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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11시 08분 등록
I.저자에 대해

켄윌버

미국을 대표하는 트랜스퍼스널심리학의 대가이자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읽히는 저술가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불과 23세의 나이에 집필한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명저를 통해 인간의식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이래로, 20여 권의 저서를 발표하여 심리학과 철학, 인류학, 동서양의 신비사상,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총망라하여 인간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철학, 종교, 심리학, 신(新)과학, 인류학, 사회학 분야의 대 사상가로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던 윌버는 노자의 도덕경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심리학, 종교, 영성에 대한 동서양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동서양 정신문화에 대한 수많은 서적을 섭렵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그 이론들을 통합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는 서양의 심리학, 철학, 동양의 불교, 힌두교, 기독교 신비주의 등이 통합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통합철학'은 바로 '영원의 철학'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윌버는 자신이 판디트(학자)이지 구루(영적인 스승)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삶의 목표가 저술에 있다고 말하는 그는 선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진지한 수행자이기도 하다. 자아초월심리학을 대표하는 이론가이자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비판가, 그리고 통합이론가인 윌버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영역을 통합하려고 한다. 이처럼 그가 하는 일은 인간의식의 대통합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사교적인 신A Sociable God』『의식의 스펙트럼The Spectrum of Consciousness』, 『무경계 No Boundary』『아트만 프로젝트The Atman Project』『에덴으로부터Up From Eden』, 『눈에는 눈Eye to Eye』『양자적 물음Quantum Questions』, 『의식의 변용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공저), 『일미One Taste』가 있다. 그의 저서들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자아초월심리학의 대가. 자연과학을 전공하던 그는 노자의 도덕경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심리학, 종교, 영성에 대한 동서양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그 후 동서양 정신문화에 대한 수많은 서적을 섭렵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그 이론들을 통합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그의 통합적 관점은 심리학과 철학, 동서양의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학, 인류학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의 저술 중 상당수가 이미 대학의 정규 교재로 채택되고 있으며, 20여 국가에서 번역되기도 했다. 현재 그는 통합 이론과 훈련을 연구하는 두뇌집단인 통합연구소Integral Institute를 설립하여, 공간을 넘어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Integral Naked, Integral University, Integral Training, Integral Spiritual Center-을 통해 통합 이론에 관한 연구를 공유 학습하고 있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9
동서양의 심리학과 정신요법과 신비사상을 총 망라하여 '의식의 스펙트럼' 이라는 그의 독창적인 스펙트럼 심리학을 제창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스스로 정신과 신체 사이에 혹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불필요하게 자신의 정체감을 제한해왔기 때문에, 이들 경계선을 하나씩 제거한다면 본래의 경계 없는 ‘진정한 나(self)’, 즉 무경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페르소나(가면)수준으로부터 건전한 자아, 심신일여의 켄타우로스, 초월적 주시자의 단계를 차례로 거쳐가며 궁극적으로 전 우주와 하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 실천법과 함께 쉽고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P.11
부디 이번생에 영적 스승을 만나는 은총과 지금 이 순간에서 깨달움을 얻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 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P.15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의식의 스펙트럼-물질로부터 몸, 마음, 혼, 영에 이르는 비상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무지개-을 지니고 있다.
  • 처음 이 글을 읽을때는 이게 무슨말인지 몰랐으나 책을 읽으면서 의식의 스펙트럼이란 말이 참 매력적인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P.18
이 책은 우리가 현재의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단편화시키고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로 부터 - 심지어는 자기자신으로 부터 - 어떻게 끊임없이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우리는 자신의 자각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 구분하면서 경험과 경험, 삶과 삶이 서로 투쟁하도록 분열을 만들어낸다

P.19
이 책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세우게 된 여러 경계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의식을 한정-분열, 갈등, 투쟁-시키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경계와 한계가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 경계들을 통합할 때 의식의 스펙트럼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양한 치료법들이 이 스펙트럼의 각기 다른 수준에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P.24
긴 안목에서 볼 때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 우주의 질서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 생명의 질서. 내가 맡닿은 우주의 질서. 생각과 정신의 영역이 한없는 영역으로 확대대어지는거 같다

P.25
우리의 ‘일상적 자각’은, 마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광대한 의식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섬과 같다. 그리고 이 일상적 자각을 대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산호초 위로는 끊임없이 파도가-언젠가 자연스럽게 광대미답의 진정한 영역, 즉 의식의 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섬 같은 각성을 덮쳐올 때까지-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 의식의 확대는 깨우침에거 깊어지는게 아닐까 생각된다.

