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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1일 06시 50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양진 사진  현암사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일대기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1281년(충렬왕 7년)에 편찬하였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이 책 덕분에 일연은 우리에게 누구보다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가치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하고 치밀한 분석의 손길이 따라야 한다. 13세기 아주 특별한 이에 의해 이룩한 민족의 발견,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 정작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일연은 너무 유명해서 아무도 모른다. 이 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삼국유사]의 지은이로 일연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삼국유사]가 유명하므로 일연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오늘날 초등학생에서 일반인까지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과서와 동화책과 인문 교양서에 이르기까지 [삼국유사]를 변주한 책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삼국유사]라는 책에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친숙하다.

일찌감치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이가 일연이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연은 20세기에 들어 유명해졌다. 아니 이 또한 [삼국유사]가 유명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일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은 [삼국유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이이다.

  하지만 일연은 당대에 꽤 잘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된 이였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사회에서 국사의 위치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고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분들의 생애를 그리워했는가. 단순하게 따지자면 당대의 일연은 추기경과 스님을 합쳐 놓은 분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만한 이가 국사에 올랐고, 단일 종교에 국가 종교였던 불교의 당시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사는 두 분을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다. 일연도 그만한 반열에 오른 이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물며 일연에게는 번듯한 비문이 남아서 전해온다. 한문으로 쓴 1,200자 가량의 꽤 긴 분량이다. 가계와 생몰연대 그리고 주요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에 비하면 꽤 풍부한 자료를 남겨 놓은 셈이다. (643년 원효가 창건한 이래 1307년 보각국사 일연이 중창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한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비의 탁본. 이 비는 1295년(충렬왕 21년) 사승 죽허가 왕희지글자를 집자해서 세운 것으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석을 세우기 위해 쓴 비문 하나가 정보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오른 고승에 대해 이토록 감감무소식인지 의아할 만큼, 다른 기록에 걸쳐 견주어 입증할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비문에 나타난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그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된 일연의 시대

   이름을 안다고 다 안 것처럼 여기는 우리네 불찰이 여기서 한몫 거든다. 일연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알았다고 말하면 너무 싱겁다. 우리의 역사 시간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도 그 이름과 단편적인 몇 가지 내용만 알 뿐, 깊이 있게 이 책의 가치와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유명해서 알았다 여기고 넘어가는 무심함을 이제 깰 때가 되었다.

   비록 단선적이긴 하나 먼저 비문을 통해 일연의 생애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 곧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이다. 그리고 꼭 10년 전인 1196년에는 최충헌이 자신의 무인정권을 세웠었다. 일연의 생애는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신난(辛難)한 세월이었다.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道義)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44세 때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첫 직장치고는 꽤 늦었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를 저술하였다. 일연의 많은 저작 가운데 [삼국유사]와 함께 지금까지 전하는 이 책은 그의 수행과 학문이 벌써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히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가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유하는가 하면,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함께 일본 정벌을 하던 때는 일연의 나이 어언 76세가 되어 있었는데,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개성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주석한 지 5년 만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실로 은퇴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아들 하나 두고, 스물여섯 살에 제 품에서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정사의 상대적인 의미인 ‘대안사서’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野史)라 부른다. 그러나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代案史書)’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서는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불렀을 때 상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활사(生活史)로 요약해 본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던 이 땅의 민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삼국유사]는 수많은 일화를 적절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곧 일연의 세계관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三大分)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왕력 편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 편은 양적으로도 역사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현저히 다른 질적인 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기이 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 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흥법 편 이하의 편들은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일연은 승려로서 분명한 불교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불교 문화사란 그런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흥법 편 이하가 중국의 승전(僧傳)을 많이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를 반추했을 때 드러난다.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고,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발견하고 민족을 재발견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일연이 전하는 삼국시대 이야기

이렇게 [삼국유사]의 세계를 정리해 보면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이 남았다. 과연 일연은 누구인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매우 치밀하고 장황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일연은 이야기하는 재주를 다양하게 지닌 이였다. 그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풀어 넣는 비상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기술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원효와 의상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짝을 지어 등장시킴으로써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우, 김춘추처럼 주인공의 자리에 조연으로 등장시켜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한 사람을 조명하는 경우 등이 먼저 눈에 띈다. 이는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경우는 한 왕대에 대해 대표적인 한 사건을 서술하여 그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선택과 집중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진평왕의 경우, 왕은 무려 53년이나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일연은 다만 한 가지 천사옥대(天賜玉帶), 곧 하늘이 내려준 옥대를 받은 일로 갈음한다. 그의 권위와 업적에 대해서는 이 한 가지로 설명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하늘에서 옥대가 내려온다는 일이 발생 가능한 것인가는 논외다. 만약 거기에 걸려서 쓰기를 주저했다면 아예 단군신화는 설 자리조차 잃었을 것이다.

