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뚱냥이
  • 조회 수 127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8년 1월 1일 11시 07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월 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 한기찬 옮김

소담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1845.7.4 걸작의 산실이 된 월든 호숫가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단돈 28불로 지은 오두막, 걸작의 집필실 되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1마일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들어온 내력과 나가는 길을 파악하기 힘든 신비한 호수이다. 18453월 말, 27세의 젊은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호숫가 숲속에서 도끼질을 하기 시작했다. 호수 북쪽 비탈진 언덕에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 서툰 손놀림으로는 도대체 개집 하나 만들어낼 성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로의 손놀림은 부드러워지고 신속해졌다. 5월 초순이 되자 소로는 친지들과 함께 상량(上樑)을 했다. 벽을 붙이고 지붕 올리는 일이 완료되자 소로는 마침내 새로운 집에 입주했다. 74,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19세기의 진정한 자유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22개월 2일 동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그의 작은 오두막을 어떤 거대한 건축물보다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

 

모험은 집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집이라곤 한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는 이가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도끼질하고 톱질하는 것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지출한 건축비는 28달러가 조금 넘은 금액이었다. 당시 하버드대학 기숙사의 1년 방세가 30달러였다니, 1년 방세도안되는 돈으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다. 당시 1달러가 현재의 1달러보다 약 3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때, 오늘날의 돈으로 1천 달러가 되지 않은 돈으로 집을 지은 셈이다.

 

소로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의 노예였고 재산의 노예였고 일의 노예였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여유있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리고 최대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었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견되는 명작 <월든>이다. 물론 소로의 상황은 자발적 고립이라는 점에서 외딴섬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두 작품이 모두 원시적인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로는 <월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잠시라도 한눈 팔게 되면 뒤처지는 현대인에게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든>이 소로가 살았던 때보다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후반, 특히 21세기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연 속에서 홀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토마스 페인,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뼛속까지 혁명적인 인물이다. 페인이 근대 혁명의 출발인 미국의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인 토대를 지원했다면, 간디는 현대 문명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고, 소로는 일과 명예와 돈과 통념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한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주체할 수 없는 끓는 피를 소유하고 있었다. 페인이 정치적 혁명가였다면, 간디는 다분히 종교적인 혁명가였고, 소로는 문학적인 혁명가였다. 소로의 혁명이 은근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문학적이고 개인적인 혁명은 자칫 혁명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소로가 숲속에 혼자서 둥지를 튼 것부터가 혁명과는 도통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통념의 뿌리를 흔드는 혁명이었다. 사회 속에서 부지런히 일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로의 부모는 성격이 서로 정반대였지만 매우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어머니는 재치있고 총명하고 쾌활했다. 그들은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과 학식을 중히 여겼다. 노예제 폐지가 메사추세츠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자 소로의 부모는 자신의 집을 노예폐지론자들의 모임 장소로 빌려주었다. 소로의 부모는 또 산책하면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취미가 자식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헨리의 위로는 누나 헬렌과 형 존이 있었고, 여동생 소피아가 있었다. 헨리는 형과 함께 인디언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들과 사이가 좋으면서도 헨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홀로 엽총이나 낚싯대를 메고 인적 없는 후미진 숲과 강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어린 시절에 월든 호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호수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1833년 열여섯 살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소로의 말에 따르면 그의 대학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그는 나의 육신은 하버드 대학의 일원이었지만, 내 마음과 혼은 소년 시절의 정경으로 멀리 떠나 있었다. 공부하는 데 헌신해야 할 시간들이 내 고향 마을의 숲을 찾아 헤매고 호수와 시내를 탐험하는 데 소비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로는 대학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가 1843년의 어느 편지에서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주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학 시절이 그에게 문필가이자 강사로서의 능력을 부여한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에머슨과의 만남, 그리고 초월주의 운동에 뛰어들다

 

1837년 랠프 왈도 에머슨과의 만남은 소로에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소로의 여동생 소피아가 에머슨의 처형 루시 브라운과 함께 에머슨의 강연을 들었는데, 강연 내용이 오빠가 쓴 글과 같았던 것이다. 이에 소피아가 브라운 부인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고, 그 글이 에머슨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49일 집으로 찾아온 소로를 보는 순간 에머슨은 소로가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로는 본래 매사에 냉담한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뛰어난 지성인 앞에서는 특별히 생기발랄해졌다. 에머슨은 소로의 입에서 사회와 종교에 대한 탁월한 견해,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쏟아져나올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되었고, 약간의 굴곡이 있긴 했지만 소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소로는 생계를 위해 교사 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콩코드의 마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체벌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2주 만에 그만두었다. 형과 함께 사설 학교를 몇 년 운영하지만 형이 몸이 아프게 되자 그것마저 벗어던지고 만다. 소로는 이제 시인이자 박물학자로서 식물표본상자와 쌍안경을 들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이 무렵 소로는 에머슨이 주도하고 있는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운동에 매료되었다.

