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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1시 16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2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일연 (1206 ~1289)

고려의 승려 일연은 1206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12149세에 출가하였고 무량사에서 공부하였다. 1277년에 운문사 주지가 되었고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첫 집필을 시작하였다. 128984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일연이 생존했던 13세기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해지고 많은 사료(역사연구에 필요한 문헌)들이 불에 타 민족역사와 문화의 자부심이 무너져 갈 때였다.

 

고운기 (1961~ )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생이며,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하였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1999~20028),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2004),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20074~20083)를 거쳐 2015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 길 위의 삼국유사등이 있고, 역서로 논어(시모무라 고진), 그늘에 대하여(다니자키 준이치로),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노무라 신이치)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이 있다.

 

고운기는 '삼국유사 스토리텔링'을 시리즈 형식으로 책으로 썼다. 삼국유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 시리즈 첫 권은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이라고 한다.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은 삼국유사를 두고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숨은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양진 (1966~ , 사진)

대전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연영회사진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사진을 시작했고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1991년부터 삼국유사 이야기에 나오는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진에 담긴 그곳, 거기 묻어둔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삼국유사 사진을 엮은 개인전을 열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들어가며

이 책은 그럴 만한 구석이 넉넉하지만, 때로 호들갑스럽게 치켜세워지기도 했고, 그런 한편 짝처럼 거론되는 [삼국사기]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2)

[삼국사기]이고 [삼국유사]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틀리는 문제였다. (3)

이렇게 다르다는 걸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에서 얼마 전에 들어서 알았다.

[삼국유사][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와 사()에 있다는 점. (3)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3)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년의 일이다. (4)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4)

그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왜일까?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왕력][기이]편의 여러 기사들은 [삼국사기]와 대조해가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 보완될 뿐만 아니라 두 책의 사이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우리는 즐겁게 상상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6)

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04, 도쿄대학의 배인본 [삼국유사]가 바로 그것이다. (8)

한국에서는 1915, 조선연구회가 원문과 일본어 번역을 부친 [삼국유사]를 내놓았으며 이의 저본은 도쿄대학세서 낸 것이었다. (9)

여기 기술된 내용들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거나, 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가미한 부분들이 있다. (10)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11)

하고 싶은 아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12)

그래서 단군도 신화로 쓰여졌던 건가.

 

세 부분으로 된 고조선

첫 번째 부분은 [위서]라는 책에서 인용했다고 하면서, (14)

두 번째 부분은 [고기]에서 인용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신화의 몸통은 여기서 나온다. (15)

너무도 잘 알려진 곰과 호랑이 이야기 대목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곰으로 상징되고, 어디서든 곰 비슷한 것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16)

그런가. 오히려 호랑이에 대해 그렇게 여기지 않나. 무서운 존재이면서 지켜주는 존재로.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17)

처음의 단군 왕검이 1,500년 동안을 살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단군이라 부르는 후손들이 그런 기간을 이어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19)

거기에 기준하면 단군 1년은 요 임금 25년인 무진년(기원전 2333)이다....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19)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대게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21)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1)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일연의 단군에 대한 관심은 신화로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22)

[삼국사기]를 편찬한 다음 모든 자료를 없애 버렸다는 김부식의 행동 저 편에는 이 같은 의식이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22)

중국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그 이전의 일들은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23)

진짜 김부식이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것일까. 삼국사기를 보고 싶어진다.

13세기의 시대적 분위기

천자의 나라를 넘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었고, 무인 정권이 내세웠던 새로운 질서라는 대의명분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 (25)

이승휴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뿐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25)

 

위만조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29)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29)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 할 이유

위만조선이 세워진 것은 한나라 초기 곧 기원전 195년경이다. (29)

한나라 사신 섭하가 위만조선의 왕 우거를 설득하였으나 끝내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았다.”(30)

이렇듯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위만조선까지 조선의 시대는 강력한 한나라의 침공 앞에서 막을 내린다. (33)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인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34)

 

고구려와 북방계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36)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6)

 

북방계의 시작, 부여

먼저 북방계의 흐름이다. 이 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37)

역시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용한 [고기]가 다시 [전한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7)

 

동명왕 기사, 사기와 유사의 차이점

일연은 유화가 금와에게 말하는 장면에 각주를 달아 [단군기]를 인용하여,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고까지 쓰고 있다. (41)

