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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8일 11시 56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 이끌리오(21세기북스)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교신화학자. 어린 시절부터 신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책을 읽으며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토템 기둥에 매료되면서 평생의 신화 탐구를 시작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중세문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 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했다.

1934년부터 새러 로렌스 대학 문과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그 시기에 대중 강연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저서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하는 삶》, 《신화의 힘》, 《신의 가면》, 《야생 수거위의 비행》 외 다수가 있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사후인 1988년에 방영된 미국 PBS 방송국의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을 통해 대중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다. 이 방송에서 그는 유명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지금까지도 신화에 관한 최고의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후 아내인 진이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 및 대담,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빌 모이어스

 

미국 저널리스트. CBS 뉴스와 PBS(사회교육방송)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사상가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학문적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조셉 캠벨과의 공동 저서인 <신화의 힘> 1985년 이루어진 대담 녹화를 정리한 것이지만 단지 그 인터뷰 시간만 살필 게 아니다. 모이어스와 캠벨 교수가 8년이나 교유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윤기

이윤기에게는 신화연구가 혹은 신화전문가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1970년대부터 신화연구를 해온 이윤기는 번역과 독서를 통해 신화연구에 한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윤기를 떠올린다. 이윤기는 1999 11월부터 2000 10월까지 <문화일보>에 「신화에세이」를 연재했고, 2000 4월부터 7월까지는 <이윤기의 신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EBS에서 강연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웅진지식하우스, 2000)를 펴낸 것도 이때였다. 이 책은 출간 3개월 만에 11쇄를 인쇄할 정도로 인기를 끌어 인문과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신화 읽기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이윤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2002),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2004),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2007) 등을 내놓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200만 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이 외에 이윤기는 자신의 이름은 건 신화 에세이를 여러 편 출간했다. 『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작가정신, 2002), 『이윤기, 그리스에서 길을 묻다』(해냄, 2003), 『꽃아 꽃아 문 열어라: 이윤기 우리 신화 에세이』(열림원, 2007) 등이 그것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집중하고 신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신화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명저를 읽으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배움으로 만들어진 나 이전의 나와 만나는 것처럼. 신화와의 만남은 보편과의 만남이다.”

그가 조셉 캠벨의고대 신화에 등장하던 영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늘도 5번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주목하는 까닭도 신화가 보편적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인류의 삶이 곤고해질 때마다 결국은 신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신화 읽기를 독자에게 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화가 소설 창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밑반찬, 소설이 주 요리라는 그의 말처럼 신화는 그의 소설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준다.

“신화는 위대한 문학이죠. 문학의 화석입니다. 신화적 상상력은 곧 소설적 상상력입니다. 이 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호메로스의 상상력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빚었지요. 그것은 신화이자 서사시입니다. 결국 소설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설쓰기는작은 신화 빚기가 아닐까요? 당대에 읽히다가 훼멸되면 소설이고, 오래오래 삶과 인간의 한 유형으로 남아 읽힌다면 신화에 편입되겠지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신화에 편입된 것처럼 말이에요.”

- 문화웹진 채널예스 中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신화와 현대 세계

 

P25.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P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문학??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인가? 신화를 문학으로 보는 것인가? 더 읽어보자

 

P26.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 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직 초반이니 만큼, 인내심을 갖자. 신화라는 것이 삶을 어떻게 풍부하게 해 주는지 분명 설명을 해 주겠지

 

P26.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빌이 이렇게 정리를 해 주니까 그나마 이해하기 편하군요.

 

P27. 위대한 악마적 미학의 길을 모험하고, ‘인류를 경멸하며 냉엄하고도 긍지에 차 있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선망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든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P28.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가 불완전하지 않나? 그런데 살인자에게 애정을 기울인다? 아직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P28.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P28.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맞다. 인간미가 사랑스러움이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간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화 날일이 없을텐데. 자주 물건을 못 챙기는 경우가 있다. 내가 왜 이러나, 정신 안 차리고 사냐고 나를 비난하고 탓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 상하기 마련이고, 하지만 그래 인간미가 있네, 귀엽네 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감정은 다시 차분해 진다. 자기합리화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리라.

