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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일 01시 02분 등록

철학이야기

 

월 듀런트(정영목 옮김)/봄날의 책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12 – 스피노자

스피노자 정신의 배경에는 이런 유대인의 오디세이가 꽉 차 있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파문으로도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유대인이 되었다.

 

P214 – 스피노자

이런 생각들 하나하나가 스피노자 사상의 내밀한 구조를 구성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에서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베이컨과는 반대로) 전통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P218 – 스피노자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그들에게 신앙인 동시에 애국심이었으며, 회당은 의식과 예배의 중심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중심이었다. 스피노자가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성경>은 그들 민족의 휴대용 조국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이단이 반역이고 관용은 자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피노자가 파문을 당한 이유로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단은 유대인들의 근본을 뒤 흔드는 커다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본인이 생각하는 진실을 이야기한 스피노자가 새삼 달리 보인다.

 

P219 -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구약> <신약>을 구별하지 않으며,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본다. 민중의 증오와 오해를 옆으로 밀어내고, 철학적 해석으로 경쟁하는 두 신앙의 감추어진 핵심과 본질을 드러내면 그렇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 즉 사랑, 기쁨, 평화, 절제, 만인에 대한 자비 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증오에 찬 적대감을 드러내며 싸우고 매일 서로에게 신랄한 증오심을 보여주는 바람에, 나는 그들이 고백하는 미덕이 아니라 그런 겉모습이 그들의 신앙에서 가장 손쉬운 판별 기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P230 – 스피노자

유대인은 박해 때문에 종족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통일성과 연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없었다면 그들은 유럽의 여러 민족과 결혼하여 썩이고, 어디에서나 그들을 둘러싸는 다수자에게 삼켜졌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해석이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어떻게 보면 역으로 유대인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통성을 지켜낸 것이다.

 

P233 –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처음 두 가지 형태의 지식을 하나로 줄이고, 직관적 지식은 사물을 그 영원한 측면과 관계에서 지각하는 것 단 한구절로 철학이 정의된 셈이다.-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직관적 지식은 사물과 사건의 배후에서 법칙과 영원한 관계를 찾아내려 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매우 근본적인 구분(그의 체제 전체의 기초). 즉 사물과 사건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일시적 질서’, 그리고 법칙과 구조의 세계를 가리키는 영원한 질서의 구분이 나온다. 이 구분을 세심하게 살펴보자.

 

P237 –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체계에는 세가지 축을 이루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실체, 속성, 양태다. 단순하게 가기 위해 속성은 잠시 밀어두자, 양태는 실재를 일시적으로 표현하는 개별적인 사물이나 사건, 어떤 특정한 형태나 모양이다. 당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각, 당신의 집단, 당신의 종, 당신의 행성이 양태다 이 모든 것은 그 뒤와 밑에 놓여 있는 어떤 영원하고 변함없는 실재의 형태, 양태, 또는 말 그대로 최신 유행이다.

 

P240 – 스피노자

미와 추 또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으로 우주를 향해 던지면 받아들여지지 않고 던진 사람을 향해 돌아올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이나 기형, 질서나 혼란이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고 미리 말해 두고 싶습니다.

이는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속성이라는 의미 같다.

 

P242 – 스피노자

신의 지성은 모든 정신의 총합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신의 정신은 공간과 우주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정신이며, 세상을 살아 있게 하는 확산된 의식이다.

 

P245 – 스피노자

본래대로라면 모든 것은 자신이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들이는 노력이 바로 그 사물의 실제 본질이다.” 하나의 사물이 스스로 존속하는 힘은 그 존재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사물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선악이 없다. 자연 그 자체이고 본성일 뿐이다.

 

P247 – 스피노자

궁극적으로 윤리학에는 세 개의 체계밖에 없다. 이상적인 성격과 도덕적 삶에 세 개의 개념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붓다와 예수의 윤리로 여기에서는 여성적 미덕을 강조하고, 모든 사람이 똑 같이 귀중하다고 생각하며,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악에 저항하고, 미덕을 사랑과 동일시하며, 정치에서는 무제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하나는 마키아벨리와 니체의 윤리로 이것은 남성적 미덕을 강조하고, 사람들 간의 불평등을 받아들이며, 전투와 정복과 통치의 위험을 음미하고, 미덕을 권력과 동일시하며, 세습 귀족제를 찬양한다. 세 번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로 여성적인 미덕이나 남성적인 미덕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 윤리는 오직 지식이 많고 성숙한 정신만이 다양한 상황에서 비추어 언제 사랑이 통치하고 언제 권력이 통치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미덕을 지성과 동일시 한다. 또 통치에서 귀족제와 민주제를 다양하게 혼합하는 일을 옹호한다.