 

소로는 1837년부터 3년간 에머슨의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 콩코드의 초월주의 그룹이 만드는 잡지 <다이얼>에 시와 산문을 실으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소로는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성격은 초월주의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면모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소로의 기질이기도 했다.

 

소로는 원래가 모험가적 성향이 강했다. 형 존과 함께 카누를 타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탐험한 것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안정된 교사의 길을 접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 것은 모험의 정점이었다.

 

그의 위대한 모험이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뉴욕에서의 작가생활 시도도 실패했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카누 여행 경험을 담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일주일>은 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집필했건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다만 소로에게 안락한 생활이란 일반적인 것과는 판이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불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모험을 통해 인생을 충분히 즐긴 사람이었다.

 

소로는 잘못된 것을 그냥 두지 못했다. 젊은 시절 에머슨과 함께 길을 걷다가 길 옆에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보고 소로는 분개했다. 그는 하느님의 땅은 만인의 소유이므로 울타리 바깥의 쪼가리 땅만을 밟을 수는 없다며 울타리를 넘어가려 했다. 에머슨은 이를 만류하며 사유재산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로는 월든 숲에서 살던 1846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당한 적이 있으며,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로의 근본적인 저항은 <월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로의 저항이 잘못된 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사후에 진가가 확인된 작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일까, 안정된 삶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소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문필활동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로는 측량사 일을 겸해야 했다. 물론 글을 쓰는 일은 버릇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1854<월든>을 출간한 이후로 소로는 어떤 책도 출간하지 않고 오직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는 초월주의에서 벗어나 실천적인 노예제 폐지 운동을 펼쳤다. 1854년에 행한 강연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는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신랄한 고발이었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사이에 몸이 약해졌던 것일까? 1859년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하퍼스페리 마을 습격을 주동했다가 처형당할 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아직 젊은 사람의 몸에 결핵이 찾아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소로와 에머슨의 삶을 함께 정리한 하몬 스미스는 소로의 마지막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렸다. 스미스는 소로가 밀려오는 피로 속에서 생의 최후를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186256, 소로는 여동생 소피아에게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 부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59일 소로의 지인들이 모인 장례식에서 에머슨은 조사를 통해 25년 동안 우정을 나눴던 친구를 회고했다. 에머슨의 이 조사는 소로와 소로의 문학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에머슨은 소로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작가로서의 업적은 적극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에머슨은 자신이 좋아한 소로의 시 <연민(Sympathy)><연기(Smoke)>를 언급했지만, 시인으로서 소로는 자연스러운 서정과 기교가 모자라다고 평했다. 소로의 월든 호숫가 생활을 얘기했지만 작품 <월든>은 지나가는 말로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큰 울림이 있었다. “가장 숭고한 사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짧은 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그곳, 덕이 있는 그곳, 아름다움이 있는 그곳이 바로 그의 영혼의 집입니다.”

 

아아, 최근 부드러운 소년을 알았다

너무나 덕스러운 용모를 지닌 그 소년은

원래 한갓 아름다운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나

마침내 스스로 미의 요새를 지키는 왕좌에 앉았도다

 

고백건대, 나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신하로서의 예를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그러나 지금 알게 되었느니, 그 동안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다면, 이제라도 더욱더 사랑하리

 

하지만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존경의 엄숙함이 우리 사이를 더욱더 멀리 갈라놓으니

우리 서로 손이 닿지 않네

첫 만남의 순간보다 더 낯설기만 하네

 

영원은 우연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로되

분명 나 홀로 외로이 길을 가야 하네

우리 한때 만난 슬픈 기억 속에서

축복이 영영 떠났음을 알고

-소로의 시 <연민> 전문(윤규상 역)