지금 우리로서는 [단군기]가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기록을 받아들여 주몽과 부루가 굳이 형제라고 말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형제 아닌가? (41)

글쎄. 알 수 없다. 그저 책에 기술된 대로 형제이긴 하나, 같은 어머니, 아버지는 아니다 라고만 여겼다.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43)

저자가 삼국유사 전문가라고 해서 뭔가 색다르거나 근거가 뚜렷한 이유를 말할 줄 알았다. 아들이 초등학교 역사에 관심을 가져서 책을 보다 난생 신화를 보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게 뭐야. 완전 뻥그리곤 역사라고 여기지 않더라.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44)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일연은 백제의 출발을 변한과의 관련성을 따져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최치원이 변한은 백제다고 한 데서 촉발된 듯하다. (45)

다만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으므로 변한이라 한다는 것이다. (46)

[삼국사기]는 이 이야기를 [고구려본기]유리왕조에 실었지만, 일연은 어디에서도 유리왕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48)

저자는 끊임없이 삼국사기와 다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리왕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으나 왜 그랬는지 설명이 없다. 저자의 추측이라도 넣었으면 좋겠다.

결국 유리왕이 즉위하던 해, 두 사람은 고구려를 떠나야 했다. (49)

북방계 이동의 끝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 집단이다. (52)

 

신라와 남방계

남방 문화 속의 신라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건국에 관한 일연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53)

일연이 진한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지만 기실 이 부분은 진한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 진한 지역 내에 있던 중국 유민들의 이야기다. 일연은 최치원의 말을 인용해 그 중국 사람들이 본디 연나라에서 피난 왔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보충하였다. (54)

 

신라 여섯 부족은 또 다른 오리지널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54)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56)

이거야 말로 일연의 작위적인 의도이다. 신라라는 나라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박혁거세가 열세 살 때인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모두 같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59)

 

혁거세 탄생, 또 하나의 이야기

일연은 비구니를 도왔다는 신모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62)

신모는 이 산에서 오래 머물며 나라를 지키고 도왔거니와 신령스런 이적이 무척 많았다는데, 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세운 혁거세와 그 부인도 낳았다고 한다. (63)

[삼국유사]는 끊임없이 현실적인 역사서라기보다 설화, 신화, 신비로운 존재를 거론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 없애지 않고 남겨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선도산 신모에서 나타나는 신라 왕실의 성격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 신화라 한다. (66)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68)

게다가 선도산 신모는 불사를 도운 일로 자연스럽게 불교와 습합되고 있다. (68)

일연이 스님이었기에 여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책을 쓴 것이 아닐까.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시골 출신의 벼락출세

탈해가 처음 신라 땅에 도착한 것은 혁거세왕 39년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탈해니사금조 원년에 나오는 기록이다. (70)

 

치아 많은 이가 된 왕 자리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다는 논리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73)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74)

 

탈해의 등장

[삼국사기]가 갓난아이로 묘사한 데 비해 여기는 직접 말을 할 수 있는 만큼의 아이인 점이 다르다. 물론 탈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는 비슷하다. (76)

 

탈해왕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탈해가 처음 신라로 들어올 때 가락국을 거쳤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구석이 조금 있지만, 모든 기록에 공통된다. (79)

사실 [가락국기]는 고려조에 들어 금관주 곧 지금의 김해 지방에 사는 문인이 가락국의 옛일을 적어 둔 것이다. 일연은 그것을 [삼국유사]에 옮겨 놓았을 뿐인데, 그러다 보니 수로를 추켜세우려 수로의 입장에서 전해져 온 이야기가 조금 과장되게 발전했을 수 있다. 탈해를 한껏 낮추려 키까지 줄여가면서 말이다. (81)

 

탈해왕의 고민

탈해는 여섯 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 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82)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83)

탈해왕 17년에 일본군이 목출도에 쳐들어왔을 때,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우오마저 거기서 죽는다. 일본 외교의 실패다. (83)

탈해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김알지의 출현이었다. (83)

알지는 이 지방말로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 황금 궤짝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씨로 하였다.“ (86)

무엇보다도 마치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삼국사기]에서는 없는 말이다. (86)

