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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11시 42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 김지윤 편역

     돌베게

 

 

1. 저자에 대하여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1) 이순신의 생애

 

조선 중기의 장군으로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해(汝諧)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다. 조선 초기에는 가문의 선조들 중에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들이 있었다. 5대조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28세가 되어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 아픔을 참고 끝까지 시험을 마쳤지만 탈락했다. 4년 후인 1576(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1583(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등을 역임했다.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다. 당시 이순신은 여진 세력의 침입을 적절하게 방어하지 못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고 첫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 · 선전관 등이 되었고, 1589년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 · 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대간들은 이순신의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대간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결국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그는 곧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의 일을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훈련 상황과 무장 상황 등을 확인하고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의 둔전(屯田) 설치를 조정에 요청했다. 1592년 음력 4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음력 4 15일이었다.

 

결국 음력 5 4일 이순신 함대는 처음으로 출격했다. 음력 5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조선은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수륙 병진 전략으로 가급적 짧은 시간에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수로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져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의 계략과 이순신을 시기하던 국왕과 신료들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직위와 업무를 원균(元均)에게 인수인계하고 음력 2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3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속에서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라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상소 등에 힘입어 특사되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것이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이다.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은 1597년 음력 7 14일과 15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하면서 조선수군을 궤멸 상태에 빠지게 했다.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결국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의 의견에 따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당시 이순신에게 주어진 전력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 전력만으로 음력 9 16일 명량(鳴梁)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조선의 제해권을 다시 확보하는 동시에 조선 수군을 재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98(선조 31) 음력 11 19일 이순신 함대는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500척의 일본 함대를 노량(露梁)에서 공격했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수군은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얻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음력 11 19일 전투 중에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순신 1599년 음력 2 11일 아산(牙山)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다. 1614(광해군 6)에 현재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동시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1704(숙종 30) 유생들의 발의로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건립되었다. 1793(정조 17) 음력 7 1일 정조의 뜻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2년 뒤에는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 간행되었다.

 

2) 이순신의 활동

 

이순신은 1576(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다. 이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당시 이순신은 변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군사의 증원을 조정에 요청했다.

 

하지만 조정의 조치는 없었고, 결국 여진 세력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패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패전을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했다. 당시 이순신은 첨병(添兵)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조정에서 패전을 이유로 자신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형은 면했지만 백의종군을 해야만 했다.

 

이후 관직에 다시 복귀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음력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음력 2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龜船]을 새로 건조하고 훈련 체제와 무기 상태를 점검하는 등 외적의 침입을 대비했다. 1592년 음력 4 13일 일본은 대군을 동원에 조선을 침입했고, 부산과 동래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의 침입에 대한 소식은 음력 4 15일 전라좌수영에 전달되었다. 결국 이순신은 음력 5 4일 자신의 함대를 출격시켰다.

 

이순신 함대는 음력 5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전투의 공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서되었다. 음력 5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흔들림 없이 전투를 수행해 승리했다. 음력 6 5일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과 음력 6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72척을 격침시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하사 받았다.

 

음력 7 8일의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에서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본 함대를 크게 격파했다. 한산도해전의 공적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음력 7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격침시켰다. 그리고 음력 9 1일 부산포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침몰시켰다.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조선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일본군의 수륙 병진 전략을 분쇄했다.

 

1593년 음력 7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고, 음력 8 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했다. 1594년 음력 3 4일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격파하고, 음력 9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다. 음력 10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 · 김덕령(金德齡)과 수륙으로 일본군을 협공해서 승리했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의 계략과 이순신을 시기하던 국왕과 신료들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직위와 업무를 원균(元均)에게 인수인계하고 음력 2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3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속에서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라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상소 등에 힘입어 특사되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은 1597년 음력 7 14일과 15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하면서 조선수군을 궤멸 상태에 빠지게 했다.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결국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의 의견에 따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당시 이순신에게 주어진 전력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 전력만으로 음력 9 16일 명량(鳴梁)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조선의 제해권을 다시 확보하는 동시에 조선 수군을 재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1598년 음력 8 19일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일본군 장수들의 뇌물과 읍소에도 불구하고 명()의 수군도독 진린(陳璘)을 설득해 음력 11 18일 밤 노량에서 마지막 전투를 단행했다. 이순신 함대는 500여 척의 일본 전선과 격전을 벌였다. 마지작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은 음력 11 19일 새벽,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의 저술에는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다.