 

겉으로 보면 소로의 삶은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에머슨의 조사가 말해주듯, 그의 시세계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가장 평판이 좋았던 <월든>마저도 각광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시민의 불복종>19세기 말에야 널리 읽혔고 간디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소로가 그만큼 뼛속까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인 정신은 이해받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에도 제대로 이해받았다고 볼 수 없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가 지적하듯이 소로는 여전히 자연예찬론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선구자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는 때로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고 글을 썼다. 필자는 소로를 앞에서 말했던 대로 문학적인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혁명가나 종교적 혁명가가 주로 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꿈꾼다면, 문학적(예술적) 혁명가는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혹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네이버]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월든>의 작가 (인물세계사)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소로의 첫 번째 이야기 삶의 경제학

 

P14. 사람들 대부분은 절망 속에서 말없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체념이라는 것은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절망을 일컫는 것이다.

 

P16. “나의 아들아, 지금껏 네가 그 어떤 실패를 겪었든 간에 그 일로 괴로워하지 말라.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이 있다 한들 누가 네 탓이라고 하겠느냐?

 

P31. 새옷을 입는 일보다는 새옷이 필요한 일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새롭지 않은데 어떻게 새옷이 잘 맞을 수 있겠는가?

 

P31.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낡은 옷을 입고 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가지고 할 무엇이 아니라, ‘해야 할 무엇’, 또는 되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해지고 더러운 낡은 옷이라 해도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헌옷을 입고도 새 사람이 된 듯이 느껴질 때까지는, 또 헌옷을 새 술을 담을 낡은 부대처럼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새옷을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P39. 이 불필요한 재산을 보유하는 데서 얻는 이점은 미래에 대비한 저축에 불과한데, 개인에 관한 한 그것은 주로 자신의 장례비로 지출될 뿐이다.

싸들고 갈 일은 없는데, 왜 버는 돈을 쓰고 싶은데로, 못 쓰고 저축을 할까? 장례도 있지만 일단 사람답게 살려고?

 

P42. 마침내 사람들 대다수가 모든 편의시설을 갖춘 현대식 주택을 갖거나 빌릴 수 있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문명은 주택을 개선시켰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을 그와 같은 정도로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문명으로 주택을 개선시켰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을 그와 같은 정도로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문명으로 궁전을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귀족과 왕족을 만들기는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P54. 사람이 자기 집을 지을 때도 새가 자기 둥지를 만드는 데서 볼 수 있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스스로 자기 가족을 위해 소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면 새들이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할 때 늘 그렇듯 시적능력이 개발되지 않을까?

나는 왜 꼭 내집을 지어서 살고 싶은 것인가? 막연한 주택에 대한 동경? 잘 가꾸지도 못하고 게으른 내가 왜 손수 집을 지으려 하지? 나도 내가 집을 지으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P72.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적한 날 평범한 점심때 삶은 풋옥수수에 소금을 쳐서 넉넉히 먹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랴? 내 식단이 조금이나마 다양했던 것도 건강 때문이 아니라 식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종종 굶는 것은 꼭 필요한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치스러운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 물만 마셨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부인도 있다.

 

P82. 내가 무엇보다 선호하는 일은 특히 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또 험하게 살더라고 나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은 값비싼 양탄자나 좋은 가구, 맛있는 요리, 그리스 식이나 고딕 양식의 주택을 손에 넣기 위한 돈을 버는 데 내 시간을 써버릴 생각이 없었다. 아무 장애 없이 그런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그 다음 어떻게 써야 할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들을 추구하는 건 그 사람들에게 맡길 생각이다.

 

P83.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다.

흐음지금 이 시대에 맞는 이야기일까?

 

P84.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화음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든 똑 같은 신념으로 협력할 것이다. 반면 신념이 없는 사람은 어떤 무리에 속하든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것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든 아니든 협력이란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다.

 

 

소로의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살았던 장소와 삶의 목적

 

P106. 탕왕의 욕조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네 자신을 새롭게 하되 그 일을 영원토록 반복하라.”

매일 매일 변화하고 성장하라는

 

P106. 나는 그글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아침은 영웅의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른 새벽, 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앉아 있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길로 집 안을 돌아다니는 희미한 모깃소리에도 저 우렇찬 트럼펫 소리만큼이나 깊이 감동받는다.

