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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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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8일 21시 39분 등록

1. 일연에 대하여

일연의 이름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이라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어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있다.(726쪽)

 일연스님2.jpg

 

일연의 사상

본질 앞에서 방편은 수정되어야 한다

<중편조동오위>의 찬술 : 조동종의 핵심교리로서 조동종은 선종의 아홉 종파 가운데 마지막에 생긴 수미산문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일연은 가장 먼저 생긴 가지산문에 속해 있었다. 고려시대에 선종 승려들이 속한 산문은 왕명 없이는 바꿀 수 없다는 엄한 내규가 있었다. 그는 자기 산문도 아닌 쪽의 책을 펴낸것이다.

일연은 이 일을 '평소 꿈구어 오던 일'이라고 표현했다.

일연은 <중편조동오위>를 완성한 다음해에 강화도로 갔다. 비문에는 "중통 신유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 서울로 가서 선월사에 주석하고 개당하여 멀리 목우화상을 이었다." 고 쓰여있다. 목우화상이라면 지눌이다. 지눌은 사자산문 출신이니 일연의 산문과 부닥친다. 그런데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 두가지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선종의 형성 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일연은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본질의 문제 앞에서 일연은 그 방편을 깨부수고 있다.

민족의식의 시작

일연의 서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괴이한 사건들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 (738쪽)

게다가 향가 14수를 <삼국유사>에 남겨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가 향가이다.

기적의 메모 노트와 함께 길 위에서 글쓰기

고운기는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이란 책에서 일연에게 누구도 보지 못했던 한 권의 노트가 있었다고 단정한다.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의 귀로 듣고, 스스로의 몸으로 닿아서 기록한 것들이기에 노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일연스님은 걸으면서 이 땅을 읽었고, 거기서 닦은 현장 감각으로 글을 썼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신음하고 정권에 시달리는 백성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거기서 무엇을 써서 남겨야 할지 몸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삼국유사>라는 역사서에 우리 땅에 전해지는 신화들과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스님이라는 자리나 자신이 속한 산문도 넘어서며 글을 쓰고 있다. 그가 말년에 파계를 하고 설총이라는 아들을 가진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라.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741쪽)

 

일연의 생애

1세  1206년  경북 경산 출생

9세  1214년 해양 무량사에서 공부

14세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가지산문)

22세 1227년 승과에 급제 후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

32세 1237년 선사가 됨

44세 1249년 남해의 정림사 주지로 부임, 지리산 길상암

  -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잡기 시작

54세 1259년 대선사가 됨

55세 1260년 <중편조동오위> 저술

59세 1264년 영일 오어사, 대구 인흥사

72세 1277년 청도 운문사 주석

76세 1281년 국사(국존)로 책봉(충렬왕), <삼국유사>집필 시작

79세 1284년 군위 인각사, 구산문도회를 열고, 어머님을 모심.

84세 1289년 입적

 

※ 고운기의 인물평가

김훈씨가 소설에서 말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고,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할 줄 알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고,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투시력이 있는’ 사람이 일연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참고자료

네이버 인물한국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62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현암사, 2002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고운기 글, 현암사, 2010

이미지출처: http://cafe.daum.net/sansa-bbibbi/NHZh/71?docid=1CV3O|NHZh|71|20100202095842&srchid=IIMnkosb200&focusid=A_1910AD014B67789C67E904

동아일보, 고운기 인터뷰기사 : http://news.donga.com/3/all/20101023/32067647/1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 귀

2.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感發 시키는 촉진제다.

4. 무인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 자체로 끝나지 않았고 세계관에 변화를 주었다.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 

4.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6.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 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7. 20세기 들어서야 <삼국유사>가 전면적인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니, 실로 빛을 보기까지 60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견딘 셈이다.

8.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만일 내가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10. <삼국유사>는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의 본체를 이해하는데 요긴하다.

 ☞ 우리가 '저자에 대하여' 를 조사하는 이유일 것이다.

11. '처음 기준' 은 누구의 생각인가? 그것이 맨 처음이 되어야 한다고 본 그 관점과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던가?

12.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었다.

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 저자는 그 상징을 읽으려 노력한다. 저자의 의도를 상상하면서... 그러므로 독자도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상상력을 마음껏 써야한다.

