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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15시 21분 등록

카를 융 자서전 기억, , 사상(111째 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카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 1961)

칼 구스타프 융은 1875726일에 스위스 북부 투르가우 주의 시골 마을 케스빌에서 개신교 개혁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융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이 유명한 정신의학자의 할아버지(역시 의사였고, 역시 칼 구스타프라는 이름이었던) 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로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융은 바젤 근교의 클라인휘닝겐에서 성장했고, 11세 때에 바젤의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융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심령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거짓으로 신경증을 일으켜서 학교를 빼먹기도 했으며, 자신이 두 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목사인 부친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이한 꿈과 환상을 체험하면서 점차 품게 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인생 행보를 결정한 요인이었다. 1895년에 융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896년에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융은 대학에 다니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떠맡아야 했다. 1900년에 의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융은 정신의학자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의 책을 읽다가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 중인 분야였으며, 의과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융은 정신의학을 통해 본인이 관심을 갖는 정신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의 조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190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 부설 부르크횔츨리 병원에 취업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1857-1939) 밑에서 연구와 치료에 전념했다. 융은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유 연상기법을 개선한 단어 연상기법을 제안해서 주목을 받았고, 아울러 환자가 지닌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다양한 생각의 집합을 일컫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고안했다(지금은 흔히 열등의식과 동의어로 여겨지지만, 모든 콤플렉스가 열등의식까지는 아니다).

 

1903년에 융은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서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융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 겸 동료 노릇을 해 주었다. 1905년에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더욱 명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융은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칼 구스타프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경과 우정에서 시작되어, 사상적 갈등을 거치고, 결국 결별과 반목으로 마무리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현대 지성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일반적으로는 융이 프로이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갈등과 결별의 이유로 거론되지만, 히스테리 연구에 근거를 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열증 연구에 근거를 둔 융의 이론은 애초부터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두 사람을 사제지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만났을 당시에 융은 이미 정신의학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중견 학자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과대학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도 많아 강의실이 초만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19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융은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교우할 수 있었다.

 

정신분석 운동의 초기에 융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을 읽고 나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온 이 새로운 이론이 자신의 고찰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흥분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동조자가 되는 데에는 적잖은 위험이 따랐다. 융이 논문과 저서에서 프로이트의 입장을 지지하자, 주위의 동료들은 자칫 학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충고를 빙자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에 서겠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프로이트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2월에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낮 한 시에 만났다. 그리고 열세 시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융의 지지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융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비()유대인인 융이 가담함으로써,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 까닭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에서 융을 기꺼이 2인자, 또는 황태자로 인정하려는 의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입장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대한 융의 비판이었다. “나는 꿈과 히스테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프로이트처럼 어린 시절의 성적 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 프로이트처럼 성을 과도하게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성이 심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1909년에 융과 프로이트는 7주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두 사람의 결별을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융은 프로이트가 진리보다는 개인의 권위를 더욱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로이트의 이론이 일종의 도그마와 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이 종교나 신비주의 같은 미심쩍은 고대의 잔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1910년에 융은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양쪽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13년에 이르러 융과 프로이트는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사적인 관계를 모두 중단하기로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융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시인했다. 이후로 프로이트는 융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결별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증언이 있다. 융 역시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을 기꺼이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에 융은 오래 몸담았던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했고,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융은 방향상실 상태인 동시에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신비 현상을 체험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는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융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 부산물로 여러 권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을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 가운데 하나를 읽어보는 특권을 누렸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융은 그 자신이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원의 최고 의사이기도 했다.”

 

융의 이론에 내재된 이중적인 성격은 아마도 그의 관심이 평생 동안 심령과 과학으로 양분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의사인 동시에 신비체험자였던 그는 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 새로운 세계를 규명하려는 후반기의 저서는 종종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융은 종종 과학자를 빙자한 공상가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서도 융은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해명을 시도했다.

 

1922년에 융은 취리히 호수 인근의 볼링겐 마을에 땅을 구입하고,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소박한 별장을 지었다. 설계와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3년간 증축을 거듭한 볼링겐 별장은 융의 사상적 발전과 업적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그는 동양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황금 꽃의 비밀(太乙金花宗旨)]를 읽고 연금술의 의미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으며, 여러 차례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면서 유럽 이외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넓혔다.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학계에서 퇴출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면 융은 스위스 국적에 비()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펼쳤다. 이후 독일 학계가 노골적인 친()나치 입장으로 선회하자, 그 일원인 융도 자연스레 나치 협력자, 또는 반()유대주의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비롯된 비난은 지금까지도 융의 이력에 그늘을 드리운다.

