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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일 00시 33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철학 이야기_2

윌 듀런트 지음 / 정영목 옮김

봄날의 책

 

 

1. 저자에 대하여

 

윌 듀런트는 이 책의 도입부에서 독자에게 말한다. 이 책은 완전한 철학사가 아니라고. 서양철학에 대해서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알아차릴 정도다. 정확히 분류를 하자면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서양철학]에 대한 개설서다. 저자가 판단하기에 서양철학사에서 꼭 다루어야 하는 인물만 선택했으며, 그들의 인생과 사상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통해 밝히고 있다.

 

아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가 밝혔듯이 이 책에서는 우뚝 솟은 인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나 공리주의의 제레미 벤담을 다루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리즈로 기획하지 않았기에 저자의 뜻을 존중한다. 오히려 많은 철학자와 사상을 다뤘다면 철학의 대중화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특히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면과 지금까지 노출되지 않은 부분을 언급하면서 흥미를 끌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그래도 이 책의 내용은 어렵다. 각 철학자들이 일생을 통해 정립한 사상을 단 몇 십 페이지로이해하겠다는 것도 욕심이겠지만, 이 책은 까다롭다. 현학적 표현과 난해한 비유가 집중을 흐린다. 분명 독자를 배려했다는 흔적들이 보이지만, 저자 머리속에 있는 상당한 지식을 일반인 수준에 맞게 푼 것 같지는 않다. 개설서 수준이 아닌 개설서라고 할까.

 

내용이 어렵고 현학적이라는 다소 부정적 의견을 냈지만, 나는 윌 듀런트에게 감사하다. 이 책을 통해 어쨌든 서양철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커피 블라인드 테스트와 같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커피마다 고유의 풍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씁쓸한 맛, 쌉쏘르 한 맛, 시큼한 맛, 약간 탄 맛. 다양한 맛과 향 중에서 분명 나와 궁합이 맞는 맛과 향이 있다.

 

블라인드 테스트가 이렇다. 집중하고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 미세한 차이를 알게 해 준다. <철학 이야기>를 통해 똑같아만 보이던(물론 관심이 없었겠지만) 서양 철학에서 나에게 맞는 맛을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내가 몰랐던, 내가 좋아하는 맛을 찾았다는 것. 개인적으로 쇼펜하우어란 맛을 더 음미해 보고 싶다. 그 맛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해 준 윌 듀런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칸트로 가는 길

 

P342.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원고를 친구 헤르츠에게 주었을 때, 헤르츠는 사변에 꽤 능통한 사람이었음에도 반쯤 읽다 돌려주면서 계속 읽다가는 미쳐버릴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런 철학자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칸트 자신

 

P352. 그는 열등생은 아무리 도와주어도 소용이 없고, 천재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 막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떠오르는 것일까?

 

P354. 어떤 전기 작가에 따르면, 칸트의 삶은 규칙동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칙적인 동사처럼 흘러갔다.

 

순수이성비판

 

P356. 그렇다면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과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절대적 지식이 있는가? 이것이 첫 번째 비판에서 다루는 문제다. “내 질문은 모든 물질과 경험의 지원이 사라졌을 때 이성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356. <순수이성비판>은 즉시 핵심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오성은 결코 경험의 영역에만 한정 될 수 없다. 경험은 무엇이라는 말은 해주지만, 반드시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이어야 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일반적으로 진리는 절대 주지 않는다.

오성에 대하여

- 넓게는 사고하는 능력을 의미. 여러 감각적 능력인 감성과 대립되는 지력을 의미

- 칸트 이후, 감성 및 이성과 구분되는 지력을 의미

오성은 개념, 즉 범주와 판단 및 규칙들이 도움으로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그에 반해 이성은 무제약자나 총체성 같은 이념의 능력이다. 오성이 개개의 경험에 관계하는 반면에 이성은 "경험의 절대적 전체"에 관계한다. 칸트에 있어서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은 오성의 상위에 있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P357.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절대성과 필연성이라는 특징을 어디서 얻는가? 경험은 아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분리된 감각 결과물과 사건들만 주며, 미래에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성비판

 

P368. 하나의 행동이 선한 것은 그것이 선한 결과를 낳았거나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내적인 의무감에, 우리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전제적으로, 선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행동에 대한 법률을 정하는 이런 도덕법칙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P369. “본디 도덕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P369. “자신이건 다른 사람이건 모든 경우에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접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P369. 이렇게 아름다움 위에 의무를 두고, 행복 위에 도덕을 두는 것이 어려운 윤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짐승이 되기를 그치고 신이 되기 시작할 수 있다.

 

종교와 이성에 관하여

 

P371. 그는 우선 설계와 아름다움을 연결시킨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마치 지성이 설계한 것처럼 구조의 대칭과 통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칭적 설계를 보면 우리는 늘 사심 없는 쾌락을 얻으며, “자연의 아름다움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늘 선의 증표라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 한다. 자연의 많은 대상이 그런 아름다움, 그런 대칭과 통일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 자체에 관심을 갖고 즐기는 것이 선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 즉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대칭은 인위적인 것의 대표다. 자연은 비대칭이다. 어디를 봐도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곳에 대칭이 있는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사람인지라, 대칭을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자연을 대칭으로 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연을 왜곡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사람의 형상도 대칭이 아니다. 오른손가락이 왼손가락 보다 두꺼울 수 있고, 종아리도 한쪽의 근육이 더 발달했다.

