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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9일 04시 25분 등록

나에게 이 책은

 

저자는 2015년 봄에 사망했다. 나는 2016년 봄에 조직검사를 했고 그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결핵약 부작용으로도 그 난리였는데 혹 암이라면 항암치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힘들었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지만 많은 생각을 농축되게 한 1주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이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마음에 중국어로 된 책을 읽고 싶어 종로의 중국어 서점을 들렀고 그 때 집은 것이 차생미완성(此生未完成)’이라는 책이었다. 마윈을 비롯한 성공한 사람들의 책 가운데 그 책이 놓여 있었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상해 푸단대 최연소 교수가 된 위지안의 항암일지였다. 서른에 이미 정점에 오른 그녀는 말기암 선고를 받는다. 사랑하는 남편과 막 돌이 지난 아들을 두고.

 

위지안.jpg

(병상에서 항암일지를 쓰던 위지안, 영면하세요.)

작년은 필사를 했다면 올해는 하루 한 페이지씩 번역을 하고자 책상 위에 둔 첫 책이 바로 그 차생미완성(이번 생은 미완성)’이라는 책이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변경연 과정 마지막 책이다. 마치 릴레이 바톤터치 같은 우연이 놀랍다. 인생의 정점, 예기치 않게 닥친 죽음,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직 어린 자녀. 30대에 이른 죽음을 맞이했던 그들 앞에는 황무지가 아닌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p.230)’가 있었고 그들은 죽음 앞에서 진실을 써내려갔다. 루시의 말대로 미완성이야말로 그들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진실,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 요소’(p. 251)였던 것이다. 내가 부재하게 될 언젠가, 아이들이 나의 글로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라 이 두 책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폴 칼라니티 (출판사 리뷰 중 발췌)


문학, 철학, 의학을 넘나들며 삶의 의미를 묻다
체험과 사색, 감성과 지성을 결합한 유례없는 에세이

저자는 청소년기 문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주제에 매혹되었고, 문학은 삶의 의미를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인간의 정신은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스탠포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전공한다. 생리적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 존재인 인간을 탐구하면서 그는 결국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폴 칼라니티는 바로 그런 소명의식에서 전문 분야를 선택했다. “신경외과는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줄 것 같았다.” 이처럼 인문학적 통찰로부터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치명적인 뇌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온 저자의 삶은 의학이, 과학이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좋은 의사란 어떤 것인지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진다.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본문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저자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죽음을 선고받고 자신의 환자들이 처했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언제 죽을지 몰랐듯, 폐암 4기 진단이 나온 후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죽음을 강렬하게 자각하면서. 그는 사뮈엘 베케트의 대사를 되뇌인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죽음을 향해 육체가 무너져 가는 순간에도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확실한 희망이 있었다. 화학치료로 손끝이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자판을 누르며 폴 칼라니티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이렇게 편지를 남겼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내 마음 속 책갈피

 

19 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

 

20 루시와 나는 병원 침대에 함께 누웠다.

 

루시는 마치 대본이라도 읽듯 조용히 물었다. “진단이 바뀔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21 하지만 정밀검사의 가치는 찾아내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23 의과 대학원 학생에서 신경외과 교수로 가는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혹독한 수련 기간도 벌써 10년이 지났고, 이제 열다섯 달만 버티면 지겨운 레지던트 생활과 완전한 이별이었다.

 

서른여섯 살에 나는 정상에 올랐다. 드디어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였다. 길르앗에서 예리코까지, 그 너머 지중해까지. 이제 주말 휴가도 떠날 수 있다. 멋진 보트에 루시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서. 근무 일정이 수월해지고 삶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허리 통증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게 약속했던 모습의 남편이 될 수 있으리라.

 

기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어머님은 대장암이 원발암이었고, 폐로 전이가 되었다. 당시 기침이 심했고 여느 감기와는 다르다고 스스로 인지하신 덕에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S대 병원이었음에도 괜찮다며 대충 지나가려는 것을 어머님이 강력하게 검사를 요구했는데 결국 폐암이었다.

 

25 멋진 삶을 약속해놓고 엉뚱한 삶을 들이대니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대신 일주일간 집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겠다는 것이었다. 루시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26 당신의 걱정거리를 지난번처럼 우연히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외롭다고 얘기하면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잖아. 이대로는 안돼.

 

하지만 우리의 커리어는 바로 지금이 절정이었다. 많은 대학이 우리 부부를 함께 채용하고 싶어했다. 신경외과엔 나를, 내과엔 루시를. 우리는 레지던트 과정의 최대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이미 지겹도록 이야기한 부분 아니었나? 아내는 왜 하필 이런 때에 분통을 터뜨리는 걸까?

 

27 늘 바라던 함께하는 삶이 이렇게나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는데, 루시는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이렇게 어깃장을 놓으려는 건가?

 

그녀는 자기가 선택한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면 된다.

 

29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숨을 내쉬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경련이 일어나는 각 근육의 명칭을 속으로 불렀다. 척주세움근, 능형근, 활배근, 이상근……

 

30 환자들은 제각각의 고통을 제각각의 단어로 표현하며 호소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그 불운의 조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그런 조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암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의원에 내원하는 환자들도 여러 표현을 쓴다. 어르신들이 쓰는 우리하다가 무슨 말인지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의 표현이 있다. 나는 소양증으로 힘들 때 바께스에 담긴 작은 벌레들을 내 몸에 부어버린 것 같다고 표현했다.