 

융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남긴 것도 사실이며, 독일 학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나치에 악용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융을 반유대주의자나 나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속단이다. 나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39년에도 융은 프로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추모사를 발표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융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융은 미국의 앨런 덜레스를 도와 OSS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융은 나치 수뇌부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으며, 특히 히틀러에 대해서는 궁지에 몰릴 경우 자살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쟁이 끝나고 논란이 일자 융은 내가 나치이거나 나치였다는 것은 악명 높은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지만, 이후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그 와중에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이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 1947년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다시 활발한 연구에 돌입했다. 1948년에는 취리히에 C. G. 융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욜란데 야코비(1890-1973)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1915-1990) 등은 융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말년의 저서 중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분석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온](1951)[욥에게 보내는 답](1952), UFO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한 [현대의 신화](1958), 융 사상의 입문서로 유명한 [인간과 상징](1961) 등이 유명하다. 82세 때인 1957년부터는 5년간 집필 및 구술을 통해 자서전을 만들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자서전은 융의 생애와 이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을 담았고, 그의 사후인 1961년에야 간행되었다.

 

1955년에 취리히에서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융을 위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 해 말에는 반세기 넘게 해로한 부인 엠마가 사망하면서, 융도 급속히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19616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 집단무의식의 개념으로 심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인물세계사)

 

1895 ~ 1900 바젤대학교 의학

1900년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부속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

1905 ~ 1913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10년 제1대 국제정신분석협회 회장

스위스 바젤대학교 의학심리학 교수

스위스 연방과학기술전문대학 심리학 교수

1948C. G. 융 연구소 설립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 서문 ; 자서전 문학의 백미

내가 평소에 가장 감명있게 읽은 책으로 추천하기도 하는, 자서전 문학의 백미인 융 자서전을 원서로 읽어보고 번역해 보는 일은 내 일생에서 무척 귀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번역 청탁을 수락했다. (7)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8)

융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으나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동의했다. 과연 그 조건대로 융이 86세의 나이로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자서전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8)

전기작가라는 전문 작가들이 있다. 인물의 사후에 자료들을 조사하고 모아서 출판하는 형태다. 요즘은 생존해 있을 때 본인이 직접 쓰는 자서전이 많다. 대필작가가 쓰는 경우도 있다.

카를 융은 일생 동안 종교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을 가리켜 위험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1))

왜 신을 믿느냐는 물음에 신을 안다고 대답했는지 궁금하다. 어떤 의미인지.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되려나.

 

프롤로그 ;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11)

변경연 과정을 하면서 나의 무의식, 욕구를 들여다본다. 내가 행동이나 표현으로 특히 감정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결국 거기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11)

캠벨이 융에게 꽂힌 이유가 있었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13)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14)

 

일생을 사로잡는 꿈 ; 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그 무렵 어머니는 여러 달 동안 바젤의 병원에서 지냈는데, 추측컨대 그녀의 병은 결혼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26)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26)

글쎄, 부모의 몇 달의 별거로 이렇게까지 되나 싶다. 그냥 방치된 것도 아니고 돌봐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의 한 측면이 되었다. (27)

이러한 불길한 유추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주 예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크고 다정하고 자비로운 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검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나는 검정 구두를 신고 검은 상자를 나르는 음울한 사람들과 연관되었다. (30)

어릴 때 예민한 아이였다고 하는데 맞는 것 같다. 어린 나이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신기하다. 내 경우엔 어렸을 때 기억은 몇몇 장면밖에 없고 그것도 대여섯 살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

나는 그 꿈을 여러 해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오랜 후에야 비로소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33)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지. 프로이트를 만나서 꿈 해석을 했나.

그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남근이 발기되듯 수직으로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34)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나의 젊은시절 내내 그런 의미로 남아 있었는데, 누가 주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해서 말할 때마다 다시 생각나곤 했다. (34)

이건 목사였던 아버지 때문에 생긴 무의식이 아닐까.

아버지의 동료들과 여덟 명의 친척아저씨가 있었는데 모두 목사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나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35)

8명이나 목사였다니 그럴 만하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37)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39)

여섯 살 정도의 아이가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이걸 기억하는 것 자체가 놀랍다.

그 아름다운 예술과의 첫 대면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친척아주머니는 마치 음화전시장을 가로질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40)

이 장면은 예술작품도 종교적 입장에서 선악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이 의아하다. 수많은 중세 그림이 종교화인데. 이런 환경에서 큰 융이 한쪽으론 많이 억제되었겠구나 싶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예민했을까?

다른 아이들보다 늘 앞서 있었기 때문에 학교공부도 내게는 쉬웠다. (42)

어머니가 이교도들이라는 말을 할 때 가벼운 경멸투의 그 어조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42)

기독교야 말로 고대에는 이교도였다.