자꾸 비교하고 추론만을 하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히미코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는 몹쓸 병마저 얻어 만년을 쓸쓸히 지내고 있지만, 링에서 김일 선수를 괴롭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가 되어 그 인기를 느긋하게 끌어 나가고 있다. (89)

 

고대 일본의 여왕 히미코

히미코라는 이름을 [삼국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신라본기]아달라왕20(서기 173), “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한자가 조금 다를 뿐 바로 히미코다. (90)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다. (91)

일본에서 한창 논쟁중인 히미코의 야마일국이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중서부 곧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방군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점은 공감을 얻고 있다. (91)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열성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92)

이 부분은 앞부분과 다르게 현재 있는 일과 연결시켰다. 전혀 다른 전개지만 더 좋다.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아달라왕 때의 일이다.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것은 바로 이 왕 때,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는 아달라왕 4년에서 16년 뒤다.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만하다. (94)

사료가 미비한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 같다. (95)

역사서는 당대에 쓰여지기보다 후대에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승리자의 역사가 된다. 그나마 신라의 기록은 남아있으나 백제나 타국 땅에 더 많이 지역을 가진 고구려의 여사는 많지 않다. 그것도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의 역사다.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96)

~ 그래서 삼국유사에 전설, 설화가 많았구나.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 또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영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96)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유독 토착 신앙에 강했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한다. (100)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101)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한국어

최근 세계 언어학계에서는 한국어를, 어족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말로 제쳐 둔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103)

그렇게 비슷하게 들리는 두 나라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상도 방언과 일본어는 더 닮았다. (106)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가지기 전에 그들은 스스로 왜라고 불렀다. 그 왜나라의 처음 신라 침공은 [삼국사기]만 가지고 따져도 벌써 혁거세왕 8(기원전 5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6)

 

일본에 간 신라 왕자 천일창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 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 쪽 역사서는 이들을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107)

우리 쪽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 쪽에서 천일창이라는 신라 왕자를 소개하고 있다. (107)

 

박제상 사건으로 터진 감정의 폭발

더욱이 고대 왕권 국가를 구축해낸 왜가 백제와 교린 관계를 맺게 되자 신라는 협공의 위기에 빠졌다. (109)

요컨대 실성왕이 정권을 얻고 지키기 위해 고구려, 왜와 맺는 우호조약의 볼모로 사촌 동생들을 보내는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110)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가서 율포 해변가에 이르렀다. 부인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었다. 부인이 부르는 소리 간절하건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머물지 않았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113)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야속할까. 요즘 시대엔 이런 사람을 융통성 없는 사람 취급한다.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115)

 

일본에 대한 적개심

두 차례의 정벌 사업이 끝난 다음,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 일이다. [삼국유사]는 이 무렵을 전후로 쓰여졌다. (119)

그 당시 70세면 정말 나이가 많은 것일 텐데... 나이가 들어 쓰는 것이라 세세한 사실에 주목하기 보다 큰 그림을 그리려고 했을까.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에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119)

앞에서도 그랬지만 저자는 [삼국유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일연에 대한 애정까지 포함된다. 저자의 이런 태도가 호불호가 있겠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 설화의 전통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120)

역시나~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120)

도화녀와 비형랑조는 전형적인 야래자 유형의 설화다. 아니 그 원조다. (121)

 

복사꽃처럼 어여뿐 여자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 (121)

그 당시에도 나라 사람들이 임금을 탄핵할 수 있었구나.

사량부는 신라의 여섯 부족 가운데 원래 고허촌이었고, 이는 정씨의 시조가 된다. (125)

정씨의 시조가 신라의 여섯 부족 중 하나였다.

