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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1일 07시 42분 등록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 저자조사

스토리텔링의 대가 일연스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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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개명에는 놀랍고도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 이름을 희연이라고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 p728

 

 

일연(一然, 1206~1289)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이 책 덕분에 일연은 우리에게 누구보다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 정작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일연은 너무 유명해서 아무도 모른다. 이 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삼국유사]의 지은이로 일연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삼국유사]가 유명하므로 일연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일찌감치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이가 일연이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연은 20세기에 들어 유명해졌다. 아니 이 또한 [삼국유사]가 유명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일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은 [삼국유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일연은 당대에 꽤 잘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된 이였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사회에서 국사의 위치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고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분들의 생애를 그리워했는가. 단순하게 따지자면 당대의 일연은 추기경과 스님을 합쳐 놓은 분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만한 이가 국사에 올랐고, 단일 종교에 국가 종교였던 불교의 당시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사는 두 분을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다. 일연도 그만한 반열에 오른 이였다.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된 일연의 시대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 곧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이다.

그리고 꼭 10년 전인 1196년에는 최충헌이 자신의 무인정권을 세웠었다.

일연의 생애는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신난(辛難)한 세월이었다.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道義)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44세 때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첫 직장치고는 꽤 늦었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를 저술하였다.

일연의 많은 저작 가운데 [삼국유사]와 함께 지금까지 전하는 이 책은 그의 수행과 학문이 벌써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히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가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유하는가 하면,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함께 일본 정벌을 하던 때는 일연의 나이 어언 76세가 되어 있었는데,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개성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주석한 지 5년 만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실로 은퇴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아들 하나 두고, 스물여섯 살에 제 품에서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野史)라 부른다.

 그러나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代案史書)’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서는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불렀을 때 상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유사’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것도 없다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연이 가졌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상은 저자조사요 삼국유사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일연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요, 효자였고, 정사 삼국사기가 있어서 야사로 쓸 수 있는 여지가 있던 책.

이 책이 예전부터 유명한 책이 아니고 20세기 들어 발굴 된 책이라는 점. 삼국유사를 읽는 동안에 삼국사기에서 따왔다 라는 말의 인용구가 종종 등장하는데 삼국사기마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스친다.

삼국사기에 비해 민족의 역사 정체성을 다른 시각에서 확립한 책이라고는 하는데, 아직 나에게는 다가 오지 않는다.

날림으로 읽는 이 짧은 시간에 도저히 일연의 역사관을 알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또한 그의 생애도 단선적인 것이어서 그를 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한번으로 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국사 시험 볼때면 늘 등장 하던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에서 날림으로나마 삼국유사를 읽었다는데 뿌듯함이 있다. 또 하나 나는 삼국사기와 유사를 구분하는 시험을 잘 틀리지 않았었다.

 

 

 

문화유적지로 보는 800주년 일연의 삶

 보각국사 일연스님은 당대의 효자다. 1274년, 일연스님은 왕실사찰인 개경 운해사를 떠나 경북 인흥사로 내려온다. 노모를 모시기 위함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의 은혜는 너무 크고 깊어, 부모를 어깨에 태우고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수미산을 돌아다닌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고 하셨다. 고려장이 성행하던 시기, 일연스님은 몸소 효를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의 귀감이 되고자 했다.

 

“첫머리에 말한다…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싸 중국 고대의 제왕인 복희를 낳았고, 중국 고대 상나라의 시조인 강원은 거인의 발자취를 밝고 기를 낳았다. (중국의 경우가 그러한데)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삼국유사의 처음 시작부분이다. 중국보다 우리의 역사를 후대로 만들려는 유학자들은 중국 역사에서 신화는 인정하면서, 단군의 역사는 부정했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서 이러한 유학자들의 태도를 질타했다.

 

 

 

1277년 일연스님은 운문사에 주석했다. 현재 국내 대표적인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인 경북 청도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창건돼 원광국사가 주석했던 사찰이다. 운문사 산내 암자인 가슬갑사에서 원광국사는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왕건의 건국을 도왔던 보양스님이 운문사 산내 암자인 오갑사를 중창하는 등 운문사는 호국도량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다. 국사(國師)스님이 주석하면서 고려시대 대표적 선찰로 성장한 운문사 절 동쪽에는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일연스님은 원나라의 침탈이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 도덕성 회복이 선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민족이 중국과 대등한 역사를 지닌 민족임을 알고, 고려장과 같은 악습이 잘못된 것임을 널리 일깨우는 작업. 일연스님은 문학을 통해 대중을 일깨우고자 했다.〈삼국유사〉에 신라의 화랑 이야기, 중국의 침략을 막은 스님이나 장수들의 이야기, 향가의 소개, 효행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다수 등장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1282년, 원나라의 침탈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충렬왕이 난을 피해 경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나라의 정신적 지주인 국사의 자리에 있던 일연스님에게 나라의 현실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큰 스승 일연스님은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삼국유사〉를 집필했지만, 결코 정치인,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했다. 스스로 깨우쳐 바른길로 나가도록 이끈 것이다. 지극히 선사다운, 불교의 스승다운 면모다.

 

 

1283년 모친이 사망하자 일연스님은 인각사에 주석했다. 빼어난 주변 경관을 자랑하는 인각사는 신라 선덕왕 11년(64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기린의 뿔을 바위에 얹은 것 같다고 해 ‘인각사(麟角寺)’라 불렀다.

 

 

삼국유사의 본격적인 집필은 이곳에서 스님이 입적할 때 까지 이뤄졌다. 1289년 7월8일 새벽, 일연스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내가 갈 것이다. 사중에 중요한 일이 있는가” 일연스님의 물음에 대중이 “없습니다”고 하자 법고를 치게 했다. 그리고 선문답을 한 뒤 주장자를 높이 쳐들어 내리치곤 거처로 들어가 금강인을 맺고 입적에 들었다. 세납 84세, 법랍 71세 였다. 이후 〈삼국유사〉는 제자들에 의해 제작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일제시대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면, 일연스님은 원나라 침략기에 민족을 위해 법을 펼친 큰 스승이었다. 스님이 주석했던 청도 운문사와 군위 인각사는 지금도 스님의 흔적을 간직한 채 천년이 넘게 중생들의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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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대 건너편에 있는 인각사.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곳이다

 

 

 

군위 인각사에서  일연선사 다례제 봉행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입력 | 2012-08-27

 

일연선사 열반 제 723주기를 기리는 다례제가 지난 25일 오전10시께 삼국유사를 집필한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 현지에서 열렸다.

이날 인각사 주지 도권스님과 은해사 총무국장 도홍스님, 군위불교사암연합회장 돈무스님, 장욱 군위군수, 조승제 군의장, 신도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연선사 다례제를 봉행했다.

다례제는 육법공양과 일연선사 연보소개, 법고공연, 종사영반, 봉행사, 추모사 등의 순으로 1시간 30여 분 동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도권스님은 봉행사를 통해 "일연스님은 단순히 삼국유사의 저자가 아니라 환난과 고난의 현장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지켜낸 선각자"라고 스님을 추모했다. 인각사는 다례제를 시작으로 다음달 8일 군위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에서

'삼국유사 골든벨'을 개최하고, 14일에는 군위 일연공원에서 삼국유사 속 '도화녀와 비형랑'의 설화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하는 삼국유사 문화의 밤 행사를 갖는다.                                                      이만식기자 mslee@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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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09:06:40 *.118.2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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