 

P373.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오해받았다. 그 결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대신 사제의 나라가 세워졌다.”

 

P373. 온간 종류의 경건한 헛소리천국의 궁정에서 하는 봉사이며, “이런 헛소리를 이용한 아첨으로 천국 통치자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정치와 영구 평화에 관하여

 

P375. 투쟁은 진보의 불가결한 동반자다. 만일 사람들이 완전히 사회적이라면 인간은 정체할 것이다. 인간 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경쟁이 어느 정도 섞여야 한다. “비사회적 특징이 없다면 사람들은 완전한 조화, 만족, 서로에 대한 사랑 속에서 전원적인 목자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들의 모든 재능은 영원히 맹아 상태로 감춰질 것이다.”

 

P377. 아메리카, 니그로의 땅들, 향료 제도, 희망봉 등은 발견되자마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 취급을 받았다. 원주민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앙을 갖고 법석을 떠는 나라들, 부정을 물처럼 들이키면서도 정통 신앙을 간직한 선민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나라들이 이 모든 일을 벌였다.”

 

P378.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체는 공화제가 되어야 하며, 선전포고는 국민투표로만 결정할 수 있다.”

 

P378. 결국 정부의 기능은 인간을 이용하고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절대적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을 어떤 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존엄을 위반하는 범죄다.”

 

P379. 따라서 칸트는 평등을 요구한다.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능력을 계발하고 적용할 기회의 평등이다.

누구든지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정말로 이 사회에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말이 어디서 왔을까? 2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있었던 말이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이 말을 믿지 않는다.

 

비판과 평가

헤겔에 관한 메모

 

쇼펜하우어

 

시대

 

P399. 괴테는 말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끝장난 세계에서 내가 젊지 않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아버지와 가끔 식사를 할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야 다 살아서 죽으면 되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들이 걱정이다. 보릿고개를 몰라. 큰 일이야보주주의자인 아버지께서 현 정치상황에 불만족스러우신 모양이다. 쨌든 괴테의 이 말에 아버지가 생각났네요. 아버지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이다.

 

P401. 이 환멸과 고난의 시기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적 희망에서 위안을 얻었다.

 

인간

 

P404. “그는 철저하게 혼자 였으며, 친구 한 명 없었다. 하나라도 있는 것과 하나도 없는 것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P410. “겸손이란 위선적 자기비하에 불과하며, 질투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탁월함과 장점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서 용서를 얻고자 하는 수단이다.

 

P412. “우리는 바깥으로부터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사물의 이미지와 이름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이를 수 없다.

 

의지로서의 세계

 

P413. 우리가 승리는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패배는 얼마나 빨리 잊는지 보라. 기억은 의지의 하인이다. “셈을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불리한 쪽보다는 유리한 쪽으로 실수하는 일이 훨씬 잦다. 부정직한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그렇게 된다.” “반대로 아무리 어리것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소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일에는 이해력이 높아진다.

망각은 합리화와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P413. 식량, , 자식을 둘러싼 인간의 열띤 싸움을 보라. 이것이 생각의 결과일 수 있겠는가? 당연히 아니다. 원인은 절반쯤은 생의 의지, 충만하게 살려는 의지다.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앞에서 끄니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뒤에서 미니까 움직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느끼는 것에 의해, 반은 그 작용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본능에 의해 떠밀려 간다는 것이다.

 

P414. 성격은 의지에 있지,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격 또한 목적과 태도의 연속이다. 이것이 의지다. ‘머리보다 심장이 낫다는 대중적 언어가 옳다.

 

P416. 의지는 인간의 본질이다.

 

P419. 우선 성적 매력의 법칙에 따르면 짝을 고르는 것이 비록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 서로 자식 생산에 적합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결정된다.

 

P420.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결함이 상속되지 않도록 그 결함을 없애 줄 짝을 구한다.

우생적 선택은 자연선택이라는 것인가? 맞는 말인 것 같다.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고, 이별은 마음의 작용도 크겠지만 더 나은 상대를 찾고 싶은 욕망의 표현 아닐까 생각한다.

 

P420. “부모는 개인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정신으로 조언한 반면, 여자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자연의 정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최선의 우생학이다.

 

악으로서의 세계

 

P424. 그러나 세계가 의지라면, 그것은 고난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우선 의지 자체가 결핍이며, 의지는 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쥐려 하기 때문이다. 충족되는 소망이 하나라면, 충족되지 않는 소망은 열이다. 욕망은 무한이며, 충족은 제한적이다. “그것은 마치 거지에게 던지는 돈과 같다. 오늘은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지만, 결국 곤궁을 내일까지 연장하는 것일 뿐이다.”

 

P425. 실현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키우며,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의지가 그 자체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의지는 늘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P425.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을 구하려 하는 대신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P426. “결핍이 민중의 변치 않는 천벌이듯, 권태는 상류사회의 천벌이다. 중간계급의 삶에서 권태는 일요일로 상징되고, 결핍은 주중의 나날로 상징된다.