 

P248 –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보다 관대하다. 스피노자는 자기중심주의가 자기보존이라는 지고의 본능이 도출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더 큰 선을 얻는다는 희망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P249 – 스피노자

그는 자기중심주의가 불가피하고 또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 기초하여 윤리학을 세운다. 인간에게 약해지라고 가르치는 도덕 체계는 가치가 없다. “덕의 기초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하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근간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생존을 위해서 노력한다.  

 

P252 – 스피노자

이성없는 열정과 이성으로 조율되는 열정, 즉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제자리를 잡는 열정을 대립시킨다. 사고에 욕망의 열기가 부족해서는 안 되며, 욕망에도 사고의 빛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열정은 우리가 열정에 관한 명료하고 분명한 관념을 만들어 내는 순간 열정이 아니게 되며, 정신은 불충분한 관념이 많을수록 열정에 종속된다.

중용의 덕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역시 모든 것은 중심을 잡고 지나치지 않는 것이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P259 –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공화주의자 드 비트의 친구로서 당대 네덜란드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 희망을 표현하는 정치철학을 정리했으며, 이것은 루소와 프랑스혁명에서 정점에 이르는 사상적 흐름의 주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된다.

 

P260 – 스피노자

아무도 혼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삶의 필수품을 확보할 만큼 강하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 조직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일컫는 이유인 것 같다.

 

P260 – 스피노자

대부분의 인간은 속으로는 법이나 관습에 대항하는 개인주의적 반역자다. 사회적 본능은 개인주의적 본능보다 늦게 그리고 약하게 찾아와 필요에 의해 강화된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사회화가 개인의 발전보다는 사회적 일원을 길러 내는 것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262 –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교육, 특히 대학에 대한 국가 통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공적 지출로 세워진 학교들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계발하기보다는 제한하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나라에서 원하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비용을 대고 손해를 무릅쓰며 공적으로 가르치도록 허락한다면 기예와 과학이 왕성하게 발전할 것이다.

 

P265 – 스피노자

민주주의 결함은 평범한 사람을 권좌에 앉히는 경향이 있다는 점인데, 공직을 훈련된 기술을 갖춘 사람에게 제한하는 방법 외에는 그 결함을 피할 재간이 없다.

다중의 변덕스러운 성향은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다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의 지배만 받기 때문이다.”

조만간 비록 소수라 해도 더 유능한 사람들이 그런 체제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민주정치가 귀족정치로, 마침내 군주제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마침내 혼돈보다 압제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훈련 받은 적합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통치해줄 사람을 선택할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서 최고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여전히 민주주의의 숙제다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훈련 받지 않은 리더로 고생해 봤고 민주주의 장점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P267 – 스피노자

괴테는 스피노자에게서 체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했다.

피히테, 셀링, 헤겔은 스피노자에 칸트의 인식론을 결합하여 각자의 범신론에 이르렀다. ‘자아를 보존하려는 노력에서는 피히테의 나,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 니체의 권력에서의 의지’, 베르그송의 생의 약진이 태어났다.

 

P276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그와 루소는 봉건 귀족제에서 중간계급의 지배로 넘어가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방대한 과정을 대변하는 두 목소리였다. 부상하는 계급은 기존의 법이나 관습에 불편을 느끼면 관심을 버리고 이성에, 법을 버리고 자연에 기댄다.

 

P284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우리가 숭배하는 사람은 폭력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우리 정신을 정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뉴턴의 저작들을 끈질기고 철저하게 공부했으며, 나중에 프랑스에서 뉴턴의 견해를 옹호하는 주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 통신은 영국의 정치적 자유와 지적 독립성을 프랑스의 압제나 굴레와 비교했다.

스스로 알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이 통신은 혁명을 알리는 닭의 첫 울음소리가 되었다.

