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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10시 56분 등록

백범일지


김구, 도진순 옮김, 돌베게, 2003.


1. 저자에 대하여 


■ 김 구 ■

•출생/사망

1876.8.29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1949.6.26

•활동분야

독립운동가

•발 자 취

1878~79. 천연두를 앓는 중 어머니가 고름을 짜 얼굴에 벼술 자국이 생김

1883~86. 양반을 구타한 아버가 도존위에 천거되어 3년 후 면직.

1887. 12세에 집안 어른이 갓을 쓰지 못한 사연을 듣기 위해 양반이 되기로 결심하여 공부 시작

1888~89. 조부 사망. 부친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호전되어 반신불수가 되어 부모님이 무전여행으로 문전걸식하며 의원을 찾아 떠돌고  백범은 큰어머니댁과 장연 재종조 누이 댁을 전전하며 생활함

1890~91. 부모님과 고향에 돌아가 서당에 다니던 중 부친의 토지문권 등의 실용문서 읽기를 권함에 통감, 사략 등을 읽으며 『대학』, 한․당 시(時) 등을 배움

1892. 경과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 폐지하고 두문불출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하며 병서등 탐독

1893. 동학 입도. 연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 얻음

1894.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첩지를 받음. 황해도 해주성 공격 실패 후 구월산 패엽사로 후회, 군대훈련함.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몽금포 피신하여 3개월 잠적

1895. 20세.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하고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청국기행, 만주까지 감. 돌아오는 길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 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귀향 후 고능선의 장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1896. 중국으로 갔다 단발령 정지와 삼남 의병 소식에 귀환.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살해함으로써 해주옥에 투옥, 인천감옥으로  이송. 도중 장티푸스로 자살기도. 교수형을 언도받으나 고종의 판결 보류로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시작하며 근대문물을 접함

1897. 강화인 김주경이 백범 구명운동을 벌이나 가산만 탕진하고 불라디보스톡 방면을 잠적

1898. 탈옥하면서 대신 부모님이 투옥됨. 삼남으로 도피하여 늦가을 마곡사 중이 됨. 법명 원종.

1899. 봄에 금강산 공부를 위해 마곡사를 떠나4월  부모님을 만나고 평5월 양 대보산 영천함 방장으로 장발의 걸시승 생활을 함.  가을경 환속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오며 작은아버지가 백범에게 농사일을 권함

1900. 김두래로 변장하여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로 갔다가 동생 진경 집에서 3개월 훈장 생활. 김주경 친구 유완무의 권유로 이름을 구로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감. 부친 사망

1903. 여옥과 맞선 보고 약혼.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 후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4. 최준례와 결혼

1905. 진남포 에버트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경성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전덕기, 이준, 이동녕, 최재학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공개연설 등 구국운동 전개. 12월 신교육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서 교육사업에 매진

1906. 장련에서 광진학교 세움. 종산의 서명의숙 교사. 왜병의 종산마을 약탈 저지. 첫딸 출생

1907. 안악으로 이사, 첫딸 사망. 양산 학교 교사. 교사양성에 매진

1909.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순회하며 계몽운동 전개. 안중근 이토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불기소. 양산학교 소학부와 더불어 재령 보강학교 교장 겸임

1910. 둘째딸 출생,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회의를 통해 서울에 도독부 설치와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 등 결의

1911.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경송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고문당하며 15년 형 언도받고 서대문감옥 이감. 감옥에서 의병 과 신사 등을 만나고 활빈당 간부 김진사에게서 비밀결사의 요령을 들음

1912. 일왕 명치 죽음으로 7년으로 감형. 명치 처 사망으로 5년으로 감형. 구(龜)에서 구(九)로 고침

1914. 인천감옥 이감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되어 생활하던 중 자살 결심하나 실패하고 열심히 일함

1915. 둘째딸 사망. 8월 가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감

1916. 문화 궁궁농장 간검. 셋째 딸 출생

1917. 준영 숙부 사망.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소작인 계몽하고 학교 세움. 셋째 딸 사망