 

3) 이순신 개인의 삶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직접 적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자신의 삶과 생각, 전쟁 등에 대한 기록이다. 모두 7 20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선조 25) 음력 1월에서 1598 10월까지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다. 친필 초고는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순신의 일기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1795(정조 19) 정조의 하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집자가 편의상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여 함께 수록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이충무공전서』의 권5부터 권8까지 수록되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순신의 일기를 『난중일기』라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중 발췌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조선을 지켜라

 

전쟁에 대비하라

 

P21. 1592 2 4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북쪽 봉우리의 봉수대 쌓아 놓은 곳에 올라갔다. 참으로 잘 쌓아서 절대 무너질 리 없을 듯했으니,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일토록 바라보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도 둘러보았다.

나는 아직 나이도 있고 사회적 위치도 낮기 때문에 이봉수에게 집중하고 싶다. 윗사람들은 다 안다. 그 사람이 부지런히 했는지, 성의있게 일 한 건지 아닌지, 그러니 이봉수처럼 보지 않더라도 이렇게 일 하거라 뚱냥아

 

P23. 1592 2 27일 흐림

아침에 점검을 모두 마치고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조망해 보았다. 고립되어 위태로운 외딴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첨사가 마음을 다해 애썼지만 아직 설비가 갖춰지지 못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무기와 전선을 점검하라

 

P26. 1592 2 22

곧장 산꼭대기에 새로 지은 문루 위에 올라가 경치를 바라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이 일대 최고였다. 녹도 만호가 마음을 다하여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 이날은 날씨를 적지 않으셨을까? 윗사람은 다 안다. 사실 나도 이제 일 한 거를 보면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 조금씩 보이는 거 같긴 하다.

 

P27. 1592 3 6일 맑음

아침밥을 먹고 관아에 나가 무기를 점고했다. ,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는 깨지거나 훼손된 것들이 많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담당 아전과 활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의 죄를 논하였다.

4 14일이 발발 날이니이 때까지도 이상태였다니그런데 왜군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지금이야 위성이 있다고 치자. 그 때는 뭘로 침입해 올 것을 예측하고 대비한 거지?

 

거북선을 만들다

 

P29. 1592 3 27일 맑고 바람이 없음

일찌감치 밥을 먹고 배에 올라 소포로 갔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매는 일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것을 보았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P30. 1594 2 15일 맑음

식사 후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에게 늦게 온 죄를 추궁했다.

흥양 배에 부정한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는데 엉성하게 처리한 일이 많았다.

전쟁 앞두고 잘 하는 짓이다!

 

P31. 1592년에 있었던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 등에 투입되어 활약을 펼쳤다.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적의 진영으로 돌격해 대포를 쏘고, 왜적의 배에 가서 부딪혀 적선을 넘어 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충파로구나!

 

오늘도 활쏘기를 연습하고

 

P34. 그렇지만 무엇보다 조선 시대에 활쏘기가 중시되었던 까닭은 활이 조선군의 대표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발사 속도가 빨랐던 활은 멀리 있는 배 위의 적을 쏘아 맞힐 수 있었으므로 바다 위 전투에서도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

 

P35. 1595 5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비가 쏟아짐

사직과 위엄 있으신 임금님께 기대어 보잘것없는 공을 조금 세웠을 뿐인데, 임금님의 총애가 남들을 뛰어넘어 분수에 넘치는 영광을 입었다. 이 몸이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있으면서 먼지만큼도 공적을 보태지 못하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지만 얼굴은 군사들 앞에 부끄럽기만 하다.

굉장히 겸소한 분이셨구나. 공을 조금 세웠다라군사들 앞에서 부끄럽다그런데, 절대 위대한 영웅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이럴 경우 모든 공을 아래 부하들이게 돌리지 않나? ‘공은 상관에게 책임은 내가내 기억으로는 우리 국군정신으로 알고 있는데, 부하들에게도 공을 돌려야 하지 않나절대 폄하아님;;

 

P35. 15957 1일 잠깐 비가 내림

홀로 수루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 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종일 뒤척거렸다.