P.26~27
이제는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을 만한 본래의 어린이로 돌아가리라

P.27
“나는 누구인가?” – 아마도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세속적인 것부터 신성한 것까지,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낭만적인 것부터 과학적인 것까지, 개인적인 것부터 정치적인 것까지, 실로 모든 범위에서 무수한 답이 제시되어왔음에도 말이다.

P.28
“나는 이러저러한 재능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이다. 친절하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온화하지만 때로는 공격적이다. 아버지이자 법조인이고, 낚시와 야구를 즐긴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느낌과 생각의 목록은 계속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이 확립되는 그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좀더 기본적인 절차가 하나 존재한다. 즉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나’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낄 때마다 당신은 _자각하든 못하든 간에_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나self’라고 느끼거나 ‘나’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경계 ‘밖에’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 not-self’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P.29
즉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단지 그 선 안쪽에 있는 것을 묘사하면서 답한다. 소위 '정체성의 위기'란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컨데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것'과 '내가 아닌 것'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한다.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진 후에 나오는 답은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으로 대단히 복잡할 수도 있고 무척 단순하거나 모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 그은 경계선에 달려있다.
이 경계선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내 영혼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우리는 이전에는 미처 가능하다거나, 얻을 수 있다거나, 바람직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그 새로운 영역 속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제작도 또는 변경은 '지고의 본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그 지점에서는 내 정체성의 경계가 온 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 한다면, 그곳엔 더 이상 안팎이 없으므로 그 어디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P.30
피부 경계선의 안쪽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이며, 그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니다.' 피부경계선 밖에 있는 것들 중에도 '나의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나'는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나의' 차, '나의' 직업, '나의' 가족을 인식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피부 안쪽에 있는 것들과는 사뭇 다르게 취급된다. 따라서 피부경계선은 가장 기본적으로 통용되고 수용되고 있는 '나/나 아님'의 경계 중 하나이다.

P.31
'심리학'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단어 자체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이지 '몸'이 아니라는 편견을 보여준다. 성 프란체스코조차 자신의 몸을 "불쌍한 나귀형제"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나귀나 노새를 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제 몸의 '어딘가에 올라타'있는 듯 느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P.33~34
이처럼 정신영역 중에서도 일부(페르소나)하고만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자연히 그는 '내가 아닌' 그 나머지 영역은 실제로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두려운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또는 그는 스스로 원치 않는 그 영역을 의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시도로써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 하려든다. 많든 적든,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전체가 아니라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것이 또하나의 보편적인 경계선이다.

P.35
궁극의 수준에선 '나/나 아님'의 경계 자체가 사라져서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P.37
이제 그는 자기 정신의 일부. 즉 우리가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것하고만 자신을 동일시한다
  • 이말이 정말공감이 간다. 그간 나로 알았던 것이 페르소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건 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38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영혼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영혼의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경계는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나아님'으로 여기게 될지를 결정짓는다. 따라서 스펙트럼의 각 수준에 따라 세계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 소외되어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P.39
경계선은 곧 전선이며, 각 수준마다 그 적이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증상들'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펙트럼의 수준들이 서로 다른 특징, 다른 증상, 다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의식에 효과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사성은 오직 그것뿐이다.

P.40
정신분석과 종래의 심리치료 기법들 대부분은 의식과 무의식적 측면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열을 치료하여 환자로 하여금 '마음전체'와 만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치료법들은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재통합시켜서 강하고 건전한 에고, 말하잠녀 정확하고 받아들일 만한 자아상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둔다.

P.40~41
인본주의적 치료의 대부분은 그 목표가 대개 이 지점을 넘어서 '에고'와 '신체'사이의 분열을 치료하는데 있다. 즉 정신과 육체를 재통합시켜서 전 유기체를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제3세력이라고 부르는 인본주의심리학_나머지 두 세력은 정신분석과 행동주의이다. _을 '인간 잠재력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음이나 에고로 부터 심신일여의 전유기체로 정체성을 확장시킬 경우, 유기체 전체의 엄청난 잠재력이 해방되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좀더 깊이 내려가면 선불교나 베단타 힌두교 등이 있다. 이들은 '유기체'와 '외부환경'간의 분리를 치료해서 온 우주와의 정체성, 즉 지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전부 합일의식 수준을 목표로 한다.