법흥왕은 기이 편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법흥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흥법 편에서 이차돈 순교 사건의 조연으로 법흥은 나온다. 물론 이는 [삼국유사]를 사건의 나열 방식이 아니라 주제별 분류에 따라 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법흥이 법흥인 것은 신라의 불교공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연은 왕의 재위 순서에 따라 기이 편을 기술하다가도 법흥 같은 중요한 왕을 과감하게 흥법 편으로 돌렸다. 거기서 더 흥미롭게 법흥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유사’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것도 없다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연이 가졌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고운기 작성-


삼국유사를 기록한 곳 -경북 군위 인각사

군위는 대구와 구미·영천·의성·칠곡과 맞닿아 있다. 팔공산과 위천이 곳곳에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고 있다. 고로면 화북리 위천 상류에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름다운 바위 절벽이 있다. 학들이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불린다. 송림과 석산의 조화가 빼어나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음풍영월하던 곳이다. 건너편에 인각사(麟角寺)가 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화산, 북쪽으로는 옥녀봉이 가파른 지맥을 드리우고 있다.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자리에 들어섰다고 해서 인각사라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됐다고 한다. 일연 스님(1206~1289)이 고려 충렬왕 10년(1284) 부터 입적할 때 까지 5년 동안 이 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집대성한 소중한 기록문화유산인 삼국유사가 탄생한 곳. 인각사는 일연 스님이 살아 있을 당시 고려 불교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불교대회라 할 수 있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가 두 번 열렸다. 효성이 지극했던 일연 스님은 78세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개경에서 인각사로 내려왔다. 어머니의 묘소는 인각사에서 1㎞쯤 떨어진 곳에 있다.

  일연 스님 입적 후 그를 기리는 부도탑과 비가 세워졌다.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민지가 왕명을 받을어 지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탑에서 광채가 나와 건너편에 있는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전해온다.

‘저 맑은 거울과 둔탁한 쇠가 원래 두 물건이 아니요. 휘몰아치는 파도와 고요한 호수가 함께 한 근원에서 나오느니, 그 근본은 같으나 끝이 달라지는 것은 연마하고 연마하지 않거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은데 있을 따름이다. 여러 부처와 중생의 성품 또한 이와 같으니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비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연 스님을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정진했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경향신문 기자 최슬기 작성)



고운기

저자 고운기는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양대와 연세대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10여 년 넘게 삼국유사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직접 답사하며 여러 권의 저서를 냈다. 1999년에 도일(渡日),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3년간 한일문학 비교연구를 수행한 뒤 위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2001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002년), 『일연을 묻는다』(2006년)등의 책을 냈다.

  2007년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객원교수로 한국고전문학과 삼국유사를 강의하였다. 이 기간의 공부가 바탕이 되어 논문 「도쿠가와가(德川家) 장서 목록에 나타난 삼국유사 전승의 연구」(2008년)를 썼고, 필생의 작업인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하여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2009년),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2010년),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2011년)를 펴냈다.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여,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내려 한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대한 고운기의 개요-우리 중심의 역사서를 쓴 <삼국유사>

고려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래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 표기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년(1145년)의 일이다.

그리고 100년이 넘게 흘렀다. 그 사이 고려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문신 귀족들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무인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 자체로 끝나지 않았고 세계관에 변화를 주었다. 무인 정권 이후 고려는 전반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철이다. 감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전기 지식인들의 세계인식은 사대(事大)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었다. 당에서 송으로 이러지며 높아질대로 높아진 한족(漢族)의 자존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주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햇던 <삼국사기>의 역사기술은 이쯤와서 힘을 잃게 된다.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206년에 태오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엿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발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禪宗)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머넞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 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3~8P)


고운기는 이 책을 어떻게 썼을까?

첫째는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 개, 그것을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40개의 제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앞의 20편은 <기이>편을 중심으로, 뒤의 20편은 <흥법> 이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운기가 뽑은 40여편을 눈여겨 볼만하다. 왜, 이것을 뽑았을까?

셋째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은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 보았고, 뒤는 승전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넷째는 일연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ㄱ구유사>본체를 이해하는데 요긴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을 군데군데 설명하엿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가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10P)

☆☆☆고운기는 일연이 재구성한 <삼국유사>를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했다. 고운기가 본 <삼국유시>를 읽으면서 그의 서술방식과 그가 전개한 반식 혹은 그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구본형사부님께서 그리스 로마신화를 공부하고 나서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고 책을 내놓았다. 아무도 보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으로 책을 읽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불교경전을 읽고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며 어떤 관점에서 쓸지를 이제 고민해야 한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앗던 첫 세대의 상징: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왔다.