죽음이라도 흔연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인데,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지닌 여자도 아름답지만, 한마디 농담으로 계면쩍은 분위기를 수습한 왕이 그대로 여자를 보내 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125)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는 것인데, 다섯 빛깔이 오방을 상징한다면 천하가 감싸준다는 것이고, 향기는 귀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징조다. (126)

 

사람을 돕는 귀신

따지고 보면 진평왕과 비형은 사촌 형제간이다. ... 이 불행한 천명의 사나이는 반은 사람이니 낮에는 사람처럼 살고, 반은 귀신이니 밤에는 귀신처럼 살았다. (130)

비형이 왕의 명령을 받아 하룻밤에 지은 다리가 귀교라고 한다. (131)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133)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134)

[삼국유사]가 그래서 역사 사를 쓰지 않고 일 사자를 쓰는 건가 보다.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밤손님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135)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135)

견훤의 경우 남자의 정체가 큰 지렁이인 반면 미와야마의 경우 뱀인 점이 다르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의 구조는 이처럼 꼭 같다. (137)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다

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는 가장 뒤쳐졌다. ... 즉 문명의 고장이라 할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139)

삼국시대 선진 문명을 상징할 불교 관계의 이런 기사에서 우리는 신라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게 된다. 신라는 6세기가 끝나갈 때쯤에야 제대로 된 유학승 한 명을 겨우 보내고 있는 것이다. (140)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 내고

신라의 불교는 공인 이후에도 순조롭게 자리잡아 가지 못한다. (141)

아육왕은 아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44)

 

토착 신앙, 불교 그리고 화랑

일연은 진흥왕 때 만든 화랑의 연원을 설명하였다. 처음은 원화였다. 왕은 타고난 성품이 풍류를 즐기고 신선을 높여, 백성들 집안의 여자 아이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골라 원화로 세웠다. (145)

여자를 미모로 골라서 그랬을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다 암살까지 하게 된다.

왕은 몇 년 후,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의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고 화랑이라 하도록 했다고 하였다. 거기 처음 추대된 국선이 설원랑이다. (145)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147)

기대했던 대로 미시는 국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화랑 제도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 같은 모범을 보인 국선이 있었다는 것은 곧 그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신하로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149)

 

신라의 호국 불교적 성격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150)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 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럽게 호국 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원광이 화랑들을 위해 지어준 세속오계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150)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152)

외교가 중요하다는 사실

백제는 친하자고 말을 걸어와도 껄끄럽고, 고구려는 가끔 쳐들어와도 치명적일 것 없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백제의 침공은 수도 경주의 안위와 직결되지만, 고구려는 변방에서 변죽만 울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157)

지금이야 삼국시대가 다 우리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한 민족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보면 또 다르게 보인다.

신라로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당나라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 이득이었다.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157)

사실 이 점이 계속 신라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와서 삼국을 통일했다는, 그것도 반쪽짜리 통일일 뿐이다 라고 한다. 구한말 또 다시 일본과 중국의 힘을 빌리려 한 것까지 엮어서 비판한다. 현재 대북관계도 중국과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을 구한말과 같은 상황이라고까지 한다. 지리적 요충지라 계속 외부세력과 연관되는 건지 우리가 자주적 국방이 안 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인건지 여하튼 예나 지금이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추억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그 배우의 이름이 문희였던가? 영화의 내용에 상관없이 분명 내게 아름다운 여성의 근원은 거기서 만들어졌다. (159)

통일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일연은 김유신조 또한 자신의 특유한 필법으로 써 내려갔다. 간단한 출신 배경만 남기고 번거로운 이야기는 [삼국사기] 쪽으로 돌리면서, 거기에 없는, 그 자신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히 출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이야기에 거의 전면을 할애했다. 바로 백석이라는 고구려 첩자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161)

김유신을 구해 준 세 군데 호국신은 신라의 민간 신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164)

 

꿈을 사서 얻은 행운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여덟 살이 아래였다. (164)

오줌을 누는 꿈 이야기가 왜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 여기에만 실린 독점물이 아니다. (166)

[고려사]의 내용을 보고 요즘으로 보면 표절한 것 아닐까.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다.

 

민족의 결혼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19(532)의 일이다. (169)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170)

 

진골의 탄생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특히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171)

그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2)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태종 무열왕 2년 왕은 3월에 세자 법민을 태자에 책봉하고, 9월에는 자신의 셋째 딸 지소부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낸다. 유신의 나이 이 때 60세였다. (175)

후처로 들어앉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이제 웬만큼 힘을 얻은 유신이 끝내 처량한 동생의 처지를 참지 못하겠다고 나선 일이라면, 일연의 기록이 맞다. 상당한 시간이란 10년 남짓한 세월이다. (177)

현대판 정략결혼일 수 있다. 정계에 욕심을 낸 오라버니를 위해 희생된 문희였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 법민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작업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해 낸 점등은, 통일을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로 보인다. (178)