P.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P.44
우리는 한계와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지금 이 순간,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자각을 탐구할 것이다.(중략)
합일의식만이 진실로 우리가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유일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런 하강은 실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P.45
논리학은 진실대 허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인식론은 외관 대 실재에, 존재론은 존재 대 비존재에 관심을 두고 있다.

P.4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극의 세계에 대하여 자연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연은 진실한 개구리와 거짓 개구리를 키우지 않을뿐더러, 도덕적인 나무와 부도덕적인 나무, 옳은 바다와 잘못된 바다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윤리적인 산과 비윤리적인 산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름다운 種종과 보기 흉한 종 같은 것도 없다. 적어도 대자연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은 온갖 종류의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즐기고 있다. "자연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옳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47
늙은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해서 공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숲으로 들어가서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히 앉아 황혼을 바라본다. 그러다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마지막으로 잠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죽어 가는 빛에 대항하여 사납게 분노하세요.
자연계에도 고통과 쾌락은 있지만, 그런 것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개는 아프면 낑낑거리지만, 아프지 않으면 아주 걱정도 하지 않는다. 개는 미래의 고통에 대해 염려하거나 과거의 고통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P.49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어떤 관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느낀 개념과 진실이 아니라고 느낀 개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디에 어떻게 경계를 그을 것인지, 그런 다음엔 경계를 지은 측면들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배우는 일이다. 사법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회 규칙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우리 편과 적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윤리학을 배운다는 것은 선과 악을 드러내는 경계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다. 서양의학에 종사한다는 것은 질병과 건강 사이에 확신을 갖고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P.51
말이란 양날의 칼이며,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브는 언어의 마술로 똑같이 되갚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P.52
아담이 배운 것은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는 실제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사실은, 우리들 역시 경계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갈등과 대립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다.

P.53
천국은 모든 대극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한 쌍의 대립 중 좋은 쪽만을 전부 모아놓은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 지옥은 고통, 고뇌, 불안, 질병 등등 모든 부정적인 쪽을 모아놓은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P.54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불만은 훨씬 극심해진다.

P.55~56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는 단지 '한 사건의 양극', 즉 단일한 거래행위의 양끝에 자니지 않는다. 거래의 양쪽 끝이 '다르긴'하지만, 그 둘은 단일한 사건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중략)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와 아니오 사시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과 악은 그 거리가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나도 두려워해야만 할까?
이 무슨 난센스인가!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하며
길고 짦음은 상대를 드러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대며,
앞면과 뒷면은 서로 따라다닌다.
장자는 좀더 다듬어 이렇게 설명한다.

고로, 옮음과 한 짝인 그름이 없는 옮음을 말하거나, 선정(善政)의 짝인 악정(惡政) 없는 선정만을 말하는 것은 우주의 위대한 원리를 모르며 뭇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땅의 존재 없이 하늘의 존재를 말하거나, 양 없는 음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말을 되풀이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거나 무뢰한임이 틀림없으리라.

P.58
우리가 흔히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주체와 객체와 같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실제로는 단일한 진동, 단일한 파도의 마루(trough)와 골(frest)에 해당한다. 하나의 파도는 그 자체로 단일한 사건이지만 마루와 골, 최고점과 최저점이라는 대극을 통해 섬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실재는 골과 마루 중 어느 한 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그 둘의 통일 속에서만 발견된다. (골은 없고 마루만 있는 파도를 상상해보라)골 없는 마루, 최고점 없는 최저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골과 마루_실로 모든 대립_는 그 근저에 있는 '하나의 현상'의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이다.

P.59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은 골 없는 마루, 파는 자 없는 사는 자, 오른쪽 없는 왼쪽, 출구 없는 입구만의 세계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P.63
문제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자연의 실제 영토를 놓고 경계가 완비된 관습적인 지도를 만들어낸 다음, 그 둘을 철저하게 혼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코르지브스키와 일반 의미론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단어, 상징, 기호, 사고, 관념 등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실재의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기'때문이다. '물'이라는 단어가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지도와 언어가 진정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P.64
양극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줄의 양끝을 서로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무줄이 끊어질 때까지 점점 더 세게 잡아당기는 일일 뿐이다.
해방이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극'으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 유념하도록 하자.