17.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20.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기자조선' 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 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 우리의 역사가 아닌 중국에서 보낸 통치자의 시대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의도가 아닐까. 어차피 정확히 알 수 도 없는 시대의 이야기는 굳이 상상하며 찾아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 생각이다.

21.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2.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22.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23.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 이었다.

2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29.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전을 단군조선의 후예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33.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가 중국의 사료를 내세웠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그에 비해 위만조선에 관한 <전한서>의 기록은 지금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놓으니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36.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3.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든 지위를 획득했다.

44.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  조셉캠벨의 책들을 읽었으면 이런 얘기는 하지않았을텐데^^ 인류의 집단무의식에 기댄 비슷한 원형의 수많은 영웅신화들이 전 세계 곳곳에 숨어있다는 사실!

48.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었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 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제2대 유리왕이 된다. 태자란 바로 이 유리왕이다.

56. <삼국사기>는 여섯 부족이 "조선의 유민으로 산과 골짝에 나눠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으로 시작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62. 일연은 혁거세왕의 최후를,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 몸만 남아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후 또한 죽자 사람들이 합하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뚱이를 다섯으로 나누어 각각 묻고 오릉으로 만들고, 또한 사릉이라 이름지었다. 담엄사의 북쪽 능이 이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오릉에 가보고 싶다. 진평왕릉과 비슷한 분위기일듯 싶다.

68.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

69. 일연은 신라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서라벌 도 서벌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 또 사로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0. 용성국 출신이라는 기이한 남자 석탈해는, 헌칠한 체구에 꾀도 많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촌놈에서 출발해 왕의 사위에 이어 왕까지 된 '신라 드림'의 원조다.

72.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보여주지 못할꺼면 섣불리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지 마라. 독자들은 책을 집어던질지 모른다.

73. 치아 많은 이가 되는 왕 자리? 그래서 왕도 닛금이라 불럿다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78.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79. 탈해가 처음 신라로 들어올 때 가락국을 거쳤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구석이 조금 있지만, 모든 기록에 공통된다.

81. <가락국기>는 고려조에 들어 금관주 곧 지금의 김해 지방에 사는 문인이 가락국의 옛일을 적어 둔 것이다.

82. 이 기간 탈해가 신라의 대보로 있으면서 가락국을 정벌하러 갔을 수 있다. 그런데 실패했거나 고전 긑에 약간의 성공을 거둔 채 물러나온 일이 있었다면, 가락국의 지역에서 탈해를 깍아 내리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83.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83. 탈해왕 11년에 나라를 주와 군으로 나누고 박씨들 가운데 높은 신분에 있는 친척들을 주주와 군조로 보냈다.

91.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여들면 곤란하다.

 ☞ 쇼비니즘(Chuvinism) 호전적/배타적/열광적 애국주의 = 징고이즘과 비슷한 개념

92.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94.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양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만하다.

95.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 같다.

96.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96.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그의 이 같은 관심과 실천 속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일연의 붓끝은 힘을 얻는다.

 ☞ 이것이 '기적의 토피카'의 힘이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채집해라. 곱게 갈무리해두어라. 후세에 그 이야기의 힘이 살아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이야기도 그 정신도 사라질 것이다.

102.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상이기도 하다.

106. 우리의 경상도 방언과 일본어는 더 닮았다. 발음이나 억양 그리고 특징적인 어미 처리 등이 그렇다.

107.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108. 천일창과 신공왕후의 연결에서 우리는 신라계가 일본열도에서 먼저 힘을 가졌음을 본다.

110.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116.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일본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8.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나태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방법이다.

 ☞ 기원전 91년에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했다. 일연은 13세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비슷한 기술방법을 보인다. 일연이 그 기술방법을 따왔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와 <삼국유사>의 사이의 긴 시간동안 한반도에는 왜 역사서가 써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왜 남아있지 않을까?

119.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이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대와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120.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21. 신라 25대 진지왕은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등극하여 불과 4년 만에 왕위를 진평왕에게 물려주고 있다... 진평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했다.

