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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8일 11시 3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의 생애 : 천복을 찾았고 천복을 누린 자!!

 

1904년에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태어날 당시 저자의 집안은 상위 중산층 가정이었으며, 미국에서는 드문 로마카톨릭 가정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캠벨은 어느날 아버지가 데려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보게 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무슨 책일까?) 큰 감명을 받아 맨해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캠벨 인생을 이끈 상징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곧 인디언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공통적으로 신화가 엮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화학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1921년 코네티컷의 캔터베리 스쿨을 졸업한 캠벨은 다트머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한다. 여기서 캠벨은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읽던 아메리칸 인디언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대학과 뭰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나는 왜 하필 산스크리트어인가 궁금해 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로 인도유럽어 연구에 가장 중요한 언어로 언어의 기원의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언어로 간주된다고 한다.) 특히 1924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동안 선상에서 만나게 되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금강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힌두교와 인도신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관심 분야가 넓어지자 기존의 전공이었던 중세 영문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박사과정을 중단한다.(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후 대공황이 닥쳐오자 5년 동안 무직상태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본인은 훗날 기본 독서와 공부는 이 시기에 거의 다했다며 회고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소설가 존 언스트 스타인벡과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새러 로런스 대학에서 문학담당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972년 퇴직할 때까지 새러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 재직한다. 그리고 그 사이 1938년에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하였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 of God>(4)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신화 이미지>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식도암 합병증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19871030,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결혼 그리고 그의 결혼관


그는 제자였던 진 어드먼(무용가·안무가)과 결혼했다. 아내 역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Open Eye Dance studio’를 설립하여 많은 무용수들을 교육하였다.

부부란 영적인 일치를 이루는 관계라고 본 캠벨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 강할수록 고통도 더 크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이다. 정말로 살아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이 사랑이다."

결혼에 대해서도 저자는 신화적 접근을 하였다.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질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혼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자연의 충동을 쫓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아이들이 가정을 졸업하고 나면 부부만 남게 되는 단계가 옵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40~50대에 무수히 갈라서는 것을 볼때마다 놀라고는 한답니다.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는 정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삶을 함께 산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그는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슬하에 자식은 없다. 왜 없었을까? 신화를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자녀 교육이 궁금해서이다.


저자의 종교

캠벨은 가톨릭에서 신화로 개종했다. 신화에서 종교를 대체할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캠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내게는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도 한다. 캠벨은 의미보다 중요한 게 체험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진짜 찾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체험이다." 하지만 캠벨이 종교를 부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종교와 신화를 긍정한다. 종교적 진리의 아랫단계가 바로 신화다. 캠벨은 이렇게 말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다. 신화는 은유적이다. 신화는 시(). 신화란 궁극적인 것 그 다음이라는 말이 있다. 훌륭한 말이다. 궁극적인 것은 말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_옮긴이의 말

 

신화는 힘이 세다. 그로부터 어언 10

 

4. 예수님이 어떻게, 인마, 영웅이냐? 예수님이 어떻게 영웅들 중의 하나로 비교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냐?

나는 이렇게 이분법적인 종교관이 싫다. 비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종교이든 그 무엇이든 자기 틀에 갇혀 발전이 없다. 비판을 자기변화를 위한 건전한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캠벨에게는 예수님도 부처님도 신화적 여정을 성공적으로 끝낸 영웅이었다. 영웅들은 해탈이나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5.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초판_옮긴이의 말

 

희망의 신화학

 

7. 문화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서로 나눌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8.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과 <미녀와 야수>의 속편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얘기할 만큼 그렇게 신화는 우리 곁에 있는 것인가. 궁금하긴 하다. 그가 앞으로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9.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서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 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소중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마치 도()와 깨달음을 얻는 이치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은 것이다.

 

9. ‘인간이 모듬살이를 향하여 베푸는 대규모 의례 행위의 전형이라고 표현한 장엄한 국장은 인간의 소구에 그 뿌리를 든 신화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10. ‘그리스의 신들 따위가 오늘날의 우리 인간 조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나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이 책을 읽으면 답이 있겠지

 

10.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런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10. 재판관이라는 위치가 단순히 직업적 역할만을 상징한다면 그 사람들은 굳이 검은 법복을 입을 필요없이 회색 양복을 입고도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재판관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그렇네, 왜 검은색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0. 캠벨은 종교와 전쟁에서 사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삶의 양태는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11. 결국 테크놀리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1.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시대가 발전하고 현대화 될수록 이러한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해소방법은...

 

11.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2.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2.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래 연구원은 나에게 운명이고 내 뜻이 여기로 인도했다.

 

14.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살면서 항상 경계해야 할 말이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15.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누가 나에게 이것을 보여준다면 나도 종교를 가지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이다.

 

15. 그는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15.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힐 수가 없게 된다.

