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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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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일 08시 35분 등록

사마천 사기열전 2013.07.01.

 

사마천2.jpg 사마천3.jpg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 먹고

해구신을 고아 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이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 년의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 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 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Ⅰ. 저자에 대하여

 

1-1. 사마천이 태어날 당시 시대적 배경

 

B.C. 2세기 한 무제가 통치했던 재위 54년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사상, 문학 등 그 동안 축적되어온 문화들이 화려하게 빛났던 시기로 불려진다. 한 무제가 당대의 사상가인 동중서를 중용하며 공자의 춘추를 국가통치 기본 원리를 삼고 있었으며 이런 여러 모습들은 사마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2. 나의 집안은 역사가

 

<사기>-‘태사공자서’에 따르면 사마천(B.C. 145~86)의 선조는 태고시대부터 대대로 하늘과(천문관찰) 땅(사건기록) 두 세계에 깊이 관련된 신성한 관직을 맡아왔다. 서주와 동주시대를 거쳐 사마씨 일족은 춘추전국(B.C.770-221)의 난세에 휩쓸려 여러 나라로 흩어져서 역사 기록에 관련된 사람도 사라진다. 즉 나의 조상은 주(周)의 사관이었다.

나의 조상 사마씨는 하늘과 땅에 관련된 신성한 관직을 맡아오다가 오로지 역사 기록만을 취급하는 사관으로 바뀌었지만, 일족 가운데 선조의 업을 면면히 계승해오면서 이를 부활시킨 인물이 수백 년 만에 나타난다. 그가 바로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다. 나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사관이 가져오는 문서나 기타 기록을 정리 보존하는 태사령이었다.

 

1-3. 나의 아버지 사마담의 평생의 꿈

 

나의 아버지 사마담은 진으로 이주한 사마씨 계통 사람이다. 아버지는 천문, 역, 노자의 도가사상에 통달하고 한무제 (7대,B.C141-87)가 즉위한 다음해(B.C.140)에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태사령이란 업무는 천문, 역법에서부터 역사 기록까지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탐탁지 않았다.

 

취임과 동시에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용문에서 수도 장안(서안)으로 이주했다. 태사령이 된 아버지는 일찍부터 크나큰 구상이 있었다. 유가의 공자(B.C. 551-479)가 지은 역사서 <춘추>는 노나라 애공(B.C.481)에서 끝이 난다.

그 후 춘추전국의 난세, 진왕조의 성립과 멸망, 나아가 한 왕조가 성립하고 어지럽게 계절이 변하고 4백 년 가까이 지나간 세월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는 씌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사마담은 이 역사 기술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선조의 업을 계승한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각지에 흩어진 옛 기록을 의욕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했다. 한편 이 큰 사업을 아들인 나 사마천에게 역사가가 되는 데 필요한 특별 훈련을 시킨다.

 

한무제는 태산에서 천지를 제사하는 봉선을 단행했다. 봉선은 절대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의 일대 시위로서 무제 이전에는 기원전 219년에 진의 시황제가 거행한 것이다. 한나라 태사령인 사마담은 시황제 이래 100여 년 만에 거행되는 이 성스러운 의식에 입회할 것을 고대하고서 무제를 모시고 태산으로 향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가 주관하는 봉선의식에 참석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봉선에 참가하고자 하는 관리들이 너무 많아 하급 관리들은 소외 되었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으나 태사령으로서 봉선의식에 참석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봉선의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자 그것이 병이 되었다. 아버지는 주남(낙양부근)까지 갔을 때 꼼짝도 할 수 없게 앓아누워서 결국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하고 말았다.

 

병이 깊어진 아버지 사마담은 아들인 나에게 유언으로 공자가 춘추를 저술한지 500년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수 많은 현군, 충신들이 그 수효가 너무나 많다며 사관으로써 이들의 기록을 남기려 했으나 병이 깊어 행하지 못함을 원통하게 생각하며 그 한을 풀어 줄 것을 사마천에게 유언으로 남기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110년 나 사마천의 나이 36세 때이다.

 

1-4. 극성 아빠 사마담

 

중국의 극성 엄마 1호는 맹모다. 극성 아빠 1호는 사마담이다.

 

여섯 살 이전 나는 부유하지 않은 지방 호족의 자식으로 용문에서 목축을 도우면서 한가로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장안으로 이주한 아버지로 인해 나의 생활도 크게 바뀐다.

 

역사가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질은 문헌을 읽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부터 고문(한대 이전의 문자)으로 쓴 문헌과 기록을 읽는 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10년을 훈련한 뒤 나는 어떠한 문헌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열 살때부터 아버지 사마담은 나 사마천을 프로그램에 맞춰서 교육 시켰다. 일찍부터 아버지눈 나의 자질을 확인하고 나에게 역사책을 정리하는 역할을 부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가가 아무리 문헌을 잘 읽는다 해도 거기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 사마담은이미 성인이 된 나를 역사가 전개된 장소의 실지검증, 곧 현지조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B.C. 126. 20세가 된 나는 중국 각지를 순례하는 대여행에 나섰다.

 

<태사공자서>에 보면 나의 여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잠시 살펴보자.

 

우선 남쪽으로 장강, 회수 유역을 여행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회계산에 오르고, 우 임금이 죽을 때 들어갔다고 하는 동굴탐험도 했다. 이어서 순 임금이 묻힌 구의산도 올라가 보고, 호남성을 흐르는 하천인 원수, 상수를 배로 여행했다. 그러고 나서 북쪽으로 향해 산동성에 있는 하천인 문수를 거쳐, 산동성에서 발원하여 강소성 회수로 흘러드는 하천인 사수도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옛 도성에서 학문을 익히며 공자의 유풍을 관찰하고 추현과 역현에서 유가의 가예인 활쏘기 의례인 향사의식에 참가하였다. 그 뒤 산동성에 있는 파현, 설현과 팽성현에서 모진 어려움을 겪고, 전국시대 위나라 수도인 대량과 한 고조가 군사를 일으킨 풍, 패를 포함한 서초를 지나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나는 2년 남짓한 세월동안 여행하면서 각지의 역사 유적을 조사하고 옛 기록을 수집했다.

향사와 같이 당시까지 남아 있던 옛 의례를 살펴보고 또 구전하는 전설과 설화를 채집했다.

후에, 내가 <사기>를 저술할 때 현장답사하고 면밀하게 조사해서 얻은 압도적인 현장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이러한 안목은 먼 과거의 사건과 역사 인물을 ‘지금 여기’의 사건과 인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사기>를 읽다 보면, 여행할 때 보고 들었던 지식을 자연스럽게 삽입하여 역사적 과거에 현재가 겹쳐지도록 서술한 장면을 접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어조는 먼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되살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위세가,44권)에서 전국 칠웅의 하나로 열거되는 위나라의 흥망을 묘사한 뒤, 나는 이렇게 비평을 덧붙였다.

내가 위나라의 옛 도읍지 대량의 폐허에 들렀을 때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대량을 함락시켰을 때, 하구의 물을 대량으로 흘려보내 3개월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항복을 빌었지만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하략)

 

폐허와 그것이 내포하는 역사적 시간의 연쇄, 폐허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은 내가 사기를 서술할 때, 현장에서 본 유적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1-5. 아버지 유언을 받들다

 

2년여의 여행을 마친 나는 스물 두 살에 낭중에 임명되었다. 35살 때 (B.C. 111)때 무제의 명을 받고 파, 촉으로 원정하고 서남쪽으로 더 내려가 공,착, 곤명등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공략하는데 참가했다. 이는 서남 이민족을 평정하기 위해 무제가 파견한 군대를 따라가는 공적인 여행이어서 자유로이 각지를 편력한 첫 번째 여행과 분명히 질이 달랐다. 나는 이 기회에 첫 번째 여행 때 가보지 못했던 중국 서남부를 주파하고서 더욱더 견문을 넓혔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즉시 주남으로 달려가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만나 본다. 아버지 사마담은 자신이 손수 역사가로 길러낸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내가 죽거든 너는 틀림없이 태사령에 임명될 터이다. 태사령이 되거든 내가 써내고 싶어 한 책(역사서)을 반드시 완성하기 바란다” 고 절절히 호소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버지 손을 꼬옥 붙잡고 약속했다

“저는 재주가 없는 몸이지만 대대로 전해져온 역사 기록을 모두 논술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하고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 편찬의 집념은 사마담에게서 아들 사마천 나에게로 이식되었다. 이때 나의 나이 36세였다.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만나 본 다음, 나는 그대로 태산으로 향해 아버지 대신 봉선 의식에 참가했다. 그 뒤 무제는 곧바로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선 동쪽으로 황해 연안(산동성)으로 갔다가 이어서 북쪽으로 올라가 멀리 만리장성의 북동쪽 갈속 요녕성에 이르고, 거기서 서쪽으로 나아가 구원(내몽고자치구)까지 갔다가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장안으로 돌아오는 큰 행행을 감행하였다. 이때 무제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사마천은 북대지대도 주파하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쳐서 동서남북 중국 대륙을 구석구석까지 돌아본 나는 역사가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대여행가였다.

 

1-5. 한무제가 변했어도 너~~~무 변했어.