121.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

130.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시내로 들어가다보면 다리를 하나 건넌다. 다리 아래로는 남산에서 출발하여 월성을 지나 내려오는 남천이 흐른다. 거기서 하류로 따라가면 모량에서 내려오는 모량천과 남쪽의 기린천이 합류하는데, 그 지점 일대를 황천이라 했다. 요즘 행정 구역 이름으로는 탑정동이고, 그 앞으로는 오릉이 있다.

 ☞ 경주에 다시 가게되면 반드시 오릉 앞에서 놀리라. 비형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귀신들과 놀리라.

134.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137. 견훤 탄생담 같은 야래자 설화가 견훤 이전에도 한반도에 퍼져 있었꼬, 그 증거는 앞서 도화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거니와, 그 같은 이야기의 틀은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까지 전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 인간의 무의식, 꿈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흘려보내는 꿈들, 무의식 속에 뭔가 신탁의 계시가 숨어있다는.

139. 원광은 곧 "중국에 들어가 도를 배우는 일은 본디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바다와 육지가 가로막혀 있어 제 힘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 지금의 나는 도를 배우러 어디로 갈까? 일단 지금 삶의 자리를 지키면서 변경연 연구원 과정을 통해 훈련한다. 깊이있게 파고든다. 글쓰는 훈련을 하고 도반들과 함께간다. 혼자라는 생각은 버려라. 우린 이미 한 배를 탔다. 그 다음 2년이 지나고 난 아마 어디론가 떠나야 할것이다. 더 큰 도를 배우러,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러 다시 돌아올 것이다.

144. 오늘날 우리가 본지수적 또는 불국토 사상이라 부르는, 토착화한 신라 불교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그것은 통일의 힘을 쌓는 일이기도 하였다.

14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147. 진자가 미륵왕 앞에서 '부처님을 화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150.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157.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159.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167. 성안 가득 오줌을 누었다는 여자들의 꿈이 왜 좋은 것인지?

169.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170. 유신은 동생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어찌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다는 말이냐?"

그러고서 온 나라 안에 그 누이를 불태우리라고 말을 퍼뜨렸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여 노는 날을 기다렸다가, 뜨락에 나무를 쌓아 불을 피우니, 연기가 피워 올랐다. 왕이 멀리서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웬 연기인가?"

"아마도 유신이 누이를 불태우려는 것인가 합니다."

"왜 그러지?"

"누이가 지 아비도 없이 아이를 가졌다 합니다."

"이게 누구 짓인고?"

그 때 춘추가 곁에서 모시다 왕앞에서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했다.

"이것이 네 짓이로구나. 급히 가서 구하여라."

춘추가 명을 받을어 말을 달려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막았다. 그 후 혼례를 치렀다.

171.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 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172. 그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9. 문무왕 법민이 당나라에 머문 지 11년째 되던 해, 백제 원정에 나선 소정방의 군대를 따라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해 아버지가 죽고 법민은 이듬해 왕위에 오른다.

181. 문무왕이 보낸 답신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오랜 전쟁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맺은 협약이며 합동 작전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가 무리하게 요구한 것들이며 위약을 자세히 들어, 문제의 책임은 결코 신라에 있지 않음을 완곡하나마 강하게 말하고 있다.

184.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186.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에 다행히도 동서에 세운 두 탑은 건재해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 남은 절의 탑 가운데 이만큼 기품 있고 의젓한 것이 없으리라.

194.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202. 내물왕이 들어서서 신라 말기 가까이까지 김씨 계승이 끊이지 않아, 어쨌거나 미추왕은 그같이 화려한 김씨 집안의 대부가 될 수 있었다... 죽은 김씨가 살아 있는 박씨보다 낫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202. 삼산은 신라의 종묘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제사 곧 대사를 올리는 세 곳, 내림, 골화, 혈례다.

205.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211. 육두품은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더 이상의 진급이 불가능하다. 성골,진골의 피를 타고나지 않으면 말이다.

212. 익선은 바로 6부소감전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의 관리 책임자였다. 그의 거만한 행동의 배후에는 상층 귀족 사회의 묘한 힘겨루기가 깔려 있는 듯하다.

212. 이미 사회에 흐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7. 이 첫 왕비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2년 후 신문왕은 일길찬 김흠운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고, 그로부터 만 4년 후에 큰아들 효소왕을, 그리고 얼마 후에 둘째 아들 성덕왕을 낳았다.

