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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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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1일 07시 01분 등록

 『사기열전11 of 2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23주차 (9/4~9/10)

티올(윤정욱)

 

1. 작가 분석

 

가.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史記)》의 저자. 자 자장(子長).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으로 사마천이 7세 때 아버지가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된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구해 읽도록 가르쳤다사마천이 약 20세가 되던해 낭중(郎中:황제의 시종)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BC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BC 110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그후 2년이 지나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고 태산 봉선(封禪: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의식에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크게 견문을 넓혔고, 《사기》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원 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고, 그 유지를 받들어 BC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BC 104(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 황제인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BC 99년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宮刑: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사기 완성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 전 91년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서한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서한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다. 이 편지《보임안서(報任安書)》의 내용으로 보아 사기는 이 시기(기원전 91)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 연표(年表) 10, ()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 52 6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천 [司馬遷] (두산백과)

 

내가 사마천이 되어 글 써보기. 자신에 대해. (특히 궁형을 당하고 나서 분발하고 작심하는 과정)

 

 

나.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p.26)

 

첫째, 발분 의식의 소산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이 열전>에서 천도시비(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의 질문을 제시한 것은 백이와 숙제의 입장이 마치 자신과 비슷하다는 데서 오는 동류의식을 ㅂ란ㄹ영한다. 또한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이는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듯,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 즉 작은 말 속의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è 순수 개인의 자격으로 사기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이점은? 어느 한 쪽(or or 나라)의 입장에서 선대의 역사를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름 중립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 자신이 살았던 한대(漢代)의 일이고, 내용 상으로도 자신을 궁형에 처했던 한나라 5대 황제 무제(武帝)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역사서가 어떻게 당대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   사기(史記)의 구성은? : 추후 작성

 

 

라.   사기 열전 이란?

 

사기 열전은 역사서 《사기》의 일부분이다. 《사기》는 〈본기(本記)(12), 〈표()(10), ()(8), 〈세가(世家)(30), 〈열전(列傳)(70) 등 전1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열전〉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인간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한 개인 전기이다. 《사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대한 분량으로서, 고대중국의 문호·학자·정치가·군인·자객·협객·해학가·관리·실업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화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어 당시의 정치, 역사, 문화, 의식 등 사회전반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기 열전은 《사기》의 제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첫째편으로 시작해 〈관안열전(管晏列傳)〉〈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등 총 7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 제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로 끝을 맺고 있다.

 

사마 천은 첫편인 〈백이열전〉에서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비통한 운명을 논하며 부조리한 세상사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아울러 궁형(宮刑)을 당한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된 동류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또 모진 치욕을 참아내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관중, 오자서, 경포 등의 일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에서도 《사기》의 끝부분에 〈열전〉을 마련한 저자의 저술동기를 읽을 수 있다.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으로 비극적 운명을 감내한 사마 천은 인생의 궁극적 의문을 탐구하는 자세로 기전체의 역사서를 집필했으며, 모순으로 가득찬 역사적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헤쳐나간 수많은 인물을 그려냄으로써 스스로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관포지교(管鮑之交)’나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고사성어로도 널리 알려진 이 역사서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며 동서양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신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적 고뇌까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문체는 오랫동안 중국 산문체의 모범이 되었다. 사마 천의 세계관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사기열전》은 격동기를 살다간 다양한 인간상과 인간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추구한 《사기》의 정수로서, 시대를 초월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윤리적·사회적·정치적 가치체계를 확립하는 데 하나의 전범으로 제시된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사기열전 [史記列傳] (두산백과)

 

 

마.   열전(列傳)이란 무엇인가? : 추후 작성

 

 

바.   사기 열전의 의의? :

 

<사기 열전>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있어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본위의 역사를 서술해 낸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   사마천의 편지 (사기를 완성하고 나서), 보임안서 : 추후 작성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 1 : 백이 열전>

 

(67) 이 편은 일흔 편의 열전 중 첫 번째 편으로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매한 임품을 허유, 무광에 견주면서 그려 나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은 데 대한 공자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들이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68) 사마천이 이 편을 쓴 의도는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기록하려 했다기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궁형을 당한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특히 하늘의 도에 대해 옳고 그름의 의문을 던지면서 세상 이치의 냉엄함에도 주목하고 있다.