 

15.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 사상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정말 많은 다양한 신화가 있는데 공통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까? 한번 살펴보자. 수십억 인구도 각각 개개인이 다른데 많은 각국의 신화가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말이 잘 와 닿지 않는다.

 

15.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16.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

 

16.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週期)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이들의 예술(이들이 그린 암벽화)과 구비문학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충동에 모습을 부여하게 된다.

 

16. 사냥에서 곡물의 경작으로 바뀜에 따라.....곡물의 씨앗이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의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16.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

 

17. 예수의 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를 인용하거나, <코란>에 나오는 말, “너희는, 선인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낙원에 들어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18.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18.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8.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나올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하느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온 세상이 다 성소(聖所)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18.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무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을 믿는다.

 

19. “천동설적 세계관에서 지동설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인류를 중심에서부터 벗어나게 한 듯하다.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으로 볼 때 중심은 시점(視點)이 있는 곳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지평선이 보인다. 달에 서면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온전하게 보인다.”

 

19. 그는 인간을 타락하게 한 것,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들과 헤어지게 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지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20. 우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외적인 자연에 관한 지식은 물론 내적인 신비에 관한 지식을 겨냥한, 인류 정신의 가장 위대한 도약에 참여하고 있다.

 

21.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1. 신화와 현대세계

 

25. 왜 하필 신화입니까?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26. 이런 게 없어진 것을 보니(그리스 문학, 라틴 문학 등)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26.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신화가 잃어버린 문학을 대신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가능할까?

 

26.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28.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여든 고령의 석가는 고향 쪽을 향하여 최후의 여행을 떠났다. 나이의 힘겨움에 지친 석가는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음식 때문에 심한 설사로 더욱 힘들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는 "나를 위하여 두 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다오.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 그러나 그는 힘들었지만 '스승의 꽉 진 주먹' 처럼 감추어 진 진리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최후의 순간 까지 법을 설했다. 아름답지 않은가. 우는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마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그답게 마감했다. 석가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 온 수바다라는 고행자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 들였다. 모두에게 명확히 알고 싶은 것이 있는 지 물었다. 세 번이나 물었다. 모두 침묵하자 석가가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대들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라"

무상하다. 그러니 애써라. 이것이 마지막 설법이었다. 존자 가섭이 석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쿠시나가라로 달려 왔다. 애처럽지 않은가! 우리를 울게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불완전한 필멸의 불쌍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경탄하고 순간에 몰입하고 사건마다 살아있음을 체험해야한다.

 

28.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친구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완전하려고 너무 노력하는 인간은 가까기 가기 싫은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데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불완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러면서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점들이 이해할 수가 없기에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29.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29.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일상에서 변화를 찾아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깨달음이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0.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 뿐입니다. 외적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30.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렇구나. 그럼 나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해 읽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질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영적 동질성이 있어야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31.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31.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이거다. 하고 오는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서양사람이. 특히 미국인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에 좀 놀랍다. 저자는 몸소 보여주었다. 그의 아내와 죽을때까지 결혼을 했으니...

 

32. 결혼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자연의 충동을 쫓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아이들이 가정을 졸업하고 나면 부부만 남게 되는 단계가 옵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40~50대에 무수히 갈라서는 것을 볼때마다 놀라고는 한답니다.

 

32.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는 정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삶을 함께 산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나라도 대부분 아이들 때문에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헤어지고 싶어도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일부로 아이를 가지지 않은 것인가? 궁금하네.

 

33.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저자는 결혼에 대해 동양의 도, 즉 음과양으로 설명을 한다. 이 역시 저자가 살고 있는 서양이 아니라 다른 문화, 즉 동양의 문화를 통해 해석하고 있다.

 

33.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4.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35.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서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割禮)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일부는 인정하지만 일부는 저자와 의견이 다르다. 고통을 주는 의례는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의 할례도 이루어진다. 이것은 잊을 수 없는 고통이라 한다. 과연 그 고통이 의례라고 부를수 있는 것인가.

 

35. 아이들이 도시에서 자라나는 겨우, 오늘날 이들은 어디에서 신화의 존재를 만날까?

스스로 만듭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온통 낙서(graffiti)투성이인 것도 그 때문이지요. 이렇게 낙서하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불량배가 있고 나름의 입문의례가 있으며 나름의 도덕률이 있어요. 아이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신화를 체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이들의 법이 도시의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름의 입문 의례를 치르지만, 이들이 입문하는 곳은 우리사회가 아니지요.

다양한 형태의 입문의례가 생기지만 제도권 밖의 의례이면서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뜻이 아닐까.

 

35.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흔히 말하는 미풍양식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37.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38. 나 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전문가는 르네상스시대의 다빈치가 아니다. 극도로 세분화된 분야에 대한 전문가이다. 그 분야외는 잘 모른다.

 

39.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40.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비교신화학에 입문한 계기였던 셈입니다.