이 시기 그래도 조정에는 류성룡이 버티고 있던 시기 아닌가? 물론 혼자서는 무리겠지만

 

실정 모르는 조정 관원들

 

P37. 1594 2 16일 맑음

그런데 담양, 진원, 나주, 창평 수령은 악행을 덮어 주고 상을 내려 달라고까지 하였다.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천장만 올려다볼 따름이다. 또 수군의 일가족에 관한 일과 장정 넷 중 두 사람이 전쟁에 나가는 일에 대해 논하며 몹시 잘못된 처사라고 하였다. 나라에 갑자기 닥친 어려움은 생각지 않고 한갓 눈앞의 미봉책 마련에만 힘을 쓰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 더욱 아파 온다.

 

P39. 1596 3 26일 맑음

경상 수사가 와서 이야기를 나눴다. 체찰사의 명령을 전하는 군사가 와서 지난번에 전라우도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일은 회계 내용을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했다. 우습다.

나라가 지금 전쟁 중인데, 일 처리를 정말 이렇게 했다는 말인가. 난세에 영웅 난다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난세가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리석은 지도자와 아첨꾼들이 주위에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명의 제대로 된 사람이 눈에 띌 수 밖에. 난세에 영웅 난다는 결국 역설적으로 그 만큼 어리석은 자들 투성이고 그들이 난세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P41. 1594 2 13일 맑고 따뜻함

곧바로 나대용을 수사 원균에게 보내 작은 이득을 보고 공격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일단 머물고 있다가 기회를 타서 무찔러 전멸시키자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원균이 얼마나 작은 이익을 보고 행동했으면 이런 말을 전하라고 했을까.

 

P42. 1594 9 3일 비가 옴

새벽에 임금님께서 비밀리에 내리신 분부가 도착했다. 수군과 육군 장수들이 팔짱을 끼고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우서 나아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이러니 조선 후기가 당파싸움에, 백성들 등 처먹는 모습을 보이지..

 

영의정 류성룡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임진년, 전쟁이 시작되다

첫 출전의 날

사천 전투

당포 해전

적을 유인하라

수군의 기세에 왜적이 달아나고

 

P62. 1594 3 3일 맑음

 

아침에 임금님께 전문을 지어 올리고 활터 정자에 앉아 있었다. 경상 우후 이의득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수군들이 적을 많이 붙잡아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원균)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가 군사들의 발바닥까지 때리려 했다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원균이 일기를 썼으면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한쪽의 입장만을 들었을 때, 일단 원균은 장수로서는 아닌 듯 한데, 어디까지나 다른 입장, 다른 시선에서 원균을 바라본 것이니. 내용 상 군법을 이렇게 적용하면 절대 장수를 따를 수 없다는 사실.

 

P63. 1594 3 5일 맑음

그러자 우조방장 어영담이 긴급 보고를 올렸는데, 적의 무리는 우리 군대의 위세를 두려워해 밤을 타 도망쳤고 빈 배 17척은 남김없이 태워 없앴다고 하였다.

 

P65. 1594 10 3일 맑음

내가 직접 장수들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장문포로 갔다. 하루 종일 적과 싸워 보려 했지만 적들은 겁을 내어 나와서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나 무서웠던 것인가. 왜군에게 얼마나 공포였던 것인가.

 

P66.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에게 패배만 당하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자 가능한 한 조선 수군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수군은 섬나라 군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해전을 치러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활약에다 전선이며 화공무기, 군사들의 역량까지 모든 면에서 전력이 앞섰다.

도대체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한양, 평양까지 왜군이 진군할 수 있었지?

 

나에게 항복한 왜인들

 

P68. 1596 1 8일 맑음

항복한 왜인 다섯 사람이 들어왔다. 조선 편으로 온 까닭을 물었더니, 자기들이 따르던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을 자꾸 고되게 부려 나와서 투항했다고 대답하였다. 또 실은 부산에 있던 것이 아니고 가덕도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하였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어떻게 되지? 리더십은 사람이 스스로 따르게 만드는 것이 리더십이다. 시대가 변해도 이것은 변치 않는구나.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P75. 명나라의 지원으로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까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과 소, 말 등을 바쳐야 했고, 식량을 빼앗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 갔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부족한 군사까지 보충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지명이 좀 어색하다. 명나라, 조선, 백성 등 그 시대 언어를 사용하면서 왜 서울이라고 했지? 한양을 사용하는 것이 더 맞는 것 아닌가?