 

31 충분한 잠, 휴식, 기분전환, 그러니까 바로 평범한 일상의 맛. 그러면 허리 통증과 피로도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리라.

 

32 내 주위의 삶과 나를 분리하고 있는 건 죽음을 논하는 책이 아니라 죽어가는 나 자신의 몸이었다.

 

33 루시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그 순간 우리 사이의 서먹한 거리는 사라졌다.

난 당신이 필요해.” 내가 속삭였다.

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루시가 말했다.

 

35 그 말과 함께 내가 꿈꿔왔으며 곧 실현되려던 미래, 그리고 오랜 세월 부단히 노력하며 도달하려 했던 삶의 정점은 사라지고 말았다.

 

1 나는 아주 건강하게 시작했다.

 

39 나는 집 바로 위의 사막 고원에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워 느긋하게 쉬는 중이었다.

집 근처가 사막이라니!

 

굳이 대답을 하라면 아마 작가라고 말했으리라.

 

나는 마치 탈출 속도에 다다라 기묘하고 흥미로운 우주로 뛰어들기 직전의, 윙윙거리는 전자 상태였고, 경력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오르는 일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의학이란 부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는 그 곳의 태양이나 저렴한 생활비(아들들을 전부 원하는 대학에 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아니면 심장병 전문의로 개업할 수 있는 기회에 이끌렸을 것이다.

 

41 아버지는 부성애도 농축해서 발휘할 수 있는 거라고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런 결과는 짧고 강렬한, 진심 어린 애정의 폭발이었다. 다른 아버지들은 어떻게 자식들을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만약 이것이 의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라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42 각각의 거미에는 엷은 색의 주머니가 하나씩 달려 강하게 고동치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무수한 블랙 위도 거미들이 주머니를 찢고 우르르 몰려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겁에 질려 쇠살대를 쾅 닫고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지역 속설(블랙 위도 거미에게 물리는 건 가장 치명적인 일이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자세, 검은빛 몸통의 붉은 모래 세계 무늬,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융이 검은 예복을 입은 남자를 보고 예수회 수도사라며 지레 벌벌 떨던 장면과 오버랩 된다.

 

43 ‘지역 속설은 내게 도시 전설의 시골 버전 같은 단어가 됐다.

 

45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도 남부에서 뉴욕으로 그야말로 세계를 가로 지르는 사랑의 도주를 했다.

 

47 그날 밤, 어머니는 침대에 홀로 누워 흐느껴 울었다. 빈약한 학교 제도가 자식들의 앞날을 가로막을까 봐 걱정한 어머니는 어딘가에서 입시용 도서목록을 구해왔다.

인도 엄마들 교육열도 대단하다던데.

 

나는 어머니의 강요로 열 살 때 <<1984>>를 읽었는데, 책에 나오는 성애 장면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지만 언어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

 

<<캉디드>>

캉디드도 변경연 과정 속의 책 읽으면서 제법 언급되는 책이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나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았고, 그 책을 대학 입학 논술 주제로 삼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48 어머니는 십 대들이 손대는 마약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열거하며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정작 내가 그 때까지 경험했던 가장 지독한 마약은 자신이 지난 주에 건네준 낭만시집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책은 잘 다듬어진 렌즈처럼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49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산맥도 이제 우리를 가로막는 벽이 될 수 없고 그 너머에 우리의 미래가 펼쳐져 있다는 분위기가 학교에 감돌았다.

 

넌 머리가 좋잖니. 그러니까 군대에 가야지.”

어차피 대학 못갈 건데 인문계 가서 들러리 할 필요 있니? 상고 가는 게 어때?라고 했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생각난다. 의사도 함부로 남은 수명이 3개월이네, 6개월이네 할 수 없는 판에 교육현장에 있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미래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어이 없는 일이다.

 

내가 스탠퍼드에, 리오가 예일에 입학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50 그녀는 몇 주 후면 내가 만날 새로운 세계, 그 은밀한 세계를 미리 귀띰해주는 전령과도 같았다.

 

51 하지만 정신은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그 소설이 넌지시 던지는 가설이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또한 생물학적인 유기체이기도 하다. 뇌 역시 하나의 생체기관인만큼 물리학 법칙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며, 뇌는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기관이다.

 

52 그리고 이미 표시해둔 문학 수업들 외에, 생물학과 신경과학 강의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에 더 끌리는 편이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뇌의 규칙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은 신경과학이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문학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인생의 무의미와 고독, 그리고 인간의 상호 유대감에 대한 절박한 추구를 이야기하는 T.S.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엘리엇의 은유가 내 말투에도 스며들게 되었다.

엘리엇의 <황무지>도 작년 읽은 책들에서 종종 언급되어 샀다. 원문과 번역본이 함께 있는데 내용은 난해하나 원문을 읽으면 독특한 울림이 있더라. 그래서 이해보다는 낭송, 암송을 통한 느낌을 간직해보기로 했다. 올 해 암송할 시집 목록에 올려놓았다.