이런 어린이답지 않은 행동은, 한편으로는 예민한 감수성과 상처받기 쉬운 성격과 연관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유년 시절의 깊은 고독감과도 연관이 있었다. (42)

내가 학교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얻지 못했던 놀이친구를 드디어 거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43)

융의 어린 시절을 읽으니 찰스 핸디가 생각난다.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그런데 성격차이인지 시대차이인지 아니면 둘 모두의 차이 때문인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그 유년시절에 나는 시골학교 학우들과 사귀는 동안 발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다. (45)

나는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의 그 시기에 불놀이를 즐겨 했던 것을 기억한다. (46)

한순간, 나는 비밀스러운 의미로 충만한 불을 붙이고, 돌이 나인지 돌 위에 앉은 것이 나인지 알지 못한 채 돌 위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로 돌아갔다. (47)

이렇게 물아일체를 경험하다니, 그래서 융이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48)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에 나오는 걱정인형이 생각난다.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대신하는 인형을 만들어 자신의 걱정이 사라졌다는. 나만이 알고 있고 비밀이기에 그 효과가 더 컸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무슨 말을 인형에게 전하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편지들이 인형에게 일종의 도서관을 의미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편지들은 특히 내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들이 아니었나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49)

돌과 함께 있었던 그 작은 나무인형은 아직 무의식적이며 유치하긴 하나 그 비밀을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50)

남자 인형의 에피소드는 내 유년시절의 정점이었으며 종결이기도 했다. 그것은 1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후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되기까지 그 사건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50)

남자 인형은 외투를 입은 고대의 작은 신으로, 많은 옛날그림 속에서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옆에 서서 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읽어주고 있는 텔레스포로스였다. (51)

그중 하나를 더 큰 규모로 돌에다 다시 조각한 것이 지금 퀴스나흐트 우리집 정원에 서 있다. 그때 비로소 무의식이 그 작품에 이름을 부여해주었다. 그것은 아트마빅투’, 생명의 숨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52)

유년시절에 꿈 하나와 연결해서 실질적인 모형을 만들어서 필통에 넣어두었다는 글을 읽고는 나는 어린 시절 이렇게 기억에 선명해서 남아 있는 게 있나 생각해봤다. 하지만 특히 꿈이 기억에 남아있는 건 없다. 나도 뭔가를 생각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볼수록 융이 독특하다.

앤서니 브라운의 걱정인형도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에서 내려온 이야기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열한 살이 되던 해는, 그때 내가 바젤로 와서 김나지움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만큼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하여 나는 시골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과 헤어져 그야말로 위해한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55)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56)

큰 세계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았다는 거네. 의외로 이런 건 무딘가보다.

아버지가 변덕스럽고 과민한 성질을 부릴 때면 나는 어머니 편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나의 성격 형성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되었다. (56)

어머니가 내 등뒤에 대고 아빠 엄마의 안부 전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코 닦는 것도 잊지 말고. 너 손수건은 챙겼니? 손은 잘 씻었니?” 운운하는 말들을 길거리 사람들이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굴욕으로 느껴졌다. (58)

나도 이 마음을 알 것 같다. 좀 다르긴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나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엄마의 잔소리가 결국 엄마의 염려증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

여든세 살의 나이에 지난날의 기억들을 적어나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59)

사람의 기억들을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짐작을 할 뿐이고 그것도 쉽지 않을 거다. 나타나는 행동도 다 다를 테니 더욱 그렇다.

신은 예수보다 훨씬 독특한 존재로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은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60)

학교생활이 따분해졌다. 그것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전쟁그림을 그리고 불장난을 하며 보냈으면 싶었다. 종교시간은 말할 수 없이 지루했다. (60)

그럼 그렇지. 처음엔 놀이친구가 생겨 학교가 좋다고 할 때 이상하다 했다. 다들 학교를 좋게 말한 사람은 없었는데. 특히 융 같은 아이가. 그런데 지금의 학교도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아들이 이 대목을 봤으면 분명 똑같이 느낄 거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격앙시킨 것은, 선생이 자신이 주장했던 평행선의 정의에 반하여 평행선이 무한대로 가면 서로 교차한다고 말했을 때였다. 이런 것은 시골사람을 등치는 어리석은 속임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다. (62)

수학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내가 적절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데도 어찌하여 수학과 관계를 맺지 못했는지, 그것은 한평생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학에 대한 나 자신이 도덕적인의혹은 나로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62)

수학수업은 나에게는 정말 무섭고 괴로운 시간이 되고 말았다.(63)

딱 수포자네.

수학에서도 나의 우수한 시각기억 덕분에 오랫동안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으므로 대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었다. (63)

그냥 암기한 거네. 지금 학교에서 수학점수 높은 아이들도 이런 경우가 많을 거다. 문제풀이를 외워서 시험보고 점수는 높지만 수학 실력이 있는 게 아닌.

게다가 나는 재능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미술시간을 면제받기도 했다. (63)

다시 말해 나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상만을 그릴 수 있었다. (63)

미술에서조차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못했다는 거다.

그후 나는 학교로 다시 가야 할 때가 되면 그 즉시 기절하기 일쑤였다. 부모가 숙제를 마무리하라고 재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반년 이상이나 학교를 쉬었다.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몫이었다. (64)

잔꾀의 대가였네.

나는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빈둥빈둥 보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막연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65)

혹시 우리 아들도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 주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속임수는 끝이 났다! 여기서 나는 신경증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66)

잠결에 혹은 문 뒤에서 의도하지 않게 듣게 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강화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한번쯤은 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그후로 부모님이 나를 염려한다거나 동정하는 어조로 나에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67)

 

너는 누구냐?