 

정유년, 다시 왜적과 맞서다

 

P76. 1597 9 14일 맑고 북풍이 거세게 붊

벽파정 건너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불 피운 군사를 데려오게 했더니 바로 임준영이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영화 명량의 진구로구나. 머리속에 영상이 그려진다.

 

P77. 이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또한 이러지 못할 리도 없을 듯싶었다. 즉시 전령선을 보내 피란민들을 타일러 빨리 높은 데로 올라가게 하였다.

영화 명량장면2

 

P77. 1597 9 15일 맑음

조수를 타기 위해 장수들을 이끌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편에 명량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우리 수군이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P79.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으므로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군법에 따라 죽고 싶으냐? 안위 네가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영화 명량장면3

 

진린과의 연합 작전

 

군율로 엄히 다르리리라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자기 잇속만 차리는 아전들

 

P93.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는 아전들도 마찬가기였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아전들을 무겁게 처벌했다. 아전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군사들을 징발해 보내지 않는 것과 백성의 제물을 빼앗는 등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도망친 군사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

배에 여인을 태운 남해 현령

 

P98. 1593 5 30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내가 탄 배 옆에다 배를 대었다. 기효근은 배에 어린 여자를 태워 놓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 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전쟁터에 첩을 데려온 순변사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 우수사

산에 숨은 무안 현감

 

1597 10 21

P105. 정상명이 와서 무안 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벼슬아치인데, 자기 한 몸 지키려고 꾀를 내어 수군 부대로 오지 않고 산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달포가 지났는데, 왜적이 후퇴하고 나자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나타났으니 그 정황이 너무나 어이없다.

이러니 7년 넘게 전쟁이 이어지고, 백성들만 죽어나지. 나라에 녹을 먹는자가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는 것이 왜 아직까지 이어지냐는 말이다.

 

아첨으로 지위를 얻은 김억추

 

P107. 1597 9 8일 맑음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일개 만호 자리에나 겨우 적합할 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해 보냈으니 조정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역시나 지금도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피란 떠나신 임금님

 

P113. 선전관에게서 서울의 이러저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또 역적에 관한 일도 들었다. 위에서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근심하시고 부지런하게 애쓰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받쳐 오르는 감정과 그리운 마음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 버리고 도망간 임금에게 이렇게 충성하다니, 하긴 장수는 주군의 안위부터 살피는 것이 맞는 법이지만나도 이랬겠지?

 

헐벗고 굶주린 군사들

 

P114. 1594 1 20일 맑았지만 거센 바람이 너무 차가움

옷 없는 자들이 이 배 저 배에서 거북처럼 웅크리고 추위 때문에 신음하는데, 그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군량이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일단 날씨에 감정이 들어가 있다. 음력 1월이면 엄청 추운 겨울인데 옷도 입지 못하고 피난 나온 것인가

 

외적의 손에 부하를 잃고

피란길에 돌아가신 숙모

 

P121. 1593 5 16일 맑음

낮에 윤 봉사로부터 서울 관동 사시던 숙모께서 양주의 천천으로 난리를 피해 가셨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째서 요즈음 세상일은 이다지도 참혹한가. 장례는 누가 주관할는지. 대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직접 가 볼 수도 없는 상황.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특히나 전란 중이니 더더욱 갈 수가 없지 아니한가. 마음으로라도 슬퍼하고 싶지만, 나라가 위기라 그러지도 못하고

 

돌림병으로 죽은 금산이

사람 고기까지 먹는 백성들

 

P123. 1594 2 9일 맑음

아침에 고성 현감이 왔다. 당항포 왜적의 배가 드나드는지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참상에 대해 물었다.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갈는지.

살려고 한다면 나도 이렇게 되려나

 

나라 안의 적

 

P128. 이몽학 일당 가운데 한 사람이 이몽학을 죽임으로써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왜적을 물리치는 데 온 힘을 기울여도 모자란 때에 나라 안의 적과도 싸우야 했다니, 당시 조선 사회가 얼마나 혼란했는지 눈 앞에 선하다.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어야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새해 첫 날에

 

P133. 1592 1 1일 맑음

다만 어머니와 떨어져 다시 남녘에서 설을 쇠니 가슴에 사무치는 안타까움을 이기기 어렵다.