 

P107. 매일매일이 자신이 지금껏 더렵혀 온 시간보다 더 이르고 더 성스러우며 더 장밋빛을 띤 시간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인생에 절망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P107. 나는 지금껏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P108.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P109. 단순화하고 단순화하라. 하루 세끼 식사를 할 게 아니라 필요할 때 한 끼만 먹도록 하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라. 나머지 일들 역시 같은 비율로 줄이라.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소국들로 구성되고 끊임없이 국경이 바뀌어 결국에는 독일인조차 현재의 국경이 어딘지 말할 수 없게 된 저 독일연맹과 흡사하다.

더 단순화하게내 삶에 더 줄여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내 삶에 모든 것을 다이어트 시켜서 가벼워지고 싶다. 일단 다시 내 몸부터, 그리고 내 가슴과 머리속에 있는 근심부터 줄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P117. 시간이란 내가 낚시하는 냇물일 뿐이다. 나는 그 물을 마시지만, 물을 마시는 동안 모래가 깔린 바닥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얕은지를 알게 된다. 시간의 얕은 흐름은 이내 흘러가고 만다. 그러나 영원은 그대로 남는다. 나는 좀더 깊은 물을 마시고 싶다. 바닥에 조약돌처럼 볕들이 깔린 하늘에서 낚시를 하고 싶은 것이다.

 

소로의 세 번째 이야기 독서

 

소로의 네 번째 이야기 삶의 소리

 

P134. 아무리 까다롭게 고른 고전이라 할지라도 책에만 갇혀 특정 언어로 된 글만 읽으면 자칫 모든 사물과 사건이 비유 없이 말을 하며, 그것만으로도 풍부하고 표준어인 언어를 잊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P134. 당신은 단순한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당신의 운명을 읽고 눈앞에 있는 것을 보라. 그런 다음 미래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으라.

삶에 적용하라는그래서 혼자만의 연구기간에는 방법을 좀 바꿔봐야겠다.

 

P150. 올빼미 역시 세레나데를 들려 주었다. 가까이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자연이 내는 소리 가운데 가장 울적한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연이 인간이 죽어갈 때 내는 신음소리를 똑같이 흉내내어 자신의 합창대 속에 영구히 보존하기라도 한 것 같다.

 

 

P154. 울타리도 없이 자연이 바로 문턱까지 다가와 았을 뿐, 낮은 풀밭아래로는 젊은 숲이 한창 자라고 있었고 야생 옻나무와 검은딸기 덩굴이 지하광 속까지 자랐다.

 

 

소로의 다섯 번째 이야기 고독

 

P156. 지금은 온몸이 하나의 감각으로 바뀌고 땀구멍 하나하나로 기쁨을 숨쉬는 감미로운 저녁이다.

엄청난 표현

 

P156. 이제 주위는 어두워졌으나 바람은 여전히 불어 숲속에서 아우성치고 물결은 밀려들며 어떤 동물들은 노랫소리로 다른 동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휴식은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다.

이런 눈을 나도 가질 수 있겠지?

 

P161.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곳에서 외로우시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과 밤이면 사람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실 테죠?” 하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 속의 점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무지 폭을 알 길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여져 있는 두 주민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내가 외롭다고 느껴야 하오? 우리 행성이 은하수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나에게도 가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지그리고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괜찮아요? 그럼 괜찮지~ 괜찮아요?라고 묻는 당신은 정말 괜찮나요?

 

P163. 사념에 사로잡힘으로써 건전한 의미에서 우리는 미칠 수가 있다. 정신의 의식적인 노력으로써 행위와 행위의 결과에서 초연할 수가 있으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급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쳐가게 된다.

 

P163. 나는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일이 유익함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고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좋아하는 감정도 식게 마련이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고독만큼 상대하기 좋은 친구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방에 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일 때 훨씬 더 외로움을 느낀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늘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독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소로의 여섯 번째 이야기 손님들

 

P171. 너무 작은 집에 살면서 이따금 느꼈던 한 가지 불편이 있다면, 손님과 내가 거창한 말로 웅대한 사상을 주고받을 때 두 사람이 거기에 걸맞는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P173. 나는 스펜서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가꺼이 내 오두막의 좌우명으로 삼으려 한다. 그것은 내 집을 찾아온 어떤 손님이 명함 대신 노란 호두나무 잎에다 적은 것이다.