그때 몹시 난처하게도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0)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저것이다! 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 같았다! (71)

18세기의 마차를 보고 이런 느낌을 가지다니.

어찌하여 내가 18세기에 속하는가? 그 무렵 나는 종종 1886년을 1786년이라고 쓰곤 했다. 그런 일은 항상 설명하기 힘든 향수가 동반되면서 일어났다. (72)

소위 조부가 괴테의 서자였다는 불쾌한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73)

괴테와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수학과 미술 수업의 패배에 세 번째 패배가 보태졌다. 그것은 체조였는데, 나는 처음부터 그 과목이 싫었다. (73)

대체적으로 머리를 쓰는 사람은 몸 쓰는 걸 잘 못한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 죄를 짓는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74)

내가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또다시 대성당과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문즉 깨달았다. (76)

며칠을 같은 생각만 한다는 건 고문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해보지 않았다. 악마는 그 무렵의 내 정신세계에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않았고, 어쨌든 악마는 하느님에 비해 힘이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79)

교회에선 사탄 마귀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데 융의 아버지는 그런 얘기를 안했나?

내가 하느님의 가차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느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계시를 체험한 것과도 같았다. 내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81)

남근상 꿈에 관해서는 내가 예순다섯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83)

30살에 프로이트를 만났는데 그때도 얘기를 안했네. 어려서 너무 정신적 억압 때문이었을까.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84)

신을 안다던 앞부분의 이야기가 이거였군.

 

자연과 사원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87)

맞다. 교회에 가면 믿으라고 강요한다. 믿는다는 말을 계속 시킨다.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87)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만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대신 그는 자연과는 친밀하게 지냈다. (89)

융이 말하는 나 자신이 둘이라는 건, 사람의 양가적인 마음과는 다른 것 같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91)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1)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말과 그 말이 풍기는 짙은 모호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92)

~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네. 나 역시 성경의 그 많은 비유나 목사님의 설교가 모호했는데, 오래된 신도들은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참 잘 말하더라.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서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다. (93)

 

두 인격의 어머니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96)

융은 다중지능에서 영성지능이 뛰어난 사람일 것 같다.

어머니는 특별한 문학적 재능과 취미, 그리고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하곤 했다. ... 하나는 악의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97)

융이 엄마를 닮았네.

나 또한 내 안에서 이러한 고태적인 성질의 어떤 요소를 인식한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항상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닌 재능을 부여한다. (101)

정말 놀랍게도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의 인생사를 낱낱이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 순간에, 내가 했던 이야기 중 한 마디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것을 기억해낼 수 없다. (102)

그분이 오셨네.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으나,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 같았고 그 상황에 들어맞는 내용을 정확하게 말했다. (102)

신끼있는 사람들이다. 대물림한다던데...

어머니가 말하는 모든 것을 둘로 나누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머니를 한정된 범위에서만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이제는 어머니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103)

나는 성찬식이 뭔가 이미 계획되고 인습에 맞는 격식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06)

맞다. 철저히 순서에 의해 목사님 말도 정말 똑같다. 교회 예배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이고 교제라고 해봐야 대화하는 사람들하고만 한다. 청소년들과는 인사만 한다. 한 곳에서 매주 만나지만 소통이 되진 않는다. 큰 교회일수록 더 그렇다고 하더라.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피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109)

융은 선한 하느님만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다.

 

악의 기원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1)

하느님은 어떤 종류의 성격 내지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이 문제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2)

하느님은 유일한 신이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하느님이 인격이 있다는 생각은 새롭다.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기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 외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자아는 덕과 재능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113)

그래서 윤리와 교육이라는 것으로 자아를 숨기는 법을 배운다.

그때 나는 하느님이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세상을 창조했다는 구절과 자연세계는 그의 선함으로 채웠고, 도덕세계는 그의 사람으로 채우기를 원한다는 구절을 읽었다. (114)

하느님이 대극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가 다른 것을 잡아먹도록 하고 인생이 죽음으로 향한 탄생이 되도록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115)

글쎄, 이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유발 하라리는 종교의 모순을 말할 때 왜 죄를 짓고 나쁜 일이 있는 지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융은 이조차도 하느님이 계획하심이라는 거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고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거다. 이건 융의 해석이 아닐까.

그 무렵 어머니, 즉 어머니의 제2의 인격이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너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번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116)

융이 파우스트를 읽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융 자서전을 읽으니 신기하게도 파우스트가 더 잘 이해된다.

자신의 영혼을 그토록 경박하게 도박에 거는 것이 나로서는 유치하게 보였다. 파우스트는 분명히 허풍쟁이였다! (117)

융이 파우스트를 읽고 반가웠던 게 아니라 파우스트의 선택이나 메피스코텔레스의 약함이 불만이었다는 건 재미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철학자의 책이 없었다. 그들은 따지며 생각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118)

이래서 목사 아들이 철학자가 된 경우가 많은가 보다.