13세기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고 그 첫머리에 단군산화를 실을 때까지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나갓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强固)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년이 흘러야 했다. 그 사이 사회가 변했다. 정권 담당자도 바뀌고 크나큰 나라 몽고와 20여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곤고한 세월이었다. (12P)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햇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주지 못햇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있게 세워 놓앗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요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23P)


고구려와 북방계

***고대 왕권 국가로서의 틀을 분명히 갖춘 나라로 선별하자면 고구려, 백제, 신라 이 세 나라 박에 없다고 김부식은 판단한 것이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36P)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다음에 살펴볼 신라의 박혁거세 탄생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父系)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卵生)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삼국사기>에서 앞에서는 주몽의 뛰어난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뒤는 하늘의 도움가지 함께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마디로 완벽하게 갖춰진 조건이다. 주모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44P)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북방계 이동의 끝: 일연은 ‘시조 온조왕은 도영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집단이다.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의 구성원이 전부 북방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 시기에 부족간의 이동은 끊이지 않았고 좀더 우세한 세력과 기술을 가진 쪽으로 힘의 균형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52P)

☆☆☆백제계는 북방민족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신라와 남방계

****신라 여섯 부족은 또 다른 오리지널: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데 반해 일연은 “여섯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렸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54P)

***일연은 혁거세왕의 최후를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 몸만 남아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 후 또한 죽자 사람들이 하바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엇다. 그래서 몸뚱이를 다섯으로 나누어 가각 묻고 오릉(五陵)으로 만들고 또한 사릉(蛇陵)이라 이름지었다. (62P)


***서연산은 선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은 지금 경주 서족에 자리잡은 높이가 380미터로 나지막하지만 예로부터 경주의 진산(鎭山)이요 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불리었다. (63P)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와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햇다. 탈해가 ‘무릇 덕있는 자는 이(齒)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레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다.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의 시작되엇다. (73P)

***탈해는 왕위에 오를 번하다 34년을 기다린 끝의 일이다. 탈해는 여섯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신라와 일본이 맺은 우호조약은 그 같은 사정을 말해준다.(83P)

☆☆☆작가의 추측과 예측이 굉장히 주관적이다. 삼국유사가 나온지 약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일연 또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주관적 해석을 가미해서 슨 것인데, 고운기 또한 주관적 해석, 주관적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탈해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김알지의 출현이었다. (83P)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프롤레슬러 하미코도 그 무려에 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생겼을 것 같다. 그런 와중에 1993년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 ‘하미코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이씨(이영희박사)는 이 말에 상당한 흥미와 매력을 느낀 듯 하다. (91P)

****하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제 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디 4년은 정유년(157년)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닥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그를 태워서 일본으로 갔다.

신라에서는 해아 달이 빛을 잃었다.......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낸다면 될 것이다.”

그러고서 비단을 내려주었다. (93P)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에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에 앞서 3년간 그는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은 곳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분주했다. 그러기에 낙향은 본연의 승려생활로 돌아가려는 마음때문이었다. (96P)

***영일(迎日)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영일ㅇ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연이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 두가지가 자연스레 결합되어 나온 것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이다......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97P)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이라는 정식국호를 가지기 전에 그들은 스스로 왜(倭)라고 불럿다. 그 왜나라의 처음 신라 침공은 <삼국사기>만 가지고 따져도 혁거세왕 8년(기원전 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낟. 남해왕 11년(14년)에는 신라 수도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알천까지 파고 들어오는데 월성(月城)을 쌓고 왕궁을 그 안으로 옮긴 것은 왜적의 침입을 막자는 의도였을 것이다.(106P)

****왜의 잦은 침공을 받는 신라로서는 비록 그때마다 물리쳤다고든 해도 늘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셈이었고, 그런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이이 숙원(宿願)이었다.(107P)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방법이다. (118P)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내물왕과 김제상 조에서 눌지왕이 볼모로 간 동생들을 그리워하자 박제상이 나서서 그 일을 이뤄 내는 다음 과정은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제상의 충성스런 마음씨와 영리한 꾀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다르다.(111P)

☆☆☆경주사람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 신라의 역사와 일화 등은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나온 것이다. 정사가 아닌 야사를 믿게 된 것은 무엇일까? 스토리델링으로 되어있는 <삼국유사>가 더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夜來者)설화의 전통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신라가 법흥왕과 진흥왕을 지나며 한반도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때다. 그런데 진지왕은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등극하여 불과 4년만에 왕위를 진평왕에게 물려주고 있다. 법흥왕이 26년, 진흥왕이 36년을 재위하며 나라가 안정되어 가는 시기에 생겨난 뜻밖의 일이다. 진평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했다.