 

53 나는 문학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추어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반성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가장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믿었다.

 

54 의미 자체의 자연적인 기원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의미를 연구할 것인 것 아니면 경험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캠프는 젊을 때 할 수 있는 목가적인 경험을 모두 선사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호수와 산과 사람들은 아름다웠고, 그곳에서 겪는 경험과 대화와 우정은 더없이 풍요로웠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거친 들판에 달빛이 흘러넘쳐 전등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55 그런 다음 차분히 앉아서 동쪽 지평선이 밝아오며 하늘이 푸른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천천히 지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붐한 하늘이 넓고 높이 퍼져나가다 첫 햇살이 나타났다. 저 멀리 타호 호수 남쪽의 도로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동쪽을 보면 환한 빛이 나를 향해 내리비치지만, 서쪽을 보면 도무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밤하늘이 버티고 있었다. 그 어떤 철학자도 낮과 밤 사이의 이 광경만큼 자연의 숭고함을 잘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56 나는 매일 삶의 활기를 느꼈고 의미 있는 인연을 맺었다.

 

나는 아이나 노인의 지혜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나의 순간, 하나의 정점이 있다. 쌓이고 쌓인 경험들이 삶의 세부사항들에 의해 마모되어버리는.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현명해지는 순간이다.

나탈리

 

57 나는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지 알기 위해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유기체들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데 뇌가 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 신경과학을 공부하면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소에서 일했다.

 

58 버지니아 울프가 아비시니아 왕족으로 분장하고 전함에 타는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기가 죽어 우리의 사소한 장난을 자랑하고 다니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접수처로 들어가자 서글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를 맞았다.

<그림자>의 이부영 교수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느낌을 적은 바 있다. 이런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글쓰기 재능 역시 주어졌고 의술, 인술, 저술이 함께 가능하게 되었다.

 

59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가족이 자주 방문하며 매일 오는 건 물론이거니와 하루에 두 번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하루 걸러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방문 횟수가 줄고, 시간이 더 지나면 환자의 생일과 성탄절에만 찾아온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대부분의 가족이 가능한 한 먼 곳으로 이사해버린다.

 

이 애들을 돌보는 건 힘든 일이니까.”

 

이 말을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힘들다? 물론 힘든 일은 맞다. 하지만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내팽개칠 수 있지?

 

60 그는 훌륭한 스승이었고, 과학과 도덕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래, 자네에게 좋은 경험이 됐군. 하지만 난 가끔 그 아이들이 죽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네.”

 

61 나중에 가서야 이 견학이 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로 나를 이끌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나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 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인간의 관계성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뇌와 신체 그 자체의 생리적인 명령에 따라 일어나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열정, 갈망, 사랑 등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언어가 신경 세포, 소화관, 심장박동의 언어와 연관되는 뭔가 복잡한 방식이 틀림없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62 리처드 로티

 

모든 학문 분야란 인간의 삶을 특정 방향으로 이해하는 일련의 도구,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나름의 고유한 도구들을 독자에게 쥐어주며 그 어휘를 사용하도록 이끈다.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나는 월트 휠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한 세기 전의 시인인 그는 나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고, 그가 생리적, 영적 인간이라고 부른 존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63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다수의 영문학 박사들이 과학을 대할 때, “불을 접하는 유인원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문학, 과학, 의학을 아우르고 의사이면서 환자의 관점도 갖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들은 목소리를 이렇게 말했다. “집어들고 읽으라.” 하지만 내가 들은 목소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책은 치우고 의학을 공부하라.”

융으로 치자면 제 2 인격의 소리인가. 그래서 성인이 펼쳐 든 성경구절 로마서 1312-14절은 다음과 같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64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65 가령 고등학교 여자 치어리더 팀이 숙박하려고 들어오면 나는 성범죄자로 찍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 텐트, , 시리얼 등을 챙겨서 타호 호수로 갔고, 돌아가도 괜찮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하여 도덕적인 견해를 세우려면 그 문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경험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66 이제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했다.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67 해부실의 상황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금기를 깨는데, 해부 도중 포름알데히드가 식욕을 강하게 자극해 부리또가 간절히 먹고 싶어지기도 한다.

 

시체 해부는 엄숙하고 경건한 학생들이 냉정하고 거만한 의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의술의 도덕적 사명이 막중하다고 생각하여 의과 대학원 초기 시절에는 아주 진지했다.

 

69 그는 천으로 덮인 시신의 머리 위에서 양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의학적인 가설과 전문용어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안면실인증은 얼굴을 인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신경 질환이다.’ 곧 나도 그 질환에 걸려 태연히 쇠톱을 손에 쥐고 있겠지.

 

70 …그래도 시신에게서 인간성이 갑자기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맡은 시체의 위를 절개하여 열었다가 채 소화되지 않은 모르핀 알약 두 정을 발견한 적이 있다. 생전에 그는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약병의 뚜껑을 더듬어 이 약을 꺼냈을 것이다.