 

아버지 유언대로 나는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현대어로 말하면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쯤 된다. 나라 기록관도 겸하고 있다. 황제가 움직이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기록을 남겨야 되고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존해야 한다. 태사령으로 공무를 집행하면서 공무가 끝나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다.

나이 42세가 되자 그 동안 아버지가 남긴 자료와 10여 년 전부터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사기 집필에 착수하고 일생을 걸고 후세에 길이 남는 작업을 시작했다. B.C. 99년 내 나이 47세, 나에게 뜻하지 않은 운명이 다가왔다. 바로 ‘이릉의 변호한 건’ 즉 ‘이릉의 화’이다.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갔던 이릉이 패전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릉이 오천의 정예병으로 북방의 흉노군 1만을 베었다. 하지만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 탓에 이릉 장군의 5천 결사대가 그만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8만의 흉노군에 포위를 당해 항복을 한 일이었다. 이때 생겨난 고사성어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이에 한 무제는 항복한 것이 치욕적이다며 이릉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사마천은 이릉의 공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번 패한 것으로 벌하는 것은 잘못이다며 구원군을 보내지 않은 총사령관 이광리를 벌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광리는 무제가 총애하는 후궁의 오라비였다.

 

나 사마천이 이릉을 위해 한무제에게 고한 글이다.

 

“이릉은 평소부터 맛있는 음식이나 조그만한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나누어 가지는 태도로 부하 장병을 대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부하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던 것입니다. 옛날 이름난 장수도 이보다 더 잘했을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패배하여서 적에게 사로잡히기는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패배의 죄를 충분히 갚을 만한 공을 세워서 한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라고 있을 터입니다. 패배한 죄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만 그가 흉노군을 격파한 공적만큼은 역시 세상에 밝히기에 족합니다.”

 

나 사마천은 왜 무제의 노여움을 건드리는 위험을 무릎쓰고 대놓고 이릉을 변호했을까?

 

첫째로 나의 오산이다. B.C.110년에 봉선을 마친 무제의 대행 때 줄곧 수행하기도 하고, 또 태사령이 되어서는 국가적 사업인 태초력 제작에 종사하는 등 나는 무제와 접촉할 기회도 많았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심성의껏 정론을 펴기만 하면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나의 오산이다. 예상과 달리 한 무제는 미친개 뛰듯이 발기발기 노하여 나를 궁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왕좌에 너무 오래 앉으면 그 총명함은 빛을 잃어간다. 한무제가 바로 그 예이다. B.C. 141. 16세에 즉위한 한무제는 이릉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재위한 지 43년, 나이가 58세였다. 이 무렵부터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에 앉은 폐해가 이 위대한 황제를 좀먹기 시작했다. 무제는 신선사상에 몰두하고 사치를 탐했으며, 총희 이부인에게 빠지는 등 기이한 말과 행동을 일삼고 이미 판단력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 사마천은 이미 부패해버린 무제의 변모를 보지 못했다.

 

나의 어리석음이다. 내가 거리낌없이 이릉을 변호하는 논진을 편 또 다른 까닭은 그때까지 사람의 심리를 읽고, 어둡고 끔찍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슬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사령 사마담의 아들로서 유소년 시절부터 역사가가 되기 위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자라서는 각지를 여행했으며, 아버지를 여윈 다음에는 뒤를 이어서 수월하게 태사령이 되었다. 나의 인생은 47세 이릉의 사건에 연루되기 까지 권력지향과 인연이 없는 역사라고서 극히 순조롭고 심각한 좌절과는 무관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입신출세와 보신을 꾀하는 조정의 교활한 정치 관료, 문화 관료와는 근본부터 다른, 좌절을 모르는 사람의 무방비가 도리어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1-6. 인생이 계획대로 안돼?

 

이릉이 흉노에게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화가 난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그 다음, 이릉을 변호한 괘씸죄에 걸린 나는 형벌을 선택해야 할 운명이다. 나를 흠모한 한국의 문정희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 먹고

해구신을 고아 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이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 년의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 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 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한 인간이 당한 지독한 불행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역사에 남을 업적으로 운명을 바꾼 위대한 사나이 ‘사마천’에 대한 칭송의 시. 기둥이 지닌 이중적 의미?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방안. 일명 속전(贖錢)이 있었다. 두번째 방법은 궁형,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궁형을 선택해야만 했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지 못함이 나에게 더 큰 불행이었기에 작은 불행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 나이 49세에(지금 나이로는 거의 환갑이다) 내 손으로 나의 성기를 잘랐다. 처절한 선택을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5년 후에 사기를 탈고했다. 사기는 나의 <피>로 쓴 책이라는 것을 밝힌다.

 

내 나이 51세 때 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내가 당시 얼마나 치욕감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아홉 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멍하니 무엇인가를 잊은 듯 어처구니가 없고 자꾸만 부끄러워져 언제나 등골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 나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1-7. 사기는 나의 운명

 

나를 지탱해준 것은 아버지 사마담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떻게든 역사서를 저술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러나 죽음보다 쓰라린 일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사는 길을 선택한 나에게 <사기>를 저술하는 일은 이미 아버지를 의식한 사명감이 아니라 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이미 ‘몸을 훼손하여 ’ 현실 사회에서 인간 실격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비정한 관찰자로 변하여, 태고 이래부처 그가 살아간 한 대까지의 역사적 메커니즘을 투사하여 기록하려는 처절한 집념뿐이었다. 이런 나에게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은 절망의 심연에서 몸을 일으켜 분노를 터뜨려 글을 쓴 이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태사공이 세상을 떠난 지 삼 년 만에 나 사마천(39세)은 태사령이 되어 사관의 기록과 (황실 도서관) 석실, 금궤에 보관한 책들을 꺼내 모았다. 그로부터 오년 뒤가 태초(太初) 원년이다. 그해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천력(정월을 한해의 시작)이 비로소 바뀌어 명당을 세우고 모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태사공은 말한다.

“선친께서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고, 공자가 죽은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년이 되었으니 다시 밝은 세상을 이어받고 <역(易)전을 바로 잡고 <춘추>를 이어받고, 시, 서, 예, 악의근본을 밝히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선친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그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로부터 칠 년 뒤(49세)에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내가 언급한 저작들은 한결같이 저자들이 불우한 시기에 완결시킨 이른바 ‘발분(發憤)의 저작’들이다. 나는 이를 두고 “저자들이 마음 속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 방법을 찾은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자결하지 않고, <사기(史記)>에 매달린 이유를 여러분에게 털어놓는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 것입니다.(故述往事 思來者)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이런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태사공자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를 쓴 까닭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 이는 역사라는 것이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까닭이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과<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가하는 바를 펼쳐보이려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인 주문왕은 유리에 갇혀서 <주역>을 지었다.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부근에서 재난을 당하고서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쫒겨나서 <이소>를 지었다. 좌구명은 실명하고서<국어>를 완성했다. 손자(손빈)은 발을 자르는 형을 받고서 병법을 논술하였다.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어서 후세에 <여씨춘추>를 전했다. 한비자는 진나라에서 투옥되어 <세난,고분>두편을 썼다. <시경>에 수록된 시 300편의 대부분은 성인, 현인이 분노를 터뜨려서 지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감슴에 맺힌 것이 있는게 그것을 배출할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진술하고 미래로 생각을 내달렸던 것이다. 이날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도당요부터 인지 한나라 무제가 기린을 얻어 발 모양을 주조한 것을 말함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서술하였다. 기록은 황제부터 시작된다. 1백 30편으로 완성하였다.

 

역사 기록을 취급하는 태사령의 직을 잃은 나는 중서령의 직을 수행하면서 묵묵히 사가판 역사서인 사기를 계속해서 써나갔다. 그리하여 B.C. 90. 56세에 드디어 탈고하고 4년 뒤 B.C. 86. 60세에 나는 세상을 달리했다. 나의 숙적 무제가 죽은 이듬해의 일이이다.

 

<태사공자서>는 <사기> 전체의 서문이며 동시에 아버지 사마담과 사마천 자신의 열전에 해당한다. 전체 내용은 먼 조상으로터 자신의 대에까지 이어진 가계, 아버지 사마담의 생애와 업적, 사마담과 사마천의 역사관의 학문적 배경, 사마천 자신의 전반기 생애, 아들 사마천에게 가업을 전승하고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어줄 것을 당부하는 사마담의 유언, <사기>편찬의 동기와 이에 얽힌 자신의 후반기 생애, <사기> 전체의 편제와 구성의 의의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죽음에 임하여 아들에게 전하는 사마담의 유언에는 역사가로서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과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석연치 않은 까닭으로 배제된 울분, 역사 기록의 숭고한 의의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상함, 가업으로 이어진 직분에 대한 자부심과 아들에 대한 신뢰가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1-8. 임소경에게 답하는 편지

 

반고가 쓴 한서에 사마천 열전이 있다. 그 열전에 <태사공자서>와 <보임안서>가 있다. 이 보임안서가 임소경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임안이 내가 궁형 당하기 전에 보낸 편지가 있었다. 바쁘고 궁형 당하는 와중에 임안에게 답장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기를 다 완성한 후, 임안이 처형당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처지도 생각나서 임안에게 답장을 보냈다.