1918. 아들 인 출생

1919. 상해 망명.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됨

1920. 아내 아들 인과 상해로 옴

1922 모친 상해 합류. 임시의정원 보권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됨. 임시정부 내무총장. 차남 신 출생. 한국노병회 조직 초대 이사장

1923. 임정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상해교민단에서 의경대 설치, 백범 고문에 추대함

1924. 아내 사망. 노동국총판 겸임

1925. 모친 아들 신을 데리고 귀국

1926. 임시정부 전 국무위원 총사직하며 백멈 국무령에 선출

1927. 장남 인 고국으로 보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제 개편하며 국무위원으로 선출

1928.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임정 활동 침체로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나자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기 정책 시작

1829. 백저일지 상권 탈고. 상해 교민단 단장이 됨

1830. 한국독립당 창당

1831. 일본 요인 암살목적으로 한인애국단 창당.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이 교포에게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이봉창 의거 계획

1932. 이봉창 의거 실패. 윤봉길 의거 직후 신변 위험으로 미국인 피치 집 은신. 한인애국단원 사건 등의 주모자로 발표되며 상해  탈출하고 상해 임시정부는 항주로 옮김. 항주에서 개각단행하여 군무장 임명됨. 백범이 임시정부 이탈하고 임정의 기반이  취약해짐. 백범은 광동인으로 행세하며 피신함

1933.. 장개석 면담. 필담 결과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1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

1934.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만남. 가흥 여사공 주애보 월 15원을 주고 동거. 한인특무독립군 조직

1935. 남경에 학생훈련소 설치하나 왜에게 발각되어 강소성 장광사로 이전. 임정해소의 부당성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정 경고문  발표. 임정의 김구시대 개막. 임시정부 옹호 위한 한국국민당 조직

1937. 미주 5개 단체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중일전쟁으로 남경 폭격되어 호남성 피난. 안공근 상해 파견하여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않음

1938. 이운환 저격으로 의식불명. 임시정부 광주에서 다시 유주로 옮김

1939. 임시정부 사천성 기강으로 옮김. 모친 사망.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 군사특파단 섬서성 서안 파견

1940. 일시정부 대가족 토교 이사. 학국동립당 결성. 임시정부 중경 옮김. 백범 임시정부 주석 선출

1941.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 요청 공함 보내고 같은 이유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담. 백범일지 하권 집 필.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제정 발표하고, 일본에 선전포고

1942. 3.1절 선언 발표하며 미, 영, 소에 임시정부 승인 요구.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과 김원봉 광복군 부사령관 임영 결의하고 광복군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 개시

1943. 장개석과 회담. 임정 헌법 개정안 문제로 임정내 좌파와 갈등하여 주석직 사직 발표했다가 갈등 해소로 복귀

1944. 장남 인 사망. 광복군 특별훈련단 설치하고 연합작전 추진. 미군정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귀국.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총동원위원회 조직

1946. 비상국민회의 소집, 의장 선출. 조선 임시정부 수립 지원 요망 메시지 발표

1947. 반탁독립투쟁우원회 조직하여 반탁운동 전개. 백범일지 출간

1948.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 요구 6개항 의견서 보냄. 남한총선거 불판 표명하고 공동성명서 발표

1949 조국 통일 위한 남북협상 희망 발표. 백범학원과 창암학원 설립.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 총에 맞아 운명.

 

 

 

 

 

 

 

 

 

 

 

 

 

 

•저    서

백범일지


■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한다는 것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어떻게 불리든, 그는 그. 본질이 달라질까. 아니 어쩌면 그를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그의 행동력이 달라질지 모른다. 스스로 개명하며 그의 신념과 의지를 붇돋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우리의 어린 왕자 속에서도, 김춘수의 꽃에서도 누누이 강조되듯이. 우리가 누군가를 부를 때, 그는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렇게 창수는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동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나지만 김구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살아 있다.