 

(75) 어떤 사람 (노자 老子)은 말했다.

 

è 老子라는 원문을 보고 역자는 도덕경의 노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늙은 사람 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아무개씨로 해석한 부분이 매력적이다.

 

(76)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è 역자가 덧붙인 부귀(富貴) 라는 말을 존귀(尊貴)라는 말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귀한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부귀는 다소 물질적인 풍요와 여유로운 상태를 말한다면 존귀는 존중과 귀함을 함께 아우르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존중 받기를 원하고 스스로가 귀하게 쓰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 당시,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은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왕이 되는 것은 핏줄이 하는 역할이었다. 당시는 춘추 전국시대로 날던 새도 떨어트렸다는 어제의 왕이, 또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재상의 목줄이 다음 날 아침이면 아침 이슬과 함께 여럿씩 날아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저자 자신도 억울한 누명으로 한 나라 무제로부터 궁형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저자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 정말 하늘이 시시비비를 잘 헤아린 결과 일까.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을 바래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준 것일까.

 

(77)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을 구하고, 열사는 이름을 추구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권세 때문에 죽고, 뭇 서민은 [그날그늘의] 생계에 매달린다.

 

(77)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야 만물도 다 뚜렷해진다

 

 

<2 : 관안 열전>

 

(79) 공자에게 소인으로 폄하된 관중은 관경중이라고도 부른다. 출신이 보잘 것 없던 그가 재능을 펼치고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포숙의 추천 덕분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è 인재를 알아보는 포숙의 능력을 부각시킨 사마천의 의도에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시대의 역사서를 남길 포부와 재능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궁형에 처하게 한 당시 한 무제에 대한 마음이 빗대어 표현 했을 것이다.

 

(80) 이 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제 환공의 포용력으로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 포숙의 대범함에 있다. 또한 안영이 월석보라는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을 부각시키면서 주군에 대한 안영의 충성심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84)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포숙)이다.

 

(89) 세상 사람들은 관중을 어진 신하라고들 하지만 공자는 그를 경시하였다. 어찌 주나라의 도가 쇠미해진 상황에서 어진 환공을 도와 왕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군자가 되게 하지 않고 천하의 우두머리로서만 이름을 떨치게 하려고 했는가?

 

è 관중을 향한 공자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볼 수 있다.

 

 

<3 : 노자, 한비 열전>

 

(100) 한비는 유가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했다.

 

(101)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102)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103) 군주가 유세자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반감을 가지지 않고 주장을 내치지 않아야 비로소 유세자는 그 지혜와 언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신임을 얻고 의심 받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 할 수 있는 방법이다.

 

(105)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è 조직이나 사회의 기본 자질은 결국 그 군주(리더)에 달려있다.

 

(105)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한 유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7)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이고, 무위에서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책은 글이 미묘하여 알기 어렵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유롭게 논했는데, [] 요지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자는 스스로 힘써 명분과 실질에 적용시켰다. 한자는 먹줄을 친 것처럼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그 극단에 치우쳐 각박하고 은혜로움이 부족했다. [이들 셋은] 모두 [노자의] 도와 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니 노자의 사상이 깊고도 먼 것이다.

 

 

<4 : 사마양저 열전>

 

(109) 사마천은 여기서 사마 양저야말로 이론과 실천 면에서 <사마법>을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대의와 예절을 아는 유가의 풍모를 지닌 장수라고 평가하며 양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115)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어 보니 그 개략이 넓고 크며 깊고 원대하여 설령 삼대(, , )의 제왕들이 전쟁에 나서도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보면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양저는 보잘 것없는 작은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느 틈에 <사마병법>에서 말하는 겸양의 예절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이미 <사마병법> 이 많이 있으므로 거론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만을 지었다.