 

P29.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내가 불완전해서 일거야. 불완전한 존재는 인간미가 넘친다는 것이라고 말했으니,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다.

 

P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실수했다. 그리스 신화만 신화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거야.

 

P30.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신화에 목마른데?? 우리 신화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배워 나가고 깨달음을 얻고 싶다. 조셉캠벨 선생님의 말을 안듣는구만

 

P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영혼이 같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나와 반대인 사람이 더 잘 맞는다. 나와 비슷한 사람과 살아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결론은 자신과 비슷한 성격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혼이 같다는 것. 그러니 나도 비슷한 사람을 찾는데 더 노력해야 겠네요.

 

P31.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호하지 못했고, 미리 끝을 맺었어야 한다. 결혼을 한 것이 아닌 나는 그냥 연애를 이어지는 동거를 하고 있었구나.

 

P31.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자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맞다. 나는 진정한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곳으로 도피했고, 하나가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P33.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 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P35. 이렇게 낙서하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불량배가 있고 나름의 입문 의례가 있으며 나름의 도덕률이 있어요. 아이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신화를 체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이들의 법이 도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나름의 입문 의례를 치르지만 이들이 입문하는 곳은 우리 사회가 아니지요.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입문의례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닐까? 약간 어르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른이지만)

 

P36.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P37.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왜 가르치는지, 무엇을 가르치는 지가 중요하다. 학생 역시 내가 왜 배우는지 무엇을 배우는 것지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P38.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P41. 신화는 우리의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게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화를 깊이 알게 되면 변화를 알고 왜 변화가 일어나는 지를 알고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인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군

 

P42.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7.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아직 초반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나가보자

 

P48.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P48.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구본형 선생님은 나의 본이 되셨다. 나는 그를 신격화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분의 삶은 모두 옳고 나는 선생님을 따라 가고 싶다. 모방하고 싶고, 거기서 나를 뽑아내고 싶다. , 그렇다면 신화라는 것은 이런건가? 신화에서 자신에게 맞는 의미를 찾고 삶에 적용해 보고 거기서 나를 찾는다는 것인가?

 

P51. 어차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가 있게 마련인걸요. 우리가 느끼는 위기, 모든 사람이 느끼는 위기…. 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전장 아마겟돈이라는 관념이 바로 이것일 테지요.

 

P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P60.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는 같아요.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P61.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부처님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항상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디에나 부처는 있다. 부처의 의미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만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P65. 미합중국은 이 세계에서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가입니다. 이 국장을 제정한 사람들은 18세기의 이신론자들, 점잖은 신사분들이었지요.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이군요.

 

P65. 결과적으로 국장을 제정한 사람들에 대한 성서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P75.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화에 나오는 것 처럼 사는 사회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것인가? 과거에나 신화의 모습으로 살았지, 지금은 4차 혁명의 시대인데그럼 4차 산업혁명도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인가?

 

P75.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P76. 오늘날 우리가 한 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P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P77. 하지만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하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 쉬울 겁니다.

 

P78.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P80.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인디언들에게는 만물의 근원인 대지가 곧 신이고, 신화라는 것이군. 가장 큰 가치를 땅에 두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보호, 환경보호의 방향을 이런 신화를 통해 추진해야 된다는 말이 맞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군

 

P81.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인종차별은 하면 안 된다. 사실 나도 반성해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원적으로 생각을 했었지 과거에는, 사실 우리는 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인데..

 

내면으로의 여행

 

P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오다는 겁니다.

내가 받은 메시지는 그 암흑의 순간에 받은 변용의 메시지로군. 그리고 지금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고

 

P86.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P87.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 (개인적인 단계와,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의 본보기가 되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단계)는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예지몽을 꾼다. 물론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들어맞는다. 꿈을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꿈이 주는 상징과 메시지를 해석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군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P89.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그렇다면 영웅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나도 영웅이 될 수 있다. 범용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P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P94. 이것을 알면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느님의 힘인 창조의 원리를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P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 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우리가 기억하는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영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고(내가 죽어도) 그러면 그리스도는 영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지요?