 백범의 일생을 보다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의 생을 뜨악하며 바라보면 그가 일제시기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가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생활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아이들은, 모두 5명. 세상에 태어난 김구의 아이들 2남 3녀 중 딸들은 모두 어릴 때 사망하고 아들 또한 독립 전에 사망한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는 아비의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살아 있는 아들들에게 띄우는 그의 생애의 기록이 그리하여 더욱 애잔하다. 그가 이러한 기록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들들에게 띄우는 편지로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 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범의 입을 통해서도 가족과의 삶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입장이, 신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때문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은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일본에 사죄했다. 힘들고 힘들던 그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무릎 꿇어버린 안준생에 통탄하다가도 그저 모두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몇 번을 개명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김구와 그의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대가 낳은 개인의 불행에 울분만이 솟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나오려다 만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냐.

  김구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 개인의 생에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다. 그의 생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다. 그의 연보를 보다 보면 그것이 고대로 그 시기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개인과 나라의 일체화가 그의 생애를 통해 대변된다. 그들에게 오늘의 삶을 빚지고 있다는 상투적인 말이 고스란히 내뱉어진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줄곧 자신이 못생겼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노년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그 온화하게 보이는 얼굴이 꽤나 잘 생겼다고 생각하던 터라 그의 이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을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책 속에 나타나는 흑백사진 속의 아주 작은 그의 얼굴은 또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숟가락을 부수며 엿을 바꿔 먹던 어린날의 개구쟁이가. 그런 어린 아이가 굳은 신념을 가지고 굳건한 활동을 이루어가는 변화를 보며 파동도 없이 흘러가는 내 삶과 신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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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리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썻던 서산대사의 선시이다.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였다.


영욕에 초연하야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쫒는다.

맑음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상권


p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위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p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p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p21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김씨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8대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살았다.


p22 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농사짓고 임야를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이 되었다.


p22 조선시대 군제에는 역둔토(驛屯土) 외에 군역전(軍役田)이란 토지가 있었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이 토지를 경작하다가 유사시에는 징병령에 따라 군에 나가는 제도이다. 울 조상은 텃골 북쪽 고내 넘어 왼쪽에 있는 군역전을 경작한 이후 완전히 ‘패(牌)를 찬 상놈’이 되었다. 군역전을 경작하다 완전 상놈이 된 것은 문을 존중하고, 무를 천하게 여기는 조선시대의 나쁜 풍습 때문이었다.


2) 난산의 개구쟁이


P28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결국 아버님은 3년이 못 되어 공금유용으로 도존위에서 면직되셨다.


P28 아버님의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p29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고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3) 궁핍한 배움길


p33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p37~38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時)・부(賦)를 지어 과문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한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p39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요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2) 동학의 세계로


p42 “동학은 용담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차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眞主)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3) 팔봉 접주


p47 나는 팔봉산 아래 산다고 해서 팔봉이란 접명을 짓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 넉 자를 크게 쓰고, 표어로는 ‘척왜(斥倭)척양(斥洋)’ 넉 자를 써서 높이 걸었다.


4) 청계동 안진사


p57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p58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삶을 좇아 소리 없이 피신한 경우와, 곧 죽을 줄 모르고 날뛰는 무리(동학교도)를 양반적 입장에서 풍자한 것.


5) 스승 고능선 


p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여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p62 “사라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p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였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고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고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절실히 필요한 바를 파악하여 말과 마음으로 전수하여 주는 것)의 교법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p63~64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p65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p66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만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3. 질풍 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p70 산은 들이 좁아 할까 저어하여 저 멀리 우뚝 솟아 섰고

    물은 가는 배가 두려워 얕게 흐르는구나.

⇒ 조선시대 방랑시인인 김삿갓 또는 김립(1807~1863)의 시 「남대천시」. 그의 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으며 전통적인 한시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파격적인 것이 많다고.


p71 조선의 사대물이라 함은 경주의 인경과 은진 미글, 연산의 쇠솥, 함흥의 장승을 이르는 것이다. 이태조가 세웠다는 함흥의 낙민루도 구경하였다.


2) 김이언 의병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p86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 못생기지 아니하였소.


4)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p100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5) 첫 번째 투옥


p106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p106 감옥 안이 극히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에 “고향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이 먼저 가 있도다”라 하였는데, 실로 헛말이 아니었다.


