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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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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5일 05시 06분 등록

『신화와 인생』

조셉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갈라파고스

 

6주차 (5/8~5/14)

티올(윤정욱)

 

[북 리뷰 INTRO]

 

<연구원 시작 6주에 접어들어 나에게 당부 하는 글>

 

정욱아. 너는 왜 연구원 과정에 지원했니? 왜 일요일 저녁만 되면 주변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신물을 삼키는지 모르겠구나.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다. 지난 6주 간 너의 연구원 생활을 제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물론 네가 연구원 과정에 지원을 할 때에도 나는 너를 지켜보았다. 너의 생각을 솔직하고, 참신하게 드러낸 것도 있었고, 예전에 써두었던 글을 마치 새로 생각을 짜낸 듯이 짜집기를 한 곳도 많더구나. 아쉬운 점은 더 있다. 너의 개인사는 네가 갓 회사원이 되었던 6년 전의 그것에서 전혀 나아진 점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네가 청춘(靑春)의 시기라고, 너의 인생의 황금기라고 기억하는 대학시절의 너의 열정적인 모습들은 정말 눈부셨다.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더라도 그 이상 보람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너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너의 황금기는, 네가 푸르른 청록의 청춘(靑春)의 시기라고 모두에게 아니 나에게 자랑할 만한 시기는 정녕 그 때가 마지막이었느냐. 나는 지금 지난 6년 간의 회사원으로서의 너의 모습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회사에서 너의 위치를 잡았고,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회사에서의 생활이 짐짓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말고 더 무엇이 너에게 남아있느냐. 연구원 지원서를 쓰며 너의 지난 인생사를 돌아보았을 때 지난 6년 간의 있었던 일 가운데 너를 당당하게 하고, 너를 빛나게 하는 추억이 대체 무엇이 있었느냐. 여기저기서 건져 올린 추억과 상념들로 기워 만든 너의 개인사는 그런 의미에서 반쪽 짜리에 불과하다.

 

정욱아, 사랑하는 정욱아. 정신 차려라. 제발 정신 차려라. 내가 오늘 오랜만에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너의 지난 시간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오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렵게 시작한 연구원 과정에 임하는 너의 자세이자, 태도에 관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앞으로도 지금처럼 연구원 과정에 임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 그만두거라. 너는 자격이 없다. 내 말에 따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라. 너는 사람이 어떻게 매일 전심전력으로 노력만 할 수 있겠냐고 변명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해져라.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솔직해져라.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 듯 하게 너를 포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속이지는 못한다. 지금부터 나의 솔직한 심정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구나. 처음 연구원 과제를 시작할 때 너는 잠시 빛나는 듯도 싶었다. 너의 생활 속에 네가 해야 할 많은 일들 가운데 우선 순위가 정리 된 듯도 싶었다. 하루에 두어 시간을 떼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내는 듯도 싶었다. 그 시기에 너는 얼핏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있는 예닐곱 평 되는 그 공간은 항상 깨끗했고, 너의 생활 습관은 정갈하여 보지 않아도 몇 시에 네가 무슨 일을 할지 그릴 수 있었다. 차분히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너의 모습은 네가 있는 그 공간을 마치 성소(聖所)로 만드는 듯도 싶었다.

 

