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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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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5일 00시 05분 등록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최준영 지음, 이종인 옮김, 이지북 출판


11기 윤정욱

43주차


[Intro]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 점심을 거르고 있다. 점심 시간은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인데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면 대략 12시 35분 즈음이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점심을 먹고 짬을 내 뭔가를 하려고도 해 봤지만, 결국 낮잠이 최고였다. 몇 년을 그렇게 보냈다. 내게 점심은 곧 낮잠이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많은 나에게 낮잠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다. 배가 불러서 오는 낮잠은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점심을 굶기로 했다.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기로 했다. 지난 1년 동안 변화경영연구소라는 단체에 들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마흔 권 가까운 책을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읽었던 책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제 남은 1년 동안은 누군가가 정해 준 책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정한 책을 읽어 나가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점심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번 주에 읽고 있는 책은 거리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최준영의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이다. 그는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을 설립 했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노숙인 자활을 지원하는 잡지 <북 이슈>의 한국판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그가 본문에서 말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노하우와 사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풀어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 둘의 삶은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나 역시 나 만의 삶의 방식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왜 글로 쓰고 싶었을까?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였다. 거창하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었다. 어렴풋하게 아는 체 하는 않고, 분명하게 나 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또 말한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누가 써도 상관없는 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누가 해도 무방한 강의를 하고 다닌다면 그건 결국 자기 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것에 다름 아닌 겁니다”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주제를 잡고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최준영 작가처럼 매일 글을 쓰면서 주제를 잡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매일 점심 하루 한 시간, 나는 나를 관찰하고자 한다. 배는 조금 고프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을 챙겨주는 아내 덕분에 아침을 든든히 먹을 수 있어 견딜 만 하다. 혹시 배가 고플까 아침에 부랴 부랴 간식을 좀 싸오기도 했다. 내가 싸온 간식 거리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등 뒤에서 한 마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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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차라리 밥을 먹어~”



  1. 저자 분석


저자 : 최준영


  저자 최준영은 이름 대신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교수'로 불리우는 최준영은 이 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소통하는 인문학 실천가이다.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최초의 노숙인 인문학 과정)을 시작으로 관악인문대학,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등에서 노숙인, 여성 가장, 교도소 수형인들에게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했다. 또 노숙인의 재활을 돕는 잡지 《빅 이슈》 창간을 위해 3년간 공을 들이기도 했다. 인문학 강의를 통해 삶에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던 그의 경험담을 듣기 위해 전국의 관공서, 공공기관, 도서관, 대학, 기업 등에서 초청 1순위로 꼽는 대중 강연가이며, 일상에서 인문학적 사색을 길어 올린 '420자 칼럼'을 페이스북에 매일같이 연재하여 수많은 팬을 불러 모으는 페이스북 논객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다녔으며,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시나리오 부문)를 통해 등단한 후 늘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해 왔다. 2004년부터 경기방송, 교통방송, SBS 라디오 등에서 책 소개 코너를 진행했으며, 2013년 현재 YTN라디오에서 '인문학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결핍을 즐겨라』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 등이 있다.



2. 마음을 무찌르는 글


[프롤로그]

개별 글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성실한 삶의 자세와 그의 꾸준한 기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글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장 : 인문학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 사람들]


(14) ‘저렴한 강의’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만큼 편안한 강의였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게 작정하고 보니 그럴 듯 합니다. 


(14) ‘저렴’은 공감이기도 합니다. 제게 제 강의가 저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에 새삼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15) 저렴한 강의지만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강의이고 싶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강의, 아니 그보다는 듣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그런 강의이고 싶습니다. 저렴한 제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이 보람과 뿌듯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편안하게 들으며 생경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강의이고 싶습니다. 평생 비싼 강의는 못하겠지만, 무의미하거나 무용한 강의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저렴한 제 강의는 계속될 것입니다. 


(27)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사회복지 업무의 비중과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는 추세이지만 복지사의 충원율은 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29) 노숙인 인문학은 물론, 한 부모 여성 가장을 위한 인문학, 어르신들을 위한 인문학, 자활 참여자들을 위한 인문학 등 소외계층 인문학 강좌마다 반드시 함께하는 사람들,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간사 혹은 실무자 역할을 하는 사회복지사들이지요. 그들 역시 인문학 강좌의 주체들입니다. 