그들이 이르러 그 작은 집을 채우지만

원래 없었던 환대를 새삼 바라지도 않는다네.

휴식이 그들의 잔치이며 모든 일은 마음대로,

가장 고귀한 정신만이 가장 흡족해 하리니.”

 

 

소로의 일곱 번째 이야기 콩밭

 

P199. 흙은, 특히 신선한 흙은, 그 안에 어떤 자력을 품고 있어서 염분과 힘 또는 효능을 끌어당기는데, 그것이 흙에 생명력을 주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흙을 갈아엎는 그 모든 수고의 이치인 것이다. 인분이나 다른 더러운 혼합물은 이 개량식 농법의 대안일 뿐이다.

 

P203. 우리는 자칫하면 태양이 우리의 경작지와 초원과 삼림을 아무 차별 없이 내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것들 모두가 햇빛을 똑같이 반사하고 흡수하며, 우리의 경작지는 태양이 매일같이 운행하면서 내려다보는 저 찬란한 풍경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태양의 빛과 열을 그것에 상응하는 신뢰와 넉넉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로의 여덟 번째 이야기 마을

 

소로의 아홉 번째 이야기 호수

 

P229. 서쪽으로 호수를 볼 때는 진짜 태양과 그것의 반사체 때문에 너무도 눈부신 나머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개의 태양은 똑 같은 밝기로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태양사이로 호수 수면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그것이 문자 그대로 거울처럼 매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수면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흩어져 있는 소금쟁이들이 햇살 속을 움직일 때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섬세한 섬광이 일기도 하고, 또 어쩌면 오리 한 마리가 깃을 다듬거나, 또는 방금 말했듯이 제바들이 수면을 건드리기라도 할 것처럼 낮게 날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도 참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떻게 눈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을까?

 

P243. 이 호수들은 너무나 순수하여 시장가치를 매길 수가 없다. 여기에는 아무런 오물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인생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우며 우리의 인격에 비해면 그 얼마나 투명한가! 인간은 결코 이들 호수들로부터 비열함을 배울 수 없다.

 

P243. 자연은 그들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번성한다. 그런 자연을 놔두고 천국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이 지상을 모욕하는 일이다.

 

 

소로의 열 번째 이야기 베이커 농장

 

P255. 사람들은 밤이면 순순히 집 안의 온갖 소음이 들리는 바로 이웃한 밭이나 거리에서 집으로돌아온다. 그들의 삶은 수척해진다. 왜냐하면 그 삶은 제가 내쉰 숨을 다시 들이쉬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때면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매일 걷는 걸음보다 더 멀리까지 늘어난다. 우리는 먼 곳에서 귀가해야 한다. 모험에서, 위험에서, 매일매일의 발견에서 새로운 경험과 성격을 형성하여.

 

 

소로의 열한 번째의 이야기 더 높은 법칙

 

P266. 정녕 취할 생각이라면 자신이 숨쉬는 공기에 취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거친 노동을 장시간 계속하는 것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반대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고 나면 거칠게 먹고 마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267. 공자는 말하기를, “마음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P267.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식욕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질이나 양이 아니라 감각적인 맛을 탐닉하는 것이 문제다. 요컨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인 생명을 지탱시키거나 정신적인 생명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를 위한 음식이 될 때가 문제인 것이다.

 

소로의 열두 번째 이야기 동물 친구들

 

소로의 열세 번째 이야기 따뜻한 집

 

P297. 무릇 인간이 거하는 집이란 것은 머리 위에 어둠이 서릴 정도로, 그래서 밤이면 그림자들이 서까래에서 어른거릴 정도로 천장이 높아야 하는 게 아닐까?

 

P309. 내 친구들 중에는 내가 일부러 얼어죽을 작정으로 숲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동물은 조용한 장소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유지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불을 발견한 인간은 널찍한 방에 얼마간의 공기를 가두고 자신의 체온을 이용하지 않고도 그 공기를 데워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데, 그 안에서는 성가신 옷을 잔뜩 입지 않고도 돌아다니며 한겨울에도 어느만큼은 여름처럼 지낼 수도 있고, 창이 있는 덕분에 햇빛을 방 안까지 들이고 등잔으로 낮의 길이를 늘이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이것을 포기할 이유가 있나? 그래야만 금욕적인 삶인가? 자연주의는 나랑 안맞는듯

 

P310.