사마천이 B.C. 93년, ‘무고의 난’ 곧 무제의 후계자인 여태자와 그의 어머니 위황후가 일으킨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눈앞에 둔 벗 임안에게 보낸 편지의 한구절이다. 사건 뒤 6년이 지났지만 나 사마천 스스로 이릉을 변호한 일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후회하지 않고 있음을 격렬한 문체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족하(비슷한 연배에서 상대방을 높이는 말)의 편지에 진작 답장을 드려야 했으나 마침 천자를 모시고 동쪽 지방을 다녀왔고 또 잡다한 일에 쫓겨서 만날 기회도 더욱 줄어들어 잠시 짬을 내어서 제 생각을 다 털어놓을 겨를도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불측한 죄를 지은 지 한 달이 지났고 이제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다가옵니다. 저는 또 천자를 딸 옹으로 가게 되었은데 그 사이에 갑작스럽게 차마 말 못할 일을 당하신다면 이는 저로서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맺힌 울분을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먼 길을 떠난는 족하의 혼백이 끝없는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루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니 오랫동안 답장을 드리지 못함을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건대, 몸을 수양함은 지혜의 표시이며, 베풀기를 좋아함은 어짐의 발단이며, 정당하게 주고 받는 것은 의리의 표현이며, 모욕을 부끄러워함은 용기를 판단하는 표준이며, 명성을 세우는 것은 품행의 극치라고 합니다. 선비는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소유한 뒤에댜 세상에 몸을 맡겨서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익을 탐하는 것보다 더 참혹한 재앙이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슬픔이 없으며,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악한 행동이 없으며,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이 없습니다.

 

사람은 본디 한번은 죽지만 죽음에도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으니 이는 죽음에 나아가는 태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 최상은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 그 다음은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일, 그 다음은 체면을 더럽히지 않는 일, 그 다음은 언사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 아래는 잘못을 저질러 몸이 구속되는 욕을 당하는 일, 그 아래는 붉은 죄수복을 입는 욕을 당하는 일, 그 아래는 형구를 차는 욕을 당하는 일, 그 아래는 묵형을 받아 살갗이 훼손되고 발이 잘리는 치욕을 당하는 일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궁형으로서 극형입니다.

 

그러나 제가채욕을 참고 구차히 살아남으며 더러운 처지에 빠져서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그러내지 못한 바가 있는데 이대로 비루하게 살다 죽으면 뒷날 저의 문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한스럽기 때문입니다.

 

서백인 주문왕은 유리에 갇혀서 <주역>을 지었다.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부근에서 재난을 당하고서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쫒겨나서 <이소>를 지었다. 좌구명은 실명하고서<국어>를 완성했다. 손자(손빈)은 발을 자르는 형을 받고서 병법을 논술하였다.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어서 후세에 <여씨춘추>를 전했다. 한비자는 진나라에서 투옥되어 <세난,고분>두편을 썼다. <시경>에 수록된 시 300편의 대부분은 성인, 현인이 분노를 터뜨려서 지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지나간 일을 서술함으로써 미래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좌구명처럼 눈이 없고 손자처럼 발이 잘린 사람은 끝내 쓸모가 없어졌지만 물러나 글을 써서 저술을 하여 분한 마음을 발산하고 포폄과 시비를 가하여서 자신의 견해를 남기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서 근래에 천박한 문장에 제 생각을 담고 천하게 흩어진 오래된 전승을 망라하여 역사 사실에 견주어서 검토하고 성패와 흥망의 이치를 탐구하여 모두 130편으로 엮었습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옛날과 오늘날의 변화를 통찰하여서 한 학자의 학설을 완성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초고를 완성하기 전에 이 재앙을 당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극형을 받고서도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제가 참으로 이 책을 써서 명산에 간직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크고 작은 고을과 도시에 전해진다면 제가 이전에 받은 치욕을 보상받는 길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비록 만 번 죽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후회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슬기로운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저속한 사람에게 해당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몸으로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고 비천한 처지에 있으면 비방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말을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재앙을 만나고 거듭 항당(12,000호가)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선친을 욕되게 하였는데 또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산소를 찾아뵐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 대가 흐른다해도 치욕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루에도 창자가 몇 번이나 꼬이고 집에서고 멍하여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깥기도 하고 집을 나서면 갈 곳을 모릅니다. 매양 이 치욕을 생각할 때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처지는 바로 궁중의 환관이니 어찌 스스로 바위굴 속에 깊이 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속 사람들을 따라 부침하고 때에 맞춰 그날그날 지내면서 되는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요컨대 , 죽은 뒤라야 시비가 가려질 것입니다. 글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하니 고루한 생각을 대략 진술합니다. 삼가 두 번 절합니다. ]

 

1-9. <나> 사마천이 상품 브랜드

 

중국에는 사마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행사가 버젓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예 훼손죄에 해당할 일이지만, 중국인은 실리를 추구한다. 조상 이름을 브랜드화 시켰다. 그래서 사마천 여행사, 태사 맥주가 버젓이 팔리고 있다. 저작권은 사후 50년이기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개방적이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백묘흑묘론白描黑描論-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은 배울 만한다.

 

한 사람의 명인(名人)이 한 지역이나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맥주이름을 ‘이순신 맥주’ 이런거 사용하면 반대하는 경향이 있을 거다. 아마도 위인에 어찌 술이름을 붙일수 있단 말인가. 라고 반대할 것이다.

 

 

 

1-10.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사마천은 아모르파티Amor fati 자기운명애에 대한 사랑을 한 사람이다. 50세 이전에 편안한 삶을 보냈다. 그러나 이릉의 변으로 궁형을 당하고 나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달라졌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이다. 평범한 한 사람에서 위대한 영웅이 되기 위한 궤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캠벨이 말한 영웅의 여정에 사마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난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딘 그가 살아야 했던 이유가 뚜렷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것은 운명이다. 구우일모의 죽음을 당하느니,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사기를 저술하는 것이 사마천의 운명, 살아야 할 이유, 존재 가치가 되었다.

 

요즘이야 컴퓨터 자판으로 책을 쓰면 되지만, 당시 사마천은 52만 6,500자의 <사기>를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이나 나무를 얇게 오린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써야만 했다. 그것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冊)이 되고, 이 책을 둘둘말면 권(券)이 된다. 아버지 유언을 받든지 36세부터 56세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집필하는 기간이다. 한 사람의 집념이 피로 쓴 책이 역사에 길이 남고 세계인의 필독서가 될 만한 역사책을 남긴 점은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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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1. 백이열전伯夷列傳

 

60.

공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66.

가의(賈誼)-한나라 문제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는 이렇게 말했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은 그날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67.

세상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고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다 한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면 쓰임이 부족하다. 그것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하는 마케팅이다. 제 아무리 똑똑해도 그 사람을 알리고 연출해주는 것이 방송과 미디어의 힘이다. 입소문과 마케팅의 힘, 홍보를 해야 사람들이 알아준다.

 

 

2. 관 · 안 열전管晏列傳

 

사마천은 모든 편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 역사상 뛰어난 재상반열이다. 시대적 상황 차이다. 관중은 제나라가 욱일승천할 때 재상이고, 안영은 제나라가 쇠퇴할 때 재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모두 다 한나라를 발전시키거나 구하기 위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상자리를 역임했다.

 

3. 노자 · 한비 열전 老子韓非列傳

 

노자사상은 사마담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가 남긴 ‘논육가요지’라고 하는 중국춘추시대때 여섯 개 학파들에 관한 전문적인 논문을 사마천 자서전에 실었다. 실제로 사마천은 노자보다 공자를 더 존경했다. 노자는 열전에 들어가 있지만, 공자는 제후들의 기록인 세가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유가보다는 도가에 더 우호적이었다.

 

82-83.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공자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데 힘썼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6-89. 한비의 <세난(世難)>편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상대방이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식견이 낮은 속된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며 멀리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높은 이름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상식이 없고 세상 이치에 어둡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유세자는 이러한 점들을 잘 새겨 두어야 한다.

 

대체로 일이란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줄 아는 것이다.

 

현명하고 어진 군주에 관해서 말하면 자기를 헐뜯는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지위가 낮은 인물에 대해서 말하면 군주의 권세를 팔아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든 오해를 받게 된다. 군주가 총애하는 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그들을 이요하려는 줄 안다. 군주가 미워하는 자에 관해서 논하면 자기를 떠보려는 것으로 여긴다.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겁쟁이라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다.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없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새겨 두어야 한다.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약간 비슷하다. 상앙이 하는 말, “법이 안지켜지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법가의 통치사상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법가사상은 <상벌분명제>이다. 잘한 이에게는 상을 분명히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려야 한다. 이 사상은 제갈량에게 영향을 준다. 제갈량이 상을 내리면, 아무도 시기나 질투하지 않았으며, 벌을 내려도 누구하나 원망하는 사람 없었다. 엄정하고 공평하게 공정하게 공개적으로 한다. 삼공三公법칙이다.

 

한비자가 진나라에 건너온다. 진시황아래 이사라는 사람이 한비자와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한나라와 진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먼저 공격해 조건으로 한비자를 인질로 보내게 한다. 한비자를 만나기 위해 외교분쟁까지 일으켰다. 진시황이 한비자를 만나보니 실망하게 된다. 글과 사람이 약간 달랐다. 한비자가 말을 더듬었다. 한비자가 오고 보니까, 친구 이사가 시기하게 되고, 모함을 한다. 이에 한비자는 옥에 갇히게 되고 자살을 하게 만든다.