(31) 엄마를 위한 자식의 눈물이었고, 가족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따스함을 선물했던 가녀린 어린 엄마에 대한 나이 많은 아들들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김자옥 선생, 그녀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33) 외려 모든 것을 잃고 병자가 되어 병원과 거리를 오가는 신세가 된 뒤에야 인생의 의미와 행복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34) 김 씨처럼 사람으로 인해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사랑을 통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그것 이상의 인문학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37) 밥 한 끼 얻어먹을 심사로 들른 줄로만 알았던 간밤의 노숙인들이 저마다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두었던 꼬깃꼬깃한 지폐를 망자의 노잣돈으로 기꺼이 내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중략)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기대기 위해 사람 냄새 물쓴 풍기는 모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둥지를 만든 것입니다. 


(43) 우선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인문학이 얼마나 유효한가에 대한 인문학 스스로의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입니다. (중략) 두 번째는 빈곤 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의미입니다. (중략) 세 번째는 정신적 삶을 회복시키는 의미입니다.


(45) 강의를 하다 보면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중 자주 받는 질문이 “과연 인문학이 노숙인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라는 것입니다. 얼핏 노숙인에 국한된 질문으로 들리지만 실은 시민 인문학의 의미와 성과를 묻는 것일 터입니다. 

=> 그런 욕심은 있다. 나의 글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혹은 일상에 작은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 그러나 과한 욕심인 것을 잘 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을 품기에 앞서 나의 글을 통해 내 자신 스스로가 먼저 변화 할 수 있어야 함을 안다. 변화도 내가 먼저다. 그래야 남들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변화하지 않고 남들에게 변화를 말하는 것은 글이 아니다. 그것은 사기다. 


(47) “중요한 건 현재의 조건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와 용기”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강의 시간에 함께 읽었던 책의 글귀를 인용하면서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이씨가 인용한 문장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철학자 니체의 말이었습니다. 


(56) 노숙인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노숙인은 잠 잘 곳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어찌 보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저자 스스로 노숙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많이 했기에 가질 수 있는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숙인들을 당장의 잘 곳이나 돈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그들을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상태로 보게 한다. 상대적으로 물질적 결핍이 덜한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태나 처한 환경에 대해 공감을 덜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시선을 바꿔서 그들을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감정적 결핍’의 상태로 보게 한다. 인식의 전환이다. 풍족한 물질 환경 속에 사는 우리들도 ‘감정적 결핍’의 상태는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오히려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제단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감정적 결핍이 더 만연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 끼 밥을 꼬박 챙겨 먹고 따듯한 집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도 이러한 사람의 빈곤, 관계의 빈곤에서 오는 감정적 결핍 상태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노식인들을 감정적 결핍 상태로 보는 인식의 전환은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들의 결핍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7) 삶의 목표조차 상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의 해체가 삶의 동기 상실로 이어지고, 동기 상실은 의지 결핍으로 이어지며, 의지 결핍은 노동 의욕과 자기 존중감의 상실로 이어져 종내에는 정상적인 삶의 양태 즉,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노숙인에 대한 저자의 깊은 관찰과 애정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66) 한 PD 지망생의 노숙인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어진 선의가 또한 여러 사람에게 즐겁고 흥겨운 일을 만들어주게 되었지요. 그 일에 약간이나마 관여한게 얼마나 보람되고 영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새삼 확인했습니다. 진심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 선의가 선순환하면 그만큼 살맛 나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68)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 뒤로도 노숙인 인문학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도처에서 편견과 차별의 눈빛과 속절없는 말들을 수시로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하다못해 동네 당구장에서도, 허름한 선술집에서조차 우리들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요.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 신영복 <처음처럼> “진정한 위로는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비를 함께 맞는 것”

 => 저자는 사회 취약 계층을 찾아 다니며 인문학 강의를 펼쳤다. 미혼모, 한부모 가정, 노숙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왜 하필 그들에게 인문학이었을까?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실용적인 강의나 직업 교육이 아닌 인문학 강의였을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취약 계층이 자립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장의 경제적 지원 보다는 자존감 회복이 먼저라고 생각한 듯 하다.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 즉 인문학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사람을 배우고 이해하는 학문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존중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70) 편견과 멸시, 차별의 눈초리만 보내던 사람들이 실은 관심과 신뢰,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걸 확인하면서 모두가 감동하고 있습니다. 용기도 얻었습니다. 세상은 그리 암담하기만 한 게 아니며,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76) 돌이켜보면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안정보다는 도전을 택했고, 안전한 길보다는 위험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무모함이 없었더라면 가지 않았을 길이고, 갈 수 없는 길이었지요. 무모함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 청춘의 8할은 무모함이었습니다. 

