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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1일 20시 56분 등록
I. 저자에 대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 《명상록》을 남겼다. 당시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페스트의 유행으로 제국이 피폐하여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출생-사망
121.4.26 ~ 180.3.17

국적/왕조
로마제국

재위기간
161년~180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마르쿠스는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모부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가 '아우렐리우스'라는 가족의 성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또 이 입양이 계기가 되어 그는 나중에 황제의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마르쿠스는 어린 시절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1)의 총애를 받는다.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에게 '진실된 아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로 그를 아꼈다.

마르쿠스는 전승에 의하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아이로 묘사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수사학과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다. 학자적 소질로 가득 찬 마르쿠스는 그러나 학자가 아니라 황제가 된다. 재위 기간 그가 주로 수행했던, 정확히 말해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활동은 그의 성격 그리고 그의 이전 경험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 후 59세에 전쟁 막사에서 죽을 때까지 이민족의 국경 침범을 막기 위한 원정 전쟁을 직접 수행해야만 했다.

마르쿠스의 19년간의 황제 자리는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의 첫 번째 파고를 막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이 노력은 로마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리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그는 당시의 로마인들에 의해 '현제(賢帝)'로 인정받았다


노예에서 황제까지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기로 치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과 권위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명분에 있다. 건달은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정의를 위해 산다. 그래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듯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 철학이었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토스1) 같은 노예 출신도 있었고 세네카2) 같은 정치인도 있었으며,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로 만든 숨은 힘이었다.


따뜻한 침대를 버린 꼬마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3) 황제의 지배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챙기느라 일평생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기념하려고 ‘황제 로마 귀환 기념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 냈을 정도였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이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4)을 3번이나 지냈던 명문가였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 오는 기록에 따르면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단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렸다. 타고난 건강 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몸을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 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Apatheia)을 강조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가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시합과 마차 경기도 멀리했다.

이런 꼬마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들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뜻을 풀자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 될 듯싶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고 슬퍼 말라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의 선생에게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1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게 마련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갔다. 어려서부터 공직에 올라, 재무관5), 집정관, 호민관6), 원로원7) 의원 순서로 출세 가도를 순조롭게 달렸다. 물론,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여겼던 듯하다. 이 점은 하드리아누스가 명문가의 딸과 그를 약혼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 다음의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누스를 지명하고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단, 안토니누스가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에서였다. 이로써 조금 해괴한 가족이 생겨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이 차가 열 살밖에 안 났다. 또한, 새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에 들어서 할아버지가 맺어 준 약혼을 깨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다.

가족의 모양새는 해외 토픽 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대단히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될 만한 사건이 없었던 탓이란다. 사람들은 그를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도 충실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이렇게 아들을 위로했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뒤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이 닥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런 스토아 철학의 이념에서 나왔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가 그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8)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숱한 사회 문제가 생겨났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빵과 서커스9)를 베풀어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위태롭기 그지없는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162년,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 파르티아(고대 이란의 왕국)가 침략해 왔다.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든 것이다. 곳곳에 페스트가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 갔다. 큰 홍수가 거듭 일어나기도 했다. 166년에는 게르만족10)이 제국의 방어선인 도나우 강을 돌파했고, 169년에는 무어인11)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전쟁 가운데에서도 과연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와 전쟁터에서 쓰인 것이다. 이 책에는 ‘나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잔인하고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법이 중요하면 다른 법도 중요하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 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선 바자회라 할 만한 것을 열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에서 쓰던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 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를 부하 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얽힌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웠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지닌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검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이 존엄하다는 사실도 당연하다.

로마가 내세웠던 세계 시민주의12)는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이성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법칙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사상13)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이성에 따르는 것인 만큼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복이 곧 약탈과 파괴로 이어졌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하려 했다. 로마의 대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용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잃지 않은 담대함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180년, 평생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고단한 황제에게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럽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게르만족이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국경을 넘어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는 정책을 꾸준히 펼쳤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도록 도나우 방어선 너머까지 영토를 넓히는 최후의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우주적 이성은 황제의 뜻을 알아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뒤,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두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코모두스의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14)에 의해 출발한 사상이다. 원래 스토아 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었듯, 스토아 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 이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 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철학적 반성을 거듭하는 성숙한 개인이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아우렐리우스의 생애는 좋은 생활과 지도자의 품성을 어떻게 일궈야 할지 일러주는 삶의 멘토라 할 만하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5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 아이를 키우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더욱 느낀다. 최고의 스승을 찾아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싵은게 공통의 부모마음이 아닐까 생각들었다.