 

P286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당시의 도덕은 인류의 위선을 계속 품위 있게 존중해주기만 한다면 연인을 여자의 살림에 보태는 일을 허락했다. 게다가 여자가 단지 연인이 아니라 천재를 선택한다면, 온 세상이 그녀를 용서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었다. 아니 불합리한 세상이었던 것 같다.

 

P294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그녀의 남편과 볼테르와 생랑베르가 임종 자리에서 만나 서로 한마디도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상실 때문에 친구가 된 것은 그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였다.

재미있는 광경이다. 이것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일까?

 

P300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볼테르가 구한 것은 유럽 문명의 역사를 통틀어서 하나의 실처럼 꿸 수 있는 통일의 원리였다. 그는 이 실이 문화의 역사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는 왕들이 아니라 운동, , 대중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통일의 원리가 있을까?

 

P324–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유신론자는 강한 동시에 선한 지고의 존재가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다. 이 존재는 만물을 만들어냈다. 이 존재는 잔인하지 않게 모든 죄를 벌하며, 모든 덕이 있는 행동은 선하게 보상한다. 그는 이런 원리로 우주와 다시 결합하며, 서로 모순되는 어떤 종파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그의 종교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신을 소박하게 섬기는 것은 세상의 모든 제도보다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P328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이론적으로는 공화제를 선호하지만, 거기에도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공화제는 당파를 허용하며, 이것 때문에 내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나라의 통일은 깨진다. 공화제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고, 아직 부로 인해 타락하지도 갈등하지도 않은 작은 나라에만 적합하다.

 

P331 –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루소가 문명, 문자, 과학에 반대하고 야만인이나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보냈을 때 볼테르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 종에 반대하는 선생의 새로운 책 잘 받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짐승으로 돌리려고 하는 일에서 선생만큼 재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P342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볼테르는 계몽주의, 백과사전, 이성의 시대를 뜻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따뜻한 열망은 전 유럽(루소를 제외하고)에 영감을 주어, 과학과 논리가 마침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의문의 여지없는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P343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이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스피노자에게서 기하학과 논리학의 웅장한 구조를 낳았다. 우주는 수학체계로, 기존의 공리들로부터 순수하게 연역하여 선험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베이컨의 이성주의는 홉스에 이르러 비타협적 무신론과 유물론이 되었다. 다시 원자와 공허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스피노자에서 디드로에 이르기까지 전진하는 이성의 뒤에는 신앙의 잔해가 남았다.

 

P346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데이비드 흄은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대단히 이단적인 <인간 본성론>- 근대철학의 고전이자 경이 가운데 하나다 으로 기독교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물질을 아는 식으로 정신을 안다. 즉 지각으로 아는 것인데, 다만 이 경우에는 내적인 지각이다. 우리는 결코 정신같은 실체를 지각하지 못한다.

 

P350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이런 논거의 실들을 한데 모으는 것, 버클리와 흄의 사상을 루소의 감정들과 결합하는 것, 이성에서 종교를 구해내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회의주의에서 과학을 구해내는 것 이것이 이마누엘 칸트의 사명이었다.

 

 

P353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그의 <인류학>(1978년 평생에 걸친 강연을 모아 낸 것이다)은 인간이 동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칸트는 만일 인간이 아직 야생 동물에게 휘둘리던 초기에 갓난아기가 지금처럼 크게 울면서 태어났다면 맹수에게 발견되어 잡아 먹혔을 것이며, 따라서 당시의 인간은 현재 문명 속의 인간과 많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P354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칸트의 삶은 규칙동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칙적인 동사처럼 흘러갔다.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식사를 하고, 걷는다.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가 회색코트를 입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자신의 집 문간에 나타나, 지금도 여전히 철학자의 산책로라고 불리는, 보리수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향해 걸어가면, 이웃들은 이때가 정각 세시 삼십분임을 알았다.

칸트의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것을 보면 칸트의 삶은 참으로 건조하고 소박했을 것 같다.

 

P358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2*2 4가 아닌 다른 것이 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런 진리는 경험하기 전에도 참이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이며, 참이 아닌 것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여기에서 마침내 칸트의 위대한 명제가 등장한다.)은 경험과 감각이 절대적이면서도 변덕스러운 의지를 기록하는 수동적 밀랍이 아니며, 일련의 또는 일군의 정신적 상태에 붙여 놓는 한낱 추상적 이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정신은 감각 결과를 관념으로 만들고 조정하는 적극적 기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질서 있게 통일된 사고로 변형하는 기관이다.