P.65
얻고자 함 없이 그저 스스로 오는 것에 만족하고,
양극을 초월하여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자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
그는 행위 속에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갈망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
그를 일컬어, 영원히 자유롭다고 한다.
양극을 초월한 자는
갈등에서 쉽게 풀려나기 때문이다.

P.66
가장 오래된 불경 중 하나인 <능가경>에서는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서롤 별개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실재는 양극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모든 전승의 주장은 '실재는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실재는 둘이 아니다'란 말은 곧 '실재는 무경계다'란 의미이다.
'모든 대극이 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진보를 향한 우리의 충동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운이 따른다면 아마도 진보의 충동은 멈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담장 너머 잔디가 더 푸르다는 환상으로써 무성해진 괴이한 불만도 멈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점만큼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의학과 농업과 기술 분야의 발전이 멈추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복이 진보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P.67
양극은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 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P.69
궁극의 형이상학적 비밀을 감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 즉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P.71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셀' 수 있었다. 이름 짓기가 마술처럼 보였다면, 계산은 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름이 사물을 마술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면 수는 사물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렌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의 오렌지가 되는데, 사과 역시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의 사과가 된다. 둘이라는 수는 두 개로 된 모든 집단에 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어떤 의미에선 개별적으로 사물의 특성을 초월한 것임이 틀림없다. 추상적인 수에 의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은 첫 번째 유형의 경계, 즉 이름 짓기, 분류 하기, 식별하기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는 이럼 힘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경계였다.

P.75
경계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며, 그 칼로 잘라낸 자연의 열매는 필연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P.78
'궁극적 실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완전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라 불리며, 그것은 고전 물리학을 내리친 마지막 치명타였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것을 "딱딱한 틀의 붕괴"라고 불렀다. 낡은 경계들이 붕괴된 것이다.

P.80
경계란 실재를 느끼고 만지고 측정해낸 결과물이 아니라, 실재를 지도로 그려내고 편집하는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이지

P.81
천의무봉 상태에 관해 테이야르 드 샤르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인 실재를 바라볼 때, 우주의 소재는 마치 일종의 거대한 원자처럼 진정으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보다 강력해진 방법을 사용해서 물질 내부로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갈수록, 물질의 각 부분들의 상호의존성을 발견하고 우리는 점점 더 당황하게 된다. 상호 의존하는 이 연결망은 모드 모서리를 닳아 헤지게 하지 않고는, 그 어느 한 부분도 조각내고 고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P.83
동양인들이 한 번도 경계라를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계가 그들의 머릿속을 독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멀리 동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 지도 밑에 잠복해 있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의 길, 도, 법만이 있었다.

P.84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한다. 이런 분별(경계들)의 실체 없음을 아는 것이 올바른 지식이다. 그러기에 현자는 이름과 모양을 실재와 혼동하는 일이 없다. 이름과 겉모양을 버리고, 모든 분별이 사라질 때, 그곳에 남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다. 진여('眞如)라 불리는 그 본성에 관해서는 어떤 예측도 불가능하다.(중략)
사물을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사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와 '사물화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 위해 던진 경계라는 그물에 붙인 두 개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실재는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실체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뒤에 무라는 순수한 진공, 분별할 수 없는 일원성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P.85
세계를 경계의 공으로 볼 경우, 모든 사물과 사건이 _모든 대립과 마찬가지로_ 상호의존적이며 상호 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핵심이다. 즐거움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고, 선은 악과, 삶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그것이 아닌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P.86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일 경우, 모든 것은 못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실제로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발명해 낼 뿐이라는 뜻이다. 분리된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발명해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신의 발명품을 실재 자체로 오해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현실세계가 미치 조각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처럼 보이게 되고, 원초적인 소외감이 자각 자체에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P.89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다.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 자각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무경계 자각이나 합일의식을 올바로 논하는 것은 물론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논의의 매개체인 우리의 언어 자체가 '경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단어와 상징 그리고 사고 자체는 실제로 경계 이외의 무엇이 아니다.