신라 제 25대 진지왕의 재위기간이 4년 밖에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나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도화녀의 이야기는 진지왕 폐위의 이유를 대자는 그렇게 단순히 처리하지 못한 몇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123~124P)

****“사량부에 사는 백성의 딸이 자태가 요염하고 얼굴이 예뻐 도화랑이라 불리고 있었다. 왕이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가지려 햇다.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바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아비가 있으면서 다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비록 황제의 위력으로도 끝내 빼앗지 못합니다.’ (삼국유사 중 126P)

***사량부는 신라의 여섯 부족 가운데 원래 고허촌이었고 이는 정(鄭)씨의 시조가 된다.(125P)

****봄꽃이라면 뭐든 아름답다 하나 복사꽃을 따를 만할까? 희다면 희고 붉다면 붉은 꽃, 그 두 가지 빛이 어우러져 먼 데서 보면 뾰족하게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의 맑고 북은 볼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그것은 도연명이 묘사한 무릉도원이라는 이상향을 장식한 꽃이기도 하였다. 도화랑은 그렇게 어여쁜 여자였던가 보다.(125P)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 밤손님: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엇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엇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134~135P)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 내고: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불교가 신라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엇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기이>편의 ‘거문고의 갑을 쏘라’조다. 소지왕 10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교에 대한 신라인들의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141P)

노인이 편지를 들고 나와 바쳤다고 해서 ‘서출지라고 부르는 연못은 지금도 경주 남산 밑 피리촌에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무척 괴이하다. 표면적으로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승려와 궁주를 처단한 슬기로운 왕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있는 여지가 넓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142~143P)

☆☆☆서출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 가면 크지 않은 호수인데도 저 끝을 보면 아득한 느낌이 든다. 연못 부근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모를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연못에서 편지를 들고 나와 전한 노인을 위한 사당인지 모르겠다. 왜 이곳이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상징하는 그런 장소가 되었을까?

특히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위해서는 성직자에 대한 추잡한 사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성직자에게 독약과도 같은 추문(醜聞)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을까?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 불교는 신라의 국교가 된다.

*****신라의 호국 불교적 성격: 원광이 화랑들을 위해 지어 준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원광은 본디 귀족출신이므로 유학에도 소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세속오계에서 유교의 오륜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지만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의 불교다.(152P)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여기서 고운기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희라는 그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현대 여배우 문희를 떠올리면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역사서라고 해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경험, 생각들을 쓰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춘추나 문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 중간에서 둘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유신의 뜻을 알아차릴 눈치가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문희의 용모를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단장에,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는 이를 눈부시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춘추가 단 번에 문희에게 푹 빠질 만도 하건만 그래서 두 사람이 야합을 한 것까지는 순조로웠으나 정식결혼에는 한 가지 장애가 놓여 있었다. 춘추와 문희의 신분때문이었다. (167P)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19년(532년)의 일이다. 김유신이 태어나기 60여 년 전, 유신의 증조부 구해는 수로왕의 후손이었는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로 와서 살았다. 그래서 유신은 신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고 관직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169P)

☆☆☆가야인과  신라인의 결혼은 민족의 결혼이다. 

****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나중 문무왕이 되는 법민은 626년생이다.


***진골 출신 왕의 탄생; 처남 매제 간으로 맺어진 김춘추와 김유신 콤비는 이후 거칠 것 없이 자신들의 뜻을 펼쳐간다.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 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특히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김춘추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법민, 인문 등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나라에 보내 그 곳의 주요 인사들과 안면을 익히게 하였다.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왕실(성골제도)엣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진골제도)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드디어 춘추의 나이 51세,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기회는 그에게 돌아왓다. 자신의 오른팔 김유신은 이제 누구도 거역 못하는 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172P)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 바 아니다. 힘으로 안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神術)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그런 만큼 태종 무열왕에서 문무왕에 이어지는 삼국통일의 역사(役事)에서 김유신의 활약은 눈부시다. (173P)

☆☆☆경주에 가면 김유신의 묘는 웅대하고 거창하다. 12지신상을 조각한 돌들이 묘를 장식하고 있다. 그만큼 김유신이 신라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을 통일하는데  김유신의 활약은 눈부셨고, 후대인들이 듣기만 해도 존경스럽다.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벌인 해프닝, 문희는 오라비의 어떤 계획에 따라 춘추와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어쩌면 법민을 낳고도 정식 결혼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차가 있지 않을까?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 법민: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해이엇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79P)

☆☆☆신라으 삼국통일 때문에 우리의 영토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만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만주벌판까지는 충분히 우리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고운기가 신라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고 나 할까.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왕위에 있엇던 20년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의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랄ㄹ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게속하겟다고 한다. (183~185P)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빅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189P)


권력의 끝

***김씨 성을 가진 첫 왕; 일연은 “제 13대 미추 닛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빛나는 집안의 전통을 잇고 두루 성덕을 갖추었다. 이해왕에게서 이어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는데 23년간 자리에 있다가 죽었다. 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200P)