 

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41.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41.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의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2.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2. 결혼식도 그런 의례의 하나이겠습니다.

그렇구나. 의례는 이렇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구나. 나는 의례를 할 필요없는 의식으로 생각해왔다. 결혼식, 장례식, 이취임식 이런 것을 쓸데없는 의식으로 봐왔었는데 이렇게 중요할 수도 있겠구나나.

42.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개인인 전시(戰時)에 한 일을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전시에 그 개인은 개인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개인보다 훨씬 상위 개념인 어떤 무리, 바로 그 자신이 섬기기로 한 무리의 대리자로서 행동한 것.

 

42.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원시 미개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 많이 보아오셨을 테지요. 백인의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사회는 분열하고, 타락하고, 병들고 맙니다. 신화가 사라지면서 우리에게도 그런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가 얘기한 것처럼 가장 풍부한 신화를 가진 인디언 조차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나라도 고유한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다 사라지고 서양의 문화가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의 고유한 신화를 간직하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었기 때문일까?

 

43. 보수 종교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어요. 보수 종교는 퇴화한 어떤 형태. 더 이상 삶을 섬기지 못할 어떤 모습을 지향합니다.

 

43. 사울 벨로는, 오늘날 과학이 믿음을 대청소해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가치는, 적어도 저에게는 여전합니다. 저는 바로 이 믿음 덕분에 오늘날의 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붙박이별, 삶의 지평(이게 바로 신화이겠습니다만), 이런 것을 잃은 아이들은 장차 어떻게 될까요?

 

43.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구시대의 종교는 다른 연령층, 다른 족속, 다른 가치 체계, 다른 우주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제는 역사와도 발이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44. 페요테 문화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선인장 꽃에서 딴 마약의 일종인 폐요테를 복용하고 도취경에 빠지는 의식. 북쪽 한계선 지역에 살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19세기에 성행했다. 19세기 말까지 서해안에 상륙한 개척자들에 의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은 많이 죽었고, 살아 남은 자도 대부분 인디언특별보호구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또한 백인문명에대한 동화 정책이 정부의 감독과 통제 아래 시행되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백인과 백인문명에 대한 반감은 고스트 댄스 등 신흥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페요테 문화는 고스트 댄스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으나 고스트 댄스가 백인과 백인문명을 부정하고 도전적인 데 반해, 페요테문화는 비폭력비위협적이었고 백인문화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소극적 수용과 체념이 특징이다.

 

45. 이 페요테가 이들의 동물노릇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디언들은 이 페요테를 사슴과 동일시하더라는 겁니다. 즉 이들은 자기네야말로 페요테를 찾아 이것을 다시 인디언 종족에게로 몰고 오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는 행세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임무야말로 신비 여행처럼 보입니다. 이 임무에는 신비 여행의 전형적인 요소가 모두 골고루 들어 있어요.

 

45. 첫째, 거기에는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가 있어요. 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신비 여행은 영험이 없어지지요.

 

45. 이 여행의 도정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정신적 변용의 단계를 나타내는 특별한 신당이 있어요. 이 신당을 모두 지나고 나면 이윽고 페요테를 모으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페요테를 죽입니다. 사슴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살금살금 다가가 정말 사슴에게 하듯이 조그만 화살을 날리고는, 쓰러진 페요테를 모으는 의례를 연기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과정은 내면여행(외계를 떠난 영적인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 말입니다.)과 관련된 체험의 복사판입니다.

 

46. 페요테에게는 생물학적, 기계적, 화학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적으로 변모시키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영적인 체험은 LSD를 통해 환각 상태에서 하는 체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말하자면 신비여행이 최악의 여행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마약을 하지만 정신상태에 따라 마약이 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고 영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

 

46.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모든 것이 머리에서 나온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머리도 하나의 기관에 불과함

 

47.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7. 나는 뉴욕의 51번가와 5번가를 지나 성 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이때부터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나에게 말을 겁니다. 십자가의 신비....... 바로 이겁니다. 채색유리는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내 의식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고대(高臺)에 섭니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8.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52. 새 시대에는 기계가 주인 노릇을 할 것입니다만, 신화와 관련해서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이제부터 비행기가 그 역할을 맡는 겁니다.

 

54.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온 권능에 복종하지 않아요. 다스릴 따름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거지요.

 

54.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을 읽는 것과 같지,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54.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크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56. 비의(秘儀)의 메타포가 아버지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고, 이 세계의 지혜와 비의의 메타포가 어머니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을 경우, 각각에 맞는 다른 명령 신호를 입력시키지 않으면 접근이 안 됩니다.……예수는, “누구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고 했어요. 이때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길을 따르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의 길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이르려 한다고 칩시다. 그러자면 인도의 칼리 여신 등을 통해서, 여신을 찬송함으로써 이르는 편이 나을테지요.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각 종교마다 경지에 이르는 법이 다르듯이

 

57.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種族神)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뿐입니다.