P.90
우리가 늙어 추억만을 간직한 채 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지막으로 포기하게 될바로 그것이다. 곧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P.91
최초의 근원적 경계란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근원적 경계의 안쪽에는 주체,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보는 자인 '나'가 있고, 그 반대쪽에는 외부 대상의 세계, 나로부터 분리된 낯선 환경, 즉 '나 아닌 것'이 존재한다.

P.93
최초의 경계를 깨부수려고 애쓰는 것은 신기루 한가운데 서서 그것을 몰아내려고 사납게 팔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런 행동은 대단한 흥분을 자아낼지는 몰라도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요가, 정신집중, 기도, 의식, 찬송, 단식과 같은 꽤 공이 드는 활동을 통해 최고의 경계를 파괴하려는 시도조차도 실은 파괴하려고 하는 바로 그 환상을 더욱 강화시키고 영속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캄브라이의 대주교 페넬롱은 "'환상을 피하려는 시도'만큼 위험한 환상도 없다"고 말했다.

P.94
나 자신을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을 때, 거기에서 찾음의 목적은 달성된다. 또한 찾음 자체도 끝난다.

P.98
우리가 '생각하는 자'라고 믿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현재 생각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P.99
현자들이 '나'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그것을 찾아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나'를 찾으려 할 경우,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P.99~100
앨런 왓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경험만이 존재한다. 경험을 경험하는 누군가란 없다. 우리는 듣기를 듣거나, 보기를 보거나, 냄새 맡기를 냄새 맡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낌을 느끼거나, 생각을 생각하거나, 감각을 감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현재 기분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 말은 '나'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고, '느낌'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분리된 것이 있어서, 그 둘을 하나로 모을 경우 이 '나'가 좋은 기분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느낌 이외엔 어떤 느낌도 없다. 그때 당시 어떤 느낌이 현존하든 그것이 곧 '나'이다. 현재 느낌과 동떨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 '나'와 동떨어진 어떤 느낌을 찾아낸 사람은 세상에 없다. 결국 이 말은 단지 그 둘이 똑같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P.100
'나'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새를 보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책상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책상을 만지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천둥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천둥소리를 듣는 경험 그것이다. '나'라고 부르는 내적 감각과 '세계'라 부르는 외적 감각은 하나의 동일한 감각이다. 내적 주체와 외적 객체는 하나의 느낌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이런 사실은 '느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유일한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깨닫고 있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의 의식상태가 곧 합일의식이라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미'우주이며, '이미'현재 경험의 총체이다. 당신의 현재 상태는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합일의식이 주된 장애물로 보이는 '분리된 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101
'분리된 나'란 없다는 통찰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신비가와 현자들이 단언해온 것이며, '영원의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런 통찰을 예증할 수 있는 수많은 인용문이 있지만 부처의 유명한 일설은 진정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통이 있을 뿐, 고통 받는 자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이런 이해는, 실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해준다고 보편적으로 전해진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곧 우주'임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우주의 밖엔 충돌을 일으킬 아무것도 없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이해는 무어보다 '고통 받을 수 있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곧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같다는 말이다. 웨이 우 웨이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머리속으로는 이해가는데 참 말이 안나온다

P.105
합일의식을 논리적, 형식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신비가는 대단히 역설적이거나 모순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 문제는 어떤 언어구조든, 포크로 바닷물을 퍼올릴 수 없듯이, 합일의식의 본질을 포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P.107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를 이(색깔 없음)라 한다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이를 희(소리 없음)라 한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붙들 수 없으니
이를 미(모양 없음)라 한다.


P.108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인식하는 자', 곧 '진정한 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몸, 마음, 성격 등을 '진정한 나'라고 상상하면서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저 환상에 불과한 그것들을 방어하고, 보호하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면서 전 생애를 소비해버린다.

P.109
나의 마음,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욕망들....이것들은 나무, 별, 구름, 산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것들을 객체로서 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탐구를 계속 진행해가면, '나'라고 하는 것이 점차 투명해지면서 어떤 의미에선 내가 고립되고 피부로 둘러싸인 이 유기체를 훨씬 넘어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는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P.110
'진정한 나'는 안에도 밖에도 살고 있지 않다. 주체와 객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신비가들은 실재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만 외관상으로만 모순되는 듯이 보일 뿐이다.