 

P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 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P102. ‘’,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로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P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P102.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하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P103. 하느님을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게 참 우스꽝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의 권능은 성별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남성 우월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남성으로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여성은 잉태, 출산이라는 특수성이 있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 것인가? 더 읽어보자

 

P104. 그렇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남성이니, 여성이니 해서는 그 존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것이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도약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P105.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단도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P106.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부모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나만의 삶을 살아간다는 반증이라는 것이군요

 

P107.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9.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P112.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이것들을 각각 둘로 갈랐어요.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신화에서 말하는 것은 동성연애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태초부터 당연한 것이고, 지금 법으로 규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인가?

 

P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114. 중요한 지적이군요.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P114.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P115.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굉장히 경건해지고 편안해지고 내가 깔끔해지는 착각이 든다. 그것이 종교가 주는 힘인 것 같다. 나를 다시 성당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종교의 힘이군

 

P116. 그러나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P117.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8.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사고방식에서 보면 독신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노시스파 기독교나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P119.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24. 내 친구 중 하나가 방콕에서 로마 카톨릭 명상회가 연 국제 모임에 참석했어요. 내 친구는, 카톨릭 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역시나 종교인도 다르지는 않아. 관리자? 관료? 가 된다는 것은 종교인도 세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구나

 

P124.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지금 나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그리고 체험도 해 봤고 하고 있고. 스토리텔링의 힘을 믿어보자 이번 주 꼭 변화에 성공해 보자.

 

P126.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7. 우리는 하느님을 정말 많은 방법으로 인격화할 수 있습니다. 신이 한 분이던가? 신이 여러 분이던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의 카테고리에 묶여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P127. 내 말은,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P132.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P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P134.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상실을 해 보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라는 것이군. 삶은 고통이요 슬픔이니, 고통스럽고 슬픈 삶이 더 긍정성을 가져다 준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P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4. 사상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P135.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P135.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고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P135. 그렇지요. 그래서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P138.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2.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P143.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P145. 사람은 죽임을 통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P156. 티라와 신은 어떤 짐승을 인간에게 보내고, 그 짐승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현현한다. 인간은 그런 짐승, 하늘의 해, , 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구본형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 같다. 물론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서 인간은 배워야 한다는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P157.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P161.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희생과 천복

 

P177.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나만의 공간을 성화시켜 보도록 하자. 꼭 신성스러운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의미를 두고 거기서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찾는 자궁 같은 의미를 둔다면 나도 신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

 

P177. 주거 환경이 빚어내는 풍경 자체가 아이콘 노릇을 하는 겁니다.

 

P178.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로 열리게 됩니다.

 

P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변경연 첫 오프라인 모임. 뗏수선배님이 진행을 하시면서 들었던 내용 같다. 구본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선생님 사상의 시작이 신화인가?? 그렇다면 나는 신화를 좇아가야 겠군 선생님처럼 살고 싶으니까

 

P179.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P186.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즉 사물 너머의 무엇인가를 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노력을 해야 보이는 것이니, 나는 계속 현상에만 집착하고 과거로만 들어간다. 어쩌면 너머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의미가 같은 것이 아닐까?

 

P188.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 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념 아닙니까?

 

P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올바른 정신, 자신만의 확실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이 세속된 삶, 구속된 삶이 아닌 진정한 너머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인가? 왜 계속 나는 질문을 하는 것이지? 답이 안나오지 질문을 하지나만의 생각으로 해석을 하면 되는 것이겠지? 어렵다.

 

P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확실히 책은 재미있다. 책을 통해 얻는 것도 많다. 하지만 이 번 신화의 힘이라는 책은 너무 어렵지만 제일 재미있다.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질문만을 하고 있지 않은가?

 

P190.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정말 좋은 방법이다. 왜냐면 나만의 기준을 만드는 일이고, 나만의 관념, 나만의 사상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것이 내 생각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P194.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 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농경 신화는 내계 지향적입니다.

 

P194. 그러나 농경 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 됩니다. 그래서 내계 지향적 관계가 이루어지지요.