법민이 당나라에 들어간 해는 650, 아직 아버지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다. (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여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어 없지 않다. (179)

애초에 당나라를 끌여 들이지 않았다면 전부 뺏길 일도 없었다. 이것 또한 역사학자나 사람마다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천왕사로 지켜낸 땅

명랑은 낭산 남쪽 기슭에 신유림이 있으니, 이 곳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도량을 열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179)

사실 그 이후로도 문무왕은 끝까지 당나라와 살얼음을 밟는 듯한 관계를 계속했다. (181)

권력의 끝 (196)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의 투쟁을 계속한다. (183)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184)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185)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다. 두 이름을 합쳐보면 법정 민명,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 값을 하고 있다. (186)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라 이름하였다.” (186)

감은사와 대왕암을 연결하는 통로로 실험을 했던 방송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실제로 가능하다고 했던 것 같다. 다른 곳보다 대왕암으로 가보고 싶다.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189)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189)

 

만파식적은 어디로 갔을까?

아버님께서 신령스런 피리를 받아 내게 전해 주셨다.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안 천존고에 간직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국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단 말이냐? 이를 어떻게 할꼬?” (191)

이 글로 보면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안 천존고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효소왕 때까지 국선 제도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도 되거니와, 국선이 적군의 포로가 되자 대비상의 도움으로 피리가 날아가 구해왔다는 데서, 어느 결에 만파식적과 불교가 습합되었음을 알게 된다. (194)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195)

 

권력의 끝

토사구팽 그 비정한 원칙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성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196)

죽어서도 100년 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197)

혜공왕이 재임한 16년 동안 다섯 번의 반역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그것으로 왕도 죽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이 태종 무열왕 후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200)

 

김씨 성을 가진 첫 왕

탈해왕 때의 김알지 탄생을 비중 있게 싣는다든지, 미추왕이 즉위하자 그 사이 이어진 세계까지 일일이 적어 둔 것은 왠지 과잉이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어느 후손의 끈질긴 조상 찾기처럼 말이다. (200)

김씨 성의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도 후손의 조상 찾기라는 것으로 보는 것도 처음 알았다.

죽현릉의 주인공이 바로 미추왕임이 드러났다. (201)

 

김유신과 미추왕

김유신은 가야 이주민 출신이지만 왕실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확보했었다. 그런 그가 자손들이 당하는 토사구팽의 억울한 광경을 보면서, 혼령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김씨의 대부 미추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202)

김유신이 미추왕의 죽현릉에 찾아가 한바탕 넋두리를 풀어 놓은 다음, 이런 기이한 일 때문에 마음 약한 혜공왕은 잠시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203)

 

효소왕대의 죽지랑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204)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205)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205)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211)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여기서 유래했구나.

 

임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익선이 도망가 숨어 버리자 큰아들을 잡아다, 추위가 극심한 날,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려 죽였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212)

이미 사회에 흐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2)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왕비를 둘 두었던 왕

고려시대에 들어 편찬된 두 책의 저자가 모두 정실로서 왕비의 격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후궁이 여럿이었을 텐데도 기록한 것은 왕비 한 사람이다. (214)

신문왕과 그의 아들 성덕왕 그리고 손자 경덕왕이다. 3대에 걸쳐 그들은 나란히 첫 왕비를 대궐에서 내보내고 있다. (215)

 

3대에 걸친 출궁 사건

삼모부인이 시주하여 황룡사 종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경덕왕 13, 곧 삼모부인 출궁 당한 11년 뒤의 일이다. 출궁의 설움을 불교에 귀의해 달래고 있었던 것일까? (216)

왕비가 되고 2년 동안 후사가 없다고 출궁 당했다는 거다. 인색하긴 하다.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219)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219)

권력 다툼은 권력이 생기면서 같이 생겨났다. 그 세력은 권력자에 주위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 희생양이 필요하다. 권력욕심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집권하지 못하면 그 딸은 버려진다.

왕의 이혼 위자료는 얼마?