난중일기를 보고 있으면, 이런 표현이 참 많이 나온다. 가슴에 사무친다. 눈물이 난다. 머리가 어지러워 뒤척거렸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을 것 같다.

 

P133. 1595 1 1일 맑음

촛불을 환히 켜고 홀로 앉아 있다가 생각이 나랏일에 미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여든의 병드신 어머니가 떠올라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

여기도 나온다. 눈물도 참 많으시다. 효도 참 깊으시다. 애도 참 많이 태우신다. 그래서 밤도 참 잘 새신다.

 

수영에도 봄은 오고

전장에서 보낸 명절

항복한 왜인의 광대놀이

 

P141. 이순신은 엄격했지만, 한편으로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항복한 왜인들에 대해서도 도망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엄중하게 처벌했지만, 한 번쯤은 광재놀이를 허락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줄도 아는 장수였다.

 

한산섬 달 밝은 잠에 잠 못 이루고

 

P142. 1593 7 15일 맑음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심사 어우선하네.

홀로 뜸 아래 앉으니

마음 너무나 답답하구나.

달빛 뱃전에 드니

정신 맑아지누나.

누워도 잠 못 이루니

닭이 벌써 울었네.

또 잠 못 이루신다. 표현이 너무 슬프면서 아름답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다. 뭔가 고뇌가 있어야 이런 시가 써지는 것인가 보다.

 

앞일을 일러 준 꿈

몸이 아파 신음하여도

 

P155. 난중일기에는 몸이 좋지 않았다는 일기가 여러 편 실려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순신은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듯하다. 50세 즈음의 나이에 7년 동안 배 위에서 생활하며 수도 없이 해전을 치러야 했으니, 그 얼마나 고된 날들이었을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아프기도 참 많이 아프셨다. 그런데 다시 전장으로 나가면 내색하지 않고 용맹히 싸우시는 구나.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을 참으신 걸까나는 어떤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가. 꾀병을 부리는가. 아니면 과장하는가. 힘들었다. 그래서 쓰러졌다. 사실 말 할 곳이 없었다. 말 할 수도 없었다.

 

점괘에 위안을 얻고

 

P157. 이순신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점을 치고 또 그 점의 결과에 기대어 잠시나마 위안을 얻으려 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순신도 우리처럼 앞날에 대한 불안이 있었음을 헤아려 보자는 생각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때, 답답한 심정으로 미래를 보고 싶어 할 수 있다. 나도 엄청나게 봤지. 타로도 보고 철학관도 가고. 기도도 많이 하고. 나약한 인간이라 어쩔 수 없나 보다.

 

멀리서 그리는 가족

 

꿈에 뵌 아버지

 

P161. 1595 1 12

홀로 앉아서 꿈에 뵌 아버지를 떠올리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1595 7 2일 맑음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이다. 슬프고도 그리워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1595 11 15일 맑음

아버지 기일이라 동헌에 나가지 않았따. 혼자 앉아 있자니 아버지가 그리워져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아버지께 자주 연락을 드리고 있다. 마음 속으로 너무나 그립다. 아버지 안계셨으면 난 벌써 객사했다.

 

머리 흰 아들의 어머니 생각

 

P163. 1593 5 4일 맑음

오늘은 어머니 생신인데, 어머니께 가서 오래 사시기를 빌며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어머니의 당부

 

P166. 1594 1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은 조슴도 없으셨다.

훌륭한 위인에게는 반드시 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신다. 우리 어머니도 참 위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이 조급하다.

 

병든 아내

아비의 마음

염이 걱정

 

P175. 1593 8 2일 맑음

날이 어두워지고 우수사가 내 배로 왔다. 방답 첨사가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싶다고 간절히 이야기했으나 다른 장수들이 아직 보내 주겠다는 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수사 원균이 나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해서 좋지 못한 일들이 많다고 했는데, 죄다 허튼짓이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도대체 원균 당신은

 

면아,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P177.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여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막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영특한 기질이 범상치 않아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남겨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은들 마침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네 이름 부르며 울부짖을 따름이구나. 하룻밤이 1년 같았다.