 

P195.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구본형 선생님의 사상의 기본이 되는 내용이다.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 죽음이 거름이 되고, 죽음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

 

P195. 따라서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하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시간의 흐름이다. 그런데 구본형 선생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은 죽어도 사는 것이니까.

 

P203.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제 점점 이해가가 가기 시작했다. 목차구성을 뒤에서 좀 당겨와도 될 것 같은데

 

P203. 기독교 전승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영생의 나무 위해 걸려 있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바로 이 영생의 나무의 열매인 것입니다.

 

P204.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P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P213.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4 8, 장례식의 의미는 영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군. 정확히 이제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1차 오프라인 모임이 장례식이었는지. 우리는 살기 위해 죽는 것이고,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것이고,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것이었다. 영적인 죽음은 육체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도 있다.

 

P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그러나 나는 살아있다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P218. 즉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P221.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P222.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현재 천복을 좇고 있다. 내 행복을 찾는 것이고, 내가 행복하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삶. 그것이 내 천복이다. 어쩌면 남을 위한 삶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삶인 것이군. 나를 죽이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타인이 스스로 죽게 만드는 역할을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다.

 

P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5. 천복 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자의든 타의든 분명 천복을 향한 전환의 시기는 온다. 그것을 잡느냐 못 잡느냐다.

 

P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기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P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은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맞는 길인지는 알 것 같다. 느껴진다. 확실하다. 그런데 불안하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간 사람이 분명히 있겠지만, 아직 이정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정표가 되면 되는 것일까?

 

P227.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P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영웅의 모험

 

P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나도 영웅이라는 것이군. 기분이 나쁘지 않다. 더 큰 것에 바치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어울리지도 않기에

 

P229.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가면 갈수록 흥미진지하다. 영웅이라는 말을 빼고 내 이름을 넣어도 되지 않는가? 상실, 모자람, 찾아 헤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네?

 

P230. 그렇고 말고요.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P231.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어머니는 나에게 마리아고, 신이다.

 

P233.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 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얘기한다. 점점 영웅이 재미있어 진다. 부끄럽지만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영웅이 아닌데얼굴이 붉어 진다.

 

P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것이구나. 신화를 통한 의식의 변모. 신화를 제대로만 안다면 의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겠구나

 

P235.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P238.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이 있는 것이지요.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납니다.

 

P238. 그런데 자진해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던져지는 여행이 있어요. 가령 징집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것이 곧 이런 여행이지요.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P240.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자극에 반응하는 범용한 전선 덩어리에서도 더도 덜도 아닙니다. 이러한 19세기의 해석이 현대 생활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쥐어 짜내고 만 겁니다.

나는 심리학적인 접근법을 알고자 앞으로의 방향도 그렇게 잡았는데, 너무 이론적으로만 가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움을 줄 수는 없겠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사회과학이라는 칼로 제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지. 도움만 받아야 겠다.

 

P242.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질서로부터의 소외감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내려진 저주 같아 보입니다.

 

P246.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P249.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체계를 도출 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P259. 전통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도 있어요. 이런 영웅은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상투성에서부터 전통의 상징성을 해방시켜 당대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지요. 이런 작업은 모든 문화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P263.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63.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선배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프라인 수업 때, 구 선생님께서는 거의 한 마디도 안 하셨다고 했다. 역시나 선생님은 이 신화를 통해 그리고 조셉 캠벨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으셨던가?

 

P263.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 줄 수 있습니다.

 

P265.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1.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P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천복을 따름에 있어 걱정이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먹고 사는 일. 그래도 삶은 이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천복을 따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이 먹고사는 일 때문인거 같다. 어떻게 초월을 하지? 로또도 안되는데자연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인가? 아니면 저절로 배가 부르다는 의미인가?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P273.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 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P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나에게도 좋은 스승이 생겼다. 구본형 선생님을 비롯한 동기분들, 그리고 선배님들 나는 이들이 비추는 길을 가련다.

 

P276.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을 만나는 일입니다.

 

P277.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P277.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 밖에 없지요.

 

P278.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79.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 낙타의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인 겁니다.