=> 저자의 키워드 하나, 무모함. 그리고 둘, 인문학. 


(81) (노숙인들은) 우선은 잠잘 공간이 필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가족이 해체된 사람, 애초 가족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도리 없이 술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워서 마시고, 마시니 그리워지는 것이지요. 

=> 이게 뭐라고 이 한 줄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중국어로 바꿔서 입으로 되뇌어도 보고, 보고 싶은 이들과 오랜만에 만난 술 자리에서 건배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순간 머리 속에는 젊었을 때의 고민을 함께 나누던 대학 동기들, 그리고 지난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내게 속 이야기를 털어 놓는 친구들. 그리워서 마시고, 마시니 그리워진다는 이 짧은 한 마디 말에는 그리워 하는 대상과 지금 함께 하지 못한다는 내용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럴 때가 있는 듯 하다.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때로는 추억이 그립기도 하도, 그 때의 내 자신이 그립기도 하다. 마셔야 한다. 


(86) 문득 홍세화의 말이 떠오릅니다. “존중하시고, 그리하여 존중 받으시오” 


(88) 개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비판과 비난이 쏟아집니다. 가까운 사람의 실수에 더 크게 반응하고 더 크게 실망스러워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하물며 자신의 실수에도 예외 없이 자책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마치 대단한 엄숙성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89)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국가의 실수에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개인의 실수에는 때로 관대함을 보이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도 사회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2장 : 일상에서 만난 생각들]


(93) 살다 보면 그와 유사한 일들을 자주 겪거나 보게 됩니다. 본질을 외면하고 수단에만 매달린다든지, 정작 소중한 사람에겐 소홀히 하면서 입만 열면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라든지. 

=> 지난 1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나는 ‘다문화’라는 테마를 품어왔다. 물론 내가 품었던 ‘다문화’라는 테마에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더욱이 <강점혁명>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에게 있는 포용과 공감의 테마를 확인하고는 나 만의 명확한 주제를 잡은 줄 알고 기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관련해서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두 꼭지 이상을 쓰기 힘들었다. 바로 경험의 부재(不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는 왜 그 주제를 내가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93) 요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기왕에 삶이라는 것이 실수투성이인데다 부지불식간에 본질을 외면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의 행보입니다. 표피적 판단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 뒤늦게나마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98) 제 글은 제 능력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제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13)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으니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내 일 –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나의 일 – 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관심이 분산되니 생각의 깊이가 얕고, 목표가 여럿이니 응당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적을 수 밖에요.

=> 내가 항상 고민했던 주제다. 요즘 사회는 ‘바쁘다’는 것이 ‘잘 산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바쁘게 지낸다는 것이 인사가 되기도 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내가 지금 왜 바쁜지도 알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134)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자기 프로그램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기 프로그램이라!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뜻일 테지요. 아니에요. 그보다는 더 구체적인 의미일 듯 해요. 일테면 이런 것 말이지요. ‘누구나 자기만의 노하우와 사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풀어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 둘의 삶은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프로그램은 돈 벌이의 수단 만으로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 필요 조건을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필요 충분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모든 개인에게는 자기만의 노하우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 만의 노하우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눈 앞의 일들을 이해한다. 일종의 프레임(Frame)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정리’다. 자신 만의 노하우와 삶의 방식을 가시적으로 체계화 한 것을 말한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으려면 ‘정리’가 필요하다. 정리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첫 책을 쓰는 것도 일종의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시작을 자신의 지나 온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자신만의 프로그램에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의 보고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원료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계속적인 창작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정리함으로써,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구축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그의 그 전과 후의 삶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135)  우선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만 글을 쓸 수 있을 테고, 그래야만 비로소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며, 다른 누군가의 삶에도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던 거지요. 


(135)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누가 써도 상관없는 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누가 해도 무방한 강의를 하고 다닌다면 그건 결국 자기 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것에 다름 아닌 겁니다. 


=> 아프다. 아플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변경연 연구수업 오프모임 동안 창 선배님이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다문화’를 주제로 책을 쓰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먼길을 돌고 돌아 결국 창 선배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왜 그 글을 하필이면 네가 써야 하는 건데? 나는 당위적인 측면에서 나를 변명했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 누군가가 나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동문서답이었다. 나의 이야기, 나 만의 이야기, 세상 누가 관심을 가질까 싶은 그런 나 만의 이야기, 그것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가 가능하다. 