P.6
오현제 시대에는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주위에서 지켜본 유망주 가운데 가장 유능해 보이는 인물을 양아들로 입양해 황제의 후계자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 상당히 현명한 제도라 생각한다. 진짜의 실력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 권모 술수가 난무해 결국 집권을 하는 구조라면 지금도 많은 면이 좋아질텐데 …



P.10
남에게 보이고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난관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깨우쳐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한, 개인의 치열한 고뇌와 사색의 결과물이기에 그렇다.(중략)
자기 정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글은 스스로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잡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여 온전한 나로 만들어준다.



P.22
문법학자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나는 남의 흠을 들추지 않게 되었다. 누가 야만적이거나 터무니없거나 불쾌한 표현을 쓰더라도 헐뜯거나 나무라지 않고, 대답이나 진술 또는 표현이 아니라 사태 자체를 공동으로 고찰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적절히 일깨워 줌으로써, 그가 사용했어야 할 올바른 표현을 재치 있게 일러주게 되었다.

프론토 덕분에 나는 악의와 변덕과 위선이 폭군의 특징이라는 것,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대체로 인정 머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라톤 학파 철학자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나는 누군가에게 “시간이 없소”라고 불필요하게 너무 자주 말하거나 그 말을 편지에 써서는 안 되며,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22~23
나와 형제간인 세베루스 덕분에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트라세아와 헬비디우스와 카토와 디온과 브루투스를 알게 되고, 동등한 법률이 적용되고 평등권과 언론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와 특히 피지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왕정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또 철학에 대하여 지속적이고 변치 않는 존경심을 갖고, 좋은 일을 하고, 언제나 후하고, 희망을 품고, 친구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세베루스는 질책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도 솔직했으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 지 친구들이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분명히 밝혔다.


P.23~24
막시무스 덕분에 나는 자제력을 갖게 되고, 어떤 일에도 동요 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특히 병이 들었을 때도 쾌활할 수 있었다. 그는 상냥함과 위엄을 겸비한 원만한 성격이었고, 맡은 일을 아무 불평 없이 해냈다.
2) 모두 그가 말한 것은 그가 생각한 것이며, 그가 행한 것은 악 의 없이 행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서두르거나 주저하거나, 어쩔 줄 몰라 쩔쩔 매거나 낙담하거나, 억지웃음을 웃다가 다시 화를 내거나 의심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3) 그는 선행을 베풀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정직했다. 그는 올 바른 길을 가고 있다기보다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자신이 그에게 멸시당했다고 여기고 그보다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또 유머가 풍부하다. 


P.24
일하기를 좋아하셨다. 끈기가 있었고, 공익을 위해 무언가 제안하는 자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셨다. 단호하게 각자의 공적에 맞는 것을 나누어 주셨고, 언제 죄고 언제 늦춰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계셨고


P.27
오직 신들의 은총 덕분이다.


P.31
너는 지배적 이성을 더 이상 노예로도, 이기적인 충동에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로도 만들지 말고, 더는 현재의 운명을 불평하지도 다가올 운명을 슬퍼하지도 마라


P.32
혼이여, 너는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네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의 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

왜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가? 그럴 시간에 너 자신을 위하여 좋은 것을 더 배우고 우왕좌왕하기를 멈추어라.


P.33
남의 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유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혼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34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 하고 생각하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사람들 곁을 떠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닐지니, 신들이 너를 불행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신들이 인간사에 관심이 없다면, 신들이 없는 또는 섭리가 없는 우주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신들은 존재하고 신들은 인 간사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신들은 인간에게 진정한 악에 빠지지 않을 능력을 주었다. 그 밖에 또 다른 악이 있다면, 그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저마다의 능력에 달려 있도록 신들은 거기 에 도 미리 대비해두었을 것이다.