옛것에 너무 집착하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58.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로 인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그 종교들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을 절대 가르치지는 않을텐데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 건지 모를 일이다.

 

58. 토인들은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쳐닫고 집안에만 틀혀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 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 선교사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59.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헌데 밀어붙이기를 했는데 가능성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는 해봐야 된다는 것인가?

 

59.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59.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고 자기 본성도 파괴합니다. 노래를 죽이니까요.....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랍니다.

 

60.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브는 같아요. 옛날부터 그래왔어요.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 속에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混淆)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구속적인 범주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이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으로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기독교를 바라볼 때 관점이다. 성경에는 상호 간 모순되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인데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거구나.

 

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 그러나 개중에는 어떤 특수한 사회만 섬기는 신화와 신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의 수호신화, 혹은 수호신 같은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62.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62.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企圖)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62.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62. 자연의 충동은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복종해야 할 대상, 가꾸어야 할 대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63. 겉을 보면 그렇지 않지만 일단 빌딩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일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겉을 보면 뉴욕과 다름없는 게 바로 일본이지요.

 

63. 온통 도시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즉 영혼이 있고 내적인 자기 자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선생님 말씀대로 여전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63.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채 살고 있지요.

 

63.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베이루트의 3개 종교간의 전쟁)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지금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 마찬가지이다. 자기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도 이들에게도 신화는 필요하고, 의례도 필요하다.

 

64.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의 신화학이 미래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64. 우리에게는 어떤 신화가 필요할는지요?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미합중국이 좋은 예입니다. 애초에 미합중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열세 개의 조그만 식민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은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합니다.

미합중국이 만들어질때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미합중국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것도 인디언의 신화나 기독교적 종교의 약화가 원인이 되는 것인가.

 

64. 피라미드에는 네 개의 측면이 있습니다. 네 개의 측면은 네 개의 꼭지점을 구성합니다. 이 꼭지점에는 누가 있고, 저 꼭지점에는 또 누가 있고, 다른 꼭지점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는 너와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네 개의 꼭지점은 하나가 되어 만나고, 이 만나는 자리에는 활짝 열린 하느님의 눈이 있습니다.

 

64. 미합중국은 이 세계에서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가입니다. 18세기의 이신론자(理神論者), 점잖은 신사분들이었지요.

이신론자 :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합리적 종교관. 신의 존재와 진리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는 이론

 

65.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는 구절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이것을 제정한 양반들은 에덴의 낙원 이래의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65.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65.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념을 거부하고 들면 인간은 그 바탕을 떠나지 않습니다.

 

66. 13이라는 숫자는 변용과 재생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최후의 만찬자리에는 열두 사도와 곧 죽어서 재생하게 될 그리스도가 있었지요. 13은 구속의 장()에서 초월의 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12궁도역시 12궁과 태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던가요. 13이라는 숫자가 부활과 재생과 새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서, 이걸 여러 모로 아주 적절하게 사용했습니다.

 

67. 피라미드의 뒤를 보면 사막이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는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사막은 전쟁, 전쟁, 또 전쟁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상태의 유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유럽에서 떼어내어, 권력의 이름이 아닌 이성의 이름으로 한 나라를 세운다. 유럽에서 떠나 있는 만큼 이 나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꽃필 것이다. 이 지폐에 피라미드를 그린 것은 대충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국장을 만드는 것은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나라 국장은 여권에 있는 무궁화 5개의 잎으로 둘러싸여 있는 태극문양이다.

 

70. 이 에너지가 시간의 장으로 들어가면서 한 켤레의 대극(對極)으로 나뉩니다. 즉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지요. 둘이 있을 경우, 이것이 상호 관계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가 됩니다. 첫째는 이것이 저것을 지배하는 방법, 저것이 이것을 지배하는 방법, 셋째는 조화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셋에서 우주의 네 구석에 있는 만물의 상호 관계가 생깁니다.

 

70.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를 떠나 있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기만 하면 곧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71. 워싱턴은 독립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유럽의 혼돈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즉 외국과 손잡는 짓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1차 세계대전까지는 이 약속을 지킨 셈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우리는 독립선언서를 포기하고 지구를 정복하려는 영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측면으로 떨어진 것입니다.....우리는 더 이상 정점에 있는 눈의 원리를 상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에 쏠려 있지, 더 이상 이성의 소리에는 쏠리지 않습니다.

 

71.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72. 그런 상징의 대부분은 프리메이슨의 상징 아닙니까?