P.110~111
우리는 실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결렬되고 분리 독립된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주 내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그것 이외의 모든 사물과 상호의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여기에서도 우리에게 독립된 개별적 실체라는 환상을 제공하는 것은 상징적 지도와 경계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계가 어떤 분리된 대상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세계가 무경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P.111
우리는 무경계인 실재의 발견이 곧 '합일의식'그것임을 알았다. 이 말은 합일의식 속에서 무경계의 진정한 실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식이 곧 진정한 무경계영토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실재는 무경계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을 인용해보자. "대지 위에 자신을 던져 어머니인 대지 위에 몸을 눕히면, 당신이 그녀와 하나이고 그녀가 당신과 하나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당신은 대지보다도 수천 배나 확고한 불사의 존재이다. 내일 그녀가 당신을 집어삼킬 만큼이나 확실히 그녀는 새로운 당신을 낳을 것이고, 당신에게 한번 더 새로운 노력과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단지 '어느 날'말이 아니라 지금, 오늘, 그리고 매일 그럴 것이다. '한 번'만이 아니라 수천 번이나 어머니 대지는 당신을 집어삼키고 또한 당신을 낳을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P.113
성 디오지시우스는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과 영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모든 신비통찰의 난제에 손을 댔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깨달은 현자들이 합일의식은 시간의 산물, 즉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즉 '무시간적인'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일의식은 시작도 탄생도 알지 못하며, 종말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가 우리를 교묘히 피해 다니도록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영원성의 본질을 철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P.114
영원한 순간이란 과거도 미래도, 이전도 이후도, 어제도 내일도,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무시간적인 순간이다. 합일의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 순간'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서 산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오염'만큼 신성한 빛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서 빛을 가로막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만큼 하나님(합일의식)을 가로막는 장해도 없다. 꼭 시간 그 자체뿐만 아니라 덧없음, 덧없어 보이는 대상들, 덧없다는 환상 등등 시간으로부터 기인한 흔적과 냄새도 모두 여기에 포한된다.

P.115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순간은 곧 무지간의 순간이며, 무시간의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이전도 이후도 모르며, 어제도 내일도 모르는 영원한 순간이다. 따라서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P.116
끝없이 이어지는 '영속적인 시간'이란 개념은 기형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런 영속성을 이해하거나 포착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지금, 바로 이 '무시간의 순간'은 당신 자신의 현재 경험만큼이나 단순하고 접근 가능한 것이다. 영원과 현재 경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영원한 생명은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원이란 현재의 본질이자 무시간적 순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비가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 즉 '과거와 미래라는 양극 너머'로 이끌어주는 위대한 해방은 지금 외에는 언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 성자인 코사드는 이렇게 말한다. "오, 목마른 자들이여! 생명수가 샘솟는 샘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그 샘은 지금 이순간 그대 곁에서 샘솟고 있다...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이름의 현현이요, 하늘나라의 임장이다. " 이런 까닭에 이슬람 신비가인 루미는 "수피는 이 순간의 자녀"라고 말한다.

P.117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기억과 기대라는 공상의 안개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로써 현존하고 있는 근원적 실재를 박탈하고는 그것을 '허울 좋은 현재' 또는 '빈약한 현재'. 즉 고작 1~2초 정도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영원한 현존의 창백한 그림자로 전락시킨다.

P.118~119
현재 그 자체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도 없다. 그곳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를 끼고 사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면밀히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식으로든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의 불안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P.119
에머슨이 멋지게 지적한 것처럼, 이 깨어남은 우리가 현재에 현존하게 될 때만 일어난다.

나의 창 아래 핀 장미들은 이전의 장미가 더 아름다운 장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이며, 신과 더불어 오늘 존재한다. 그들에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단순히 장미만이 존재할 뿐이다. 장미는 존재의 매 순간 완전하다...그러나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고 과거를 비탄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무관심한 채 습관적으로 눈을 뒤로 돌리거나 미래를 미리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다. 인간은 시간 너무 현재 속의 자연과 함께 살 때까지 행복할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리라.

P.121
신비가들은 환상을 깨부수라고 하지 않고, 다만 환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만 권고하는 것이다. 만일 실제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부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P.122
모든 소리가 오직 현재의 소리인 것과 똑같이, 모든 맛은 오직 현재의 맛이며, 모든 냄새도 현재의 냄새이고, 모든 광경 역시 현재의 광경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자각 속에서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즉,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초도 안 될 만큼 아주 짧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쉼 없이 변화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직적접인 자각은 모두 무시간적인 자각이다.