하지만 1주일을 가지 않더구나. 대체 왜 그랬느냐. 왜 게으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항복을 했느냐. 걸음마를 걷는 아이는 수천 번, 수만 번 넘어지기도 한다고 변명하고 싶은 것이냐. 너는 걸음마를 걷는 아이가 아니다. 너의 모습은 걷기 위해 애를 쓰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 조차 귀찮아서 누워 낮잠을 자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량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 뿐만 아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네가 제출하고 있는 북리뷰와 칼럼은 점점 더 성의가 없어지는구나. 지금 너의 머리 속은 온통 스무 페이지의 분량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것 같구나. 과제 속에 너의 상념과 고민은 사라지고, 온통 저자의 글을 발췌한 내용들로만 가득하다. 과정 속에 있는 주제의 책들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깊이 고민하고, 선정한 책들이다. 넓게 읽고 깊이 있게 너의 생각을 정리해 두면 너의 사고와 인식을 크게 확정시킬 좋은 책들이다. 결국 문제는 그 책을 읽는 너의 자세다. 그 책들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극을 받았다면, 하고 싶은 말이 없을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네가 묻는다. 네가 연구원에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냐? 여러 권의 좋은 책들을 전과 다르게 깊게 읽으며 너의 사고를 깊게 하고, 깊어진 사고를 바탕으로 흩어져있는 너의 관심사를 한데 집중시키고, 종래에는 너의 천복을 좇아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 아니었느냐? 그것이 네가 말하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책을 읽고, 대충 사고하고, 대충 과제를 해서 어떻게 너의 사고가 깊어질 수 있다는 말이냐. 대체 네게 한 번 따져 물어보고 싶구나. 책 한 권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닌데, 너는 그 책을 너무도 쉽게 읽고 있구나. 책을 한 번 잡았으면 가로로 읽고, 세로로도 읽고, 뒤집어서도 읽고 때로는 저자와 싸움이라도 할 듯 머리를 쳐들고 읽고, 때로는 홀딱 벗고 무릎이라도 꿇은 채로 읽을 일이다. 왜 그렇게 고생하듯 읽어야 하는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너의 습관과 사고는 마치 작은 고무 풍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무 풍선을 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무 풍선은 처음 숨을 집어 넣는 것은 쉬워도 딱 제 크기만큼 부풀고는 쉽게 더 커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숨을 멈추면 고무 풍선은 더 이상 부풀지도 않고, 크기도 변함이 없다. 풍선을 불기 위해서는 딱 제 크기만큼 부풀었을 때 사정없이 후우욱하고 긴 숨으로 더 불어야 마침내 봄철에 꽃이 터지듯 풍선이 부풀게 된다. 이 때 풍선 안으로 들어가는 이 긴 숨은 풍선 안에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긴 숨은 어느 곳만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고무의 탄성을 이겨내기 위해 온 사방을 향해 제 몸을 던져 세차게 달린다. 그래야만 풍선이 비로서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작은 풍선이 너의 사고의 범위이자 너의 그릇의 크기라면 고무가 가진 탄성은 너를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너의 습관들이자 관성의 유혹이다. 네가 책을 읽는 것은 너의 풍선, 즉 너의 사고를 키우는 긴 숨이 되고, 책을 이리 저리 고생스럽게 읽는 것은 너의 긴 숨이 풍선 안 쪽에서 사방을 향해 제 몸을 세차게 던지는 것과 같다. 그래야 마침내 너의 풍선은 크게 부풀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크게 부풀어 오른 풍선은 바람이 모두 빠지더라도 그 크기가 예전과 같지 않다. 또한 다른 책을 보며 새롭게 긴 숨을 불어넣으면 예전과 다르게 금방 풍선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사고가 유연해지고 깊어졌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한 번이라도 크게 부풀어 오른 풍선은 한 번도 부풀어 오른 적이 없는 풍선과는 다르다. 이것이 바로 네가 고생스럽더라도 책을 깊이 읽어야 하는 이유다.

 

지난 주 네가 읽었던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을 알 것이다. 중세영문학을 전공하던 그는 1929년 대공황으로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5년 간 칩거 생활을 들어가며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가 있으면 그의 모든 책을 몰아서 보면 방대한 지적 사유의 시간을 보냈다. 고작 그의 나이 스물 여섯 살에 시작 된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 된 그의 칩거 생활을 그의 나이 서른 한 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 많은 풍선을 불었을 것이고, 그가 살던 작은 오두막은 그가 불었던 크고 작은 그 풍선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천복을 좇는 5년 간의 생활은 그를 더욱 깊은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5년 간의 칩거 생활을 마무리 짓고,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그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교수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혼자서 천복을 좇던 5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그의 사상과 연구의 깊이를 바다 보다 더 깊게 파고 들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편, 어렸을 때부터의 관심을 가졌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활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까지 쉬지 않고 계속 했다고 하더구나. 평생을 진지한 노력으로 살아온 그다. 너는 그런 그가 첫 책은 쓴 것이 언제인지 아느냐? 바로 1949년이다. 그가 그의 천복을 좇기 시작한지 정확히 20년 만의 일이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살의 일이다. 느껴지는 바가 있느냐? 너에게 묻고 싶다. 너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얼마나 간절히 너의 천복을 좇을 자신이 있느냐?

 

너 만의 책을 쓰겠다고 다짐한 것을 알고 있다. 책을 쓰는 것이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 또한 네가 분명히 지나가야 할 하나의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너의 다짐을 그 각오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쓸 일이다. 물론 그냥 읽고 그냥 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잘해야 한다. 잘 읽고 잘 써야 한다. 좀 전에도 당부 했지만 대충 허투루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는 너무 사로 잡혀서도 안 된다. 실패해도 좋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처음에는 많이 읽고 많이 썼으면 좋겠구나. 양이 질을 계속해서 압도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질이 양을 압도하는 순간이 오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너에게는 부담이나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힘들고 지칠 때 값싼 위로나 격려가 아닌 네가 진정으로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낼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동안 너에게 많이 무심했던 점을 깊이 반성한다. 금번 과제를 통해 진짜 연구원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변곡점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바란다. 너의 고무 풍선이 앞으로도 더욱 커지고 커져서 너의 육신을 가볍게 하고, 그 가벼운 걸음으로 즐겁게 너만의 천복을 좇아 가기를.

 

 

1. 작가 분석

 

√ 같은 저자를 네 번 리뷰 한다는게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자기만의 언어로 써내는 부분이 특히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전혀 다른 저자를 매주 만나게 됩니다. 책을 한권이라도 내거나, 책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저자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될 수 있고, 그의 삶에서 내 삶의 단초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이 책의 특징

 

이 책은 1983년에 에설런 연구소에서 조셉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2) 종교학이란? (저자의 전공)

‘- 여러 가지 종교를 비교하여 연구하는 종교학의 한 분야. 비교종교학의 연구 주제는 종교의 공통점, 차이점, 서로 다른 종교끼리 미친 영향 등이다.