 

P427. 모든 종은 다른 종의 물질, 공간, 시간을 빼앗으려고 싸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좋은 대학에 가려고 했던 것은? 좋은 직장에 입사는 하는 것은? 승진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집은? 좋은 차는? 이 모든 행위들이 아닌 다른 이들의 물질과 공간, 시간을 뺏앗으려는 행위 아닐까?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그렇게 피 터지게 일하려는 건 아닐까? 돈은 왜 벌려고 하나? 그저 편하자고? 그러면 내가 편함으로 인해 반대로 불편해 지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는 것인가? 내가 더 갖는 재화로 인해 더 못 갖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행위는 다른 종이 대상이 아닌 내 옆에 있는 인간의 소유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 아닐까? 다르게 생각하면 나 혹은 나와 관련된 인간이 아니면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즉 이종(異種)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것이고, 혼밥, 혼술이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쓰지 않는 것이고, 연민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P428. 우리는 결혼해서 불행하고, 결혼하지 않아서 불행하다. 우리는 혼자일 때 불행하고, 함께일 때 불행하다. 우리는 온기를 얻으려고 함께 웅크린 고슴도치들 같아서, 너무 빽빽하게 모여 있으면 불편하고 떨어져 있으면 비참하다. 아주 우스꽝스럽다. “모든 개인의 삶은 전체로서 살펴보면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특징만 강조하면 사실 늘 비극이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희극의 특징이 있다.”

 

P430. 죽음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저 고양이가 무력한 쥐를 갖고 놀듯이 우리를 갖고 노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걷는 것이 넘어지는 것을 계속 막는 행동에 불과하듯이, 우리 몸의 생명은 계속 죽음을 막는 것, 즉 늘 지연되는 죽음에 불과하다.”

 

삶의 지혜

 

P435. 따라서 어떤 사람이 거의 온종일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점차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절대적인 독서의 양이 중요하기는 하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을 가진 위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내 인생과 연결해서 사유하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 같다, 변경연을 통해 읽는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과 내 생각을 비교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죽은 독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쇼펜하우어점점 알고 싶어진다.

 

P435. 첫 번째 조언은 책보다 삶이 먼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조언은 주석보다 본문이 먼저라는 것이다. 해설자와 비평가보다 저자를 읽어라.

 

P435.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의 거처로 삼기에는 한심한 곳이다.”

 

P435.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얻는 행복이 우리 주변에서 얻는 것보다 크다. 한 사람이 사는 세계는 주로 그가 그 세계를 보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한 사람에게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의식에만 존재하고 그 사람 혼자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인 일은 그의 의식의 구성이다. 따라서 행복하다는 것은 자족적이라는 뜻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는 큰 진실이 담겨 있다.

내 자신으로부터 얻는 행복의 시작은 무엇일까? 결국 선택의 문제 아닌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에 의해 행복하다 불행하다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쉬운 말로 생활이라고 한다면 내 생활은 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시간이며 공간이다. 그 선택에 의해 발생한 결과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며 내 의지를 통해 형성된 세계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왜 불행한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만약 회사의 거지 같은 직장상사 때문에 힘들고 불행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직장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다. 다시 선택은 2가지다. 참던지 그만 두던지. 기회비용을 따져 봐야한다. 그만 두고 얻는 심적 안정감이 더 크다면 그만 두자. 그러면 최소 10가지의 선택지는 생긴다. 그리고 다시 선택하자. 결국 힘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그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네? 물에 발을 담겄는데, 뜨거우면 발을 빼는게 맞는 것 아닌가? 이렇게 질문을 따라 가다보니 결국 고통, 불행, 힘듦이라는 것은 내가 쥐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P436. 끝없는 의지라는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지적인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성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P442. 따라서 궁극적 지혜는 니르바나다. 자신의 자아를 욕망과 의지가 최소한인 상태로 줄이는 것이다.

 

죽음의 지혜

비판

 

P447. 쇼펜하우어 개인에 대한 진단은 인간의 행복이 외적 환경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한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P448. 존재에 대한 거만한 혐오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한 은밀한 혐오의 위장인지도 모른다. 삶을 망치거나 실수를 해놓고 자신을 방어할 혀가 없는 환경이나 세상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P448. 성숙한 사람은 삶의 자연스러운 한계를 받아들인다.

인정하자는 의미 같구나.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왜 동양의 사상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까?

 

P448. 사실 세상은 우리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원료일 뿐이며, 우리가 하는 바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P449. 쇼펜하우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비관주의가 나타난 원인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낭만적인 태도와 기대에 있었다. 젊음은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P450. 채워진 욕망이 다른 욕망을 낳을 뿐이라면 어쩔 텐가? 어쩌면 절대 만족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랜 가르침이 말하듯, 행복은 소유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에 있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구한다.