 

P285. 아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요. 맡겨서 홀로 서기에 충분한 힘이 있게 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P286. 가령 신화는 우리에게, 나이 몇 살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쳐줍니다.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나게 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그래 일단 천복을 좇아보자.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자. 그리고 남들을 위해 행복을 실천하자

 

P287.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91.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참 멋있는 말이다. 모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 아닌가? 끝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P291.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P293. 중국을 비난하는 일도 없고 자기를 홀대했던 서구를 섭섭하게 여기는 일도 없습니다. 국가에 대한 것뿐이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달라이 라마는 가장 존경하는 분을 석가모니와 모택동이라고 했다. 왜냐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적을 존경한다는 것. 나도 이런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까?

 

P296.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P296.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7.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P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P301.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진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조화여신의 은혜

 

P305.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P306.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도 갑니다.

 

P308.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문화,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즉 대지와 아주 밀접합니다.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P315. 교황 되는 거요? 그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것은 사무적일 따름이에요. 교황이 되어본 남성은 많아도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어본 남성은 없잖아요. 서로 맡은 역할이 따로 있는 겁니다. 여성을 보호하는 것, 그때는 그게 남성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겁난다. 물론 내가 겁내 할 일도 아니고 돌아가셨지만, 당시 이런 발언의 후폭풍이 엄청났을 텐데..

 

P316.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로서,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P319.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P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에요.

이런 발언을 해도 괜찮은 건가? 과연 종교계에서 가만히 있을까?

 

P322. 마리아에게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P328. 우리 삶과 우리 생각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을 보면 이 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P329. 이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여신이지요. 재생은 영적인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어머니가 바로 성모 교회인 파리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의 노트르담인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교회를 나섬으로써 거듭나는 겁니다.

 

P334.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P334.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나의 사회성은 아버지에게서, 본성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 확실하다.

 

P335.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36.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6.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만물에 의미를 찾는다면 우리가 우주라는 것을 믿지 않아도 믿는 날이 오겠지?

 

P337.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1.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P341.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과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P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기다림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대한 미안함이 가장 큰 것도 사실이다. 두려움도 있지만 기다려 주시는 부모님께 가장 미안한 것이 크다. 천복을 찾는 여행이 오래 걸린다면,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닌가

 

P355.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P356.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P356.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 입니다. <앨리엇>

천복을 좇는다면 나는 황무지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

 

P358.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P360.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P361. 우리는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P364.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싶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P365.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구속받는다고 투덜거리고, 힘들다고 하고, 심지어 안했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가장 큰 관심사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P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365.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에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네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P365. 여기에는 가 있고, 여기에는 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P366.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P373.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흐음사랑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영원의 가면

 

P378.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가족을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를 명상하는 것도 중요한 명상이지요.

 

P381.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P383.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 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너무나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눈에 들어있는 것을 빼려는 노력은 안하고 그저 보이는대로 생각하는대로 상대만 잡아 빼려고 하고 있었다니.

 

P385. 우리는 의식의 파편, 에너지의 파편으로만 살고 있지요. 그러나 종교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특정 시간에 존재하는 이 특정 육신의 의도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대국적인 의식의 통찰 안에서 사는 겁니다.

 

P387. 모이어스씨가 곧 그 깨달음의 수레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씨가 곧 정신의 광휘인 것입니다.

 

P387. 남의 삶에서 의 삶을 인식하는 것. ‘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여행을 통해서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한다는 말을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P289.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이라는 프레임 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이건 아마 원의 공간적인 측면일 겁니다. 그러나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갔다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P391.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P393.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범용해 보이는 어떤 대상의 동일시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내가 삶을 살고 있는 공간, 시간에서 보는 모든 사물은 다 이유가 있었고, 거기에 영원이 있었고, 그리고 영혼이 있었다. 무생물이지만 생명이 있었고, 그것들에게도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사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들은 추억하고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P393.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P394.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P396.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P399. 내가 절정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은 어떤 경험에서든 마찬가지지요.

 

P407. 종교는, 자기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의 삶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P409. 영원은 영속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적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P411.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시처럼 사는 삶. 어쩌면 여기에 해답이 있을 수도 있다.