 

89-90.

송나라에 어떤 부자가 있는데 집의 토담이 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담을 다시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입니다.”

그 이웃집 주인도 다들과 똑같이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정말 많은 재물을 잃었다. 부자는 자기 아들은 매우 똑똑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이웃집 주인을 의심했다.

예전에 정나라 무공은 호나라를 칠 계획으로 자기 딸을 호나라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데 어는 나라를 치면 좋겠소?”

관기사關基思가 대답했다.

“호나라를 쳐야 합니다. ”

그러자 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호나라는 형제 같은 나라인데 그대는 어찌 호나라를 치라고 하시오?”

그러고 나서 관기사를 죽였다. 호나라 군주는 이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친한 친구 나라로 여기고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군사들이 호나라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4. 사마 양저 열전 司馬穰菹列傳

 

--> 역대 사마천이 남겨놓은 군사 전문가들이다. 군대의 꽃은 병사들이다. 이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훌륭한 장수의 차이다.

장수들이 군사들의 사기를 어떻게 올려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려있다. 나폴레옹은 “군사들은 사기를 먹고 산다”고 했다. 사마양저는 처음에 군법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보여주었다. 전쟁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병사들을 돌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공사구분을 엄격히 하며, 상벌을 엄하게 하며 리더의 기본기를 보여주었다.

 

사마양저가 남겨놓은 <사마병법>모두 130편 중에 5편만 남아있다. 전쟁에 필요한 다섯가지 조건들만 남아있다. 시기를 잘 선택해라. 전쟁시기. 때와 장소, 지리적 문제, 물질적 준비를 충분히 넉넉히 대비하라. 무기, 후방 식량 등. 병기를 잘 다듬어라. 장수와 병사가 한마음으로 일치단결해라. 적진에 대한 정보수집이다.

 

5. 손자·오기 열전 孫子吳起列傳

 

유가, 도가, 묵가 삼가가 시대를 지배했다. 진시황제는 법가로 나라를 다스렸다. 한나라에 와서는 법가만으로는 통치가 어렵게 되자, 상하와 지배질서를 강조하는 충효정신을 담은 유가가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 편은 세 명의 뛰어난 병법가 손무(孫武), 그보다 백여 년 뒤의 후손 손빈(孫臏), 오기의 이야기에 방연을 덧붙인 것이다. 조조가 주석을 달아 유명해진 손무의 병법은 <손자> 열세 편으로 7세기에 일본에 전해져 18세기 이후에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체코어 등으로 번역되었을 정도다.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인재유동’이다. 움직이는 인재유동이 중국역사상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무한경쟁에 돌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서도 전문가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전쟁과 관계된 부분은 전쟁의 형태가 바뀌었다. 그전에는 신사게임으로 페어플레이로 싸웠다. 전차전에서 보병위주로 전투형태로 바뀌며, 전략과 전술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숨어서 습격하고, 기마전과 함께 살상력과 피해가 커졌다. 왕은 장수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장수가 군중軍中에 있을때는 임금명이라도 받들지 않는다”고 했다. 군령이 지엄함을 보여준다.

 

손자병법이 뛰어난 이유들은, 전쟁경제학의 선구자다. 손자는 힘이 없으면, 능력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고 했다. 이익이 되면 싸우고, 이익되지 않는 전쟁은 하지 말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최상의 승리는 안 싸우고 이기는 것이다”. “모든 전쟁은 속임수다.” 심리전, 첩보전 등 군사사상이나 군사철학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병법서다. 18세기전후로 서양으로 이 책이 유입된다. 어떤 이는 싸움에 지고 난 후, “내가 진작 이책을 읽었으면...”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전무후무한 병법서 <손자병법>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121. 태사공은 말한다.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손빈이 방연을 해치운 계락은 실로 절묘했으나, 그에 앞서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당하는 재앙을 막지는 못하였다. 오기는 무후에게 험난한 지형보다 임금의 덕행이 더 낫다고 말했지만, 초나라에서 그의 행실이 각박하고 인정이 없었으므로 목숨을 잃었으니 슬픈 일이구나!“

 

--> 오기에 관한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오기를 질투한 사람은 욕심많고 여자도 좋아했다. 반대로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고 한다. 군사전문가이며 개혁정치가이고 목표를 향해서 불굴의 의지로 달려간 열정적인 장수 오기吳起다.

 

손빈은 동문수학했던 방연이라는 친구의 모함에 걸려 다리를 잘린다. 불굴의 의지로 탈출하여 살아서 앉은뱅이 군사전문가가 된다. 20년후 방연에게 복수한다. 손무와 손빈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손무는 실전경험이 많지 않음에도 탁월한 <손자병법>이라는 병법서를 남겼다. 손빈은 실전경험에서 우러나온 <손빈병법>을 남겼다. 군사전문가 사마양저, 손무, 손빈, 오기가 있는데, 요즘 시대는 이 네 사람을 섞어서 하나로 엮으면 최고의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ㅎㅎㅎ

주어진 상황과 시대적 요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심 없이 살다간 열정적 존재들이다.

 

6. 오자서 열전 伍子胥列傳

 

--> 사마천이 오자서 인물 평가를 하면, 강직한 인물이며, 오자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본 인물이다. 사기에는 주인공이 200여명이 되는데, 그 가운데 120여명이 비극적 인물이다.

오자서는 기원전 6c 인물이다. 2500여년전 사람으로 초나라 명문가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오거이며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초나라 평왕때 아버지와 형님이 살해당한다. 평왕의 마수를 피해서 오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오자서 망명을 중심으로 해서 오나라로 건너와서 오나라를 어떻게 부국강병으로 키우고 월나라와 싸움, 초나라고 돌아가서 원수를 갚는 일, 이런 것들이 대하드라마로 펼쳐진다. 최고의 명편으로 꼽힌다. 피로 쓴 드라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왕 부차는 따가운 섬나무 위에서 잠을 잤고, 월나라 왕 구천은 맹일 쓸개를 맛보았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도 여기에서 나온다.

 

134.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일묘도원

 

-->중국속담에 ‘대장부 복수 10년도 늦지 않았다‘가 있다. 초나라 평왕이 오자서를 붙잡기 위해 상금을 걸고 초상화를 소관이라고 하는 관문앞에 붙여놓았다. 이를 얼마나 고민하고 속을 태웠던가. 오자서는 밤새 고민한 끝에 머리가 하앟게 새어서 무사히 초나라를 탈출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만큼 오자서의 원한이 깊고 절박했다는 심경을 말해준다. 오나라 왕 합려가 임금이 되도록 돕고, 오나라 군대를 키워서 복수하기 위해 초나라로 돌아왔다. 초나라 수도가 영이었는데, 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평왕이 이미 죽고 없었다. 오자서는 평왕 무덤을 파헤쳐 평왕시체에 채찍질을 가한다. 여기에 굴묘편시라고 하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온다. 무덤을 파서 시체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것도 300대나. 친구였던 신포서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야. 해도 너무 한다”고 말했다. 신포서는 오자서가 망명할 때 도움을 주었던 친구다. 오자서가 망명할 당시.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반드시 살아나서 원한을 갚겠다”고 말하자, 그당시 신포서는 “나는 너의 원한을 막겠다”고 했다. 오자서는 ‘일묘도원’이라,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 ‘도행역시’라는 때로는 일의 순서를 바꿔서 해야한다. 상식하고 어긋나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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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니 제자 열전 仲尼弟子列傳 -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

 

B.C.500~250년에 이르는 기간은 제자백가의 전성 시대다. 당시 사상가들은 각국을 동라다니며 유세를 하였고, 봉건 제후의 고문이 되거나 외교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위대한 지적(知的)전개와 성과는 문화적 진보를 가져왔다.

공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고, 그이 사이 30을 전후로 제자를 모아 수업을 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교육관을 ‘유교무류有敎無類-배움에는 종류, 부류가 없다, 누구든지 배우고자 한다면 차별없이 가르쳤다 -’에 두었다.

 

--> 공자 이름은 구이다. 자는 중니다. 니구산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숙량왕과 어머니와 야합해서 태어난 곳이다. 죽은 후 왕호로 추존되는데, 공자 무덤앞에 대성지성문성왕묘 라 씌여였다. 문文 즉 글을 널리널리 세상에 알렸다 해서 문성왕이라는 지었다.

공자 아버지는 ‘숭량휼’이란 무장이었고, 어머니는 ‘안징제’라는 분이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중니는 공자제자들고, 중니제자열전은 공자제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공자는 “배워서 여력이 되면, 나가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라”라고 가르쳤다. . 공자가 평생에 떠돌아다닌 이유중의 하나도 “내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자리”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공자는 사립대 총장이다. 3000여명의 제자가 따라다녔다 하니.

 

153. 자로가 “군자도 용맹을 좋아합니까?”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다.