P.34~35
모든 것은 얼마나 빨리 사라져 버리는가! 우주에서는 육신이, 시간에서는 육신에 대한 기억이! 감각적인 모든 것, 특히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고통으로 겁주거나 허영으로 부풀어오르는 것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싸구려이고 경멸스럽고 더럽고 덧없고 죽어 있는 것인지 깨닫는 것은 우리 이성이 할 일이다. 판단과 목소리로 명성을 얻는 자 들이 실제로 어떤 자들인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이성이 할 일이다. 이성적 분석에 따라 죽음과 관련된 인 상을 모두 벗겨내고 죽음 자체를 살펴본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 용 외에 아무것도 아니 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역시 이성이 할 일이다. 자연의 작용을 두려워하는 자는 어린애 같은 사람이 다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에 유익 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일부분으로 신과 접 촉하며, 인간의 그 부분은 대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생각하는 것도 이성이 할 일이다. 


P.37~38
인간이 사는 시간은 한 순간이며, 그의 실체는 유동적이고 그의 지각은 불분명하다. 인간의 육신의 요소는 모두 썩게 되어 있고, 그의 혼은 하나의 소용돌이 이다. 인간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고,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불확실하다. 즉 육신의 모든 것은 강처럼 흘러가고, 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이다. 삶은 전쟁 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내면의 신성을 모욕과 피해에서 지켜주고 쾌락과 고통을 다스리게 하고, 계획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게 하고, 거짓과 위선을 멀리하게 하고, 남이 행하든 말든 거 매이지 않게 하고, 나아가 일어나거나 주어진 것을 마치 자신이 온 곳으로부터 온 것인 양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죽음을 모든 피조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 라고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 다린다. 그런데 개개의 구성 요소가 끊임없이 다른 요소로 바뀌는 것이 구성 요소 자체에 결코 무서운 일이 아니 라면, 사람들 은 왜 모든 구성 요소의 변화와 해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 그것은 자연에 따르는 것이며, 자연에 따르는 일은 나쁜 것 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P.39
우리는 생명이 날마다 줄어들고 생명의 남은 부분이 점점 적어 진다는 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산다고 할 때 과연 우 리의 사고력이 여전하여 능히 사물을 이해하고 신과 인간에 관 한 일을 고찰을 통해 알 수 있을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은 늙기 시작하면 호흡이나 소화, 상상력이나 충동 등의 능력에 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을 활용하고 자신의 의무를 정확히 인식하고 눈앞의 현상을 구분하고 스스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그 밖에 특히 잘 훈련된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쇠퇴한다. 그러므로 서둘러야 한 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질 뿐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죽기 전에 먼저 멈추기 때문이다


P.41
공동체의 이익과 연관이 없다면 남들을 생각하느라 네 여생을 허비하지 마라.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그렇게 할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고 노리는 걸까 등등과 같이 너 자신의 지배적인 이성을 가지고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생각함으로써 네가 해야 하는 다른 일들을 하 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P.42
지금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가장 선한 자들에 포함되고자 하 는 자야말로 자신 안에 깃든 신성과 긴밀히 교류함으로써 신들 의 사제이자 머슴이 된다. 그 신성은 인간을 쾌락에 물들지 않게 하고, 온갖 고통에 상처받지 않게 하고, 온갖 교만에서 지켜 주고, 온갖 수치스러운 짓에 무감각하게 한다. 그 신성은 또 그 가 어떤 정염에 나가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그를 가장 큰 싸움의 투사로 만들고, 그가 뼛속까지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과 자기 몫으로 할당된 일은 무엇이든 진심으로 반기 고, 공동체의 이익 때문에만 부득이할 때만 아주 드물게 남이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한다. 그는 오 직 자신이 할 일을 행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우주가 자기에게 할당한 일만을 줄곧 생각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최선을 다해 실현하고, 자신에게 할당된 일을 선하다고 믿는다. 각 자의 몫으로 할당된 운명은 우주 속으로 끌려들어 가면서 각자를 우주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P.43
너는 스스로 똑바로 서야 하지, 똑바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P.45
다른 것은 다 던져버리고 이 몇 가지만 간직하도록 하라. 무엇보다도 각자는 현재라는 짧은 순간을 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나머지 시간은 이미 살았거나 불확실하다. 따라서 각자가 사는 시간은 짧고, 각자가 살고 있는 대지의 구석은 좁다.