 

8장 허버트 스펜서

 

콩트와 다윈

 

P458. 1827년 콩트는 2년 동안 불운한 결혼 생활을 한 뒤 정신적으로 붕괴하여 센 강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그를 구해준 사람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1830년에서 1842년 사이에 나온 <실즐철학강의> 다섯 권, 1851년에서 1854년 사이에 나온 <실증정치체계> 네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흐음뭐지 내가 생각나는 건

 

스펜서의 발전

1원리들

 

P473. 모든 지식은 상대성이다. “생각하는 것은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므로 어떤 생각도 관계 이상은 표현 할 수 없다. 지성은 현상에 의해, 현상과 대화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어서 현상 너머의 어떤 것에 사용하려고 하면 터무니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P473. 그러나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은 그 이름과 본성으로는 자신을 넘어선 것,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암시한다. “우리의 사고를 지켜보면 겉모습 뒤에 놓인 실재에 대한 의식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으며, 이런 불가능성에서 그 실재에 대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왠지 도덕경에서 말하는 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맞는 것인가?

 

생물학 : 생명의 진화

심리학 : 정신의 진화

 

P485. 이성적인 행동이란 단지 어떤 상황에서 다른 본능적 반응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특정한 본능적 반응들에 불과하다. ‘숙고란 경쟁하는 충동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는 이성과 본능, 정신과 생명이 하나다.

 

P485. 의지는 우리의 적극적 충동들의 총합에 부여하는 추상적 용어이며, 의욕이란 관념이 방해받지 않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관념은 행동의 첫 단계이며, 행동은 관념의 마지막 단계다.

 

사회학 : 사회의 진화

 

P487. 사람들은 평생에 걸친 연구라는 준비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의 권위자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일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식료품점의 아들도 전문가이고, 해법을 알며,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P490. “높은 수준의 사회적 국가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전쟁의 중단에 달려 있다.”

 

P492. “완전해 질수록 경직되는 것은 모든 조직의 법칙이다.”

 

윤리학 : 도덕의 진화

 

P496. 가장 수준 높은 유혀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 삶의 가장 광범한 다양성, 복잡성, 완전성을 효과적으로 통일하는 사람이다.

 

비판

결론

 

9장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혈통

 

P515. 니체는 다윈의 자식이고 비스마르크의 형제다.

 

청년 시절

 

P517. 그가 기독교를 공격한 것은 그의 안에 그만큼 기독교의 도덕적 정신이 강했던 탓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떠오르는 건 뭘까?

 

P518. 그는 평생 자신을 이성적인 남성성을 갖춘 남자로 단련시킬 신체적이고 지적인 수단을 강구했다. “내가 아닌 것, 그것이 나에게는 신이자 미덕이다.”

 

P519. “마치 쇼펜하우어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열의를 느꼈으며, 눈앞에 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한 줄 한 줄이 큰 소리로 포기, 부인, 체념을 외쳤다.”

 

P520.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실수일 것입니다.” 니체는 그렇게 말했다.

 

니체와 바그너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P530. “위대함을 보여주는 나의 공식은 운명애(Amor fati). 운명애는 모든 필연적인 것을 감당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에 옮기기는 무척 어렵다.

 

P533. “신들은 있다. 하지만 신은 없다. 이것이 바로 신다운 것 아니겠는가?”

 

P534. “형제들이여, 늘 땅에 충실하기를 기원하노라. 너희에게 이 땅을 넘어선 희망에 관해 말하는 자를 믿지 마라! 그들 스스로 알건 모르건, 그들은 독을 뿌리는 자들이다.

 

P536. “네 능력을 넘어선 것은 바라지 마라. 네 능력을 넘어선 덕을 가지려 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마라.”

 

영웅 도덕

 

P539. 이 모든 도덕뒤에는 은밀한 권력의지가 있다. 사랑도 소유의 욕망에 불과하다. 연애는 전투이고 짝짓기는 정복이다.

 

P540.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상상한다. 종종 자신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사랑은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이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장애에 부딪히면 가장 인색해진다.

 

P540. 진리에 대한 사랑에도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 어쩌면 그 첫 소유자가 되려는, 그것을 처녀 상태로 발견하려는 욕망이 있다. 겸손은 권력의지의 보호색이다.

 

초인

 

P544. 사랑하는 동시에 지혜로워지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P545. 최고는 오직 최고와 결혼해야 한다.

 

P547. 자신의 충동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한 자다. 억제할 힘이 없는 자다. 아니라고 말할 힘이 없는 자다. 자신의 규율을 잡는 것- 그것이 최고다. “단순히 대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하지만 않으면 된다.”

 

P547. 위대해지자. 아니면 위대한 자의 종이나 도구가 되자.

 

P548. “너희 오늘 외로운 자들이여, 너희 홀로 떨어져 있는 자들이여, 너희가 언젠가는 하나의 민족이 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선택했으니 너희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 생겨날 것이고, 거기에서 초인이 생겨날 것이다.”

 

퇴폐

귀족주의

 

P555. “이 재빠른 원숭이들이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지 보라! 그들은 서로 딛고 올라가려고 애쓰는 바람에 오히려 서로 잡아당겨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상점 주인의 악취, 야망의 몸부림, 악한 숨.” 그런 사람은 부를 가져봤자 소용이 없다. 그것을 고귀하게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P555. “지성이 있는 사람만이 소유를 유지해야 한다.”