“군자는 의(義)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157. 자식은 태어난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재여宰予가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삼 년이나 치르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삼 년간 예를 닦지 않는다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햇곡식이 익고, 나무를 비며 앋던 불씨도 한 해에 한 번식 바꿉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상도 일 년이면 됩니다.“

 

재여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난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 슬픔도 너무 오래간직하면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돌아가신 것은 슬픈일이나 그 슬픔을 3년씩이나 한다는 것은 지금같은 세상에 우울증 걸리고 자살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생즉필멸生卽必滅 태어나는 것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진리다. 살아생전에 따뜻한 말한마디 해주고 찾아 뵙고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이다. 부모가 돌아가셔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살아생전 함께 한 시간을 갖고 웃으면서 따뜻하고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ㅎㅎㅎ 탈무드(484p)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옛날에 한 가지 점에서 아주 예외적인 랍지가 살고 있엇다. 그는 랍비이면서 아울러 굉장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 판단을 잘못함으로써 어떤 사람에 모든 재산을 걸었다가 하루 아침에 몽땅 날리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위로하이 위하여 달려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랍비가 의기소침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놀랍게도 랍비는 조용히 자기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제자들은 못 믿겠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존경하는 랍비님. 저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도대체 아무 근심도 없으세요?”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걱정이 된다. 그러나 너희들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하셔서 두뇌 회전이 빠르게 하셨단다. 다른 사람들이 한달 동안 근심하는 일을 나는 1시간 만에 다 할 수가 있단다. “

 

148.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워하는 안회

 

--> “안회는 어리석지 않다. 마치 나와 같다” 고 공자는 말했다. 안회는 가난과 청빈의 대명사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단표누황’이다. 표주박에 물을 먹고 밥을 먹고 더러운 골목에서 살아도 그 삶을 즐겼던 인물이다. 가난하지만 깨끗한 사람. 공자 사당이 크게 있고 공자를 ‘지성’-지극한 성인-이라 한다. 맹자를 ‘아성’이라 부른다.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뜻이다. 안회 사당에 가보면 안회를 복성이라 부르는데, 다시 성인이라는 뜻이다. 안회를 공자의 분신으로 보면 된다. ‘복성전’이란 한다. 중국가면 공자님 관련된 것을 3공이라 한다. 공자 집, 공자 사당, 공자 무덤이 있다.

 

155.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 자로는 공자와 아홉 살차이로 아래다. 자로는 공자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 공자가 체면상 나서지 못할 때, 자로가 나서줬다. 자로는 생각과 말보다는 행동을 하는 행동파였다.

 

158.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

 

160.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공자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밥도 못먹고 고생을 많이 한적이 있었다. 한번은 제자들과 다니다가 헤어진적이 있었다. 길이 엇갈렸다. 제자들이 공자를 찾으려고 애를 쓰다가, 간신히 공자를 찾을 수 있었다. 제자 하나가 말한다. “선생님 찾아다니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지나가는 영감님께 이렇게 이렇게 생긴 사람 어디 봇봤냐고 물어보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애기했나면요. ”꼭 상갓집 개처럼 생겼더라. 그 사람 찾느냐?“ 이렇게 물어봤다. 와서 그 애기를 제자가 전해준다. 공자가 다 듣고 웃으면서 ”앞의 부분 즉 위 상반신은 요임금처럼 생겼고 ~~, 행색은 영락없이 상갓집 개다“ ”앞의 부분은 모르겠지만, 뒷부분은 맞는 것 같다“. 고 말했다. 공자의 여유고 유머다.

 

160-169. 한 번 움직여 세상의 판도를 새로 짠다.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로 몰아놓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남에게 보복할 뜻이 없으면서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고, 남에게 보복할 뜻이 있는데 이것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또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새어 나간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세 사지는 일을 꾀하는 데 큰 걱정거리입니다. “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자공은 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衛, 지킬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 금을 쌓아두기도 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삶을 마쳤다.

 

-->자공에 대한 기록은 압도할 만큼 많다. 오월동주는 적이지만 한배를 탄 적과의 동침이다. 오나라와 제나라가 국경이 접해있다. 오나라 북쪽에 제나라가 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북쪽의 야만족이라 하여 천시 당했으나 오나라가 국력이 강해지니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서쪽의 초나라를 오자서가 크게 한번 혼을 내고, 북쪽의 제나라를 쳐야 하는데, 제나라를 치다 보니, 그 옆의 노나라가 문제를 발생한다. 노나라는 조그만 나라고, 공자의 고향이었다.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국제전으로 퍼지게 된다. 노나라는 힘으로 안되고, 말 잘하는 자공을 선발해서 오나라로 먼저 보낸다.

 

자공은 일단 말을 잘한다. 자공은 공자 제자 중에서도 큰 부자였고 사업가였다. 크나큰 수레를 끌고 다니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왕공들과 교류했다. 대등한 예를 가지고 비즈니스를 했다. 심지어 어느 나라를 방문한다 하면, 그 나라 왕이 직접 맞이할 만큼 자공의 사업수완이나 인맥이 대단했다. 자연스레 자공이 발탁되었다.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정관계, 재계의 인물들과 인맥을 형성해 놓은 자공이다. 공자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고, 공자가 해내지 못하 일을 자공이 대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공이 다닌 나라를 살펴보자.

 

노나라에서 동쪽인 제나라고 가고, 남쪽인 오나라에서 더 남쪽 월나라고 간다. 서북쪽인 진나라고 간다. 그리고 다시 동쪽인 노나라로 돌아온다. 노나라를 제외한 제·오·월·진 나라 4개국을 다녔다. 자공이 설파한 것 핵심을 보면, 정세를 분석한다. 즉 상황을 분석했다. 유세가들의 특징이다. 힘의 균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이해관계로 완전히 설득한다. 월나라를 방문했을때는 월나라 왕이 자공이 오는 길을 직접 청소해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자공은 큰 수레에 공자를 모시고 다니면서 천하를 주유하면서 천하왕공제후들과 대등한 예를 나누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사마천은 말한다. “공자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자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제자들이 공자의 사상과 철학을 전파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공자는 살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이 존경한 인물중에 하나가 ‘공자’다. 사마천은 일일이 공자마을을 탐방한후,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대신했다.

 

170.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할 수 있다.

자하는 공자보다 44세 아래인데, 이렇게 물었다.

“아름다운 눈의 맑게 갠 움직임이여, 아름다운 눈이 가진 흑백의 선명함이여, 흰 바타응로써 아름다움을 이루었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서 다듬는다는 뜻이다.”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적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

훗날 자장이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진(陳, 늘어놓을진)나라와 채(蔡, 거북채)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한 뒤에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장은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 두었다.

 

--> 송나라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공자에게 성인의 옷을 입힌다. 공자와 제자가 주고 받은 논어를 보편화 시키지 않고,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여성차별문제, 칠거지악, 등. 공자의 언행이 모두 성인으로 둔갑시킨다. 즉 할레루야식이다. 그래서 대화가 어렵게 바뀌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원래 논어의 의미는 간결하고 쉬웠다. 바로 맞춤형 교육을 한 눈높이 교육을 한 사람이 공자이다.

 

172. 명망과 통달의 차이

자장이 공자에게 ‘통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네가 말하는 ‘통달’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 이에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집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그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라고 한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 명망과 통달의 차이를 내말로 풀이해보자.

 

174. 사람은 말과 생김새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

담대멸명澹臺滅明으로 공자보다 39세 아래다. 그는 못 생겨서 공자는 그가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르침을 받은 뒤 물어나면 덕행을 닦는 일에 힘씅고, 기를 갈때는 절대로 사잇길로 가지 않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卿大夫(벼슬경, 즉 벼슬아치들)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가 남쪽으로 내려가 장강(長江)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를 따르는 제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건을 주고 받는 것과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를 이치에 맞게 가르쳤기 때문에 제후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184.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智, 슬기롭고 지혜로울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8. 상군열전商君列傳

상군은 중국 선진 시기 법가를 대표하는 정치가 상앙商鞅을 말한다. <상군열전>을 설정한 것 자체가 상앙의 변법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 법가 사상 자체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전제주의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상앙의 사상은 지식인과 관료를 중심을 하는 유교사회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사마천도 그이 인물됨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

 

 

 

200.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206-212.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진나라의 숨어 사는 선비 조량趙良이 상군을(진나라 재상이 된지 10년이 흘렀을 때) 찾아와 말했다.

‘어진 이를 추천하여 받드는 자는 번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불러 모아 왕 노릇을 하는 자는 몰락한다. -공자

제가 듣건대 ‘자격이 없는 자가 그 지위에 잇는 것을 지위를 탐한다고 하고, 자기가 누릴 명성이 아닌데 그 명성을 누리는 것을 이름을 탐한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 한다.

 

상군은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쥐한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을까?’- 시경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은 자는 망한다’-시경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 시경

 

9. 소진열전 蘇秦列傳

 

--> 사마천이 “말이 적합하면 분쟁도 해결할 수 있다. 김영수 “말이 언격이다” 말함에 있어서도 격이 있어야 한다.

 

소진의 공부법이 유명하다. ‘추자고 두현량’. 공부하다 졸리면 송곳으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매단다. 졸리면 머리카락을 잡아댕긴다. 최마술이라고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공부를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지 못하면 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각국의 정확한 정세를 분석했다. 정보력이 유세가의 차이를 결정했다.

 

소진은 6개국의 합종을 하기 위해, 각 나라가 소진을 객경으로 임명한다. 소지은 6개국의 재상이 된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유엔 사무총장쯤 된다고 할까. 소진의 권한은 유엔사무총장보다 권한이 막강하다. 소진의 도장도 육각이었고, 죽고 난 후의 비석도 육각이었다고 전해진다. 유세가들은 말만 잘하는게 아니라 책략가였다. 이 책략가들이 후에는 왕의 참모가 되었다.