(135)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삶,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배와의 만남 이후 새삼 저 자신에게 묻게 되더군요.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


(137)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 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애 처음 민들레를 기다리는 봄. 이 설렘을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148) 경험 없는 여행자의 행장은 거창하고 무겁지만 진정한 여행가의 행장은 단출하고 가볍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청년의 삶은 번다하고 복잡하지만, 관조의 경지에 들어선 노년의 삶은 그지없이 단조롭고 담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149) 내려놓고 비우는 일의 시작은 사람에 대한 배려심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바꾸십시오. 질서와 경쟁심 대신 지긋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십시오, 달리 보일테고, 그들 역시 나를 다르게 볼 것입니다. 


(169) 병의 회복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 관심과 존중의 회복으로 어머니의 치매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면. 


=> 티비 프로그램에서 치매로 고생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중에, 정말 나중에 부모님 가운데 혹 어느 한 분이라도 저 분들처럼 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듯 하면서도 내가 저 사람들처럼 극진히 부모님을 모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77) 내게 문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어디론가 떠날 수 있게는 해주었지만 돌아오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그렇게 많은 작의 그토록 절절한 이야기들이 고작 목포행 편도 기차라니요. 그 때 알아버렸습니다. 문학은 떠나는데는 유용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주진 못한다는 것을. 


(189) 세상에 영원히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되고 말지요. 허무합니다. 허나 어쩌겠습니까. 사람 마음이 그러한 것을.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中)


(194) 나 또한 글을 많이 퍼뜨린 저자의 입장에서 시시로 엄습하는 행여 내 글에 사기성은 없었는지, 군더더기나 동어반복은 없었는지, 말이나 글로 표현 될수록 진실과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 읽히고 싶다는 욕망 안에 도사린 함정 등을 돌아보게 했다. (박완서)


(198) 생각해 봅시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사과할 일, 용서를 구할일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라면 진심으로 사과한 뒤 용서를 구합시다. 그러나 잊지는 맙시다. 용서한다고 해서 완전히 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소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김지우 저, 창비 출판 中)


(202)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직접 체험하거나 대면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중략) 사물의 전모와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직접적 경험 못지않게 깊이 있는 사유와 성찰, 무엇보다도 꼼꼼한 정보 수집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213) 강렬한 느낌을 주는 말은 그리하여 무엇보다 진실되어야 하며 간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잠시 동안이라도 누군가의 몸으로 마음으로 틈입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213) 필요한 말을 저장한 대신 불필요한 말을 내다 버렸으니 이제 실제적으로 내게 남은 말은 없는 셈입니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침묵의 시간을 가져볼 일입니다. 


(217) ‘단 한 문장도 드러낼 문장이 없는, 완벽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설가 신경숙)

(220) 그러고 보니 오늘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만날 듯합니다. 그들에게 저는 과연 어떤 색깔로 비칠는지요. 


(227) 책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책을 읽어왔고 읽고 있기에 유지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늘 지적 허기에 시달리지만 그리 걱정하진 않습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었으며, 내일도 읽을 것이니까요. ‘나는 읽는다, 고로 산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최준영 저)


(243)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 (<좋은 이별> 김형경 저)


(245) 이모의 죽음은 어쩌면 내 문학의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게 아쉽고 서러워서 나는 소년 율겐처럼 이모의 주검 옆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내 문학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설핏 무섭기도 했고 이상한 환영에 사로 잡히기도 했지만, 종내 향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 옆에서 밤을 지새웠어요. 


=> 나 역시 나의 지난 삶을 정리하면서 가족들과 친척들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이모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 이모를 사랑한다. 이모와 관련 된 글을 쓰며,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 적도 있다. 많이 망설였지만, 그래도 글로 옮겼다. 


(251) 삶은 곧 사랑의 연속이며, 사랑은 또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의 무수한 사람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 즉, ‘대상 선택’에서 출발 하지요. 



[4장 :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256)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꾸준히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글쓰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면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글쓰기 능력은 결코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묵묵하게 꾸준히 쓰는 것이야말로 글쓰기 실력을 쌓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단박에 늘지 않습니다. 꾸준히 쓰면 조금씩 감각이 생기는데, 그것도 아주 더디게 진행됩니다.”


=>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많이 와 닿았던 말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무림 고수의 비전(秘典)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게 된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도 있다. 꾸준히 써야 한다. 매일 한 편의 칼럼을 쓰기로 했고,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한 달은 채우면 아내에게 선물을 하기로 약속했다.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남은 3주간 무사히 칼럼쓰기를 마치려고 한다. 