P.126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되어 모든 면에서 제한된다. 현재는 한정되고, 담으로 둘러싸이고, 제한된다. 열린 순간이 아니라 짓눌린 순간, 압착된 순간, 즉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덧없는 순간이 된다. 과거와 미래가 너무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샌드위치 속의 고기인 현재의 순간은 단지 얇은 종잇 조각처럼 축소되고 우리의 실재는 이내 내용물 없는 두 조각의 빵이 되어 버린다.

P.127
이 순간에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도 없다. 고로, 종말을 초래할 탄생과 죽음이란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그것은 이 순간에 있지만 이 순간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여기엔 영원한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P.128
합일의식은 '진정한 나'에는 경계가 없다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거울이 대상을 포용하는 것처럼 모든 우주를 포용한다.

P.131
자아를 진정한 '나'로 정의하는 정통심리학에서는 합일의식을 정상성의 상실로, 의식의 착란 또는 변성된 의식 상태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일의식을 '자연스러운 나', 유일한 '진정한 나'로 본다면 자아는 합일의식의 부자연스러운 억제나 제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스펙트럼의 각 수준은 '진정한 나', 즉 합일의식과 무경계 자각이 점진적으로 속박, 제약 또는 수축되어가는 단계들로 이해될 수 있다.(중략)
자연 속에는 어떤 장벽도 담장도 없다.

P.132
근원적 경계는 보는 자와 보여진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이다.

P.138
모든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고 모든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다

P.149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P.150
경계로 이루어진 삶은 투쟁의 연속이며, 공포 불안 고통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으로 점철된다.

P.151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주술사, 사제, 현자, 신비가,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고통을 넘어선 삶을 살기 이해 고통을 바르게 살아내는 최선의 길을 제시해왔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신들의 통찰을 나눠줬는데, 그것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그 고통을 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P.152
그들은 인간 각성의 '다른 수준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영혼의사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는 그들 모두가 '동일한'의식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적어도 핵심사항에서는, 서로 명백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그 모순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P.154
경계가 생겨날 때마다 자신의 일부분은 외부로 '투사'된다.

P.155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P.164~165
가해자는 '피해자가' 더럽고, 어리석고, 변태적인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사실일 수돟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글일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덮어쒸운 그 혐오스러운 특징을, 알든 모르든 자기 자신도 소지하고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난리를 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끔찍이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우리의 일면을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다.(중략)
환경(사람 또는 사물들)속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단지 '정보'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대개 우리 자신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성가시고, 당황스럽고, 혐오스러운 물건들, 또는 역으로 매료되고, 항거할 수 없고,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들, 이런 것들이 흔한 그림자의 반영이다. 옛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P.169
페르소나 수준에서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지금까지 혐오해왔던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증상과 접촉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마음을 크게 열고 증상을 수용해야 한다. 이 말은 우울, 불안, 소외감, 권태로움, 상처, 또는 당혹감 등을 스스로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전엔 온갖 방식으로 저항해왔던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P.171
'변환'이 치료의 열쇠이다.

P.191
눈 주위에서 긴장감을 느낀다면, 울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관자놀이에서 긴장과 통증을 느낀다면, 아마도 소리 지르거나 고함 치거나 또는 웃는 것을 저지하려 애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턱을 악물고 있을 수도 있다. 어깨와 목의 긴장은 억제된 분노나 적개심을 나타내며, 횡격막의 긴장은 느낀 그대로의 '알아차림'이 표출되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시도로 호흡을 만성적으로 제한하고 참고 있음을 나타낸다(자기억제 시에는 언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흡을 멈춘다)아랫배와 골반 주변의 긴장은 흔히 성욕에 대한 모든 자각이 차단됐다는 신호이다. 즉, 생기 있는 호흡과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기 위해 그 주변부위를 경직시키고 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다리에서의 느낌도 대부분 차단된다. 다리의 긴장, 뻣뻣함 또는 힘이 없는 느낌은 일반적으로 확고함, 안정감, 확실성 또는 전반적인 균형의 결여를 나타낸다.