 

P555. “무엇보다도 최대한 많이 생산하고 최고의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나라들을 휩쓰는 광기를 보라. 마침내 인간은 맹금이 된다. “그들은 서로를 습격하려고 노리며 산다. 엎드려 기다렸다가 서로에게서 물건을 빼앗는다.”

 

비판

 

P565. 사랑을 탐색하다 좌절한 니체는 철학자답지 못한, 그리고 남자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원한에 사로잡혀 여자를 공격했다. 부모자식 관계를 놓치고 우정을 잃은 니체는 삶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 지배와 전쟁보다는 상호성과 동지애에서 온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피날레

 

P569. 그는 사상만이 아니라 바그너, 그리스도 등 사람도 공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혜의 성장은 신랄함의 감소로 측정할 수 있다.”

 

P569. “어쩌면 나는 인간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이유를 가장 잘 알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음을 발명한 것은 너무 괴로워서 달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과 침침해지는 눈은 그의 쇠약을 드러내는 생리적인 면이었다.

니체를 읽으면서 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정신세계와 나는 맞지도 않고 비슷한 점도 없다. 그래서 나는 평생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하겠구나.

 

10장 현대 유럽 철학자들 베르그송 / 크로체 / 버트런드 러셀

 

앙리 베르그송

 

P579. “의식은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채운다.” 의식은 쓸모없는 부속물이 아니다. 의식은 생생한 상상 극장으로, 이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이루어지기 전에 대안적 반응들이 펼쳐지고 검증된다.

 

P579. “현실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가 행동의 중심이 되며 세상으로 진입하는 우연성의 총합을 나타낸다. 즉 가능한 행동의 일정량을 나타낸다.”

 

P579. 자유의지는 의지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P583. 생각과 지성 없이 어떻게 생명의 흐름과 본질을 포착할 것인가? 잠시 생각을 멈추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적 현실-우리 자신-을 그냥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수동성이 아니라 행동이다. 기계 작용이 아니라 선택이다.

 

베네데토 크로체

 

P604. 상상은 사고에 선행하므로, 또 사고에 필수적이기에, 정신의 예술적 활동, 즉 이미지를 형성하는 활동은 논리적인 활동, 즉 개념을 형성하는 활동보다 앞선다. 인간은 상상하는 순간, 예술가가 된다. 이것은 추론보다 훨씬 앞서는 일이다.

 

P604. “사람은 손이 아니라 뇌로 그림을 그린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말했다. 또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썼다. “고귀한 천재의 정신은 외적인 것과 거리가 먼 일을 할 때 창의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P604.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며칠이고 캔버스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 작품을 주문한 수도원장이 몹시 불쾌해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안달하는 수도원장이 언제 일을 시작하느냐고 집요하게 묻자 수도원장을 유다의 모델로 삼아 복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P604. 미학적 활동의 핵심은 염두에 둔 주제를 표현할 완벽한 이미지를 생각하기 위해 예술가가 이렇게 가만히 기울이는 노력에 있다. 신비한 통찰이 아니라 완벽한 시각, 완전한 인식, 적절한 상상력과 관련된 직관 형식에 있다. 예술의 기적은 외화(外華)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잉태에 있다. 외화는 기계적 기술과 솜씨의 문제일 뿐이다.

 

P607. “우리는 왜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그 이유를 절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P607. “나에게 정확하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있었던 사람은 없다. 내 경우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나의 느낌을 따른다. 어느 누가 더 나은 안내자를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아름다움과 진실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제외하면 세상에 진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P615. 자유는 지고의 선이다. 자유가 없으면 인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619. 세상은 자신이 그의 공식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다고, 또 어쩌면 그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무겁다고 버트런드 러셀을 설득했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마음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11장 현대 미국 철학자들 산타야나 / 제임스 / 듀이

 

머리말

 

P623.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은 둘이며, 그 가운데 하나는 유럽적이다.

 

P624. 이곳 사람들은 원시적 환경과 과제에 의해 신체적으로는 억세고 정신적으로는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빚어져 있다. 이것이 링컨과 소로와 휘트먼과 마크 트웨인을 생산한 미국이다.

 

조지 산타야나

 

P627. <회의주의와 동물적 신념>의 서문은 말한다. “여기 또 하나의 철학 체계가 있다. 독자가 웃음을 짓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면, 나도 함께 웃음을 짓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독자를 대신하여 독자가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는 원칙들을 표현하려는 것뿐이다.”

 

P629. 철학은 왕의 궁정에서 잠시 비단 바지를 입은 노동당 간부처럼 여전히 인식론적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언젠가 중세가 정말로 끝이 나면, 철학은 구름들로부터 내려와 인간사를 다룰 것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철학을 한다는 것인가?

 

P639. 국가는 니체가 말한 대로 괴물, 불필요한 크기의 괴물일 수도 있다.

 

P642. “하나의 전형적인 삶의 우수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떤 나라도 바다의 모래와 마찬가지로 기억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는 귀족주의보다 많이 개선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 나름의 폐해가 있다. 부패와 무능도 그렇지만, 더 나쁜 것은 그 나름의 독특한 압제, 획일성이라는 물신이다. 천박한 익명의 압제만큼 가증스러운 압제는 없다. 이것은 어디에나 스며들어 모든 것을 방해한다. 이것은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모든 새로움의 싹과 천재성의 가지를 쓸어버린다.”