눈부신 불꽃이여, 그대의 저 값진 삶을 묘사해 주는

따사로운 동정심을 결코 내게 거절하지 말지어다.

나의 희망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토록 밝게 타올랐겠는가?

나의 운명이 아니라면 깊은 밤 무엇이 그토록 굴러 떨어졌겠는가?

모든 이로부터 그토록 환영과 사랑을 받았던 그대가.

그토록 우둔한 우리네 삶의 평범한 빛에 비하면

그대의 존재가 너무나 유별났던가?

그대의 눈부신 불꽃이 마음에 맞았던 우리의 영혼과

신비로운 대화를, 어떠면 너무도 대담한 비밀을 나누었을까?

이제 우리는 안전하고 강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흐릿한 그림자가 스치지 않는 난롯가에 앉아 있기에

환호하지도 않고 슬퍼할 것도 없이

오직 불에 두 발과 손을 녹일 뿐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네.

아담하고 실리적인 덩치 옆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앉아서 잠들어 버릴 수도 있네,

어두운 과거에서 걸어나와 저 옛날 흔들리는 장작불

불가에서 우리와 함께 이야기했던 유령을 겁내지 않네.

 

소로의 열네 번째 이야기 예전의 주민과 겨울 손님들

 

소로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 겨울 동물들

 

P344. 토끼나 뇌조가 튀어 달아날 때 당신이 본 그것은 야생 동물이 아니라 바삭거리는 나뭇잎이 그렇듯이 자연의 일부를 본 것뿐이다.

 

 

소로의 열여섯 번째 이야기 겨울 호수

 

P346. 자연의 여신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지도 않는다. 그려는 이미 오래 전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이다.

오 제왕이시여! 우리의 눈은 이 삼라만상의 경이롭고 다양한 장관들을 감탄에 차서 쳐다보며 그것을 영혼에 전하고 있나이다. 밤은 어김없이 이 눈부신 창조물의 일부를 가리지만, 다시 낮이 찾아와 땅에서 하늘의 평원에 이르는 이 위대한 작품을 우리 앞에 펼쳐주나이다.”

 

P354. 그러나 얼핏 상충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치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법칙에서 우러나온 조화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것이다.

 

P355. 내가 호수에서 관찰한 사실은 인간의 도덕 원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것은 평균의 법칙이다. 두 지름의 이러한 규칙은 우리를 태양계 안의 태양과 인간의 심장으로 인도해 줄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와 삶이라는 물결의 길이와 폭을 통해 그만의 작은 만과 후미진 곳까지 이어지는 선분을 그려준다. 그 선분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그의 성격이 지닌 높이이거나 깊이가 될 것이다.

 

 

소로의 열일곱 번째 이야기

 

P369. 숲속에 들어와 사는 데 한 가지 매력은 봄이 오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볼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첫 관찰도 봄이 오는 모습이었는데. 꽃의 변화, 잎의 변화, 호수의 변화. 그 때가 그릴 울 때가 있다.

 

P373. 지구가 자신을 잎사귀로 표출하는 건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것은 지구가 내부에서도 그러한 관념을 가지고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P375. 인간이란 사실 녹고 있는 진흙덩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사람의 손가락 끝고 물방울의 응결에 불과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육신의 녹고 있는 진흙덩이가 각기 한도껏 흘러가 이루어진 것이다. 좀더 온화한 풍토하면 인간의 육신이 어느만큼 확장되며 흘러가게 될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손바닥은 찢어진 잎에 잎줄이 나 있는 종려나무 잎사귀가 아닐까?

 

P383. “매일같이 평정하고 자비로운 아침의 숨결에서 나와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한다는 면에서 보다 근원적인 본성에 다가가게 하는데, 그것은 죽은 숲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행하는 악은 다시 움트기 시작한 덕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덕의 싹이 여러 번 자라지 못하게 되면 저녁의 자비로운 숨결로도 싹을 보존할 수 없다. 저녁의 숨결로 더 이상 싹을 보존할 수 없으며 곧 이간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같다고 보고 그에게 원래 보유의 이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참되고 자연스러운 성정일까?”

 

 

소로의 열여덟 번째 이야기 맺음말

 

P390.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종장의 가로장 울타리를 허물고 돌담을 쌓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삶에 경계가 그어지고 운명이 결정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P391.