주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언제나 의심스럽게 여겨졌고 그것을 진실로 믿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대개 배후에서만 암시되고 있는 하느님보다 더욱 나에게 강요했다. (120)

개신교는 그럴 수밖에 없다. 유대인이나 카톨릭은 구약, 하느님을 믿지만 개신교는 신약인 예수 이후의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주기도문엔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기도한다.

나는 철학자들에게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의미에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일종의 가설이라는 기묘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1)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독서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기분전환이 되도록 해주었다. (123)

나는 평균점수로 슬그머니 통과했는데 그 정도가 나에게는 딱 어울렸다. 그것은 주목을 받지 않으려는 나의 일반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125)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128)

그러게. 그러고 보니 딱 맞는 표현이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131)

식물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131)

나는 학교와 도시생활에 정신을 빼앗겼고, 증가된 나의 지식은 예감으로 가득한 영감의 세계를 차츰 침투해들어가 억압했다. (132)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133)

융의 이런 모습이 참 맘에 든다. 나는 아우라에 눌려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대단한 사람들이니 당연 극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봤다.

여기서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133)

쇼펜하우어가 이랬었나. 철학이야기를 다시 봐야겠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34)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136)

인생이란 진지함과 성실성, 노동과 노력이 요구되는 법이야.“ (137)

교사다운 표현이다.

내 작문에 몇 가지 빼어난 착상이 들어 있다고 여겼으나 선생은 그것들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37)

조심스럽게 물어서 조사해본 결과, 내가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것들에 관해 자주 발언하거나 넌지시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7)

요즘 표현으로 잘난 척해서 재수 없다는 거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나의 관심은 다양한 분야로 끌렸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기초를 둔 진리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에 강한 흥미를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종교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매료되었다. (139)

2개의 서로 다른 사람이 있으니 당연하다.

자연과학은 제1의 인격의 정신적 욕구에 아주 잘 부합하였고, 그에 반해서 인문학이나 역사과목은 제2의 인격을 위한 일종의 유익한 시청각수업인 셈이었다. (140)

이제 이 둘을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 자연과학이 인문학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불쌍한 아버지가 내적인 의혹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맹목적인 믿음만을 주장했다. (141)

갑자기 융의 자서전을 목회자들이 보면 어떨까 싶다.

나는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이런 세계에서 점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142)

혼자 집에 있거나 자연 속에 있을 때는 그 즉시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강력하게 되살아나고, 그들과 함께 위대한 신의 세계도 되살아났다. (143)

교회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하는 점은 결코 아쉽지 않았다. ... 습관에 따라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서로 교제하는 유대관계가 약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144)

왜 이렇게 느끼는지 알 것 같다. 교회 신도들은 좋은말만 한다. 융이 앞에서 이야기한 자아가 없는 사람들 같다. 사람이 아니다. 시기, 질투, 이기심.... 이런 것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표현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난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 방학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굉장한 시간이었다. (145)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149)

이런 느낌을 가질 만한 곳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받은 인상이 너무나 깊었으므로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1의 인격 역시 이 여행에서 자기가 바라는 바를 얻었다. 그가 받은 인상들이 대부분의 내 생애 동안 항상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성숙하고 독립된 존재로 여겼다. (150)

그렇다. 어떻게 사람이 성자와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성자는 은둔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은둔처는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151)

그 실험실에서 나는 구리뿌리들이 대기로부터 끌어들인 신비로운 재료를 가지고 황금을 제조했다. (156)

융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상상속이다. 연금술에 심취했다고 하더니 이 대목을 보니 알겠다.

길고 지루했던 등굣길이 다행히도 짧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학교 건물을 나서기가 무섭게 나는 이미 환상의 성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157)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가대장 존]이 생각난다. 존 역시 학교에 오며 온갖 상상을 해서 결국 지각을 하고 선생님께 상상 속에 본 것들을 설명하는데 선생님을 여지없이 반성문을 쓰는 벌을 내린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이 있네. 재밌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식물은 뽑아서 말라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오직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 데 의미가 있었다. (158)

모든 존재에 대한 동정은 오직 항온동물에 국한되었다. (159)

융의 동식물학이란 걸 다루면 재밌겠다.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아버지가 무척 걱정하며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는 모르고 있어.” (164)

아니, 이건 우리 아들인데.

이 두 개의 꿈이 나로 하여금 자연과학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 점에서는 나의 회의가 사라졌다. (165)

진짜 자면서 꾸는 꿈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다니.

이와 같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내가 의학을 공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시처럼 떠올랐다. (165)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내게 확고했으나 다만 어떻게 공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으며, 돈이 없기 때문에 학문적인 행로를 준비하기 위해 외국 대학에 다닐 수도 없었다. (166)

아버지는 바젤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했으며 부끄럽게도 나는 그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내가 부끄럽게 여긴 이유는,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테면 모든 사람, 즉 유력한 분들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7)

학교 시스템이 맞았다고 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럼 학교는 도대체 뭘 한 걸까.