 

P643. 산타야나가 무엇보다 경멸하는 것은 현대 생활의 혼돈과 품위 없는 성급함이다.

 

P643.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괴한 압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혁명의 인과응보이기도 하다.

 

P643. 혁명은 모호한 것이다. 혁명의 성공은 일반적으로 적응 능력, 그들 내부에서 그들이 맞서 싸우는 것을 다시 흡수하는 능력에 비례한다. 수많은 개혁이 있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상태다. 각각의 성공적 개혁은 새로운 제도를 건설했고, 이런 제도는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남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P64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형태의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까? 어쩌면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사회든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조금씩 변화왔고, 변하고 있겠지만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P645. “완벽에는 비극이 있다. 완벽이 생기는 우주 자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예리한 미학적 감각은 세상에 흩어진 어여쁜 것들에게서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사물의 추함에서 고통을 겪었던 듯하다.

 

P645. “지혜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는 묻고 이렇게 답한다. “한쪽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세상을 적대시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 덧없는 아름다움을 반기고 덧없는 고난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이 덧없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

 

P645.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삶을 기억해야 한다. 멀고 완벽한 희망만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

 

P648. 그는 산타야나나 헨리 제임스처럼 귀족적으로 과묵하게 이야기하는 대신 팔팔한 일상어로 힘차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며,

 

P649. 제임스에게 심리학이란 여전히 그 어머니인 형이상학의 태아막으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꼭 이런 표현을 써야 철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P649. 단순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철학은 단지 가장 포괄적인 방식으로 사물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P656. 미완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의 대사 몇 줄을 쓸 수 있고, 우리가 살아야만 하는 미래를 빚어내는 데 우리의 선택이 어느 정도 기여하기 마련이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운명의 세계가 아니라 우연의 세계다. 모든 것이 완전히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P658. 그는 모든 개인에게 환경이 적절한 산파 노릇을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축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개인을 향해서나 사회를 향해서나 이 자원을 완전히 이용하자고 호소했다.

 

P660. “결론은 없다. 우리가 그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고 누가 결론을 내려주었는가? 점을 쳐줄 것도 없고 조언해 줄 것도 없다. 안녕.”

 

존 듀이

 

P663. 어떤 의미에서 학교는 정신적 성장의 도구만 줄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우리가 경험을 어떻게 흡수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진정한 교육은 우리가 학교를 떠난 뒤에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는 끝날 이유도 없다.

 

P664. 듀이는 베이컨과 홉스와 스펜서와 밀의 혈통의 상속자로서 훌륭한 실증주의자답게 형이상학이 신학의 메아리 또는 위장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P664. 뇌는 일차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행동기관이다.

현재 뜨고 있는 뇌과학분야의 시초인가? 정확히 과학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는데..

 

P665. 철학의 문제는 외부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다시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느냐,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느냐다. 철학은 지각과 지식의 분석이 아니라(그것은 심리학이다) 지식과 욕망의 종합과 조정이다.

 

P665. 사고는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고는 구체적인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주어진 문화적 환경 안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개인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도 사회의 산물이다. 관습, 예절, 관행, 언어, 전통적 관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망이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달려들어 그 아이를 주위 사람들의 형상으로 빚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P666. 변화나 성장에 알려진 한계는 없다. 어쩌면 불가능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P666. 듀이가 가장 훌륭하게 여기며 숭배하는 것은 성장이다.

 

P666. 최종 목표로서의 완벽성이 아니라 완벽해지고 성숙해지고 다듬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 삶의 목표다. 나쁜 사람이란 전에 아무리 좋았다 해도 이제 나빠지기 시작하는 사람, 덜 좋아지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란 전에 아무리 도덕적으로 가치가 없었다 해도 지금 좋아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신을 판단할 때 엄격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는 자비로워진다.

 

P666. 선하다는 것은 단지 복종적이고 해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능력 없이 선한 것은 절름발이다. 지성이 없다면 세상의 어떤 덕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무지는 행복이 아니라 자각 없이 예속되는 것이다. 오직 지성이 있어야만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P666. “우리는 결국 본능이 아니라 생각을 신뢰해야 한다. 산업화 때문에 점점 물질화 되어가는 환경에서, 우리를 둘러싼 미로처럼 복잡한 문제들에서, 본능이 어떻게 우리를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P667. 칼라일과 러스킨이 우리의 산업 문명 전체를 저주하고, 톨스토이가 황야로 돌아가자고 선언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을 꾸준히,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의 발달과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P667. 정치적 질서의 목적은 개인이 완전히 발달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각자가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집단의 정책과 운명을 결정할 때에만 이룰 수 있다.

 

P669.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스스로 세속적이 되어야 한다. 지상에 머물며 삶을 해명해주면서 자립해야 한다.