비단 500필도 엄청난 양이려니와, 200결이라면 최소한 지금의 20만 평이고, 1만 석을 세금으로 거둘 권한까지 곁들였으니, 얼른 계산이 되지 않는다. (220)

태자의 어머니이니 이 정도는 주었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순원은 다음 왕인 효성왕의 왕비로도 자신의 딸을 들여보냈다. 그러니까 효성왕은 이모와 결혼한 셈이다. 순원이 처음 왕의 장인이 된 20년 후의 일이다. 다음 왕인 경덕왕의 첫 부인은 순정의 딸이다. (222)

순원을 보니 조선시대 한명회가 생각난다.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223)

저자의 표현을 수로부인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푼수 끼라니...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228)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였다. ...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229)

 

동해 바다 그리고 국도 7호선

속 태우고 있었을 남편은 아랑곳 않고, 용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수로부인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229)

꽃을 사랑하는 여자 수로부인, 그리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던 여자 수로부인,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발을 굴러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용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부인이 자원해 살겠다고도 했을 법하다. (232)

저자가 왜 공주병에 푼수 끼가 있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상 편하게 산 부인이다.

 

첫 성전환증 환자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경덕왕의 재위 무렵은 신라 사회가 전성기인만큼 여러 가지 문제적 사건이 많이 일어나긴 했다. 그래서 경덕왕인지 모른다. (234)

요컨대 역사서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다지 비중 있게 그려지지 않았을 이 왕이 일연에게는 각별히 다가온다. (235)

아들을 바랐던 왕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첫 왕비를 출궁시키고 두 번째 왕비까지 맞았건만, 경덕왕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235)

표훈이 하늘님과 만나는 곳이 토함산이었다. (237)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겠다는 경덕왕의 비원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237)

후대에는 진덕, 선덕여왕이 왕을 했는데 이 당시엔 생각 못할 일이었나 보다. 하긴 후대에 여왕이 된 경우는 신라 말고는 없으니 당연하긴 하다.

 

재앙을 극복하는 길

경덕왕은 재앙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을 여기서 얻는다. 특히 호국 불교적 특징이 미륵 신앙과 긴밀히 만나는 장면이다. (240)

아이는 궁안 절의 탑으로 들어가더니 숨어버렸다. 차와 염주는 미륵보살을 그린 남쪽 벽 앞에 두었다.” (241)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241)

배경 설화인즉, 재를 마친 자리에 바람이 불어와 이 시를 적은 종이가 날아 갔다고 한다. 서쪽 방향이다. 서쪽이라면 당연히 불국토의 세계 곧 서방정토를 뜻할 것이다. (242)

왜 서방정토일까? 아마 불교가 전래된 인도가 서쪽에 있기 때문이가 보다. 향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창시절 그저 고리타분한 고시 정도로만 여겼는데.

 

최후의 시도

5악과 3산의 신들이 어전 뜨락에 자주 나타났다는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5악은 경주를 둘러싼 다섯 개 산이요, 3산은 신라의 대사를 지내는 신령스런 곳이다. (246)

충담사는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 자식에 비유한다. 고대 왕권 국가였기에 나올 법한 비유였으나,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247)

 

여자 같은 남자

어린 왕은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였다.” (249)

지금으로 보면 게이였나보다. 태자가 이랬다면 당연 그냥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양성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불법적으로 수술을 감행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도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 (250)

내가 관심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 몰랐다.

일종의 역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김춘추에게 왕위를 뺏겼던 내물왕계의 후손이다. (251)

 

왕이 되는 자

야심가의 등장

마침 같은 집안의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었다. 경신은 그를 부추겨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상은 얼굴 마담역할이었을 뿐이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경신은 양산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다음 이벌찬 곧 각간으로 승진하면서 상대등이 된다. (253)

 

왕이 되느냐 죽느냐

왕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254)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돌아가셨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고자 궁 안에 맞이하려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255)

먼저 도착해서 왕이 되었다니. 참 이것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꼼꼼하면서도 과감했던 왕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어찌 북천의 물 때문 만이었을까? 명분을 중요시 여기던 시절의 한 삽화일 뿐 왕의 자리에 오르는 자의 치밀한 계산은 늘 그 밑에 깔려 있다. (256)

왕이 한 선의의 거짓말은 국보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거절하되 어떤 다른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지 않도록 섬세히 배려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의 조심스런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257)

당나라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도교에 경도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58)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261)

 