 ☞ 통일된 신라의 첫 외척 세력으로 성장

219.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삶의 당연한 이치. 난 투쟁을 피하고 자족할지 모른다. 이것은 삶을 피하는 것이다.

224. 수로부인이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 우성선배가 생각난다. 난 노래를 듣고 감상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한다. 기타를 배우고 싶은 마음 좀 있다.

228.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 = 여론의 힘

232. 꽃을 사랑하는 여자 수로부인, 그리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던 여자 수로부인,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발을 굴러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용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부인이 자원해 살겠다고도 했을 법하다.

233.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235. 일연이 어떤 인물의 무엇을 선호했는가?

 ☞ 역사서의 저자의 취향, 가치관에 따라 그 전하는 소재와 주제가 바뀐다는 것

242.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6.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250. 양성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불법적으로 수술을 감행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도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

254. 어차피 왕위를 다투는 마당에 결과는 왕이 되거나 죽거나 어느 하나로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는 길을 찾는 수밖에, 여삼의 해몽이란 결국 살길을 찾으라는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261. 체제가 기득권 층의 자기 이익에 따라 흘러가다 보니, 관직에 있는 자들은 갈수록 무능해질 뿐이어서, 왕은 제도의 혁신 없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262. <기이>편 '48대 경문대왕' 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264.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

267.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268. 왕으로서 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대도곡>,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문군곡>이리라.

269.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 오르지요."

270.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272.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객관적 사실만 나열시켜 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277.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완도,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284.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286. '짖어대는 것 같은 소리'와 '짖었다' 는 분명 다르거니와, 여기서도 <삼국사기>가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 방식의 한 단면을 읽게 되는데, 기왕의 기이한 사건을 한층 극적으로 전하려는 데서 일연의 태도에 더 매력을 느낀다.

287. 신라의 멸망원인 :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 .. 신라 안에서 중앙과 지방간의 원활한 교류가 이뤄질 어떤 대책조차 세워져 있지 않았던 것이, 영토상으로도 통일 이전보다 그다지 많이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288. 꽉막힌 위정자들 (토피카) -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조

"제 51대 진성여왕이 조정에 나간 지 몇 년 되었을 때였다. 유모 부호부인과 그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사람이 신하로서 총애를 받고 권세를 마구 휘둘러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왕과 못된 신하들이 이를 얻어 보고는 말했다.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지었겠느냐?"

그러고는 왕거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하늘이 감옥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다.

302.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304.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305. 망한 주나라의 신하가 옛 서울을 지나다 그 곳이 메기장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인데, 신회의 노래는 그마저 없어졌으니, 천년 사직은 말 뿐이오 무상하기만 하다.

307.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자세히 서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311. 한강을 끼고 북으로는 양주에서부터 가운데는 위례성 그리고 남으로 광주까지가 500여 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백제의 대표적인 도읍은 한강 유역 곧 지금의 서울이다.

314. 백제의 풍속 : '소박하고도 따뜻하지 않았을까'

315.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분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

322. 백제를 세운 주축 세력이 북쪽에서 이주해 왔고, 그들은 이주의 달인이었음을 나는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323. 코앞의 한반도 국가 가운데 왕실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을 개척한 백제야말로 일본열도에서 우위를 잡는 데 적임자였다.

324. 8세기경 일본열도의 인구를 560만명. 그러나 200명도 채 안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였다.

325. 일본의 천지왕의 당나라에 보낸 서신(670년) :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왜라는 명칭을 실헝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   난 아무래도 보수주의자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게 변하다. 규칙을 변화하는데 저항하는 성향까지 있다. 어쩌누.

336. 버림받은 처지였건만 바리공주는 병든 어버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약을 구해 온다. 선화공주가 좋은 남편을 만나 그에게서 많은 보물을 받고, 그것을 친정 어버이에게 보낸다는 이야기도 모티브 면에서는 닮았다.

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43.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352. 918년, 왕건이 철원경에서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축하하였으며, 공작부채와 지리산의 대살을 바치기도 했다.

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363. 왕건은 자기에게 오는 이를 누구도 말리지 않는 사람이다. 형님으로 섬기고 누이로 높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364. 삼국유사 베스트 3 : 단군신화-향가-가락국기

372.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2.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무리한 토목 사업은 애초에 벌이지 않았다.