모르핀 알약을 무심코 넘기는 사람들도 많았을 건데. 그 알약에서 시신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는 마음이란. 저자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인간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우선, 지금의 의대생들은 19세기처럼 스스로 시체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의과 대학들 역시 해부용 시체를 확보하기 위해 시체 도둑들을 지원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사실 시체 약탈은 살인보다는 훨씬 더 개선된 방식이었다. 한때 시체 장사를 위한 살인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그것을 뜻하는 ‘bruke’라는 동사가 생겨날 정도였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숨을 막히게 하거나 목을 졸라, 혹은 해부용 시체로 팔기 위해 은밀하게 살해하는 것.’

장기매매

 

71 ‘뼈 절단기

 

72 해부실에서 우리는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문자 그대로 장기, 조직, 신경, 근육으로만 바라보았다. 실습 첫날, 나는 시체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73 신체를 물질이자 구조로 보는 것과 인간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대로 시신과의 유대감을 잃지 않는다.

 

74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고, 그런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75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치명적인 부정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갑작스럽게 뭉클해진 루시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연습용 심전도가 누구의 것이든, 그 환자는 살아남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 페이지 위의 구불구불한 선들은 단순한 선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심실세동이 악화되어 결국 심장 수축이 멈출지도 모르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고,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녀의 공감능력과 감성.

 

셔윈 눌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How We Die)>> - 금붕어든 사람이든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 책처럼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논한 책은 거의 없을 것이다.

 

76 “울혈성 심부전이 서서히 진행 중이며, 오래된 피가 오래된 폐의 오래된 조직에서 가져 나오는 산소의 양이 현격하게 줄었음을보여주는 징후였다.

 

77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환자의 흉부를 절개하고 손으로 심장을 눌러 문자 그대로 생명을 꽉꽉 눌러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심폐 소생에 실패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끝까지 환자를 살리려는 영웅적인 책임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0 조산아들은 생존한다 해도 뇌출혈과 뇌성마비에 걸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내 형인 수만은 거의 30여 년 전 8주나 일찍 태어났지만 지금은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81 …해석하는 법을 알고 나면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지 참사가 일어날지 미리 알 수 있다.

 

82 마취과 의사가 환자에게 관을 삽입하는 동안 고참 외과의사인 담당의는 안절부절 못했다.

 

83 대기하던 신생아 중환자 전문의가 얼른 받아들고는 서둘러 신생아 중환자실로 데려갔다.

이 경우 호흡하나? 우나?

 

85 이제 세상에 태어났으니 산소가 폐로 들어가야 하지만 쌍둥이의 폐는 복잡한 팽창과 가스 전달, 즉 호흡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다 자라지 못한 폐처럼, 나 역시 환자의 생명을 책임질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87 인간의 뇌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출산을 위험한 일로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뇌 덕분에 산부인과, 심장진통계, 경막외 마취제, 응급 제왕절개술 같은 것들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해졌다.

 

88 나는 신으로부터 기쁨에 넘치는 새 약속을 받고 산꼭대기에서 돌아온 예언자가 된 기분이었다.

 

89 성냥불이 깜박이다가 꺼지고 말았다. 543호실 산모의 통곡, 아빠의 시뻘게진 눈꺼풀과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환희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 견딜 수 없고, 불공평하며, 예기치 않은 죽음……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단 말인가?

 

제왕절개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다면요?”

친구의 아기가 태변을 먹고 현재 자가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늦었지만 제왕절개를 했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제 와 그 이야기를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다.

 

90 어떻게 하면 의사다운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도덕적 명확성

 

91 보통 이 수술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길게는 아홉 시간 동안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움직여봤자 움츠리는 정도가 전부다.

 

너무 피곤해. 하느님 제발, 전이가 있게 해주세요.’

 

92 그녀는 수술실을 뛰쳐나왔고, 고해 신부가 필요하던 차에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해주었다.

 

의과 대학원 4학년이 되자 많은 동기들이 방사선과나 피부과 같은 덜 고된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자기중심주의가 의학의 본질에 상반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주장에 합리적인 면도 있다고 보았다.

 

93 그러나 원하는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아니,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분도 잘 들으세요. 서로를 위해 자기 자기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때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밤을 새우거나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죠?”

우와 이렇게 현실적으로 그러나 걱정과 배려를 담은 이야기를 의사에게 들을 수 있다면 보호자들도 한결 든든하겠다.

 

94 외과의는 다음 얘기로 넘어가, 예정된 수술, 예상되는 결과와 가능성, 지금 결정해야 하는 것들, 고려해야 하지만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는 사항, 아직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들을 설명했다.

따듯함이 담긴 경우의 수, 절차 설명

 

그래도 앞으로 닥쳐올 일과 마주할 준비는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창백하고 칙칙하고 멍해 보이던 그들의 얼굴이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모든 이가 언젠가는 마주치기 마련인, 삶과 죽음과 의미가 서로 교차하는 문제들은 대개 의학적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유기체이고, 물리법칙에 복종해야 하며 슬프게도 그 법칙에는 엔트로피의 증가도 포함되어 있다. 질병은 분자의 탈선에서 비롯된다. 삶의 기본적인 요건은 신진대사이며, 그것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95 모든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는 동안, 신경외과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빅터 프랭클

 

96 감정적, 과학적, 정신적 문제가 가득한 숲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활로를 개척하는 저 박식가들의 대열에 나도 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나를 도취시켰다.