6) 역사적인 심문


p108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을 임금을 섬기시오?“


7) 사형수의 옥중생활


p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6~117 때는 건양 2년쯤이었다. 『황성신문』이 창간된 때였다. 어느날 신문을 보니 나의 사건을 간략히 게재하고, 김창수가 들어간 후로는 인천감옥이 감옥이 아니라 학교라고 쓴 기사를 보았다.


p119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한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럭저럭 저녁밥을 먹었다. 옆사람들이 창수는 특수죄인이니 야간집행을 하려는가 보다 하였다.


p22 사형 정지 이전에는 순전히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하게 여기고 뜨겁게 동정하던 사라들이 나를 찾아왔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머지않아 대군주의 소명을 입어 영귀하에 될 줄 알고, 그때 세도를 얻으면 다른 수가 생기리라 생각하고 와서 아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관리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인천 항내 인사들 가운데서도 그런 빛이 보였다.


8) 파옥


p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2) 삼남견문록


p148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3) 출세간(出世間)의 길


p151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룻누룻 불긋불긋하였다. 가을 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p152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p154~155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p155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디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오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p156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淸淨)적멸(寂滅)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4) 장발의 걸시승


p162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p165 작은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 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사응ㄹ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5) 동지를 찾아서


p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 하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6) 스승과의 논쟁 


p178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 오랑캐’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p181 산골이 가난한 집에서 고명한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터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떠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p186 나는 깜짝 놀라 즉시 처가에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낭자는 병세가 위중한 중에도 매우 반가워했다. 병은 만성감기인데 약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산중이라, 2,3일 후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내 손으로 직접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묘 앞에서 영별하였다.


8) 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p188 신호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의상 양주삼이나 김구 중에 누구를 고르고 누구를 버릴 수 없으니 양쪽을 다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청혼을 받고도 몸이 약한 것을 꺼려 승낙하지 않았던,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김성택을 택하고, 김・양 두 사람은 거절하기로 결심하였다 한다. 어쩔 수 없지만 일의 모양새나 정리상으로는 매우 섭섭하였다.


p192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자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희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p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빈약한 것이다.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p201 "그대의 지금 말은 결코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칠십 노구로 며칠 뒤 왜놈의 노예문적에 편입될 나쁜 운명을 가진 나 같은 놈을 가리켜, 팔자 좋다는 것이 무엇이냐?“

⇒ 김홍량의 조부, 김효영.


p203 여하튼 양반의 세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당당한 그 양반들이 보잘것없는 상놈 하나 접대하기에 힘이 딸려 애쓰는 것을 볼 때 더욱 가련하였다. 나라가 죽게 되니까 국내에서 중견세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위세를 다 부리던 양반부터 저 꼴이 된 것 아닌가.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p204 자제를 교육하라고 권하니 머리 깎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교육은 단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천주학이나 하라는 소린 줄 알고, 자기 가문 중에도 예수교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며 대화를 기피하였다.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3) 각 군 순회 교육운동


p208 나는 해주에 도착한 즉시 투옥되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검사가 안중근과의 관계를 질문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는 안중근 집안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지만 이번의 하얼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검사는 김구라고 쓴 100여 쪽의 책자를 내놓고 신문했다. 그 책은 내가 수년간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본 관헌과 반목한 것에 대한 경찰의 보고를 모은 것이었다.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p213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그는 먼저 인력거를 끄는 차부를 죽이고 이완용의 생명은 다 빼앗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던 것이다.


5) 신민회와 안악 사건


p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6) 세 번째 투옥과 고문


p219 왜놈이 한국을 강점한 후 첫 번째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한 것이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먼저 안명근을 잡아 가두고는, 계속하여 전 도내의 지식계급과 부호를 일일이 압송하였다. 경성에 이미 배치한 감옥, 구치소, 각 경찰서 구류소에는 미처 수용할 수 없으므로, 집물창고와 사무실까지 구금소로 사용하면서 임시로 창고 안에 벌집과 같은 감방을 만들었다. 나도 그곳에 옮겨 수감되었는데, 한 방에 두 명 이상은 가두어 두기가 불가능했다.


p225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 요렇게 외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리.