378.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378.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  왜 세울까? 수호의 상징?

382. 문무왕 :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백제-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384.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두고

390. 백제에는 바다를 건너 중국 남방계의 불교가 이어지는데, 특히 법화 신앙의 흐름은 이것을 타고 한층 뚜렷해진다.

392.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394.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 사진이미지가 할 수 있는 일도 이런것이 아닐까. 어떻게 찍고 어떻게 보여주면 확실히 이렇게 사실 이상의 어딘가로 보는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399.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402.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 조 : 원종은 법흥왕을 가리키고, 염촉은 이차돈의 다른 이름이다.

406. 왕이 절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차돈은 이 명령을 잘못 전달했다는 것이 된다. 왕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려고 이차돈의 목을 베라 하는데, 이 서슬 푸른 모습에 다른 신하들도 꼼짝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다.

411.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416. 월성과 안압지가 모여 있는 곳에서 분황사 사이의 허허벌판, 그 곳이 황룡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룡사 터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지나치고 만다.

417.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425.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428. 아쇼카왕은 참회하고 사자나 황소 또는 코끼리의 모습을 새긴 기둥을 세웠따.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428. 불교미술사학자들은 불상의 출현을 서기 1세기경의 쿠샨 왕조 때로 보고 있다.

 ☞ 불교와 그리스 조형 예술의 기술의 만남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429. 신라 땅에 이르렀다는 인도 배는 이 굽타 왕조의 불상 문화를 실어온 것이 아닐까? 아육왕은 인도의 불교를 키운 상징적인 인물이다.

433. 인도 모델의 불상 앞에 중국 모델의 탑이 서려는 순간이다. 절은 본디 왕궁으로 쓰려고 지었던 화려한 건물, 그야말로 신라 건축 문화의 총합이 여기 있다.

 ☞ 황룡사, 장륙존상

435.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또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모라고도 한다.

442. 자장이 받은 계 : 1. 모든 법을 알았다. 2. 본디 성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3. 이와 같이 법성을 풀면, 4. 곧 노사나불을 보게 되리라.

444.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45. 대적광전은 바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금당에 붙이는 이름이다.

451. 영동고속도로의 상진부 톨게이트에서 빠져 나가 월정사를 들러라!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세간에 알려지 대로이고, 월정사 뒤편으로 상원사 가는 길은 더욱 호젓하고 아름답다.

454.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게 아닐까?

459. '어디에 쓰실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 주지 않으시려는가'

469.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471.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473.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475.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 속세와 성속의 경계가 허물어진 현대에 와서는 어떻게 하지?

479.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481.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머.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바라건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만 말아주시게. 부디 함께 가야지?"

 ☞ 땡칠이들이 생각난다. 함께 가야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혼자서는 못간다. 혼자가면 가도 간것이 아니다.

486.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 한시, 민요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 삼국유사는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

495. 그 때서야 알 만했다. 앞서 만난 여자들이 바로 성녀이며 진신이라는 사실을.

497.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

498.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499.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502. '현실과 신이가 하나된 만남'

508. 일연의 시. 인각사 시비에 새겨짐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겟네

513.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517. 기본 줄거리를 같되, 세세한 부분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일연은 이런 점때문에 두 기록을 나란히 인용. 분명히 정할 수 없어 두가지를 다 둔다고 하였다. 일연다운 필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521. 원광의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할 것이다.

527. 운문사 : <삼국유사> 편찬이 이 절에서부터 시작.(청도)

530.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뜻?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할까?

 ☞ 원효

531. 원효의 결정적인 흠이라면 파계요 그것은 인간적 고뇌라 말하는 춘원의 저변에는 사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에게 파계라면 이광수에게는 변절이 있다.

536. 설총 : 삼국유사에서 "나면서 영리하고 밝아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해 신라의 열 분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말을 가지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세간 풍물과 이름을 통하게 하였으며, 육경과 문학을 뜻풀이하였다."