 

97 앞으로 7년 동안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의학 드라마를 시청하던 입장에서 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게 될 터였다.

 

늘 왼손으로 식사하도록 하게. 양손을 다 잘 쓰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요.

국방부 시계처럼

 

98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이 서류들이 그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위험과 승리로 가득한 이야기들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파악력

 

며칠 뒤, 메슈는 병동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간호사들의 사탕을 몰래 빼가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날 밤, 나는 매슈의 끝없는 퇴원 서류를 즐거운 마음으로 작성했다.

이 메슈가 4년 후 140키로의 12살 아이가 되어 다시 입원한다. 가슴 아프다. 결국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민 끝에 내린 수술인데 결국 시상하부에 손상을 입었구나.

 

101 나는 그 장기들을 직접 만지고 세밀히 살피며 내가 그녀의 창자에 묶었던 매듭들을 확인했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102 “이건 불공평해요. 난 여태껏 술을 물에 타서 마셨는데.”

 

생전에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셈이었다.

 

103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옮기고 두개골에서 피를 빼내자 환자는 깨어나서 가족에게 말을 건넸고 머리에 절개 자국이 남았다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병원 안을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104 기량이 발전할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점점 더 커졌다. 어떤 환자를 구할 수 있고 구할 수 없는지, 또 구해서는 안 되는지 제대로 판단하려면 손에 넣기 어려운 예지력이 필요하다.

 

나는 실수도 했다. 한 환자를 수술실로 급히 데려갔지만 그의 뇌를 완전히 구해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환자의 심장은 뛰었지만, 그는 이제 말을 하지 못하고 튜브를 통해 음식을 먹었다.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105 나는 이것이 환자의 사망보다 더 지독한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 상태로 신진대사를 하는 이런 불완전한 생존 상태는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짐이 되어 대개는 시설로 보내진다. 감정적인 정리를 아직 하지 못한 가족이 환자를 찾아오는 발길은 점점 뜸해지고 환자는 결국 치명적인 욕창이나 폐렴에 걸리고 만다. 환자가 언젠가 눈을 뜨지 않겠냐며 연명치료를 고집하는 가족도 있지만, 많은 환자들이 그렇지 않기에, 아니 그렇게 될 수 없기에 신경외과의는 선고를 내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연말에 몸살로 주말에 꼬박 누워 있었는데 이틀 누웠는데도 허리가 너무 아프더라. 고작 이틀로도 이런데 오래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 욕창은 보통 일이 아니겠다 싶었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106 나는 결정적 순간에 환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순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많은 고통을 목격했고, 더 나쁘게도 그런 고통에 익숙해졌다.

 

107 “제프, 혈압이 불안정한 건 알지만 환자를 수술실로 데려가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이 환자는 워싱턴에서 아이다호로 가게 될 거야. 안정시킬 수 있겠어?”

서로에게만 통하는 이런 표현이 주는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데. 결국 제프는 자살한다.

 

108 그리고 30분 뒤, 우리는 그가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치료를 멈췄다. 이 정도의 두부외상이라면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다들 조용히 동의했다.

 

109 가족이 사망한 환자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때 나는 이에 낀 초콜릿 칩을 떼어내며 굉장히 맛있다고 생각했다. 의사로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도덕적으로 나아지기는커녕 퇴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10 고통의 의미/ 인간적인 의미

 

111 하지만 나는 왜 좀 더 시간을 내지 않았을까?

 

112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 뿐이다.

 

113 …장기간 지속되는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과 불안전한 회복.

 

가족들에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온전하고 생기가 넘치는 독립적인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환자가 어떤 미래를 원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했다.

 

114 그리고 내가 맡은 환자의 안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16 나는 그녀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녀는 수술을 선택했고,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 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듯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117 심인성 혼수상태인 경우 치료법은 환자가 알아듣고 깨어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안심시켜주는 말을 해주는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심약한 환자분이 계시다. 내일 전화해야지.

 

다른 하나는 몸의 다른 부분, 흔히 폐에서 옮겨 오는 전이암이다.

 

118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게 누구의 소관인지를 두고 종양학 전문의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일은 빈번하다. 나도 똑 같은 짓을 몇 번이나 했던가. 어쨌든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19 그녀가 지난 주까지 살아왔던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삶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을 것이었다. 이 부부는 뇌암이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누군들 그럴까?

 

120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 한 번에 그릇을 통째로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121 권위 있는 통계인 카플란 마이어 생존분석 곡선은 시간 경과에 따른 생존 환자의 수를 보여준다.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산지박괘

 

122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는 의사들이 있는데(“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6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그런 수치를 가르쳐 주는 건지 나는 너무나 의아했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의 손을 잡는 것으로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 어쨌든 수술에 직면할 때는 싸우겠다는 태도가 적당하다.

 

123 한 번에 한 숟가락씩.