***미추왕은 화려한 김씨 집안의 대부가 될 수 있었다. (202P)

***효소왕대의 죽지랑: 최근 학계에서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책의 진위 여부와 그 역사적 가치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엇다. 그것은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금갈 예인(藝人)이나 급기야 귀족부인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략한 남창이 되엇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화랑들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신라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205P)

***죽지랑 또한 그런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기이>편의 효소왕대의 죽지랑조에 소개되는 그는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진덕왕, 태종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고 하였다....죽지랑마저 노년에는 쓸쓸한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득오의 모죽지랑가


가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213P)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 고 있을 것이다. (219p)

***태종과 문무왕대에는 강력한 왕의 힘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골화된 이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왕실과 가까운 최고 권력층에서 터졌다. (219p)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226p)


첫 성전환증 환자

****월명의 도솔가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하 SrHC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238p)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잇으니 두려웁고

“니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갓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월명사의 <제망매가>(241p)

***역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김춘추에게 왕위를 뺏겼던 내물왕계의 후손이다. 양상은 10세손으로 선덕왕이, 그리고 경신은 12세손으로 원성왕이 되었다. (251p)


왕이 되는 자

***선덕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본래 재주와 덕이 얇고 가벼워 왕위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의 추대를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비록 겸사로 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일정한 사실도 숨어잇다. 당시 김양성은 국무총리격인 상대등이었고, 김경신은 별다른 직책을 가지지 않은 이찬이엇다. 양상은 왕이 되어서도 5년 만에 자리에서 불려나려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말리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결국 다음해 몸져눕고 만 것이다. (252p)

***북천은 알천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화백제도 시절, 부족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다. 혁거세의 신이한 탄생을 목격한 곳도 알천의 언덕 위였다. 그러므로 북천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왕위를 바라는 자가 해야 할 조상에 대한 알림 곧 고유의 의가 잇을 것이다. (255p)


나라가 망하는 징조

****이른 눈으로 상징한 것: 원서왕 이후 신라가 망하기까지 150년이다. 그 사이에 19명의 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한 왕이 그저 8년 남짓 자리를 지킨 셈이나 1~2년 만에 죽거나 죽임을 당한 왕도 여럿이다. (271p)

***헌강왕은 동해왕을 만난다. 이미 수로부인의 이야기에서 확인했듯이 우리 옛 이야기 속의 용은 그다지 나쁜 영향을 맡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 분이다. (280p)

***처용은 정말로 용의 자식인가? 문면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갖가지 해석이 나왓는데 지방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 두는 기인(其人)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한편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81p)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도의 동맥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졋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햇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엇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통일이 되고도 신라는 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역에서 맴도록 있다. 통일을 하자마자 수도를 한반도의 중부로 옮겻다면 어땠을 까? (288p)


***마의 태자가 바로 경순왕의 아들이다.

  태자가 말했다.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잇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이었다.(301p)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백제가 한강유역에다 도읍을 두엇을 때는 북부여로부터 출발한 북방계 민족일 뿐이었다. 그 외교 관계의 중심점도 북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일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로부터 가중되어 오는 압박을 견디기에 백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레서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311P)

***청동으로 만든 거울이 1914년 일본의 오사카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잇다. 서기 50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거울에 ‘남제왕’과 ‘사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수수게끼는 1971년에 와서야 풀렷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엇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청동거울이 나온지 거의 60여년 만에 사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고, 그로서 계체왕이 무녕왕과 형제지간임을 밝히는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320P)


서동은 정말 공주를 꾀었을까

☆☆☆고운기는 <삼국유사>의 베스트 10을 꼽으라면 당연히 들어갈만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왜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님을 엮었을까?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견훤, 비운의 영웅

***견훤은 사실상 주인공인 왕건을 빛내주는 훌륭한 조연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어 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 그리고 시비 고비녀, 나인 능예남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술을 빚어 마시다가 감시하던 군사 50명을 취하게 만들고는 도망을 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적이었던 왕건에게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러 갔다. 왕건은 구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다. (361P0


신비의 왕조, 가야

***가야는 규모 면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나라의 이름만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호칭 도한 없었으며 다만 아홉 사람의 9간이 다스리는 100호에 7만 오천명의 인구가 전부였다. ‘가락국기’으 시작과 끝은 작은 나라만큼이나 그렇게 소박하다. 