p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채찍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것, 두 손을 등위에 포개고 오랏줄로 결박하여 천장의 쇠고리에 끌어올리고서, 심문받는 자를 둥근 걸상 위에 세웠다가 오랏줄 한 끝을 한편에 잡아매고 발판을 뽑아버리면 온몸이 공중에 매달려 질식하게 되는데, 그수 결박을 풀고 냉수를 온몸에 끼얹어 숨이 돌아오게 하는 것. 화로에 쇠막대기를 즐비하게 늘어놓아 벌겋게 달군 후 그 쇠막대기로 온몸을 함부로 지지는 것, 손가락 크기의 농목 세 개를 세 손가락 사이에 기우고 나무 양끝을 노끈으로 동여매는 것, 거꾸로 매단 후 콧구멍에 냉수를 부어넣는 것 들이 그것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신문할 때 음식을 보통 수인의 반으로 줄여 생명만 유지하게 해놓고, 친척이 사식을 청원하여도 신문 주임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도로 내보낸다. 신문 주임 되는 놈은, 사실 유무는 관계치 않고 거짓말이라고 왜놈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하는 수인에게는 사식을 허락하고, 반항성이 있어 보이면 절대로 허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치장에서는 자연히 사식을 받아먹는 자는 강경치 못해 보이게 된다.

      그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좋은 음식도 대접하고 훌륭히 장식한 아카시의 방으로 데려가 극진히 공경하며 점잖게 대우하는 바람에, 가혹한 고문을 참아낸 자도 그 자리에서 실토한 사람이 더러 있다.

      내가 신체 고문에는 한두 번 참아보았고, 저놈이 발악을 하면 나도 감정이 발하여 자연 저항력이 생기므로 인내하였지만, 둘째와 셋째를 당하여 참아내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두 번째는 굶주림이니, 처음엔 밥이라야 껍질 절반 모래 절반에 반찬은 소금이나 쓴 장아찌 꽁댕이를 주는데, 구미가 없어서 안 먹고 도로 보내기도 하였다.


p228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7) 기약없는 15년형


p237 이것은 이른바 ‘강도 사건’으로 선고된 것이었다.


8) 서대문감옥으로


p237 5년 이하는 세상에 나갈 소망이 있으나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p238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십수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을 교훈하였으므로,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나의 변화는 경무총감주에서 신문받을 때 와타나베 놈이, 다시 마주앉은 오늘의 김구가 17년 전 김창수인 것도 모르고, 대담하게 자기 가슴에는 x광선을 붙이고 있어 출생 이후 지금껏 나의 잎에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당장 쳐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9) 옥중의 의・식・주


p252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p254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10) 기인과 영웅


p258~259 조선시대 이전은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도적이란 이름부터 명예롭지 않거든 누가 도적질을 좋은 직업으로 알고 행할 자 있으리오만, 대개가 불평자의 반동적 심리에서 기인된 것이외다. 고려 말 이성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 나라를 얻은 후, 당시에 두문동 72인 같은 사람들 외에도 고려 왕조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자 많았을 것이오. 그러한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 혹은 집단하여 가지고,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붙들고자 하는 선의와,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보복적 대의를 표방하고, 구석진 곳에 동지를 소집하였습니다. 조선의 은총과 국록을 먹는 자, 백성을 착취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족속과 부유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년 동안 압박・도살하여 온 것이외다.


p261 조직 방법에 대하여는 근본 비밀결사인 만큼 엄밀하고 기계적이므로 설명을 충분히 해드리기 어려우나, 노형이 연구하여 보아도 단서를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부터 말씀하지요.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각 도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 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p264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옥중의 수인들 중에도 이같은 강도의 인격이 제일이므로, 왜놈에게 의뢰하여 순사나 헌병보조원 등 왜관리를 하다가 들어온 자는 감히 수인들 중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사기・절도・횡령범들도 강도 앞에서는 옴짝을 못하기 때문에 수인계의 권위를 강도가 잡고 있었다.


p267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 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p268 잔기를 2년도 채 못 남기고 서대문감옥을 떠나 인천으로 이감하게 되었다. 원인은 내가 제2과장인 왜놈과 싸운 사실이 있었는데, 그놈이 비교적 고역이 심한 인천 축항 공사를 시키는 곳으로 보낸 것이다.