 

P360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시계는 똑딱 소리를 내지만 평소에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순간, 전보다 커지지 않아도 똑딱 소리를 듣게 된다. 갓난아기의 요람 옆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는 주변의 소란은 전혀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기가 움직이면 어머니는 서둘러 수면으로 올라오는 잠수부처럼 더듬더듬 잠에서 깨어 관심을 갖는다. 목적이 덧셈이 되면 ‘23’이라는 자극은 ‘5’라는 답을 가져온다. 목적이 곱셈이 되면, 똑 같은 자극, 똑 같은 청각 경험인 ‘23’‘6’이라는 답을 가져온다. 감각 경험이나 관념은 단지 경험이 시간이나 공간에서 인접해 있다거나 비슷하다거나 최근의 것이라거나 빈번하다거나 강렬하다고 해서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연합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 감각이나 사고는 하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며, 우리가 요구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이들을 선별하고 지휘하는 작용이 바로 이들을 사용하는 주인인 것이다. 감각 경험과 관념 위에 정신이 있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키가 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P362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감각 경험은 조직되지 않은 자극이고, 지각은 조직된 감각 경험이며, 개념은 조직된 지각이고, 과학은 조직된 지식이며, 지혜는 조직된 삶이다. 뒤로 갈수록 질서, 순서, 통일성의 등급이 높다.

지각이 자동적으로 질서 잡힌 사고로 짜인다면, 정신이 망치질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적극적 노력이 아니라면, 어떻게 똑 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한 사람은 평범하게 남고, 더 적극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지혜의 빛과 진리의 아름다운 논리를 보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겟는가?

 

P368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하이네에 따르면 칸트는 신을 죽였고, 신학의 가장 귀중한 논거들을 파괴했다. “이 사람의 외적 생활과 그 파괴적이고 세상을 뒤흔드는 생각이 얼마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지!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이 이 생각의 전체적 의미를 짐작했다면, 그저 사람을 죽일 뿐인 처형자보다 이 사람앞에서 더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P372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진짜 교회는 아무리 흩어지고 나뉘어 있더라도 공동의 도덕적 법칙에 대한 헌신으로 통일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리스도가 살고 죽은 것은 그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본래 종교의 목적 또한 이것이 아닐까 싶다.

 

P377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상비군은 국가들이 무장 병력의 수로 경쟁에서 이기도록 자극하는데, 이 경쟁에는 끝이 없다. 여기에 들어가는 경비 때문에 평화는 결국 단기전보다 심한 압박을 주게 된다. 따라서 상비군은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해 벌이는 침략전의 원인이 된다.” 전시에 군대는 징발, 숙영, 약탈로 자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국 영토면 더 좋지만, 필요하면 자국 내에서도 그렇게 한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정부의 돈으로 군대를 먹여 살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칸트의 판단으로는 이런 군국주의는 많은 부분 유럽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확장해 들어간 결과다. 그로 인해 새 약탈품을 두고 도둑들 간에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잘 설명해 주는 분석인 것 같다. 결국 군대가 다시 또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P379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칸트는 평등을 요구한다.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능력을 계발하고 적용할 기회의 평등이다. 그는 출신과 계급에 따른 모든 특권을 거부하며, 모든 세습특권이 과거의 폭력적 정복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평등은 기회의 평등, 교육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부여 받는 것이다. 

 

P381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외적 세계는 오직 감각의 결과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 정신은 단순히 무력한 백지, 감각 경험의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힘, 경험이 도달하는 대로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경험임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P385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그의 영향은 19세기의 철학 사상 전체가 그의 생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이후로 독일 전체가 형이상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P388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그는 친구 셀링에게 정착할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음식은 소박하고 책은 많고 훌륭한 맥주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셀링은 예나를 추천했다.

헤겔은 낭만과 유머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본인이 거의 도피하듯 가는 정착하는 곳을 고르는데 이런 조건을 달라니 재치있는 것 같다.

 

P395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1827년에서 1832년 사이에 독일은 괴테, 헤겔 베토벤을 잃었다.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대의 마지막 훌륭한 노력이 마무리되면서 한 시대도 끝이 났다.