 

124 생명(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정체성, 어쩌면 다른 이의 영혼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을 지켜줘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이 일의 신성함에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125 산제이 굽타/ 브이/ 인도인 2

 

126 ‘신경조절술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파급 효과를 지닌다. 신경 점화를 통제할 수 있으면 우울증에서부터 헌팅턴 무도병, 조현병, 투레트 증후군, 강박장애에 이르기까지 현재 치료가 아주 힘들거나 불가능한 다수의 신경, 정신 질환을 치료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얼른 발전되어 정신질환에 널리 쓰였으면 좋겠다.

 

127 휘플 수술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싶어 검색해봤다. 모든 수술은 참 어렵다.

 

129 환자는 의사에게 떠밀려 지옥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렇게 조치한 의사는 그 지옥을 거의 알지 못한다.

 

130 레지던트의 수술 기량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술과 속도.

 

132 고도로 집중하다 보니 시곗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간이 마치 일 분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바늘 땀을 뜨고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갑자기 일상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휴우 하고 내쉬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 이런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환자가 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릴까? 다음 수술은 또 언제일까? 오늘 밤엔 몇 시에 집에 갈 수 있을까?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 그림이 떠오른다.

 

133 실패하면 괴로웠고,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에 정말 많은 게 걸려있거나, 불과 1-2 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동안 그의 시상하부가 약간 손상을 입었는데, 그 결과 사랑스러웠던 여덟 살짜리 꼬마가 열두 살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 / 그는 1밀리미터의 손상 때문에 괴물이 되었다. 무슨 수술이든 위험보다 이익이 더 클 거라는 가족과 외과의의 판단 하에 결정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가슴이 아프다. 매슈가 열두 살에 140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슬프고 안타깝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간호사의 사탕을 갖고 간 귀여운 8살 메슈. 지금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135 “내가 이걸 아는 건 이 수술을 하면서 세 번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세.”

(락트인 증후군)

 

136 보통 좌뇌에 있는데,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이라 불린다. 전자는 언어의 이해를, 후자는 언어의 표현을 담당한다.

언어 없는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137 “십사 일 이 팔” / 신경심리학적 검토

메슈와 더불어 이 환자의 경우도 안타깝다. 언어가 아닌 숫자로만 말하게 되다니.

 

138 이렇게 뇌와 종양을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야 안전하게 절제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는 내내 환자는 언어 과제와 잡담에 전념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139 환자의 독백은 그치지 않았고 종양은 페트리 접시 위에 놓였다. 깨끗해진 뇌가 빛나고 있었다.

 

이거 왜 멈추고 이래? 당신들 원래 이렇게 멍청해? 내 머리에서 그 망할 것 좀 꺼내라고 했쟎아!”

 

대체 어떻게 그는 여전히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종양의 크기와 위치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욕설은 다른 회로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쩌면 종양이 그의 뇌를 바꿔버린 것일지도……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해피엔딩이라 다행이고. 아니, 성격장애라는 부작용이 있었을까? 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욕설을 하기는 쉽지 않고, 종양이 뇌를 바꾼 것이 아닐까 싶은데.

 

140 생물학, 도덕, , 그리고 죽음의 개별적인 가닥들이 마침내 서로 엮이기 시작하는 듯 했다. 완벽한 도덕체계는 아니더라도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잡히고 그 안에 내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긴장감 높은 분야의 의사는 삶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삶이 굴절되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 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142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제프와 나는 몇 년 동안 죽음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마치 천사와 씨름한 야곱처럼 죽음과 씨름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대면하려 했다.

 

143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접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2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 마라

 

148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내 병은 삶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산산조각 내버렸다.

두 번째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아닙니다. 당신이 쌓은 잠재력이 고스란히 글로 남겨져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있습니다.

 

155 우리는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너무 슬펐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고 함께 할 인생을 계획했다. 내 친구인 로리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을 때 약혼자가 있었다. 이 편이 더 잔인할까?

 

156 의논할 게 많지만, 먼저 물어볼게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화법이 굿

 

160 의사가 개인적으로 마음을 쓰는 환자들의 예후는 잘 못본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 말이야.

우리는 난임치료를 잘한다. 정확하게는 남편이 잘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다 임신이 잘될까 싶던 차에 화성시 난임사업한의원 중 성공사례가 제일 많은 한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한게 난임으로 고생하는 지인들은 효과를 못봤다는 것이다. 결국 다들 성공하긴 했지만 우리 한의원을 거쳐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그래서 저 부부는 꼭 임신성공하면 좋겠다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부터 먼저 마음을 비우려고 애써 왔다. 그래서 저 말이 경험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급 궁금해지네. 진짜 왜 그럴까?

 

163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희망의 진짜 의미는 헛된 소망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과연 생존곡선을 패배’, ‘비관적’, ‘현실적’, ‘희망적’, ‘망상등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까? 숫자는 그저 숫자가 아니던가? 우리는 모든 환자의 생존확률이 평균 이상이라는 희망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산지박괘

 

통계자료와 나의 관계는 내가 환자가 되자마자 달라져 버렸다.

 

165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외모가 다소 추해지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누구나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체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 형상

 

많은 사람들이 암 진단을 받으면 일을 아예 그만둬요. 아니면 정반대로 일에 몰두하거나요.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에마가 말했다.