 

238.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239.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소진이 제나라 왕을 만나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축하하고는 곧 고개를 들어 조의를 표하였다. 제나라 왕이 이상해서 물었다.

“축하하자마자 조의를 표하는 것은 무엇때문이오?”

소진이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굶주린 사람이 굶주리면서도 오훼(烏喙)라는 독초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굶어 죽은 것과 똑같은 해독이 있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지금 연나라는 비록 힘이 약하고 작지만 연나라 왕은 진나라 왕의 사위입니다. 왕께서는 연나라의 성 열 개를 얻었으나 강대한 진나라와는 길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 힘이 약한 연나라가 기러기 행렬처럼 앞장서고 강대한 진나라가 연나라의 뒤를 봐주며 쳐들어온다면 천하의 정예 병사를 불러들이는 격이니 오훼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성공했다고 합니다. ”

 

242.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고, 나아가 이루는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합니다.

 

244.

어떤 사람이 관리가 되어 멀리 떠나갔는데, 그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 정부(情夫)가 걱정을 하자, 아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미 독약 탄 술을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흘이 지나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는 첩에게 독이 든 술을 가져다가 그에게 권하도록 하였다. 첩은 술에 독이 들어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모(主母)가 내쫓길까 두렵고 말을 안하자니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질렀다.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다. 첩은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매 맞는 것만은 피하지 못했다.

 

250-260. 자주색 비단이 흰색 비단보다 열 배 비싸다.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값은 열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쫒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했다.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10. 장의열전(張儀列傳)

장의가 그 아내와 이야길할 때 혀가 붙어 있는지 물어본 것은 혀가 없는 장의는 생각할 수 없으며,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를 무기 삼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내며 부귀를 쫓던 당시 유세가들의 모습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진은 합종을 했다. 진나라에는 장이가 있는데, 장이가 바로 합종(세로정책)을 깬다. 장이는 연횡정책(가로정책)을 실시한다. 종횡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유세를 펼치기에 유세가를 종횡가로 한다. 장의가 그 아내와 이야기할 때 혀가 붙어 있는지 물어본 것은 혀가 없는 장의는 생각할 수 없다. 이를 설상제라 한다. 즉 혀가 살아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장이가 요즘에 살았다면 장이는 혓바닥에 보험을 들었을 게다. 소진의 합종이 없었으면 장이의 연횡도 없었을거다. 합종의 취약점은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나머지도 다 무너진다.

 

유세가들은 국제전문로비스트다. 천하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그 판단에 따른 분석함으로써 전문가 반열에 올려놓는다. 외교전문가들이 바로 그 당시 유세가였다.

 

265.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275.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도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

 

-> 가벼운 돈도 자주 많이 쓰면,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는다. 하찮고 사소한 거라도 지출할일이 있으면, ‘지금 이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세 번은 하고 결정하자.

세 치 혀가 여럿이 모이면 나라도 팔아먹는다는데, 말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한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이 증자 어머니한데 와서 말한다.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자,

“내 아들이 그럴리 없다”고 하면서 꼼짝도 안하면서 베를 짰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자, 꼼짝도 안하고 베를 짰다. 다음 세 번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자. 그때 증자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말이 전해온다.

말이란 이처럼 얼마나 무서운다. 세치혀가 모이면 뼈도 녹인다 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말에도 언격言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4. 맹자, 순경 열전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하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 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 춘추 전국시대를 잠깐 살펴볼까나>

사기에 나온 인물숫자만도 4,000여명, 주인공들만도 200여명, 한시간에 한명씩만 읽어도 200여시간이 필요하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혼란기였으며, 인재들이 대활약한 시기였다. 끊임없이 전쟁하고 경쟁하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하는 시대로 약진하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이다. 전쟁이 약 500회이다. 기록만으로. 1년에 한번씩 전쟁을 했다는 통계다. 그에 따라서 국제 회담. 전쟁이 끝나면 회담을 해야 하고, 기록에 의하면 전후회담戰後會談이 약 480여차례이다. 여기에 외교전문가, 유세가, 로비스트들이 활약한다.

통일로 가는 대세이다 보니 각국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려는 부국강병책을 쓰게 된다. 각종 정책들, 수많은 발명들, 수많은 인재들 등 이런 다양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황금시기’라고 부른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철기문화가 보편화되고, 무기 때문에, 또 하나가 농기구 농업생산이 중요한 생산방식이었다. 철제농기구는 땅을 깊이 팔 수 있었다. 땅을 깊이 파면 씨앗을 심어도 수확량이 많아지고. 우경牛耕이 발명된다. 철제쟁기로 땅을 깊이 파는 우경이 보편화 된다. 생산량이 늘어나니 인구가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하면 도시가 발달한다. 이 도시 발달이 이 시기에 굉장히 중요한 현상인데, 인구가 많았던 곳은 50만정도가 되었단다. 2,300~400년전에요. 그 당시로 말하면 인구 천만정도 되었다고 해야 할까.

사마천이 이 모습을 보고 묘사했는데,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흘리는 땀 때문에 비가 내릴 정도였다.”비유했다. 사마천이 글심이 좋지요.

 

노자, 장자, 공자는 다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다.

인의예지신 사상은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 엄격한 법집행을 강조한 한비자를 중심으로 하는 법가사상, 억지로 일할려고 하지 말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원래 인간이 태어났던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했던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 평화사상을 실천한 사람으로 묵자가 있다. 보편적 인류애, 박애정신, 비전非戰, 반전사상인 묵가사상이 있다.

유가는 중국국가 통치이념으로 정책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유교로 확립되었다. 도가는 중국인에게 민중종교로 확산되면서 도교로 성립되었다.

 

사마천은 공자를 존경해서 공자를 <세가>에 넣었고, 순자 한비자, 노자, 장자, 맹자는 열전에 넣었다.

순자 아래에 법가 사상이 나온다. 맹자는 유가 우파, 순자는 유가 좌파이다. 법가의 주요한 인물들이 순자밑에서 많이 나온다. 추연은 음양오행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변종유세가정도?, 권력보다는 자기 생각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이야기하지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 들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쿨cool한 사람들이다. 다만 논리자체가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적호기심이나 만족감 때문에 허영심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370. 제나라 왕은 그들의 학설에 흡족하여 순우곤 이하 모든 학자에게 열대부라는 작위를 주고, 번화한 길가에 높은 문이 달린 커다란 집을 지어 주어 살게 하면서 존경하고 총애했다. 제나라 왕은 천하의 제후들과 빈객들에게 제나라에서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순우곤’이 있다. 임금한테 말할때도 수수께기로 말했다. 제나라 사람으로 위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하지 않았다. 순우곤이 위왕을 찾아가서 충고를 했다. 순우곤이 위왕에게 말했다.

“수수께끼 하나 낼터이니 들어보시겠어요? 우리 궁궐 앞마당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둥지를 틀었는데, 이 놈의 새가 어찌 된 일인지3년동안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네요. 어떤 새일까요?” 이렇게 물었다. 거기에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멋진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는데,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으니 일을 안한다는 말이었다. 왕을 비꼬았던 것이다. 이에 왕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 새가 한번도 울지 않았다면, 한 번 울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고, 한 번 날았다 하면 하늘까지 솟구쳐 올라갈 것이다. ” 라고 했다.

 

1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전군 4공자戰國四公子-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객 3000여 명을 거느렸다.

--> 일단 이력서 들고 오면 다 받아주었다. 경제력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식객이 많다는 것은 자기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도 계파처럼 비슷하다.

 

381. 닭 울음소리와 개 짓는 소리로 위기를 벗어난다.

진나라 소왕이 맹상군을 불러, 맹상군이 가려 하자, 소대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저는 밖으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나무 인형과 흙 인형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질거야.’라고 말하자 흙 인형이 ‘나는 원래 흙에서 태어났으니 허물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어디까지 떠내려가야 할지 몰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처럼 사나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굳이 가려고 하시니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은 흙 인형의 비웃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맹상군은 진나라로 가려던 생각을 그만두었다.

 

397.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맹상군이 제나라 재상에서 물러났을 때 빈객이 모두 떠나고, 다시 제나라 재상으로 등용되자, 풍환이 빈객들을 맞이하려고 할 때, 이를 이상히 여겨 맹상군이 풍환에게 물어본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알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설 땅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곳 풍속은 마을에 난폭하고 사나운 젊은이가 아주 많아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나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의 풍속과는 사뭇 달랐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맹상군이 천하의 협객들과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여 설 땅으로 들어온 자가 6만여 가(家)나 되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맹상군은 빈객을 좋아하여 스스로 즐겼다고 했는데, 그 소문이 헛된 것만은 아니구나!

 

--> ‘집안의 물건은 그 집주인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빈객들은 오죽하겠는가? 물건도 집주인의 성품을 닮아가는데, 그 집안의 밥을 먹고 주인의 말을 들으며 잠을 자는데 자연히 닮아가겠지. 빈객에게 밥을 주는 맹상군의 성품대로 빈객도 그렇게 되어간다. ’끼리낄 모인다‘고 했다. 맹상군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겠는가? 그가 명성과 이익을 좇았다면 당연히 그를 따르는 빈객들도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리라.