537. 원효는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40.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

543. 원효는 대체로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였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바보 같은 원효가 진정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548. 거추장스런 교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551. "지난 밤 잘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58. 물론 그는 화엄의 진수를 배우고자 갔지만, 벌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지상사의 그 엄격한 훈련이 의상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도의 훈련은 저 궁벽한 신라 땅 산 속에서 경험할 대로 경험한 바였다. 원효가 그랬던 것처럼, 의상 또한 이미 의상이었다.

563. 의상은 김씨 집안의 귀족 출신이다. 김흠순이나 김양도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고, 조국의 위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고 했을 것이다.

563.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이 가득 덮인 언덕에 금을 그어 '이게 성곽이다'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함부로 넘지 못할 것이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곧 성 쌓기를 중지했다. -의상

567.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하다."

570. 지금까지 나온 이러저허한 기행문보다 이 책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바로 사진의 구체성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그 투박함으로 가급적 현장을 현장 그대로 잡아낸 한 장 한 장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571.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574.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575. 천축 사람들은 해동 사람들을 구구탁예설라 라 불렀다. 구구탁은 닭이라는 말이고, 예설라는 귀라는 말이다. 저들 나라에서 '그 나라는 닭의 신을 경배해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깃을 머리에 꽂고 장식을 한다'라고 전한다.

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582. 전라북도를 대표할 금산사, 충청북도를 대표할 법주사, 경상북도를 대표할 동화사 - 삼남

586.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지장은 땅 속에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땅이 지닌 덕을 의인화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과 함께, 죽은 이들의 구제자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에게 빌어야 한다. 지금도 절에 가면 명부전이라는 불당이 있는데 거기서 바로 이 지장보살을 주불로 삼는다.

590. '삼베를 붙들고 황금을 버린다'

596.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간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604. 혜통은 다름 아닌 밀교 승려다. 밀교 기본 은 <대일경>

604.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내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607.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삼국유사>의 가장 오래된 인쇄본은 조선조 정덕 연간에 나왔다.

607. 다만 여기 단 한번 나오는 지은이 이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612. 신통력을 미끼로 헛된 이름을 팔거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밀교의 본령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자는 것이다.

613.  '이에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王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 화상이라 하였다.

620.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쪽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도 이 같은 부류로 나눠지고, 그에 따라 일연에 대한 관심이나 사적이 인멸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625. 정토 신앙은 번성기의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627.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633.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636.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641.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민간 신앙의 큰 줄이인 산신 신앙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절 안에도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생기게 된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산신각에는 산신뿐만이 아니라 칠성신, 용왕신 등을 같이 모시기도 한다.

650. 일연은 말한다. "호랑이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해쳤으나, 좋은 처방으로 잘 이끌어 주어서 그 사람들을 치료했다. 짐승이라도 인자한 마음씀이 저와 같으니, 이제 사람이면서 짐승만 못한 이들은 어찌하리."

653.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656.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657.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668.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670.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 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672.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82.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물며 그 분들의 남기신 아름다움을 적어 놓았었다. 이제 여기 함께 적는다."

682.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일연이 곳곳에서 머물 때마다 써 둔 메모들의 집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기적의 토피카'의 필요성. 언제나 나의 키워드를 생각하고 메모하자.

684. 숨는다는 것은 오히려 잘난 척 하는 데 불과하다. 연회는 거기서 자신도 모르는 제 속마음을 들켰기에 불쾌했는지 모른다.

686.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688. 어떤 책이거나 거기에는 그 책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념이 불교일 뿐이다.

691. 흥덕왕 때였다. 손순이라는 이는 모량리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곡식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이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 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 그러고서 아이를 없고서 취산의 북쪽 교외로 나갔다.

693. 부부가 놀라워하며, 잠시 숲 속의 나무 위에 걸어두고 시험삼아 쳐보니, 소리가 은은하기 그지없었다. 아내가 말했다.

"기이한 물건을 발견했으니, 아마도 아이의 복인가 합니다. 묻어선 안  되겠어요."

남편도 그렇다 여기고, 곧 아이와 종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들보에다 종을 걸어두고 치니,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를 듣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서쪽 교외에서 기이한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맑게 퍼지는 것이 보통이 아니야. 빨리 찾아보라."