 

불교로 보는 역사

****이 땅에 처음 온 승려 순도

*****백제에 이른 마라난타

백제에 중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왓다. 마라난타가 입국한 바닷가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과의 어디쯤이라고 한다.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젖는 소리에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아도는 고구려사람인데 그 어머니는 고도녕이라 했다. 5세 때 어머니의 명령을 좇아 출가하고 16세 때 위나라 현창화상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세 때 돌아오자 어머니는 불교의 인연이 있는 신라로 가라고 했다. 미추왕 즉위 2년 계미였다. 그러나 막상 신라의 사정은 달랐다. 심지어 아도를 죽이려했다. 그는 속선현의 모록(모례)의 집에 숨었다. 공주가 큰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자 아도가 나서 낫게 한다. 왕은 기뻐서 그에게 소원하는 바를 묻게 되는데 그는 단지 천경림에 절 하나 짓기가 소원이라고 말한다.(395P)


****완고한 신라 사회 소에 뿌린 불교의 씨

모례는 모록이라고도 한다.

일연은 찬에서 바로 이 모례에게 주목하고 있다.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금교는 아도가 미추왕의 허락을 받아 첫 절을 지은 천경림에 있는 다리다. 눈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399P)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이차돈이 왕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차돈은 그때 나이 스물둘로 사인(舍人)이라는 낮은 자리에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시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임금은 말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 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405P)


****아도의 본마음을 이룬 성자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다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적이 이 이야기의 절정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다.(407P)

***신라 불교가 뿌리 내리는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일연은 대각구사 의천이 1091년 경복사에서 쓴 다음과 같은 시를 덧붙여 놓고 있다.


열반의 무릇 평등한 가르침이

우리 스님에게서 전해 받았네.

애달프다. 방이 날아온 다음

동명왕의 옛 나라 위태로워졌네. (414P)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의 돌무더기

월성과 안압지가 모여있는 곳에서 분호아사 사이의 허허벌판, 그곳이 황룡사다. 정확히 말하면 황룡사터다. (416P)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오나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지금 겨우 남아있는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을 돌들이나 금당과 회랑등을 놓았을 돌들이 무어라 외치는지 들어볼만도 하다.  (417P)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황룡사가 완성되고 2~3년이 지난 후 였다. <삼국사기>는 그때를 진흥왕의 일로 기록하였다.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울주의 곡포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지금의 울산 앞바다 어디쯤일 것이다.

배 안에서 발견한 쪽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000근의 호아금 3만분을 모아 석가 삼존상을 만들려 하엿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뚜ㅢ워 보내노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거기에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델을 함께 실어 놓았다. 관리가 이를 갖추어 왕궁에 보고하자 경주로 옮겨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이뤄냈다고 한다.((422P)


***뒷날 지장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으 주면서 부탁하는 것이었다.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 우왕이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렀으니 완성하여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423~424P)

****일연은 구층 탑을 찬하였다.


이에 올라보라. 어찌 구한(九韓)만의 항복을 보겟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34P)

문수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성인이 성인인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둘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444P)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던 때는 부처의 얼굴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보배스런 구슬로 , 부처의 눈 형태로, 부처의 손 형태로, 보배스런 탑의 형태로, 부처의 머리 형태로, 온갖 등의 형태로, 금빛 나는 다리 형태로, 금빛 나는 북의 형태로,.....다섯 빛깔의 광명 형태로, 길상초의 형태로 푸른 연꽃의 형태로....”(448P)


작은 절들에 서림 삶의 애환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안식

14편의 향가에 들어있는 <천수대비가>가 실린, <분황사 천수대비, 맹인아이가 눈을 뜨다>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큰고.


천 개의 눈에서 하나만이라도 내 주어 소원을 들어주기 바라는 지극한 마음이 노래에 스며있다. ‘어디에 쓰실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주지 않을실려는가’ 라고(458~459P)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흰달이 비추는 산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뜻깊은 것을 뽑으리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데 주저하지 않겟다.

***여자는 먼저 박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이런 노래를 지어 바쳤다.


가다보니 해는 떨어지고 온 산이 저물어

길은 끊어지고 마을은 멀어 사방이 막혓다오.

오늘 밤 몸을 맡겨 암자 아래 자려 하니

자비로운 스님께선 화내지 마세요  (477P)


박박은 “절이란 깨끗이 지키는 것을 일삼는 곳이오. 그대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빨리 떠나시고 이곳에 머물지 마시오.”라고 그답게 거절한다.


***여자는 부득에게 이런 시를 지어 바쳤다.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그늘이 짙어가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께 계율을 일러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마오(478P)

☆☆☆두 사람에게 바쳐진 시를 보면 이미 여자는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의 그릇의 크기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바친 시에서 박박은 공부가 좀 덜 된 사람이로 읽혀지는가 하면 부득은 달통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시로 완성되는 <삼국유사>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족 암자 가까운데 그리고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겟다는 짓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은 노힐부득을 두고 쓴 일연의 찬이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려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484~485P)


낙산사의 힘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일연이 조신의 꿈에 대해 찬을 하였다.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악착을 부리는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508P)


운문사 이야기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527P)


원효, 해동불교의 자랑

****일연이 가장 잘 알았던 사람

하루는 스님이 거리에서 소리질러 노래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맨 먼저 그 뜻을 알아 챈 이는 혼자되어 살고 있는 딸을 가진 태종임금이었다. 자루빠진 도끼를 달라함은 다름 아닌 과부인 요석공주를 가리킨다. (534~535P)

***바보같은 원효

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

사복이 글이 번거롭군요 하더니 고쳐서 말햇다.