 

‘- 종교현상을 객관적·비판적으로 연구하고, 특정의 종교가 아닌, 종교 일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총칭한다. 객관적이라 함은 특정의 신앙을 전제로 하여 그 변증(辨證)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비판적이라 함은 공격적이라는 뜻이 아니고, 종교의 근거와 본질을 자료와 논리에 의해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철학도 이에 포함되는데, 종교학을 특별히 실증적(實證的연구를 하는 것에 국한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종교 일반의 해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를 하지 않아도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특정의 종교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는 특수종교사로서 종교학으로부터 제외될 때도 있다.

 

# 종교학의 기원 #

 

종교학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종교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는 점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에게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고, 또는 헤로도토스와 같이 이국(異國)의 종교습속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를 들기도 한다.

이성의 한계를 넘은 형이상학적 사색을 피하고, 비판철학을 완성한 칸트가 종교철학의 시조인 동시에 종교학적 입장과 그 의의를 처음으로 밝혔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종교학의 원어(原語) 'science of religion'을 처음으로 사용한 막스 뮐러가 종교학의 시조라고 한다. 그는 산스크리트와 고대 인도 종교를 연구한 학자인 동시에, 고대의 종교와 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를 하여 1873년에 《종교학개론》을 출판하였다.  

 

# 종교학의 경향 #

 

종교철학을 제외하고 그 후의 종교학의 경향은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막스 뮐러, 틸러, 쇠데르블롬 등, 고대 종교의 문헌학적 연구를 토대로 하면서 여러 종교를 비교하는 것이다. 처음에 비교종교학이라고 불리던 이 학문은 현재는 종교현상학이라고 한다. 철학에서의 현상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종교적 관념과 제도의 유형학(類型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엘리아데에게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듯이 종교상징의 구조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편 성서의 문헌학자 로버트슨 스미스가 미개인의 인류학적·사회학적 연구를 함으로써 《셈족()의 종교》(1889)를 쓴 것처럼, '인간과학'의 한 분야로서 종교학을 보는 입장도 있다.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문화인류학적 연구, 뒤르켐, M.베버의 사회학적 연구, 제임스·프로이트의 심리학적연구 등에서 종교민속학·종교사회학·종교심리학이 생겼다. 이들 학자는 종교이론의 형성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지만, 이들은 사회학자 또는 인류학자였기 때문에 종교학 측면에서의 적극적 대결이 없어, 종교학은 다른 학문과의 교합(交合)면에서는 활발한 양상을 보였으나 종교학 자체의 영역에서는 정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3) 저자의 생애

 

1904 3 26일 미국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서났다.

 

1904 : 3 26일 미국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 출생

1925 :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 전공

이후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겨 중세영문학으로 학사와 박사 학위 취득

1927 :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

1927~1928 : 파리 대학

1928 ~ 1928 : 독일 뮌헨 대학교

1934 ~ 1972 : 미국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

1987 10 31일 사망

 

# 주요 저서 #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49) :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 신의 가면 (1959~1968) :

√ 신화와 함께하는 삶 (1972) :

√ 신화의 이미지 (1974) :

√ 세계신화지도 (1983~1989) :

 

 

# 위키피디아 검색 인용 #

 

뉴욕에서 태어날 당시 캠벨의 집안은 상위 중산층 가정이었으며 미국에서는 드문 가톨릭 가정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캠벨은 어느 날 아버지가 데려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보게 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해튼에 있는 미국자연사박물관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그는 곧 인디언 사회의 여러 측면에 공통적으로 신화가 엮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화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1921 코네티컷의 캔터베리 스쿨을 졸업한 캠벨은 다트머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1925 중세 문학 석사, 1927 영어 문학 석사 학위를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1927년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특히 1924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동안 선상에서 만나게 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 금강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힌두교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관심 분야가 넓어지자 기존의 전공이었던 중세 영문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박사 학위 과정을 중단한다. 이후 대공황이 닥쳐오자 5년 동안 무직 상태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본인은 훗날 기본 독서와 공부는 이 시기에 거의 다했다며 회고하였다.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58) 여러분은 어린 소녀 속에서 늙은 여인을, 늙은 여인 속에서 어린 소녀를 느낄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여러분이 나이 드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방식이다.

 

è 늙은 여인 속에서 어린 소녀를 느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린 소녀 속에서 늙은 여인을 느낀다는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60~64) 사랑의 다섯 가지 단계

1단계 :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

2단계 : 친구와 친구의 관계

3단계 :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4단계 :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

5단계 : 광인(르 포)의 사랑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 된 사랑)

 

(65) 가사의 문제는 여러분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바로 여러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멋지고 작은 의식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68) 고결한 마음이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되어 있다.

 

(69)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72) 남자가 무너지지 않는 한, 여러분은 진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

 

è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이해가 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다.

 

(72) 양쪽 모두 정신적 길잡이가 없는 한, 결혼이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은 발효되고, 융합되고, 분해되고, 부패되어야 한다.