 

백의종군의 길

 

감옥 문을 나와

다시 남쪽으로

 

P187.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백의종군이란 죄를 지은 장수나 관리에게 관직이 없는 상태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는 처벌인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가서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은 아직 죄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도원수가 머무는 남쪽으로 가는 길에 호송하는 의금부 관리들이 동행했다.

임금도 어리석고, 그 신하들은 간신이고이럴 땐 꼭 나라가 어지럽고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P192. 전장에서도 감옥에서도 늘 그리워하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여수 고음천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별세하였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비통함을, 더구나 죄인의 몸이 되어 어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다시 남쪽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이순신도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글로 적기 힘들었던가 보다. 위의 일기는 모두 나중에 기록한 것이라 한다.

왜 내가 눈물이 나오지어머니 아버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원균

 

수사 원균이 왔다. 그의 사람됨은 음흉하고 간악해 형편없기 짝이 없다.

 

수사 원균이 거짓 공문을 보내 군사들을 동요시켰다. 군대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새벽 네 시쯤 수사 원균이 공문을 보내 내일 새벽 군대를 진격시키자고 하였다. 그 음험한 속내와 시샘을 이루 말할 수 없어 답장을 밤중에 곧바로 보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균이나 그 아래 있는 군관들은 평소 허튼소리를 잘 전하니 믿을 수 없다.

 

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포로 가자고 독촉하는데 음흉스럽다 하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그리고 진짜 원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정말 난중일기에 적힌 그대로 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해서 전장에 있는 것이지? 그럴 위인도 안되면서 어떻게 계속 장수를 할 수 있는 거지?

 

나의 자리로 돌아와

두 번 다시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리

 

P206.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며 조선의 바다를 지켰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철수하라 지시하고, 1598 8 18일에 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순천 왜교에 성을 쌓고 주둔하던 고나시 유키나가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1598 11 19, 고니시를 구원하러 순천으로 향하던 시마즈의 수군 부대를 공격한 것이 바로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가 된 노량해전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시마즈 부대를 크게 이겼지만, 이순신은 이날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고나시 유키나가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사실상 정유재란은 끝이 났다. 이순신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선을 구하며 두 번 다시 조선의 바다를 왜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구성에 대하여

 

“!” “?” “!”

 

서문을 읽으며 독자에 대한 배려에 감탄했다. 전체 주제와 테마에 따라 일기를 재구성했다.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몇 장을 읽고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머리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1592년에서 1594년으로 1597년에서 다시 1592년으로. 시간순이 아니다 보니 혼란스러웠다. 온전히 임진왜란 그 7년간의 숨막힘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실망했다.

 

참고 참고 읽으며, 편역한 김지윤님의 의도가 점점 분명해 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향한 이순신장군의 마음. 아버지를 향한 안타까움. 자식에 대한 아비의 마음 등. 주제별 구성으로 인해 인간적인 면모가 압축되고 감정이 보였다.

 

이 구성에 대해 회의적인 독자가 있을 것이다. 분명 호불호가 갈린다. 개인적으로 이 구성은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는 신의 한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

 

단연코 구성!!

 

목차/구성에서 언급했 듯이 이 책의 장점은 8할이 구성에 있다.

 

Chapter 마다 덧붙인 해설

 

일기에 다 표현되지 못한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작가가 넣어 놓은 장치인 해설. 이 해설(주석)이 해당 테마의 이해도를 높인다. 아주 길지도 않다. 그렇다고 사실만을 열거한 것도 아니다. 작가의 생각과 적절한 분량의 해설이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마치 코스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으며 입가심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주요해전 / 관직체계에 관한 자료 삽입

 

본 분량이 200페이지도 안되는 굉장히 가벼운 책이다. 하지만 주요해전의 위치, 이순신 연보, 관직체계 등을 삽입한 전략이 이 책을 무겁게 만들어 준다. 개인적으로 역사서 구성의 표본이라고 까지 생각하고 싶다.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보완점은 거의 없지만, 중간 중간 단어 선택이 다소 아쉽다. 철저하게 과거 지명을 사용했으면 좋았겠지만, 서울이라는 등 지금의 언어를 사용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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