P.47
의사들이 갑작스러운 수술에 대비해 도구와 메스를 가까이 준비해 두듯이

P.47
이제 더는 헤매지 마라. 너는 네 작은 비망록도, 고대 로마인들과 헬라스인들의 행적도 노후에 읽겠다고 제쳐놓은 그들의 저술 발췌 본도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표를 항하여 서둘러라. 헛된 희망을 버리고, 자신이 염려된다면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너 자신을 돕도록 하라.


P.48
충동의 줄에 조종당하는 것은 들짐승이나 변태 성욕자들, 필라리스와 네로 같은 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P.49
너는 원하기만 하면 너 자신 속으로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


P.50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정리 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늘 그런 은둔의 기회를 마련해 자 신을 새롭게 하라. 네 원칙들은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당장 근심을 모두 쫓아주고 네가 돌아가야 할 것들에게로 아무 불만 없이 너를 보내줄 수 있도록 짧고 근원적 이어야 한다. 2) 너는 무엇이 불만인가? 인간의 사악함인가? 그렇다면 이성 적인 동물들은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고, 참는 것도 정의의 일 부이며, 본의 아니게 인간은 과오를 저지른다는 명제를 상기하라.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의심하고 미워하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P.52
나에게서 흙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어떤 흙에서 내게 주어진 부분이고, 물로 이루어진 부분은 다른 요소에서, 내가 쉬는 호흡은 어떤 원천에서, 따뜻하고 불로 이루어진 부분은 또 그 나름의 원천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적 능력도 틀림없어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 지적 능력은 배움과 지혜와 사유에서 올 것이다.



P.52
네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P.53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당하게 일어난다는 점을 명심하라. 자세 히 관찰해보면 너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 말은 그것이 순리에 맞을 뿐 아니라 정의에도 맞으며 공적에 따라 합 당하게 나눠주는 사람의 행동과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태까지 그랬듯이 유심히 살펴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자가 되고자 노력하며 행동하라. 매사에 선한 자가 되겠다는 이 원칙을 지켜라.

너를 모욕한 자가 판단하는 대로, 또는 네가 판단해주기를 누군 가 바라는 대로 사물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


P.53~54
다음 두 가지는 언제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입법 능력 이 있는 제왕다운 이성이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네게 일러주는 것만을 행하라 둘째, 너를 바로잡아주고 그릇된 의견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네 생각을 바꾸어라 생각을 때는 그것이 옳고 공동체의 이익에 이바지한다는 확신에 근거해야 한다. 반드시 그런 이유로 생각을 바꿔야 하지 그것이 즐겁고 명예로워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


P.54~55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이 지척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살 수 있는 동안 선한 자가 되라.

이웃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지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이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신의 마음에 들도록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나 만은 여가가 생기는가. 선한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의 나쁜 성격을 불러볼 것이 아니라, 이쪽 저쪽 돌아보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야 한다.


P.55~56
사후의 명성을 염려하는 자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모두 곧 죽고 그 다음 세대도 죽을 것이며,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에 대한 기억도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인간들에 의해 무엇이 이어지다가 완전히 꺼져버릴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다.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불멸하고, 따라서 너에 대한 기억까지 불멸한다고 한들, 그것01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은 자 에게 찬사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 사람에게도 부차적인 이익 외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후 세 사람의 평판에 매달림으로써 자연의 선물을 소홀히 하는 것 은 시의 적절하지 못하다.

아름다운 것은 어떤 종류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찬미는 아름다움을 이루는 성분이 아니다.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기 때문이 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것들, 이를테면 자연의 산물이나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법이나 진리나 선 의나 겸손만큼이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칭찬받는다고 아름다워지고, 비난 받는다고 흉해지겠는가? 에메랄드가 칭찬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지겠는가? 황금과 상아가 자줏빛 옷과 뤼라와 단검과 꽃송이와 어딘 나무는 또 어떤가? 