독일입장에서는 천재들의 시대가 일단락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인류 모두의 아픔이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P405 – 쇼펜하우어

이런 작품들은 거울과 같다. 바보가 들여 다 보는데 천사가 내다 보지는 않는다.

나는 자꾸만 바보다 보인다. 끔직하다.   

 

P413 – 쇼펜하우어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른다. 다른 동물들은 형이상학 없이 욕망을 갖기 때문이다. “이성과 설명 능력을 갖춘 사람을 상대로 논쟁하고 설득 하려다가 마침내 그가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 우리가 그의 의지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보다 짜증나는 일은 없다.

 

P414 – 쇼펜하우어

사실은 느끼는 것에 의해, 반은 그 작용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본능에 의해 떠밀려간다는 것이다. 지성은 외무부장관에 불과하다. “자연은 개인의 의지를 섬기라고 지성을 생산했다. 따라서 지성은 사물이 의지를 위한 동기를 제공하는 한에서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사물을 깊이 헤아리거나 그 진정한 존재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P416 – 쇼펜하우어

생명은 잠에 대한 투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잠에서 영토를 빼앗지만, 결국은 잠이 도로 찾아간다. 잠은 죽음의 일부를 빌려와 생명 가운데 낮에 소지한 부분을 갱신하여 유지하는 것이다. 잠은 우리의 영원한 적이다.

영원한 적이자 친구인 것 같다.

 

P417 – 쇼펜하우어

일반 동물의 본능은 자연에 남아 있는 목적론을 가장 잘 보여준다. 본능이 목적이라는 개념에 인도되면서도 전혀 목적 개념이 없듯이, 자연의 모든 구성물은 목적이라는 개념에 인도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사실 전혀 목적 개념이 없기 대문이다.

 

P418 – 쇼펜하우어

재생산은 모든 유기체의 궁극적 목적이자 가장 강한 본능이다. 그렇게 해야만 의지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재생산의 의지는 지식이나 사고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심지어 철학자도 가끔 자식을 둔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성, 특히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너무나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본인의 개인적인 가정환경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역시 너무나도 냉소적인 문장이 아닌가.

 

P421 – 쇼펜하우어

사랑은 자연의 기만행위이므로 결혼은 사랑의 소모이며, 환멸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오직 철학자만이 결혼으로 행복할 수 있지만, 철학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P424 – 쇼펜하우어

충족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 어떤 이상에 그것의 실현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충족된 열정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낳는 경우가 많다. 열정의 요구가 당사자의 개인적 복지와 심하게 갈등을 일으켜 복지를 망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시 인생은 악이다. 고통이 그 기본적 자극이고 현실이며, 쾌락은 고통이 멈춘 소극적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을 구하려 하는 대신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P426 – 쇼펜하우어

만일 모든 악이 제거된다면, 다툼이 완전히 끝난다면, 권태가 고통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삶은 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인간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지옥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뒤로, 천국에는 권태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성공을 거둘수록 지겨워진다.”

쇼펜하우어는 너무 비관적이다. 일면 일리있는 이야기로 들리나 너무나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닌가?

 

P426 – 쇼펜하우어

의식이 상승하는 것에 비례하여 고통도 증가하며, 결국 인간에게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또 인간의 경우도 인식이 명료할수록 지능이 높을수록 고통도 커진다. 천재가 가장 큰 고난을 겪는다.

천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는 논리는 어떤면에서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일반인들의 수준에서는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더 고민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불안한 것이 아닐까?

 

 

P428 – 쇼펜하우어

주인공이 수 많은 위험과 난관을 거쳐 목표에 이르게 하지만, 그 목표에 닿는 순간 서둘러 막을 내려버린다.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기대했던 반짝거리는 목표가 주인공을 실망시켰고 목표에 이른 뒤에도 그가 전보다 나아진 점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이제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인생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P431 – 쇼펜하우어

신학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피난처이듯이, 광기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다. “광기는 고난의 기억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찾아온다. 광기는 의식이라는 실을 끊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나 두려움은 오직 그것을 잊을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광기가 정말 구원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P437 – 쇼펜하우어

천재란 인식 기능이 의지가 요구하는 수준보다 상당히 많이 발달한 존재이다. 이것은 힘의 일부가 재생산 활동으로부터 지적 활동으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천재의 근본 조건은 감수성과 반응성이 재생산 능력을 비정상적으로 압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재는 살려는 의지와 살리려는 의지에 지성이 종속되어 있는 여자와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천재에 대한 비웃음과 여자에 대한 조롱 같다.