 

è 상념 하나 : 태초의 인간은 어쩌면 나무젓가락과 한 벌과 같은지도 모른다. 하나였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이원성(duality)에 눈을 뜬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게 된다. 서로 붙어 있던 나무젓가락이 하고 떨어지며 서로 기대어 의지하게 된다. 사람()이 된 것이다. 늘 서로 가슴과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하나였던 둘이 되어 서로 객체가 되었다. 한 쪽이 없이는 사람()으로 존재 할 수도, 서 있을 수 조차 없기에 한 쪽은 늘 다른 한쪽을 그리워한다. 그렇게 평생을 그리워하던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 진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워하던 짝을 만났으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결혼 전 서로가 객체인 주체로서 존재했던 연애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이다. 신이 한 벌의 나무젓가락을 하고 뜯어서 만든 것이 사람()이라면, 결혼은 남녀가 다시 만나서 아름답게 춤을 추는 젓가락질과 같다. 두 사람 모두가 자아를 굽히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모양()으로는 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다. 젓가락질은 두 젓가락을 서로 겹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태초에 하나()였던 나무젓가락을 창조신이 둘()로 떼어내 사람()으로 만든 것은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둘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서로를 더욱 그리워하고 소중한 존재로 아끼게 하려는 배려는 아니었을까. 결혼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이제서야 만난 그 둘()이 서로의 자아를 무너뜨리고 조심스럽게 포개어지며 둘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원래 나무젓가락은 한 벌이었듯 결혼은 어쩌면 오매불망 기다린 재회(再會)의 현장이다.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76) “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닌 고통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내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로 하여금 행동에 돌입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

 

è 2009년 대만에서 큰 수해가 났을 때 나는 한 걸음에 대만으로 날아갔다. 왜 그랬을까. 바다 건너 섬 나라 사람들의 고통이 어떠한 경로로 나에게 그렇게 크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일까?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것이 자비(慈悲)’의 마음이라면,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나는 얼마만큼이나 진심으로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슬퍼할 수 있을까?

 

(77) 그것은 의무도 아니고, 계산도 아니다. 그것은 섬광이다. 우리 안에 있는 삶의 진실의 발견이다. 그런 순간에 여러분은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깨달음이다.

 

è 불교 교리에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말이 있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리 안에 존귀한 불성(佛性)과 신비(神秘) 나아가 신의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자,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타인을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너와 나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은 곧 나의 진실이 상대방의 진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믿음과 종교 그리고 개개인의 신념을 떠나 우리 모두는 원래 하나였다는 우리 안의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79) 신화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을 합쳐 줄 수 있는 실마리다.

 

è 신화를 통해 우리는 무의식의 원형(原型)을 짐작할 수 있다. 신화의 곳곳에 숨겨진 여러 은유(메타포)의 장치들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을 들여다 봄으로써,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기도 한다.

 

(80)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82~83)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è 돈에 관해 무심한 삶을 살아왔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해서 돈에 관해 무심해 진다고 모두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돈에 무관심한 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힘일 것이다. 나는 지금껏 대체 나의 삶에게 무엇을 선사했을까?

 

(85) 여러분은 자신의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가? 여러분은 돈을 사용하는데 있어 여러분의 의식 가운데 과연 어떤 요인을 선호하겠는가?

 

(90) 여러분이 지내 온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중략)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è 구본형 작가의 『마지막 편지』 27 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좋아하는 작가가 인용한 작가의 글을 읽는 기쁨이 이런 것인가 싶다.

 

(27~28) 지난 삶 자체가 하나의 줄거리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절, 그 순간에는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이 또 다른 뜻밖의 일을 뒤따르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면 그야말로 완벽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99) 나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녔다.

 

(100)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113)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è 다시 한번 나는 왜 연구원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본다. 이것은 정녕 내가 원했던 일인가? 아니면 모두가 나서는 길을 얼떨결에 같이 따라나서는 것인가?

 

(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121) 학생, 순종, 집주인,

 

(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 준다.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 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è 원시 수렵 사회에서 사냥꾼들은 사냥을 하기 전 또는 사냥을 마치고 나서 그들의 의례를 치렀다. 사냥으로 인해 희생된 동물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표현이자, 그들이 죽고 나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구조의 세계에 속하게 된 것을 축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공동체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의례의 풍습이 있다. 바로 고수레 풍습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조금 떼어 자리 밖으로 고수레를 외치며 허공에 던지는 것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이어가는 행위고, 인간의 생명을 이어가는 행위에 다른 생물들의 희생이 없을 수 없다. 고수레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다는 표시이자, 그들과 인간들이 결국에는 운명공동체임을 인지하는 행위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고수레 문화가 몽골에서도 원형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몽골사람들은 초원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하늘(탱거리)와 땅(가잘) 그리고 사람()에게 세 번 고수레를 하고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고수레에 대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중 조선 숙종 때 북애 노인이 지었다는 <규원사화>에는 이러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옛날에 고시(高矢)씨가 있었는데,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 짓고 수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농사를 지은 음식을 먹을 때 고시네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후대에 이으러 고수레라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한국과 몽골에 유사한 의례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땅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나고 자란 어머니의 대지(大地). 어머니 대지를 도움 없이 태어나거나 자라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은 어머니 대지에서 자란 우리들이 종래에 도달해야 하는 곳이다. 그곳은 생명의 죽음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관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살다 보니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 것이지 태어날 때 아 기쁘다 하고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다.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때도 아 슬프다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은 내공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130) 우리는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음식을 필요로 한다. 물질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 한다.