P.58
그림의 저쪽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이쪽을 보라. 너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지 마라. 너 자신을 단순화 하라. 누가 네게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렇다면 그는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건 잘된 일이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우주가 너를 위하여 정해 놓고 펼쳐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은 짧다. 신중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현재에서 무언가를 얻도록 하라. 정신을 맑게 하되 긴장하지 말라.
  • 이해는 가는데 참 쉽지 않은 말이다. 실천이 나를 살릴 것인데 왜 이리 깊이 들어오지는 않는 것일까?



P.60~61
우리가 열성을 쏟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가지뿐이다. 올바른 생각,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행동, 거짓을 모르는 말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필연적으로 친숙한 것으로, 우리와 같은 근원과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환영하는 심성이 곧 그것이다.


P.61
만물은 변화를 통하여 태동하고 있음을 언제나 지켜보라. 보편적 자연은 존재하는 것을 변화시켜 같은 종류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가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라.(중략)
너는 곳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단순하지 못하고, 담담하지도 못하고, 외부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까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지 못하다. 지혜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거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P.63
일어나는 모든 일은 봄철의 장미나 여름철의 과일처럼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들이다. 병과 죽음, 중상모략과 음모, 바보들을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


P.73
고매함, 자유, 소박함, 남에 대한 배려, 경건함이 더 즐거운 것 아닌지 고찰해보라. 지혜보다 더 즐거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이 매사에 얼마나 확실하고 원활한지 네가 마음속에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P.74
“지금 나는 내 혼을 어떤 목적에 쓰고 있는가?” 매사에 그렇게 자문해 보고 다음과 같이 또 자시에게 물어보라.
  • 지금 나의 혼은 성장과 배움, 확장에 있다. 제대로 배워보고 알아가자. 그리고 그렇게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자.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전승을 통해 확장하자. 타인을 위해 혼은 그런데 써야 하지 않을까. 그게 공동체를 위해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P.76
내 마음은 내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중략)
우리가 공동체를 위하여 태어났다는 것은 앞서 밝힌바 있다.
  • 참으로 무서운 말이기도 아름다운 말이기도 하다. 생각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P.77
혼만이 스스로 자신을 바꾸거나 움직이며,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외부에서 다가오는 사물을 그 판단에 따라 평가한다.


P.82
무엇이 너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는가? 만약 감각의 대상들이 쉬이 변하고 안정성이 없다면,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불확실하고 쉬이 오도 된다면, 가련한 혼 자체가 피의 증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라면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멸이 됐든 이주가 됐든 담담하게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겠는가? 신들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 사람들을 ‘참고 견디거나’ ‘멀리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가련한 육신과 호흡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며 너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라.
  •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결국 생명을 부여한 신을 생각해 보면 신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외에 나머지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같은 삶을 사는 공동체에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지금 살아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뿐인 것이지.



P.90
내 의도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누가 입증하고 깨우쳐주면 기꺼이 고칠 것이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진리 때문에 해를 입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기만과 무지에 집착하는 자는 해를 입는다.


P.95
현존하는 것을 보는 사람은 태곳적부터 일어난 모든 것과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을 본 것이다. 만물은 종류도 같고 형상도 같기 때문이다.


P.99
이 세상에서 단 한가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평생을 진리와 정의와 더불어 살아가며 거짓말쟁이들과 불의한 자들에게도 호의로써 대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싶으면 너와 함께 사는 자들의 장점을 생각하라. A의 활동성과 B의 겸손, C의 선심과 D의 또 다른 장점을, 우리와 함께 사는 자들의 성격에서 미덕의 본보기가 최대한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언제나 가까이 준비해 두고 있어야 한다.


P.105
똑바로 서라. 아니면 똑바로 세워져야만 할 테니까
  • 참 무서운 말이다. ‘생각하며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생각한 사람의 노예가 될 테니까’라고 했던 그 말과 왠지 모르게 맥이 통하는 느낌이다.



P.107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가?
  • 변화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변화는 항상 두려움을 앞에 내세운다. 그것을 뚫고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앞으로 가야 하는 나를 결정할 것이다.