 

P441 – 쇼펜하우어

음악과 건축은 대척점에 있다. 건축은 괴테가 말하듯이 동결된 음악이며, 대칭은 정지한 박자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심오한 비관주의 철학이다. “원죄(의지와 주장)와 구원(의지의 부정)의 교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위대한 진리다.”

우리의 상태가 매우 비참한 동시에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고백에서 나왔다. 이에 반해 유대교와 이교는 둘 다 낙관주의적이었다. 유대교와 이교는 종교를 천국의 권세에 뇌물을 주어 지상의 성공에 대한 지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444 – 쇼펜하우어

여자도 자식을 한 두명 낳은 뒤에는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아마 그 이유도 개미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오직 성적 충동 때문에 지성이 흐려진 남자만이 크기도 작고, 어깨도 좁고, 엉덩이만 크고, 다리는 짧은 종족에게 아름다운 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지금 이런 주장을 한다면 다른 어떤 좋은 주장을 하더라도 아마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  

 

P449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비관주의가 나타난 원인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낭만적인 태도와 기대에 있었다. 젊음은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비관주의는 낙관주의가 지나가고 난 뒤의 아침이다. 1815년의 반동으로 1789년 혁명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낙관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관주의를 가지고 왔다. 세상사는 진기롭고 오묘하다.

 

P450 – 쇼펜하우어

오랜 가르침이 말하듯, 행복은 소유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에 있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구한다. 이 자유와 이 능력에 고통의 형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즐겁게 벌금을 낸다.

인생은 그 자체가 과정이다. 행복이고 고통이고 즐거움이다.

 

P452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불행의 밑바닥에는 정상적인 생활에 대한 거부, 여자와 결혼과 자식에 대한 거부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은 부모 노릇에서 삶의 가장 큰 만족을 찾는 반면, 그는 거기에서 가장 큰 악을 발견한다. 그는 사랑의 은밀함이 종족을 이어가는 수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에는 개인적인 비극이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P454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심리학자들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본능의 힘과 그 포착하기 힘든 깊이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지성주의 인간이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성적으로 선택한 목적에 의식적으로 수단을 맞춘다는 개념 는 루소에서 병이 들어, 칸트에서 자리에 눕고, 쇼펜하우어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철학은 200년에 걸친 내성적 분석 끝에 생각 뒤에서 욕망을 발견했고, 지성 뒤에서 본능을 발견했다. 물리학이 100년의 유물론 끝에 물질 뒤에서 에너지를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 덕분에 우리의 은밀한 심장이 드러났다. 그는 욕망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사고가 비인격적 사건들의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행동과 욕망의 유연한 도구라는 것을 이해하는 길을 닦아 놓았다.

 

P460 – 허버트 스펜서

한편 빈약한 과학에서 태어난 산업혁명은 거꾸로 과학을 자극하고 있었다. 뉴턴과 허셜은 별을 영국으로 가져왔고, 보일과 테이비는 화학의 보고를 열었으며, 패러데이는 세상을 감전시킬 발견을 해나갔고, 럼퍼드와 줄은 힘의 변화 가능성이나 등가, 에너지 보존을 증명했다.

 

P472 – 허버트 스펜서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신학자에게 아이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신은 누가 만들었나오?” 모든 궁극적 종교 관념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늘 종교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부딪치는 질문이 아닐까? 이 질문은 아이라면 더욱더 의문을 품게 되는 의문이다.

 

P511 – 허버트 스펜서

그는 늘 영국의 장식적인 왕을 비웃었으나, 이제 아이에게서 인형을 빼앗는 것이 옳지 않듯이 백성에게서 왕을 빼앗는 것도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찬가지로 종교에게도 기운을 북돋워주는 자비로운 역할을 하는 전통적인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불친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P516 –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 아니라 힘이며, 겸손이 아니라 자부심이며, 이타주의 아니라 단호한 지성이라는 것, 평등과 민주주의는 선택과 생존이라는 결을 거스른다는 것, 대중이 아니라 천재가 진화의 목표라는 것,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 모든 차이와 모든 운명의 중재자라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렇게 보였다.