태사공이 맹상군이 살았던 지역을 답사하고 느꼈던 것을 썼다. 그곳 주민들이 난폭하고 사나운 젊은이가 많다는 것을 예와 인을 따르기보다는 이익에 좇아 행동하는 선조들을 두었기 때문에 후손도 그렇다는 것을.

 

맹상군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했다. 자기가 먹는 밥하고 식객이 먹는 밥을 똑같이 두게 했다. 재주나 능력있는 사람은 모두 받아주었다. 누가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면, 뒤에 이것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다 선물을 미리 보냈다. 자기 곁에 스카웃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 이런 인재들을 망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임금하나로 부족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는 제후나 공자나 유력가들이 인재풀을 가동하여 조정에 추천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권력기반을 확실하게 다졌다.

3000명의 식객을 거느리기 위해서 맹상군 돈놀이도 했다.

 

맹상군이 풍환을 비롯하여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흉내내던 빈객들을 불러 들였을 때, 그들이 맹상군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이런 점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빈객으로 대접한 맹상군의 인물평가 능력은 본받을 만하다.

 

16. 평원군· 우경 열전

 

405. 세 치 혀가 백만명의 군사보다 강하다

문하에 모수(毛遂성취할수)라는 이가 있었는데,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며 평원군에게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라고 평원군이 대답했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

->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고사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

 

18. 춘신군열전

 

춘신군황헐은 제 공자 중 한 사람으로 변설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활헐은 이 십여 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합종책을 추진하여 진나라에 맞서는가 하면 노나라를 멸망시켜 초나라를 다시 한 번 일으키는데 이바지했다. 그렇지만 말년에는 권세와 부귀를 지키려다 이원의 간사한 음모에 걸려 비참하게 살해된다.

 

445.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이 좋기란 드문 일이다”-시경

 

“여우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역경

 

“이리저리 날뛰는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걸 헤아릴 수 있다-시경

 

456. 정확한 결단만이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이원은 이미 자기 누이동생이 궁궐로 들어가 왕후가 되고 그 아들이 태자가 되자, 춘신군의 입에서 비밀이 새어 나오거나 그 일로 점점 오만해질까 염려하여 남몰래 죽음을 각오한 용감한 병사들을 길러서 춘신군을 죽여 그의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 중 많은 이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459. 북과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주영이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생각지도 않던 복이 찾아올 수 있고, 또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생각지도 못한 행복과 재앙이 찾아오는 세상에 살고 있고, 기대를 걸 수 없는 군주를 섬기고 계십니다. 어찌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 뜻밖의 인사를 구해 두지 않으십니까?

 

춘신군과 주영이 묻고 대답한다.

 

“무엇이 생각지도 않는 복이라고 하오?”

“당신께서 초나라 재상이 된 지 이십여 년이 됩니다. 이름은 재상이지만 사실은 초나라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초나라 왕이 병에 걸려 머지않아 돌아가시려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린 군주를 도와 나랏일을 하게 될 텐데, 이는 옛날 이윤이나 주공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자라면 정권을 돌려주거나, 아니면 왕노릇을 하여 고(孤)라고 일컬으며 초나라를 차지할 것ㅇ딥니다. 이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재앙은 무엇이오?”

“이원은 당신이 있으면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원수로 생각하고 오래 전부터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원은 반드시 궁궐로 들어가 권력을 잡고 당신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지도 않은 재앙입니다.”

 

“뜻밖의 인사란 누구요?”

“당신께서는 저를 낭중(郎中)에 임명하십시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원은 틀립없이 먼저 궁궐로 들어갈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안을 막아 낼 수 있는 뜻밖의 인사입니다.

 

태사공은 말한다.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일까?“

 

20. 악의 열전

 

513. 군주와 신하의 의는 무엇인가

악의가 연나라 혜왕에게 답장한 글이다.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

“일을 잘 꾸민다 해서 반드시 일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시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무리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21. 염파· 인상여 열전

545.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은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4. 굴원 · 가생 열전

 

587. 그 문장은 사소한 것을 적었지만 담은 뜻은 매우 크며, 눈앞에 흔히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뜻은 높고 깊다.

 

590.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역경

591.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쫒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여기서는 그 시대의 일을 아는 자를 가리킬 뿐 도덕적, 인격적 경지에 오른 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쫒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뜩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고?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

굴원은 돌을 안은 채 마침내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597. 모자를 신발 삼아 신어서야 되겠는가.

가생은 한나라가 일어나서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천하가 태평하니 마땅히 역법을 고치고 관복 색깔을 바꾸며 제도를 재정비하고 관직 이름을 새로 정하며, 예의와 음악을 창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의 의례와 법률제도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색깔은 황색을 숭상하고, 숫자는 5를 기준으로 삼으로, 관직이름을 만들어 진나라 때의 법을 완전히 바꾸려고 했다.

 

26. 자객열전

 

626. 비수로 잃었던 땅을 되찾는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제후들의 신뢰를 읽고 천하 각국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땅을 되돌려주는 편이 낫습니다. ”

 

651. 자객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

 

바람 소리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27. 이사열전

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막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려을 뿐이구나.”

 

662.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669.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시경> <서경> , 제자백가의 책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어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법률과 제도를 밝히고 율령을 만드는 일은 모두 시황제 때에 처음 생겼다. 문자를 통일하고 천하의 이곳저곳에 이궁(황제가 각 지역을 순시할 때 머무는 것)과 별장을 두루 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세상을 돌아보고 사방의 오랑캐족을 나라 밖으로 쫒아냈는데, 이 모든 일은 승상 이사의 힘으로 가능했다.

 

670. 이사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아! 나는 순자가 ‘사물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 이사는 말단 공무원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궁창 속의 쥐와 곡식창고의 쥐를 보면서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세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다름 아닌 순자를 찾아가서 공부한다. 그러나 다 마치지 못하고 곤궁하고 비참하게 사는건 나는 견딜수 없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겠다 고 진나라로 가게 되고, 여불위 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여불위 추천으로 진시황의 측근이 되었다. 출세지향주의자들의 대표격인 이사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부귀영화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부분들을 떨치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리다 결국은 아들과 함께 허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는다.

 

 

 

. 내가 저자라면

 

3-1. 사기史記란 어떤 책인가.

 

원래 이 책은 태사공자서였다. 그러다가 사기로 불리웠다. 사기가 세계인의 필독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전무후무하고 사기만한 역사책도 없다라고 한다.

 

첫째, 나머지 역사책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은 삼황오제 때부터 한 무제 때까지, 2500년에서 3000년 정도 되는 역사를 52만 6천 5백자로 압축했다. 즉 ‘압축파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후대인 우리들이 사기를 읽으면서 압축파일을 풀어야 한다. 이 중에서 열전 편은 사기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사마천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역사를 왕조 중심의 연대기로만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특징적인 삶을 적극적인 논평과 함께 입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책은 주류 역사에 포함되기 힘든 자객, 글쟁이, 총신, 익살꾼, 점쟁이, 장사꾼, 변방의 이민족 등과 같은 주변부 사람들의 삶까지 적극 역사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중국 고대 2500년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전한다.

 

역대 천자들의 역사를 다룬 본기 12편

중요한 연표를 다룬 표 10편

정책과 문물의 발전을 다룬 서 8편

제후들의 역사를 다룬 세가 30편

역사의 영웅들이나 보통 사람들의 활약상을 다룬 대서사지 열전70편으로 나뉜다.

전체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보통 사람들의 활약상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작용이 역사를 움직인다 라는걸 직접 보여준다. 우리가 주인공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시대계층의 역사. 가진자나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었는데 사기는 이것을 깼다.

사기에 나온 인물수도 4,000여명이나 되며, 직업도 100여가지 이상이다. 당시 사람들은 생사관이 뚜렷해서 자살도 삶과 죽음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모반과 배신, 암투,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삶아죽이고, 찢어 죽이는 등, 죽이는 바업ㅂ도 여러 가지다.

 

셋째는, 처세술, 리더쉽, 인생을 이끌어줄 수 있는 멘토 역할을 하는데, 생사관이 가장 뚜렷한 역할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관한 의문, 체제도 완벽, 다섯 체제로 서술, 본기(本記),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각각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삼총사에 나온 인용을 한다면, All for One, One for All 이다. 전부는 하나를 위해서, 하나는 전부를 위해서이다.

 

넷째는, 지리, 군사, 문화, 사상에 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 중국을 알기 위한 백과사전과 같다.

 

다섯째는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착하다라는 말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는 뜻이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이며, 선악이 무엇인지 구별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사기 연구가 김영수 선생님은 말한다. “삼국지 열 번 읽고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사기 한번 읽고 좋은 사람 되라‘.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력으로 머리말을 썼다. 따라서 이러한 사마천의 입장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재해석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70여편이 사기열전이다. 자기의 눈과 귀와 발이 닿는 한 세상에 족적을 남긴 사람이면, 누구나 다 열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처음이 백이열전이고 마지막이 화식열전-역대 부자 30여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마천이 인간의 이상적인 인물을 맨 앞에 두고, 현실적인 인물은 맨 마지막에 배치했다. 절묘한 조화이다.

사기는 난서亂書다. 어지러운 책이다.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한 곳에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다. 깊이있게 연구해보니, 사마천이 의도대로 안배했다는 것이다. 난서難書-어렵다- 어려운 책이다.