 

(131)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한다나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한다.

 

è 모든 의례에는 그 함의를 내포한다.

 

(149)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175) 꿈의 비밀이란 주체와 객체가 똑같다는 것이다. 객체는 스스로 빛을 발하며, 유동적인 형체를 취하고, 의미에 있어서도 다의미적이다. (중략) 이것은 무의식과 자아의식의 관계이다.

 

è 내가 꾸었던 꿈들을 기록하던 때가 있었다.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나의 무의식의 한 조각이라고 생각하니 또 그냥 지나칠 수 많은 없다. 가끔은 꿈을 꾼다는 것이 파도가 치는 바닷가를 나 혼자서 조용히 거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펼쳐진 저 넓고 푸른 바다는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나의 세계다. 나는 수영을 할 줄도 감히 저 넓은 푸른 바다를 헤엄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나의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바다 속의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깊다고는 들었지만 얼마나 깊은지는 알지 못한다. 바다는 나의 무의식 세계다. 나는 그것의 존재를 믿지만 이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오직 느낄 뿐이다. 마치 바람과도 같다. 바닷가를 걸으며 파도는 끊임없이 나를 향해 다가 오지만 발이 젖을까 도망치면서도 끊임없이 바다 주변을 맴돌게 된다. 나는 그저 바다 주변을 산책하듯 걸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저 바다 먼 곳에서 떠내려 왔음직한 조개 껍질들과 검붉은 해초 더미를 주울 때도 있다. 내가 꾸는 꿈의 조각들이다. 나는 꿈을 꾼다. 꿈은 바다의 파도와 젖은 모래가 만나는 그 즈음의 영역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바다에서 떠 밀려 온 조개 껍질들을 줍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조개 껍질로 드넓은 바다를 들여다 보는 것. 나는 새끼 바다 거북. 언젠가는 나도 저 바다 깊은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185) 만물을 로 파악하며, 그것들의 삶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적인 명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고의 진술이다.

 

(189) 우주는 한 몽상가가 꾼 꿈이며, 그 꿈속에 나오는 모든 사람 역시 꿈을 꾸고 있다. (쇼펜하우어)

 

(205)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붓다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초월했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220)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장애가 되는 듯 보였던 모든 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것이 여러분의 변이를 위한 수단임을 깨달음으로써 말이다.

 

(222) Q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장애물은 무엇이며,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광휘로 변모시킬 것인 것?

 

(222)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6) 만약 세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생략) 즉 하나님을 향해, 우주를 향해, 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것을 향해 비난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관념은 이른바 인간 속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특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이미지일 뿐이니까.

 

(237) 즉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46)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

 

(247)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257)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è 구본형 작가가 자신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한 자신만의 성소(聖所)의 개념이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닐까 한다. 자신이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곳, 매일 새로워질 수 있는 곳, 우리는 그러한 자신만의 성소가 필요하다. 본문에서는 이 성소에 대해 그 공간에 있는 어던 것도 실용성을 그 주된 특징으로 지니고 있지 않고, 성스러운 공간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우리 자신의 삶의 조화를 위해 중요하다고 한다.

 

(259)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놀이 같다면, 여러분은 거기 열중하게 된다.

 

è 자신의 성소와 일상적인 공간은 분리되어야 한다. 나의 성소는 기숙사에 있는 책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로 옆에는 나의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 침대가 있다. 침대에서 책을 읽거나 책상에서 잠을 자거나 하지는 않지만 나의 경우는 성소와 가장 일상적인 장소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나만의 성스러운 놀이에 심취해 하늘을 나는 듯 취해 있다가도 이따금씩 저 깊은 일상으로 추락하는 것은 바로 나만의 성소와 일상적인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별도로 집 밖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해두고 글을 쓴다거나 집에서 글을 쓰더라도 서재를 따로 갖춰두는 것이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집 밖을 나가지 않더라도 출근하는 사람처럼 옷을 다 차려 입고 자신의 서재에서 글을 쓰기도 한다. 절대 잠옷 차림으로 서재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본인만의 리추얼이자 자신만의 성소에 입장하는 일종의 금제(禁制)이자 의례인 것이다. 자신의 성소에서 글을 쓰는 동안에는 집 안일이나 일상적인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와서는 글을 쓰는 것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신 만의 성소와 일상적인 공간을 잘 분리해야 하는 이유다.