프리메이슨 : 18세기초 영국에 창설되고, 이후 세계에 퍼진 박애주의 단체로 단순히 메이슨(Mason)이라고도 한다. 비밀결사는 아니지만 입사식이 비공개이기 때문에 외부자에게는 전모가 파악되기 어렵다. 한편 세계시민적 박애, 자유, 평등의 실현을 지향하고, 정치적 전체주의, 배타주의, 광신을 물리쳤다. 회원은 서로 <형제>라고 부르며, 입사식에서도 성서에 서약하듯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대립하지 않지만, 신을 <전세계의 지고의 건축사>라고 하듯이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을 가진다

 

72.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원초적인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연례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가의 수위가 줄어들고 나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무덤은 재생한 세계를 상징합니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어로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라 하고 그림문자인 히에로글리프로는 으로 표현된다.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는지 대해 여러설-파라오의 무덤, 보물, 보관창고, 곡물, 창고, 천체 관측소 등이 있지만 파라오의 무덤일 것이라는 것이 아직은 유력설이다.

피라미드에 있는 또 하나의 유적으로 쿠푸왕의 배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45년 피라미드 근처의 모래 속에서 5척의 태양선이 발견되었는데, 이 배는 죽은자가 재생, 부활하여 영생을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나일강을 건너야 했다고 한다.

 

73.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수는 없어요. ......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4.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75.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76. 신화에는 네 번재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76.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서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76.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人神)만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76. 신을 죽이지 않고는 나무도 자를 수 없고 땅을 갈 수도 없고 강을 부동산으로 만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77. 어쨌든 하느님은 자연에서 분리되었고, 자연은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77.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78.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80. 만일에 우리가 이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80.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81.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81. 우리가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3. “자네 왜 신화라는 것에 그렇게 홀딱 빠졌는가? 조셉 캠벨이 하는 말에 도대체 무엇이 있나?”.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단 말이야.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

 

83.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시설을 거치고 성적으로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리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읽어가고, 그러고는 죽는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85.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름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85.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불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게 좋지요.

 

85. 세상을 보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견해가 중세에 있었지요?

신화가 바로 이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신화는 우리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알려주니까요.

 

85.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87.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수 있게 됩니다.

 

87.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내면에 송두리째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요.……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어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90. 마음에서 솟아오르지 어디에서 솟아오르겠어요? 나는 마음말고는 꿈의 원천이 될 만한 것을 알지 못해요.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신화의 기본구조를 이룹니다.

 

96.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더구나 뱀은 주로 먹는 것과 관계되는 삶의 아주 원초적인 기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잡아먹은 것인가? 갑자기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97.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인간과 뱀의 관계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지요.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 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對極)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97.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기독교의 상당한 반발을 가져올 문장이다. 문득 캠벨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얘기가 듣고 싶다.

 

98.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에덴 동산이 그렇게 좋아보이던데 오늘부터 완전 새롭게 다가온다. 삶이 없는 에덴 동산. 가야할 이유가 없다.

 

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0. 이 사과가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남성과 여성은 대국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 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여성의 대극, 신인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101.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107.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을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114.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115.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선악과 같은것인데 웬지 먹고싶지는 않다. 그들이 정한 죄악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나는 내가 아니므로

 

115. 기독교의 신은 다른 민족의 전승에 등장하는 선악이 두루뭉수리하게 어우러진 신과는 전혀 다르지요.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서적 전승은 모두 이른바 자연 종교의 타락이라는 문맥에서 논의되고는 합니다. 자연종교가 사회적 종교로 변질하면 자연과의 관계를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116.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쫓는겁니다.

나는 메타포, 즉 은유의 중요성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모든 고전은 메타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다.

 

117.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118.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120.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야 많은 작가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나도 칼럼을 쓸 때 매번 매문장마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123.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4.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메세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125. 종교는 신비 체험을 이야기하는 대신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를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지요.

 

125. 카톨릭 의례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찬식입니다.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나도 가짜 카톨릭 신자여서 이 성찬식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의미였다니. 왜 교육을 할 때 이런 부분은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거지. 이러한 것이 의례이구나. 깨달음이다.

 

135.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2.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142. 가령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변화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다른 단계로 들어가는 단계이므로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143.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에요. …… 신화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청년의 시대를 그리고 있는 같아서지요.

 

145. 매장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라는 관념은 보이지 않는 사회(즉 저승)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임을 통하여 살아갑니다. ……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146.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 이 양자는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147.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는 서로 숭배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도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거소가 유사합니다.

 

147.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48.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신화가 그 죄의식을 닦아줍니다. 그 짐승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었거든요. 자연의 일을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161.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162.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삶 속에는 이런게 없습니다. 마흔 다섯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분고분한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정신분석의를 찾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우리 사회에서 이제 입문 의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 신화는 사회적 의례, 종족적 의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신화가 없어지니까 이런 의례도 없어지게 된 것이군요.

 

165.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한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16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수 있는 사람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68.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증 적 해리 현상이라고 할수 있지요. 그래서 샤먼의 무의식은 늘 열려 있습니다. 샤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무의식에 빠져 들수 있지요.