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거친 기질, 모호한 태도들을 지니고 있었다. (167)

2의 인경은 제1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이런 과제는 일련의 결점으로 인하여 부담이 가중되었다. (167)

이렇게 자신을 2개의 인격으로 나눠서 보는 것도 신기한데, 어떻게 다른 지까지 알고 있으니 더 신기하다.

그 무렵 다소 충격적으로 깨달은 바지만, 파우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파우스트속에는 내가 직접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생동하고 있었다. (168)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더니... 그래서 깨달았다고 했나보다.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169)

나는 자문해보았다. “어디서 이런 꿈이 오는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꿈들은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71)

꿈이 무의식에서 나온다는 거겠지. 꿈을 기억하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남다르다. 나도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다.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는 꿈이나 학교에서 시험 보는 꿈, 버스를 못 타서 집으로 못 가는 꿈 하지만 해석은 못 하겠더라.

나는 나 자신이 점점 더 제1의 인격과 동일화되는 것을 느꼈으며, 이러한 상황은 훨씬 더 포괄적인 제2의 인격의 단순한 일부임이 판명되었다. ... 2의 인격은 사실 일종의 유령이었다. (172)

아무튼 나와 제2의 인격 사이에는 분열이 생겼으며, 그 결과 나는 제1의 인격 쪽으로 기울었고, 그만큼 제2의 인격으로부터 떨어져나오게 되었다. (173)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173)

그래서 집단무의식을 이야기했구나.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말보다는 주위 분위기의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것들에 대해 훨씬 더 잘 반응한다. 어린아이는 그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한다. ,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 보상적인 성격의 상호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174)

어머니의 제2의 인격은, 내 무의식이 자극을 받아 만들어내고 있던 기이한 보상적 산물들과 아버지의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 나에게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75)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176)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그는 너무나 많은 선행을 베풀고는 그 결과 대개 기분이 언짢았고 곧잘 부아를 내곤 했다. 부모는 두 사람 다 경건한 삶을 살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자주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어려움들이 나중에 아버지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말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177)

내가 다닌 교회 목사부부가 생각난다. 목사님의 아들, 딸이었고 다시 그들이 목회자로 생활하고 있다. 너무 독실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일련의 암시들을 통해 그것이 종교적인 회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178)

이렇게 결실 없는 토론을 할 적마다 아버지와 나는 화를 냈으며, 결국 두 사람 다 특유의 열등감을 안은 채 물러서고 말았다. 신학은 아버지와 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180)

하느님 자신은 나의 꿈속에서 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둔 교회를 부인했다. (180)

그러게. 나도 과연 하느님이 지금의 교회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유물론자들이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정의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81)

나는 아버지의 인생이 대학 졸업과 함께 결정적으로 정지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았다. (183)

홀연히깨달았으니 아버지의 목사로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해했겠다. 찰스 핸디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보고 아버지의 목사로서 삶이 결코 초라하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지금 돌아가셨구나.” 그 말은 나에게 이런 의미로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너에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견해는 나로서는 어머니의 제2의 인격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185)

회고하건대 대학시절은 나에게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정신적으로 활기를 띠었고 또한 우정을 나누는 시기였다. (187)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나는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만드는 견해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다. (192)

개신교는 예수의 존재를 너무 강조한다. 하느님보다 더. 주일날 성경구절도 구약보다 신약에 치중되어 있다.

주 예수는 나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사람의 인간이었으며, 따라서 불확실한 존재거나 단순히 성령의 대변자였다. (192)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193)

그 당시 손에 넣을 수 있는 심령술 문헌들은 모조리 독파했다. (194)

이것 때문에 융 이론에 호불호가 나뉘던데.

나에게 불같이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질없는 것이며, 심지어 불안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195)

도시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6)

나는 인간이 동물을 실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실험공개는 야만적이고 끔찍하며 무엇보다도 쓸모없다고 여겨졌다. (197)

동물권이란 용어가 있다. 실험동물부터 동물들의 생명권을 말하는 것이다. 융이 생각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나 자신이 니체를 닮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불안을 느끼며 주춤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킨 그 비밀에 있어 비슷한 데가 있을지도 몰랐다. (198)

나는 나 자신이 니체와 어느 정도 비슷한지도 따져보아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199)

융이 분야는 다르지만 지금은 니체만큼 영향력이 있지 않나?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199)

그는 제2의 인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에다 그것을 거리낌없이 앞뒤재지도 않고 밝혀버렸다. (200)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201)

나는 철학자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202)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나는 해부학에서 전문수련을 받았고 병리학을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 외과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203)

나는 두드리는 소리가 분명히 저절로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영매의 넋두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이러한 관찰의 결과를 박사학위 논문에서 기술했다. (207)

집안 가구에서 폭음소리가 나다니 그건 나무가 오래돼서 나는 소리가 아닐까? 여하튼 그걸 영매와 연결시킨 것을 보니 융은 영성지능이 남다른 게 맞다.