사기에는 최소한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첫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둘째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세 번째는 가장 나를 닮은 사람이다. 반드시 이 세 종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사기에는 생사관의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자살 기록만도 100여편이나 된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속죄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그 당시에는 자결이 보편화되었다. 생사관이 요즘 현대와 많은 차이가 난다는 볼 수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 관한 정설이 없다. 행방불명설, 자살설, 병사, 자연사등이 있지만, 사마천의 고향에 사는 후손들은 내가 처형당했다고 믿고 있다. 사기로 인해 황제 심기를 건드렸다. “어차피 나는 죽은 목숨 아니더냐. 그러니 내가 한무제 너에 관해 쓰면서, 너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썼다. 어차피 나는 내놓은 목숨이고 사기를 완성했으니, 네가 나를 죽여도 나는 죽음에 여한이 없다.”라는 사마천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차례

 

역자서문

해제

차례

일러두기

 

1. 백이열전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과 등의 사적이 없을까?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 길을 갈 수 있다.

 

2. 관·안 열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3. 노자·한비 열전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둔다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형명지학의 대가 신불해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4. 사마·양자 열전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5. 손자·오기 열전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노려라

아내를 명성과 바꾸다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남보다 윗자리에 앉는 이유

죽은 시체 위에 엎드린 오기

 

6. 오자서 열전

소인배의 참언을 믿고 친자식을 내친다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안고 떠난다

때를 기다려라

오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깨뜨린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7. 중니 제자 열전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가 존경한 사람들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워하는 안회

효성스러운 민자전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염경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으면 제물로 쓸 수 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좋은 말을 듣고 실행하지 못했는데도 또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렵다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자식은 태어난 지 삼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

종묘의 제사 그릇 같은 자공

한 번 움직여 세상의 판도를 새로 짠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할 수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명망과 통달의 차이

효성으로 이름을 떨친 증삼

사람은 말과 생김새로만 평가하면 안된다

재능은 배어난데 몸담고 있는 곳이 작다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자장

흰 옥의 티는 갈 수 있지만, 말의 티는 어찌할 수 없다

지조를 지킨 공석애와 낭만주의자 증점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역경>의 전수는 끊이지 않았다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겸손한 칠조개

모든 일은 천명에 의해 결정된다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얼굴이 닮았다고 하여 공자가 될 수는 없다

군자는 가난한 사람만 돕는다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8. 상군열전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새로 만든 법은 믿음 속에서 꽃필 수 있다

법은 위에서부터 지켜야 한다

뱃속에 있는 질병을 없애라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9. 소진열전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천 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백리 안의 근심을 해결하라

어찌 어두운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랴?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우환이 닥친 뒤에는 걱정해도 소용없다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없신여긴다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사람을 속여 원수를 갚는다

소진이 남긴 사업을 이은 소대와 소려

자주색 비단이 흰색 비단보다 열 배 비싸다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싸울 때는 명분과 실속을 모두 얻어야 한다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중시하는 까닭

호랑이와 양은 적수가 못 된다

달콤한 말은 나라를 망친다

한때의 이익에 끌려 백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

오른팔을 잘리면 싸울 수 없다

허우대는 어른, 생각은 어린아이

무왕과 틈이 벌어진 장의

사람 됨됨이는 그 주위 사람이 제대로 안다

할 일 없이 술만 마신 서수

병들었을 때는 고향이 가장 그립다

자기보다 나은 자를 밟고 일어선다

 

11. 저리자, 감무열전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저리자

아들이 살인했다는 말을 듣고 북을 내던진 어머니

짐승도 궁지에 물리면 수레를 뒤엎는다

남의 남는 빛으로 집안을 일으킨다

너무 현명해도 재상이 못 된다.

지혜는 나이와 관계없다

 

12. 양후열전穰侯列傳

외척의 정치 참여

첨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잃는 게 없는 싸움을 하라

결국 내쫒기는 신세가 되다

 

13. 백기, 왕전 열전

마음을 잘 바꾸는 자는 난을 일으킨다

하늘에서 죄를 지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세 세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싸움에서 진다

 

14. 맹자·순경 열전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시대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 주장은 쓰이지 못한다

추씨 성을 가진 세 학자

양나라 혜왕이 순우곤을 만나 한마디도 듣지 못한 까닭

전국시대 각 지역의 사상가들

 

1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사람의 운명은 어디로부터 받는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위기를 벗어난다

모든 일에는 보답이 따른다

맹상군의 결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군주가 이익에 눈멀면 백성은 떠난다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16. 평원군· 우경 열전

애첩을 죽여 신의를 지킨다

세 치 혀가 백만명의 군사보다 강하다

나라가 망하면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지키지 못한다

 

17. 위공자 열전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

숨어 사는 선비 후영과 주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지 말라

잊으면 안 될 일과 잊어야 할 일

노름꾼과 술 파는 자라도 어질면 찾아가라

비방 한마디가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8. 춘신군열전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신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

정확한 결단만이 몸을 보존할 수 있다

북과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19. 범저, 채택 열전

군주가 의심하면 잠시 떠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제후의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진다

머리카락을 뽑아 속죄해도 부족하다

군주가 어진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

 

20. 악의 열전

충신이 반역자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군주와 신하의 의는 무엇인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21. 염파· 인상여 열전

큰 나라끼리 사귀는 데도 법도가 있다

피를 뿌려서라고 군주의 위엄을 지킨다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한다

세금이 공평하면 나라가 부유해진다

쥐구멍 안의 싸움에서는 용감한 쥐가 이긴다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르다

권세를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 몰린다

죽음을 알면 용기가 솟는다

 

22. 전단 열전

수레바퀴 축의 쇠가 목숨을 구한다

기묘한 계책으로 적의 허를 찔러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23. 노중련, 추앙 열전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

잠시의 부끄러움을 참고 이름을 길이 남겨라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

 

24. 굴원, 가생 열전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우물물이 맑아도 마시지 않으니 슬프다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모자를 신발 삼아 신어서야 되겠는가

들새가 들어오고 주인이 나간다

 

25. 여불위 열전

진귀한 재물은 사 둘 만하다

한 글자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겆시으로 얻은 명성은 물거품 같다

 

26. 자객열전

비수로 잃었던 땅을 되찾는다

혈육을 죽이고 왕이 된다

충신은 지조를 위해 죽는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인물은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인다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 놓는다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아야 성공한다

자객은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여 있다

등용했으면 내치지 말라

옛것으로 지금을 비평하지 말라

남의 신하가 되는 것과 남을 신하로 삼는 것은 다르다

제 몸조차 이롭게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리야

사슴을 말이라고 한다

 

28. 몽염 열전

충신은 대신들과 다투지 않는다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29. 장이 · 진여 열전

목이 달아나도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다

명분이 있어야 도울 수 있다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원수가 된다

지조있는 신하가 왕을 구한다

 

30. 위표 · 팽월 열전

인생은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짧다

용 두 마리가 싸우면 기다려라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되낟

팔짱만 끼고 앉아 어느 쪽이 이기는지 보면 안 된다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랴

왜 낮은 계책을 쓸까

 

32. 회음후 열전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간다

소하가 달아난 한신을 쫒아간 이유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다

싸움에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하지 않는다

과욕은 화를 부른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훌륭한 활을 치운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도 운명이다

 

33. 한신 · 노관 열전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든 한신

배반과 투항을 일삼은 노관과 그의 족속들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34. 전담 열전

왕의 피를 물려받은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

독사에게 물린 손은 잘라야 한다

원망하는 마음은 반란의 불씨가 된다

평민에서 일어나 번갈아 왕이 된 세 형제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35. 번· 역· 등 ·관 열전

용맹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번쾌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잔을 사양하리

반역으로 몰려 위기에 처한 번쾌

노략질을 일삼던 역상

위증죄에 연루되어 옥살이한 하후영

비단을 팔던 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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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184.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智, 슬기롭고 지혜로울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200.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207.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 한다.

 

 

 

3-3.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편집이 잘되었다. 각 열전앞에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제시해주고, 시대상을 설명했다. 각 열전에 독자가 글의 전체 내용에 대한 주제를 소제목으로 했다. 그러한 점이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책속에 있는 주제와 key sentence를 각 꼭지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점이다.

 

3-4. 내가 저자라면( 내가 사기를 바탕으로 책을 쓴다면)

 

2013년 2월 한달을 EBS 고전읽기에서 ‘사기’를 방송했었다. 이희구씨와 진행한 ‘사기’ 연구가 김영수 선생님과 함께 했었다. 재미있었던 점은 사기에 해석을 덧붙이니까 읽지 않았어도 한번은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사기에서 나온 예화와 더불어 고사성어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언젠가 들었던 부분들이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아~~~하”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사기에서 나온 예화에서 비롯한 고사성어가 있다고 들었다. 현대인의 비슷한 예화와 함께 고사성어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책(시중에 나와있는지 모르겠지만)을 쓰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천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참고문헌

 

1. 고전이 된 삶 : ‘사기’부터 ‘모란정’까지 동양고전 걸작과 함께 읽는 중국 문장가 열전, 이나미 리쓰코 지음,

 메멘토, 2013. 04. 22.

2. EBS 고전읽기. 2013. 02.04-02. 2.22

3. 사기열전 1, 2.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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