6. 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p273 선유진을 거쳐 여물평을 건너가며 살펴보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이 쏟아져 나오는데, 선두에 계신 어머님이 내 걸음걸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와서 붙들고 말씀하셨다.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2) 농감생활

p279 나는 소작인 준수규칙 몇 조를 반포했다.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 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학령 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 두마지기를 회수함.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p281 어린 딸아이 은경이가 사망하고 처형 역시 사망하여 그 땅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3) 상해 망명


p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p286 민국 2년(1920, 45세)에 아내가 인이를 이끌고 상해로 건너와 같이 살았다. 본국에서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하니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민국 4년(1922)에 상해로 건너와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에 신이가 태어났다.


p287~288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p288~289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p289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p290~291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에는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 온 후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p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해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할 때―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p298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p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1. 상해 임시 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p300~301 상해에 모여든 500여 명의 인원은 어느 곳에서 모여들었든지, 우리의 지도자인 연로한 선배요, 젊고 굳센 청년투사들이다. 당시 상해에 먼저 도착한 인사들은 벌써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회담의 대표로 파송하였고, 김철을 본국 대표로 파견하였다.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전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2) 경무국장 시절


p302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p302 남의 조계지에 붙어 사는 임시정부니만치, 경무국 사무는 현재 세계 각국의 보통 경찰행정과는 달랐다. 그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을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나는 정복과 사복 경호원 20여 명을 임명하여 이 일을 수행하였다.


p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p309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 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p310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第)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 총리 이동휘의 공산혁명 주장에 대한, 일제시기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제3국제당으로부터의 독자성의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거론하며.


p313~314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깨우쳐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었다. 한독당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이유필․차이석․김붕준․김구․송병조 등을 지도자로 하여 창립되었다. 이로부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조직을 따로 가지게 되었다.


p315 동북 3성의 정의․신민․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 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고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p316 임시정부는 마침내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의정원에서 일대 문제가 되었다.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는 말을 억지로 권유하기에 나는 사양하였다. 의장이 다시 강권하기에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다.

     첫째 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고 하더라도, 해주 서촌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둘째 이․홍 양씨도 호응하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거늘,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할 인재가 없을 것이다.


p319 나는 최초에는 정부의 문파수를 청원하였으나, 끝내는 노동총판, 내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역임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나의 문파수 자격이 진보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경제난이 극동 달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명성이 쟁쟁하던 인가가 몰락하여,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된 것과 흡사한 형편이었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 이봉창


p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 이봉창의 말. 그는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미수에 그쳤다.


2) 일본 천황 불행부중(不幸不中)


p326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나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p328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처도 만국일보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p331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아래 사진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흐트러짐없는 꼿꼿한 자세. 이 사진을 보며 전율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발견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하 뒤 일본군은 윤봉길의사의 이 경건하고 굳건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아주 왜소하고 부랑자 같으며 끊임없이 불안에 가득찬 허름한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윤봉길이라 주장하며 사진을 배포했다. 뚜렷이 보이는 골격의 차이에도 일본군은 강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정신을 훼손하고 나약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사람을 내보임으로써 약한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 일본인들에 대해 조소를 금치 못하겠다. 나아가, 윤봉길....그의 나이 이십대. 그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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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19일 일제가 윤봉길 의사를 총살하는 장면.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한겨레 자료 사진


4) 홍구공원의 쾌거


p339 나는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하였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세계 각국에서는 동경 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계획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41 관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라기보다다 비관적인 편이 더 많았다. 나에 대한 한인 교포들의 유일한 불만은, 4.29 사건 이후 신변이 위험하여 내가 평소 친지들의 면담 요구에 함부로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p343 불란서 조계지를 지나 중국지역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고, 나와 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2) 광동인 장진구


p348 나는 날마다 묘지기를 데리고 산과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는 데 무한한 취미가 생겼다. 본국을 떠나 상해에서 생활한 14년간, 다른 사람들이 남경․소주․항주의 산천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천이 극히 그립던 차에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하였다.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p352 명대 시절 우리나라의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p352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p353 정주(성리학)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없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 5당 통일운동


p359 5당 통일이 형성될 당시부터 동지들은 단체 조직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극히 만류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은 통일하자는데 내용이 복잡하여 아직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어찌 차마 딴 단체를 조직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소앙이 한독당 재건설을 추진하니, 내가 단체를 조직하여도 통일의 파괴자는 아니며, 임시정부가 종종 위험을 당하는 것은 튼튼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 1935년 11월 항주에서 김구, 이동녕, 조완구, 엄항섭, 박찬익 등이 결성했고 1940년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함께 한국독립당에 합류하게 된다.