이것은 지난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가 아닐까?

 

P519 – 프리드리히 니체

1865년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세계, , 나 자신의 본성을 웅장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았다. 그는 그 책을 하숙집으로 가져가 굶주린 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읽었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P521 –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나중에도 셀리 같은 뻔뻔스러움이나 칼라일 같은 배짱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사의 갑옷을 입은 소녀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니체가 소녀의 영혼이라니. 그가 주장하는 것과는 매치가 안되는 것 같다.

 

P522 – 프리드리히 니체

하루밖에 못 사는 애처로운 종족이여, 우연과 슬픔의 자식들이여, 듣지 않고 내버려두는 편이 나올텐데 왜 말해달라고 강요하는가? 최선의 운명은 얻을 수 없는 것, 즉 태어나지 않는 것, 무의 상태로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좋은 운명은 일찍 죽는 것이다.” 이 정도면 쇼펜하우어나 힌두교도에게서는 더 배울 것이 없을 듯 하다.

비관주의중에서도 비관적 주장인 듯 하다.

 

P548 – 프리드리히 니체

초인으로 가는 길은 귀족제를 통과할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 머릿수를 세는 데 대한 이런 열광- 는 너무 늦기 전에 박멸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첫 단계는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들 모두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이다.

 

P548 – 프리드리히 니체

초인으로 가는 길은 귀족제를 통과할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 머릿수를 세는 데 대한 이런 열광- 는 너무 늦기 전에 박멸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첫 단계는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들 모두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이다.

 

P562 –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바그너가 <비창 소나타>와 교향곡 5, 9번에서 고전적 굴레를 뜯어내려 하던 베토벤의 정열을 해방하고 찬양했듯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천재를 모든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하고 찬양했다. 그는 루소의 혈통을 이은 마지막 위대한 상속자였다.

 

P564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책들 가운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비판에 가장 안전하다. 한편으로는 모ㅗ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확고부동한 장점들이 온갖 흠잡기를 아주 잘아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겁회귀라는 관념은 디오니소스적인 니체만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스펜서에게도 공통되는 관념이지만, 불건강한 공상이자, 마지막 순간에 불멸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려는 괴상한 노력으로 보인다.

 

P565 –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충동들이 철학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 유럽이 이기적 전쟁의 수렁에 빠져 그가 그렇게 찬사를 보냈던 문화적 습관과 성취 협력과 사회적 예의와 자제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었다-를 잊고 있을 때 니체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P568 –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수백년 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제도와 의견을 건강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그리스 드라마와 철학을 보는 새로운 전망을 열었다는 사실, 바그너의 음악에서 처음부터 낭만적 퇴폐의 씨앗을 보았다는 사실, 외과의사의 메스만큼이나 날카롭고, 또 어쩌면 그 만큼 유익할 수도 있는 섬세함으로 인간 본성을 분석했다는 사실, 다른 근대 사상가들은 따라오지 못할 수준에서 도덕의 어떤 감추어진 뿌리를 드러냈다는 사실, 이제까지는 윤리의 영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가치, 즉 귀족주의를 도입했다는 사실, 다윈주의의 윤리적 함의에 관해 솔직하게 생각해보라고 강요했다는 사실, 그 세기의 문학에서 가장 위대하나 산문을 썼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이 넘어서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는 신랄하게 말했지만, 거기에는 귀중한 진지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화하는 번개와 몰아치는 바람처럼 근대 정신의 구름과 거미줄을 뚫고 지나갔다. 유럽 철학의 공기는 니체의 글 덕분에 맑아지고 신선해졌다.

니체가 철학사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를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P568 –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을 창조하려다가 죽는 사람을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P571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1900년에 죽었다. 자신의 천재성에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천재는 그리고 근대 철학자들의 생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은 현자들이 안고 가야할 아픔인 것인가?

 

P593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베르그송

인간은 본능에 의해 존재하지만, 지성에 의해 진보한다. 베르그송이 가장 훌륭한 점은유물론적 기계론에 대한 공격이다.