 

(262)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265) 여러분이 일단 자기만의 성스러운 공간을 갖고 나면, 여러분은 필요할 때면 어느 장소든지 간에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중략) 하지만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우선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288) 우리의 종교는 모두가 이러한 이미지에만 매달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신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점은 곧 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è 힌두교의 신 칼리는 죽음과 파괴의 신이다. 푸른색 몸을 하고 자기 남편이기도 한 시나 남신의 시체 위에서 춤을 춘다. 목에는 해골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고, 한 손에는 피가 뭍은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거인의 목을 부여잡고 있다. 하늘에서는 브라흐마와 비슈누 등 여러 신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고, 칼리 여신의 뒤로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본당에 가기 전에 항상 사천왕상이 지키는 문을 지나게 된다. 사천왕은 모두 부릅 뜬 눈과 잔뜩 치켜 뜬 눈썹 그리고 커다란 입 등으로 표현된다. 왜 신들이 이토록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의 감정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초월하지 않고 우리는 신을 넘어설 수도 신비에 다가갈 수 없다. 괴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시적인 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천국을 가기 위해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과 의무의 감정을 모두 버렸을 때, 그 동안의 길을 안내해준 또는 마지막 문을 지키고 있는 신 마저 넘어서야 우리는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304)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30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è 본문 217페이지에서 소개 된 일화 (흑인)

 

(310)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352)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을 그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은 교훈적이라고 한다. 모든 사회학적 예술은 예술적이다.

 

(362) 성배는 여러분이 이런 밀폐 봉인된 장을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완전한 환희와 영적 성취의 감각이다.

 

(370)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è 작가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대중에게 선 보인 사람들을 작가라고 한다. 대중으로부터 얼마만큼의 큰 공감을 얻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 결과를 떠나 글을 쓰고 자신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들과 그 경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우리는 작가라는 표현을 쓴다.

 

(371) 여러분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잘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피카소처럼 유능한 화가가 되려는 것인가? 여러분이 삶에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바로 거기인가? 그것이 진정한 삶의 희생이다.

 

(372)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 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82)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 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 아니마 (anima)[1] :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이것은 남성에 있어서 조상 대대로 여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남성 속의 아니마로 인해 남성은 여성을 볼 때 현실적인 여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 된 여신상을 본다고 한다.

 

√ 아니무스 :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 여성에 있어서 조상 대대로 남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 옮긴이의 말 >

 

(430) 중요한 것은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430) 캠벨의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캠벨은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 등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고 믿었고, 그 배후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했다. (중략) 그는 특정 종교의 독단을 배제하고 궁극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겸손과 양보를 주장했다.

 

(431) 캠벨은 인간의 인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했다. 비록 사람마다 짧고 길고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태어남과 부름과 모험와 역경과 귀환과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영웅의 여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크게 성공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애석하게도 실패하고 은거해 버린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천복)’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작가의 글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쓰는 글이 되어야 한다.

<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좋으나 구체적인 방식이 없어 혼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작성하는 방법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포맷을 제시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이 방법으로 작성하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분량은 자유 >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 이 책은 1983년 저자가 살아있을 무렵 약 한 달간 열린 그의 강의 내용을 담은 강의록이다. 즉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조셉 캠벨이 지은 것이 아니라 조셉 캠벨의 강의 내용을 들은 역자가 그의 강연 내용을 엮어 낸 것이다. 이 책을 어떻게 구성했는지에 대해 역자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조지프와 함께 보낸 시간들로부터 이 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에설런에서 있었던 수개월간의 길고 집중적인 세미나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이 책에 균형과 광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저서에서 가져온 적절한 인용문들은 이탤릭체와 삽입문 형식으로 수록했다 (8 p)”

 

전반적인 구성은 의식의 세 단계(층위)로 구분하였다. 먼저 의식의 첫 번째 단계로 현세에서의 삶을 조망한다. 현세에서의 삶은 두 번째 단계인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변모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의식의 세 번째 단계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이다. 캠벨이 지은 여러 책에 언급 된 많은 인용과 일화 그리고 우화의 소개들을 의식을 세 단계 별로 묶어서 펴낸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의 의식 흐름에 대한 저자의 다양한 책에서 소개 된 일화나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집중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 별 분량이 길지 않아 소화하기 편했다.

 

# 각 단계별 KEYWORD #

 

‘- 첫 번째 단계 (현세에서의 삶) : 인식

‘- 두 번째 단계 (깨달음을 향한 길) : 신화

‘-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 깨달음, 열반, 니르바나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 구성에 대한 의문 (역자는 왜 이러한 순서로 글을 배치했을까?)

 

전반적으로 몰입하기 어려웠다. 이 책의 본문을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큰 힘을 쥐고 있는 것은 강의를 담당했던 조셉 캠벨이 아니라 이 책을 엮은 다이앤 K. 오스본이다. 의식의 세 가지 단계에 따라 전체적인 본문을 구성한 의도는 잘 알겠지만 각 단계별로 소개 된 에피소드들이 과연 이 의식의 단계에 왜 소개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선집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큰 흐름을 가진 줄거리의 책으로 이해하고, 그 전반적인 흐름을 좇으려고 각 챕터와 에피소드 간의 연관 관계를 파악하고 씨줄과 날줄을 엮듯이 각 에피소드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파악하며 읽어보고자 했다. 그러다가 책을 몇 번이나 다시 덮었다. 집중하기 어려웠고, 왜 이 에피소드를 이러한 순서로 배치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에는 이 책이 공부를 우등생이 꼼꼼하게 적어 놓은 대학 강의 노트 필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보태자면 같은 교수의 다른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도 관련 있는 내용은 꼼꼼하게 따와서 그 교수가 출제하는 어떠한 시험에도 완벽하게 대응이 가능한 만능 족보(?)를 만들어 둔 듯도 싶었다.