 

P413.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P413.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P413.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이 책을 보면서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나를 더 두고봐야 하지만, 확실히 태도는 바뀐 것이 느껴진다. 뭔가 다 소중하다는 느낌이 든다.

 

P414. 시는 언외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P415.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관한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영원한 삶, 불멸의 삶은 분명이 존재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알게 되었다. 육체는 죽어 없어질지언정 정신만은 오래 살 수 있도록 지금에 충실하자.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사실 정말 안 읽힌다. 개인적 지식수준의 한계에 부딪혔다고 전적으로 생각되지만, 목차의 구성이 너무나 아쉬웠다. (다 읽고 난 다음에 가장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 신화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없이, 또는 신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2장 정도에서 아마 책을 덮고 책장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 신화의 힘??’ 하고 다시 집어 들면 똑 같은 장면이 반복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대담집이라는 책의 특성이 있지만, 음악에서도 부드러운 인트로로 시작하듯 이 책 역시 흥미를 끄는 부분부터 먼저 제시했으면 어땠을 까 생각된다.

(‘이 연결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에피소드 형식이기 때문에 순서를 조정해 본다.)

 

차 례

태초의 이야기꾼들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

조화여신의 은혜

사랑과 결혼 이야기

내면으로의 여행

영원의 가면

신화와 현대 세계

 

구성이유

- ‘태초의 이야기꾼들에서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특히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처음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음

- 다음으로는 가장 교훈적이며 조셉 캠벨의 사상의 주를 이루는 천복 영웅순으로 배치

- 여성(여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사랑과 결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짐

- 내용이 바탕이 되어 신화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소재이며, 결국 신화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며,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식으로 마무리하고자 함

 

보완점

책에서도 조셉 캠벨은 말한다. ‘읽고 싶은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읽었던 책을 모조리 읽는다.’ , 참고 혹은 부록으로 캠벨이 읽었고,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의 책을 소개해 주면 좋을 거 같다.

용어 부록 수록이 필요하다. 번역서이기 때문에 이윤기 선생의 언어가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굉장히 거부감을 줄 수 있다. 책 자체의 내용은 흥미를 끄나 단어가 반감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한자와 더불어 전문용어는 별도 해석페이지가 있었으면 한다.

대담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가 있었으면 한다. 갑작스런 전개와 전환으로 사실 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초반구성에 책의 근간인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소개가 있다면 정신 없음을 다소 잡아주는 기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

대화형식으로 풀어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내용파악이 더 힘들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오히려 독자에게 친근함을 주는 역할을 한다.

빌 모이어스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즉 다른 책에서도 빌 모이어스의 역할과 같이 내용을 정리해 주고 방향성을 잡아주는 부분을 삽입한다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더욱 부각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해를 돕고 더 많은 정보를 주기위해 삽입만 그림들이 신의 한수라 생각한다. 신화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저자의 눈으로

 대담 형식의 프로그램을 책으로 그대로 옮겼을 때의 단점이 있다. 그것은 생동감과 내용전달의 한계다. 분명 TV로 방영되었다면 흥미와 더불어 내용 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신화의 힘>이라는 제목과 내용으로 다시 출간을 한다면 절대적으로 대화형식을 채택하지 않겠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에 입각하여 저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풀어나갈 것이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더 익숙한 예시를 (신화 모티프에서 나온 영화) 추가할 것이다. 스타워즈 이야기에 라이온킹같은 영웅들의 여정을 쉽게 풀어가며 더 친근하게 접근하겠다. (물론 당시에는 라이온킹은 제작되지 않았다.)

 더불어 가장 힘을 주고 싶은 내용인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 카테고리에 실제 성공한 인물의 인생을 (천복을 좇은) 소개하겠다. 신화는 스토리다. 인생도 스토리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독자에게 한 발 더 다가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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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8 18:24:59 *.18.218.234

와, 내가 저자라면 깔끔하게 눈에 들어오네. 난 그 부분이 젤 어렵더라. ㅡㅜ

발췌 부분은 나중에 읽어봐야지~ 같은 글이라도 각자 느끼는 게 다른 거 신기함.

오늘은 여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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