 

P670. 미래 철학의 과제는 그 시대의 사회적, 도덕적 갈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밝히는 것이다. 미래 철학의 목적은 되도록이면 이런 갈등에 대처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삶의 갈등하는 요인의 조정에 관한 멀리 내다보는 보편적 이론이 철학이다.

 

맺음말

 

P671. 한 민족이 철학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살기부터 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들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우리 영혼의 무질서는 이런 발전 속도 탓이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성장과 사춘기 경험으로 한동안 혼란에 빠지고 균형을 잃은 젊은이들과 같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그래도 오랜 세월이 아닌가? 2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형성된 자유민주주의 사상. 오히려 이 말은 대한민국에 어울린다. 개개인은 굉장히 살기 힘들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일단 살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거의 3배에 육박하는 속도로 지금에 도달했다. 시간이 갈수록 의식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큰일이다. 지금의 사춘기를 언제까지 겪을까? 우리도 성숙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옮긴이의 글

 

P717. 언뜻 새로운 문제처럼 보이는 것도 그 속을 파고들면 전에 존재했던 문제의 변형일 뿐이며, 따라서 그 문제를 분석하거나 해결하는 방식도 과거의 방식과 답안을 재검토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P717. 오래된 문제를 현실에 맞게 새롭게 읽어내면서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P717. 듀런트가 이 이야기를 쓰면서 노린 것은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어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불가해한 학문으로 전락한 철학을 그 상아탑에서 끌어내, 현실을 해석하고 또 때로는 바꿀 수도 있는 생각의 무기로 다듬어내자는 것이었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구성에 대하여

 

철학의 계보(160p) 中 목차 및 구성에 추가하고 싶은 철학자

① 정통? 라인 -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사이에 토마스 아퀴나스 추가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학자, 도미니크 교단의 수사.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제자. 1323년 성도(聖徒)의 열()에 들었다. 그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중에서 유물론적 요소를 제거하고 관념론적 요소인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1원리로서의 신이라는 관념 등을 취하여 기독교에 적응시킨 점이 특징이다.

 

또한 신()플라톤학파의 초자연적인 신적 세계라는 생각도 받아들였다. 보편논쟁에 관해서는 '중용의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여, 보편은 개개 사물 이전에 존재하며(신적이 성속에)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한다(개개 사물의 보편으로서). 모든 사물 뒤에 존재한다(보편을 인지한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것으로서)고 설명하였다.

 

그의 입장은 신앙과 이성(은총과 자연의 빛)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어 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반대를 논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틴어 ancilla theologiae)인 한에서 진실한 것이라 보았다. 봉건제 사회의 질서에 조응하여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의 계층적 질서 아래 놓여져 있다고 설명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기독교인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는 것은 중세시대 몰락의 위기에 처해진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相對的) 자율(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ㆍ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토마스의 사상은 오늘날 신토마스주의로 되어 반공주의(反共主義)로 이용되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았을 때, 프란시스 베이컨 前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가하면 중세 철학 및 종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이 후 칸트로 넘어가면 대비를 통해 더 사상의 극명한 비교가 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의 영향을 받은 존 스튜어트 밀 추가 혹은 스펜서 대체

 

제레미 벤담의 제자이며 존 로크까지 설명이 가능한 존 스튜어트 밀을 추가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히 밀의 자유주의 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유론]을 설명해 준다면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히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1926년의 시대적 배경, 윌 듀런트와 동시에 인물인 듀이와 연결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약 분량적인 면이라면 오히려 스펜서를 밀로 대체 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John Stuart Mill)1806년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제임스 밀은 벤담의 제자이자 친우(親友)로서 대학교육과 종교를 불신하였지만 아들 밀의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밀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3세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7세에는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8세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한 밀은 많은 문학적 저작들과 역사서를 섭렵했고, 12세부터는 논리학과 경제학도 학습해 나갔다.

 

밀의 이러한 정신적 성장과정은 분명 천재의 그것이었지만, 자만할까 두려워한 아버지의 교육으로 밀 스스로는 자신이 천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교우관계가 부족했고,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나이에 걸맞은 놀이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천재적인 학문적 역량을 선보인 밀도 20세에 이르면서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다. 프랑스 여행에서 알게 된 벤담주의에 대한 반감들,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이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닌 자신의 감정 등이 원인이 된 이러한 위기는 밀이 24세가 되던 1830년까지 지속된다. 물론 그동안 밀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밀은 1823년에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동인도 회사의 서기로 취직했고, 논리학과 경제학을 연구했으며, 아버지의 『웨스트민스터 평론』이나 벤담의 『증거론』 출간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네 인생의 목적이 모두 실현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 (중략) … 이것이 네게 큰 기쁨이요 행복이 되겠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밀의 위기는깊고 강한 감정을 가졌고, 투철하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진테일러 부인(Harriet Taylor)을 만나면서 점차 극복된다.

 

이후 테일러 부인과는 20년 동안 순수한 교제를 지속하다가 남편 테일러씨가 사망한 후에 결혼하게 되는데, 당시 이들의 삼각관계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화제였지만 당사자 세 사람의 이성적 행동으로 추문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밀은 이후에 테일러 부인과 『자유론』(On Liberty)을 공저하는데, 밀 스스로 이는 자신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 남는 책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고, 또 그에 걸맞은 명성을 획득한 밀의 대표작이 되었다.