 

이 책의 절반을 지나고 나서야 이 책을 하나의 큰 흐름의 책으로 보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선집을 보듯이 인용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너무 구속되지 말고 편하게 읽기 시작하니 잘 읽혔던 것 같다.

 

 

. 강의 커리큘럼 소개하면 좋지 않았을까?

 

이 책에 대해 아쉬운 부분은 첫째도 역자의 의도이고, 둘째도 역자의 의도다. 전체 본문 구성을 강의 커리큘럼 순으로 해도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일관성 있는 흐름을 위해 꼭 의식의 세 단계 흐름의 구성을 가져가야 한다면, 별지를 통해서라도 강의의 커리큘럼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었다면 독자가 (적어도 내가) 느꼈던 혼란을 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도입의 단계는 마지막으로

 

이 부분은 옮긴이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부분이다. 아포리즘에 대한 내용이 도입의 단계에서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한다. 도입의 단계에서 소개 된 상당수의 아포리즘 역시 본문을 읽다가 보면 우리가 많이 공감하고 또 밑줄을 그은 내용들이 많았다. 본문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해 두어,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로 하여금 역자가 생각한 주요한 캠벨의 아포리즘을 다시 한번 복습하게 하거나 독자가 인상 깊게 읽었던 문장들을 서로 비교 할 수 있도록 해당 내용을 본문의 마지막에 배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 Companion (선집) : 보기 편했다

. 다양한 경험과 우화 소개 : 지루하지 않았다

 

신화는 재미있다. 저자는 저자의 또 다른 책 『신화의 힘』에서 신화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신비(내면 세계 또는 자연)의 세계로 가는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조선 시대 할아버지, 삼국 시대 할아버지를 거쳐 신석기 시대 할아버지, 구석기 시대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때 그들이 동굴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앉아 했을 법한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화의 힘이다. 신화가 하늘 위에 있는 신비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시간의 장(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으로 끌고 내려와 이를 인간의 말과 글로 설명하고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은 신학이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종교가 우리 안에 신비의 새싹이 있음을 강조한다고 한다. 예수가 그랬고, 부처가 그랬다. 우리 안의 신비의 새싹을 찾아 떠나는 일생의 과업을 영웅의 여정이라고 한다. 많은 신화에서 영웅의 여정을 그리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신비는 이거다 라고 분명한 글과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과 인지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차원의 세계에서 삼차원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신비에 대해 안다고 하는 사람은 진정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진정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신비는 오직 드러낼 수 있을 뿐 설명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 신화는 상징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이러한 상징이라는 도구는 신화를 더욱 재미있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신학(神學)의 단계로 내려오면 불가피하게 설명을 보태고, 이론적 배경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의 한계일 뿐이다. 삼차원의 세계를 이차원의 언어로 최대한 표현해야 하는 것은 신학의 과제이다.

 

본문 가운데 저자는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 신학의 도움을 빌리기도 한다. 생소한 용어와 신들의 이름은 책에 대한 집중을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계속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저자의 다양한 경험과 우화에 대한 소개가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어떤 고귀한 철학이나 신화도 글에서 그치면 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 그러한 철학이나 신화를 나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는지 함께 소개를 더해서 더욱 읽기 편하고 쉽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본문 297페이지를 보면 저자가 두려움과 욕망을 내려 놓으면서 영적 훈련을 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아내 진이 항상 약속 시간에 늦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지인에게 이것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하게 되는데, 그 지인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지인의 조언을 통해 캠벨은 아내를 기다리는 시간을 새로운 경험을 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인식의 대전환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이라는 것(원문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대략 certain situation which not belong to you로 예상 됨) “자네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욕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매끄럽지 않았을까 한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 꿈에 대한 소개와 신화적 의미 분석

 

캠벨은 꿈을 무의식과 자아의식이 만나는 비밀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꿈과 관련해 캠벨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자.

 

꿈의 비밀이란 주체와 객체가 똑같다는 것이다. 객체는 스스로 빛을 발하며, 유동적인 형체를 취하고, 의미에 있어서도 다의미적이다. (중략) 이것은 무의식과 자아의식의 관계이다. (175 p)”

 

“우주는 한 몽상가가 꾼 꿈이며, 그 꿈속에 나오는 모든 사람 역시 꿈을 꾸고 있다. (189 p)”

 

캠벨은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신화의 흔적을 소개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다양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캠벨이 소개한 일상의 경험 가운데 캠벨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저자라면 내가 직접 꾸었던 꿈을 소개하며 그 속에는 어떠한 무의식과 의식의 만남을 알아볼 수 있는지 또한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신화적 흔적을 찾을 수 있는지 소개하면 본문의 구성이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한다. 나는 꿈을 꾸면 그 꿈을 메모로 남겨두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 꾸었던 꿈들 가운데 일부를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 꿈의 한 조각 #

 

<2007. 07. 22()>

 

베니스

그 꽃. 이효석.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녀는 끝내 울을음

터뜨리고 맙니다.