왕이 되는 자의 금도

희강왕은 사촌간인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했고, 민애왕은 신무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모두 6촌간의 가까운 형제들이었다. (262)

짐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소. 장례를 치른 다음 마땅히 큰딸의 남편 응렴이 잇도록 하시오.” (2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7)

경문왕 자신 화랑 출신이다. 앞에서 통일 이후 화랑의 존재가 미미해졌다고 밝혔거니와, 그와 더불어 화랑에 관한 기록조차 많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무렵의 왕들 가운데 화랑 출신이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 희귀한 경우를 본 셈이다. (268)

 

나라가 망하는 징조

달도 차면 기운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270)

찼으니 이지러지는 달에서 우리가 읽는 역사의 유전이 감상적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해도,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끝을 보아도 되지 않았을까? (270)

한 왕조라 하지만 두 집안이 왕을 이어왔으니 당연할 것이다.

 

이른 눈으로 상징한 것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272)

권력다툼 속에 인재는 죽고

왕의 입장에서는, 이제 효용 가치를 넘어 또 다른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장보고를 다른 신하들이 견제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275)

염장은 한 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면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276)

 

빛나는 조연, 처용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한 번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다. 이 구절은 실로 역설적으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이 전해올 것이다. (278)

연구자들은 처용의 정체와 함께 이 이야기를 무속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80)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탐락에 극심하게 빠졌으므로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는 긴 글까지 인용해 놓고 있다. (284)

나라가 망하는 징조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286)

 

지는 해 뜨는 해

마지막 희생자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287)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88)

 

준비되는 새 나라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에서 거타지는 사실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291)

호경은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 불렀으며 자식이 없다가 평나산에서 과부로 지내는 산신을 만나 이 산의 대왕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무당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말하는 무조 신화의 하나로 쓰이는 이야기다. (292)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294)

왕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란다. 할머니가 용의 딸이다. 이건 저자의 해석일 뿐 아닐까. 거타지가 작게건이고, 작제건이 왕건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어디에 근거하는 건지 모르겠다.

 

김부대왕이라는 칭호

더욱이 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도 10여 년이 지난 다음이다. 벌써 새로운 나라가 시작하여 새로운 기운이 뻗쳐나갈 때, 새 왕조에 편입되지 않은 두 세력 곧 신라와 후백제를 곱지 않게 볼 여지가 충분하거니와, 후백제 견훤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앉혀진 경순왕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297)

어쨌거나 일연의 의도는 견훤과 왕건의 비교, 곧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의 덕망을 보여 주려는 데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00)

이것이야말로 승자의 역사물이다. 우리 역사 기록물은 왕의 역사이다. 그것도 승자의 나라에 의해 기술된. 그래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비운의 왕자

그 마의태자가 바로 경순왕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명분과 실리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잘도 그려져 있다. (301)

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 리에 길을 가득 메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 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 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302)

 

천 년 사직은 막을 내리고

대체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 내리는 평가란 또 하나의 주관적 주장이 될 뿐이다. (304)

자신이 비록 승려지만, 불교의 말폐를 지적하는 것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이면서 불교가 살아날 길이기도 하다. (305)

정치와 종교, 아니 권력과 종교의 관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한국의 현대 기독교와 불교 종파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들에게 우호적인 종파만 남은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저자의 평가가 많이 들어간 해설서를 읽는 것이 이해는 잘 되나 편중되는 느낌이 든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아쉬운 백제의 역사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 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라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307)

신라가 통일을 했으니 고구려와 백제의 사료가 없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백제 고도의 대표는 부여가 아니다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309)

한강을 끼고 북으로는 양주에서부터 가운데는 위례성 그리고 남으로 광주까지가 500여 년 동안 백제의 도입지였다. (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11)

 

따뜻했을 것 같은 백제의 풍속

어쩐지 백제의 풍속이 왕에서부터 민간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고도 따뜻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왕이 절을 하는 널찍한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314)

 

곤지왕자로부터 시작하는 백제와 일본의 왕계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315)

히미코가 신라나 가야계일 가능성이 큰 데 비해, 응신왕은 분명 백제계일 것으로 보고 있다. (318)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320)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왕자는 일찍이 일본 왕실에 건너가 있다가, 자신의 형인 문주왕과 조카인 삼근왕 둘 다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자, 아들을 보내 동성왕으로 손자를 보내 무녕왕으로 올리고, 그로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앉을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321)