P.108
넘어진 자들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다. 그들도 너와 동족이고 무지하여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르고, 너도 그들도 한결같이 얼마 뒤에는 죽데 되리라고 생각하면 그런 사랑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너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라. 그가 네 지배적 이성을 이전보다 더 열등하게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109
누가 너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즉시 그가 무엇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여겼기에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을 알고 나면 너는 그를 동정해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을 것이다. 너 자신도 좋음에 대하여 그와 똑같거나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네가 좋고 나쁨에 대한 그러한 의견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면, 잘못 본 자에게 관대해지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P.122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이 행동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내가 이 행동을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하고 자문해 보라. 잠시 후면 나는 죽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신과 동일한 법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게 어울리는 일이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아우렐리우스는 두가지. ‘신을 공경하는가?’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가?’를 항상 묻는다. 그가 어떤 사고에 의해서 결정을 내렸을지 추측이 된다.



P.144
더 우월한 존재들 사이에는 별들의 경우에서처럼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어떤 의미에서 유대가 존재한다. 이처럼 우월한 존재로 상승하는 것일수록 서로 떨어져 있는 것 사이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P.151
이들의 지배적 이성은 어떤 것이고, 이들이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이유에서 이들은 사랑하고 존경하는가? 너는 이들의 혼을 적나라한 상태로 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라. 이들이 자신들의 비난으로 해를 입히고 칭찬으로 이익을 준다고 믿는 다면 이 얼마나 큰 망상인가


P.152
우리의 호흡도 그와 같아서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한다.
  • 결국 나도 물, 먼지, 악취, 침전물…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나에서 결국은 자연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등바등 해도 결국은 우리는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



P.154~155
누군가의 몰염치한 행동에 기분이 상할 때마다 “세상에 몰염치한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하고 너 자신에게 즉시 물어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이 사람도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할 몰염치한 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악당이나 신의 없는 자나 잘못을 저지르는 다른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려라. 너는 이런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더 관대해질 것이다. “자연이 이런 잘못에 대하여 어떤 미덕을 주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지한 사람에게 일종의 해독제로서 온유함을 주었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또 다른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모든걸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삶은 항상 무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겸손한 자세가 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P.164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정의롭고 고상한 일을 남이 폄하한다고 해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P.184
여섯째, 몹시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면, 인생이 한 순간이며 잠시 뒤면 우리 모두 묻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 무척이나 허무한 일이지. 그렇지만 몹시 화가 날 때는 참아내기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화가 나는건 화가 나는 것 ^^


P.189
쓰기와 읽기를 먼저 배우기 전에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 인생은 더욱 그렇다.
  • 쓰기와 읽기를 배우더라도 남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쓰잘데기 없는 지적 허영심으로 남을 가르치려 말고 스스로를 가르치는 게 어쩌면 더 올바른 일일 것이다.



P.191
정의에 따라야만 너는 자유롭고 솔직하게 진리를 말하고, 법과 사물의 가치에 부합하는 일을 행할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사악함이나 너 자신의 판단이나 남의 말이나 너를 둘러싸고 자란 육신의 감각이 너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에서 영향을 받는 네 육신이 돌보게 하라.


P.196
적절하지 않으면 행하지 말고, 진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마라. 네 욕구는 너에게 달려 있다.


P.200
“너는 대체 어디서 신들을 보았기에, 또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기에 신들을 그토록 공경하는가?"라고 묻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 첫째, 신들은 맨눈으로도 보인다. 둘째, 나는 아직 내 혼을 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내 혼을 존중한다. 마찬가지로 신들의 경우에도, 나는 신들의 권능을 매번 경험함으로써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신들을 공경한다.

개별 사물의 전체적인 실체와 그 질료와 원인을 꿰뚫어보고, 온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인생의 구원이 달려 있다. 조그만 틈도 남지 않을 만큼 선행에 선행을 이어 붙임으로써 인생을 즐기는 것 말고 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III. 내가 저자라면

1.보완이 필요한 점
  1)아쉬웠던 부분
  • 주석을 책 밑부분에 넣어도 좋을 뻔 했다. 


  2)생각하게 된 부분
  • 한번에 읽어나갈 책이 아니었다. 두고 두고 천천히 읽어나갈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별 다를 바 없다. 


2. 이 책의 장점
  • 순서에 상관없이 어느곳을 펴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 점검해 보는데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3. 네이버 도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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