 

 

<5 : 손자, 오기 열전 >

 

(117) 사마천은 오기의 각박함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 점은 치욕을 참아 내며 발분의 세월을 보내고 성취를 이룬 손빈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는 확실히 대비 된다.

 

(122) 손자가 말했다. 신은 이미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때에는 군주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è 손자가 궁녀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손자, 오기 열전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오나라 왕 합려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손자는 그가 제일 아끼는 후궁 두 명의 목을 베어 버린다. 그의 단호함에 감탄이 나온다.

 

(135) 태사공은 말한다. (중략) “속담에 말하기를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행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6 : 오자서 열전>

 

(137) 오자서는 합려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오나라의 대부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는 월나라와 화친을 맺지 말고 멸망시켜 뒤탈을 남기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를 헐뜯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을 듣고 그를 멀리하더니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7 : 중니제자 열전>

 

(164)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164)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è 공자는 자신이 아꼈던 제자 안회의 죽음을 특히나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죽음을 생전에 그토록 안타까워 했던 스승을 둔 안회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69)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176)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è 자공은 자신의 집에 천 금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질문을 공자에게 했다는 것은 자신을 빗대어서 한 질문 일 수도 있다. 자신이 공자에게 인정 받을 만한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부유하면서도 겸손 할 줄 아는 것은 쉽다. 다만 공자의 말씀처럼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예를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88) “말은 진실 되고 미더우며,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용될 것이다. 말에 진심과 믿음이 없고 행동에 독실함과 공손함이 없다면 비록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라 하더라도 통용되겠는가?

 

(189) 대체로 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문 난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소문이 나게 된다.

 

(192) 원헌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197) 사마경은 자가 자우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성질이 조급하였다. [한번은] 공자에게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었는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한 사람은 자신의 말에 조심한다

 

(199) 번수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말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8 : 상국 열전 >

 

(205) 이 편은 상앙이 변법을 주장하게 된 과정과 성과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상앙을 보다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210)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움트기도 전에 압니다.

 

(211) (위앙은 효공에게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얽매입니다.

 

 

<9 : 소진 열전>

 

(225) 세상에서는 소진을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의 신하로 일컫지만, 합종에 성공하여 진나라 병사가 15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238) 항간의 속담에차라리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서쪽으로 투항하여 팔을 모아 복종해 신하로서 진나라를 섬긴다면 쇠꼬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241) 『주서』에서는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교를 맺고 힘을 합쳐 뜻을 하나로 한다면 강력한 진나라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252)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든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10 : 장의 열전>

 

(269) 이 편은 연횡가들의 전기로서 장의, 진진, 서수 세 사람의 사적을 수록하고 있다. 합종파의 대표 인물이 소진이라면 장의는 연횡파의 대표 인물이므로, 합종파와 연횡파의 인물들을 합쳐 각각의 열전을 만들면서 두 사람으로 대표성을 갖게 한 것이다.

 

(275)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잘 살펴서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287) 나라의 오랜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한 순간의 달콤한 말을 듣는다면 이보다 더 남의 임금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309) 태사공은 말한다. “삼진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합종론과 연횡론을 주장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체로 모두 삼진 사람이다. 장의가 일을 꾸민 것은 소진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11 : 저리자 감무 열전>

 

(324) “저는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처벌될까 두려워서 도망쳐 나왔지만 몸을 안전하게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못사는 여자와 잘사는 여자가 함께 길쌈을 하였는데, 못사는 여자가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궁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야흐로 진날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아내와 자식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부디 남는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322) 감라는 나이가 어리지만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행실이 성실한 군자는 아니지만 전국시대의 책사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천하는 더욱 권모와 술수로 치달으려 했던 것이다.”

 

 

<12 : 양후 열전>

 

(343) 태사공은 말한다. (중략) “그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유세를 펼치자 신분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에서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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