 

백제가 어떻게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200명도 채 안 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계였다. (324)

 

일본의 독립선언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왜라는 명칭을 싫어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325)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325)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한 눈에 맹랑한 자가 보인다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

맹랑한 사람도 많지 않지만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도 아니다.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327)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첫머리다.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그 때문에 받는 고난 등의 배치가 그렇다. (328)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일 것이다. (329)

일연이 이렇게 상징으로 쓴 것이라면 내용이 설화나 신화처럼 여겨지지 않겠다. 하지만 우린 이렇게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다. 그 상징도 추측일 뿐이다.

 

서동과 무왕 그 아슬아슬한 연결

왕위 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난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335)

실은 무왕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이렇듯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이 이야기가 설화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부분이다. (336)

일연이 그 당시 바리데기 공주 설화를 알고 있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337)

캠벨의 글이 생각난다. 서로 다른 나라 신화에서 공통적인 모습들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던. 이 책의 저자도 알고 있었다. 교육팀에선 이런 내용이 재미있다고 했을까.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338)

 

미륵보살 쟁탈전 속의 선화공주

미륵 사상은 백제 불교에서 먼저 피어났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반적인 발전은 신라에 비해 백제가 언제나 한 발 앞서 있었다. 백제는 발전된 항해술을 이용해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교를 그때그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화해서 토착시키고 있었다. (338)

일반적으로 서방은 아미타 정토이고 동방은 약사불이어서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남과 북은, 석가가 태어난 남쪽의 인도와 견주어 미래불인 미륵은 북쪽인 백제에서 태어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42)

서방이 인도가 서쪽에 있어서 그렇게 여긴 것인 줄 알았는데 아미타 정토라는 이상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구나.

 

견훤, 비운의 영웅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

비슷한 인물로서 궁예는 빠뜨리고, 견훤 한 사람에다 상당한 분량을 바치고 있다는 점에서 웬지 야릇하다. (347)

궁예를 넣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후고구려를 기술하고 싶지 않았거나 궁예라는 인물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궁예는 이미 고려조의 사람으로 왕건에게 복속한 신하이니 굳이 그의 나라와 일생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고, 신라가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왕건과 끝내 경쟁 관계에 섰던 견훤을 언급하지 않고는 마무리가 시원찮았을 터다. 그래서 견훤은 이 조의 사실상 주인공인 왕건을 빛내 주는 훌륭한 조연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348)

 

3대에 걸친 물고 물리는 불화

기이한 인물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해도 견훤의 이 경우는 그 가운데서 조금 심한 쪽에 속한다. (350)

아자개가 상주성을 차지한 5년 뒤, 견훤은 부모가 야반도주했었을 외가 쪽 완산으로 돌아와서, 후백제의 왕에 올랐다. 그 과정을 아버지가 도왔다는 낌새는 전혀 없다. (351)

 

호랑이가 키운 아이

견훤에게는 망해 가는 신라보다 더한 강적이 있었다. 바로 북쪽의 왕건이었다. (352)

이 때가 견훤의 전성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353)

이것도 고려의 사람의 고려의 왕을 평가하는 것인데 당연한 내용 아닐까. 그래야 고려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편지로 싸운 한 판

어쨌든 이 편지 싸움을 정점으로 형세는 급격히 왕건 쪽으로 기울었다. 견훤의 부하들은 하나 둘 왕건에게 항복해 왔다. (358)

 

가엾은 완산 아이

큰아들이 아버지를 절간에 가두는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밑의 두 동생과 합작한 것이었는데, 모든 일의 계략은 이찬 능환이 했다. (359)

 

라이벌에게 의지한 마지막 생애

오랫동안 적이었던 왕건에게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러 갔다. (361)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야하고 목을 베었다. (363)

 

신비의 왕조, 가야

인멸된 가야사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364)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365)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노래 속에 내려온 왕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372)

 

왕의 밀월 여행은 4일간?

가야 사람들은 질박하고 검소하게 살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만큼 작은 나라가 가진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372)

 

바사석탑으로 풀어 보는 왕후의 정체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378)

 

슬픈 수로왕의 그림자

[삼국사기]에서의 가락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의 식민지가 서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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