지인 중 약사인 분이 계시다. 항암치료로 입원 중엔 다른 약사에게 약국을 맡기고 퇴원하면 복귀해서 일을 하곤 하셨다. 암환자라고 무조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물론 그것도 의미 있으나) 그렇게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좋아지셨다.

 

166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

 

내 가치를 찾는 것은 내게 달린 문제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암은 우리의 결혼생활을 구원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169 혹은 내 생명이 꺼져가는 동안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또한 내 경력을 위해 계속 분투해야 할 지, 오랜 시간 외곬으로 추구해왔지만 이룰 시간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야망들을 다시 품어도 될지 아무 해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예전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 아니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버둥거렸다.

 

171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172 삶의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인간관계라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의미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하는 것 같았다.

 

177 내 주변은 온통 성공, 가능성, 야심으로 가득했다. 사람을 녹초로 만드는 여덟 시간의 수술도 서서 견딜 수 있는 동료들과 선배들은 이제 나와는 다른 삶의 궤도를 따라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선배들은 더는 내 것이 아닌 미래(젊은 의과학자 상 수상, 승진, 새집)를 살아가고 있었다.

 

178 그렇다면,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던 청년에게 불치병은 완벽한 선물이 아닌가?

 

179 결국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솔제니친의 <<암병동>>, B.S.존슨의 <<운 없는 사람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네이글의 <<정신과 우주>>, 울프, 카프카, 몽테뉴, 프로스트, 그레빌, 암 환자들의 회고록 등 죽음에 관한 글이라면 뭐든 읽었다. 죽음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어휘를 찾고 싶었다.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바이탈 사인

 

182 도덕적인 의무에는 무게가 있고, 무게를 가진 것은 중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생사가 걸린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나를 다시 수술실로 끌어당겼다. 루시는 내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정말 표현이 남다르다.

 

194. 평생을 바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암을 주십니까?

 

195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시려면 또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할까요?

암환자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영입하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 외과의가 될 수 없다고 믿었지만 결국엔 되었고, 이건 개종과 다를 바 없는 강력한 변화였다. 에마는 심지어 내가 생각지 못할 때에도 나의 이 정체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 환자의 영혼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환자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점으로 되돌려놓았다.

 

197 연구실은 남은 판돈을 모두 걸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판돈이라는 표현도 재미있네. 나라면 남은 판돈을 어디에 걸까? 내가 매달리고 싶은 대상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언어와 문학에 끌린다.

 

198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 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불확실성과 병적 상태는 환자 본인이 계속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199 예수가 자신의 비유적인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추종자들 때문에 좌절하는 내용이었다.

곧이 곧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보면 답답하다. 맥락, 흐름, 행간 파악 못하는 사람 보면 답답하고. 그러면서 논리 따지고. 그런데 머라 할 수 없는 게 시 앞에서 내가 그런 모습. 바로 그렇기에 시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낭송하면서 그 느낌을 마음으로 받아보려고 하는 노력은 의미 있을 거 같다.

 

202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204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되 거기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혹은 가능하다 해도 확실히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차생미완성

 

205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아버지가 되고, 내 미래가 현실이 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찍는 CT 촬영이었다.

 

206 예전 촬영 결과를 다시 보니, 새로 생긴 종양의 희미한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유령 같았던 조짐이 이제 뚜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님이 기침을 예사로 보지 않고 CT를 요구해서 폐암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간 계속 S대 병원을 다니며 추적관찰은 해왔었다. 예전 사진을 보니 조짐이 있었음에도 희미하니 괜찮다며 넘겼던 것이다. 그러면 추적관찰은 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황당했는데. 결국 환자가 스스로의 증상을 민감하게 지켜봐야겠구나 싶었다. 저자도 예전 촬영 결과의 희미한 흔적을 나중에야 발견했으니. 꼭 암이 아니라 해도 불행의 조짐은 희미하게 현재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걸 알아챌 수 있는 민감함과 예민함이 필요하다.

 

207 거스트만 증후군 / 행복감

손가락 실인증이라는 것이 신기해서 알아봤다. 검색해보니 김홍도가 거스트만 증후군이 있었고 손을 잘 못그렸다고. 그림을 보니 실제로 그래서 신기.

 

208 아침이 지나갔고, 나는 마지막 수술을 하기 위해 손과 팔을 씻었다. 갑자기 이 순간이 장대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손을 씻는 것도 마지막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211 내 두개골을 본뜬 견본

 

213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내 삶은 내 선택들이 쭉 이어져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적 서사에서 한 인물의 운명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 그 희곡의 극적 구조를 만들어주는 건 리어 왕의 허영심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간의 행동이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맥을 못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그리스 비극과 더 닮은, 오래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뜻대로 안된다니까.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에 접근하려면 신성한 환상을 보는 예언자들을 통하거나 신탁을 받아야 한다.

 

217 수료식 날이 왔다. 침실에 서서 7년 레지던트 생활의 정점인 수료식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있는데 갑자기 지독한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극적이라 해도 이렇게 극적일 수 있을까. 그 어려운 7년의 과정을 어렵게 마무리하고 그 마지막 정점을 찍는 순간에 이럴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간 정신력으로 누르다 풀어진 긴장의 폭발로.

 

227 그녀는 내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뇌를 다쳐서 오로지 숫자로만 말할 수 있었던 환자처럼.