3) 폭격 속의 남경생활


p360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회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해남도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


p361~362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여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 요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지만, 안중근의 가족은 그 외에는 시대적인 신념이 덜 했던 듯하다. 시대적 신념을 떠나 가족에 대한 정과 의리도. 그런 것들이 김구의 가족과 비교된다.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p365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년 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경과 사실의 모년 모일을 기입한 것은 본국에 계신 모친께 편지를 올려 답장을 받아 기입하였으나, 지금 하편을 쓰는 때에도 어머님이 곧 생존하셨더라면 도움이 많았을 터이건만, 슬프도다!


p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p369 그날 남목청에서 연회가 시작될 때, 조선혁명다원으로 남경에서부터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 하여 내가 금전 보조도 해준 적이 있는 이운환이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 평소 이운환은 임정 어른들이 자기편 견해를 고수하여 일에 별 진전이 없었고 조선혁명당 청년들에게 주는 생활비가 적어 불평이 많았다고.


p371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님께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지내다가, 거의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신이가 사실을 알려드렸던 것이다.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2) 7당 통일회의


p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메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 광복군 창설


p386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 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 광복군 제3징모처 신봉빈 여사. 상덕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수감되어 있던 4.29 홍구폭탄 사건 후 귀국한 이영근의 처제, 민단 사무원으로 체포되어 귀국한 송진표의 아내.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p387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로 왜의 미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도나, 광복 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 금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가하여 일본의 정탐꾼을 암살한뒤 상해로 건너와 민단 사무원이 되었다. 비밀공작으로 왕래하다 왜구에체 체포되어 본국에 가서 20년 징역형을 받았고 가족 모두 왜구에 의해..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p395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 중국 인사들이 중한문화협회에서 50여명의 청년 환영회 개최 행사에서 한 청년의 답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


2) OSS국내침투훈련 


p397 우리 청년학생들은 훈련시키는 미국 장교들이 각자 맡은 과목을 실습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 박사가 각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시험하여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파괴술을, 지적 능력이 강한 자는 적정 정탐으로, 눈 밝고 손재주 있는 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분과 과목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심리학자가 시험 성적의 개요를 보고하였는데, 특히 한국 청년은 앞으로 촉망된다고 하였다.


3) 왜적의 조기항복


p399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 나 또한 언제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허무했다. 어린 마음에도 일본의 항복이 기쁘지 않았던 그때. 며칠만 있었더라면 우리의 힘으로 독립되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련만, 안타까움, 또 안타까움.


4) 중경생활 회고


p402 비단 중경뿐만 아니라 남안과 토교에 사는 동포들도 중경과 같이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곳곳마다 생활이 부족하다는 원성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곳 생활은 지옥생활인 줄 알고 살아가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p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 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p403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은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p406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가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5) 해방 직후의 상해


p408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며,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죄하고 1936~1942년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를 자신의 애비라 칭하였다.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p409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명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 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p411 22세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23세 때 탈옥, 도주하였고, 41세 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하였다. 17년 전에 파괴하고 탈주하였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옛날 그대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17년(1929) 전 김창수는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세월 또한 오래 흐른 관계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


p412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 물러나지 않고 속세에 들어 앉아서도 꿈인듯 싶다.