 

è 베니스가 왜? 이효석은 또 왜? 나는 메밀꽃 필 무렵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그녀는 또 누군가? 꿈은 이렇듯 내게 나의 무의식에 관한 알 듯 모를 듯한 단서 몇 개만을 하고 던져 준다. 아주 많이 뜬금없지만 이러한 뜬금없음이야말로 내가 나의 꿈을 격하게 아끼는 이유다.

 

 

<2008.06.30 ()>

 

수학여행 간 그곳은 오사카. 광활한 대해 속의 그곳에서 친구들과 뛰어 논다. 깎아지는 모래사장. 넘치는 파도에 몸이 젖는다. 고래를 내려다 보며 콩콩을 타러 간다. 콩콩을 기다리는 긴 행렬.

리와 섞이지 못하는 외국인 6명도 데려간다. 왜 줄이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내게 날짜 지난 우유를 준 둘째누나가 다급히 나를 찾는다. 통역이 필요하다고. 그곳은 일본. 줄의 선두열에 가보니. 직원 두 명이 모두 담배를 피우며 놀고 있다. 내가 일본어로 항의하자, 쉬는 시간이었다는 관리자의 변명. 히토리, 후타리. 모두 쉬고 있었다는 내 항의에 화가 난 관리인은 뛰쳐나온다.

 

그는 괴물. 공포스럽다. 이게 왠일인가. 외국인 중에 한 명이 그의 아내였다. 괴롭힌 사람이 없었냐는 질문에 아내는 머뭇거리고, 그 괴물은 아내의 몸 속에 들어가 자신의 아내를 괴롭힌 사람을 알게 된다. 그들을 공격할려는 찰라 영웅이 나타난다. 둘의 혈전은 굉장했다. 결국 괴물을 크게 때린 영웅은 깎아지는 빌딩 밑으로 뛰어내리는 척 하며 1층의 창문 안으로 숨는다. 그를 뒤쫓아 빌딩 밑으로 뛰어내린 괴물은 아주 얕은 바다로 다시 뛰어 든다.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로 갈아타며 계속 도망 간다. 우리의 숙소 근처에서 나타난 또 다른 영웅은 괴물의 꼬리를 잡아채고는 그를 멀리 던져 버린다.

 

è 영웅의 탄생. 히어로물은 언제나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2008. 08. 29 ()>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그들. 그들과 이야기 하던 중 일행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일행 중 하나가 나를 몰래 불러내어 그 진위를 말해주려는 찰나 우리들 뒤에 그 죽은 이의 부모가 실기를 띄고 서 있음을 깨닫는다. 이유는 모르지만 도망치는 나와 나를 쫓아오는 그들. 나는 살고자 했고, 그들은 나를 죽이고자 했다. 강에 빠트리고 내가 그 강 양쪽으로 바위로 된 둑이 있는데 너무 올라가기 힘들다. 양쪽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올라오면 찍어죽일 기세다. 내가 물에 빠져 죽기를 바라는 그들. 웬일인지 나는 물 속에서도 죽지 않는다. 그들이 방심한 틈에 둑을 조금 기어올라 여자를 끌어내렸다. 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나는 무참히 찌르고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고 나는 또 다시 도망을 치며 남자를 죽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칼로 찔러도 보고 돌로 찍어도 보지만 그들은 죽지 않는다. 결국 도망치던 나는 그들이 바로 내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그들을 찌르고 죽이려 했다. 그들이 내게 그러는 것처럼. 결국 장소는 내 방. 문을 잠그려는 나와 두 사람의 힘으로 열려고 하는 그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로 한다.

 

è 부모를 죽이려 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입 밖에도 꺼내기 힘든 내용인 것은 맞지만, 캠벨의 신화의 힘을 통해 보면 나는 어쩌면 이 시기에 스스로 성인이 되어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삽화 추가

 

본문에는 인도의 다양한 신은 물론 불교 및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신화의 힘』에 비해 이 책에서는 삽화가 거의 없어서 아쉬웠다.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삽화를 추가하면 본문 내용에 대해 더 쉽고 깊이 있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1]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에 따르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든 것 중 가장 현저한 자율성의 집합체다. 그것은 남성의 여성과의 상호작용과 여성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꿈 소게 나타나는 상으로서 그것 자신이 나타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과정을 상상하는 힘의 하나의 근원이다 라고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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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10:12:27 *.124.22.184

앞부분 <당부하는 글>은 다음 주 과제로 해도 되겠어요.  직장생활하며 이 정도하는 것도 대단해요. 

정욱님 성격상 제대로 하고 싶은 맘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너무 초반에 힘빼면 오히려 버티기 힘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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