신하가 그 집에 와서 살펴보고 왕에게 사정을 자세히 아뢰었다. 왕이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묻어 하늘에서 금 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이 돌 종을 솟아나게 했구나. 옛 효도와 지금의 효도를 하늘이 함께 살피셨도다."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매년 메벼 50석식을 주어, 그 순수한 효도를 드높였다.

 ☞ <삼국유사> 속의 아브람함 이야기가 있다니.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이로구나.

695. 이제 또 시주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작지만 저희가 가진 밭을 법회에 시주해서, 다음 세상에 갚아주시길 바라는 게 어떨까요?

 ☞ 다음 세상에 만 배 받을 것을 위해 배팅하는 구나. 현생이 고단한 민중들의 바램이 들어가 있는듯.

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702. 진정은 침통한 생각으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쌀독을 뒤집어 쌀 일곱 되를 털어 내, 그 자리에서 밥을 짓고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느라 늦어질까 오히려 두렵다. 내 보는 눈앞에서 그 중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 개는 싸서 서둘러 가거라."

706. 표기 수단이 외연적 현상이라면 문제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다.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 하였는가?

709.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709.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개인의 일상이 개인의 정서 속에서 부딪혀 형상화되어 있다.

710. 향가는 일상사의 개인이 부르는 곡진한 노래다.

714.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718. 신기루를 보고 왜군이 왔다고 호들갑들 떤다든지, 산행 오는 화랑을 맞으려는 달이 무심히 떠 있는데 사라진 혜성을 두고 뭐 그리 놀라느냐는 표현은 곧 변괴를 두려워 말라는 융천사의 차원 높은 응원이다. 출전하는 세 화랑에게 써준 격려의 노래였다.

720. 세속의 명예와 권력이 좋다고는 하나 인생의 무상함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으랴. 경덕왕 22년, 신충은 두 친구와 더불어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가 절을 지어 그 곳에 거처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었다.

724. 신라 말 고려 초 선종의 여러 종파를 전래한 승려마다 수십 년 걸친 고행 끝에 스승으로부터 분명한 인정을 받아 돌아온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수입이 아닌 자기화한 어떤 사상의 고갱이를 발견한다.

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아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바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26.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이라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어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있다.

728.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733. 선종의 형성 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분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4. 본질 앞에서 방편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735. 여기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고대 국가의 초보적 형태를 벗어난 다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근대적 개념의 민족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곧 중세의 단계를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러기에 나는 13세기를 중세의 시작이라고 본다.

738.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

739.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41.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741.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 많은 현대인들, 변경연식구들이 그리스인 조르바가 지금 시대의 필요한 삶의 모습으로 보는 것처럼.

744.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내가 즐기는 것 가운데 가장 신나는 놀이다. 의상의 몇 편 되지 않는 저술을 평한 일연의 글처럼, '솥 안의 국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 같은 사진 만들기. 희망사항이다. -양진

 

3. 내가 저자라면

고운기가 한 일

저자 고운기는 국문학자다.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로서의 삼국유사에 보다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했던것 같다.

그도 처음에는 한국의 고전들에 관한 글을 쓰다가 자연스럽게 삼국유사를 그대로 번역한 책을 냈었다. 그러던 그가 '삼국유사에 상상력을 덧붙여 독자들이 역사서에 쉽게 다가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삼국유사>라는 텍스트의 다양한 변주를 시작했다. '역사의 왜곡은 곤란하지만 상상력의 발휘는 꼭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아래와 같은 책들을 썼고,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는 총 15권을 기획하고 있다 한다. 일연이 발로 직접 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을 메모해서 말년에 <삼국유사>란 책을 냈다면, 고운기는 그런 일연스님을 현대로 모셔와 동행하며 그와 대화를 나누며 책을 써낸 듯 싶다. 그가 <삼국유사>와 함께 걷고 쓴게 이십년이 넘었다 한다. 텍스트는 한권이지만 그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21세기 자신의 눈으로 13세기 고려시대를 보고, 13세기를 살던 일연의 붓끝으로 삼국 고대사를 그려낸다. 다시 고대에서 현대로 넘나드니 그 상상력의 변주가 끊임없을만 하다. 저자 고운기에 대한 자세한 조사는 다음주 리뷰에서 다룰 예정이다.