그녀가 죽어가는 최후 몇 달 동안 그녀의 성격들이 하나하나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결국은 두 살짜리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서 마지막 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207)

나는 정신의학에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다. (209)

이랬던 사람이 정신의학분야에서 이름을 남겼다.

의사들도 일반인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일반인들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209)

정신의학 분야가 당시엔 발달되지 않았었으니 당연하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210)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211)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길을 간 거다. 거창고의 직업 선택 십계명이 생각난다.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하는 곳으로 가면 틀림없다. 의심하지 말고 가라.’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213)

나는 소위 일종의 지식인집단에 속해 있었고 특정한 사회적 동아리에 들어 있었다. 나는 여기에 반감을 느꼈다. 나 자신을 그런 식으로 묶어 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214)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환자와 관계가 잘 이뤄졌을 수도 있겠다.

나의 전공 동료들도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존재들로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후 몇 년에 걸쳐 스위스 둉료들의 유전적 배경에 대한 은밀하고도 교육적인 통계자료들을 작성했다. (216)

MBTI?

그 무렵 나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소위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217)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해 환상을 엮어나간다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217)

그렇다. 자서전이 자칫 변명이나 자랑 일색일 수 있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주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221)

환자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진단하여 도장을 찍으면 그것으로 일은 대충 끝나는 것이었다. 정신병자에 관한 심리학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221)

이런 꼬리표가 오히려 병을 양산하는 거라는 견해도 있다.

프로이트의 견해는 나에게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와 이해의 길을 열어주었다. (222)

연상검사를 통해 나는 그녀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비밀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요컨대 일종의 심인성 장애가 문제였던 것이다. (224)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225)

개인사를 모르고 치료가 될 수 없다. 부모와 형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이 불확실한 가운데 일하는 것에 대해 늘 저항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내가 결정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30)

상담이나 정신의학에서 의사나 상담사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거나 제시를 해줄 수는 있지만 결정은 본인이 내리는 것이다.

음주는 괴로운 상황을 잊기 위해 자신을 마취시키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231)

모든 중독은 회피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라든지 어머니가 간섭하는 대로 따라야만 할 때마다 자신의 기분을 마비시키거나 날려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본능에 반하여 부유와 안락에 자신을 내맡겼다. (232)

그녀는 영리한 부인이었으나 강력한 권력의 화신이었다. (232)

강력한 권력의 화신이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정도면 얼마나 기가 쌘 걸까.

나는 그가 모르게 그런 진단서를 발급해주었기 때문에 그 환자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강제적인 방법만이 그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신경증도 치료되었다. (233)

자신이 결단을 못하는 사람에겐 이런 처방도 맞다.

그녀는 살인범이었으나 거기에 더하여 그녀 자신을 또한 살해했다. 그런 죄를 범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살인범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셈이다. (234)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235)

신기하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동식물도 살인범을 싫어해서 기피하고 병에 걸린다니.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라는 것이 있어서겠지.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36)

여러 차례 나는 그런 환자들에게도 그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239)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정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241)

정신치료에 심리학을 도입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242)

예전엔 정신병도 뇌수술 같은 외과적 수술로 고칠 수 있다고 여겼었다.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246)

근친상간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꿈의 분석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48)

나는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249)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249)

중요한 것은 이론의 증명이 아니라, 환자가 자기 자신을 한 개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250)

교육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부분이지 무조건 암기하여(문자 그대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51)

융은 심리학이건 정신의학이건 오로지 환자에게만 집중해서 한 인격체로 대한 것 같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251)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252)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253)

상처를 입은 자만이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남편이 초인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254)

여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문 편이다. 프로이트와는 대비된다. 후에 이런 것들도 서로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담자도 본인을 먼저 상담한다. 어떤 상담자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하더라.

나는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배워서 시행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편이다. (257)

융은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람인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상담일을 시작할 때 심리학을 전공한 박사인 분이 일반인이 상담하는 것에 대해 위험하다고 했었다. 전문적인 심리상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러 해 동안 정신치료를 시행하고 스스로 분석을 받은 비전문가들은 그래도 뭔가를 알고 어느 정도 치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거듭 확인했다. 게다가 정신치료를 활용하는 의사들도 그 수가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직무는 아주 긴 기간의 철저한 수련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교양이 요구된다. (258)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드디어 나왔군.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259)

그렇구나.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260)

질투는 사랑 때문인 줄 알았는데.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61)

나는 환자를 어떻게 개종시켜보려고 한 적이 없으며 그것을 강요한 적도 없다. 나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환자가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261)

그 꿈은 그녀가 단지 경망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그 내면에 성녀의 소질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63)

꿈을 통해 성녀의 소질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건데, 이건 좀 심한 게 아닐까 싶고 이래서 융이 심령주의에 치우쳤다고 보는 가보다 싶다.

사실 그녀는 하느님의 비밀스러운 뜻을 이루어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였다. (263)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264)

그들이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264)

혹 엄마가 이런 걸까?