“죽고 남이 괴롭구나.” (541P)


*****문 닫힌 분황사에서 추억하는 원효: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45P)


***일연은 설총과 원효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각승을 지어 처음 삼매의 요점을 열었고

뒤웅박 들고 춤추니 온 거리에 유행하였네

달 밝은 요석궁 봄 잠은 옛일이니

문 닫힌 분황사 고영(顧影)자리만 비었구나 (546P)


의상, 화엄의 마루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 땅에 도독부를 두고 식민통치를 하고자 했다. 신라는 이에 반발하고 나섰는데 그러자 당나라는 내친김에 신라마저ㅓ 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의상의 귀국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보인다. 본디 의상은 김씨 집안의 귀족출신이다. (562~563P)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일연은 위대했던 개척정신을 추모한 시를 불렀다.


천축 길 하늘 너머 만첩 산인데

가련타 순레자들 힘써 오르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 돌아옴을 보지 못했네

(579P)


밀교의 한 자락

***중국으로 간 헤통은 무외삼장에게 가르침을 청ㅎ하러 갔는데 오랑캐 땅에 므슴 법기가 있겠느냐며 핀잔만 들었다.


이에 헤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간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낫다. 삼장이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613P)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광덕과 엄장

사실 광덕은 모진 사내다 밤마다 아내를 제쳐놓고 한결같은 소리로 아미타 부처님만을 불렀으니 말이다.

엄장은 현실적인 사내다. 엄장은 광덕의 죽음을 알고 찾아가 장례를 치르고 그의 아내를 거두어왔다. 밤이 되어 몸을 섞으려 하자, 여자는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광덕과 달리 세속의 인연만을 생각하는 염장을 준엄히 꾸짖었다.(632P)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흥륜사는 경주 시내에 있었던 신라 최초의 절이고 음력 2월 보름이라면 바야흐로 천지에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다. 대는 원성왕 재위시절이다.

김현이라는 청년은 밤 깊도록 혼자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있엇는데 한 처녀가 나타나 염불하며 따라 돌았다. 절에 남은 사람은 오직 둘뿐, 그들은 단박에 눈이 맞았고, 탑돌이가 끝나자 가려진 곳으로 들어가 정을 통했다.

☆☆☆탑돌이가 부활되어 석가모니탄신일이 아니어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이땅의 청춘남녀들이 좀더 폭넓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탑돌이가 부활된다면 아마 사찰에 많은 청춘남녀가 들끓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남산의 불상은 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선으로 불상을 새긴 것은 초기 또는 초보적인 형태다. 약간 도드라지게 파내서 입체감을 살린 것이 좀더 세련된 형태다. (658P)

☆☆☆ 고운기의 책에 윤경렬선생의 사진이 나와 있다. 경주인들은 보살같은 윤경렬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다. 아니 너무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경부박물관에서 윤경렬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유적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숨어사는 이의 멋

***세상과의 단절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각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72P)


불교가 보는 효도

***일연의 비문에 나타난 어머니에 대한 효도

“스님은 평소 서울 생활을 즐겨하지 않고 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사양의 듯이 매우 깊어 임금께서도 그 뜻을 거스르다가 결국 허락하였다. 근시좌랑 호아수명에게 명하여 하산을 호위케하니 조야(朝野)의 인사들이 희구한 일이라 하여 탄복해 마지 않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96세였다.(688P)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 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햇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요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704P)

***신라 사람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고급의 문자 수단인 한문을 두고 왜 굳이 향찰을 만들었을까? 물론 한문의 문자 체계가 복잡하여 쉽게 익혀 쓰기가 곤란했다는 점으로 설명하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일연도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706P)


***<제망매가>는 누구나 공감하는 향가의 최고 작품이다. ‘월명이 일찍 죽은 누이의 영재(靈齋)를 지내려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다.’(707P)

***일연의 개인적인 성향인 시취미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으로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삼국유사>속에 실은 것이다. (707P)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이다.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이 노래는 경덕왕을 감동시켰던 향가다. 기파랑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충담은 마지막에 승려의 신분으로 생애를 마쳤지만 본디 화랑 출신이었을 것으로보 이고 기파랑은 그가 따른 상관이 아니었나 싶다.