 

P594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베르그송

베르그송과 다윈 시대의 관계는 많은 면에서 칸트와 볼테르의 관계를 복제해 놓은 것이다. 칸트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디드로와 흄의 회의주의로 끝난 세속적이며 부분적으로는 무신론적인 지성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맞서려 했다. 그의 노력은 초월적 문제라는 영역에서 지성의 궁극성을 부정하는 노선을 택했다.

 

P595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베르그송

베르그송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방어하러 나섰기 때문에 일찌감치 크나큰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도 불멸과 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다.

 

P596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베네데토 크로체

베르그송은 자신의 비전을 언뜻 명료해 보이는 언어로 번역해내는 신비주의자다. 반면 크로체는거의 독일적인 모호함을 재능으로 타고난 회의주의자다. 베르그송은 종교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면서도, 마치 철저한 진화론자처럼 말한다. 반면 크로체는 미국의 헤겔주의자처럼 글을 쓰는 반교권주의자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와 라마르크의 전통을 물려받은 프랑스 유대인이다. 반면 크로체는 이탈리아의 카톨릭 교도이면서도 자신의 종교에서 스콜라 철학과 아름다움에 대한 헌신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P613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버트런트 러셀

자유인은 이런 외부의 야만적 힘들, 아무런 목적 없는 고집으로 그를 정복하고, 그가 구축한 모든가정과 문명을 때려 부수는 그런 힘들을 섬기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 맞서 계속 투쟁하고, 조각되고 그려진 것들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적어도 수백년 동안 양육되고, 파르테논의 웅장한 페허를 기리는 내부의 창조적 힘들을 섬긴다.

 

P616 – 현대 유럽철학자들 / 버트런트 러셀

학교와 대학이라는 우리의 훌륭한 조직이 제대로 발달하고 제대로 사람을 받아들여 지혜롭게 인류의 성국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인간은 못할 일이 없다. 폭력혁명이나 종이 위의 입법이 아니라 교육이 경제적 탐욕과 국제적 잔혹행위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인간은 성장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인 덕분에 다른 모든 생명 형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시간을 더 들이고, 또 그 시간을 더 지혜롭게 보낸다면, 심지어 자신을 통제하고 다시 만들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학교는 유토피아의 문을 여는 열쇠다.

 

자유인은 이런 외부의 야만적 힘들, 아무런 목적 없는 고집으로 그를 정복하고, 그가 구축한 모든가정과 문명을 때려 부수는 그런 힘들을 섬기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 맞서 계속 투쟁하고, 조각되고 그려진 것들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적어도 수백년 동안 양육되고, 파르테논의 웅장한 페허를 기리는 내부의 창조적 힘들을 섬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저자는 중간에도 밝혔지만 의도적으로 헤겔이나 흄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고 있다. 철학사 전체적인 흐름과 중요도로 볼 때 토마스아퀴나스나 데카르트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언급했으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헤겔에 대해서도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너무나 적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조금 더 상세한 설명과 소개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사실 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아마도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어려움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책을 읽으면서 정말 머리에 쥐가 난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달았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온 몸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읽고는 피곤해졌다. 마치 컴퓨터가 용량을 초과해서 부과가 걸리듯 뇌에 부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읽는 독자의 부족함이 너무나 크기에 책의 보완점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몇 가지만 집어보자면 우선 저자의 기술을 따라가다보면 가끔 이게 저자의 느낌이자 주장인지 원래 책에 있는 내용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기존 철학자의 주장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그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 의견을 달았으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3. 이 책의 장점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철학이야기이다. 어려운 철학을 이야기처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 자체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원 내용 자체가 담고 있는 심오한 내용을 아주 쉽도록 설명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철학자들의 삶을 설명해 주는 것이 참 좋았다. 그 사람의 삶속에서 그 철학자의 사상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었다. 이런 접근이 그 철학자의 사상을 더욱 더 쉽게 이해해 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각 해당 철학자의 삶 -> 주요 주장 -> 주장에 대한 철학계 내의 평가 -> 저자의 평가 à 역사적의미와 같은 순서로 저술이 되었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금 더 초심자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각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을 비교해 준다면 조금 더 쉽게 각 사상의 핵심적 장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철학적 기본 지식을 요구하는 듯 하다.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잡힐 듯 아직은 조금 어려운 내용 때문에 조금 더 분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이 많은 것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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