 

229 앞으로 루시와 내 딸의 삶에는 많은 것들이 부재할 것이다. 내가 아내와 딸 옆에 지금처럼만 존재할 수 있다 해도 나는 담담히 받아들이겠다.

 

230 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

저자의 집필동기는 매우 명확하다.

 

231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팽창한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수축될까? 분명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를 엄청나게 짧아졌다.

 

233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어느 쪽이든 그 야망은 과거의 것이다.

 

하지만 절대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우리 딸 케이디. 나는 케이디가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까지는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목숨은 사라지겠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234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That message is simple: When you come to one of the many moments in life when you must give an account of yourself, provide a ledger of what you have been, and done, and meant to the world, do not, I pray, discount that you filled a dying man’s days with a sated joy, a joy unknown to me in all my prior years, a joy that does not hunger for more and more, but rests, satisfied. In this time, right now, that is an enormous thing.”

 

그의 육성을 그대로 듣고 싶어 원문을 찾았다. 케이디에게 생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까지 선물한 그는 정말로 훌륭한 아빠이지 않나. 앞서 그는 의사라는 직업은 아버지의 부재로 다가왔다고 했다. 의사로서 바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묻어나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시 딸에게 부재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글은 자신의 부재를 대신하며 딸과 함께 할 것이라며 치열하게 쓴 문장에 그의 사랑이 느껴진다.

 

에필로그 루시 칼라니티

 

241 폴은 토요일에 내가 녹화하는 동안 엘리엇의 황무지를 꺼내 거실에서 크게 읽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자극한다.” 숙제도 아닌데 폴이 책을 무릎에 엎어놓고 열심히 암송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족들이 빙긋 웃었다.

 

249 아홉 시간 넘게 우리 가족은 그의 곁을 지켰다.

앞서 폴의 동료는 아홉 시간을 서서 버틸 것이 두려워 환자의 암 전이를 기도한다. 같은 아홉시간이지만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그 시간의 의미가 이렇게 다르다.

 

251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252 이 책에는 모자란 시간과 싸우는 절박함, 중요한 얘기를 꼭 전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253 하지만 나는 폴이 그 일을 글로 남겨서 기쁘다. 그것은 우리 진실의 일부이고, 우리가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 계기이며, 폴과 나 우리 둘 인생의 고난과 구원, 의미를 보여주는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전 인터뷰나 아내 루시의 인터뷰를 보면 암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구했다고 표현한다.

 

257 매일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의 균형을 힘겹게 맞추며, 감사와 사랑의 새로운 깊이를 탐구한 시기였다.

 

폴은 자신의 강인함과 가족 및 공동체의 응원에 힘입어 암의 여러 단계에 우아한 자세로 맞섰다.

 

그래서 미리 계획해둔 미래를 잃고 슬픈 와중에도 새로운 미래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자아로 살아간다.

 

258 그 시기에 그가 낸 목소리이며,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이다.

 

뭔가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남자였던 투병 말기의 폴, 이 책을 쓴 폴, 병약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그 남자가 그립다.

 

261 폴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폴은 비극이 아니었다.

 

262 그 대신에 폴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했고, 이는 그만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이다. 이 책이 출판된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준 상실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데에서 의미를 발견했고, 이 책에도 그렇게 썼다.

 

그것이 폴에게 주어진 삶이었고, 그는 그 삶으로부터 이 책을 써냈다. 그래서 <<숨결이 바람될 때>>지금 이대로 완결된 작품이다.

 

264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 분석

이 책은 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2장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이다. 저 문장을 기준으로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주어로서의 삶과 목적어로서의 삶을 잘 구분하여 전개했다. 어찌 보면 미완성인 글에 아내 루시의 에필로그를 더해 이 책이 완결된 작품임을 드러낸다. 훌륭하고 가슴 아픈 목차이다.

 

2 보완이 필요한 점(독자의 눈으로 – 이런 내용은 아쉬웠다.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됐다)

전혀 없다.

 

3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다소 민감한 부분들도 있기에 의사로서 환자로서 겪은 의료환경 내에서의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편집 과정 속에서 가감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최대한 살려낸 것 같다. 뇌와 심장을 다 살린 글임에 감사하다.

 

또한 저자는 의사/환자, 의학/문학, /죽음 등 두 가지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명상에 익숙한 인도인과 근거 중심의 미국인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배경도 그의 관점 형성에 일정부분 기여했을까.

 

아내 루시의 에필로그에 감동받았다. 사실 그녀는 편집자로부터 에필로그를 제안 받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의사로서 의료차트나 정보를 쓰는 것에나 익숙하지 에세이 같은 걸 쓰는 건 생각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미완성인 채로 끝난 남편의 책에 에필로그를 쓰는 것의 의미를 헤아려 쓴 그녀의 에필로그는 문장마다 울림을 줬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없다.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성공적인 수술을 해내려는 그의 완벽함이 글에서도 느껴진다. 생명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가 딸에게 생명과 그 의미를 선물하려고 하는 절박한 의지가 책 전체에서 흐른다. 그가 딸에게 선물한 바로 그 메시지가 독자에게 주려는 메시지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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