 

173. 나는 그의 발언이 신화와 상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열쇠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블랙엘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174. 이것은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이다. 그는 국지적인 숭배상인 하이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세계의 축)’를 말합니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정,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말고 신화체험인 것입니다.

 

175.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179.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하던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183.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수 있어야 합니다.

 

186.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188.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89.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에서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심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은 안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결국 접신하기 위한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결국 내가 신화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캠벨 책은 다 읽어야 하고 그가 읽었던 토마스 만의 소설이니 이런 것은 다 읽어야 하는 것이네.

 

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해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 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은 다음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5.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206. 희생에 대한 옛 관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요.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 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그럴듯하게 포장은 되어있는데 정말 그럴까? 사람 목숨이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누가 피터지게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겠나. 경기는 진짜 재미없게 흘러갈수도 있는데...

 

206. 선생님께서는 정말 목숨을 버리는 자가 새 삶을 얻는다고 믿습니까? 믿어요. 무엇인가를 위하여 버린다면 말입니다.

 

209.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이다.

 

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213.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없이 미래를 맞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 상실, 죽음, 탄생 ……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3.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15.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217.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열정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21.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4월 책을 다시 한번 더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하는 것이 천복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본 부분이다.

 

223.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225.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다. 연구원에 대해 아무 반응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행복하다. 그것만으로 된거지

 

226.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할 내용이다.

 

5. 영웅의 모험

 

229. 육체적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230.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 낼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234. 의식은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도 시련이나 계시를 받은건 아닐까? 잘가고 있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자체가 변모이다. 고로 나는 우리 가족에 있어서 영웅이다.

 

235.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241.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 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전이지요.

그렇다. 부양 즉, 경제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을텐데. 하지만 이건 누구도 해결할수 없는 문제이다. 오로지 스스로가 해결할 수 밖에 없다.

 

244.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54.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게. 자네같이 꽃 같은 아가씨는 몰라도 되는 것이니까.”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내 나이는 꽤 된거 같은데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이 책은 너무 어렵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번은 그냥 이렇게 가고 다시 한번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255.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63.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265. 다스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자기 뜻에 따라 사는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똑같지는 않지만 나도 수천번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

 

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이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277.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내가 캠벨처럼 지식이 없어 뭐라 딱히 반박은 안하겠지만 서양이나 동양이나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그냥 단순하게 서구 우월주의로 비친다.

 

278.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86.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96.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301. 나는 보통사람이라는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사람, 보통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보통사람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굴레이면서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수준이다. 사회적 범주로 나를 규정짓지 말자. 우리 아이들 마찬가지. 특별한 아이들이다.

 

303.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수 있게 됩니다.

 

6. 조화여신의 은혜

 

 

307. 아버지 탐색의 이미지는 굉장히 강력한 것 같은데요. 왜 어머니 탐색은 없습니까? 어머니는 여기에 있으니까요.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08.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문화,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315. 교황이 되어본 남성은 많아도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어본 남성은 없잖아요. 서로 맡는 역할이 따로 있는겁니다.

궤변같아 보인다. 과거에는 그럴수 있다. 이제는 아닌 것 같다.

 

316. 성서에서 볼수 있는 극단적인 예로서,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322.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직 마음으로는 와 닿지 않는다.

 

330. 남성원리와 여성 원리의 통합과 관계가 있는 이 수많은 이미지는 결국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원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이 신화 이미지를 주도해왔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남성적이고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다가,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창조와 재창조에서 여성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 아모르적 사랑른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상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이런 사랑은 교회가 주장해 온 사랑과는 극과 극이지요. 이것은 개성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나는 서구를 위대하게 한 것, 다른 전통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경험이었을거라고 생각하곤 한답니다.

 

343.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344.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타인을 향하여 열려야 할 우리의 기관이죠. 가슴을 열고 남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게 바로 짐승들과는 다른 인간의 특질 아닙니까?

 

347. 결국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트리스탄은 이렇게 말하지요.“죽음이라니 ……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 ……. 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도 이 역시 나는 받겠소.”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50.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1. 중세기사가 섬기던 다섯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예의 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겁니다. 사랑은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덕과 동행해야 하는다는 뜻이군요? 어떤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다섯 기능 중 하나의 기능이 전체적인 질서를 섬기지 못하고 한 사회를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352.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여성의 손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 사랑놀음의 주도권을 쥐고 규칙을 만들고 허무는 권리가 여성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353.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 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겁니다.

 

354. 오히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을 정제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355.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56.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357.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참 삶인 겁니다.

 

364.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놀음이 아니에요.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은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8. 영원의 가면

 

376.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신들을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 드러남이지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380.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은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381.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4.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384. “믿사오니, 저의 믿음 없음을 깨우치소서”. 바로 이겁니다. 저는 이 궁극적인 실재를 믿습니다. 저는 궁극적 실재를 체험할 수도 있고 실제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있는가”, 이게 제가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의문입니다.