(257)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이태준의 <문장 강화>, 이오덕의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정희모/이재성 공저 <글쓰기 전략>


(258) 글쓰기는 철저히 실천의 문제이며 오로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자기만의 느낌과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작업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다져야 하고 기본적인 기교도 길러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나름의 문체 감각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쓰고 또 쓰고, 쓰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쓰고 또 쓰고, 쓰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260) 소박한 일일망정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세상은 반드시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261) 성실함과 꾸준함, 한 줄의 좋은 문장보다 더 가치 있는 건 삶의 자세라는 걸 제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262) 너무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실천하는 삶을 사십시오. 


(262) 내 말이면서 내 생각이고, 내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것 그 이상의 강의는 없을 것이기에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264) 저 역시 지난 10여 년 동안 하루 두 시간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65) 진정한 자기 계발이란, 거창한 이론으로 무장하거나 학위를 줄줄 목에 거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작고 꾸준한 실천을 통해 꿈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라는 뜻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에게는 그것이 매일 한편의 칼럼을 쓰는 것이 된다. 우선 처음 목표는 30일이다. 한 달 동안 매일 칼럼을 꾸준히 써보려고 한다. 


(267) 책을 읽으면 느낀 점을 썼고, 딸들의 재롱을 보면 그걸 또 세세하게 묘사해두곤 했습니다. 제 삶의 궤적을 돌아보기도 했고, 더러는 소설 흉내를 낸답시고 돌아가신 아버지, 함께 사는 이모의 삶을 들여다보는 글을 써 보기도 했습니다. 이따금 사회성 짙은 글을 쓰기도 했지만 매번 역량 부족을 실감할 뿐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글을 쓸 때는 되도록 뚜렷하고 강력한 주장을 담아내려 애썼습니다. 


=> 꾸준하게 쓰기. 일상의 다양한 풍경과 감정들을 글로 옮겨 두기. 그것은 마치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것.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것. 거창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68)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위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글쓰기와 책 읽기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삶이 고달플 때, 하던 일이 꼬여서 괴로울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271) 의미 없는 글을 쓰는 건 삶의 직무 유기라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쓴 지 3년여가 지난 뒤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의미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 아직 나의 단계는 아니다. 물론 나 역시 나중에는 의미 있는 글을 쓸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의미를 담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담는 것이다. 의미를 담는 글 쓰기와 생각의 흐름을 제어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조금 다른 듯 하다. 칼럼을 쓸 때에는 내가 담고 싶어하는 의미와 전개를 고려해서 글을 쓸 것이다. 짧다고 그냥 쓰지 않고, 구성을 잡고 말하고 싶은 바를 분명하게 담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시간이 다소 오래걸리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북리뷰를 하는 동안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이 나는 대로,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글로 옮겨 두려고 한다. 의미를 담는 글 쓰기와 생각의 흐름을 제어하지 않고 글을 쓰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힘을 들여 운동을 하고 나면, 근육을 쉬게 하는 휴식 시간도 중요하다. 짧은 칼럼 쓰기가 나에게는 사고 근육을 움직이는 운동과 같다면, 북리뷰를 하는 동안의 글 쓰기는 휴식 시간과 같다. 나를 제어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자 한다. 나의 사고와 나의 글이 좀 더 부드러워 질 수 있도록. 


(279)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최준영의 420자 칼럼’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 서서히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짦은 글이지만 재미있고 잘 썼다는 호평을 듣기도 했고, 글이 짧아 주제를 깊이 다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니 좀 더 긴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 오랫동안 글을 써온 저자도 처음 글을 올리기 시작한 후 20여 일이나 지나서야 대중들로 부터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나를 채워야 한다. 감각을 배제하고 그냥 꾸준히 써야 한다. 


(279) 50회가 넘고 80회가 넘어가면서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수준이나 깊이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다는게 스스로 대견했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늘 신선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 처음 목표는 30회를 채우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목표는 100회를 채우는 것이다. 


(283)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서 오늘도 쓴다. 올릴 땐 매양 잘 썼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다음 날 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거다. 삭제해버릴 수도 없는 게, 이미 ‘좋아요’를 누른 분들이나 댓글을 달아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 부끄러운 글을 뒤로 혹은 밑으로 내리는 방법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새로운 글을 올리는 거다. 그래서 매일같이 쓰는 거다. 어제 쓴 부끄러운 글을 밑으로 내리기 위해서…”


=> 제목 정말 잘 지은 듯 하다. 