그대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곳을 보게 되리라. 그곳을 여행하라,

그리하여 자신의 우주에 통달하라.”

 

P392. 자신의 극지방을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고기 통조림을 한 배 가득 싣고 가되 빈 깡통은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높이 쌓으라. (중략)

차라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완전한 신대륙과 신세계를 찾아나설 콜럼버스가 되어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 항로를 열라. 사람은 누구나 왕국의 군주이며

 

P393. 여기에는 눈과 용기가 필요하다. 패배자와 도망자만이 전쟁에 나가며 겁쟁이들만이 이 일을 피해 입대하는 것이다.

 

P394. 나는 숲에 처음 들어갈 때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그때 내게는 아직 살아야 할 몇 개의 삶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나의 삶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부지불식간에 어느 특정한 길 하나에 들어서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다져놓는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나도 살고 싶은 삶이 있다. 지금은 그 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내하자.

 

P395. 나는 경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다면 보통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은 받아들이고, 어떤 일은 내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위와 그의 내부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법칙이 확대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됨으로써 보다 높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허락을 받고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데 비례하여 삼라만상의 법칙은 덜 복잡해질 것이며,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며 약점도 약점이 아니게 된다. 설혹 공중누각을 세운다 해도 그 일은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데, 누각이란 것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아래 기초만 만들며 되는 것이다.

나도 변경연 생활을 한 것이 숲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아직 숲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숲에서 나와 숲 생활도 함께하니 지치는 구나

 

P399. 결국 우리가 어떤 일에 부여할 수 있는 외관이란 것은 진실만큼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진실만이 오래가는 법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현재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자리에 있다.

 

P400. 자신의 삶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그 삶을 정면으로 대하고 살도록 하라. 피하지도 욕하지도 말라. 그 삶은 당신만큼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P403. 사랑이 아니라, 돈이 아니라, 명성이 아니라 내게 진실을 달라.

(변경연)에서 살다보니, 사랑도 필요하고, 어느정도 돈도 필요하더라. 이유는? 일단 살아야 하니깐

 

P405. 세상에서는 끝없이 진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지루해하고 있다.

 

P406. 나는 지금 존이든 조나단이든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으로는 결코 밝아 오게 만들 수 없는 저 아침의 특성인 것이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저 빛은 우리에게는 어둠일 뿐이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날 동터 올 것이다. 앞으로도 동틀 날은 얼마든지 있다. 태양이란 아침에 뜨는 별일 뿐이다.

 

 

 

역자 후기

 

P409.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3. 내 책에 적용하기

 

목차/구성에 대하여

 

소로가 잡은 월든의 목차에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 안에는 시간의 순서도 있고, 감정의 순서도 있지만, 순서만으로 나열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감정 자체에 중점을 두고 목차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의 목차와 구성이 내 책에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지 실제 적용은 어려울 것 같다. 내 책은 일정한 방향과 순서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

 

장점이라기 보다는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관찰한, 특히 자연을 관찰하며 삶의 의미와 연결시키는 방식이 흡사 나와 같았다. (물론 건방지게 닮았다는 의미는 아님) 나도 자연을 관찰하며 삶의 의미를 찾은 것처럼 소로 역시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연을 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숲이라는 공간이 나에게 변경연이라는 존재와 연결이 되었다. 숲에서 의미를 찾은 것처럼 나 역시 변경연을 통해 의미를 찾아간 모습에 뭐랄까, 뭉클했다고 해야하나?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좀 아쉽다. 이런 위대한 사상가라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읽으며 기대했는데, 터질 듯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물론 월든을 읽은 다른 독자의 리뷰를 봤을 때 엄청난 감흥이 있었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프로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묘사하는 부분이 많아서 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나 같은 독자는 더 큰 의미를 바랬는지 모른다. 그런데 딱 어느 선까지만 간 듯 하다. 물론 그 여백은 독자가 채워야 겠지만

 

 

 

IP *.140.65.74

프로필 이미지
2018.01.02 12:01:12 *.18.187.152

이 책 읽으면서 뚱냥 생각 많이 나더라. 소로의 관찰--> 시적인 스탈이 뚱냥과 닮아서.

뚱냥 스스로도 '나랑 닮았네'하면서 읽겠다 싶었는데 진짜 그랬네 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