노래의 서두에서 기파랑을 찬양하면서 하늘의 흰구름과 당의 백사장이 가진 개결(芥潔) 함을 위아래로 바탕에 깔고 거기에 달빛의 은은함을 쏘아 묘사해 낸 솜씨는 일품이다. 기파랑의 성품이 그만큼 맑고 부드러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파랑이 그렇게 맑고 부드러운 이미지만을 지닌 인물인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마당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마지막 줄에 그렷듯이 높이 솟은 잣나무 가지가 눈도 이겨 내고 꼿꼿한 것처럼 기파랑은 굳세고 강인한 존재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威儀)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자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711~712P)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처음에는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일연은 열네 살이 되더 s해 설악산의 진전사로 가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엇다. 진전사는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아홉산문에 속해 있었으니 그는 여기서 산문이 결정되었고, 왕명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산문의 적이었기에 평생을 이 파에 속한 승려로 살다 갔다. (726P)

****승려로서의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움을ㄹ 하나로 보겟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과정에는 숨어있다.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사상으로 이엇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727~728P)

***재래신앙과 불교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내가 작가라면

첫째는 1990년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의 그 탁월한 선택이 부럽다.

둘째는 지금이야 고운기의 <삼국유사>는 유명하지만, 그 유명세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별로 박수도 받지 못햇고 돈도 되지 않는 <삼국유사>를 오랜 세월 연구를 해왔다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보낸다.

셋째, 작가의 글쓰기가 조금 산만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잇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부분을 복원하자니 앞뒤해서 여러 정황들을 갇다 붙였을 것이다. 이것 또한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능력이있다.

넷째는 작가의 추측과 예측이 굉장히 주관적이다. 삼국유사가 나온 지 약 80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일연 또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주관적 해석을 가미해서 쓴 것이다. 고운기 또한 주관적 해석과 주관적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오능에 얽힌 이야기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경주인들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온 이야기를 믿고 있고 나 또한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야사에서 명확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이 명확하지도 않고 산만하다. 작가도 전해오는 이야기를 참고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여기서 고운기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희라는 그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현대 여배우 문희를 떠올리면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역사서라고 해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경험, 생각들을 쓰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고운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고 그것을 전한 사람들의 이력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불교가 신라에 뿌리 내린 것에 대해 해설해 놓은 것이 좋았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고 내가 40편을 뽑는다면 어떤 것을 뽑을지 생각해 본다.

지금 유적으로 남아있는 신라의 건축물과 불상은 대부분 양지스님의 손에 의해서 탄생되어졌다는데, 작가는 그러한 부분을 크게 조명하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고운기는 <삼국유사> 140편을 여러 갈래로 쪼개어 책을 내고 있다. 그의 눈으로 본 삼국유사는 140편보다 훨씬 방대하다. 작가는 최근 <신화 리더쉽을 말하다>를 펴냈다. 삼국유사를 텍스트로 한 네 번째 책이다. 그의 삼국유사 시리즈를 지켜보면서 나도 불교경전을 통해서 그런 뭔가를 한 번 만들어 보아야겠다. 불교경전을 바탕으로 한 그런 작업들을 많은 사람들이 해왔기에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 어던 부분을 좀더 연구하여 쓰야할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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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9.11 06:51:35 *.85.249.182

사부님! 제가 과제물을 다 마무리 하지 못햇습니다.

오늘 밤 12시까지 과제물 마무리 하겠습니다.

한 번 만 저의 청을 허락해주소서.

오전에 전화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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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글/ 양진 사진 세린 2012.09.11 2566
55 삼국유사 레몬 2012.09.11 2707
54 (우리가정말알아야할)삼국유사 -고운기- file [1] [1] 장재용 2012.09.11 5369
53 #19_우리가 알아야할 삼국유사, 고운기 서연 2012.09.11 2034
52 # 19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1] 샐리올리브 2012.09.11 3168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id: 깔리여신 2012.09.11 2996
50 #19. 삼국유사(일연 원저)_고운기_Review 한젤리타 2012.09.10 2211
49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두번읽기) 루미 2011.05.23 2556
48 08.<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_두번째> 고운기 강훈 2011.05.23 2157
47 8.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두 번 읽기 file 미선 2011.05.23 1920
46 [북리뷰 008]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두 번 읽기 file [1] 김경인 2011.05.22 4615
4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3] 루미 2011.05.09 2475
44 6th Review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북리뷰 file 사샤 2011.05.09 2547
43 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미선 2011.05.09 1891
42 [북리뷰 006]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김경인 2011.05.08 4376
41 [리뷰6] 우리가정말알아야할 삼국유사_고운기 file 양경수 2011.05.08 4195
40 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file [2] 미나 2011.05.08 2665
39 06.<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강훈 2011.05.08 2010
38 북No.6 -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유재경 2011.05.07 4467
37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양진 미옥 2010.05.11 2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