P.194
자신의 팔을 어떻게 들어올릴 수 있는지를 남에게 묻지 않듯이, 어떻게 하면 꼬집기를 멈출 수 있는지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양쪽 다 수의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P.199
켄타우로스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정신-신체적 유기체 내부 전체에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이미 순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에너지란 영원한 기쁨이며, 그것은 신체에서 온다"고 블레이크는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외적 보상이나 약속에 의존하지 않는 기쁨이기도 한다. 이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이 현재 순간에도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자아가 시간 속에 살면서 이익을 얻고자 미래로 목을 길게 빼고 마음속으로 과거의 손실을 한탄하는 데 비해, 켄타우로스는 언제나 현재의 흐름, 스쳐가는 구체적인 현재, 어제에 매달리거나 내일을 희구하지 않는 살아 있는 현재, 즉 '눙크 플루엔스'속에서 살고 있다. 켄타우로스는 이 순간의 선물에서 충만함을 발견한다. 켄타우로스의 자각이야말로 '미래의 충격'에 사로잡힌 세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P.202
삶 속에서 자아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어느 시점까지 그것은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넘어선 곳에는 그런 종류의 의미를 넘어선 무엇이 있다. 행위는 감소하고 존재가 증가하는 그런 의미 말이다. 커밍스가 말한 것처럼, “존재할 수 있거든, 단지 존재하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원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고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가지 이런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

P.216
우리는 ’모든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인 대상과 탈동일시함으로써, 즉 그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이 초개아적 주시자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실제로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P.218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각색하거나, 손대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순수하게 자각할 뿐이다. 어떤 느낌이나 경향성이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느낌에 대한 증오가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증오에 대한 증오심이 나타나더라도 또 다시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해야 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행위가 나타나든 단지 그것을 주시할 뿐이다. 모든 괴로움의 한 가운데서, 다만 '무선택적 자각'으로 머물러 있어보라.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괴로움도 '전정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이다. 그런 것에 집착하고 있는 한,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반드시 그것들을 조작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나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 할 때. 비로소 자신의 괴로움을 비난하거나, 그것들에 분개하고, 원망하는 일도, 거부하거나 탐닉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을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P.219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P.228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 아는 나, 내면의 나가 아니다. 그것은 지각될 수도, 정의될 수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속박이란 보는 자를 ‘보여질 수 있는’ 것들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은 이런 잘못의 단순한 역전에서부터 시작한다.

P.233
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할 방법은 분명히 없다. 이미 그런 것에 새삼 '도달할' 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따라서 라마나가 시사한 것처럼,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선언한다.

P.235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중생은 그것을 먼 곳에서 찾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유컨대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사람과 같다.

P.238~239
만일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면, 사실 깨달음을 얻을 길은 없다. 깨달음이란 좋은 기분과 같은 특정한 마음상태가 아니다. (좌선 수행 시)그대가 앉을 때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 좌선에 있어서는 바른 마음 상태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바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P.239~240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가르침은, 좌선을 시작할 대, 아무 준비하지 않아도 이미 깨달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본래 불성이 있다면, 우리가 좌선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는 이 수행 이외에 또 다른 수행은 없다.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P.260~261
세계와 나는 두 개의 별개의 체험이 아니라, 단일한 경험으로 되돌아온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파도뿐이며, 그 파도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파도 옮겨타기를 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으면, 더 이상 경험이 우리를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도 없을 뿐만 아니라 끝도 없으며, 앞에도 뒤에도 아무럿도 없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기대로서의 미래 둘 다가 다만 현재의 사실로 보일 때, 이 현재를 가로막는 얇은 판은 붕괴한다. ‘이 순간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들이 ‘이 순간으로’ 녹아들고, 달리 갈 곳 없는 이 순간만이 남는다.

P.261 
억겁아래 나란 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죽어도 달리 갈 곳이란 없도다.
아무 데도 없도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책을 읽고
  • 의식과 인식은 깊어지는 것 같으나 이해가 갔던 부분이 말로 흘러 나오지는 않는다. 큰 맥락에서 경험이 경계를 만든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이 실제의 세계에서는 다수의 경계는 존재한다. 이를 머라 설명해야 할지 어떤 관점에 맞춰서 살아갈지 다소 어려웠다. 나중에 다시 읽어본다면 또 다른 생각이 나를 이끌까 궁금해 진다.


IV. 네이버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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