 

387.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393.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394.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395. 중심 에너지가 이 풀과 같습니다. 성배 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5. 비교신화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사실 나는 약간 두려워했어요. 학생들의 종교적 신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던거지요.

사실이다. 나 같은 경우도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지만 성당에 나가질 못하고 있다. 나가지 않아야 되는 이유만 잔뜩 더 생긴 것 같다.

 

396. 비교종교학은 신앙 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네 종교의 이미지가 지닌 전혀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고, 다른 문화권 이미지에서, 자기네 이미지 이상의 내적영적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부는 느꼈으리라.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396.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히하게 할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397.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어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397. 신화와 우리 유태-기독교의 차이는, 전자의 이미저리는 약간 유머스러하다면 후자의 이미저리는 지나치게 삼엄한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화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 종교를 보세요. 모든 것이 살풍경하고 심각해요. 가령 야훼를 두고 농담을 할 수 있던가요?

 

399. 그러나 내가 절정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은 어떤 절정 경험에서든 마찬가지이지요.

 

399.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400. 미학적 체험은 윤리나 도학을 초월해 있는 것이니까요.

 

401. 우리가 괴물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에피파니를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401.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장엄함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장엄한가 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생명의 형상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힘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02. 괴물도 신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 이런 경험은 윤리적미학적 판단을 초월합니다. 윤리는 흔적도 벗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402.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보면, 명상하는 부처는 두 측면을 보이면서 나타납니다. 즉 평화로운 측면과 분노로 치를 떠는 측면이 그것입니다. 수도하는 자가 자기의 자아와, 고통과 기쁨이 함께 하는 속세의 일, 그 달콤함 삶에 연연할 경우 신이 나타나되 분노로 치를 떠는 측면을 보이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아를 잊고 자신을 포기하면 다 같은 부처라도 이번에는 천복을 주는 부처로 나타납니다.

 

403.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세속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404.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이다.

우리의 본질은 어디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있다.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정진해야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은 금물.

 

405. 흔히들 천국과 지옥은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406. 이 시간의 째깍거림이 영원에 대한 앎을 가로막지요. 우리는 시간에 갇힌 존재랍니다. 그러나 시바 신의 다른 한 손에는 시간의 너울을 태우고 우리 마음을 영원으로 열어주는 불꽃이 있습니다.

 

407. 시바 신은 여러 모습으로 현현합니다만, 대개의 경우 존재의 무서운 측면을 상징하는 굉장히 무서운 신으로 현현합니다. 그는 삶의 환상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버린 원형적인 요가 행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창조주, 삶을 생성시킨 신인 동시에 피조물을 상대로 삶을 가르친 신이기도 합니다.

 

407. 신화는 형이상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종교는 윤리, 선악등을 다룬다. 신화에서 윤리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어떤 역할을 합니까?

윤리는 우리와 타인이 하나인 듯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그러나 종교에서는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종교는 우리에게, 타인과의 자비를 나누는 관계를 비롯하여 우리의 행동 양식을 아주 교리로 찍어내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409. 영생불사라는 말이, 육신으로 영생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지요. 육신으로 영생불사하려는 자는 종종 어릿광대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영생불사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영원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것이지요.

생명의 유한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영생불사의 삶은 한편으로 좋아보이지만 결국은 불행하다. 나만 제외하고 나와 관계되는 것은 항상 없어지니까.

 

411.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체험을 언어로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精髓)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411.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 의식은 알지도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412.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412. 인도 신화의, 인드라의 그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념을 대할 수 있어요. 인드라의 그물은 실과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입니다. 즉 실과 실이 만나는 곳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각 보석에는 다른 보석이 비칩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종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천복이라는 말이 이렇게 다가오는구나. 나이 천복을 위해 사는 삶을 살고싶다. 그래서 천복을 쫓는 일을 하고 있는 이 시간이 좋다.

 

413.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413.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에덴이라구요.

 

413. 그렇게 보일뿐입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414. 어떻게 하면 메타포를 섬기고, 메타포를 사랑하고, 메타포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414. 메타포를 위해 죽는 것, 이것은 사람이 늘 하고 있는 짓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에 (AUM)’ 이라는게 있습니다. 이 소리의 의미를 깨달으면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 소리를 정관하고, 경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정경험일 테니까요.