(285) “분명한 글에는 독자가 모이지만 불분명한 글에는 평론가만 꼬인다” (알베르 카뮈)


=> 쉬운 글, 분명한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 


(292) 읽지 않고서 잘 쓰기를 바라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입니다. 


(297) (후배에게) “저질러라. 저질러라. 저지르고 나서 쓰라”는 말이었습니다. (중략) 넓게 읽어라, 글에 구체적 국면들을 녹여내라. 관념적으로 고뇌하고 특정 문체에 경도되었던 후배는 끝내 등단하지 못했습니다. 


(298)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 게바라)


(308) 비는 바람이 내미는 손일지 모릅니다. 비는 구름이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내민 손, 구름이 하는 말에 답하기 위해 나도 누군가에게 손 내밀고 자분자분하게 나의 말을 이어갈 것입니다. 


(308) 왜 쓰는가 물으면 이제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떠나기 위해 씁니다. 못 떠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태 쓰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나 이제 입이 아니라 몸으로 대답할 터입니다. 떠남으로써, 떠돎으로써. 안녕! 후덥지근한 일상이여, 헛헛한 마음이여, 답답한 가슴이여. 



[에필로그]


(310)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 있어야 사람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나는 언제나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될까요. 섬처럼 떠도는 외로운 삶을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3. 내가 저자 라면


  1. 목차를 보고 (좋은 점, 아쉬운 점)


# 매일 쓰는 이야기 # 


  처음 저자를 접하고 저자가 어떻게 글을 써 왔는지를 알고 났을 때,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 졌을 지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목차를 통해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올라온 글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할지 궁금해졌다. 책장의 어느 곳을 펼쳐서 읽어도 무방할 듯 하다.


# 에피소드 모음 (?) #


  각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드러내어 명확하게 말하는 편은 아닌 듯하다. 일상의 체험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 같다. 목차만 보았을 때는 저자가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 할 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큰 분류는 볼 수 있다. <인문학>, <일상>, <문학>,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1. 이 책의 장점


# 체험한 이야기 # 


  저자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로 내가 쓰고 싶어하는 글이다. 나는 가공의 글을 쓰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체험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건져 올려야 한다. 그것이 내가 매일 해야 하는 과제이자 나의 유희가 되어야 한다. 나도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글을 쓰고자 한다. 


# 쉬운 글쓰기 # 


  저자는 강조한다. 자신의 글이 잘 쓴 글이 아닐지는 몰라도, 꾸준하게 쓴 글이라고. 저자는 꾸준히 글을 쓸 것을 강조한다. 글쓰기에는 기교 보다는 글을 쓰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도 한다. 쉽게 글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쉬어야 한다. 그래야 메시지가 실리고, 힘이 담긴다. 



  1. 이 책의 아쉬운 점


# 작가의 깊은 속 이야기의 부재 #


  이 책은 저자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한다고 독자에게 가르침이나 배움을 주는 책은 아니다. 저자의 에세이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저자의 지난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녹아난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물음을 품은 독자라면 저자의 글에서 공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글 쓰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두 가지다. 그것은 바로, ‘꾸준히 쓰기’와 ‘쉽게 쓰기’다. 이것을 다시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면 ‘쉬운 글을 꾸준히 쓰자'는 것이 될 것이다. 


# 다소 아쉬운 부조화 #


  각 장의 키워드는 아래와 같아. 1장은 <인문학>, 2장은 <일상>, 3장은 <문학>, 4장은 <글쓰기>이다. 저자가 평소에 써 오던 글들을 주제로 구분하여 엮은 듯 하다. 굳이 각 장의 연관성을 찾기 보다는 별개의 구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 내가 저자라면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쓰겠다. 


# 3장 (텍스트와의 만남과 단상들) 제외 # 


  3장에 실린 텍스트의 만남과 단상들은 따로 한 주제로 떼어 두고, 한 권의 책으로 엮는 것도 좋을 듯 하다. 


# 힘들었던 이야기가 듣고 싶다 #


  매일 두 시간을 짬을 내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파서 병원에 가거나 먼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 매일 같이 글을 썼다고 한다. 글을 쓰기 힘든 상황이나 글을 쓰고 싶지 않았을 때 어떻게 유혹들을 극복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한, 두 꼭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 일상 속에서 소재를 걷어 올리는 법 # 


  방법론을 설명해 주지는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소재를 낚아 올리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도 함께 실리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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