 

『자유론』이나 『공리주의』(On Utilitarianism)가 밀의 생애 중반기에 쓰여진 주요 저작이라면 『논리학 체계』(System of Logic)나 『정치경제학 원리』(The Principle of Political Economy)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은 그 이후에 쓰여진 밀의 주저들이다. 특히 『여성의 예속』은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주의(feminism)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최근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밀은 테일러씨가 사망한 1849년이래 이러한 저술과 결혼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그로부터 불과 7년 반만에 테일러 부인이 결핵으로 사망함으로써 비탄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곧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여 웨스트민스터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한다. 입후보를 부탁하러 온 정당관계자들에게 밀은 자신은 의원이 되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이 없으므로 선거비용을 얻으러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지역구의 이해에 관계하지도 않을 것이고,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지지한다는 점을 포함한 자신의 견해를 인정해 줄 것을 공약으로 제시한다.

 

뜻밖에 높은 지지를 얻어 의원으로 당선된 밀은 임기 동안 노동자 출신의원들을 지지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노력하는 등 매우 진취적인 의원활동을 전개하지만 3년 후에는 낙선하고 만다. 테일러 부인의 딸인 헬렌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밀은 1873년 아비뇽에서나는 내 일을 다 끝마쳤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부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양대 철학사상의 기원을 알면 더 이해하기 쉽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이 책에서 언급한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니체는 스토아 학파의 계통을 잇는다. 반면 베이컨, 볼테르은 에피쿠로스 학파를 잇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란 그리스 사상의 정통만을 다룬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이 두 학파를 설명함으로 인해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토아라는 명칭은 그 학교가 있었던 장소가 스토아 포이킬레 stoa poikilē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B.C. 3세기의 키프로스(Kypros)제논(Zenon)에서 시작되고 뒤이어 크리시포스(Chrysippos)를 대표자로 한다.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부문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윤리학에 중점을 두었다. 또 논리학의 역사에서는 명제 논리를 성립시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설을 계승하여, 존재는 모두 영원히 생동하는 화기(火氣)로 이루어졌고, 이것이 법칙(로고스)에 따라 생성 변화하면서 만물의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유물론적이면서 변증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로고스는 우주와 인간을 함께 지배하는 보편적인 '세계이성'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윤리학이 말해졌다. 인간의 본성(자연도 세계이성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사는 것, 즉 그리스인도, 타국인도, 노예의 주인도, 노예도, 전체의 인간도 어떠한 차별도 없이 비이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인 이성에 의해 평정ㆍ부동(平靜ㆍ不動)의 경지(그리스어 apatheia, 영어 apathy)에 이르는 것을 '유덕'(有德)한 생활 방식이라고 가르쳤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또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세계주의적이기도 한 사상인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 이성의 지배라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숙명이라는 견해도, 신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사상도 생길 소지가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 아테네에 학교를 세우고, 이것을 '정원학교'라 불렀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조. 헬레니즘 시대란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로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지배 하에 있었던 시대로, 그로 인하여 그리스 본래의 문화에 외국의 문화가 혼합되었으며, 이 상태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고전적인 철학도 그 모습이 퇴색되어, 주로 개인적인 인생 문제가 주된 관심이었다. 에피쿠로스도 또한 이 인생 문제를 사색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하여 공허 가운데에서 운동하는 원자로부터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원자는 '직선운동에서 빗나간' 자의성을 갖는다고 보고, 데모크리토스의 기계적 결정론에 새로운 견해를 가했다. 인식에 대해서는 감각론을 주장하고 감각은 그 스스로 참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오류가 생기는 것은 감각을 해석하는 방법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식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무지나 미신에 기초한 신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은 평정하고 자율적인 심신의 안정 상태, '아타락시아'라 하고, 이것을 쾌락이라 칭하였다. 그가 주창한 쾌락주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 책의 장점

 

저자에 대하여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명한 철학자의 사상과 이론에만 치중하여 설명한 것이 아닌,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장점이다. 태어난 배경, 살아온 환경 그로 인해 형성된 정신세계가 철학사상과 이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중간 중간 삽입하여 지루할 수 있는 내용에 재미와 유머(?)를 던졌다.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윌 듀런트를 오해를 한 것 같다. <철학 이야기>가 난해하고 어렵게 느낀 것이 번역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영목 교수는 서울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이화여자 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철학을 공부하신 분이 아니다.

 

물론 다양한 철학책을 번역했지만 소프트한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에 유독 힘이 들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더불어 이 책의 배경은 1920년대이며, 개설서이지만 엄연히 철학분야에 속한다. ‘철학책은 이래야 돼라는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어려운 어휘와 문장은 한국 독자 특히 철학 입문자를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 원서를 직역하면서 철학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더 쉽게 풀어 썼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저자라면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 뽀개기>?? 등으로 입문 교양서로 기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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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3 20:47:26 *.18.218.234

성한씨는 목차/구성에 대해 정성을 들이는 듯. 

나는 목차/구성 쓰는 게 젤 힘들어서 성한씨 목차/구성 눈여겨 보는 편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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