저항은 특히 완강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개 그런 저항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266)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267)

그녀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제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박신경증에 걸린 것이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본성에 의해, 바로 강박신경증을 통해 제약을 받게 되는 법이다. (268)

이러한 재능이 기묘하고도 꺼림칙한 정신적인 기질 속에 뿌리박고 있어, 우리는 그것이 천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단편적인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269)

천재성이라는 것이 한편으로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도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270)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말만 그럴듯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271)

단지 어떤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272)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272)

융 자신이 권위주의와 윗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인지 오히려 명성 있는 사람보다 일반인이 더 끌리나 보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나의 정신적 발달을 향한 모험은 정신과의사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는 정신병 환자를 임상적으로 밖에서부터 관찰하기 시작했다. (275)

환자는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시간이 무척 길어지곤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러한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276)

융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예지몽 같은 꿈도 많이 꿨으면 환자의 치료에도 적용하기도 했으니까.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276)

나 역시 융과 같은 생각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어릴 적 성적 억압이 원인이라고 본다. 물론 그래서 나중엔 많은 지적을 받기도 했다.

유력인사들은 프로이트에 관해 기껏해야 은밀히 언급했고, 학술회의에서 프로이트는 복도에서만 거론될 뿐 전체회의에서는 한 번도 토의되지 않았다. (277)

의외다. 당대에도 인정받았는지 알았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278)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 연구를 제한하고 진리를 숨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경력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278)

융은 출세나 명성을 중요시 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오후 1시에 만나 열세 시간 동안이나 그야말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279)

20살 차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알아본 거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의 만남과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모호한, 알 수 없는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긴 했다. (279)

성욕이 그에게는 일종의 누미노숨(신성한 힘)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80)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보루교리같은 단어들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281)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또는 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넣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282)

프로이트 자신이 어릴 때 성적 트라우마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284)

프로이트는 왜 자신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지, 왜 그러한 생각이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지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284)

정말?

그는 한쪽 면에만 치우쳐 있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에게서 비극적인 모습을 본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 무엇에 홀린 사람이기도 했다. (285)

에로스와 권력충동은, 같은 아버지에게서 났지만 서로 다투는 형제와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인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힘으로, 음전기와 양전기처럼 경험적으로는 대극의 형태로 나타난다. (286)

에로스와 권력충동이 같은 이유로 움직이고, 나타나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는 건데,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287)

한편으로는 성적인 해석,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의 권력지향이 나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유형학의 문제와 더불어 마음의 대립성과 에너지론에 이끌리도록 했다. (288)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프로이트의 발작이 브레멘에서 일어났다. (291)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면 자주 발작을 일으켰나보다.

그후에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시체들에 대해 떠벌리는 나의 모든 말이 내가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음을 뜻하는 거라고 확신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해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나는 그의 환상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충격을 받았다. 그 강도가 너무 세서 그를 실신하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292)

그래서 프로이트가 나중에 타나토스(죽음)에 대해 연구를 한 걸까.

이러한 실신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두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부친 살해에 대한 환상이었다. (294)

부친 살해, 사회로 나서는 입사식의 의례라고 배웠다. 아이는 부친 살해를 통해 성인이 된다는.

나는 진리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294)

프로이트가 어떤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여기서 늘어놓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295)

프로이트에 대한 융의 배려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295)

나는 그와 다툴 만큼 감정이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와의 우정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298)

융과 프로이트는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꿈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비슷하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에 같이 할 수는 없었겠다.

그 꿈은 개인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선험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다. (300)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301)

그 무렵(1911) 프로이트는 나에게 권위가 상실된 존재이긴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우월한 인격을 의미했으며 나는 그에게 부성을 투사했다. (303)

그 꿈을 꾸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프로이트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이런 분열된 태도는 내가 아직도 그 사태를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성찰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이것은 모든 투사의 특징이다. (303)

기사와 세관관리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세관관리는 흐릿했으며 아직 제대로 죽지 못한스러져가는 유령이었다. 반면에 기사는 활기 넘치고 완전히 현실적인 존재 같았다. (306)

범죄성을 지닌 그런 것들은 나에게 단지 인간존재의 추악함과 무의미성만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인생의 참맛을 망쳐놓는 더러운 찌꺼기에 불과했다. (307)

그런 계몽이 신경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조로운 일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때에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부터 억압해오던 것에 머물기를 너무 좋아하기만 한다. (307)

엄마가 그렇다. 불필요한 것에 필요이상으로 규칙을 적용한다. 싫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 사신이 신경증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 신경증은 쉽게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미국여행에서 내가 발견한 바와 같이 무척 고통스러운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308)

의사가 먼저 자신을 관찰해야한다고 했던 융이었으니 프로이트의 이런 모습들이 힘들었겠다.

나로서는 근친상간이 개인적인 착종을 의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 외 수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09)

캠벨이 신화가 없어진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나는 희생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310)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311)

맞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무의식의 개념도 정신의학 분야도 더 늦게 발전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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