 

<고운기가 쓴 삼국유사와 관련된 책들>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현암사, 2010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 2)

“일연에게 「삼국유사」는 무엇인가. 어떤 훈련을 거쳐 어떤 방법으로 「삼국유사」를 썼는가.” ‘스토리텔링 삼국유사’의 두 번째 책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구현된 글쓰기 방법을 다룬다. 고운기 교수는 다쓰노 가즈오의 「문장 닦는 법」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틀을 잡고, 「고려사절요」,「화랑세기」,「삼국사기」 등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삼국유사」 현장을 좀 더 박진감 있게 비교하였다.「삼국유사」는 일연이 평생에 걸쳐 닦은 감각의 소산이다. 감각이라면 타고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닦이기도 한다. 더불어 일연 글쓰기의 총량이 집합된 책이기도 하다.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에 고스란히 반영된 ‘일연의 글쓰기 감각’을 포착, 현장 감각/정치적 감각/균형 감각으로 접근하였다. 일연은 글쓰기의 3대 감각을 무기로 「삼국유사」를 썼다. 이는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조화를 이루며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첨예한 세 가지 감각의 발현, 이것이 「삼국유사」를 입체적으로 만들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는 재미요, 「삼국유사」 읽기의 새로운 관점이다.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현암사, 2009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 1)

어린이 삼국유사, 현암사, 20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현암사, 2006

일연을 묻는다, 현암사, 2006

길 위의 삼국유사, 미래M&B, 2006

삼국유사, 홍익출판사, 2001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연은 국존의 위치에 까지 올랐던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반면 그는 백성의 삶 깊숙이 내려와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지위나 전대의 규칙에 머물지 않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신을 <삼국유사>라는 책에 담을 수 있었다. 난 현대의 평범한 회사원이다. 내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거창한 시대나 규범이 아니라 고작 나 자신 뿐일지 모른다. 그런 내가 쓸 수 있는 <삼국유사>에 관한 책이라면 어떤 내용일까? 긴 시간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엔 단순한 결론에 이른다. 바로 삼국유사에 담긴 수십편의 이야기들을, 내 삶의 경험 속에서 찾아낸 키워드로 평범한 현대인의 삶과 함께 엮어 내는 것. 바로 <삼국유사에서 건진 현대인의 처세술> 정도의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제목으로는 '노힐부득의 외통수와 달달박박의 융통성', '현대인의 스승', '도시생활과 전원생활의 조화' 등 이 떠오른다. 일연의 글쓰기 방식을 따른 <발로 쓴 내 고향 문화유산> 이라는 책도 읽어주는 이는 별로 없겠지만 쓸 수는 있을 듯 싶다. 이번 칼럼에 도전해 볼 예정이다.

또 하나의 기획을 해본다면, 삼국유사의 현장들을 발굴하여 답사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다. 1. 일연의 생애를 좇아서, 2. 삼국유사의 신라/백제/고구려의 모습을 찾아서 3. 통일신라의 흔적을 따라서, 4. 민담의 현장을 찾아서, 5. 삼국유사를 통해 찾아본 일본 기행 등 다양한 여행 답사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더한다면 사진워크샵 프로그램과 인문학 공부를 곁들인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다. 이 <역사/사진 워크샵>에는 사진가와 인문학자가 동행하며 대상은 여행작가 지망생들이 될것이다. 여행작가 과정의 일환으로서 들어가면 좋을 듯 하다. 여행작가도 단순한 볼거리, 먹을거리 위주의 정보제공에서 벗어나 인문학과 사진이라는 차별화를 통해 새로운 여행기, 기행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국내를 넘어 해외 여행으로 넓혀나간다면 과거의 신라시대 혜초가 히말라야 너머 인도를 여행하고 쓴 <왕오천축국전>이나 조선후기 박지원의 생생한 여행담인 <열하일기>같은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이 탄생할지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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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3] 루미 2011.05.09 2476
44 6th Review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북리뷰 file 사샤 2011.05.09 2547
43 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미선 2011.05.09 1891
42 [북리뷰 006]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김경인 2011.05.08 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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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file [2] 미나 2011.05.08 2665
39 06.<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강훈 2011.05.08 2010
38 북No.6 -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유재경 2011.05.07 4468
37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양진 미옥 2010.05.11 2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