.

적절치 않으면 행하지 말고, 진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마라. 네 욕구는 너에게 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6)

첫째, 목적 없이 무턱대고 행동하지 마라. 둘째, 공동체에 유익한 것만을 네 행동 목표로 삼아라. (206)

보편적 자연의 부분들이 변함으로써 우주 전체가 늘 젊음과 전성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207)

우주 만물이 순환하고 그렇기에 젊음과 전성기를 유지한다는 것이겠지. 현대에 와서는 우주와 자연을 정복하거나 알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조화를 이루기보다 깨뜨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간다면 지구는 머지않아 없어진다.

공통된 실체는 개별적 특징을 가진 무수히 많은 개체들로 나뉘지만 하나뿐이다. (210)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너의 인생에서는 3막이 연극 전체인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전에는 너의 구성에, 지금은 너의 해체에 책임이 있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212)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목차에 대한 건 따로 논할 것이 없다. 숫자뿐이어서 그 내용을 짐작할 수도 없다. 또한 그 분류를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다.

 

옮긴이가 권별로 앞부분의 내용으로 소제목을 달아도 좋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각 장의 주기가 뒤에 실려 있는데, 찾아보기 어렵다. 차라리 밑에 주석으로 처리했으면 나았겠다.

주석도 좋지만 원문에 원래의 언어를 병기했으면 어땠을까 한다. 이성이라고 번역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고, 중간 중간 현대어로 번역된 것들이다 보니 지금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3. 이 책의 장점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책이다. 철학서다. 삶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꺼내보면 좋겠다.

고대 철학, 스토아 학파에 관심이 생긴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내 인생의 책들에서 필사한 부분들을 모아 출판해도 좋겠다. 내가 이럴 때, 힘들 때 책의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는 식이면 어떨까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명언집 같은 책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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