 

414. ‘,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험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415. ……. 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은 사대(四大)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셋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끝나고, 또 한 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관한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물론,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밖에는 할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우리나라로 치면 EBS와 비슷한 교육방송에서 대담형식으로 진행된 교육용 프로그램이었고, 사후에 다시 책으로 출간되었다. 원 방송을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영어로 듣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이번에는 정말 물리적으로 읽는 시간이 부족했다. 제일 아쉬웠던 점은 책 출간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미 캠벨의 독자라면 그의 저서를 읽었다고 전제하고 시작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 신화를 처음 접하는 나같은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도입부에는 신화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나 저자가 왜 신화를 공부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면 각 장의 도입부나 마지막 부분에 해당 장에 대한 요약본을 정리해주었으면 읽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아직도 각 장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 신화와 현대세계 :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옛날 신화을 읽어야 하고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방대한 분야를 다루었다. 거의 모든 내용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가볍게 시작했으면 좋았을텐데 너무 무거워 도착하기도 전에 진을 다 뺀 느낌

2. 내면으로의 여행 : 신화, 의례 등을 통한 자기의 내면으로 여행이 필요한 이유

3. 태초의 이야기꾼들 : 초기 신화 및 고대 의례

4. 희생과 천복 : 희생의 의미와 천복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5. 영웅의 모험 : 영웅적 변모과정이나 행동을 통한 메세지

6. 조화여신의 은혜 : 여성과 남성의 신화적 생성 및 변화과정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 말 그대로 신화적 의미에서 본 사랑과 결혼

* 어떻게 보면 생략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를 상징하고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넣은 것으로 

  판단됨. 결혼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줌

8. 영원의 가면 : 영원의 진정한 의미

 

8개의 장은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중복이 계속된다. 앞에 내용과 비교해봐야 되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독립된 구성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별도의 장을 구성하여 동양과 서양의 신화의 차이, 공통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면 많은 동양사람들에게도 신화를 새롭게 접근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보완이 필요한 점

 

대화방식은 좋았으나 신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특히 용어는 내가 처음 접하는 부분이 많았다. 쉬운 용어나 아니면 주석이 있었다면 이해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p.28)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원초적인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연례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의 수위가 줄어들고 나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무덤은 재생한 세계를 상징합니다.(p.72)

이외에도 많지만 대표적 사례이다. 이 문장만으로는 나는 이해가 안되었고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고 의미를 찾느라 힘들었다. 저자가 만약 이 부분을 메타포이므로 알아서 해석해야 한다라고 답한다면 어쩔수 없지만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왜 모이어스 같은 유명한 저널리스트인가. 그는 캠벨과 이미 깊은 교류가 있었고 이미 신화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이다. 독자는 모르는데 둘이만 신화를 잘 아는 느낌이 들어 소외감이 들었다. 모이어스보다는 신화에 대해 처음 접하는 누군가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 그리고 이왕이면 청중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추가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화라고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허구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그리스로마신화에 왜 그렇게 열광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앞으로 모든 신화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 같고 그 뒤에 숨겨진 원형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실 구본형 선생님의 떠남과 만남에서도 절과 용의 관계나 김유신과 천관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선생님의 힘에 놀랐는데 이 책에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런 것이 내가 접하고 있는 사물을 다시 바라보기 즉, 재해석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모든 신화는 인류의 정신적 원형과 보편적 꿈을 담은 전승물이며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이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상처와 치유를 볼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바로 4장 희생과 천복이었다. 그중에서도 천복이었다.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p.221)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p.225)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p.226)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27)

천복이란 말은 결국 내게 진실로 진정되게 물어보고 내면에서 답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천복과 관련되어 있다니 너무 기뻤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캠벨은 이 대담을 녹화 후 2년 뒤 식도암 합병증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38년간의 신화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렇다면 그 기간동안 아니면 퇴직 이후에도 그에 대한 비판의 글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대담집에서 짧게 나마 그의 이론이나 저서에 대한 비판자들의 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포함시켰을 것이다. 자기를 비판하는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역비판이 가능하다면 굉장히 재미있는 구성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너무 서구중심의 신화소개로 동양에 대한 신화나 내용이 소수라 아쉬웠다. 동양과 서양의 풍부한 사례와 설명을 통한 객관적 비교를 포함시켰을 것이다.(동양에 비해 서구가 우월하다는 인식도 받은게 사실이다.)

 

또한, 서양 역사에서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한 것은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철학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중세에서 인간이 행사하는 힘은 신의 은총으로부터 왔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신에 의해서 존재한 것이었다. 그런데 데카르트 등 철학자에 의해 우리가 존재하는 근거는 이제 더 이상 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이 생각한다는 이 사실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세계관이 바뀌었다. 그런데 신화는 결국 이런 내용과 정반대 되는 내용이다.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철학에 의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이성에 의해 사라진 신화와 의례로 인해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다고 얘기한다. 이 책을 통해 신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성된 건 사실이지만 철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와의 차이와 우리가 이 두가지 부분에 대해 어떤 사고를 가져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 부분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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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18:18:21 *.18.218.234

오~ 결혼관을 따로 쓰셨네요. 저도 캠벨이 결혼에 대한 언급을 유난히 많이 한다 생각했어요.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아이는 애초에 갖지 않기로 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인류에 기여하기로 했대요 ㅎㅎ 학생들을 자녀로 여기며.


하와이도 진 애드먼의 친정이었더만요.

동생들은 팽개친 듯.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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