- 나의 소원 -


1) 민족국가


p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자주 듣언 김구의 소원. 그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일까.


p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새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p425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도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약, 그리고 그 침약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2) 정치이념 


p426-427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범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p427~428 우리 나라의 양반 정치고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p428~429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p429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 예전엔 나도 다수결의 복종에 당연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그 다수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며, 다수결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다수결이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버린..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나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p430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p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432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거니와, 적은 아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며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 할 수 밖에 없다.한없이 주기 위함이다.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p433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 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1947년 샛문 밖에서


 



3. ‘내가 저자라면’


■ ‘백범일지’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상권

- 인.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2) 난산의 개구쟁이

 3) 궁핍한 배움길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2) 동학의 세계로

 3) 팔봉 접주

 4) 청계동 안진사

 5) 스승 고능선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2) 김이언 의병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4) 복수 의거,치하포 사건

 5) 첫번째 투옥

 6) 역사적인 심문

 7) 사형수의 옥중생활

 8) 파옥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2) 삼남견문록

 3) 출세간의 길

 4) 장발의 걸시승

 5) 동지를 찾아서

 6) 스승과의 논쟁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8) 교육자의 길,그리고 결혼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3) 각 군 순회 교육운동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5) 신민회의 안악 사건

 6) 세번째 투옥과 고문

 7) 기약없는 15년형

 8) 서대문감옥으로

 9) 옥중의 의.식.주

 10) 기인과 영웅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6. 망명의 길

 1) 출옥,고향으로

 2) 농감생활

 3) 상해 망명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하권

-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2) 경무국장 시절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 이봉창

 2) 일본 천황 불행부중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4) 홍구공원의 쾌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 광동인 장진구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 5당 통일운동

 3) 폭격 속의 남경생활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5) 가슴에 박힌 총탄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2) 7당 통일회의

 3) 광복군 창설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2) OSS국내침투훈련

 3) 왜적의 조기항복

 4) 중경생활 회고

 5) 해방 직후의 상해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 나의 소원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쓴 자서전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상권은 아들 인과 신에게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온 개인적인 행로를 들려주기 위해 쓴 글이다. 백범의 나이 53세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쓰여진 글이다.

 백점일지 기술의 명확인 이유를 백점의 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 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 고립무원의 외딴 성에 해마저 진다는 뜻으로 패망이 얼마 남지 않거나 위세가 덜어진 쓸쓸한 모습을 말한다- 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로,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상권은 그의 일생의 기록이므로 그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중년의 삶들을 회고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권은 그의 행적의 기록이지만 그가 행한 구체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느낀 그의 생각과 감정들을 함께 기술하고 있어서 백점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함께 파악할 수 있다.

 상권이 보다 개인적인 생애에 관한 기록이라면 하권은 백범의 활동을 보다 조직적인 관점, 임시정부 활동과 그 당시 활약하던 다은 인물들과의 관계를 중점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개인이 속한 조직의 활동 내역이라 불릴 만하다. 백점은 하권의 집필에 관하여 자신이 활동한 50여 년의 기록을 보며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고 하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이 글은 백범의 일생의 기록이다. 일제시기와 독립 후의 격랑의 세월 속에서 살았던 백범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므로 사회적 상황 속에 놓인 한 개인이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는 고대로 감동의 기록이다.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과정의 담담한 서술들은 그의 행동에 대한 감동이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행동을 하게끔 이끄는 그의 내면 속에 자리한 생각들도 역시 감동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그의 소원에 관한 글이 아닐까. 하나하나 두루두루 곱씹는 맛이 좋다. 백범의 나의 소원! 또한 그것이 그의 일생과 더불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 보완점


 개인의 생애에 대한 자서전에 관한 한,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쓰여진 백범의 자서전 상권은 마치 한편의 소설을 보는 것처럼, 현실에서 일어난 것인가 하듯이 드라마틱하다. 그의 글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없이 쓰여진 것 같은데도 글들이 휘날리는 듯하다.

 사실적인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러한 행동 이면에 있던 백범의 생각을 함께 말하고 있어 그의 행동의 동기, 생각들을 일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시간적인 흐름으로 정리한 것이 일제시기와 임시정부수립 이후의 활동들에 관한 역사를 함께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개인의 성장의 기록이자, 독립운동의 역사를 파악하게 되어 미흡한 공부를 더하는 느낌이었다. 개인의 기록이라 정확한 인명이나 시간이 헷갈릴 수 있음을 주해자의 설명에서 정정하며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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